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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에 새기는 빛 : 서경식 에세이 2011-2023 / 서경식 / 연립서가

 

 나는 지금까지 책을 버린 적이 없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연구실 정리에 들어가 작심하고 책을 일부 버리기로 했다. 이 역시 ‘체감 시간’ 때문이다. 정년이 되면 연구실을 비워 줄 수밖에 없어 그곳에 난잡하게 쌓여 있는 책들을 내가 치워야 한다. 정년을 맞이하는 모든 동료가 이 문제로 골머리를 앓는다. 책을 치워도 마땅히 둘 곳이 없기 때문이다. 도서관에 기증하면 되지 않느냐는 건 실정을 모르는 생각이다. 우선 그런 제의를 환영하는 도서관이 없다. 정리와 소장에는 비용이 들기 때문이다. 몇 해 전까지는 내게 남은 시간에 대한 현실감이 없었다. 언젠가는 읽어 봐야지 하는 심정으로 산 책들이 잔뜩 쌓여 있다. 하지만 문득 생각이 나서 지난 1년간 제대로 읽은 책을 떠올려 보니 몇 권 되지 않는다. 연구실과 집에 있는 책을 내가 다 읽는다는 건 이제 불가능하다. 그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글을 쓰는 것도 마찬가지다. 책을 읽을 수 없게 되어 입력되는 정보는 점점 줄어든다. 게다가 장시간 컴퓨터 화면을 바라보고 있으면 눈이 흐려지고 머리가 아파 와 오래 앉아 있을 수가 없다. 만일 이대로 남은 인생을 큰 문제 없이 보낼 수 있다고 하더라도 앞으로 많아야 열 권 정도 쓸 수 있지 않을까. (p.14-15)

 

 위에 거명한 분들의 격려와 조언을 들으며 나는 겨우겨우 글을 쓰고 있었는데, 그것이 세상 사람들의 눈에 들게 됐다. 그리고 복수의 사립대학에서 10년 가까이 비상근 강사로 일한 뒤인 1990년대 말 도쿄경제대학이 내게 말을 걸어 온 것이다. 나는 물론 내 행운을 기뻐했지만, 그것이 단순한 ‘행운’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역시 늘 의식하고 있었다(형들의 투옥이 가져온 결과라고 생각하면 ‘행운’이라고 말하기도 꺼려진다). 나보다 능력 있고 성실한 재일조선인 동포들이 불합리한 상황이나 불우로 인해 고생을 겪다 찌부러져 가는 모습을 봐 왔기 때문이다.
 대학 노조의 가입 권유를 받았을 때 내가 그것을 예상외의 ‘특권’인 것처럼 느꼈던 데에는 이런 사정이 있다. 하지만 일본 전체로 보면 노조 조직률은 계속 하락하고 있으며 노조 운동의 보수화 경향 역시 멈출 기색이 없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안정된 기업에 정규직으로 취업할 수도, ‘조합’에 가입할 수도 없는 사람들이 지금 오히려 늘고 있다는 사실을 잊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 다수는 여성, 재일 외국인, 무언가 핸디캡이 있는 사람들, 즉 ‘마이너리티’다. 코로나 사태로 실직해 고통받는 사람도 늘고 있다. 여성과 청소년의 자살이 급증하고 있다. 나는 노동조합이 자신들의 권리에 못지않게 마이너리티의 권리에도 민감하기를 바란다. (p.26)

 

 ‘관용’이란 자기만족에 빠져 타자를 내려다보며 연민하는 태도가 아니다. 생생한 인간적 관심을 가지고 ‘다양성’에 마음을 여는 것이다. 일본은 오늘날까지 ‘다양성’을 받아들이는 관용적인 사회가 되는 데에 실패해 왔다. 이것은 단지 살기 어렵다는 차원의 문제에 그치지 않으며, 일본과 일본인에게 (그리고 세계에도) 매우 위험하기도 하다.
 지금 세계를 뒤덮은 불안은 ‘코로나 사태’만이 아니다. 나는 얼마 전 뉴스에서 미얀마군이 자국 시민들을 폭행하는 장면을 보고 반사적으로 생각했다. ‘아, 이건 광주다.’ 다친 시위대를 구조하려던 구급대원 세 명을 군인들이 구급차에서 끌어 내려 곤봉과 총대로 마구 두들겨 패는 장면이었다. 그 구급대원들은 어떻게 됐을까. 목숨은 건졌을까. 그 뒤의 일은 모른다. 이런 무도한 폭력이 미얀마뿐 아니라 홍콩, 태국, 벨라루스, 러시아 등지에서 일상적으로 되풀이되고 있다. 정치 폭력이 ‘역병처럼’ 세계에 만연해 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시대인가. (p.27-28)

 

 멍하니 과거를 회상하노라면 오랫동안 완전히 잊고 있던 장면이나 인물에 대한 기억이 느닷없이 되살아난다. 예컨대 이럴 때다. 대학 연구실에서 거두어들인 책을 정리하다가 ‘언젠가 읽어봐야지’, ‘이것도 공부해 봐야지’ 하는 마음에 입수해 놓고는 죽 손도 대지 못한 책과 재회한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책들을 수납할 공간도 없고, 지금부터 그것들을 다시 공부할 시간도 체력도 남아 있지 않다는 것만은 알고 있다. 그럴 때면 내가 인생살이에서 얼마나 많은 일을 허투루 해 오며 살아온 것인가 하는, 찌르는 듯한 아픔을 느낀다.
 이것은 하나의 비유로, 모든 일, 특히 인간관계에 대해서도 같은 이야기를 할 수 있다. 뜻하지 않게 소원해진 사람을 불시에 떠올릴 때면 20년, 30년이라는 긴 세월이 지나가 버린 것을 깨닫는다. 그 사람은 이제 살아 있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며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향해 변명하고 있는 나를 본다. 무언가를 이뤘다는 성취감은커녕 거듭된 실패, 과오, 죄 같은 기억들만 가슴속에 쌓인다. 초로기에서 노년기로 이행한다는 게 이런 것일까. 그리고 이제부터는 ‘인생을 마감한다’는 큰 과제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 (p.32)

 

 20년쯤 전에 독일의 뮌스터라는 도시에 갔을 때 공영 버스가 정류장에 정차할 때마다 차체를 비스듬히 아래로 기울이는 모습을 봤다. 승객, 특히 고령자가 부담 없이 타고 내릴 수 있도록 한 장치였다. 나와 아내는 거기에 감동해서 우리가 사는 일본의 도시에도 이런 장치가 어서 보급되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이야기했다. 그 이야기를 했을 때는 우리가 그런 혜택을 입을 것이라는 생각은 거의 없이 고령자나 약자들을 위해서라고 생각했다. 그 뒤 어느새 일본에도 그런 버스가 꽤 보급되었다. 지금은 그 버스를 반기며 감사히 노약자석에 앉게 됐다. 50대 무렵의 나는 고령자의 ‘타자’로서 ‘타자’인 노인들을 바라보았다. 지금은 내 몸에 ‘늙음’이라는 낯선 타자가 비집고 들어와 나의 내부를 침식하고 있다고 느낀다.
 나는 예전에 이 기간을 초로기에서 노년기로의 이행기라고 표현했는데, 그 ‘이행’의 난처함은 상상 이상이었다. 평온한 노년기를 조용히 즐기기는커녕 뭔가 의미 있는 일을 해야 한다는 절박감과 그런 의지를 심신이 따라가지 못하는 데 대한 초조감이 끊이지 않는다. (p.37-38)

 

 히다카 선생은 늘 중국에서 태어난 자신을 ‘식민자(colon)’로 규정했으며, 그 특권적 생활의 ‘쾌적함’을 쓰라린 죄책감과 함께 회고했다. 일본이 패전했을 때 중국과 조선에는 각각 150만, 70만 명의 일본인 민간인이 살고 있었다. 그들 대다수는 패전 후 일본으로 돌아갔는데, 기껏해야 철수할 때의 고생을 피해자적 관점에서 기억하는 경우가 많았지 가해자·지배자로서의 존재 형식을 고통스럽게 인식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히다카 선생의 사상 밑바탕에는 그 고통의 감각이 있었다.
 앞에서 이야기한 인터뷰 때 히다카 선생이 한 이야기 중에 내 마음에 새겨진 것이 있다. 많은 ‘식민자’와 달리 선생에게서는 식민지 사람들의 마음이 보이는 듯한데, 그 이유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다. “나는 어릴 때부터 빈곤의 밑바닥에 있는 중국인, 이른바 쿨리(coolie)로 불렸던 사람들을 늘 보고 자랐습니다. (…) 이런 옳지 못한 일은 절대로 용납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최근에는 문화상대주의가 유행하고 있고, 나도 사물을 상대화해 바라보는 것을 강조하는 등 머리는 비교적 유연한 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용납할 수 없는 불의가 존재한다는 직관은 역시 중요하지요.”
 언제나 온화하고 신사적이었던 선생으로서는 의외라고 할 만큼 강한 어조이다. (p.45)

 

 우크라이나뿐 아니라 세계 각지에서 수많은 디아스포라가 계속해서 생겨난다. 생활 기반이 무너지고 고향에서 쫓겨나 낯선 땅에서 사람들의 몰이해와 편견에 둘러싸여 살아가야만 한다. 예전에 졸저 『디아스포라 기행』의 에필로그에서 이렇게 쓴 적이 있다. “또 새로운 디아스포라들이 생겨나는 걸까. 눈물을 흘리며 황야를 가로지르는 사람들의 기나긴 행렬이 환시처럼 내 시야에 들러붙어 떨어지지 않는다.”
 그때로부터 거의 18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세계는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음을 통감한다. 지금 우리는 핵전쟁의 늪으로 휩쓸려 들어가고 있으며 이를 저지할 어떤 방법도 없다. 세계사의 시계가 한 세기 정도 되돌아가 버린 듯하다. 이런 생각에 사로잡히니 글을 쓰기가 어렵게 된 것이다.
 그럼에도 무언가를 쓰고 싶다는 마음은 여전하다. 그럴 때 내가 떠올리는 것은 슈테판 츠바이크, 파울 첼란, 장 아메리, 프리모 레비 같은 ‘디아스포라 지식인 선배’들이다. 그 ‘선배’들은 하나같이 인간성이 지닌 외면하고 싶은 추악함과, 그럼에도 희미하게 빛나는 숭고함에 관한 깊은 고찰을 남기고는 스스로 삶을 저버렸다. 나는 ‘디아스포라’라는 존재를 정의할 때 이런 의미를 넣어도 좋겠다고 몰래 생각해 본다. 디아스포라는―그 일부 지식인은―‘인간성이라는 심연까지 도달하는 말들을 남기고 자살하는 존재’이다. (p.56)

 

 말할 필요도 없겠지만 ‘불법체류’란 국가가 마음대로 단정해 놓은 정의다. 예를 들어 지금 우크라이나의 경우를 보자. 그 땅에서 태어나 그 땅의 말을 쓰며 살아온 사람들은 한때 오스만 제국이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러시아 제국의 신민이었고, 그 후로는 ‘소련인’이었다. 그러고는 우크라이나인이 되었다가 지금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로 찢겨 있다. 본인은 ‘이동’하지 않았지만 위로부터 국가가 차례차례 자의적으로 선을 긋고 나누어 서로 싸우게 만든 것이다. 우리 민족의 경우도 기본적으로 마찬가지다. 내 이모부는 남한의 탈영병, 고모부는 북에서 온 인민군 소년병이었다. 두 사람이 어디선가 총탄을 주고받았다고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런 일이 지금 우크라이나에서 일어나고 있으며, 이는 ‘조선’ 민족의 역사에서도 오히려 흔하디흔한 일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상황에서 이모부는 누구로부터 어떤 보호도 받지 못한 채 필사적으로 살아남았다. 그 과정을 겪으며 허무하다고 할 만큼 현실주의적이고 공리주의적인 처세술을 몸에 익혀야 했다. 전 세계의 많은 디아스포라가 그러했다. (p.63)

 

 이중섭은 말하자면 ‘난민 화가’다. 모든 걸 잃고 ‘난민’이 되어서도 계속 그림을 그렸다.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인가. 애초에 인간이란 존재에게 예술이라는 행위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그런 의문에 사로잡히게 만드는 존재가 이중섭이다. 예술에 삶을 바친 화가 중에는 영예와 부를 거머쥐기는커녕 생존보다도 ‘예술하기’의 가치를 더 우위에 둔 이들이 존재한다. 빈곤, 병고, 사회적 불우 같은 경험은 드문 일이 아니다. 이중섭은 바로 그런 존재다. 한국의 많은 사람이 그의 생애와 작품에 자신들의 이야기를 포개어 본다. 그것이 그의 작품이 사랑받는 이유일 것이다. ‘난민’이 된 화가가 극심한 빈곤 속에서 담뱃갑 은박지에 못으로 눌러 그린 그림. 이 얼마나 보잘것없고 초라한가. 하지만 그 세계는 친밀하고 에로스로 가득하며 유머도 있다. 가만히 보고 있자면 어렴풋이 광기를 띤 궁극의 유토피아상이라 할 만한 것이 떠오른다.
 처자식과 함께 일본에서 살았다면 좀 더 오래 살 수 있었을 텐데, 하고 이야기하는 이도 있다. 정말 그럴까? 주운 은박지에라도 그리고, 그리고, 또 그리는 것이 그가 ‘살아가는’ 방식이었다. 어려운 상황일수록 그림을 그리는 것이 그의 ‘삶’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일본이라는 장소에서 살아가는 것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예술적 욕망이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거기에 이 화가의 독자성과 보편성이 있다.
 지금도 세계에는 ‘난민’이 넘쳐난다. 국가의 보호에서 배제된 채 오직 생존을 위해 거친 들판을 맨발로 헤매고 다니는 사람들. 그중에는 이중섭과 같은 사람들도 꽤 있을 것이다. 이중섭을 애석하게 여길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 무수한 고난에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믿고 싶지만……. (p.91-92)

 

 세계적으로 보더라도 이른바 ‘문명’의 발전은 타자에 대한 침략·지배 과정과 깊이 결부되어 있다. 제국주의 국가가 타자에게 ‘야만’, ‘미개’, ‘후진’이라는 표상의 딱지를 붙임으로써 스스로를 ‘문명’, ‘개화’, ‘선진’의 위치에 놓고 침략과 지배를 정당화하려 할 때 미술, 사진, 영화 등 시각 미디어가 수행한 역할은 지대하다. 이런 ‘이미지’는 대중의 무의식에 침투함으로써 타자에 대한 우월감을 양성해 몇 세대나 되는 장기간에 걸쳐 줄곧 영향을 끼친다. 유의해야 할 것은 이런 이데올로기가 단지 권력에 의해 위로부터 서민에게 강제됐을 뿐 아니라 서민 쪽에서도 이를 기쁘게 받아들였다는 사실이다. (p.96-97)

 

 필시 유복한 가정의 자제였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는 화가가 되겠다고 생각할 수도, 미술학교에 진학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나는 이 그림을 보고는 한눈에 그렇게 판단했다. 하지만 반세기 뒤 유족을 찾아갔던 무언관의 구보시마 세이이치로 관장에 따르면 이자와의 집은 “요즘 세상에 아직도 이런 집이 있나 기겁할 정도로 허름한 집”이었다고 한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나니 한 미술학도의 존재가 실감으로 다가왔다.
 이자와는 도쿄미술학교(도쿄예술대학 미술학부의 전신) 3학년 재학 중에 징병당해 만주에 갔다가 다시 홍콩 전투에 투입된 뒤 뉴기니에서 전사했다. 26세였다. 그의 집안은 극빈 농가였다. “아침부터 밤까지 농사일에 쫓겨 생활에 여유가 없었다. 〈가족〉이라는 작품은 상상화”라고 이자와의 형은 말했다. 구보시마 관장에 따르면, “당시 지방 농가에서 자식 하나를 도쿄의 미술학교에 보내려면 상당한 결단과 용기가 필요했다. 얼마 안 되는 입학금과 월사금(수업료)을 내기 위해 이자와 집안은 마당에 있던 소중한 느티나무를 베어 팔았다고 한다.”
 그토록 꿈에 그리던 화가의 길이 전쟁에 무자비하게 짓밟히고 만 것이다. 전몰 미술학도들은 피해자다. 하지만 ‘전쟁’이라는 추상적인 운명의 피해자가 아니다. 침략 전쟁을 강행한 자국 지배층의 피해자인 것이다. 동시에 그들은 자발성 유무와는 관계없이, 침략에 가담했다는 의미에서 가해자이기도 했다. 관장은 내게 “그들의 총구 앞 저쪽 편에 그들과 다를 바 없는 젊은이들이 있었다는 사실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라고 말했다. (p.110-111)

 

 전후 일본에는 진지한 반성과 더불어 재출발을 모색하는 사상적 시도도 존재했다. 그 대표적인 예로 역사학자 이시모다 쇼(1912~86)의 『역사와 민족의 발견』(1952)을 들 수 있다. 여러 이웃 민족을 상대로 침략 전쟁을 벌이고 무참한 패배를 맞은 일본의 근대를 ‘역사의 주체는 무엇인가’ 하는 문제의식에서 탐구한 책이다. 이 책의 케이스와 속표지에 콜비츠의 〈희생〉이 실려 있다. 또 제3장 ‘민중과 여성의 역사에 부쳐’에는 「어머니에 대한 편지―루쉰과 허남기에 부쳐」라는 글이 수록되어 있다. 허남기(1918~88)는 「화승총의 노래」로 알려진 재일조선인 시인이다.
 이시모다는 전쟁 전 구제 고등학교 시절 사회과학연구회에 참가했던 이력 때문에 ‘적색분자’ 혐의로 경찰에 구금되어 무기정학 처분을 받은 바 있다. 이때 무신론자이자 사상적 진보파였던 그의 아버지는 출세가 물거품이 되자 심히 화를 내며 아들을 나무랐다. 반면에 교육을 받지 못했고 보수적이었던 어머니는 아들을 조금도 나무라지 않았으며, 옳은 일을 하는 사람은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아들에게 확신시켰다고 한다. ‘근대적’인 사상의 소유자인 아버지가 부르주아적 입신출세주의에 물들어 있었던 데 비해 ‘봉건적’인 어머니는 자신과 자식의 인간성을 외부와 아버지의 권력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노력하고, 또 저항했다. 이런 ‘민중과 여성’의 관점에서 깊은 사색을 통해 자국의 역사를 반성하며 통찰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이시모다는 생각한 것이다. (p.118-119)

 

 제2차 세계대전 중이던 1941년, 74세의 콜비츠는 〈씨앗들을 짓이겨서는 안 된다〉를 제작했다. 그 자신의 일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그 여자(늙은 여인)는 자식들을 제 외투 속에 품고 절대로 빼앗기지 않겠다는 듯 넓게 팔을 벌려 소년들을 감싸고 있다. 〈씨앗들을 짓이겨서는 안 된다〉―이 요구는 〈두 번 다시 전쟁을 해서는 안 된다〉와 마찬가지로 막연한 바람이 아니라 율법이다. 명령이다.”
 케테 콜비츠의 이 ‘명령’을 오늘날에 전하는 사키마미술관. 기지에 머리를 들이밀듯 들어선 그 모습은 평화를 위한 투쟁의 선두에 내걸린 깃발처럼 보였다. (p.120)

 

 100년 전의 독일에 원류를 둔 목판화 운동의 수맥이 어떤 때는 거센 물줄기가 되고 또 어떤 때는 땅에 스며들기도 하면서 끊어지지 않고 아시아 각지의 민중운동 현장에 전파된 사실이 일목요연하다. 중국, 일본, 한국에 대해서는 불충분하나마 어느 정도 예비지식이 있었지만(따라서 이 글에서는 적게 언급했지만), 여타 지역에 대해서는 처음 알게 된 것이 많았다. 그럼에도 나는 그 모든 작품에서 어쩔 수 없는 그리움과 같은 감정을 느꼈다. 다가와의 탄광 유적에서 지하 수백 미터 갱도를 더듬다가 반세기도 더 된 시간을 넘어 이곳으로 빠져나온 듯한 환상에 잠겼다. 내 상상 속에서 그 갱도는 이곳으로부터 현해탄 밑을 지나 한반도에 도달하고, 다시 중국으로, 동남아시아로, 인도로 뻗어 나간다. 그리하여 팔레스타인의 가자지구까지. 자본가와 권력자는 밝은 지상과 공중을 제멋대로 오가지만, 땀과 탄가루로 얼룩진 자들은 이 지하 갱도를 왕래하며 ‘어이, 살아 있나?’ ‘여기야. 살아 있어!’ 하며 서로 소리쳐 부르는 것이다. (p.124-125)

 

 나치 독일이나 일본 제국(일제)의 예를 들 것까지도 없이, 국가권력은 (그리고 가부장제나 상업주의 권력 역시) 사람들의 감성 밑바닥까지 침투해 통제하려고 하는 법이다. 바로 그 때문에 개개인의 존엄과 권리를 지키기 위해서는 감성의 차원에서 권력으로부터 독립할 필요가 있다.
 그런 까닭에 나는 학생들을 만날 때 그들의 감성을 해방하고 자발성을 발양시키려 신경을 쓴다. 이는 ‘인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교의나 지식으로 ‘인권’을 가르치려 해도 학생들 개개인이 자발적으로 타자나 약자에 대한 상상력과 공감을 발휘하지 않는 한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예술학’ 강의에서 나는 처음에는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고 예술 작품을 보여준 뒤 뭐든 좋으니 느낀 바를 글로 적어 보라고 이야기한다. 이 “뭐든 좋으니”가 학생들에게는 어려운 모양이다. 그들은 당혹스러워하면서 “이 작품의 작가는 누구인가요?”라거나 “어느 시대 작품인가요” 라는 등의 질문을 한다. “그런 건 신경 쓰지 않아도 좋아요. 작품을 잘 살펴본 뒤 의문이든 반감이든 괜찮으니까, 자기 마음속에 일어나는 걸 써 보세요.”라고 나는 대답한다. 그러면 학생들은 더욱 곤혹스러워한다. 하다못해 작가명이나 작품명만 알아도 스마트폰으로 검색이라도 해 볼 수 있을 텐데…….
 학생들은 매사 교수(어른)의 안색을 살피면서 허가나 지시를 받으려고 한다. 그것은 그들의 책임이라기보다 그런 식으로 그들의 감성을 가둬 버린 어른들의 책임이다. 적어도 내 강의에서만은 자유롭게 느끼고 발언해 주기를 바란다. (p.133-134)

 

 지금 내 뇌리에 비치고 있는 것은 ‘종말’의 광경이다. 예술제에 대해 무뢰배(깡패)들이 범죄와 다르지 않은 협박을 가한다. 그것도 최근 일어난 애니메이션 제작사 방화·살인 사건을 기회 삼아 협박한다는 가장 비열한 수법으로 말이다. 한두 사람의 행위가 아니다. 지난 15일까지 아이치현 당국에 걸려 온 ‘항의’ 전화, 팩스, 메일은 약 5,700건에 달한다고 한다. 협박 세력은 비열한 수법이 효과적이라는 것, 그리고 권력자들이 그들의 행위를 환영한다는 것을 재차 확인했다.
 ‘종말은 이렇게 찾아오는 것이다.’ 예술 행위는 그것을 알리는 경종이다. 예술에 대한 권력의 간섭은 인간의 감성 자체에 대한 간섭이다. ‘예술과 관련된 것이니까’, ‘예술은 일상생활에 직결되지 않는 일종의 사치니까’ 하는 심리로 시민이 이 경종을 경시하기라도 하면 그것은 곧바로 감성 자체에 대한 통제로 이어진다. 무엇이 ‘미’이고 무엇이 ‘추’인가 하는 기준까지 권력이 휘어잡게 된다. 그런 광경을 우리는 일찍이 일본에서, 독일에서, 세계 곳곳에서 거듭 목격하지 않았던가. (p.148-149)

 

 내가 젊었을 때는 ‘죽음의 상인’이란 말이 아직 살아 있었고, 전쟁으로 폭리를 취하는 것은 가장 업신여겨야 할 행위로 여겨졌다. 적어도 나는 그런 감각을 소중히 여기며 자랐다. 그런데 어느새 한국이 ‘죽음의 상인’이 되어 버렸다. 아무도 그것을 부끄러워하거나 비판하지 않는 것인가? 한편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무기 부족에 빠져 있는 러시아에 ‘북’(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무기를 제공할 것이라는(이미 하고 있다는[?]) 보도도 있다. 식민 지배를 받고 분단된 민족이 이제는 현재 진행 중인 세계 규모의 분단과 전쟁에 각각 ‘무기 제공자’로서 관여하고 있다. 나중에는 ‘병력 제공자’가 될지도 모른다. 이 얼마나 치욕스러운 일인가? (p.154)

 

 “만일 예술가들이 사회의 양심을 배반한다면, 인간의 근본 원칙을 배반한다면, 도대체 예술은 어디에 설 수 있다는 말인가?” (2011년 한스 울리히 오브리스트와의 대담)
 “사회의 양심”이나 “인간의 근본 원칙”과 같은 생각은 지금 우리 사회에서는 경멸당하거나 적어도 의심의 눈초리를 받고 있지 않는가. 이런 소박하다고도 할 수 있는 인도주의를 이토록 확신을 지닌 채 힘차고 설득력 있게 이야기하는 존재는 달리 찾을 수 없다. ‘인도주의’라는 이름의 방파제는 지금 세상 곳곳에서 무너지기 시작했다. 차라리 인간에게 절망해 버리고 싶기도 하다. 하지만 농민이 수백 년간 메마른 밭을 일궈 왔듯이, 인류에게 양심이나 인간성을 일깨우는 사람들은 늘 존재해 왔다. 이 또한 아이웨이웨이를 통해 깨닫게 된다. (p.179-180)

 

 도무지 선한 사람이라고는 할 수 없는 주인공을 매력적인 존재로 묘사하는 것은 인간성의 복잡함에 대한 깊은 이해와 그 이해를 작품으로 엮어내는 예술적 모험 정신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p.189-190)

 

 피히테는 ‘독일인’ 아이덴티티의 근거를 ‘독일어’에서 찾았다. 그에 따르면 독일어를 말하고, 독일어로 생각하는 사람이 ‘독일인’이다. 여기서 근대 ‘국어 내셔널리즘’의 원형을 찾을 수 있다. 그런가 하면 프랑스는 혁명 뒤 일찌감치 철저한 국어교육을 실시했으며, 정통적인 프랑스어를 말하는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프랑스인이라는 국어 내셔널리즘을 다른 어느 곳보다 강력하게 실천했다.
 잘츠부르크 체류를 마친 뒤 나는 노르웨이로 가서 오슬로대학에서 강연할 예정이다. 제목은 「모어(母語)와 모국어(母國語)의 상극」으로, 그 결론 부분은 다음과 같다.
 “현재 전 세계에 이산해 있는 약 600만 명의 코리안 디아스포라는 모어와 모국어의 상극으로 고통받고 있다. 한편 한국에는 이주 노동자 등 많은 정주 외국인이 살고 있다. 국제결혼으로 한국에 살게 된 외국인 여성도 늘고 있다. 이런 추세는 누구도 막을 수 없다. 지금 외국에서 건너와 한국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재일조선인이 겪은 것과 같은 고통을 주어서는 안 된다. 그들의 모어와 문화를 대등한 것으로 존중해야 한다. 그런 사회를 구체적으로 상상해 보면, 그것은 한국어는 물론이고 일본어, 중국어, 러시아어, 영어 그리고 언젠가는 베트남어도 공용어로 인정받아 통용되는 사회다. 그런 열린 사회에서 각각의 구성원을 이어 주는 것은 식민 지배를 받은 역사의 기억과 그 역사를 피해자로서는 물론이요 가해자로서도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는 모럴이다. 이 유토피아의 실현을 가로막는 것은, 한국의 경우에는 우선 국민 다수의 무의식에 뿌리내린 국어 내셔널리즘이라 할 수 있다. 분단을 극복한 한반도라는 장소를 중심으로 쌓아 올린 새로운 다언어·다문화 공동체. 이런 유토피아상조차 상상할 수 없다면 식민 지배에서 대체 어떤 보람을 찾을 수 있단 말인가?” (p.191-192)

 

 나는 다시 정중하게 머리를 숙였다. 청년이 짜증을 낸 것도 무리는 아니다. 사고 후 7개월이 지났는데도 책임자는 사죄하지 않았으며, 보상도 구체화된 것이 없다. 게다가 도시에서 온 사람들은 사태 초기의 심각성을 망각하기 시작했고, 정부와 재계는 원전을 재가동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6월에는 이 지역에 살던 한 낙농업자가 자살했다. 원전 사고 탓에 매일 생산하던 우유를 출하할 수 없게 되어, 우유를 짜서 그냥 버리는 나날이 한 달간 이어졌다. 빚을 내 지은 새 퇴비 창고 벽에 분필로 “원전만 없었더라면”이라 써 놓고는 목을 맸다. 빚과 필리핀인 아내, 아이 둘을 남겨 두고.
 이 지역은 일본 패전 뒤 군에서 제대한 농가의 차남과 삼남, 그리고 만주에서 돌아온 사람들이 개간한 개척지다. 전쟁 전 일본은 장자 상속제였기에 논밭은 모두 장남이 물려받고 차남과 삼남에게는 아무것도 주어지지 않았다. 가난한 그들은 군인이 되었으며, 국가에서 밥을 먹여 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해했다. 그리고 만주에 가면 자기 땅을 가질 수 있다는 정부의 선전에 혹해 만몽(만주·몽골)개척단에 지원했다. 그런 사람들이 일본에 의한 아시아 침략의 첨병이 되었다. 돌아온 그들은 개척지에서 낙농업에 뛰어들었고 생활은 나아졌다.
 하지만 그것도 1970년대를 정점으로 내리막길에 접어들어, 한때는 115가구가 낙농업에 종사했던 이곳의 현재 주민은 75가구로 줄었으며, 낙농가는 자살한 남자의 가정을 포함해 겨우 6가구뿐이다. 이제 척박해진 이 지역을 떠받치는 것은 인근 아시아인들이다. 계육 가공 공장에는 20명의 젊은 중국인 여성이 일하고 있다. 결혼 이민도 늘었다. 농어업은 고된 노동이다. “일본인 신부는 오지 않는다.”라고 한다. 현재 후쿠시마 전체에서 2,000명 이상의 필리핀인이 일본인 남성의 배우자로 살아가고 있다. 그들도 분명 원전 사고의 피해자지만 실제로는 잊힌 존재다. (p.222-223)

 

 후쿠시마에 갈 때마다 기묘한 감각에 사로잡힌다. ‘현실만이 지니는 비현실감’이라고나 해야 할까. 이미 결정적으로 손상당했고 지금도 계속 위협에 노출된 환경. 그 속에서도 사람들은 얼핏 보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살고 있다. 현실 그 자체를 바라보고 있는데도 그것이 매우 비현실적으로 생각된다는 것인데, 그것이 바로 방사능 재난의 특질이 아닐까. 요컨대 방사능 재난은 우리의 감각이나 상상력의 원근법에 도전한다.
 나는 ‘동심원의 패러독스’라는 것을 떠올렸다. 텔레비전이나 신문에는 후쿠시마 제1원전을 중심으로 반경 20, 30, 100킬로미터의 동심원들이 곧잘 등장한다. 예컨대 센다이는 약 100킬로미터, 도쿄는 약 200킬로미터 떨어져 있으며, 그 거리에 따라 위험도가 높기도, 낮기도 하다는 이야기다. 도쿄에 사는 나의 상상력은 피해지 주민들이 경험하는 불안에 닿지 못한다. 오사카나 규슈 사람들의 상상력은 훨씬 더 닿기 어렵다. 한국이라면 더더욱 그럴 것이다. 즉 방사선량뿐 아니라 상상력 역시 동심원적으로 멀어진다는 역설이 나타나는 것이다. 동심원 중심에 가까운 사람들은 공포와 불안에 대한 실감이 그만큼 강하다. 그렇기에 “편리한 진실”(프리모 레비)을 찾아내서 거기에 매달리는 심리가 작동한다.
 재난의 중심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이 중심을 향한 상상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중심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이 현실에서 눈을 돌리면 사태의 본질을 냉철하게 인식해 재발을 방지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지금 진행되고 있는 것이 바로 그런 사태이다. 우리는 이 ‘동심원의 패러독스’를 의식해서 중심과 먼 사람들일수록 중심을 향한 상상력을 갈고닦고, 중심에 가까운 사람들일수록 엄혹한 현실을 더욱 직시하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 대단히 어려운 일이지만 눈앞에서 벌어지는 사태가 우리에게 그것을 요구하고 있다. 상상력이 시험받는 것이다. (p.227-228)

 

 후쿠시마에서 온 무토 루이코 씨는 후쿠시마 원전 사고의 공포와 불안을 담담하게 이야기하며 일본 정부와 도쿄전력의 무책임함을 고발했다. 그의 이야기 중 특히 감명 깊었던 것은 그가 자신의 피해만이 아니라 자신의 조국이 타자에게 가한 가해의 책임까지 분명하게 언급하며 일본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사죄의 뜻을 표명한 점이다. 언제나 그렇듯 피해를 당한 사람들, 고통받고 있는 미약한 존재가 타자와의 진정한 연대를 추구하는 지혜와 용기를 보여 준다. 타자를 해친 자들, 무거운 책임을 져야 할 자들은 고개를 돌리거나 제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오만한 태도로 일관한다. (p.233-234)

 

 “방사능 피해는 도쿄 주민들과는 무관한 것일까요? 도쿄 역시 식품·물·공기 오염이라는 형태로 틀림없이 영향을 받게 될 겁니다. 여러분은 자신과는 무관한 후쿠시마라는 한 지역이 오염된 걸로 생각하고 있는 듯합니다만, 세계적 관점에서 보면 일본 전체가 오염됐습니다. 그 피해는 앞으로도 여러분의 일생보다 더 긴 시간에 걸쳐 지속될 겁니다. 그럼에도 일본 정부는 안전성도 확인되지 않은 오이 원전 재가동을 강행했어요. 그런 곳에서, 그런 시간을 여러분은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그래도 행복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최근 보도를 보면 젊은이들의 ‘취직 활동 자살’이 늘고 있다고 합니다. 조금이라도 안정된 직장에 취직하려고 몇십 번이나 면접을 보지만 결국 아무 데도 취직할 수 없어 비관한 나머지 자살하는 겁니다. 이것은 ‘주변’이 아니라 바로 여러분들의 일이 아닌가요?”
 “정부는 ‘세금과 사회보장의 동시 개혁’을 부르짖지만 실제로는 사회보장 개혁을 포기하고 부유층에 대한 과세 강화도 내팽개친 채 소비세 증세만 강행하려 합니다. 여러분의 생활은 점점 어려워지겠지요. 그래도 여러분은 행복한가요? 나는 지금까지 여러분 중 다수가 ‘일본에 태어나 행복하다.’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여러분은 ‘일본은 풍요롭고 안전하며, 일본인들은 행복하다.’라는 상투적인 이야기를 어릴 때부터 주입받아 그것을 자기 머리로 생각하고 검증해 보지도 않은 채 되뇌고만 있는 건 아닌가요? 이미 안전도 풍요도 밑바닥부터 흔들리고 있어요. 자기 ‘주변’만 보면서 애써 불안을 외면하고 있는 건 아닌가요? 하지만 여러분의 ‘주변’에까지 위기가 닥쳤을 때는 이미 너무 늦어 손을 쓸 수 없게 될 겁니다…….” (p.250-251)

 

 마루키 부부가 사재를 들여 세운 미술관 마당에는 ‘통한의 비’가 서 있다. 1923년 간토 대지진 뒤에 약 6,000명의 조선인이 일본의 일반 민중과 군경의 손에 학살당했다. 마루키미술관이 있는 지역에서도 학살이 있었다. 그것을 절대 잊지 않겠다는 뜻에서 지역 주민의 반발을 무릅쓰고 마루키 부부는 이 비를 세웠다. 일본 국민 중에 마루키 부부와 같은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나는 잊고 싶지 않다. 매해 여름 〈원폭도〉를 전시해 온 다카하시 주지 스님 같은 사람이나 그 설법에 진지하게 귀 기울이는 시민들이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 수는 해마다 줄고 있다. 71년 전 전쟁의 기억이 희미해지고 있을 뿐 아니라 바로 엊그제라 할 만큼 가까운 과거인 후쿠시마 원전 사고에 대해서조차 죄 많은 망각의 기색이 짙다. “시간의 경과는 언제나 가해자 편입니다.” 나는 ‘원폭 위령제’ 당일의 좌담 행사에서 그렇게 말했다.
 “권력에 대한 싸움은 망각에 대한 기억의 싸움”(밀란 쿤데라)이라고 한다면 사람들은 (적어도 일본 사회에서는) 이 싸움에 언제나 패배해 왔다고 할 수밖에 없다. 망각까지 갈 것도 없이, 기억의 기초가 되는 언어와 그 개념 자체가 안쪽에서부터 썩듯이 무너지고 있다. ‘평화’라는 미명 아래 전쟁을 준비하고, ‘유일한 피폭국’으로서 선제 핵 공격을 지지하는 식이다. 평화를, 또는 인간을 지키라고 외치기 위해서는 우선 언어를 지키라고 호소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이 일본 사회의 현실이다. 한국은 어떠한가? (p.262-263)

 

 후쿠료젠을 오간 길은 5년 전에 사진가 정주하 씨와 함께 다닌 길이다. 전에 본 기억이 있는 길옆 민가의 마당에 곱게 익은 감들이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하지만 우리를 안내한 지역 사람은 5년 전과 마찬가지로 “저건 먹을 수 없어요.”라고 경고했다. 알렉시예비치는 이번에 일본에서 일찍이 자신이 예견했던 ‘미래’를 본 것이다.
 그는 예전에 홋카이도의 도마리 원전을 찾은 적이 있다. 그곳에서도, 그리고 프랑스, 미국, 스위스에서도 만나는 사람마다 그에게 체르노빌에 관해 묻고 동정을 표했으나, “우리가 사는 곳에서 그런 일이 일어날 염려는 없다.”라고 입을 모았다고 한다. 체르노빌 이후, 후쿠시마 이전의 일이다. 지금은 ‘후쿠시마 이후’다. 인간은 과거에서 배우지 않는다. 그것이 동시 진행형으로 이토록 명백하게 드러난 적이 있었던가.
 원전의 폐로 처리와 배상 등의 비용이 사고 뒤의 견적으로부터 수조 엔 단위로 늘어나고 있으며, 20조 엔을 웃돌 것이라는 추산까지 나오는 가운데 정부는 국민 부담을 늘리는 쪽으로 논의를 진행하고 있다. 세코 히로시게 경제산업대신은 12월 7일 다시금 ‘원전은 비용이 싸다’고 강조했다. “여러 비용을 전부 포함해도 발전 단위당 비용은 원전이 가장 싸다고 생각한다.”라는 것이다. 세코 대신의 말은 허언이다. 그것은 리쓰메이칸대학의 오시마 겐이치 교수 같은 식자들이 거듭 지적하는 바다. 백 번 양보해서 이 논의가 아직 결론이 난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일단 사고가 일어나면 긴 시간에 걸쳐 파괴적인 피해를 가져오는 원전에 이렇게까지 집착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국가의 체면, 전력 회사 주주들의 이익 보호, 원전 직원·연구자·건설업자·지방 정치인 등 원전 마피아에 기생하는 사람들의 기득권 보호, 그리고 잠재적 핵무장 능력 유지 등을 떠올릴 수 있다.
 여행을 마치고 도쿄에 돌아온 알렉시예비치는 도쿄외국어대학 기념 강연에서 이렇게 말했다. “후쿠시마에는 내가 체르노빌에서 본 것들이 전부 다 있다.” “국가는 자기 자신을 지키지 사람들을 지키지 않는다.” 나아가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일본 사회에 ‘저항’이 없다는 데 놀랐다. 체르노빌 사고 때도 국가에 대한 저항이 거의 없었는데, 그것은 우리 나라(옛 소련)가 전체주의 국가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일본은 어떠한가?” (p.267-268)

 

 ‘일본통신’이라는 이름을 제안한 또 하나의 이유는 지식인층을 포함한 한국 국내 사람들의 일본 이해에 대해 내가 가지고 있는 의문, 좀 더 명확히 말해 우려에 있다. 일본과 한국이 지리적으로 가깝고 역사적으로도 서로 밀접하게 얽혀 있는 데다 유학생 등 인적 교류가 이토록 활발한데도 한국인들 다수는 일본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못한 듯하다. ‘일본인은 악랄한 우익 뿐이라고 생각했는데, 직접 만나 보니 예의 바르고 친절해 일본을 좋아하게 됐다’는 식의 반응이 전형적으로 보여주듯, 한국에서 교육이나 언론을 통해 익힌 일본 이해는 너무나 일면적이어서 그 일면적인 선입관이 무너지면 쉽사리 일본 긍정론에 빠지고 만다. 그것은 ‘한국인은 무례하고 난폭하다고 생각했는데, 직접 만나 보니 그렇지 않았다’는 일본인들 다수의 반응과 닮은꼴이다.
 어느 민족국가든 개인 차원에서는 좋은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 특정 민족 전체를 좋은 사람 또는 나쁜 사람으로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위험하다. 3월의 지진 직후 일본에서 일어난 ‘일본은 강한 나라’, ‘힘내라 일본’ 따위의 캠페인이나 거기에 호응해 한국에서 고조된 지극히 정서적인 일본 동정론도 마찬가지로 단순한 발상의 산물이다. 그런 단순한 유형화의 밑바탕을 이루는 것이 어떤 사회에 속한 사람들을 ‘국민’이라는 지표로 일괄하고, 자기 자신도 거기에 포함시켜 유형화함으로써 안심을 얻으려 하는 ‘국민주의’ 심성이다. 이 심성은 ‘국민’ 내부의 차이나 대립을 은폐하고, 동시에 내부의 타자를 항상 외부화해 배제하려는 기능을 지닌다. (p.275-276)

 

 10여 년 전 오키나와에서 알게 된 한 목사를 나는 떠올렸다. 그는 후텐마 기지 바로 옆에 살면서 말 그대로 자신의 인생을 걸고 기지 반대 투쟁을 이어 가고 있었다. 그의 두 손은 소나무 뿌리처럼 거칠었고 엄지손가락은 납작하게 우그러져 있었다. 일본에서 기독교 신자는 마이너리티이며, 일반적으로 목사의 수입으로는 생활이 어렵다. 그래서 그는 생계를 위해 아내와 함께 조그만 인쇄소를 운영했는데, 종이를 훑어 내고 접는 하루하루의 노동으로 손과 손가락이 변형된 것이다. 얼마 전 텔레비전 뉴스를 보다가 우연히 기지 반대 농성을 벌이고 있는 사람들 속에서 그의 모습을 발견했다. 지나간 10년의 세월만큼 늙었지만, 그는 여전히 싸움을 계속하고 있었다. 강정과 오키나와에서 만난 사람들, 국가 폭력의 최전선에서 저항하는 사람들 덕에 우리의 양심은 잠에 빠지는 것으로부터 간신히 구원받고 있다. (p.2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