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정빈의 환영 : 영화관을 나서며 / 손정빈 / 편않
그러니까 영화 기자가 되고 지금까지 이 일을 하는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만약 대학을 늦게 들어가지 않았다면 그렇게 매일같이 영화를 보진 않았을 것이고, 하필 『씨네21』을 읽지 않았다면 도서관 시청각실에 가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때 영화를 많이 보지 않았다면, 어쩌면 영화를 취재하는 일에 큰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얼른 다른 부서로 옮겨 갔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 모든 일들이 병천에 간 그날과 연결되어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병천에 갔기 때문에 기자가 되었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병천에 가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 완전히 다른 삶을 살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번에도 역시 이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억지 같은 소리라고 생각하지만, 그런데도 이런 생각을 완전히 떨쳐 낼 수 없다. 그럴 때마다 묘한 무력감과 아름다움을 동시에 느낀다. 어떤 것도 내가 통제할 수 없고 어떤 일도 내가 예상할 수 없어서 고통스러운 삶이지만, 모든 게 뜻대로 되는 인생이라면 이미 정해진 끝에 도달하기 위해 그 긴 세월을 견뎌야 할 이유도 없을 것이라고. (p.27-28)
처음 일한 곳이 문화부가 아니었다면 계속 기자 생활을 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가끔 생각한다. “마음대로 써.” 이 한마디가 나를 나 스스로에 집중할 수 있게 했던 것 같다. 마음대로 쓴 기사의 주도권은 당연히 온전히 나에게 있을 테니까, 지시나 의무 혹은 강요 없이 내가 하고 싶어서 한 일이었기에 누군가의 성과와 비교할 일도 많지 않았다. 쓰고 싶은 기사를 쓸 때 중요한 것은 나의 기준을 충족시키는 일이었다. 기사라는 것, 저널리즘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독자와 사회를 향한 것일 테지만 그때 나에게는 그런 것이 아무래도 중요하지 않았고, 그럴 여유도 없었다. 나는 나를 위해 기사를 썼다. 만약 사회부나 정치부에 가서 시키는 일들을 해야 했다면, 나는 동기들과 나를 비교하고 나의 기사와 다른 이의 기사를 비교하며 나를 후려쳤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면 그때 나는 나의 부족함을 자책하며 짐을 싸서 집으로 갔을 수도 있다. 문화부장의 그 독특한 업무 철학은 내 안의 열패감에 내가 파묻히지 않게 했다. 그는 모르겠지만, 나는 문화부장에게 큰 빚을 지고 있다. (p.41)
지난해 초 이상문학상 수상 결과에 관한 기사를 읽다가 수차례 다시 읽은 대목이 있다. 그해 이상문학상 대상은 이승우 작가가 쓴 「마음의 부력」이었다. 그는 수상 소감을 이렇게 말했다. “소설가가 자기가 한 일로 상을 받는 것은, 규칙과 반복이 지배하는 ‘사무원’의 사무실로 갑자기 낯선 손님들이 찾아오는 것과 같은 사건입니다. …… 손님들에게 그 이유를 따져 묻는 대신 다시 ‘사무원처럼’ 내 일을 하려고 합니다.” 자신을 사무원에 비유한 이 표현은 이승우 정도 되는 작가에게는 지나치게 겸손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이 말에 큰 위로를 받았다. 소설을 쓰는 이승우 작가도 자신을 규칙과 반복으로 일하는 사무원이라고 일컫는데, 그렇다면 규칙과 반복 없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새삼스러운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낯선 손님이 찾아왔을 때 그 이유를 따져 묻는 대신 사무원처럼 다시 일을 할 수 있으려면 규칙과 반복을 지배하고 있어야 할 것이다. 그 지배를 위해 나는 규칙적으로 반복해서 무엇이든 써 보려고 한다. (p.52-53)
서울에는 좋아하는 영화관 두 군데가 있었다. 그중 하나가 명동 중앙극장이었다. 어쩌다가 중앙극장에 처음 갔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중앙극장에 처음 간 것은 이명박 당시 서울시장이 만든 버스 중앙차로가 없던 시절이었으니까, 아마도 2003년 정도였던 것 같다. 그때부터 그 극장에 참 자주 갔다. 그때에는 사람 붐비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는데, 중앙극장에는 사람이 거의 없어서 좋았다. 영화가 끝나면 극장 바로 앞에서 광역버스를 타고 성남에 있는 집으로 바로 갈 수 있어서 편하기도 했다. 누군가를 명동에서 만난 후 곧장 집에 가기 싫을 때면 중앙극장에 가서 아무 영화나 골라서 보고 집에 갔다. 무엇보다 좋았던 것은 중앙극장 특유의 낮은 천장이었다. 그 낮게 깔린 천장은 바깥의 넓은 공간과 대비되면서 영화관 안으로 진입했다는 느낌을 주었다. 온통 검은 상영관 안에서 영화를 본 후 다시 그 낮은 천장의 극장 내부를 거쳐 밖으로 나와 뻥 뚫린 세상을 마주하면 시간이 잠깐 멈췄던 것 같은 기분이었다. 위치가 그렇게 좋은데도 유독 관객이 없는 극장이어서, 영화가 끝난 후 사람과 차로 북적이는 대로를 마주하면 딴 세상에 있다가 온 것 같았다. (p.60-61)
“선배, 코로나 터지고 들어온 후배들은 현장 경험이 없대요.” 최근 같은 팀 후배에게 들은 말이다. 현장에 나간 적이 없는 기자가 있다는 것은 한 번도 떠올려 보지 못했다. ‘과연 이상한 상황이 벌어졌구나’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제작보고회든 인터뷰든 기자 간담회든 기자회견이든 간에 현장에 가는 것과 가지 않는 것은 완전히 다르다. 누군가의 말을 받아써서 그걸로 기사를 쓴다는 행위 자체는 동일할지 모르지만 현장에서 누군가의 목소리를 직접 듣는 것과 스피커나 이어폰을 통해 듣는 것은 같다고 할 수 없다. 현장에는 분위기라는 것이 있고, 그곳에 누구와 있었는지 또 누구를 만났는지에 따라 기사는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현장에 가지 않고 온라인으로 듣고 기사를 쓰는 것에는 변수가 전혀 없다. 당연히 같은 상황에 처한 기자들은 서로 유사한 기사를 쓰게 된다.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일과 집에서 영화를 보는 일이 전혀 다른 체험인 것처럼 말이다. 중앙극장이 없어지고 씨네코드선재가 사라지더니, 이제는 영화관이라는 현장이 사라지는 것만 같아서 나는 종종 텅 빈 영화관을 가만히 보고 있을 때가 있다. (p.64)
나는 나를 위해 썼다. 저널리즘 같은 것은 없었다. 기자 생활 초기에는 경력이 조금 더 쌓이고 나면 대단하지는 않더라도 나름의 저널리즘이 생기고 그 가치를 지키기 위해 기사를 쓰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런 모습을 꿈꿨다. 하지만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저널리즘이라는 단어의 정의는 기자마다 다르게 생각하겠지만, 어쨌든 이 말에는 사회를 나은 곳으로 만들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다. 나에게는 공익을 위한 마음이 거의 없었다. 나는 그저 기사를 잘 쓰고 싶었다. 이유는 잘 모르겠다. 내가 그걸 원했기 때문이라는 말 외에는 달리 할 말이 없다. 저널리즘의 부재는 때로 콤플렉스였다. 과거에 어떤 기자가, 요즘에 어떤 기자가, 외국에서 어떤 기자가 그들이 쓴 기사의 사회적 가치나 국민의 알 권리 같은 것을 언급하면 나는 왜 저런 대의에 관심이 가지 않는지 생각하고는 했다. 영화 담당 기자가 아니라 정치부·사회부·산업부 기자일 때에도 그랬다. 나는 그저 잘 쓴 기사를 원했고, 기사의 사회적 의미는 크게 생각하지 않았다. (p.69-70)
요즘에는 그런 일이 거의 없지만, 몇 년 전만 해도 나는 완성도가 낮은 영화를 강하게 비판했다. 영화를 본다는 것은 돈과 시간을 쓴다는 뜻이다. 티켓 두 장을 사면 3만 원에서 4만 원을 쓴다. 시간은 러닝타임 100~120분에다가 영화를 고르고 상영 시간을 선택하고 극장에 가서 영화를 본 후 극장을 빠져나오는 시간만큼 더 든다. 그럼 1시간 40분짜리 영화를 보는 데 아무리 적게 잡아도 3시간을 쓴다. 최소 3만 원에 3시간. 영화를 보는 데에는 이렇게 많은 비용이 든다는 점 때문에 관객의 돈과 시간을 허투루 쓰게 만드는 영화는 비판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영화도 돈 받고 파는 상품과 다르지 않으니 이 계산이 당연하다고 여겼다. 나는 내가 쓴 기사에도 이 논리를 똑같이 적용했다. 물론 돈을 직접 내지는 않지만, 나의 기사를 보는 사람들은 시간이라는 비용을 쓴다. 내가 쓴 글을 읽는 일이 누군가의 시간을 죽이는 일이 되는 것은 견디기 어려웠다. 나의 정신 건강을 위해서 기사를 잘 쓰고 싶었다. 내가 자신있게 내보일 수 있는 기사를 쓰려고 했다.
다만 나는 “기레기”이기도 했다. 이 부서 저 부서를 옮겨 다니며 온갖 잡스러운 기사를 써 댔다. 그 잡스러움은 조회 수와 광고·홍보에 달려 있었다. 소셜 미디어에 매우 관심이 많은 어느 대기업 부회장의 인스타그램을 보고 기사를 썼다. 조회 수가 잘 나왔으니까. 그 부회장은 그 기사를 캡처해 인스타그램 계정에 또 올렸다. 그 게시물에는 여지없이 “기레기”라는 댓글이 달렸다. 대기업 광고·홍보용 기사도 참 많이 써야 했다. 내가 속한 회사가 그 기업으로부터 광고비를 받았으니까. 그런 기사에는 종종 얼마 받고 이런 기사를 쓰냐는 댓글이 달렸다. 나도 그게 궁금했다. 연예인의 시답잖은 사생활에 관한 기사도 썼다. 그들이 돈을 얼마나 벌고 살을 얼마나 뺐는지에 관한 것들이었다. 이 모든 것이 결국 돈 문제였다. 조회 수도 돈, 광고·홍보도 돈. 어떤 기자는 종종 “기레기”라는 말에 모욕감을 느낀다고 말했지만, 나는 그런 적이 없었다. 내가 때로 “기레기”였으니까.
기사 쓰는 것, 글 쓰는 것이 좋았다. 스트레이트 기사를 쓸 때에는 취재한 각종 팩트를 가장 읽기 좋게 구성하는 일이 재밌었다. 해설 기사를 쓰는 일은 다양한 사실관계를 논리적으로 이어 붙여 가며 설득력 높은 분석을 담아낼 수 있어서 매력적이었다. 영화를 담당할 때에는 리뷰 기사는 리뷰 기사대로, 인터뷰 기사는 인터뷰 기사대로 쓰는 즐거움이 있었다. 그러니까 쓰고 싶은 기사들을 눈치 보지 않고 쓰려면, 잘 쓰고 싶은 기사를 정말 잘 쓰려면, 때로는 “기레기” 짓을 할 필요가 있었다. 언론사 역시 돈이 없으면 굴러갈 수 없는 기업이고 돈은 대체로 조회 수와 광고에서 나온다. 나는 완전한 “기레기”가 되지 않으려고 부분적으로 “기레기”가 될 수밖에 없었다. 좋게 말해서 내가 속한 조직과 철저한 기브 앤 테이크 관계를 맺었다고 해야 하나. 아마도 내가 쓴 기사 중에 어떤 것을 보느냐에 따라 나에 대한 평가가 극명하게 갈릴 것이다. 저널리즘 같은 것이 없는 기자라는 것이 이럴 때는 편하다. 남들이 나를 어떻게 이야기하든 별로 상관이 없어져 버리니까. (p.71-73)
기자 생활 10년째이다. 아주 긴 시간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10년을 일했다고 생각하면 나 스스로도 잘도 견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10년간 기자 외에 다른 직업을 생각해 보지 않았다. 천직까지는 아니어도 잘 맞는 일이라고 여기기는 했다. 기자 일을 관두지 않은 데는 여러 이유가 있지만, 가장 결정적인 것은 기사 쓰는 일, 글 쓰는 일에 질리지 않았다는 점이다. 아주 조금씩이라도 글이 전보다 나아졌다는 느낌을 꾸준히 받은 것이 큰 동력이었다. 실제로 과거에 썼던 기사보다 최근에 쓴 기사가 낫다는 것을 스스로 수차례 확인했고, 기사를 쓸 때 나만 알 수 있는 어떤 감각 같은 것이 더 좋아졌다고 판단했다. 그 감각은 정확히 말로 표현하기는 어렵지만 예전보다 경험이 쌓여서 생긴 변화인 것 같다. 그리고 앞으로도 나의 글이 좋아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면 이 일을 조금 더 해도 괜찮겠다는 용기가 생긴다. 밤늦게까지 기사를 붙잡고 있다가 ‘이게 다 무슨 소용이냐’고 생각하던 적이 있었는데, 그게 아무 의미 없는 일은 아니었다는 것이 나를 위로해 준다. (p.76)
그는 매거진을 어떻게 만들었는지를 이야기했다. 정세현 씨의 말은 과장이 없고 담백했다. 그는 〈우리들〉이라는 영화를 봤고, 혼자만 알기에는 아까워서 더 많은 사람에게 알리기 위해 매거진을 만들기로 했단다. 정세현 씨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일을 제대로 했다. 매거진을 정식 판매하기 위해 1인 출판사를 차렸고(출판사 등록을 해야 바코드를 받을 수 있다), 매거진에 〈우리들〉의 스틸 컷을 넣기 위해 영화사를 통해 정식으로 저작권 문제를 해결했다. 필진을 구성해 글을 모았고, 그 글들을 모두 편집했다. 디자인에도 관여했으며, 크라우드 펀딩을 해 제작비 일부를 충당했고, 매거진이 나온 후에는 출간을 기념해 영화 상영회를 열고 윤가은 감독과의 GV도 진행했다. 그는 이 일을 거의 혼자서 했다. 정세현 씨는 일회성 이벤트로 이 프로젝트를 시작했다가 성취감을 느껴 계속 이어 가 보기로 했다. 그렇게 〈플란다스의 개〉를 다룬 매거진도 나왔다. 그는 〈우리들〉 매거진을 만들 때의 그 번거롭고 수고스러운 작업을 똑같이 반복하면서 동시에 봉준호 감독과 인터뷰를 따내는 데도 성공했다.
그날 정세현 씨와 나눈 대화는 이게 전부였다. 소소한 일상, 책 만드는 이야기. 그가 어떤 사람인지 한 번 만나서는 알 수 없었지만, 그가 매거진을 진심으로 만들고 있다는 것은 모를 수가 없었다. 손이 많이 가서 귀찮고 큰 성과는 기대할 수 없는 작업을 그는 기꺼이 했고 계속하고 있었다. 정세현 씨가 하는 일은 어쩌면 아무 의미 없는 일이었다. 영화 매거진을 만든다는 것이 명예를 가져다 주지는 않을 테고, 더군다나 책을 만드는 일로 돈을 벌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시간과 돈을 써야 하고, 취미 생활이라고 하기에는 상당히 피곤한 일이다. 말하자면 그는 어떤 효용도 없는 일을 정성스럽게 하고 있었다. 만약 누군가 이런 종류의 일을 하고 있다면 그만하는 편이 낫지 않겠느냐고 반응하는 것이 자연스럽겠지만, 나는 오히려 정세현 씨가 그 작업을 더 오래 할 수 있기를 바랐다. 나는 그의 인간성에 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지만, 책을 만드는 모습을 보면 그는 스스로 삶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렇게 만든 동력으로 몸을 움직일 줄 알았다. 그 모습이 나의 마음을 움직였다. (p.84-85)
나는 『무비고어』를 2021년 4월에 냈다. 그 만남 이후 곧바로 작업에 들어갔고, 정세현 씨가 그랬던 것처럼 책이 나오는 과정에서 해야 하는 대부분의 일을 혼자 하면서 나만의 영화 매거진을 완성했다. 나는 『무비고어』에 여러 의미를 담았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했던 점은 정독할 만한 영화 글을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것이었다. 그들이 영화에 투자한 그 많은 시간을 내가 만든 매거진으로 일부분 보상해 주고 싶었다. 나는 이 내용을 매거진의 맨 첫 장 “편집장의 편지”에 썼다. 첫 번째 매거진을 출간한 후 엄청난 성취감이나 희열을 느끼지는 않았다. 기쁘다거나 행복하다는 감정도 없었다. 매거진을 냈다는 것이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다만 아무 일도 없던 일상에 나 스스로 균열을 낼 수 있고, 그것은 누구도 아닌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을 알았다. 매거진이 나온 후 정세현 씨를 다시 만났다. 그는 축하한다며 이렇게 말했다. “저한테 책 만드는 일에 관해 물어본 사람은 많아요. 근데 정말 만든 사람은 정빈 님 한 명뿐이네요.” (p.86-87)
일하다 보면 허탈할 때가 있다. 중요하고 의미 있다고 판단해서 공을 들여 쓴 기사가 별다른 반응을 얻지 못한 채 쏟아지는 다른 기사들 속에 파묻힐 때이다. 기사 가치가 조회 수와 댓글로 매겨지지 않는다고는 해도, 누가 봐도 좋은 기사를 썼다고 생각했는데 예상보다 반응이 없으면 어쩔 수 없이 기운이 빠진다. 게다가 각종 가십 기사에 달린 수백 혹은 수천 개의 댓글을 보고 있으면 기사를 더 예리하게 쓰지 못한 나를 탓해야 하는지, 나의 기사를 읽지 않는 독자를 탓해야 하는지, 그것도 아니라면 포털 사이트를 탓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다. 물론 기사 하나에 일희일비하지는 않는다. 업무 결과를 대중에게 실시간으로 확인받는 일을 10년간 하다 보면 그렇게 된다. 정치 기사나 사건·사고 기사와 비교해 상대적으로 반응이 적은 영화 기사를 쓸 때에는 나의 일이 일종의 아카이빙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당장 눈에 띄지는 않아도 누군가가 정보를 얻기 위해 인터넷을 검색했을 때, 언젠가 나의 기사가 유용한 정보로 쓰일 것이라고 여긴다.
아무리 좋은 쪽만 보려고 해도 그게 잘 안 될 때가 있었다. 내가 지금까지 써 온 기사나 앞으로 쓸 기사가 다 무슨 소용인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나의 기사 따위는 있으나 없으나 이 세상에 어떤 영향도 주지 않는 것이 아닌가.’ 괜한 넋두리가 아니라 진심이었다. 실은 아무것도 아닌 일이고 기껏해야 월급이나 타 먹으려고 하는 일에 애써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아닌지 자문했다. 예를 들면 바로 앞에서 언급한 ‘아카이빙’ 이야기 같은 것들. 이런 생각들을 하다 보면 일을 넘어서 삶 전체를 그렇게 보게 된다. 삶의 순간마다 나에게는 매우 중요하다고 여겼던 일들이 시간이 지나고 나서 보면 별것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 때가 누구에게나 있지 않나. 그러다 보면 내가 지나온 꽤 긴 시간 동안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 것만 같았다. 그럴 때마다 올리비아의 말을 떠올렸다. “내 인생에 뭔가 더 있을 줄 알았어.” 그렇다고 해서 올리비아처럼 우는 일은 없었다. 그냥 그렇다고 받아들여 보려고 애썼다. (p.118-120)
지난 10년간 이런저런 글을 써 온 데는 다양한 이유가 있었다. 일단 그게 일이기도 했고, 취미 생활이기도 했으며, 나를 드러내는 수단이기도 했다. 돈을 벌려고 썼고, 나의 만족을 위해서 썼던 것도 같다. 그런데 결혼을 하고 아내가 나의 1번 독자가 되고 나서 5년 가까이 시간이 흐르자 나는 어느 순간부터 아내에게 보여 주기 위해 글을 쓰고 있었다. 아내를 위해서 쓰는 글이니까 아내만 봐 주면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글을 쓰는 가장 큰 이유가 아내인 것은 맞다. 아내가 나의 글을 한 번 읽는 것은 그 어떤 것도 대체할 수 없는 조회 수 1회였고, 나의 글에 대한 아내의 코멘트는 그 어떤 것도 대신할 수 없는 댓글 1개였다. 그리고 그 1회의 조회 수와 1개의 댓글은 오랜 시간 나와 나의 글을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열렬히 지지해 주었다. 내가 쓴 글이 수없이 쏟아지는 각종 텍스트에 휩쓸려 어딘가에 처박히게 되면 속상하겠지만 그래도 아내가 읽어 주었으니 아무 의미가 없었던 것은 아니라고, 대체할 수 없는 의미를 얻었다고 여길 수 있게 되었다.
“내 인생에 뭔가 더 있을 줄 알았어.” 나는 이 대사를 여전히 생각한다. 애써 하는 일들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될까 봐 두렵고, 삶이 어떤 의미도 없이 흘러가 버리는 것만 같아서 무력할 때도 있다. 아마도 나는 평생 올리비아의 이 말을 극복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래도 이제는 오래 우울해하지 않는다.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금세 그런 감정에서 빠져나온다. 이 모든 것을 아내라는 뒷배가 있어서 할 수 있다. 앞서 나는 “내 인생에 뭔가 더 있을 줄 알았다”는 말 뒤에는 “그러나 특별한 뭔가는 없었다”는 말이 생략되어 있다고 했다. 이제는 그 뒷문장을 고쳐 써도 괜찮을 것 같다. “그래도 아내가 있었다”라고. 최근에 본 영화 중에 인상적인 대사가 있었다. 브래드 피트가 주연한 영화 〈애드 아스트라〉(2019)에 나오는 대사이다. 긴 우주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로이(브래드 피트)가 말한다. “이제 소중한 것에만 집중해서 살 겁니다. 삶이 어디로 흘러갈지 모르지만 걱정하지 않아요. 가까운 사람들과 의지하며 살면 되죠.” 나도 이 말처럼 살아 보려고 한다. (p.121-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