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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벌-입시의 정치에 반하여 / 박준상 / 오월의봄

 

 국가와 구별되는, 시민들의 자발적이고 평등한 윤리적·문화적·정치적 결합체인 시민사회는 교육과 매우 밀접하게 연동되어 있다. 시민사회가 교육을 떠받치고 있는 동시에 교육이 시민사회를 떠받치고 있고, 시민사회의 여러 특성들이 그대로 교육에 전이되며, 역도 마찬가지이다. 한 국가에서 교육의 수준이 시민사회의 수준이며, 역도 마찬가지이다. 한국 교육은, 서로가 서로와 연대해서 함께 화합하는 상생 면을 거의 허용하지 않으며, 극단적인 경쟁과 이기심의 각축장이자 학습장이 되어온 지 오래이다. 말하자면 이곳에서 교육이라는 명목으로 아이들에게 ‘교육시키는’ 대표적인 두 가지는, 하나는 줄기차게 경쟁을 추구하고 경쟁에 복종하라는 노예성이며, 다른 하나는 각자 자기에게만 집중해서 어떻게든 최상위 점수를 받아 자기의 ‘에고’를 드높이라는 천박성이다. (p.11-12)

 

 사회 자체를 품격 없게 만드는 승리자-노예 엘리트들을 위해 존재하고 실시되는 현재의 대입제도는 대단히 잘못된 것이고, 어쩌면 최악일 수 있다. 현행의 입시제도에 대한 대안(또는 대응)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으며, 많은 것들이 현재의 입시제도보다 여러 측면에서 나을 수 있다. 그러나 누군가 대안(또는 대응) 하나를 제시하기만 하면, 사람들은 그것과 관련해 과연 타당한 것이냐, 과연 옳은 것이냐라는 의문을 갖고 주도면밀한 검토의 메스를 들이대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그러나 관건은 옳고 그름이 아니라, 옳고 그름 이전에 권력이다. (…) 타당성, 정당성이나, 심지어는 상식을 결여하고 있는 어떤 것을 모두가 따라가야만 한다면, 거기에 엄청나지만 부당한 어떤 집단적 권력이 걸려 있는 것이다. 학벌-입시는 절대다수가 맹목적으로 따를 수밖에 없다고 믿기에 사실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며, 다만 거기에 강력한 어떤 전체적인 권력이 걸려 있는 문제일 뿐이다. 그 대학원생처럼 많은 사람들이 학벌-입시 체제는 결코 바뀌지 않을 것이라고 믿고 있는데, 이는 학벌-입시에 걸려 있는 권력에 완전히 포박되어 있으며, 거기에 저항하는 것조차 어렵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당성도 없고 상식에도 거스르는 문제 많은 어떤 권력에 저항하는 것조차 쉽지 않다고 많은 사람들이 믿는다는 사실 자체가, 그 권력이 극도로 강고한 동시에 사악하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학벌-입시의 문제는 무엇보다 먼저 강력하지만 악한 어떤 권력의 문제, 즉 정치적인 문제이다. (p.20-21)

 

 먼저 여기서 이렇게 단도직입적으로 밝히고자 한다. 한국에서 대학입시 문제를 포괄하고 있는 학벌 문제는 진정한 정치적 문제들 가운데 하나다. 또한 학벌-입시 문제는 이곳에서 가장 중요한 정치적 문제이다. 누군가는 여기의 가장 중요한 정치적 문제로 분단 문제, 재벌 문제, 빈부격차 문제, 노동 문제, 부동산 문제, 수도와 지방의 격차 문제나 남녀 불평등 문제를 꼽을 수 있겠지만, 이 문제들 가운데 대다수가 바로 학벌-입시 문제로 표출되는 동시에 강고해지며, 학벌-입시 문제와 밀접하게 연동되어 돌아가는 동시에 이 문제와 맞물려 증폭된다. 그 사실 이전에 학벌 문제가 이곳의 가장 중요한 정치적 문제인 이유는, 그것이 우리의 경험의 장 자체에서 가장 일반화된 문제―거의 모두가 겪는 문제―이자 가장 직접적으로 경험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문제가 이곳의 가정 일반 내에서 가장 자주, 끊임없이 불거져 나올 뿐만 아니라, 유리한 위치에 있는 부유한 가정들조차 작지 않은―때로는 보다 더 큰―고통으로 몰아넣기 때문이다. 기득권층의 가정들 대다수가 스스로 그렇게 고통스러운 만큼이나, 과도한 ‘충성’과 기이한 경쟁을 통해 학벌-입시의 의무라는 거짓말을 유지시키고, 폭로하기 힘들 정도로 확고한 것으로 만들고 있다. (p.43-44)

 

 이곳 이외의 전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수도권 대학들과 지방 대학들의 격차를 상징하는 표현이자 입시에서의 성공 기준이 된 ‘인서울’ 대학들에 입학하는 학생들의 비율은 7.17%(수능 응시자들의 7.17%)에 불과하며, 그것은 청년 정규직 비율(서울에 거주하는 18~29세 청년들의 정규직 비율) 7%와 일치한다. ‘인서울’에 입학하는 학생들 전체가 정규직 청년이 된다는 것이 아니라, 입시 ‘시장’과 마찬가지로 고용 ‘시장’도 10% 이내의 사람들에게만 유리하게 움직이도록 구조화되어 있고, 대입에서의 불평등에 대한 학습은 이후의 사회적·경제적 불평등에 대한 훈련이 된다는 것이다.
 이곳의 고등학교들 대다수가 입시에서 성공하는 10% 이내의 학생들을 위해, 그들 아래로 ‘깔려주고’ 있으며, 마찬가지로 대다수의 청년들이 10% 내외의 정규직 청년들이 ‘제대로 설 수 있도록’ 직접 시장의 ‘밑바닥에 깔리고 있고’, 결국 국민들 대다수가 10% 내외의 다른 사람들의 안녕·평안·행복과, 무엇보다 그들의 위세·권위와 권력을 보장해주기 위해(본래, 언제나 위세·권위·권력은 타인들이 있어야만 행사할 수 있는 것들, 타인들에게 지극히 의존적인 것들 아닌가) 그들의 바닥으로 ‘깔린다’. (p.60-61)

 

 한국의 기득권 엘리트계층이 자신을 유지하고 강화시키는 가장 중요한 방법은 바로 그러한 자신을 위한, 자신의 집단적 관념들을 사회 내에서 잘 유지하고 보다 더 강화시키는 것이다. 그 집단적 관념들의 보존과 확대·강화를 위해 가장 중요하게 보전해야만 하는 체제는 바로 오랜 시간 이어져온 학벌·입시 체제이다.
 이 기득권계층이 초중고 학급에서 자신의 관념들을, 친미·친일·반공·초-자본주의와 반민중을, 민중의 자유·자율은 무시되어도 좋다는 관념을 직접 가르치게 한다는 것이 아니다. 물론 어느 시점에서, 어떤 정부하에서―가령 군사독재정권들하에서―그러한 관념들 가운데 몇몇을 학급에서 가르치고 주입시켰던 경우도 있었지만, 이는 문제의 핵심이 아니다. 적어도 기득권계층의 관념들에 초중고 학생들이 직접 부딪혀 의문을 품지 않도록, 그들을 입시·학벌과 사교육으로 몰아댄다는 것이 문제의 핵심이다. 이 학생들이 기득권계층의 본모습을 볼 여유를 갖지 못하도록, 자신들의 현실에 대해 사유하고 반성하지 못하도록 그들을 초중고 학창 시절 내내 경쟁시키면서 서로 연대하지 못하도록, 그럴 수 있는 시간을 갖지 못하도록 끊임없이 채근해댄다는 것이 핵심이다. 사실 초중고 각급 학교에서 무엇을 가르치냐는 문제는, 즉 수업 내용이라는 문제는 중요하지 않거나 부차적이다. 학생들을 고분고분한 순응자로 길들이기 위해, 학창 시절부터 이 엘리트계층에 저항하지 못하도록 그들을 경쟁으로 몰아가 옥죄고 윽박지르면 되는 것이다. (p.79-80)

 

 아이는 가정이라는 사적 울타리를 벗어나 학교에서 시민사회의 교육을 받으면서 시민의 자질들을 함양한 후에 국가라는 제도적 현실 사회에, 즉 행정·입법·사법과 시장·경제와 소유관계의 법적 운영 기관에 진입한다. 중요한 점은, 학교에서의 교육이 국가에 잘 적응하기 위한 학습과 훈련이 아니라는 것이다. 교육이 아이들을 국가에 순응하도록 훈육시키는 과정에 불과하다면, 그 교육은 전체주의적 교육이고, 그 국가는 전체주의 국가일 뿐이다. 그러한 경우가 아니라면, 학교에서의 교육은 무엇보다 먼저 동료(친구)들과의 소통과 연대의 학습장이어야 하며, 국가라는 현실 사회에 진입하기에 앞서 어떠한 주체성을 가져야 하는가라는 문제에 대해, 그 현실 사회와 나 사이를 어떻게 주체적으로 연결시켜야 하는가라는 문제에 대해 생각하고 숙고하면서 대응하고 해결 방향을 타진하는 훈련의 장이어야 한다. 학교에서 아이들 각자는 자신의 삶에 대한 어떠한 답도 강요받아서는 안 되며, 자신의 삶에 대한 가능한 답들을 스스로 찾아갈 수 있어야 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학교는 하나의 사회 조직·제도이지만, 답 없는 과정의 장이고, 결론 없는 소통의 장이며, 삶에 대한 실패 없는(학생들에게는 어떠한 결정적인 성공도 실패도 없어야 한다) 실험의 장, 즉 미완성의 어린 삶들의 열린 유동적인 실험장이어야 한다. 학교는 과도적인 공간, 과정의 공간이다. 결정되지 않은 존재들의 흐르고 열려 있는 공간이다―그렇기에 그들 중 하나가 어떤 범법 행위를 저질렀다 하더라도 같은 행위를 저지른 어른이 받는 처벌을 받지 않을 권리가 있는 것이다. 학교는 국가에 결코 종속되어서는 안 된다. (p.103-104)

 

 이곳의 교실은 각 시대의 현실 사회의 지배적 가치에 의해 끊임없이 유린당해왔고, 여전히 난도질당하고 있다. 거기에서 아이들은 일제강점기에는 황국신민이 될 것을 강요받았으며, 그 이후의 군사독재 시대에는 반공투사이자 산업역군이 되기를 주입받았고, 현재는 스펙을 쌓아 필요한 ‘인적 자본’이 되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한다(김누리). 교실에서 언제나 아이들에게, 각자의 가슴과 머리에, 몸·영혼과 정신에 현실 사회의 주도적 가치 하나가 ‘꽂혀 헤집고’ 난입해 들어온다. 아이들은 자신들에게 대못처럼 박힌 그 지배적 가치에 꼼짝달싹할 수 없게 되어버리고, 그 가치의 근거도 이유도 목적도 명확히 모른 채, 그 가치를 달성하지 못하면 평생을 주눅 들어 살면서 ‘알아서 기게’ 된다. 이제 우리는 그 가치의 근거와 이유와 목적을 분명히 밝힐 수 있다. ‘현실’을 참칭하는 그 지배적 가치의 근거지는 바로 그 가치를 주입시키고 확산시키는 지배 엘리트계층이다. 그 이유는 지배 엘리트계층의 권력 유지 및 확장이며, 그 목적은 사람들로 하여금 ‘알아서 기게’ 만드는 것이다. (p.110-111)

 

 국립대와 사립대를 막론하고, 한 대학 내에서의 인접 두 학과 간의 통합도 쉽지 않다. 관계자들의 여러 이해의 상충, 내세울 수 있는 명분들의 상치와 어떠한 보상으로도 포기되기 힘든 자율성 유지에 대한 욕구 등과 같은 걸림돌들을 해당 대학이 강제로 치울 수도 없는 법이다. 하물며 국립대들 사이의 통합네트워크 구축도 너무나 요원한데, 특히 공영형 사립대 연합은 불가능에 가깝다. 사립대들에게, 특히 연고대를 포함한 ‘인서울’의 주요 사립대들에게 연합을 강제할 어떠한 방법도 없다. 만에 하나 정부가 연합을 강제하는 어떤 조처를 취할 경우, 여러 해당 사립대들의 ‘줄소송’이 이어지리라는 예상이 쉽게 우리의 앞을 가로막는다(자사고 취소 조처가 내려졌던 몇몇 고등학교가 법적 소송으로 대응했던 사실을 기억해봐야 하는데, 각각 오랜 전통과 강력한 기득권 위에 서 있는 서울 시내 주요 사립대들이 어떤 강제 조처가 자신들을 억압할 때, 가만히 있을 리가 없다). 마찬가지로 만에 하나 국립대 통합네트워크가 구축되고, 거기에 이 사립대들이 전혀 보조를 맞추지 않는다면, 오히려 이 대학들은 한국의 ‘아이비리그’(초일류 사립대학 연합체)를 형성하기 위해 일로매진할 가능성이 높다. 만약 그 가능성이 현실화될 경우 대학 서열의 순위만 바뀔 뿐 학벌-입시 문제와 연관된 모든 병폐들은 다시 악순환에 악순환을 거듭하게 될 것이다. 20년 가까이 첫 단계도 실행하지 못한 하나의 계획은, 그것이 아무리 바람직하고 이상적이라 할지라도 그 자체에 문제가 있다. (p.141-142)

 

 학생들을 기계나 노예로 전락시키는 이러한 패턴이 한 대학 클래스나 한 대학만의 것이라면, 거기서 방향을 틀어서 창의적이고 비판적 교육을 함으로써 문제가 해결되겠지만, 그 패턴은 원칙적으로 초중고 교육을 이곳에서 받아온―높은 대입 점수를 향해 일로매진하는 교육 아닌 교육에 함몰되어온―모든 대학생들과 모든 교수들이, 나아가 모든 사람들이 세대에 세대를 걸쳐 오랜 기간 동안(일제강점기에서부터 한 세기 동안) 체화해온 것이다. 본고사, 학력고사나 수능에서의 높은 점수라는 하나의 목표를 향해 수 세대에 걸친 수많은 사람들이 질주를 벌이게 되면, 그 목표의 가치와 정당성은 불문에 부쳐질 수밖에 없게 되며, 따라서 그 목표를 정하고 확고한 것으로 만들어온 이 학벌-입시 체제는, 나아가 그 위에서 유지되는 이 사회의 체제 자체와 그 권력은 모든 비판으로부터 벗어나 수월하게, ‘무의식적’으로 정당화되고 강고해지게 되는 것이다.
 ‘외우기’, ‘정답 맞히기’와 ‘베끼기’의 패턴이 초중고 교육과 대학 교육뿐만 아니라 그 이후의 석박사 과정과 연구자·교수의 연구에조차 너무 큰 영향을 미친다. 석박사 과정에서도 예외는 있지만 너무나 많은 교수들이 지도 학생들에게 ‘설익은 네 생각을 따라가서 낭패보지 말고’ 해당 주제나 학자의 생각을 숙지해서 잘 따라가라고 주지시킨다. (p.150-151)

 

 논문 심사자들은, 물론 예외가 있기는 하지만, 논문을 쓴 사람이 어떠한 문제를 제출하고 있고, 어떠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으며, 어떠한 다른 관점을 제시하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그가 동료 연구자임에도 불구하고 거의 관심이 없다. 게다가 이러한 논문 작성·제출과 심사는 박사과정에서부터 시작되어 박사후·연구자·강사와 교수 전 기간에 걸쳐 30여 년 동안 계속되며, 많은 연구자와 교수는 ‘논문 작성자와 심사자들 외에는 거의 아무도 읽지 않는 재미없는 논문 양산’의 이 반복적 과정에 지치고 너무 많은 시간을 뺏겨서 각자 진정으로 관심 있는 연구와 문제에 다가갈 수 있는 여유조차 가질 수 없다. ‘정답 베끼기’가 초중고 교육과 대학 교육뿐만 아니라, 이후의 석박사 교육 및 논문 심사와 연구자·교수의 논문 작성·게재에서조차 대세의 관행이자 기준이다. (p.152)

 

 1990년 초 동구권이 몰락하고 판도가 다르게 돌아가는 것처럼 보이자 마찬가지로 많은 수가 이번에는 대세처럼 보이는 포스트모더니즘이나 현대 프랑스 철학으로 갈아탔지만, 언제나 같은 패턴이 반복되었을 뿐이다. 이번에는 새로운 사상 하나가 가르쳐주는 정답(가령 탈주와 노마디즘)을 숙지하고 베껴 써서 이곳의 정치 현실을 바라보고 해석하면서 실천을 모색하는 데에 몰두했다. 원인과 결과의 전도가 가져온 또 하나의 심각한 오류, 상황의 현실을 몸으로 느끼는 데에 따라 의문과 물음이 자라나서 하나의 사상으로 형태화되는 것이 정당한 과정임에도 불구하고, 상황의 현실 바깥에서 주어지는 어떤 사상을 정답으로 머리로만 받아들여 어떤 가상의 현실에 그대로 쏟아부으려는 기이한 오류를 우리는 반복해왔다. 다시 김동춘의 말에 의하면 “사회과학 이론에서 식민성은 문화에서 식민성이 그러하듯이 미국 혹은 서구에서 최근에 유행하는 이론이 무엇인가가 가장 중요하게 거론되고, 자신의 눈으로 직접 관찰할 수 있는 현실은 언제나 이론의 ‘적용 대상’으로 전락한다”.
 이 말은 사회과학을 염두에 두고 나온 것이기는 하지만, 인문학이나 철학에도 적용된다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인문학이나 철학에서도 이런저런 서구의 최신 이론이나 과거의 고전적 이론이 연구 교류의 장에서 정형화된 ‘정답’의 틀로 설정되는 경향이 지나치게 강하다. 이후에 곧 다시 살펴보겠지만, 문제는 학문 자체의 주체성 또는 ‘민족주의’를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 전혀 아니다. 한 국가나 민족에게 고유한 학문은 존재하지 않으며, 외국의 사상들과 이론들을 필요하다면 다양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문제는 그것들을 ‘주체화’하는, 즉 이곳의 상황에서 ‘문제화’해서 공유하는 교육과 연구의 시스템이 거의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p.155-156)

 

 하지만 대입뿐만 아니라 대학에서까지도 높은 점수를 얻는 이 학생들이 물론 뭘 몰라서 그토록 수동적으로 ‘정답 베끼기’의 방법을 고수해서 반복하는 것이 아니다. 이유는, 그들이 그렇게 하는 것이 차후에 자본과 사회적 지위를 획득하는 데에 그나마 유리하다는 ‘무의식의 명령’에, ‘아버지의 법’에 순종하기 때문이다. 단지 ‘공부 잘할 뿐인’ 이 학생들의 잘못이 아니다. 특정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문제는, 너무 오랜 기간 동안, 한 세기 동안 강고하게 유지되고 강화되어온 이 학벌-입시 체제 자체이다. 그 체제에 이 학생들도 기계적으로, 노예적으로 순응해왔고, 순응하고 있을 뿐이다. 그렇다 할지라도 부인할 수 없는 점은, 이곳의 상위 대학들은 윤리적인 측면에서든 능력의 측면에서든 진정으로 창의적이고 탁월한 자질들과 재능들이 모이는 곳이 아니라, 단순히 부와 권력을 손에 넣는 데에 유리한 위치를 점한 학생들이 모이는 곳이라는 사실이다. 과연, 대입 점수가 대학의 경제적·정치적 서열을 결정한다. 부유하고 권력 있는 사람과 인격적이고 능력 있는 사람을 혼동하는 것이 우리가 너무 오랫동안 얽매여온 숙명인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이 체제는 우리를 끊임없이 그러한 혼동으로 몰아넣는다. (p.161-162)

 

 그렇기에 이곳의 학벌-입시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서 입시제도를 이렇게 저렇게 바꾸는 오랜 관행은 전혀 유효하지 않았다는 김종영의 이러한 비판이 타당할 수밖에 없다. “학종[학생부종합전형]의 원류인 미국에서도 그 제도가 논란에 휩싸이지는 않았는데, 왜 유독 한국에서 이렇게 큰 문제가 되는가? 미국의 입학사정관제도가 완벽하지는 않지만, 한국처럼 거대한 사회적 이슈는 아니다. 곧 한국이 교육지옥이 된 이유는 입시가 원인이 아니라는 말이다.” “입시가 종속변수인 이유는 매우 분명하다. 정부는 지난 수십 년 동안 입시를 바꾸어보았지만 한국을 교육지옥에서 구해내지 못했다. 입시가 문제가 아니라는 말이다. 교육부가 고교학점제를 2025년부터 시행한다고 발표했고 교육 과정, 평가, 입시가 또 바뀔 테지만 고교학점제가 한국을 교육지옥에서 구해낼 것이라고 기대한다면 당신은 바보다.” (p.164)

 

 즉 우리 모두는, 적어도 절대다수는 대학들과 학과들 각각의 가치는 불문에 부친 채 수능 점수를 신봉한다―‘신앙한다’. 이러한 준종교적인, 즉 ‘도착적인’ 상황에서 우리의 현실은 분명 대입 점수가 대학 가치를 결정하는 곳이다. ‘도착증’, 즉 ‘페티시즘’, 대입 점수에 대한 ‘물신화’에 홀려서 불행하게도 우리는 ‘앞뒤를 못 가리게’ 되어버린 것이다. 그것을 학벌-입시 문제와 관련해서 정상적인 것이 별로 없다는, 거의가 비정상적인 것들이라는 사실이 증명한다. 무엇보다도 먼저 전국 곳곳에, 거리마다 왜 이리도 학원들이 많은가, 한 해에 전체 약 40조 원이 사교육비로 증발해버리는 것, 부모의 노후까지 위태롭게 만드는 그 사교육비, 아이들이 밤늦게까지 이 학원에서 저 학원으로 몰려다니는 것, 밤늦은 시간이 되면 학원 한 곳에서 아이들을 ‘픽업’하기 위해 정차해 있는 부모들의 차량 행렬, 부모가 의대에 가라고 강요해서 고등학교의 미적분 문제집을 풀고 있는 어느 초등학교 6학년생, 성적 때문에 우울증에 걸려 신경정신과 치료를 받는 아이들, 성적 때문에 자살을 시도하거나 정말로 자살해버리는 아이들, 열패감과 소외감에 비틀거리는 특성화고 아이들, 어느 일반 고등학교 교실에서 수업 내내 엎드려 자기만 하는 아이들, 그들을 측은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는 교사들, 최고 학부라는 서울대에서 학점을 잘 받기 위해 ‘정답 베끼기 기계’로 변해가는 ‘공부 잘하는 아이들’, 나치 전당대회를 연상시키는 연고전의 응원제, 〈SKY캐슬〉, 이 기이한 현상들과 풍경들을 우리는 지금부터 몇 쪽에 걸쳐 나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도착적인’ 광기의 상황에서 대입 점수가 대학의 가치를 결정하는 것이, 대입이 원인이 되어 대학 가치라는 결과를 결정하는 것이 우리의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 불행하게도 대입 점수가 아이·부모의 관계, 가정(아이·부모)과 학교의 관계, 학교와 사회의 관계, 그리고 자본과 권력의 관계를 결정짓는다. 그 숫자 하나가 그 모든 관계를 매듭짓는다. (p.166-168)

 

 문교부 장관 민관식의 주도하에 입시제도연구협의회는 1972년 12월부터 1973년 2월까지 단 3개월간의 협의를 거쳐 연합고사라는 결론을 도출해냈다. 당시를 회고하면서 민관식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이 고등학교 입시제도 개혁을 추진했다. 일류 지향 의식이 팽배되어 있는 사회에서 전통 있는 일류 고등학교의 개념을 허물어뜨린다는 것은 보통 결심으로는 실천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 80년대, 90년대의 한국사회는 소수 엘리트 중심의 사회가 아니라 세계와 더 폭넓게 교류될 지식 대중사회일 것이다. 우리는 어떤 면에서는 사회 발전을 둔화시키는 전통적인 상징을 허물어뜨리는 노력을 더 계속해야 할 것이라고 본다.” (…)
 “(…) 그러나 대부분의 위원들은 개혁의 필요성을 주장하였다. ‘…… 또, 학력 저하를 우려하는 분이 있는데, 시험이라는 절박한 상황 속에서 오직 시험을 위한 단편적 사실의 기억에 급급하여 시험을 치고 나면 모두를 까맣게 잊어버리는 하루살이 공부보다는 공부하고 싶을 때 읽고, 쓰고, 사고하는 것이 진짜 학력이 아니겠는가? 너무 지적 편중의 고교 교육에서 사람됨을 강조하는 인간 교육에로 전환시켜야 한다’는 논리를 펴면서 새 제도 개혁을 지지한 모 위원의 발언은 감명 깊은 바 있었다”. (p.172-173)

 

 현재의 대학입시는 계급 문제의 중심에 놓여 있는 동시에 계급 문제를 반영할 뿐만 아니라 그 문제의 원인이 된다. 한마디로 현재 강남의 한 아파트 단지는 ‘스카이캐슬’이다. 즉 강남의 한 고급 아파트 단지가 ‘필사적으로’ 자신의 담장을 지키면서 자신을 차별적으로 드러내려는 것과, 그 단지의 부모들이 자식들을 ‘스카이’라는 울타리 안으로 들여보내 보호하려는 것은 결코 다르지 않다. 양자 모두 계급 보존의 욕망이 표출된 사실상 동일한 현상들일 뿐이다. 다시 말해 현재의 학벌-입시 문제는 계급의 문제, 과도한 계급 불평등의 문제, 즉 전형적인 정치적 문제일 수밖에 없다. 그 사실을 묻어두고, 역대 정부들은 대입과 관련해 거의 예외 없이 ‘교육제도 공학적인’ 차원에서 대입의 소소한 형태들(대입 문제 제출 방식과 대입 평가 방식)만을 만지작거리며 이리저리 ‘다람쥐 쳇바퀴 돌리듯’ 바꿔왔을 뿐이다. 오늘날의 교육 정책들은 현재의 학벌-입시 문제가 전적으로 정치적 문제라는 사실을 덮어 가리고 애써 못 본 척하면서 헛수고들만을 반복한 결과이다. 그러나 심각한 정치적 문제에 대해서는 그 문제 자체로 다루어야만 하고, 정직한 정치적 해법을 내놔야만 한다. 그렇지 못하고 계속 ‘헛다리만 짚는다면’ 그 문제는 점점 더 격화되고 점점 더 심각해질 것이다. (p.175-176)

 

 그러나 하나는 분명하다. 현재의 학벌-입시 문제는 정치적 문제, 즉 부당하고 기이한 하나의 권력이 악순환에 악순환을 거듭해서 집단적 억압·피억압과 지배·피지배, 전면적 차별·피차별의 전 사회적인 서열 구조를 강화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문제의 경우 부당한 심각한 불평등을 조장하는 그 권력은 단순히 우리를 ‘위에서 찍어 누르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서로서로를, 부모가 아이를, 교사가 학생을, 한 학생이 다른 학생을, ‘옆에서 밀어내면서 압박하는’ 권력이다. 그 권력이 기이하고 비정상적이라는 사실을, 학벌-입시와 관련되어 벌어지는 현상들·사건들 가운데 정상적인 것들이 별로 없고, 우리가 취하는 태도와 마음이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왜곡되어 있다는 현실이 증명한다. 또한 그 권력에 포박되어 있는 상태에서 ‘쉬쉬하면서’ 우리가 집단적으로 너무나 많은 거짓말을 서로가 서로에게 강요하고 있는 현실이 증명한다. 가령 ‘대학수학능력시험’뿐만 아니라 ‘특수목적고등학교’와 ‘자율형사립고등학교’ 같은 거짓말들 말이다. (p.179-180)

 

 국립대들의 경우뿐만 아니라 더욱이 수도권의 주요 사립대들의 경우에도 국가가 나서서 실행하고자 하는 학교들 간의 통폐합은 말할 것도 없고 같은 학교 내에서의 어떠한 소규모 학과 간 통폐합도 반기지 않는다. 국립·사립을 망라한 이곳의 핵심 대학들은 각각 자체의 경영권·학생 선발권과 인사권 등의 권력을 결코 포기하려 하지 않을뿐더러 침해받는 것도 원치 않는데, 그 권력은 과거 봉건시대의 ‘토호’의 권력과 상당히 유사하다. 근래 서울대가 법인화 노선을 택한 것은 자체의 유구하고 막강한 권력을 ‘사유화’하겠다는 의지의 발로 이외에 다른 것일 수 없다. 대통령이 아니라 그 위의 누가 됐든, 무소불위의 어느 독재자가 아니고서야 가령 연고대에 권력을 내놓으라고 강요할 수 있겠는가? 원칙적으로―국립대, 사립대를 불문하고―대학 권력에 정당성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고, 그것을 해체하는 것이 전적으로 정당한 것도 아니다. “대학의 자율성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보장한다”(헌법 제31조 4항, 1987년 10월 29일 공포). 이 헌법 조항의 의미는, 헌법재판소의 해석대로, “대학에 대한 공권력 등 외부 세력의 간섭을 배제하고 대학 구성원 자신이 대학을 자주적으로 운영할 수 있게 함으로써 대학인으로 하여금 연구와 교육을 자유롭게 하여 진리 탐구와 지도적 인격의 도야라는 대학의 기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p.192-193)

 

 자본이 아이들을 위해 존재해야 할 것이다. 가령 한 해에 29.2조 원(또는 공식적 통계에 잡히지 않는 금액까지 합치면 약 40조 원)이라는 천문학적인 금액을 사교육에 쏟아부을, 정확히는 ‘날려버릴’ 것이 아니라, 현재 전국의 모든 대학생들을 무상으로 교육시킬 수 있다는 금액인 11조 원을 그들을 위해 투자해야 한다. 이는 간단한 상식일 수 있지만, 문제는 입시-사교육-학벌-부동산-자본-계급의 연쇄사슬이 모든 상식을 무시하게, 보지 못하게 할 정도로 우리의 ‘무의식’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다는 데에 있다. 우리의 그 ‘무의식’은 집단적인 것이며, 따라서 그 ‘무의식’을 무너뜨리기 위해서는 마찬가지로 집단적인, 즉 정치적인 어떤 해결책이 나와야 한다. (p.202-203)

 

 현재의 학벌-입시 문제의 근원지는, 즉 학벌-입시의 권력이 주도적으로 작동되는 장소는 국가가 아니다. 과거 이곳의 근대화 과정에서 국가가 주도해 학벌-입시의 가치를 우리에게 주입시켰던 것은 사실이지만, 현재 그 가치는 국가가 방관하더라도(사실 국가는 방관하고 있는데, 그러면서 언제나 그랬듯 강력하게 통제한다) 바로 우리 자신에 의해, 우리의 자발적인 선택·복종(선택이자 복종)에 의해 수호되고 끊임없이 확대-재확산된다. 말하자면 우리 스스로가 우리 자신을 점점 더 강하게 옥죄는 악순환에 스스로 빠져들어가 있는 것이다. 우리 자신이 자식들의 사교육을 위해 기꺼이 지갑을 열면서 그 대가로 스스로 노후를 위태롭게 만들고 있고, 그에 따라 우리 자신 대다수와 그 자식들이 실패와 박탈의 경험으로 인해 결정적으로 한계에 이르러야만 포기와 체념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국가가 주도적으로 정립해서 유포해왔던 하나의 가치가 이제 우리 각자가 스스로 몸·영혼과 정신에 내재화시킨 것이 되었다. 한마디로 학벌-입시 이데올로기는 이곳의 근현대에서 가장 완벽하게 성공한 이데올로기, 즉 가장 오랫동안(1세기), 모든 비판으로부터 가장 안전하게 보호되면서, 가장 견고하게 유지되고 확산되어온 이데올로기이다. 그 결과 우리는 학벌-입시와 연관된 또 하나의 분명한 전도 현상과 마주하게 된다. 학벌-입시 이데올로기를 창출시켜 국민들에게 주입시켰던 국가가 학벌-입시와 관련된 사안들에서 국민들(학부모들)을 이겨본 적이 거의 없게 되어버린 것이다. 이제 이 이데올로기를 국가보다도 국민들이 더 강력하게 수호하게 된 것이다. (p.225-226)

 

 그러나 지성의 능력은 지성에 선천적으로 내재한 순수한 자연적인 능력이 아니며, 사회적·문화적이자 정치적인 능력이다. 말하자면 지성의 능력은 인간 사회 내에서 권력의 의지와 결합되어 자기 확장과 타자(자연·사물들과 타인들)에 대한 지배의 능력으로 발전되면서, 그 자체를 타자에 대한 대상화의 능력으로 확장시킨다. 한마디로 지성의 능력은 사회 내에서 타인들 위에 위치하려는 우월의 의지로, 타인들을 통제하려는 지배의 의지로 귀결된다.
 지금까지 우리는 너무나 많은 경우 똑똑하고 힘 있는, 우리 위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인간들을 인정하면서 그들에게 기꺼이 지배권을 주어왔던 반면, 어수룩하고 무력하며 어딘가 ‘못 배우고 모자란’ 인간들을 무시하면서 당연하다는 듯 그 위에 군림해왔다. 이는 윤리적인 관점에서뿐만 아니라 정치적 관점에서 정당화될 수 있는 경향인가? 우리에게 유익을 가져다주기는커녕 바로 우리 자신에 대한 억압과 구속을 스스로 용인하는 너무 오래되고 왜곡된―‘적폐’의―경향에 지나지 않는 것 아닌가? 이곳의 상황으로 눈을 돌려본다면, 대입 시험에서 높은 점수를 받아 입증되었다고 간주되는 지성의 능력을 소유한 자들에게 편향적이거나 배타적으로 경제적·정치적 권력을 부여해온 우리의 이 오래된 관습이 과연 우리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것인지, 과연 합당한 것인지, 과연 평등한 것인지, 민주적인 것인지, 그러한 질문을 우리 자신에게 던져봐야만 한다. (p.242-243)

 

 이제 우리는 일제강점기 이전 구한말에 조선인들이 했던, “해외 유학에 의존하는 것은 자주적인 국가 교육 체제의 온전한 수립을” 방해한다는 우려조차 하지 않는다. 한 국가가 1세기 넘게 해외 유학에 의존한다는 것은, 즉 그 나라가 외국 학위를 높게 평가하면서 장차 지식인층이나 지도자층에 들어가게 될 고급 인력들을 외국에서 공부하고 학위를 취득하도록 1세기 넘게 부추긴다는 것은, 그들이 학습하고 지향하는 외국의 이런저런 관념들과 그들이 벗어날 수 없는 자국의 현실들 사이의 괴리가 더 크게 끊임없이 벌어지도록 방치한다는 것이다.
 학문의 고유성을, 존재하지도 않는 가상에 불과한 학문의 민족성 또는 민족주의를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 전혀 아니다. 해외 유학에 너무 오랜 기간 동안 의존해오고, 외국 학위의 가치를 맹목적으로 지속적으로, 또한 집단적으로 사회와 대학 전체가 높게 평가해옴에 따라, 전문가들과 연구자들이 각자 해당 학문의 분야에서 하나의 관념을 어떤 구체적인 현실의 맥락에서 공유하고 문제화하는 합당하고도 필연적인 과정을 제대로 밟을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각자 외국에서 배워온 어떤 관념을 주장할지라도, 그것이 연동되어 있을 수 있는 어떤 현실을 못 찾거나 간과하거나 무시하게 되었고, 그에 따라 그 관념으로부터 다른 사람(특히 동료)들과 함께 어떤 문제를 구성하는 과정에 들어갈 수조차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각자 어떤 관념을 펼쳐 보여주고 하나의 ‘정답’으로 내세울 수는 있지만, 너무 많은 경우 그 현실적·구체적 맥락을 찾을 수 없거나 무시해버리고, 그에 따라 그 관념을 문제화해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하나의 문제로 공유할 수 없게 되어버린 것이다. (p.249-250)

 

 한국적인, ‘한민족’ 고유의 학문(그러한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을 해야 한다는 것도, 한국적인 교육을 해야 한다는 것도 아니다. 고등교육의 결말을 외국에 너무 오랜 기간 동안 위탁해 놓음에 따라, 산출되는 수입된 ‘고등의’ 관념들이 각각 현실적·구체적 맥락 없이 공허하게 주장되고 유통될 수 있으며, 그 관념들에 다수가 접근하기 힘들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가령 서울대의 한 학과가 그렇듯이, 학과 교수들의 90% 정도가 미국 박사학위 소지자들이라면, 그들을 중심으로 진행될 수밖에 없는 교육과 연구가 과연 이곳의 현실을 반영할 수 있는가? 그러한 교육과 연구는 완전히 미국화된 어떤 상황에 익숙한 사람들만이, 아니면 교육과 연구에 대해 아무 관점도 없는 사람들만이 온전히 수용할 수 있을 것이다. 고등교육의 마무리 단계와 박사학위를 너무 오랫동안 외국에 맡겨버려 방치함에 따라, 고등교육 자체가 피상화, 더 나아가 허구화될 수밖에 없고, 거기서 ‘간판주의’가 지배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사실 이곳의 학계에서 대부분의 경우, 외국의 한 명문대 박사학위를 취득한 어느 누구에 대해 사람들은 그의 ‘간판’만을 알 뿐, 그의 생각·문제의식과 실력에 대해서는 모른다. 또한 전국 모든 대학들의 절대다수의 학과에서 전임교수 공채를 진행할 때, 해당 심사자들(해당 학과의 교수들)의 선택을 가장 크게 좌우하는 요인은 지원자의 외국 박사학위 ‘간판’이다. (p.251-253)

 

 초중등 교육이라는 것은, 여러 분야에서 일반적으로, 가장 기본적으로 알아야 할 것들을 가르치고 습득하는 과정이지, 특정 분야에서의 역량을 결정하고 키우는 과정이 아니다. 그러한 초중등 교육이, 이곳에서 수능 시험에서 그렇게 하듯이, 모든 분야(교과목)에서의 능력 성과(시험 성적)들을 세밀하게 판정하는 데에서 마감되고 결론 난다는 사실 자체가 난센스이다. 아이들 각자의 진정한 역량을 아직 판정할 수 없는 시점에서, 시험으로 모든 능력 성과들을 평가하고 서열화한다는 것은 아이들을 ‘줄 세우는 것’ 이외의 어떠한 다른 목적도 갖고 있지 않다. (p.257-258)

 

 대학의 가장 중요한 임무와 가장 근본적인 존재 이유 하나는, 사회의 전문 분야들의 각 적재적소에 가장 유능하고 자격 있는 인재를 배출하는 것이다. 그 임무와 존재 이유에 부응하기 위해 대학은 전문적인 고등교육의 과정에 있는 학생들에게 부담되는―즉 사회적 책무를 감당하는 데에 필요한―쉽지 않은 과제들을 내주어야 하며, 어느 정도는 버거운 경쟁(타인들과의 경쟁 이전에 자기 자신과의 경쟁, 즉 자기 자신의 역량 강화)을 부과하고, 분명한 어떤 상벌 체계를 제시해야 한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대학에서의 고등교육 이수 과정이, 그 자체에 필요한 경쟁을 거의 포함하고 있지 않기에, 초중등 교육 이수 과정보다 훨씬 더 쉽다. 그 단적인 증거 하나가, 대학생의 하루 평균 학습 시간이 초등학생의 그것보다도 더 짧다는 것이다.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대학에서 좋은 점수 받기란 고등학교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쉽다. (…)
 이곳에서 그렇게 박사학위의 공신력이 없다는 사실은, 매우 방만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대학의 고등교육 전체가―가령 ‘스카이’에서의 교육 자체가―공신력이 없으며, 대학 입학시험·성적을 기준으로 정체되어 있다는, 또한 피상적이라는 이곳의 현실을 증명한다. (p.259-260)

 

 자격고사로 전환하게 되면, 향후 대학에서 학업을 잘 이어가 높은 학점으로 졸업할 의지가 있는 고등학생들은 공부를 소홀히 하기는커녕 각자 자신의 적성·취미와 소질에 대해 깊이 숙고하면서 자신이 원하고 택한―자신의 미래의 대학 전공과 연관된―과목들에서 ‘연구’에 가까운 수준 높은 학업에 매진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즉 진정한 의미에서의 학습에, 자발적이고 심화된 학습에 집중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것이 적어도 모든 과목들에서 사교육에 의존해 ‘정답 찾기’에 몰두하면서 점수 높이기에 일로매진하는 작위보다는 국가와 사회의 발전과 번영에 도움이 된다. (p.263)

 

 이곳에서 대학평준화는 오직 대입 자격고사화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보다 정확히 말해 대입 자격고사화 자체가 대학평준화를 의미한다. 많은 사람들이 대입 자격고사화를 너무 급진적이며, 그러한 만큼 불가능하다고 단정할 것이다. 그러나 이는 객관적·사실적 판단이 아니라, 지배 권력이 그 자체의 보존을 위해 오랜 시간 동안 더 강고하게 만들어온 정치적 판단일 뿐이다. 보수를 포함한 절대다수가 현재의 수능 체제가 큰 폐해를 가져온다고 우려하고 비판하지만(가령 전국 4년제 대학 총장들 가운데 이 수능 체제를 지지하는 비율은 12%에 불과하다), 상당수가 거의 모든 개혁의 시도에 대해서, 안 된다고, 불가능하다고, 비현실적인 희망이자 망상이라고 저지한다. 그렇기에 무의미한 대입 개편안들만이 반복적으로 튀어나오고, 학생들과 학부모들은 지속적으로 혼란에 내맡겨진다. (p.266)

 

 한국의 교육 시스템 전체는 대학입시에 초점이 맞추어진 채 돌아가며, 대학 입학 이후의 과정에 대해서는 그 자체를 단순히 유지하려고만 할 뿐 사실상 방기한다. 이를, 대입 시험 때까지는 국가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경쟁 질서의 세밀한 부분들까지 규정하고 관리하는 반면, 대학 입학 이후의 과정에서는 어떠한 평가·경쟁·상벌의 제대로 된 제도적(공식적) 기준도 설정해놓지 않고―설정할 필요도 자각하지 못하고―있다는 사실이 증명한다. 또한 초중고 아이들은 국가가 설정해놓은 경쟁 질서에 위협당하면서 만성적으로 무감각·무사고·무기력과 불안·분노의 상태에 매몰되어 있는 반면, 대학생들과 석박사 과정의 대학원생들은 각자 자신의 전공과 관련해서는 오직 자신의 개인적인 관심·흥미·노력, 그리고 ‘초국가적·초사회적인’, 나아가―결혼과 직업의 안정까지 포기하는―‘반사회적인 순수성’에만 의존해서 힘겹게 학업을 이어가고 있다는 사실이 입증한다. 그 사실을 또한 초중고 학생 1인당 교육비가 OECD 국가들 대비 평균을 상회하고 있는 반면, 대학생 1인당 교육비는 OECD 국가들 평균 대비 3분의 2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는 통계가 증명한다. 게다가 한국에서 대학생 1인당 교육비는 고등학생 1인당 교육비의 0.8배에 불과한데, 고등학생보다 대학생에게 국가적 투자를 더 적게 하는 나라는 OECD 국가들 가운데 한국이 유일하다. (p.2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