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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장은 누구의 것인가 / 데이비드 벨로스, 알렉상드르 몬터규 / 현암사

 

 저작권은 18세기 초반 런던에서 생겨났다. 책 저자와 그의 양수인들에게 책의 인쇄 및 판매에 대한 독점을 단기간 허용해주는 것이 최초의 형태였다. 그런 독점이 허용되는 대상은 그 후 몇 세기 동안 점점 많아졌고 독점 가능 햇수도 거듭 늘어났다. 그다음엔 저작권의 범위가 차차 넓어져 축약, 각색, 공연, 번역 등등의 2차적 사용으로까지 확장되었다. 각 단계를 거칠 때마다 저항이 있었지만 살금살금 전진하며 세력을 넓혀갔다. 저작권을 멈춰 세우려는 철학적·윤리적·현실적 논거가 먹힌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렇다면 회의론자들은 처음부터 쭉 틀렸던 걸까? 옳고 그름을 떠나 저작권은 사회적·산업적·기술적 진보의 불가피한 결과, 즉 현대화의 부산물일까?
 그 답은 ‘아니다’이다. 첫째, 현대 저작권법의 부정적 효과 중 다수는 이미 18세기에 예견된 바 있다. 타당한 경고들이 묵살당했을 뿐이다. 둘째, 저작권이 특히 지난 반세기 동안 현대 세계의 형성에 역동적 역할을 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것은 거스를 수 없는 거대한 역사적 흐름의 부작용이 아니라 그 흐름 자체를 밀어붙이는 거대한 힘이다. 그러나 현대화의 다른 동력과는 차별화된 특징을 한 가지 갖고 있다. 불가피하게 불평등을 초래한다는 것이다. (p.18-19)

 

 저작권법을 기업들의 금광으로 바꾸어놓은 인상적인 사례가 있다. 안드로이드 운영 체제에 자바 프로그래밍 언어의 일부(애플리케이션 프로그래밍 인터페이스, API)를 사용한 구글에게 오라클이 거액의 사용료를 요구하며 소송을 제기했다. 시작은 특허법 소송이었지만 10년을 넘기면서 저작권 소송으로 변했다. 특허보다 저작권의 보호 기간이 훨씬 더 길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작자’와 ‘저작물’이라는 오래된 용어가 사용되는 저작권법은 이 다툼에 전혀 어울리지 않았으므로 지방법원과 연방법원은 항소 재판마다 일관성 없고 모순된 판결을 내렸고, 이미 수천만 달러의 변호사 비용이 사용된 후 소송은 결국 미국 대법원에까지 올라갔다. 2021년 4월, 대법원은 API가 저작권 보호 대상인지 아닌지는 명시하지 않았다. 다만 그렇다고 가정할 경우, 구글이 자바의 특정 요소들을 용도 변경한 것은 소유자의 권리를 침해한 것이 아니라는 판결을 내렸다. 이를 공익의 승리로 평가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저작권자가 저작물의 2차적 사용까지 통제하는 것을 막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판결은 어떤 언어가 한 기업에 소유될 수 있는가 없는가의 문제에 답을 주지는 못한다. 저작권법은 그 범위가 광대하고 세부는 미로처럼 복잡하지만 아직 안정적으로 확립되지 않았으며, 역사를 보건대 치열한 공적 논의를 통한 정착이 필요하다. 자칫하다간 모든 것이 소수의 기업들 손에 들어갈지도 모른다. (p.20-21)

 

 작가든 작곡가든 화가든 분야를 막론하고 완전히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창작자는 없다. 완전히 새로운 것이라면 기존 분야나 장르의 이름이 붙지도 않을 것이다. (‘전례 없는’ 새로운 작품이라는 과대 선전은 곧이곧대로 듣지 않는 것이 좋다.) 새로운 희곡은 희곡 집필의 기나긴 전통에서, 교향곡은 작곡의 역사로부터 탄생하고, 추리소설과 성당과 소네트와 광고 음악은 본보기로 삼을 만한 이전 작품들에서 무언가를, 그것도 상당량 차용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면 모든 작가와 예술가는 어느 정도 표절을 하고 있는 셈이며, 그들 중 다수는 이 사실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여러 문화권에서는 예술과 모방을 구분하지 않는다. 근대 초기의 러시아에서 “성상(聖像)은 원작이든 모방작이든 기적을 행했으며, 가끔은 모방작이 원작보다 훨씬 더 추앙받기도 했다. (…) 마찬가지로 책에 기존 이야기를 실어놓고 저자의 권리를 주장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16세기 이탈리아의 화가이자 건축가인 조르조 바사리는 골동품 위조를 예술적 기교의 승리로 간주했다. 19~20세기에 영국 관광객과 미국 수집가에게 기념품으로 제공할 로마 골동품을 대량 생산한 이탈리아 장인들은 스스로를 도둑이 아닌 예술가로 여겼다. (사실 다수의 로마 골동품은 더 오래된 그리스 골동품의 모방작이다.) 셰익스피어는 앞선 시대의 연대기들에서 이야기와 인물을 가져왔으며, 그가 사용한 소네트 형식은 그전 몇 세기의 이탈리아 시인들에게서 취한 것이었다. 서양에서 문학이 태동한 이래 현대에 이르기까지, 모방은 한낱 수단이 아니라 예술적 가치의 판단 기준이 되어왔다. 16세기와 17세기에는 시를 쓰는 가장 기품 있는 방식을 라틴 시인 롱기누스의 글에서 찾았다. 그는 「숭고에 관하여(On the Sublime)」라는 에세이에서 “과거의 위대한 시인들과 산문가들에게 지지 않으려는 모방”을 옹호했다.

위대한 고대 작가들의 강렬한 천재성이 경쟁자들의 영혼으로 옮겨가 영감의 샘처럼 뿜어져 나온다. (…) 그들이 남들의 숭고한 열정을 공유할 때까지. (…) 내가 말하고 있는 것은 표절이 아니라 아름다운 형태나 조각상이나 숙련된 노동의 결실을 모방하는 과정과 닮았다. (…) 그 수준 높은 선례들을 경쟁자의 눈으로 주시하면 그것들은 우리를 인도하는 등불이 되어, 우리의 영혼을 우리가 상상하는 곳까지 끌어올려 줄 것이다.

 중국에서는 고대인들을 모방하는 것이 시, 철학, 역사, 시각 예술의 기본 방식이었다. 그래서 “위대한 중국 화가들은 자신의 작품 모작에 전반적으로 관대한 태도를 보였으며” 문학에서는 “고전을 인용하는 것이 일반적인 화법이었다.” (p.30-32)

 

 18세기에 영국 작가이자 성직자인 윌리엄 워버튼은 이제 막 생겨난 저작권이라는 개념을 다음과 같이 공격했다. “정서나 신조는 만인이 동시에 향유한다. 차라리 바람을 맞으면서 자기 혼자만 그 상쾌함을 누리는 척하는 편이 낫겠다.” 수십 년 후 역사가 토머스 배빙턴 매콜리는 워버튼처럼 자연을 이용한 은유법을 구사했다. “책에 담긴 사상이나 언어는 일단 창작되고 나면 햇빛이나 공기처럼 어디서나 공짜로 누릴 수 있다.” 미국 대법원 판사 루이스 밴다이스도 1918년에 같은 맥락의 발언을 했다. “지식, 입증된 진리, 개념, 사상은 남들에게 자발적으로 전달된 후에는 공기처럼 누구나 무료로 사용할 수 있다.” 러시아에서 1828년 검열법을 논의하는 입법부 의원들을 위해 마련된 저작권 관련 자료에서는 출판물을 “교육과 시민권을 제공해준 사회에 작가가 바치는 기증물”로 취급했다. 표절한 문장들을 가지고 표절에 관한 에세이를 집필한 조너선 레덤도 에세이의 마지막에 다음과 같이 썼다.

내 책을 불법 복제하지 말고, 나의 통찰을 약탈하시라. 중요한 건, ‘전부 주는’ 것이다. 독자 여러분은 얼마든지 내 이야기를 써먹어도 좋다. 애초에 내 것이 아니었고, 내가 여러분에게 준 것이니까. 훔치고 싶다면, 내가 허락할 테니, 가져가도 좋다.

 이러한 항변들은 저작권의 급소를 겨냥한다. ‘공표’를 통해 대중에 공개되는 것은 무엇이든 명백하고도 돌이킬 수 없는 공유 재산이 된다. 그런데 저작권은 그것을 다시 사유 재산으로 만들어버린다. 이런 모순된 아이디어가 출현하고 제도화된 연유는 무엇일까? (p.34-35)

 

 독일에서는 1479년부터, 포르투갈에서는 1502년부터, 스페인에서는 1506년부터, 프랑스에서는 1515년부터, 잉글랜드에서는 1518년부터, 베네치아 법을 본뜬 특권이 서적 인쇄에 주어졌다. 이런 일시적 독점 허용은 유럽 전역으로 퍼지면서 좀 더 구체화되었다. 슈파이어의 요한은 인쇄기를 가동할 배타적 권리를 얻었고, 이후 다른 곳에서는 모든 책이 아닌 특정 종류의 책, 이를테면 법률서, 의학서, 신학서를 찍을 권리가 허용되었다. 머지않아 도서관 서가가 아닌 개별 저작물에 특권이 주어지기 시작했다. 작가가 아니라, 원고를 책으로 만들 수 있는 인쇄업자에게 말이다. 그로부터 수년 후, 현대 초기의 이런 인쇄 특권에서 저작권이 생겨난다.
 16세기 중반부터는 악보 한 장보다 긴 무언가를 출판하려면 군주나 주교 같은 국가나 종교 권위자로부터 특권을 얻어야 했다. 인쇄술을 육성하려는 관대함과 열망에서 생겨난 제도가 이제 그 사용법을 통제하는 효과적인 수단으로 변한 것이다. (p.42-43)

 

 이런 까닭에 고전적인 책 시장의 인쇄업자들은 특권 및 특허 제도에 전혀 반대하지 않았다. 오히려 법과 관례가 있어야 사업이 가능했다. 역으로 공권력은 책의 위력이 자신들의 세속적, 종교적 지위를 흔들어놓을까 두려워 인쇄업자들을 자기네 앞잡이로 삼으려 했다. 런던과 마찬가지로 파리에서도 인쇄소 수는 법으로 제한되었고, 인쇄업자의 권리와 의무는 상거래 관행과 스스로 단속하는 길드를 통해 체계화되었다.
 이런 규제에 반갑지 않게 딸려온 또 다른 결과는, 인쇄업자 길드의 정식 회원들이 시, 희곡, 소설, 과학, 철학, 신학 등 모든 지적 저작물의 생산과 판매를 독점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게다가 독자층이 점점 넓어지기 시작했으니, 인쇄업은 누구나 탐낼 만한 사업이 되었다. 인쇄업과 출판업은 인쇄를 가업으로 잇는 가문의 카르텔이 되었다. 그들이 정식 허가와 특권을 받아 인쇄한 책은 그들의 재산처럼 보였다. 관행상 그럴 수밖에 없었다. 카르텔의 일원들이 동료의 출판물을 다시 인쇄해 서로의 심기를 건드리는 일은 없을 테니 말이다. 런던을 예로 들자면, 셰익스피어의 모든 작품은 인쇄업계의 왕가라 할 만한 톤슨(Tonson)에서 출판되었다. 다른 회사들이 초서와 밀턴과 드라이든 등등의 작가를 소유했듯, 톤슨은 셰익스피어를 소유했다. 서적출판업자 조합 회원들 앞으로 등록된, 지속적이고 안정된 판매가 보장된 책은 잉글리시 스톡(English Stock)으로 불렸고, 이는 분명 대단히 값진 재산이었다. 전집, 긴 총서, 호화본을 작업할 때는 출판인쇄업자들이 콩거(conger)라는 연합체를 형성하는 경우가 많았다. 가끔은 서로에게 작품을 팔거나 작품의 지분을 팔기도 하는 등 작품에 대한 권한이 2차 시장에서 활발히 거래되었다. 그러나 톤슨과 동료들은 이 자산을 권리가 아닌 재산(집, 논밭, 말 또는 상선이나 탄광 등 공동 기업체의 지분 같은 재산)으로 여겼다.
 이런 이유로 인쇄기가 발명된 후에도 책값은 예상만큼 많이 떨어지지 않았다. 16~18세기 영국과 프랑스의 평민들에게 책은 여전히 접하기 어려운 사치품이었다. 거래의 성격과 규제의 형식 때문에 출판인쇄업자들은 멋대로 높은 가격을 책정할 수 있었다. (p.55-56)

 

 1710년 앤 여왕 법의 정식 명칭에서 “학문의 장려를 도모하기 위한 법”이라는 구절은 1790년 미국 저작권법에도 그대로 복제되다시피 했다. 그 후로 입법자들과 소송 관계자들은, 창작자와 발명자가 공익에 더 이바지하도록 그들에게 의욕을 불어넣는 것이야말로 지식 재산권의 목적이라는 명백한 증거라며 이 표현을 자주 들먹였다. 몇 가지 사례를 보자.

특허의 기간이 늘어나고 강도가 높아질수록 창의적인 활동이 늘어난다.

금전적 보상을 통해 지적 저작물의 충분한 생산 및 분배를 장려해야 한다.

저작권의 근본 목표는 대중의 지식과 이해를 넓히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잠재적 창작자들에게 저작물 복제 독점권을 허용하여 금전적 혜택을 줌으로써, 그들이 대중의 지식을 향상하는 유익한 창작 활동에 더욱 매진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런 주장이 자명해 보일 수도 있지만, 다들 명백한 문제점을 품고 있다. 가령 허풍에 대한 특허가 강화된다고 해서 인간의 언어 능력이 나아질 리 없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영구적 권리를 소유한 린텃과 톤슨 가문의 후손에게 돌아간 금전적 보상은, 스티븐 손드하임과 레너드 번스타인이 〈웨스트사이드 스토리〉를 쓰는 데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다. 금전적 혜택이 졸작에도 똑같이 적용된다면, 대중의 지식을 향상시키는 유익한 창작 활동의 열쇠가 될 수 없다. 진지한 학문 분야의 편집자라면 빨간 줄을 그었을 이 개연성 없는 발언들은 저작권 관련 법률 문서에서 흔히 볼 수 있으며, 헛소리로 취급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p.75-76)

 

 값비싼 특허를 보유하고 있는 생산성 높은 수많은 대기업의 행태 또한 특허의 인센티브 효과에 의구심을 품게 만든다. 이를테면 대형 제약 회사들은 대체로 연구보다 광고에 훨씬 더 많은 돈을 쏟아붓는다. 2019년에 일라이 릴리는 연구에 55억 9,000만 달러, 마케팅과 영업에 62억을 썼다. 글락소스미스클라인은 연구 개발에 45억 달러를 투자하고, 마케팅에 110억 4,000만 달러를 썼다고 보고했다. 화이자의 경우, 연구 개발 비용은 5,000만 달러, 마케팅 비용은 143억 5,000만 달러였다.
 여기서 궁금해진다. 이 기업들이 만약 소수 제품들에 대한 특허를 잃는다면 연구 개발 예산과 광고 예산 중 어느 것을 깎을까? 특허를 잃는다고 해도 사실상 큰 차이는 없을 것이다. 세계보건기구에 필수 약품으로 등록된 약 가운데 95퍼센트가 ‘특허 만료’ 상태지만 여전히 수익을 내며 제조되고 있다. 대형 제약회사가 지식 재산권을 보호받지 못하면 파산할 거라는 주장은 이처럼 본질적으로 설득력이 부족한데도 많은 사람이 진실로 믿고 있다. (p.85)

 

 특허나 저작권의 보호를 한 번도 받은 적 없는 기본 분야가 몇몇 있는데,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수학이다. 재산권 영역에서 수학이 제외된 까닭은, 현대의 지식 재산권 제도가 처음부터 자연의 사실과 창작물을 구분했기 때문이다. “지식은 신의 선물이다. 고로 팔 수 없다.” 사람들은 자연에 존재하는 사물들을 누구도 소유할 수 없다고 쭉 믿어왔고, 바로 최근까지도 수학자들은 발명자가 아니라 세상의 플라톤적 질서를 밝히는 사람으로 여겨졌다. 그런데 왜 수학자들은 그토록 열심히 연구할 뿐만 아니라 다른 분야의 발명을 도우며 진전을 이루고 있는 걸까? 차량 호출 앱에서 핵 과학, 컴퓨팅, 우주 비행까지. 보상을 기대할 수 없으니 남다른 인간이 된 건가? 당연히 아니다. 메르센, 뉴턴, 가우스, 아인슈타인, 존 콘웨이도 남들처럼 도박 빚, 이혼 위자료, 강제 추방에 시달렸다. 누구나 그렇듯 그들도 돈이 필요했다. 그러나 재정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자신들의 발견에 대한 지식 재산권을 주장하지는 않았다. 보상이 뒤따라야 창의성을 높일 수 있다는 주장은 그와 정면 배치되는 수학자들의 행보로 무색해진다.
 지식 재산권으로 창작을 장려하자는 논리에는 작가, 예술가, 발명자의 인간성에 대한 부정적 평가가 깔려 있기도 하다. 이 문제에 관한 자칭 권위자는 작가들이 “대부분의 사람보다 더 쉽게 나태해진다”고 거리낌 없이 말했다. 얼마 전 현대 영화 산업의 본거지에서, 로스앤젤레스 저작권 협회는 더 엄격한 규제를 주장하며 이 근거 없는 비방을 되풀이했다. “작가들의 전기는 그들이 대부분의 사람보다 더 쉽게 나태해진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강력한 지식 재산권 보호를 옹호하는 자들이 노골적으로 혹은 은연중에 끊임없이 들먹이는 논리다. 작가와 예술가를 돈독 오른 게으름뱅이로 몰아야, 오로지 금전적 보상만이 생산적인 창작 활동을 북돋울 수 있다는 주장이 성립하기 때문이다.
 공공연히 “학문을 장려하고 과학 및 유용한 기술의 진보를 촉진하자”고 떠들면서, 바로 그 가치 있는 목표를 성취할 사람들의 도덕적 약점을 근거로 삼다니, 허튼소리에 놀아나는 창작자들의 뒤통수를 치는 격이다. 저작권을 창작 장려책으로 지지하는 방법이 창작자를 폄하하는 것뿐이라면, ‘인센티브 효과’를 호소하는 것은 한낱 궤변에 지나지 않는다. (p.87-88)

 

 오늘날 우리가 지식 재산이라 부르는 것으로 임대료를 챙긴 가장 진기한 사례의 주인공은, 동물과 풍경을 그린 진취적인 화가 조지 개러드였다. 그는 부업으로 당시 전국의 양축 농장에서 키우던 여러 품종의 소들을 석고 모형으로 제작했다. 다른 화가들이 전원 풍경을 그릴 때 해부학적 정확성을 기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서였다. 그의 주물은 1:5.33의 축척으로 제작되었기 때문에 헤리퍼드종 모형은 약 30센티미터의 키로 서 있었다. 그런데 이 모형의 구매자들은 개러드처럼 동물화를 그리는 동료 화가가 아니라 주로 농부, 동물 사육자, 가축 상인이었다. 또한 다른 주조자와 주형공이 개러드의 석고 모형을 손쉽게 모방했다. 개러드가 농업위원회에 이 문제를 제기하자, 어떤 이유에선지 위원회는 냉큼 의회에 탄원서를 제출하겠노라고 답했다. 위원회가 제출한 법안은 마법처럼 순조롭게 의회를 통과했다. ‘새로운 모형 및 흉상 주조물 제작 기술을 장려하기 위한 법’(1798년)은 개인의 구체적인 사업상 이익을 위해 선구적인 저작권을 보장해준 세 번째 사례였다.
 18세기 잉글랜드에서는 문학 작품 저자들이 1710년에 명목상의 소유권을 처음 인정받았다. 출판업계가 언제나처럼 서적 출판업자 조합의 독점적 통제하에 놓일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18세기 말 무렵, 도널드슨의 항소에서 상원이 조합의 권력을 꺾어놓았지만 저작권 보호 대상은 조금씩 늘어났고, 출판된 책들 외에 다소 기이한 조합의 다양한 것들이 포함되었다. 판화로 시작하여 악보, 그다음엔 지도, 행주에다 모형과 흉상까지. 계획하에 처리된 일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저작권의 확장과 쟁취는 상상력의 결실 또는 정신노동처럼 그때 막 부상 중이던 개념이나 원칙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다. 영국의 역사답게 즉흥적이다. 하지만 이런 전개가 웃겨 보일지 몰라도 여기에는 불길한 이면이 있다. 점점 더 상업화되고 산업화되는 사회에서 누구도 알아채지 못하게 사유화가 진행되어왔다는 점이다. (p.120-121)

 

 월터 스콧은 소설로 부자가 되었고 빅토르 위고는 글을 써서 생계를 유지했지만, 저작권료로 집세를 지불한 당대의 작가는 거의 없었다. 그들 대부분은 재산을 물려받거나, 개인 사업을 하거나, 그도 아니면 공무원·사서·군인·외교관·교사·성직자·의사·정치가로 일했다. 글로 먹고사는 작가 대부분은 저작권을 팔아서 돈을 번 것이 아니라 일간지와 주간지에 글을 기고했다. 학문을 장려하고 천재의 권리를 지켜주겠답시고 만들어진 법으로 큰 이득을 본 사람은 오늘날의 영화계가 그렇듯 소수의 유명인에 불과했다.
 명성과 영예는 저작권의 결과물이 아니다. 어림도 없는 소리다. 영예란 그리스와 로마의 작가들이 추구하던 것, 창작물의 소유라는 개념을 생각하지도 않고 상상도 할 수 없었을 때 가끔 얻어지던 것이었다. 그러나 기간이 한정된 저작권 보호 제도가 만들어져 출판업자의 사업상 이익 구조에 변화가 생기면서, 낭만주의적인 스타 시스템은 더욱 아찔한 피라미드 형태를 띠게 되었다. 도리아는 신간으로 번 돈을 유명 작가들에게 주는 것이 자신의 일이라고 말했다. 당연한 결과지만, 그래서 그는 유명 작가들을 끌어모으고 그들을 더욱 유명하게 만들어야 했다. (p.132-133)

 

 최근 몇십 년간 미국은 엄격한 지식 재산 보호법을 채택하고 시행하도록 다른 나라들을 강력하게 설득해왔다. 그러나 미국만큼 불법 복제의 유용성을 잘 아는 나라도 드물다. 수십 년 동안 미국 자체가 불법 복제의 나라였으니 말이다. 다른 국가의 사상, 책, 기계, 장치 등을 끌어다 자기네 경제와 문화의 기반으로 삼았다.
 미국만 그런 건 아니다. 18세기에 에든버러가 계몽주의 시대의 강력한 세력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도널드슨 소송 건이 보여주듯 서적출판업자 조합의 영향력이 잉글랜드와 웨일스를 넘어 스코틀랜드에까지 미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더블린도, 아일랜드가 런던의 관할 구역에 속하지 않았던 덕분에 중요한 문화 중심지로 부상할 수 있었다. 19세기에 벨기에는 무허가로 프랑스 책을 마구 찍어내며 인쇄 산업을 구축했고, 지금까지도 유럽에서는 그래픽 노블과 아동 서적을 위한 컬러 인쇄에서 벨기에를 따라갈 나라가 많지 않다. 일본은 1868년 이후의 메이지 시대에 유럽 서적을 대량으로 수입, 번역, 출판하고 서양의 공산품을 모방하여 현대 국가로 탈바꿈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한 뒤에는 그 관행을 재개했다. 지식 재산권법을 무시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이득을 보여주는 사례는 이들뿐만이 아니다. 미국의 역사 자체가 그 증거라 할 수 있다. (p.151-152)

 

 미국 법에 따르면 ‘독창적인’ 작품만이 저작권 보호를 받을 수 있었다. “문학계를 확장하고 그 영토를 늘려”주는 천재들의 권리를 보장해주어야 한다는 18세기 에드워드 영의 주장이 떠오르는 대목이다. 이 원칙의 곤란한 점은, 저작권법 범위 밖으로 밀려날 만큼 독창적이지 않은 작품을 결정하는 기준이 명확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1845년에 법정은 그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보스턴의 교사였던 벤저민 굴드가, 1772년에 에든버러에서 처음 출간된 권위 있는 도서 『애덤의 라틴어 문법(Adam’s Latin Grammar)』을 수정하고 개선했다. 그 후 C. D. 클리블랜드도 자신이 직접 그 책을 편집해서 출간했는데(지금도 주문 맞춤형으로 구할 수 있다), 기본적으로 굴드의 책과 다르지 않았다. 굴드는 저작권 침해로 클리블랜드를 고소했다. 클리블랜드는 굴드의 문법책이 독창적인 저서가 아니므로 애초에 저작권 보호 대상이 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재판을 맡은 스토리 판사는 피고의 주장이 저작권법 자체에 위협이 된다고 판단했다.

여러 다양한 출처에서 얻은 자료로 집필된 글의 저작권을 우리 법이 인정해주지 않는다면, 현재 출간되어 있는 과학서와 전문 서적 중에 저작권의 보호를 받을 수 있는 책은 거의 없을 것이다.

 실제로 이는 지식 재산권을 찬성하는 모든 주장의 허점이다. 과학서와 전문 서적뿐만 아니라 희곡, 소설, 시, 에세이 등의 장르도 기존 작품의 글감을 일부 또는 전부 끌어다 쓴다. 소송은 항소를 거쳐 대법원까지 올라갔고, 또다시 스토리가 판사석에 앉았다. 그는 이번에도 클리블랜드의 변론에 대해 반대 의사를 밝혔다.

남의 생각에서 도움과 가르침을 받지 않고 오롯이 자신만의 생각으로 글을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 어떤 책이 새롭고 독창적인 요소가 없다는 이유로 저작권의 대상이 될 수 없다면, 현대의 저작권은 어떤 근거도 갖지 못할 것이다.

 전적으로 옳은 말이다! 에드워드 영이 의도했던 의미의 ‘독창적인’ 작품만 보호받을 수 있다면, 저작권은 속임수 아니면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 수많은 문화권이 오래전부터 인정해왔듯, 새로운 작품은 헌 누더기에서 만들어지는 법이니 말이다. 하지만 이토록 합리적인 의견으로 스토리 판사가 도출해낸 결론은, 미국 저작권법의 근거가 약하니 재고해보자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정반대였다. 판결문에서 그는 이전에 출판된 적 없는 인쇄물이라면 창조적 저작물로서 저작권 보호를 받을 수 있다고 못박았다.
 당시 재판에 연루된 당사자들은 잘 몰랐겠지만, 이 결과는 아주 중대한 전환점이 되었다. ‘독창성의 문턱’이 낮아지면서, 저작권은 공익에 기여하는 제한된 범위의 작품을 보호하기 위한 수단이라기보다는 서적 출판업을 규제하기 위한 수단이 되어버렸다. (p.153-155)

 

 전 세계 번역서에 관한 유네스코의 데이터베이스에 따르면, 기록을 시작한 1950년대 이후로 50개의 가장 인기 있는 ‘기점 언어’로부터 221만 2,618권이 번역되었다. 이중 무려 75퍼센트(정확히 166만 473권)가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에서 번역되었다. 영어를 원작으로 한 책은 126만 6,110권으로 5배 차의 선두를 차지했다. 영국에서는 2001년부터 2020년까지 2만 6,576권의 책이 프랑스어, 독일어, 스페인어, 러시아어, 중국어에서 영어로 번역된 데 반해, 22만 4,991권이 영어에서 겨우 다섯 언어로 번역되었다. 인세가 어느 방향으로 흘러가는지 쉽게 알 수 있다! 미국과 영국은 자국 책의 번역 계약으로 벌어들이는 돈이 타국의 원서에 지불하는 인세보다 최소 8배 많지만, 거의 모든 다른 나라들은 저작권 계약에서 적자를 보고 있다. 예를 들어 중국은 현재 서양 국가의 저작권을 많이 사들이고 있으며 프랑스 출판사들의 최고 고객이지만, 해마다 프랑스어나 영어로 번역되는 중국 서적은 소수에 불과하다.
 요약하자면 이렇다. 지식 재산을 창조하는 국가가 그 소비자인 국가로부터 큰 액수의 임대료를 받고 있다. 번역서는 세계 무역의 한 귀퉁이를 차지하는 조그맣고 속물적인 영역일지 몰라도, 전 세계 책의 불균형적인 흐름은 저작권이 국가들 사이의 불평등한 관계를 부추기고 있음을 증명해준다. (p.179-180)

 

 1837년 러시아의 위대한 시인 알렉산드르 푸시킨은 소문으로 실추된 아내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한 프랑스 장교에게 결투를 신청했다가 서른일곱의 나이에 사망했다. 1828년의 저작권법에 따라 그의 아내 나탈리아―그외엔 아무도 없었다―가 메모, 초고, 미필 원고 등 푸시킨이 남긴 저작에 대한 출판 허가권을 얻었다. 그녀는 1862년까지 지금의 예술계에는 익숙한, 큐레이터이자 고인의 유지 계승자라는 지위를 누릴 터였다.
 푸시킨의 저작권이 만료되기 5년 전, 나탈리아는 황제인 알렉산드르 2세에게 당시 20대 후반이던 아들들을 위해 저작권 보호 기간을 연장해달라고 탄원했다. 교육과 사법을 담당하는 각료들의 조언을 받아들인 황제는 이 특정한 요구를 받아들이는 동시에 모든 문학 작품의 사후 보호 기간을 50년으로 연장해 또 한 번 신기록을 세웠다(이 기록은 금세 스페인에게 따라잡혔다). 그래서 푸시킨의 모든 저작은 시인 탄생 100주년에 조금 못 미친 1887년에야 공유 재산으로 풀렸다. 그전 50년 동안은 나탈리아(재혼해서 란스카야라는 이름을 얻었다)나 그녀의 아들들에게 허가받은 작품만 출판되었다. 그들은 상당량의 자료를 비공개로 숨겨두었다.
 러시아의 가장 귀중한 시들에 대한 나탈리아의 권리가 소멸한 해에, 푸시킨의 작품들은 163개 이상의 서로 다른 판본으로 출간되어 150만 부 가까이 팔렸다. 문맹률이 여전히 높은 나라에서 실로 대단한 판매 기록이었다. 이는 저작권 보호가 얼마나 효과적으로 시장을 억압할 수 있는지 증명해준다. 비평가들은 나탈리아 란스카야가 푸시킨을 두 번 죽였다며 비난했다. 우선 푸시킨이 결투를 신청할 빌미를 제공했고, 그다음엔 저작권을 연장하여 50년 동안이나 수많은 가난한 독자들이 그의 작품을 읽지 못하게 막았다는 것이다. (p.195-197)

 

 수많은 러시아인이 나탈리아의 행동에 대해 품은 혐오감은 예술적 독창성의 본질에 대한 더 뿌리 깊고 전통적인 믿음에 근거한다. 푸시킨은 러시아 시의 창시자가 아니었다. 물론 훌륭한 시를 남겼지만 러시아의 시와 산문을 발전시킨 수많은 선조들이 없었다면 그런 영광을 누리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대위의 딸』의 진정한 주인은 누구인가? 그 창작자를 배출한 국가였다. “지식은 신의 선물”이라는 중세의 격언이 있듯, 러시아의 문학 문화를 국유 재산으로 보고 작가가 사망하면 공공재로 취급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았다. 사실 미국은 1976년까지 그런 입장을 취했다. 그전에 미국의 저작권은 등록 후 최대 56년간 유지되었기 때문에, 많은 저작물의 경우 사후 권리가 존재하지 않거나 아니면 비교적 짧은 기간만 지속되었다. 그래서 공유 재산으로 전환되는 저작물의 양이 1976년 후보다 훨씬 더 방대했다.
 수십 년 후, 장수한 작가 레프 톨스토이 역시 자기 작품의 주인은 자신이나 자연 상속인이 아니라 ‘인민’이라고 믿었다. 말년에는 문학 유산의 사후 소유권을 ‘사회, ‘인류’ 또는 ‘만인’에게 넘긴다는 내용의 유서를 작성하려고 했다. 실행에 옮기기는 쉽지 않았다. 변호사들이 조언했듯, 러시아에서는 유서에 지명된 사람만이 유산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인민’에게는 법적 정체성이 없으므로 그런 표현이 담긴 유증은 법정에서 무효화될 터였다. 톨스토이는 1880년 이후에 집필한 작품들을 사이가 틀어진 지 오래된 아내 소피아에게 남기지 않기로 결정하고, 대신 그의 사회적·종교적 신념을 성실하게 따라준 막내딸 알렉산드라에게 모든 문학 유산을 상속했다. 알렉산드라는 재단을 설립하여 톨스토이 사후에 발생하는 인세를 빈곤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임무를 맡았다. 계획대로 되지는 않았다. 소피아가 소송을 걸었고, 제1차 세계대전의 혼란 속에 판결은 계속 밀렸다. 그러다 1917년에 러시아 혁명이 일어났고, 볼셰비키는 저작권을 비롯한 대부분의 사유 재산을 재빨리 폐지했다. 소피아는 1919년에 사망했다.
 빅토르 위고 역시 자기 작품의 주인은 자연 상속인이 아니라 전 세계라고 굳건히 믿고, 자신의 문학 유산을 ‘국가에’ 남겼다. 그 결과, 호화본 전집 간행을 맡은 국가 기관인 국립 인쇄소(Imprimerie Nationale)가 저작권을 얻었고, 2차 허가가 떨어진 개별 작품들은 일반 출판사에 넘어갔다. (p.198-199)

 

 고아 저작물은 출판사와 학자에게 다른 딜레마를 안겨준다. 최대 100년이라는 보호 기간 내에 계승이 끊기는 경우가 허다하다. 얼굴도 모르는 고조부의 작품을 자기가 책임져야 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저작권자도 있고, 구식의 고집불통 조상이 마음에 안 들어 사용 허가 요청을 무시해버리는 경우도 있다. 어느 쪽이든 20세기에 창작된 수많은 문학예술 작품이 이런 상황에 놓여있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 않다. 잊혔던 1930년대의 소설을 재발견한다 해도 저작권자를 찾아 허락을 받아야 다시 간행할 수 있다. 흔히 그러듯 저작권자를 찾지 못하면 출판사는 돈 많고 소송 걸기 좋아하는 방계 혈족에게 고소당할 가능성을 무시하기 어렵다.
 창작 예술업계의 모든 관계자가 해결책을 바라고 있지만 대형 콘텐츠 기업들의 몇몇 주장은 황당하기 그지없다. 더 강력한 저작권을 위해 로비 활동을 벌이고 있는 자들은 저작권이 풀린 작품마저 고아라고 가끔 주장하기도 한다. 미국 영화 협회(Motion Picture Association)의 전 회장인 잭 발렌티는, 저작권 없는 작품은 그 생사를 책임질 사람이 없으므로 “모두에게 착취당하다가 이전의 미덕을 잃은 채 더럽혀지고 훼손된다”라는 기이한 성명을 발표했다. 셰익스피어, 디킨스, 위고는 새까맣게 잊은 모양이다. (p.201-202)

 

 1903년의 서커스 포스터 소송에서 올리버 웬들 홈스 판사의 판결은 여러모로 획기적이었다. 독창성의 문턱을 거의 바닥으로 낮추고, 포스터를 도안한 (익명의) 화가가 아니라 포스터를 찍어낸 석판 인쇄소에 저작권을 부여했다. 다른 상황에서는 일급 자가당착으로 간주될 법한 일종의 정신분열증적인 판결이었다. 홈스 판사는 문제의 그림 세 점이 “자연에 대한 개인의 사적인 반응”이며 따라서 “고유성”을 지니므로 저작권 대상으로 적절하다고 단언했다. 이렇듯 작품의 개성을 이유로 인정해준 저작권을, 바로 다음 문장에서는 개성 없는 쿠리어 석판 인쇄소의 손에 쥐어주었다.
 저작권법에는 이런 모호함이 난무한다. 현재 미국에서 주요 법으로 시행 중인 1976년 저작권법은 “프로그래머의 독창적인 아이디어가 표현된” 컴퓨터 프로그램의 저작권을 인정하지만, 프로그래머가 아니라 그를 고용한 회사의 저작권 소유를 허락한다.
 창작물에 대한 권리를 고용주가 갖는 것은 현대 미디어의 불가피한 숙명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라디오 드라마, 영화, 음반, 컴퓨터 프로그램 제작에 수많은 사람이 참여하는데, 창작 팀과 기술 팀 전원(장편 영화의 경우 수백 명에 달한다)에게 권리를 분배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는 모든 나라가 내건 저작권법의 취지에 위배되는 편의주의적 주장이다. 잉글랜드와 미국은 “‘저작자와 발명자’에게 저작물과 발견에 대한 독점적 권리”를 주는 것이 저작권법의 목적이라고 선언했다. 그러나 이제 미국 헌법과 저작권법을 정당화하는 명분은 법 조항이 아닌 암묵적 목표인 것 같다. “고용인과 하청업자의 저술과 발견에 대한 독점적 권리를 거의 무기한으로 기업에 보장함으로써 금광 창출을 장려하자”는 목표 말이다.
 어쨌든 법인의 저작권을 지지하는 편의주의적 주장은 의뭉스럽기 그지없다. 스프레드시트 소프트웨어를 사용하면 최소한 소수점 이하 다섯 자리까지 수익을 쉽게 나눌 수 있다. 그러므로 창작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인세 소득을 분배해서는 안 될 구조적 이유는 전혀 없다. 사실 많은 분야에서, 저작자의 인세를 수금하고 라이선스를 관리하는 단체들(미국의 ASCAP, 영국의 ALCS, 프랑스의 SACEM 등등)이 늘 그런 일을 하고 있다.
 창작물의 소유권이 실질적인 창작자로부터 점차 떨어져 나가면서, 오늘날의 저작권 제도는 그 명분을 전혀 살리지 못하고 있다. 입법자들과 변호사들은 18세기의 용어를 본래 의미와 상관없이 다른 용도로 사용함으로써 한 입으로 두말하기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 (p.220-221)

 

 법에서 말하는 ‘유사성’의 경계는 ‘필수 장면(scene a faire)’이라는 사법 개념에 의해 정해졌다. 18세기 프랑스 연극 비평에서 미국의 법적 소송으로 도입된 ‘필수 장면’은 희곡·소설·영화에서 창작이 아닌 장르적 제약 및 기대의 결과로 간주되는 플롯 요소나 상황을 일컫는다. 예를 들어 어떤 영화의 자동차 추격전이 자동차 충돌로 끝난다면, 비슷한 장면이 들어간 예전 영화의 권리자는 권리 침해를 주장할 수 없다. 장르상 관습적이고 예상 가능한 전개이기 때문이다. 어떤 야망 있는 여성이 배우자가 살인을 저지르자 강박적으로 손을 씻는 장면 역시 셰익스피어의 『맥베스』 이후 누구나 써먹을 수 있는 문학적 자원이 되었다. 이 논리를 극단으로 끌고 가면, 필수 장면 원칙에 따라 거의 모든 소설·희곡·영화의 플롯은 공유 재산이 된다. 진실로 새로운 서사적 전개란 극히 드물기 때문이다. (p.243-244)

 

 인격권을 엄격하게 보호하는 프랑스 같은 나라의 작가들은 동일성 유지권을 내세워 자기 작품의 번역을 감독하고 제목 선택에까지 참견할 권한을 얻게 되었다. 밀란 쿤데라는 자기 작품의 영어 번역 작업에 지나치게 간섭하여 악명을 날렸다. 심지어 구두법을 체코식으로 수정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동일성 유지권이 대대로 상속되다 보면 문학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 선조의 작품을 자기 멋대로 내둘러 전 세계 새로운 독자들과의 만남을 방해할 수도 있다.
 동일성 유지권의 상속 가능성 때문에, 저작권이 만료된 유럽 고전은 두 부류로 나뉜다. 작가의 혈통이 끊긴 작품과 작가의 손주와 증손, 그 후대까지 살아 있는 작품. 우리는 발자크의 소설을 마음껏 이용할 수 있지만 『레 미제라블』은 아직 건드릴 수 없다. 유럽에서는 우연적인 유전자 추첨 결과에 따라 공유 재산이냐 아니냐의 여부가 결정된다. (p.265)

 

 1976년의 미국 저작권법은 저작물의 2차적 사용을 보호했지만, 지식 재산권을 둘러싼 높은 벽에 약간의 틈을 남겨두었다. 제107조는 ‘공정 이용(fair use)’ 부문에 속하는 2차적 사용에 대해 저작권 책임을 면제해주었다.
 제107조의 주된 문제는, ‘공정하다’라는 단어의 의미가 모호하다는 것이다. ‘올바르다’, ‘정당하다’, ‘온당하다’, ‘용인된다’ 등 못지않게 모호한 개념들과 겹친다. 그래서 크리켓 심판은 페어플레이라고 판단했지만 선수들에게는 전혀 그렇게 느껴지지 않을 수도 있다. 이런 이유로 1976년 저작권법은 ‘공정’의 정확한 의미를 밝히지 않는다. 법률 문서는 대개 첫머리에 용어를 정의하는데, 공정 이용 조항은 모든 법적 용어를 설명하면서도 단 한 단어 ‘공정’만 쏙 빼놓았다. 대신 학교에서 학생에게 단어의 의미를 설명하는 데 사용하는 방식을 차용한다. 즉 개괄적인 용어의 의미를 추론할 수 있도록 용례를 쭉 열거하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 교실에서 사용하기엔 바람직하지 않은 방향을 취한다.

비평, 논평, 뉴스 보도, 교수(수업용으로 다수 복제하는 경우를 포함), 학문, 연구 등과 같은 목적으로 저작권 있는 저작물을 복제물이나 음반으로 재현하는 경우를 포함한 공정 이용은 저작권 침해가 아니다.

 “저작권 있는 저작물(의)… 공정 이용은 저작권 침해가 아니다”라고 말하는 건 동의어 반복이다. 그리고 저작권 침해에서 제외될 수 있는 이용 사례들(비평, 논평, 뉴스 보도, 교수, 학문, 연구)을 제시하는데, 이 특정 분야들의 저작권 보호물이라면 무조건 재사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공정한 이용만 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러면서도 ‘공정 이용’의 정확한 의미를 알려주지는 않는다. 어떤 이용이 공정한가 아닌가를 두고 법정마다 다른 판결이 나오고, 학회나 개인이 저작권 자료를 인용할 때 지나치게 조심하는 주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p.283-284)

 

 베네치아는 ‘천재적이고 영리한 사람들’의 명예를 보호했다. 오늘날의 천재적이고 영리한 사람들은 저작권을 묵살할 방법을 찾았다. 웹상의 가장 인기 많고 수익성 높은 애플리케이션에서 저작권은 정리해고당하고 말았다.
 이런 대대적인 규모의 저작권 회피는 법의 의미를 무색케 한다. 기업들은 저작권을 조롱하다시피 하다가도 수익을 높일 기회만 생기면 열심히 저작권법을 써먹는다. (p.299)

 

 미국에서는 1998년부터, 다른 나라들에서는 훨씬 오래전부터, 작가와 예술가는 사후 70년까지 자신의 저작물에 대한 권리를 갖는다. 저작물의 무단 사용은 엄격히 제한되기 때문에 인용 같은 2차적 사용에 대해서는 허락을 구하는 편이 현명하다. 문제는 지난 세기에 발표된 책·영화·희곡·노래의 90퍼센트가 절판되었거나 더 이상 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출판사가 폐업했거나, 작가에게 재산을 물려받은 배우자가 재혼해서 아이들이 뿔뿔이 흩어졌거나, 작가가 유언이나 자식 없이 사망했을 경우 그렇다. 사후 보호 기간, 대다수의 창작물이 공표 후 몇 년 안에 상업적 가치가 사라지는 현실, 상속법, 복잡한 가계도, 인간의 유동성 등 온갖 일상적 요인 때문에 대부분의 현대 문학은 전재·인용·선집 수록·축약·개작을 허락받기가 어렵고, 음악과 미술, 상당량의 영화도 사정이 다르지 않다. 이런 회색 지대에서 출판사, 작가, 화가, 가수, 영화 제작자는 몸을 사릴 수밖에 없다. 저작권 침해로 무거운 처벌을 받을 수도 있으니 말이다. 찾을 수 없는 저작권자가 나타날 확률은 희박하지만, 그들은 엄연히 존재한다. 게다가 모든 가능한 권한을 승인받기란 여간 부담스러운 일이 아니고 그 결과도 확신할 수 없다. 작가나 화가는 20세기의 무형 저작물을 섣불리 다른 용도로 사용하거나 재활용하거나 길게 인용하지 못한다. 그래서 현대 문화의 대부분이 고아원에 갇혀 있고, 매해 1월 1일마다 아주 조금씩 그곳에서 탈출할 것이다. 대부분의 나라에서 1920년대부터 문화 상품 제작에 가속도가 붙기 시작한 사실을 감안하면, 해가 갈수록 저작권의 감옥에서 탈출하는 저작물보다 갇히는 저작물이 더 많아질 것이다.
 이는 20세기의 마지막 25년 동안 가해진 규제들의 예기치 않은 결과다. 200년 전의 고아들은 구빈원의 높은 벽 뒤에 갇혔지만, 오늘날의 ‘고아 저작물’은 디킨스의 올리버 트위스트보다 확실히 더 격리되어 있다. (p.309-310)

 

 저작권이 패션업계로까지 확장되면 과연 누가 이득을 볼까? 개인 디자이너? 아니면 패션업계 대기업? 저작권의 역사와 업무상 저작물 원칙을 감안하건대, 아마도 후자일 것이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패션업계의 성장과 창의성은 복제에 의존한다”며, 업계가 이토록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저작권의 부재 덕분이라고 주장했다. 이와 똑같은 ‘불법 복제의 역설’이 18세기 스코틀랜드의 출판업계와 19세기 미국 경제의 성장 단계에도 발생한 바 있다. 저작권은 대기업에 지나치게 몰리는 경향이 있고, 대기업은 그 저작권을 이용해 혁신을 장려하기보다는 방해한다. (p.315)

 

 최근 노벨상을 수상한 작가의 소설 한 편이 내 책장에 꽂혀 있다. 지난 10~20년간 출판된 책이 대개 그렇듯, 속표지의 왼쪽 페이지에는 아주 작은 활자로 이렇게 적혀 있다.

출판사와 저자의 서면 동의 없이는 이 책의 어떤 부분도 복제할 수 없습니다.

 이 책을 읽고 있는 여러분은 지금쯤이면 이런 공지가 거짓임을 알 것이다. 미국, 영국, 유럽연합에서는 어떤 책이든 그 일부를 비평과 학술 저작물에 인용하여 인쇄하거나 인터넷 웹사이트를 통해 배포할 수 있고, 수업용으로 복사할 수 있으며, 학생들이나 도서관 전용 웹사이트에 이미지를 올려 보관할 수도 있다. 혼성 모방작이나 패러디에 소설 일부를 그대로 옮길 수도 있고, 아이들이나 친구에게 읽어주거나, 옥상에서 큰 소리로 외쳐 소설 내용을 복제할 수도 있다. 저작권이 있는 작품을 공짜로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은 이외에도 많다. (p.327-328)

 

 저작권 범위가 책에서 판화로, 조각·사진·음악·음반·건축·소프트웨어로 꾸준히 늘어나고 초상권까지 생기다 보니, 거의 모든 매체에서 혹은 영화의 야외 촬영 장면에서 권리 문제가 다반사로 발생한다. 영화 제작사는 그림, 포스터, 사람, 건물, 텔레비전 화면에 언뜻 비치는 다른 영화 장면들, 배경에 흐르는 음악, 배우가 라디오를 켜거나 실제 혹은 가짜 가게에 들어갈 때 흐르는 음악 등에 걸린 저작권이나 초상권을 말끔히 해결해야 한다. 조각물이 등장하는 장면(설령 공공장소라 하더라도), 미술관이나 아파트나 도시 거리 등지에서 촬영한 로케이션 장면도 마찬가지다. 권리 침해 가능성을 열거하자면 끝도 없다.
 전 세계를 돌아다니다 최근에 사망한 어느 모험가의 전기 영화를 만든다고 가정해보자. 30년 전에 파리를 방문한 그가 루브르 박물관의 유리 피라미드 앞에서 환하게 미소 지으며 전 아내를 한 팔로 안고 있는 스냅 사진 한 장이 발견된다. 배경에서는 금발의 멋진 여성이 광장을 거닐고 있다. 저작권 침해 소송에 걸릴 위험 없이 이 사진을 영화에 삽입하려면, 피라미드에 대한 복제권을 가진 건축가 I. M. 페이(Pei) 유산 관리단, 고인이 된 전 아내의 인격권 소유자(직접 찾아내야 한다), 사진을 찍은 길거리 사진가(찾을 수 있다면) 그리고 오스트레일리아의 테니스 스타 혹은 덴마크의 수상이 되어 있을지도 모를 뒷배경의 정체 모를 여인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 이 여정을 방해하는 건 돈이 아니다. 겨우 2초 내보낼 이미지에 걸려 있을지도 모를 모든 권리에 대해 서면 허락을 받아내는 건 여간 번거로운 일이 아닐뿐더러 성공 가능성도 그리 크지 않다. 결국 이 스냅 사진은 영화 스틸이나 책 삽화로 쓰기 어렵다. 지난 50년간 폴라로이드, 코닥, 라이카, 아이폰으로 찍힌 수십억 장의 이미지 가운데 대다수가 그렇다. 소설가 게리 슈테인가르트는 중앙아시아에 있는 가상의 석유 부호국에 ‘압수르디스탄(Absurdistan, 부조리가 지배하는 나라)’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젠 어디에나 그 이름이 통할 듯하다. (p.338-339)

 

 일반인이 감당해야 하는 저작권 비용은 교과서, 음악 다운로드, 영화 티켓 가격에 추가로 붙는 금액뿐만이 아니다. 저작권의 과세 효과로, 텔레비전 시청과 라디오 청취 비용도 늘어난다. 방송사들이 라이선스 요금을 지불해야 하기 때문이다. 지금은 아주 많은 것들―자가 조립식 소파의 디자인이나 시리얼 포장지에 그려진 만화까지―이 저작권 보호를 받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지출하는 비용 중 얼마가 소매상과 도매상을 거슬러 올라가 최종 소유자(특허법과 저작권법이 만들어낸 독점권으로 거의 영구적인 임대료를 받고 있는)에게로 흘러들고 있는지 계산하기란 불가능할 것이다. 어떤 식으로 계산하든 상당한 액수임에는 틀림없다. 계산을 시도한 몇 안 되는 경제학자 중 한 명은 2018년에 1인당 연간 6,000달러라는 수치를 내놓았다.
 현대 사회의 빈부 격차를 논할 때 저작권은 사람들이 입에 올리기를 주저하는 껄끄러운 주제가 된다. 그것은 21세기의 불평등을 부추기는 주된 동력이다.
 전 세계 지식 재산 라이선스 계약금의 4분의 1 이상이, 세계 인구의 4.2퍼센트가 사는 미국으로 흘러들고 있다. 그중 10분의 1이 미국 밖으로 빠져 나가니, 미국이 다른 나라에서 거둬들이는 순익은 연간 800억 달러에 이른다. 이와 대조적으로 아프가니스탄은 2020년에 지식 재산으로 225달러를 벌었다.
 요즘 이런 소득을 창출하는 콘텐츠는 대부분 포장비도 운송비도 들지 않고, 각 품목의 한계비용은 0에 가깝다. 인터넷이 요긴했겠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1976년에서 1998년 사이에 수정되고 확대된 저작권법이 무형 재화의 배포를 세계 최대의 현금 지급기로 바꿔놓았다는 것이다. (p.358-359)

 

 법인의 저작권은 얼마나 존속되어야 할까? 정답은 없다. 대부분의 저작권(법인의 저작권조차)은 몇 년만 지나면 한 푼의 수익도 올리지 못하기 때문에, 보호 기간이 사후 10년으로 짧다 해도 많은 사업체들은 지금과 같은 모양새로 굴러갈 것이다. 하지만 훨씬 더 많은 공공재가 풀리고, 고아 저작물 문제는 거의 사라질 것이다. 특효약을 개발한 제약회사도 고작 20년밖에 특허권을 갖지 못하는데, 왜 도널드 덕은 거의 100년이나 디즈니에 묶여 있어야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합리적 답은 없는 듯하다. 역사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을 뿐이다. 대중이 즐기는 영화와 노래가 얼마나 오래 사유 재산으로 남아 있어야 할까? 지금이야말로 이해 당사자들, 특히 일반 대중이 참여하는 토론을 개시해야 한다. (p.3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