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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정하는 힘 / 아즈마 히로키 / 메디치미디어

 

 정정하는 힘은 현재 상황을 유지하면서 바꾸어가는 힘이다. 따라서 최근에 회자되는 “목소리를 내는 것”과 비슷한 면이 있다. 하지만 다른 점도 있다.
 소수파라는 것은 지금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가치관에 위화감을 느낀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아니다”라고 목소리를 낸다. 이에 대해 다수파는 당연히 “왜 그런 말을 하는 거냐?” 하고 응한다. 이는 피할 수 없는 반응이다.
 즉, 목소리를 내면 필연적으로 반발을 부른다. 오히려 반발이 없다면 의미가 없다. 그런데 최근에는 “목소리를 내면 주변에서 이상한 시선을 받는다. 그것 자체가 압력이니 ‘이상하다’는 말을 하지 말아달라”는 요구를 하게 됐다.
 이래서는 논의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목소리를 낸다는 것은 규칙에 대해 이의를 제기한다는 것이다. 이 이의 제기가 성공해 세상이 바뀔지 여부는 결과가 나왔을 때만 알 수 있다.
 이의 제기란 그런 의미에서 도박과 같다. 그렇기 때문에 가치가 있다. 처음부터 “목소리를 내도 환영받는 환경을 만들어달라”는 것은 어불성설인 것이다.

 

 정정하는 힘은 이와 같은 ‘사전 승인’은 요구하지 않는다. 단지 “이 규칙은 문제가 있으니 바꾸어야 한다. 아니, 원래는 이렇게 해석할 수 있었던 것이다”라고 행동을 보이고 그 후에 사후 승인을 요구한다. 이것이 정정하는 행위다. 따라서 이는 어떤 의미에서는 규칙 위반이다.
 하지만 이 위반이 매우 중요하다. 위반함으로써 규칙의 약점, 불완전한 부분이 가시화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규칙을 위반하기 때문에 “규칙을 위반했다”는 비난을 받게 된다. 모두가 찬동하지도 않을 것이며 문제 제기가 실패하면 범죄로 취급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를 통해 규칙이 바뀔지도 모른다. 정정하는 힘은 이런 위험을 감수하고 행동하는 것이기도 하다.
 달리 말해, 정정하는 힘은 “나는 이 길을 간다”, “나는 이 규칙을 이렇게 해석한다”라고 결단하는 힘이기도 하다. 그리고 비판을 받아들이는 힘이기도 하다.

 

 최근의 자니즈 소동을 보면서도 이런 일그러짐을 느꼈다. 2023년 3월 해외 방송국이 자니즈 사무소 창업자인 자니 기타가와에 대한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방영했다. 자니 기타가와에 의한 사무소 소속 탤런트의 성폭행을 고발하는 내용으로, 그 후 일본 국내에서도 조금씩 분위기가 바뀌어 자니즈 사무소에 대한 비판이 주류가 되었다.
 매우 좋은 일이긴 하나, 이렇게 되자 역으로 자니즈를 비판하지 않는 관계자를 조리돌림하는 풍조가 나타났다. 과연 옳은 일일까? 자니 기타가와의 행위는 범죄이며 사무소의 대처도 비판받아 마땅하다. 다른 한편, 자니의 행동은 연예계에 널리 알려진 사실이었다고 한다. 즉, 예전에는 침묵하는 것이 규칙이었고 모두 이에 따르고 있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지금은 규탄하는 것이 새 규칙이 되었고, 모두 이에 따라 규탄하기 시작했다. 공기의 지배라는 점에서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
 다양성의 긍정은 알력의 긍정이기도 하다. 다양한 사람들이 목소리를 내면 당연히 알력도 생긴다. 그 과정에서 정정하는 힘도 나오는 것이다.
 모두가 목소리를 내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그것이 누구에게나 박수를 받고 환영받는다면 오히려 정정하는 힘이 기능하지 않는다. 정말 중요한 것은 자기와 다른 의견을 가진 인간을 바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지 못한 채로 ‘방치’하는 일종의 거리감이다. 이런 점에서 일본 사회는 마치 초등학교 교실처럼 유치한 공간이 되고 말았다.

 

 일본 사회는 외국인 노동자가 없으면 돌아가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도쿄에 살다보면 외국인이 담당하는 영역이 내가 학생이었던 30년 전과는 전혀 달라졌음을 실감할 수 있다. 아무리 오래 일본에 살면서 세금을 납부해도 국적이 외국이라는 이유로 주민자치 참여를 막는 것이 과연 정당할까? 이것이 ‘일본식’이라는 주장이 얼마나 통할까?
 외국인을 받아들이면 일본 고유의 문화가 사라진다는 반발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애초에 ‘일본이란 무엇인가’라는 감각 자체가 시대에 따라 바뀐다. 이를 전제로 삼아 보수파도 바뀌어야 한다.

 

 학자는 전문 분야에 대해서만 말해라. 뮤지션은 음악만 해라. 아이돌은 아이돌만 해라. 그러나 현실의 인간은 순수함 속에서만 살아갈 수 없다. 무엇보다 나이를 먹다보면 누구든 변해간다. ‘정정’해간다. 순수함을 포기하고, 변화를 긍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정정하는 힘은 ‘나이 듦의 힘’이기도 하다. 또 ‘재출발하는 힘’이기도 하다. 나이 든 주인공이 이런저런 좌절을 겪으면서 점점 변해가는 스토리. 변하지만 여전히 같은 인간이다. 완전히 리셋해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이런 작품이 더 많이 나와도 되지 않을까? 이는 고령화 사회에 걸맞게 변한다는 측면에서도 중요하다.

 

 폴리티컬 코렉트니스는 ‘과거에는 올바르다고 여겼던 것이 지금은 올바르지 않으니 정정하자’는 반성 행위다.
 지금의 이 올바름도 5년 후에는 올바르지 않은 것이 될 수 있고, 반대로 지금 올바르지 않은 것이 장래에는 올바른 것이 될지도 모른다. 이처럼 거리를 두고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다. 현재의 가치관을 절대시해 과거의 발언이나 복잡한 맥락 속에서 이루어졌던 행위를 재단하는 행위는 폴리티컬 코렉트니스 정신에 반한다.
 누군가가 내거는 올바름에 편승해 답에 도달했다고 안심하며 특정 대상을 비난하는 것은 오히려 본래의 올바름과는 정반대되는 태도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오야마다 소동은 씁쓸한 뒷맛이 남았다. 소동을 거치며 ‘정정’해야 했던 것은 일본 사회 집단 따돌림에 대한 둔감함, 음악 저널리즘의 폐쇄성 등 여러 가지가 있었을 터였다. 하지만 오야마다를 내쫓은 것으로 모두 만족하고 잊어버렸다. 지금은 누구도 화제로 삼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보면 정정하는 힘은 ‘기억하는 힘’이라고 할 수 있다. 정정하려면 과거를 제대로 기억해야 한다. 정의를 내세워 큰 소동을 일으킨 다음 잊어버리는 것은 ‘정정’과는 반대되는 행위다.

 

 인간은 약한 동물이다. 감정에 휩쓸려 판단을 그르친다. 증거를 여럿 제시해 이성적으로 토론하면 ‘올바른’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는 건 환상에 불과하다. 인간은 믿고 싶은 것을 믿는다. 동영상과 SNS의 시대에는 이 경향이 더욱 거세질 것이다. 포스트트루스(post-truth, 탈진실)와 음모론이 퍼지는 것은 이 때문이다.
 따라서 정정하는 힘이 필요하다. 인간은 약하다. 오류를 범하는 존재다. 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 오류를 정정하는 것뿐이다. “저 사람은 외모만 그럴듯했어. 속았어.” 하고 반성하는 것이 중요한 것으로, 이때 제대로 정정하지 못하면 점점 포스트트루스의 늪에 빠지게 된다.

 

 인터넷은 맥락을 지운다. 시간도 지운다. 모든 정보를 무미건조하게 제시하는 것은 인터넷의 장점이기도 하다.
 하지만 앞서 말한 잉여 부분이 없으면 독해가 단순화될 수밖에 없다. ‘이 사람은 이렇게 표현하고 있지만 사실은 다른 얘기를 하고 싶었던 것이고, 지금 이 시대에 맞게 해석하면 이런 얘기가 아닐까’ 하는 재독해를 할 수 있는 여지가 사라지고 만다. 지금은 이런 폐해가 늘어난 시대다.
 정정하는 힘이란 ‘재독해하는 힘’이다. 메시지와 콘텐츠의 외부를 상상하는 힘이다. 그런 힘이 약해져 과거의 풍요로운 문화적 유산을 활용하지 못하게 되었다.

 

 예를 들어 라이브 공연에 간다고 치자. 그 행위는 티켓을 사고, 들뜬 친구와 연락을 주고받고, 당일 행사장까지 이동하고, 춤추고, 맘껏 외치고, 물품판매소에서 굿즈를 사고, 끝난 후에 함께 밥을 먹으며 감상을 얘기하는 등의 여러 체험을 동반한다.
 많은 사람은 이를 아울러 하나의 체험으로 여긴다. 이 모든 것이 즐겁기 때문에 ‘음악을 듣고 싶다’고 생각한다. 순수하게 소리만을 듣는 것으로는 뭔가 부족함을 느낀다. 영화나 스포츠도 마찬가지다. 엔터테인먼트란 그런 체험의 종합적 연출로 존재했을 때 비로소 가치를 갖는다.
 그런데 지금 사회는 콘텐츠 산업이 번성한 것처럼 보이는 한편, 문화 소비의 구조에는 의외로 둔감해진 것 같다.
 현대사회에서는 구독 문화가 발달해 예전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다양한 음악을 손쉽게 즐길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정말 ‘음악을 듣고 싶다’는 욕구를 충족시키는 방식일까? 현재의 플랫폼은 이와 같은 요청에 “알겠습니다. 월정액 1,000엔으로 1억 곡을 들을 수 있게 해드리죠”라는 식의 응답을 한다. 과연 이것이 사람들이 원하던 것일까?
 데이터는 넘쳐나지만 의외로 종합적인 체험은 빈곤하다. 콘텐츠의 양은 넘쳐나지만, 실제로는 사람들의 욕구불만이 쌓여가는 시대인지도 모른다.
 책도 마찬가지다. 나도 지금은 인터넷 서점과 전자책에 의존하고 있지만 젊을 때는 열심히 오프라인 서점과 도서관에 들렀었다. 책장 사이를 거닐며 처음 보는 책과 만나는 것이 무엇보다 즐거웠다.
 독서라는 행위도 실은 이와 같은 체험과 하나였던 것이 아닐까? 독서는 결코 고독한 행위가 아니다. 책이라는 콘텐츠의 데이터를 제공하는 것과, ‘책을 읽는다’는 체험을 제공하는 것은 다른 행위다.

 

 미하일 바흐찐이라는 러시아 문학이론가가 있다. 《도스토옙스키 시학의 제문제》라는 유명한 책을 쓴 사람인데, 그 책에서 대화가 중요하다고 논했다.
 단, 이는 일반적인 대화가 아니다. 바흐찐이 말하는 대화의 정의는 ‘언제든 상대방의 말에 반론할 수 있는 상황’이라는 것이다. 바흐찐의 표현을 빌리자면 ‘최종적인 말이 없다’.
 즉, 누군가가 “이게 마지막입니다. 결론이 났어요”라고 말했을 때 반드시 다른 누군가가 “아니지 않나?” 하고 말한다. 그리고 다시 얘기를 나눈다. 이처럼 어디까지나 계속되는 것이 대화의 본질로, 다르게 표현하자면 계속해서 발언을 정정해간다. 이것이 타자가 존재한다는 것이고 대화라고 바흐찐은 주장한다.
 이는 매우 중요한 지적이다. 사람은 대화가 필요하다, 이야기를 나누라고 말하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이는 일정한 합의나 결론에 도달하기 위한 절차에 불과하다. 바흐찐에 따르면 그런 것은 대화가 아니다.

 

 리버럴파는 ‘진정한 민주주의’에 호소하기를 좋아한다. 하지만 진정한 민주주의 같은 것은 없다. 민주주의의 본질은 ‘모두가 규칙을 만든다’는 것에 있다. ‘올바름’도 모두가 정한다. 따라서 어떤 규칙을 만들어도 이를 악용하는 인간이 반드시 나타나고, 기존의 민주주의의 상식을 어기는 인간이 나타난다. 구조 자체가 그렇기 때문이다.
 완벽하게 올바른 시민을 키우고, 완벽하게 올바른 법제도를 만들고, 완벽하게 법을 지키는 사회를 만들자는 발상은 의미가 없다. 오히려 규칙을 어겼을 때 어떻게 대처하는가에 민주주의의 역량이 나타난다. 이런 점에서 정정하는 힘이란 민주주의의 힘이라고도 할 수 있다.

 

 포퍼는 어떤 명제가 과학적인지 여부는 이와 같은 ‘반증 가능성’이 있는지 여부로 정해진다고 생각했다. 이 세계에는 개별적인 실험이 불가능한, 따라서 반증도 불가능한 명제가 있는데, 이런 명제들은 과학이라는 범주에 포함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신은 존재한다’는 명제는 옳을지도 모르고 틀릴지도 모르지만, 실험이 불가능하고 반증이 불가능하므로 진위 여부를 논하기 전에 애초에 ‘과학적인 주장’이 아니다. 포퍼는 이를 기준으로 과학과 비과학을 분류한 것이다.
 이 반증 가능성이라는 사고방식은 이 책의 주제인 정정 가능성과 비슷한 면도 있으나 결정적인 부분에서 다르다.
 자연과학의 세계에서는 한 번 반증된 이론은 버려진다. 그래서 학생이 배울 때는 최신 교과서만 있으면 되고, 과거의 저작은 필요치 않다. “여러 학자가 시행착오를 거쳐왔지만, 현시점에서 가장 합리적으로 자연을 설명할 수 있는 이론은 이것입니다. 그러니 이것을 공부하세요”라는 논리다.
 그런데 인문학은 그렇지 않다. 학생도 우선은 과거를 배우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왜냐하면 인문학은 정정의 학문이기 때문이다. 철학에도 버려지고 잊힌 이론이 많이 있다. 하지만 그 이론들을 완전히 잊어서는 안 된다. 언제 ‘사실 …였다’는 논리로 부활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이것이 자연과학과 인문학의 차이다.

 

 작가성이라는 말을 구닥다리라고 느끼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실제로 내가 대학생 때 현대사상 분야에서는 ‘작가의 죽음’이 자주 회자되었다. 포스트모던 사회에서는 근대적인 작가상은 해체된다는 주장이 파다했다.
 하지만 현재 눈에 보이는 현상은 작가의 죽음은커녕 그 어느 때보다 작가성이 중요해지고 있다는 변화다. 트위터, 유튜브, 틱톡 등 현대인은 그 어느 때보다 ‘사람’에게 많은 관심을 갖고 있다. 어떤 사람을 매력적이라고 느끼면 다소 콘텐츠의 질이 나쁘더라도 망설이지 않고 돈을 쓴다.
 이런 변화를 업계 전문가들은 가볍게 여긴다. 전문적인 프로는 콘텐츠의 질을 중시하기 때문이다. 소설가의 경우 문장의 질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본다. 뮤지션은 음악의 질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여긴다. 영상 작가는 영상의 질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현실의 소비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아무리 생각해도 질이 낮은 콘텐츠를 열심히 소비한다.
 예전에 ‘주목 경제(attention economy)’라는 말이 화제가 되었다. 주목받으면 돈을 벌 수 있다는 뜻인데, 막상 뚜껑을 열고 보니 주목받는 대상이 된 것은 작품이 아니라 ‘사람’이었다. 내용이 뛰어나서 작품이 팔린다고 믿는 사람은 이제 일부 전문가뿐이다.

 

 오히려 PT가 완벽하거나 얘기한 내용이 논리정연하면 이런 반응이 없다. 토크 중에 해프닝이 일어나거나 논의가 탈선해 얘기가 어디로 튈지 모르게 되면 이 반응이 나온다. 그리고 그럴 때는 예외 없이 매출이 증가한다. 그렇다고 잡담을 하면 되는 것도 아니어서 도대체 어떻게 했을 때 ‘신들렸다’는 반응을 끌어낼 수 있는지를 두고 매번 시행착오를 겪는다.
 이에 대해 느낀 바가 있다면, 지금까지 논한 작가성과 관련된 것 같다는 직감이다.
 유명인이 아니면 안 된다는 뜻이 아니다. 무명인 사람이 등단해도 ‘신들림’의 느낌이 만들어질 때가 있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이 사람은 이런 사람이었구나!’, ‘이 주제가 이렇게나 재미있는 거였구나!’ 하는 의외성의 발견이다. 그런 사례를 많이 보다보면 사람은 ‘사실 …였다’는 발견, 즉 정의를 정정하는 것 자체에 강한 쾌락을 느끼는 것이 아닐까 하는 가설을 갖게 된다.

 

 과거에 마르크스주의가 지지를 받았던 것은 이론이 매력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이 세 요소가 균형을 이루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마르크스주의에는 혁명의 이론이 있고, 일상적인 정치 문제에 대한 처방전이 있으며, 나아가 ‘너도 혁명 전사로 살아가라’는 실존적 메시지도 있었다. 사상은 이론만으로는 힘을 지니지 못한다.
 그런데 최근에는 이 세 요소를 두루 갖춘 언어가 매우 드물다. 셋 중에 두 요소를 갖춘 언어는 있다. 예를 들면 시사와 이론의 조합이 있다. 최근의 윤리 기준에 따르면 장관의 이러이러한 발언은 용납될 수 없다는 식의 논의가 그렇다. 이런 언어를 구사하는 사람은 리버럴파를 중심으로 인터넷에 많다. 그들의 분석은 타당할 때도 있으나 유감스럽게도 가차 없이 사회 비판을 하는 것에 비해 본인은 대학에 근무하는 등 안정된 자리에 있는 사람이 많다. 본인의 삶, 즉 실존과의 연결이 결여되어 있어 어딘지 모르게 인간미가 느껴지지 않고, 지지를 받지 못한다.

 

 주어진 일을 하고, 상대방이 기대하는 역할을 하는 것만으로는 사람은 당신을 고유한 존재로 여기지 않는다. 고유명사가 되기 위해서는 그런 기대와는 무관한 영역에서 상대방이 교환 불가능한 존재라고 여기게 해야 한다.
 이는 특별한 능력을 보이라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애초에 사람은 누구나 교환 불가능한 고유한 존재다. 이를 평소에는 느끼지 않을 뿐이다.
 일상생활에서는 시간이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사람은 모두 필요한 정보만 교환한다. 따라서 서로가 ‘저 사람은 몇 살이고, 이런 일을 하고 있고, 직책은 이거고, 취미는 저거고, 이런 느낌의 사람’ 하고 유형을 분류하고는 사람들과 교류했다고 생각한다. 그뿐 아니라 자기 자신조차도 스스로를 그런 유형에 가두어 타인의 기대에 부응하기만 하는 존재가 되고 만다.
 이런 보호막을 부수면 인간은 모두 저절로 교환 불가능한 존재가 된다. 그러면 상대방이 알아서 ‘사실 …였다’고 당신을 발견해준다. ‘잉여 정보’가 필요한 것은 이런 이유다.
 주변에 ‘잉여 정보’의 장을 만드는 것. 이를 위해 시간적 여유를 갖는 것. 이것이 정정의 지렛대가 되어준다.

 

 사회 상황은 계속해서 바뀐다. 여론도 극히 무책임하다. 어떤 때는 정의로 여겨지던 것이 몇 년 후에는 판단이 뒤집히는 일도 부지기수다. 변화를 모두 예상해 시기가 각기 다른 발언들 사이에 모순이 없게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실제로 논객은 그런 변화에 대처해 계속해서 정정해나갈 필요가 있다. 그럼에도 그들이 궤도 수정을 하지 않는 이유는 만약 궤도를 수정하면 지지자를 잃고 만다는 공포 때문일 것이다. 입장을 고수하려다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조직이라는 말은 요즘 평판이 좋지 않다. 폐쇄적이라는 이미지가 있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나는 어떤 집단에 대해 폐쇄적/개방적이라는 구분을 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다고 본다. 왜냐하면 그런 판단은 상황이나 관점에 따라 얼마든지 바뀌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가족에 대해 생각해보자. 가족은 일반적으로 매우 닫힌 집단으로 인식된다. 가족의 압력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어 하는 사람도 많다. 그러나 실제 가족 안에는 반드시 세대의 다양성이 있고, 성적 다양성이 있다. 남학교나 여학교의 같은 학년으로 구성된 집단보다 훨씬 열려 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렇다면 학생 집단은 폐쇄적일까? 클럽 활동을 생각해보자. 같은 연령대, 같은 성별의 사람들이 모두 함께 야구나 축구를 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닫혀 있다. 하지만 그런 집단에도 구성원의 가족 구성이나 경제적 환경에 주목하면 다양성을 발견할 수 있다.
 반대로 열려 있는 다양한 관계를 표방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매우 폐쇄적이고 획일적인 예도 있다. 소위 ‘리버럴 동네’ 문제가 대표적이다.
 2017년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소설가 가즈오 이시구로는 2021년의 인터뷰에서 리버럴적인 지식인은 전 세계를 누비며 국제적인 척하지만, 실은 어디에 가서도 비슷한 계층의 사람들하고만 만나고, 같은 화제만 얘기하고 있으니 더 자기 주변 사람들을 깊이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인터넷에서 상당히 화제가 되어 아는 독자도 있을 것이다.
 나도 국제회의에 출석하거나 해외 대학교에 초청돼 강연을 한 적이 몇 번 있는데, 이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지식인이 지식인과 만나서 나누는 얘기는 국경을 넘어가도 놀라우리만큼 똑같다. 열린사회를 추구하는 리버럴파가 실은 가장 닫혀 있다.
 따라서 나는 어떤 집단의 질을 폐쇄적/개방적이라는 잣대나 다양한지 여부를 기준으로 판단하는 것이 본질적이라고 여기지 않는다. 오히려 그 안에서 ‘사실 …였다’라는 정정하는 힘이 작용하는지, 즉 사람을 고유명사로 여기는지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교환 가능성과 정정 가능성. 모든 것을 교환할 수 있는 세계와, 아무것도 교환할 수 없고 정정할 수 있을 뿐인 세계. 어느 쪽이 좋은지는 쉽게 정할 수 없다.
 중요한 점은 인간은 이 두 세계를 오가며 살아간다는 것이다. 지금 세상에는 교환 가능성을 높이는 것이 옳은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많다. 일을 못하는 종업원은 해고하면 되고, 직장이 싫으면 그만두면 되며, 학교가 싫다면 안 가면 된다 등등. 교환의 사상이 사람을 자유롭게 만드는 것은 분명하다. 무엇이든 ‘체인지’하면 되니까.
 하지만 그것만으로 인생을 마지막까지 쾌적하게 살아갈 수 있냐면 그렇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신체 자체가 교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주위 환경을 계속해서 교환해갈 수 있더라도 모든 인간은 자기 자신과 처음부터 끝까지 같이해야 한다. 자기를 ‘체인지’할 수는 없다.
 달리 말해 세상에는 교환하는 힘만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경우가 있다. 이때 우리를 자유롭게 해주는 것은 정정하는 힘뿐인 것이다.

 

 나는 사람과 사람은 서로를 끝내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부모는 자식을 이해할 수 없고, 자식도 부모를 이해할 수 없으며, 부부도 서로를 이해할 수 없고, 친구도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다. 인간은 결국 그 누구도 이해하지 못한 채,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한 채 고독하게 죽을 수밖에 없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이해의 정정’뿐이다. ‘실은 이런 사람이었구나’ 하는 깨달음을 거듭해가는 것뿐이다. 이것이 내 세계관이다.
 따라서 “조직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은 이와 같은 공간을 만들면 주변 사람들이 이해해줄 것이라거나 고독하지 않게 된다는 뜻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겐론에서 활동하고 있지만 나는 여전히 고독하다.
 중요한 것은 사람이 서로를 이해하는 공간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영원히 “너는 나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어”라고 서로 이야기하는 공간을 만드는 것이다. 2장에서 논한 바흐찐의 말을 빌려 쓰자면, 대화의 공간이다.

 

 토크빌은 미국의 민주주의가 왜 튼튼한지를 가장 먼저 사유한 사람이다. 여러 이유를 지적하고 있지만, 그중에서 최근 주목받고 있는 것은 ‘결사(자유로이 구성하는 단체)가 중요하다’는 지적이다. 미국에는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구성한 모임이 많다. 그래서 민주주의가 튼튼하다는 것이다. 이는 앞서 말한 ‘조직이 중요하다’는 얘기와 비슷하다. 하지만 그뿐이 아니다.
 결사에 비해 주목받지 못하고 있지만 토크빌은 ‘떠들썩함’에 대해서도 논했다. 정치적인 주장이든 비정치적인 주장이든, 미국에서는 여러 사람이 다양한 주장을 거리에서 호소하고, 그 주장을 실현하기 위한 단체를 만든다. 이것이 큰 힘이 된다는 것이다.

 

 민주주의 사회는 정답을 요구하는 사회가 아니다. 여러 사람이 자기 나름의 논리에 따라 멋대로 ‘너는 나를 잘못 알고 있다’며 정정하기를 요구하는 사회가 민주주의 사회다.

 

 고대 그리스라고 하면 민주제를 실현한 좋은 사회라는 이미지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실제로는 전쟁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특히 기원전 5세기 말에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영향으로 아테나이 시내에서 큰 내란이 일어나 사회가 매우 혼란스러웠다. 그 원한이 남아 있는 한 반드시 내란은 다시 일어난다.
 이때 그리스인은 내란의 기억을 ‘잊는다’는 결정을 내렸다고 한다. 물론, 실제로 잊는 것이 아니다. ‘공적인 장에서는 잊은 척한다’는 사회적 약속일 뿐이다. 따라서 이는 환상이다. 하지만 고대 그리스인은 그런 환상이 없으면 평화를 이룰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는 매우 현대적 문제라고 생각한다. 현대는 기억하는 것이 절대적 정의라고 여긴다. 그리고 새 정보기술이 세밀하고 완벽한 기억을 가능케 한다. 먼 과거의 작은 범죄도 기록을 불러오면 자세하게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추세는 점점 강화될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정말 사회의 안정, 사람들의 행복을 가져올까?
 지금의 상식에 비추어볼 때 이런 질문은 어리석게 느껴질 것임을 잘 안다. “피해자의 고통을 보고 모른 척하라는 거냐”라고 비난받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바른 말’만으로는 평화를 이룰 수 없다고 선인들이 생각했던 것 또한 사실이다.
 나는 여기에서도 정정하는 힘이라는 관점이 유효하다고 본다. 평화를 만드는 것은 “그 전쟁은 사실 …였다”는 일종의 픽션을 만드는 것이다. 과거를 기억하면서 과거를 바꾸는 것이다. ‘정정’하는 것이다.
 이는 환상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어떤 환상도 없이 전쟁이 가져온 사실 하나하나를 계속 검증한다면, 예외 없이 모두 결코 용서할 수 없는 일이 될 것이다. 이로 인해 평화를 이루지 못하는 것이 과연 정의로운 일일까? 한 발 물러서서 생각해보았으면 한다.

 

 일본인은 혁명도 공화정도 경험한 적이 없다. 프랑스혁명도 러시아혁명도 엄청난 희생을 낳았는데, 일본에서는 이를 미화하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 부족은 결코 보수파만의 문제가 아니다. 일본의 리버럴파도 너무 이상화한 측면이 있다. 그들은 정권을 비판할 때 ‘민주주의’라는 말을 편리하게 사용하지만 민주주의를 “‘위정자’가 민초의 지혜에 귀를 기울여 적절하게 안배해주는 것” 정도로 이해하는 것이 아닌가 의심될 때가 있다.
 민주주의는 위대하다. 하지만 동시에 무섭기도 하다. 왜냐하면 민의는 틀릴 때도 있고 폭주할 때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민주주의의 양의성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원제와 삼권분립 등은 이러한 민주주의의 폭주를 막기 위한 장치다.
 그래서 이 책에서는 ‘리셋은 위험하며 보수적으로 보일지라도 과거를 정정해가는 편이 낫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이거다’라고 외치는 것만으로 바른 사회를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너무 유치한 발상이다.

 

 앞에서 이름을 언급한 독일 법학자 슈미트의 유명한 정의에 따르면, 정치의 본질은 ‘친구’와 ‘적’을 명확히 구분하는 데 있다.
 그 궁극적 형태가 전쟁이다. 전쟁이 일어나면 생활 전체가 친구와 적의 구분으로 환원되고 만다. 모든 이가 ‘아군/적군’이라는 이분법으로 평가되고, 가벼운 이의 제기나 생활상의 독자적 판단조차 이적 행위라 비난받게 된다. 코로나19 팬데믹에도 일부 그런 극단적 양상이 나타났다. 전쟁은 정치의 연장인 것이다.
 그렇다면 평화는 무엇일까? 평화란 전쟁의 결여다. 즉, 정치의 결여다. 정치와는 무관한, 친구와 적의 대립에 환원되지 않는 다양한 활동을 해갈 수 있는 것. 평화의 본질은 이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평화는 정치가 결여된 것이라고 하면, 또 지식인들에게 혼날 것 같다(이 책에서는 계속 혼난다). 좌파 이론가 중에는 인간의 모든 행위는 정치적이라고 논하는 사람도 있다. 개인적인 것이야말로 정치적이라는 주장은 학생운동과 페미니즘의 슬로건이었다.
 의도하는 바는 이해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것이 정치라고 하는 것은 ‘정치’를 너무 확대 해석하는 것이 아닐까? 모든 행위를 정치로 여기면 오히려 정치라는 말의 무게가 사라지고 만다.
 나는 오히려 정치가 정치일 수 있는 것은, 그 바깥에 정치가 아닌 영역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일상생활에서 가족이나 친구와 대화를 나눌 때 보통 스포츠나 음악 얘기를 하다 싸움이 일어나지는 않는다. 어떤 팀을 좋아하고, 어떤 뮤지션을 좋아하는지. 이런 얘기는 정치와 무관하게 나눌 수 있다. 거꾸로 말해 그럴 수 없다면 사회에서 정치적 긴장이 고조되었음을 뜻한다.
 모든 이가 자기 취향을 자유롭게 말하고, 정치와 상관없이 가치관을 표현할 수 있는 것. 이것이 평화로운 일상이다.

 

 이 책은 ‘정정하는 힘’을 주제로 한다. 정정하는 힘이란 ‘생각하는 힘’이다. 나는 무엇보다 독자가 ‘생각하는 사람’이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이 책을 썼다. 하지만 요즘 그런 책은 환영받지 못한다. 시장을 석권하고 있는 것은 ‘생각하지 않는’ 방법을 알려주는 말들뿐이다. 그래서 독자를 머릿속에 그리기 어렵다.
 생각한다는 것은 매우 이상한 행위다. 생각했다고 해서 꼭 좋은 일이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생각하면 행동을 머뭇거리게 된다. 앞으로 전진할 수 없게 된다. 그럼에도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이 책에서 누누이 논해왔으나, 솔직히 정말 그렇다는 확신이 있는 것도 아니다. 세상에는 아무 생각도 안 하고 크게 성공한 사람이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생각 안 하고 성공하는 편이 나아 보인다.
 그런데도 나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지금 세계에는 생각하는 사람이 너무 적고, 이는 큰 문제라고 느끼고 말았다. 모두가 ‘생각 안 하고 성공’하기 위한 방법만 추구하는 나라는 언젠가 망할 거라고 느꼈다. 그런 위기감을 가진 것도 이 책을 쓰게 된 계기 중 하나다. 이 책의 간행을 통해 그런 위기감을 공유할 수 있는 동지를 한 명이라도 많이 찾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