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t Read Code

 

책 대 담배 / 조지 오웰 / 민음사

 

 책에 매겨진 가격과 책을 읽어서 창출되는 가치와의 상관관계를 설정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책’이란 총칭에는 소설, 시, 교과서, 참고서, 사회학 논문, 그리고 여러 다양한 종류의 글들이 포함돼 있다. 그리고 책의 가격은 책의 길이로 정해지지 않는다. 중고책만을 주로 구입하는 사람들은 이를 아주 잘 알고 있다. 전체 길이가 500행 되는 시 한 편이 10실링일 수 있고, 한번 구입하면 이십 년 이상을 볼 수 있는 사전 한 권이 6펜스일 수 있다. 여러 번 읽게 되는 책이 있고, 한 사람의 정신 일부를 구성하는 책이 있고, 한 사람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 놓는 책이 있고, 전체를 꼼꼼히 다 읽지 않고 겉핥기식으로 대충 읽는 책이 있고, 한자리에서 다 읽고 나서 일주일 정도 지나면 다 잊어버리는 책도 있다. 그렇지만 어떤 책을 읽든 돈이 든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다. 독서를 그저 영화를 보는 것과 같은 여가 활동으로 본다면 독서에 드는 비용을 얼추 계산해 볼 수 있다. 오로지 소설책과 그 외 가벼운 문학 작품만을, 그리고 직접 돈을 주고 사서 읽는다고 하면―책값으로 8실링, 읽는 데 드는 시간 네 시간으로 계산하면―한 시간당 2실링의 비용이 든다. 이는 영화관의 최고급 자리에서 영화 한 편을 볼 때 드는 돈과 맞먹는 비용이다. 내용이 좀 더 심각한 책을 돈 주고 사서 읽는다고 해도 드는 비용은 거의 비슷하다. 그런 유의 책은 좀 더 비싸지만 더 오랜 시간 읽을 수 있다. 게다가 가벼운 책이든, 심각한 책이든 일단 구입을 한 책은 읽고 난 다음에도 소장하고 있다가 최초 구입 가격 삼분의 일 정도를 받고 되팔 수 있다. 중고책만 구입해서 읽으면 돈이 훨씬 더 적게 든다. 시간당 6펜스로 계산하는 것이 온당할 것이다. 한편 책을 사지 않고 대여 문고에서 빌려 읽으면 시간당 반 페니가 든다. 게다가 공립 도서관에서 빌려 보면 공짜나 다름없다.
 이 정도 얘기했으면 독서가 돈이 가장 적게 드는 여가 활동의 하나라는 주장은 충분할 것이다. 물론 라디오를 듣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돈이 적게 든다. 그렇다면 실제로 영국 사람들은 독서에 어느 정도의 비용을 지불하고 있는 것일까? 분명히 어딘가에 정확한 수치는 존재하고 있겠지만 아직까지는 그 수치를 찾지 못했다. 그러나 전쟁 이전에는 이 나라에서 재판본과 교과서를 포함해 약 1만 5000권의 책이 매년 출간되었다는 사실을 나는 분명히 알고 있다.

책 한 권을 출판하면 1만 부가 나간다고 가정할 때―교과서까지 고려해도 이는 높은 수치이지만―보통 사람 한 명이 한 해에 약 세 권을 직간접적으로 구입했다는 계산이 나온다. 이 세 권 모두를 사는 데 드는 돈은 1파운드나 1파운드가 조금 안 되는 정도다.

 물론 이런 결과는 추정치에 근거하고 있다. 따라서 정확하게 계산을 한 사람이 있으면 내 계산 결과를 바로잡아 주었으면 좋겠다. 혹 내 계산 결과가 얼추 정확하다면 문맹률이 거의 0퍼센트에 달하고 보통 사람들이 인도의 농민들이 평생 소유할 수 있는 돈보다 더 많은 돈을 흡연에 쓰는 나라에 대한 자랑스러운 기록이라고 할 수는 없다. 과거나 지금처럼 우리나라 사람들의 책 소비가 계속해서 저조하다면, 책을 많이 읽지 않는 현상이 적어도 독서가 개 경주나 영화를 보러 가는 것, 그리고 펍에 가서 한잔하는 것보다 재미가 없어서이지 돈이 훨씬 많이 들어서―구입해서 읽든 빌려서 읽든―가 아니라는 점을 인정할 수밖에 없지 않는가. (p.11-13)

 

 모든 책들이 서평이 필요하다고 당연시되는 한, 이 문제는 고칠 수 없다. 상당한 양을 쓰다 보면 책 대부분을 과찬할 수밖에 없게 된다. 책과 일종의 직업적인 관계를 맺기 전까지 대부분의 책이 보잘것없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평론이 객관적으로 정직하게 써진다면 열에 아홉은 “이 책은 하잘것없다.”일 것이고 평론가 당사자의 반응 역시 “나는 이 책에 아무 흥미가 없고 돈 때문이 아니면 이 책의 평론을 쓰지 않을 것이다.”일 것이다. 하지만 대중은 돈을 그런 유의 책을 사는 데 쓰지 않을 것이다. 그들이 그럴 일을 왜 해야 하겠는가? 그들은 어떤 책을 읽기 전에 읽어 볼 필요가 있는 일종의 안내 글을, 나아가서는 일종의 평가를 원한다. 그러나 가치라는 말이 언급되자마자 평가의 기준은 무너진다. 만일 누군가가―거의 모든 평론가는 이런 식의 말을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씩은 한다.―『리어 왕』은 훌륭한 희곡 작품이고 『정의로운 네 사람』은 훌륭한 스릴러라고 말할 때 도대체 이 훌륭한이라는 단어에 무슨 의미가 있다는 말인가?
 내 생각에 최선은 절대 다수의 책들은 그냥 무시하고 중요하게 보이는 극소수의 책에 관해서 아주 긴 평론―최소 1000단어가 넘는―을 쓰는 것이다. 곧 나올 신간에 관해서는 한두 줄 정도로 짧게 평론하는 것도 유용할 수 있지만 흔히 600단어 분량으로 쓰는 중간 길이 서평은 진정으로 평론가가 쓰고 싶어 한다고 해도 쓸데없는 일이 될 수밖에 없다. 정상이라면 평론가는 그런 글을 쓰고 싶지 않을 것이다. 매주 자질구레한 평론만 쓰다 보면 이 글 첫머리에 나왔던 가운 차림의 서서히 망가지고 있는 사람이 될 공산이 크다. 하지만 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는 자신들이 내려다볼 수 있는 누군가는 존재하기 마련이다. 두 업에 다 종사해 본 경험으로 말하건대 서평가가 영화 평론가보다 낫다. 영화 평론가는 집에서 일을 할 수가 없다. 게다가 한 번이나 두 번, 극도로 예외적인 경우가 아닌 한 오전 11시에는 시사회에 참석해서 싸구려 셰리 한잔에 자신의 명예를 팔아야 한다. (p.18-19)

 

 전체주의 국가들이 조직적으로 하는 거짓말은 군대에서 사용하는 기만 작전과 동일한 속성을 가진 임시방편이 아니라는 주장이 가끔 제기된다. 그것은 전체주의에 필수적인 것으로 강제 수용소와 비밀경찰이 필요 없게 되더라도 여전히 존재하게 된다. 지식인 공산당원들 사이에서 은밀히 떠도는 전설이 있는데, 이는 러시아 정부가 지금은 거짓 선동이나 재판 조작을 할 수밖에 없지만, 러시아 정부가 비밀리에 참사실을 기록하고 있으며 일정 시간이 지나면 그것들을 공개하리라는 것이다. 이런 일은 절대 없으리라고 나는 확신한다. 그 같은 행위에 내재하고 있는 사고방식은 과거는 바뀔 수 없으며 역사를 정확히 아는 일을 응당 값진 것으로 신봉하는 자유주의 역사가의 사고방식이기 때문이다. 전체주의의 관점에서 볼 때 역사는 학습되는 것이 아니라 창조되는 무엇이다. 전체주의 국가는 사실상 신정 국가며 그 나라를 지배하는 특권 계급은 자신들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자신들을 무오류의 존재로 여겨지게 해야 한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무오류인 사람은 있을 수 없으므로 이런저런 실수가 결코 행해진 적 없거나 이런저런 상상의 승리가 실제 있었던 점을 보여 주기 위해서는 과거 사건을 재구성할 필요가 자주 생긴다. 그러고 나서는 정책이 크게 바뀔 때마다 이에 상응하여 강령 역시 바뀌고 역사적으로 중요한 인물들을 재발견할 필요가 생긴다. 이런 종류의 일은 세상 어디에서나 벌어지지만 어느 특정 시점에 오로지 한 가지 생각만 허용되는 사회에서는 노골적인 왜곡으로 이어질 공산이 크다. 실제로 전체주의는 계속해서 과거를 바꿀 것을, 그리하여 종국에는 객관적 진실의 존재마저 믿지 말 것을 요구한다. 이 나라에서 전체주의를 옹호하는 자들에게는 절대적 진리는 도달할 수 없는 것이기에 큰 거짓말이 작은 거짓말보다 나쁠 게 없다고 주장하는 경향이 있다. 모든 역사 기록물에는 편견이 개입되고 부정확하다거나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 눈에 실상처럼 보이는 것들이 단지 허상에 불과하다는 점을 현대 물리학이 입증했으니 감각으로 수집된 증거를 믿는다는 것은 저속한 속물주의일 뿐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전체주의를 영속화하는 것에 성공한 사회는 분열적 사고체계를 만들어 낼 것이다. 이런 분열적 사고체계 내에서 상식의 법칙은 일상생활과 특정 정밀과학 분야에서는 유효할 수 있어도 정치인, 역사가, 사회학자에게는 무시당할 수 있다. 과학 교과서 왜곡을 언어도단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역사적 사실 왜곡은 아무 잘못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미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전체주의가 지성인들에게 거대한 압력을 행사하는 곳은 문학과 정치가 교차하는 바로 이 지점이다. 이 시점에서 정밀과학은 과거같이 위협이 되지 않는다. 이 점은 어느 나라에서든 작가들보다 과학자들이 정부에 줄서기 용이하다는 사실로 어느 정도 설명이 된다. (p.26-28)

 

 물론 인쇄물은 계속해서 사용될 테지만 엄혹한 전체주의·사회주의 사회에서는 어떤 종류의 읽을거리가 살아남을지 헤아려 보면 흥미롭다. 추정컨대 신문은 텔레비전의 기술이 정점에 도달하기 전까지는 살아남겠지만 신문 말고 산업국가의 대중들이 어떤 읽을거리를 필요로 할지에는 여전히 의문이 든다. 어떤 경우든 그들은 읽을거리에는 여타의 여가 활동에 쓴 돈 이상을 쓸 생각은 없다. 아마도 장편 소설과 단편 소설의 자리는 영화와 라디오 제작물로 완전히 대체되겠지만 인간의 개입을 최소한으로 축소하는 일종의 대량 생산 공정으로 생산되는 저급의 감상 소설류는 살아남을지도 모르겠다.
 기계로 책을 쓴다는 것은 아마도 인간의 창작 영역을 뛰어넘는 일이 아닐 수 있다. 그러나 영화와 라디오, 광고와 선동, 그리고 싸구려 저널리즘에서는 이미 일종의 기계화 공정이 돌아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가령 일부는 기계 작업으로, 일부는 독창성을 억제하는 예술가들의 집단 작업으로 생산되는 디즈니 영화는 본질적으로 공장식 공정을 따르는 것이다. 라디오 극은 보통 주제와 방식이 미리 정해져 있는데 돈 받고 고용된 글쟁이들이 이에 맞춰 쓴다. 게다가 그들이 쓰는 것은 그저 초고 수준의 원재료들이다. 제작자들이나 검열관들은 이것을 자기들 식으로 재단해 원하는 것으로 만들어 낸다. 정부 여러 부처에서 발주한 수많은 책과 팸플릿 또한 마찬가지다. 제작 과정이 훨씬 기계적인 것은 싸구려 잡지의 단편 소설, 연재물 그리고 시다. 《라이터스》 같은 신문에는 한 번에 몇 푼만 내면 이미 구성된 플롯을 판다고 선전하는 문예 학교 광고가 넘쳐난다. 어느 광고에는 전체 플롯은 물론이고 각 장의 시작 첫 문장과 마지막 문장도 제공한다고 돼 있다. 또 다른 광고에는 작가들이 플롯을 짤 때 사용할 수 있는 일종의 수학 공식 같은 것을 제공한다고 돼 있고, 등장인물과 상황을 적어 놓은 카드 묶음을 제공한다고 돼 있는데 그 카드를 뒤섞어서 배열하면 참신한 이야기가 자동적으로 만들어진다고 선전하는 광고도 있다. 전체주의 사회가 문학을 필요로 할 때 문학이 생산되는 방식은 아마도 이런 방식일 것이다. 저술 과정에서 상상―아마도 의식 역시―은 제거될 것이다. 책은 관료들이 그려 놓은 큰 그림 안에서 기획된 후, 수많은 사람들의 손을 거쳐 완성될 것이다. 그렇게 완성된 책은 조립 라인 최종 단계에서 비로소 완성되는 포드 자동차처럼 더 이상 어느 한 개인의 창작물은 아닐 것이다. 두말할 것도 없이 그런 식으로 제작된 것들은 모두 다 쓰레기다. 그러나 쓰레기가 아닌 것들은 무엇이든 국가의 체계를 위험에 빠뜨릴 것이다. 과거의 문학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억압되거나 최소한 정교하게 다시 써져야 한다. (p.35-37)

 

 전체주의 국가는 과학자들을 필요로 하기에 당장은 그들에 관대하다. 나치 정권 아래의 독일에서도 과학자들은 유대인이 아닌 한 비교적 후한 대접을 받았고 독일의 과학계는 히틀러에게 저항하지 않았다. 역사상 현재 같은 단계에서 최악의 독재자조차 일정 부분 자유로운 사고 습관이 남아 있어서, 일정 부분 전쟁을 준비할 필요가 있어서, 어쩔 수 없이 물리적 현실을 고려할 수밖에 없다. 물리적 현실을 완전히 무시할 수 없는 한, 예를 들어 비행기 설계도를 그릴 때 2 더하기 2가 4가 될 수밖에 없는 한, 과학자에게는 고유의 역할이 있기에 어느 정도는 자유가 허용될 수 있다. 과학자는 전체주의 국가가 공고히 확립된 후에야 깨우칠 것이다. 그동안 과학의 순수성을 지켜 내고 싶다면 그가 할 일은 문학 동료와 일종의 연대를 발전시켜 작가들이 침묵을 강요당하거나 자살로 내몰릴 때, 신문이 조직적으로 허위 보도를 일삼을 때 무관심해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물리과학, 음악, 회화와 건축이 어떻게 되든 간에―지금껏 내가 보여 주려고 했듯―사상의 자유가 파괴되면 문학은 운명적으로 소멸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확실하다. 전체주의 체제를 유지하는 나라에서만 그런 것은 아니다. 전체주의의 관점을 받아들이는 작가, 탄압과 현실 왜곡의 구실을 찾는 작가, 그럼으로써 작가 자신을 파괴하는 작가에게도 동일한 운명이다. 일단 들어서면 빠져나올 길은 없다. 개인주의상아탑에 대한 신랄한 비판도, “진정한 개성은 단지 공동체와의 동화를 통해서만 성취된다.”라는 식의 엄숙하고 상투적인 문구도 매수된 마음은 망가진 마음이라는 사실을 넘어설 수는 없다. 특정 시점에 자발성을 갖게 되지 않으면 문학 창작은 불가능하다. 그리고 언어 자체가 지금의 언어와 완전히 다른 무엇이 된다면 모르긴 해도 우리는 문학 창작을 지적 정직성과 분리하는 법을 배우게 될 것이다. 지금 당장 우리가 아는 유일한 것은 상상력은 마치 야생 짐승들처럼 갇힌 상태에서는 결코 번식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한 사실을 부인하는―그리고 지금 소련에 대한 칭송에는 그러한 부인이 포함돼 있거나 내재돼 있다.―작가와 언론인은 실은 자신의 파멸을 요구하는 셈이다. (p.38-39)

 

 대여 문고에서 일하다 보면 사람들의 가식적이 아닌 진정한 취향을 알게 된다. 그리고 한 가지 놀라운 점은 영국의 고전 소설가들이 대중들의 사랑을 완전히 잃었다는 것이다. 디킨스, 새커리, 제인 오스틴, 트롤럽 등을 대여 문고 도서 목록에 넣는 일은 전적으로 쓸데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이런 작품들을 대여해 갈 사람이 한 명도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19세기 소설을 힐끗 쳐다보고는 “흠, 엄청 옛날 거네!”라며 외면한다. 하지만 디킨스 작품을 파는 일은 셰익스피어 작품을 파는 것만큼 언제나 무척 쉽다. 디킨스는 사람들이 항상 읽을 의향이 있는 작가의 한 명인지라, 헌책방에서는 성경과 마찬가지로 꽤나 유명하다. 사람들은 마치 모세가 갈대 바구니에서 발견됐고 하느님의 을 봤다는 것을 들어서 알듯 빌 사이크스가 강도였고 미코버 씨가 대머리라는 사실도 들어서 알 뿐이다. 또 하나 주목할 것은 미국 책의 인기가 점점 떨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또 하나 놀라운 사실은―출판사들은 이삼 년마다 이런 문제로 마음을 졸인다.―단편 소설이 인기가 없다는 것이다. 읽을 책 한 권 추천해 달라고 대여 문고 담당자에게 부탁하는 사람들의 입에서 나오는 첫 마디는 우리 문고의 한 독일 고객이 즐겨 하는 표현처럼 한결같이 “단편 소설은 말고요.”나 “짧은 이야기는 빼 주세요.”다. 이유를 물어보면 종종 단편 소설을 읽을 때마다 새로운 등장인물들에 익숙해져야 하는 고역을 치르기 싫기 때문이란 대답이 돌아온다. 그들은 첫 장 이후부터는 많이 생각할 필요가 없는 장편 소설에 몰입하기를 더 좋아한다. 그럼에도 나는 독자들보다는 작가들이 문제라고 생각한다. 오늘날 영국과 미국의 단편 소설 대부분에는 생기와 가치가 철저히 결여돼 있다. 그 정도가 대부분의 장편 소설들보다 훨씬 더하다. 그렇지만 제대로 된 단편 소설은 충분히 인기가 많다. D. H. 로렌스의 단편 소설은 그의 장편 소설만큼 인기가 많다. (p.51-53)

 

 내가 책방 일을 평생 하고 싶어 하지 않는 진짜 이유는 책방에 들어와 있으면 책에 대한 애정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때때로 서적상들은 책에 관해서 거짓말을 해야 하는데 그러다 보면 책이 싫어진다. 더 안 좋은 것은 서적상들은 책에 내려앉은 먼지를 끊임없이 털어내야 하고 책의 위치를 이리저리 계속 바꿔 줘야 한다는 것이다. 진정으로 책을 사랑했던 때가 있긴 했다. 최소 오십 년은 된 책의 모습과 냄새와 감촉을 사랑하던 때가 있었다는 말이다. 시골의 경매장에서 단돈 1실링을 주고 책 한 무더기를 살 때만큼 즐거웠던 적이 없다. 그런 식으로 예상치 못하게 구입한 책에는 독특한 운치가 있다. 잘 알려지지 않은 18세기 시인들, 고지명 사전들, 지금은 거의 잊힌 소설 희귀본들, 1860년대 여성지 제본판들이 그러하다. 무심히 책을 읽을 때―예를 들어 목욕할 때나 너무 피곤해서 오히려 잠이 안 오는 늦은 밤이나 점심 먹기 전 다른 것을 하기 애매한 자투리 몇 분의 시간처럼―에는 《걸스 오운 페이퍼》 과월호만 한 것이 없었다. 하지만 책방에서 일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나는 책을 더 이상 사지 않게 됐다. 한 번에 5000 혹은 1만 권 정도의 책이 쌓여 있는 장면을 보다 보니 책이 별 볼 일 없어졌고 지긋지긋하기까지 했다. 물론 요즘에도 이따금씩 책을 사긴 하지만 빌려 볼 수 없을 때뿐이다. 그럼에도 쓰레기 같은 책은 결코 사지 않는다. 오래된 책에서 나는 달콤한 냄새에 나는 더 이상 끌리지 않는다. 오래된 책을 보면 편집증 환자 같은 손님들과 죽은 금파리들이 마음속에서 너무나도 금방 연상되기 때문이다. (p.53-54)

 

 지난 십 년 동안 내가 가장 하고 싶었던 일은 정치적 글쓰기를 예술로 만드는 것이었다. 내 출발점은 언제나 당파성, 즉 불의를 감지하는 데서부터다. 책상에 앉아서 책을 쓸 때 나는 “예술 작품을 만들어 내고 말 테야.”라고 말하지 않는다. 폭로하고 싶은 거짓과 관심을 둬야 할 사실이 존재하기 때문에 나는 책을 쓴다. 그렇기 때문에 내 최우선 관심사는 독자들이 내 생각을 듣게 하느냐다. 그러나 미적 경험이 없다면 책을 쓰는 일은 물론이고 장문의 잡지 기사를 쓰는 작업조차 불가능할 것이다. 내 작품을 꼼꼼히 읽는 사람이라면 노골적인 선전 글을 쓸 때조차 전업 정치인이 보면 관련성이 부족한 데가 상당히 많다는 것을 알 것이다. 나는 어린 시절에 형성한 세계관을 완전히 포기할 수도 없고, 그러고 싶지도 않다. 내 몸과 정신이 온전한 나는 계속해서 산문 형식에 애착을 가질 것이며 지구를 사랑할 테고 구체적인 대상과 쓸모없는 정보 쪼가리들에서 기쁨을 느낄 것이다. 나의 이런 면을 억누르려는 수고는 부질없다. 이는 내 안에 깊이 배어 있는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과 당대가 우리 모두에게 강요하는 공공적, 비개인적 행위를 화해시키는 작업이다.
 물론 쉬운 일이 아니다. 이 일은 구성의 문제와 언어의 문제를 야기하는 동시에 진실성이라는 새로운 문제를 야기한다. 야기되는 여러 어려움 중에서 투박한 유형의 어려움 하나를 예로 들어 보자. 내가 스페인 내전에 관해서 쓴 책인 『카탈로니아 찬가』가 노골적인 정치 저작인 것은 분명하지만 이 책의 근저에는 초연한 심정으로 형식에 신경을 쓴 저자의 노력이 자리한다. 나는 이 책에서 내 문학적 본능을 거스르지 않으면서 전체적인 진실을 말하려고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다른 무엇보다 이 책의 한 챕터에는 프랑코와 공모했다는 혐의를 받던 트로츠키파를 변호하는 신문기사 인용문과 같은 글이 여럿 실려 있다. 일이 년 뒤면 분명히 일반 독자들의 관심에서 멀어질 이런 챕터가 이 책을 망친 것은 분명하다. 평소 내가 존경하는 비평가 한 분이 훈계의 말씀을 주셨다. “어째서 그런 걸 다 집어 놓았어요? 훌륭한 책이 될 수 있는 것을 한갓 보도물로 만들어 버렸잖아요.” 옳은 지적이었다. 나는 그렇게밖에 쓸 수 없었다. 나는 우연히 영국에서 극소수만 알 수 있는 내용, 즉 아무 잘못도 없는 사람들이 억울한 혐의를 받는다는 사실을 우연히 접했다. 내가 그 사실에 분개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결코 그 책을 쓸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p.63-64)

 

 『걸리버 여행기』의 앞부분은 아마도 지금까지 출간된 모든 작품 중에서 인간 사회를 가장 통렬하게 공격한다고 할 수 있다. 모든 단어는 오늘날 상황과 딱 들어맞고 곳곳에서 우리 시대의 정치적 공포를 무척이나 상세하게 예언하고 있다. 하지만 스위프트는 자신이 흠모하는 종족을 묘사하는 대목에서는 실패한다. 이 작품 마지막 부분에는 역겨운 야후족과 대비되는 고상한 휘넘족이 나오는데, 이 종족은 인간이 지닌 결점을 갖고 있지 않는 지성적인 말 종족이다. 하지만 이 말들은 고상한 품성과 기대에 어긋나지 않는 상식을 소유하고 있음에도 무척이나 음울한 존재들이다. 다른 유토피아의 주민들과 마찬가지로 그들의 주된 관심사는 난리법석을 피하는 것이다. 말들은 다툼, 무질서나 모든 종류의 혼돈이나 위험은 물론이고 육체적 사랑과 같은 열정도 없이 별일 없는 듯 아주 차분하게 합리적 삶을 살아간다. 말들은 우생학 원리에 따라 짝을 고르며, 과도한 애정을 멀리하고 살다가 때가 되면 어느 정도 기뻐하며 죽음을 맞는 듯 보인다. 이 작품 초반부에서 스위프트는 인간의 어리석음과 무뢰한 같은 삶이 인간들을 어디로 끌고 가는지를 보여 준다. 그러나 어리석음과 무뢰한 같은 삶을 없애고 나니 살 만한 가치가 거의 없는 미적지근한 존재만 남는다. 확실하게 다른 세상에서나 맛볼 행복을 그리려는 시도는 성공한 적이 없었다. 천국을 그리려는 시도도 유토피아를 그리려는 시도처럼 크게 실패했다. 반면 지옥은 문학에서 꽤 괜찮은 자리를 차지하며 종종 아주 세밀하고 설득력 있게 묘사되어 왔다. (p.69-70)

 

 수많은 부흥 목사들, 수많은 예수회 사제들(제임스 조이스의 『젊은 예술가의 초상』에 나오는 그 엄청난 설교를 보라.)은 지옥을 그림처럼 생생하게 묘사하여 신도들을 경악시켰다. 하지만 천국을 묘사할 때면 곧바로 황홀더없는 기쁨과 같은 단어에만 의존할 뿐, 그 단어가 어떤 내용을 담는지 설명하려는 노력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이런 주제로 쓴 글 중 가장 중요한 글이 테르툴리아누스가 쓴 그 유명한 글일 텐데, 이 글에서 테르툴리아누스는 천국에서 누릴 수 있는 것 중 주된 기쁨은 저주받은 사람들이 고문을 받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여러 이교도들의 낙원도 별반 다르지 않다. 사람들은 낙원이 늘 황혼녘 같다는 느낌을 갖고 있다. 신주를 마시고 신찬을 먹는 신들이 살고, 요정들과 D. H. 로렌스가 “불멸의 매춘부”라 불렀던 여신들이 있는 올림포스는 기독교의 천국보다 좀 더 편안한 곳일 수 있지만 그렇더라도 그곳에 오랫동안 머물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이슬람교 낙원에는 남자 한 명이 일흔일곱 명 미녀와 같이 사는데, 이 일흔일곱 미녀들은 관심을 끌기 위해 저마다 아우성을 칠지 모르고 이것은 그야말로 악몽이다. 심령주의자들이 “모든 것은 빛나고 아름답다.”라고 끊임없이 호언하지만, 그들도 역시 생각을 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그곳을 매력적일 뿐만 아니라 견딜 만한 곳이라고 여기게 할 만한 다음 세계의 활동을 한 가지도 묘사하지 못한다. (p.71-72)

 

 인류가 노고로부터든 고통으로부터든 무엇인가로부터 벗어나는 형식 말고는 행복을 상상할 수 없음을 아는 사회주의자들은 이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인다. 디킨스는 가난으로 찌든 가족이 구운 거위고기를 게걸스럽게 먹는 모습을 묘사해서 그들이 행복하게 보이도록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완벽한 세상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자연스레 생겨나는 흥겨움은 없는 듯하고, 대개는 역겹기까지 하다. 하지만 우리는 디킨스가 그리는 그런 세상을 목표로 하는 것은 분명 아니다. 더군다나 그가 상상할 수 있는 세상을 목표로 하지도 않는다. 사회주의자들의 목표는 결국 친절한 노신사들이 칠면조 고기를 나눠 주기 때문에 모든 것들이 제대로 돌아가는 그런 사회가 아니다. 자선이 필요 없는 사회가 아니라면 도대체 우리가 목표로 하는 사회는 어떤 사회란 말인가? 우리는 배당금을 받는 스크루지도 다리가 결핵에 걸린 타이니 팀도 생각을 할 수 없는 그런 세상을 원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고통도 없고 노력도 필요 없는 유토피아 같은 세상을 목표로 하고 있다는 말인가?
 나는 《트리뷴》의 편집자들이 내 주장을 인정하지 않을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사회주의의 진짜 목표는 행복이 아니라고 말하고자 한다. 이제껏 행복은 부산물이었고 우리가 아는 한 늘 그럴지 모른다. 사회주의의 진짜 목표는 인류애다. 대체로 이런 말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지 않아 왔고 설령 그렇더라도 큰 소리로 오르내리지는 않지만, 많은 사람들은 이를 중요한 문제라고 느끼고 있다. 사람들이 지난한 정치 투쟁으로 삶을 소진하거나 내전에서 죽임을 당하고, 아니면 게슈타포의 비밀 감옥에서 고문당하는 것은 중앙난방 장치, 냉방 시설, 기다란 형광등 조명을 갖춘 낙원을 세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류가 서로 사기를 치거나 죽이는 세상이 아니라 서로 사랑하는 세상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첫 단계로 그런 세상을 원한다. 그다음 단계는 어떤 것일지 확신을 할 수 없다. 그리고 그곳을 세세하게 예측하려 하다 보면 오히려 문제에 혼선만 가중될 뿐이다. (p.73-75)

 

 세상은 존재할 수 있었겠다 어렴풋이 인식하고는 있지만 정확하게 정의할 수 없는 뭔가를 원하고 있다. 올 크리스마스에 수천 명이 러시아의 눈밭에서 피 흘리며 죽어 갈 것이고, 차가운 얼음물에 빠져 죽고, 태평양 습지대 섬에서 수류탄을 터뜨려 서로를 갈기갈기 찢어 죽일 것이다. 집 잃은 아이들은 먹을 것을 찾아 폐허가 된 독일 도시를 헤집고 다닐 것이다.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은 훌륭한 목표다. 하지만 평화로운 세상이 어떤 모습이리라고 구체적으로 말하는 것은 별개 문제이며 그런 시도를 하다 보면 결국 이전에 제럴드 허드가 그토록 열정적으로 제시한 공포로 이어지게 된다.
 유토피아를 창조한 사람들 거의 모두는 행복을 그저 치통에서 벗어나는 것으로 생각하는 치통 환자와 유사하다. 그들은 일시적이기 때문에 소중했던 뭔가를 영속화해서 완벽한 사회를 만들고 싶어 했다. 하지만 그것은 틀렸다. 인류에게는 추구해야 할 노선이 있고, 거대한 전략은 이미 나와 있지만 전략의 세세한 사항을 예언하는 것은 우리가 관여할 바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 더 현명할 것이다. 완벽한 상태를 상상하려고 애쓰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의 내면이 텅 비어 있음을 드러낼 뿐이다. 스위프트 같은 위대한 작가도 마찬가지였다. 스위프트는 주교나 정치인을 아주 깔끔하게 꾸짖을 수는 있었지만 초인을 창조하려 했을 땐, 비록 스위프트에게는 이럴 의도가 없었겠지만, 역겨운 야후족이 계몽된 휘넘족보다 발전 가능성이 훨씬 더 크다는 인상을 주었을 뿐이다. (p.75-76)

 

 좌파 정부들은 거의 예외 없이 지지자들을 실망시킨다. 자신들이 공약했던 번영을 이루게 됐을 때에도 불편한 이행 기간이 늘 있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 이행 기간에 대해서 사전에 아무도 말해 주지 않았다. 바로 이 순간 우리는 절망적인 경제 위기 속에서 결과적으로 과거에 펼쳤던 선동에 맞서 싸우는 정부를 보고 있다. 지금 우리가 처한 위기는 지진처럼 갑자기 닥친 재앙이 아니다. 전쟁 때문에 생긴 것도 아니고 그저 전쟁 때문에 앞당겨진 것일 뿐이다. 수십 년 전부터 이런 종류의 위기가 닥칠 것이라고 예견됐다. 일정 부분 해외 투자로 벌어들이는 이윤, 식민지라는 확실한 시장과 거기서 들여오는 값싼 원자재에 의존해 온 우리나라의 국민 소득은 19세기부터 극도로 위태로워졌다. 조만간 안 좋은 일이 터져 수출과 수입의 균형을 맞춰야만 할 수밖에 없게 될 것이 확실하다. 그렇게 되면 노동자 계급을 포함한 전 영국인의 생활수준은 적어도 일시적으로 떨어질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도 좌익 정당들은 반제국주의를 큰 소리로 외칠 때조차 이런 사실을 명확하게 알리지 않았다. 좌익 정당들은 오늘날 영국 노동자들이 아시아와 아프리카를 수탈해서 어느 정도 혜택을 보고 있다는 사실을 가끔 인정했으나, 수탈을 중단해도 우리 경제가 어떻게든 계속 번창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려고 했다. 크게 보면 노동자들은 자신들이 착취당한다는 말에 사회주의에 끌리게 된 것은 사실이지만 세계적 관점에서 보면 영국 노동자들은 착취당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착취하는 사람들이라는 잔인한 진실이 존재한다. 아무리 봐도 노동 계급의 생활수준이 향상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현 수준도 유지할 수 없는 지점에 다다랐다. 부를 쥐어짠다고 해도 대다수 사람들은 소비를 줄이든지 생산을 늘려야 한다. 그게 아니라면 내가 지금 우리가 처한 난관을 과장하는 것인가? 그럴지 모른다. 오히려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이라면 좋겠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요점은 좌파 이데올로기를 신봉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이 문제가 진지하게 논의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임금을 낮추고 노동 시간을 늘리는 것이 본질적으로 반사회주의 대책일 수밖에 없으므로 경제 상황이 어떻든지 그런 대책은 처음부터 제외될 수밖에 없다. 그런 대책이 불가피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단순히 우리 모두가 공포에 떠는 딱지를 붙이는 위험을 감수하는 일이다. 문제는 회피한 채 기존의 국민 소득을 재분배해서 모든 것들을 바로잡을 수 있는 척하는 것이 훨씬 안전하다.
 정통성을 받아들이는 것은 언제나 해결되지 않은 모순을 물려받는 일이다. 가령 예민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산업주의와 산업주의의 산물에 반감을 가지면서도 가난을 극복하고 노동 계급을 해방시키기 위해서는 산업화가 덜 필요하다기보다는 오히려 점점 더 많이 필요하다는 점을 인식하고 있다는 사실을 예로 들어 보자. 아니면 어떤 일들은 절대적으로 필요하지만 다소 강제하지 않으면 결코 수행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예로 들 수도 있다. 강력한 군사력 없이는 적극적인 외교 정책을 펼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도 예가 될 수 있다. 제시할 수 있는 예들은 이것들 말고도 수없이 많다. 경우가 어떻든 결론은 완벽하게 뻔하지만 그 결론은 오직 공식 이데올로기에 개인적으로는 충성하지 않는 사람만이 이끌어 낼 수 있는 그런 식의 결론도 존재하기 마련이다. 정상적인 반응은 문제는 해결하지 않은 채 마음 한구석으로 밀어넣고 모순되는 구호만 반복하는 것이다. 굳이 서평과 잡지를 찾아보지 않아도 이런 사고가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는 쉽게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정치와 거리를 두는 것이” 모든 작가들의 의무라고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는 것일까? 결코 그렇지 않다. 내가 이미 앞에서 말했듯 오늘과 같은 시대를 사는 사람들 중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정치와 거리를 둘 수도 없고 두어서도 안 된다. 나는 정치적 충성과 문학적 충성을 구분할 때 사용하는 지금의 방식보다 더 선명한 방식을 사용해야 한다고, 그리고 마음에는 안 들지만 반드시 해야 하는 필수적인 것들을 기꺼이 한다고 해서 대체적으로 그런 일에 따르는 신념까지 받아들여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인정하자고 제안할 뿐이다. 작가가 정치에 참여할 때는 한 명의 시민, 한 명의 인간으로서 참여해야지 한 명의 작가로서 참여해서는 안 된다. 예민한 작가라는 이유로 보통 정치의 지저분한 현실을 회피할 권리가 작가에게 없다고 생각한다. 다른 모든 이들처럼 작가도 바람이 새는 강연장에서 강연을 하고, 길바닥에 분필로 무엇인가를 쓰고, 유권자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선거 운동도 해 보고, 전단지를 나눠 줘 보기도 하고, 심지어 필요하다면 내전에라도 참전해 싸울 각오도 돼 있어야 한다. 자신이 속한 당을 위해서는 무슨 일을 하든 상관없지만, 자기 당을 위해서 글을 쓰는 것만큼은 절대 해서 안 된다. 자신의 글이 자신이 속한 당과는 별개라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 하고자 한다면 당의 공식 이데올로기를 철저히 거부하면서도 당에 협력할 수 있어야 한다. 일련의 사고 과정이 자신의 생각을 혹시 이단으로 이끌지 모를까 하는 걱정으로 포기해서도 안 되며,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비정통 사고를 감지하더라도, 결국 그렇게 되겠지만 개의치 말아야 한다. 이십 년 전에는 공산주의에 동조하지 않는 작가로 의심받는 것이 작가에게는 나쁜 신호였듯, 요즘에는 반동적인 성향이 있는 작가로 의심받지 않는다는 것이 작가에게는 나쁜 신호일 수 있다. (p.84-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