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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평온하게 죽고 싶습니다 / 송병기, 김호성 / 프시케의숲

 

 오늘날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생의 끝자락은 3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 돌봄의 경로가 삶을 ‘임시적인 상태’로 만든다는 점이다. 환자가 안심하고 지낼 수 있는 곳이 없다. 집, 요양원, 요양병원, 급성기 병원 모두 불안한 장소이다. 환자는 의료라는 ‘컨베이어 벨트’를 타고 자꾸 어딘가로 이동해야 하는 대상으로 변모한다. 의학적 판단에 따라서 환자 삶의 형식이 규정되는 셈이다. 그 과정에서 환자의 일상, 관계, 역사, 즉 목소리는 주변으로 밀려난다.
 둘째, 생애 말기 돌봄을 함께 이야기할 ‘상대’가 없다는 점이다. 생애 말기는 갑자기 인생의 진리를 깨닫는 시간이 아니다. 여전히 일상의 연속이다. 다만 돌봄의 중요성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시기이다. 예컨대 생애 말기를 어디서 보낼지, 누구에게 돌봄을 받을지, 어떤 의료 처치를 지속하거나 중단할지, 생계를 어떻게 유지할지, 임종은 어디서 할지 등등 여러 사안에 대해 생각하고 준비할 필요가 있다. 생애 말기 돌봄은 내밀하고 복잡하고 전문적인 일이다. 개인이 혼자 하기는 힘들다. 누군가와 함께 대화하고 계획을 세워야 한다. 문제는 그 ‘누군가(제도)’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환자와 가족이 생애 말기 돌봄을 요양병원 의사나 대학병원 의사와 논의하기는 어렵다. 만약 생애 말기 돌봄을 시장에 내맡긴다면, 정치의 존재 이유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셋째, 생의 끝자락에 대한 ‘상상력’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점이다. 대개 생의 끝자락에 대한 상상은 어떤 병원을 가서, 어떤 의사를 만나고, 어떤 약을 먹고, 어떤 수술을 받아야 하는지에 대한 것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 이러한 상상은 치료를 받고 회복을 기대할 수 있는 시기에는 유용하다. 하지만 치료를 받아도 회복을 기대하기 어려운 생애 말기에는 어울리는 상상이 아니다. 생애 말기는 ‘지난한 돌봄’과 함께한다. 가령 환자가 음식을 삼키지 못할 때, 의학적 진단과 처치를 넘어서 어떻게 그 ‘취약함에 응답’할 수 있을지 다양한 사람들이 다각도로 고민해야 하는 시간이다. 환자와 의료진의 관계, 돌봄과 의료의 관계가 근본적으로 달라져야 하는 생의 끝자락에 대한 풍부한 상상력이 절실하다. (p.14-15)

 

김호성 말기 환자의 고통은 신체적인 요인뿐 아니라 심리적·사회적·경제적·영적 요인들의 영향을 받는 총체적 고통(total suffering)입니다. 말기 환자의 이런 총체적 고통을 다각도로 살펴 해결하기 위해서 다학제팀(multidisciplinary team)을 구성하게 되는데요. 다학제팀은 ‘다면적인 한 인간이 마주한 문제를 다루기 위해서는 다양한 직제의 사람들이 협력해야 한다’라는 상식에서 출발했습니다. 이는 20세기 초 영국의 사회복지사이자 간호사, 의사인 시슬리 손더스가 이야기한 현대 호스피스 운동의 핵심 개념입니다. 따라서 호스피스에서는 의사와 간호사, 사회복지사, 종교인, 자원봉사자, 음악·미술 치료사 등의 다양한 직군이 팀을 이루어 전인적 돌봄을 제공합니다. (p.37-38)

 

김호성 기본적으로 1인실이 쾌적하고 편안합니다. 다만 모든 환자들에게 그렇지는 않다는 것을 경험합니다. 심지어 1인실로 갔다가 다시 2인실로 옮기기도 합니다. 그곳만의 특수성이 있거든요. 가령 2인실에서 한 환자는 거동이 여의치 않으나 다른 환자는 나쁘지 않은 체력일 수 있는데, 그러면 상태가 괜찮은 환자가 옆의 환자를 챙겨줍니다. “간호사님, 이 환자가 아파요. 와서 좀 봐주세요” 하는 식으로요.
 환자들과 보호자들 간에도 이런 관계가 맺어집니다. 옆 환자의 보호자가 다른 환자의 간식을 챙기기도 하고 이것저것 신경 쓰지요. 한번은 어머니를 여읜 한 여성 보호자가 있었는데요. 간병 기간에 옆 자리에 있던 환자와 라포(Rapport, 상대방과 형성되는 친밀감 또는 신뢰관계)가 쌓여서, 그 환자 임종 이후에 열린 사별가족 모임 때 함께 참여한 적도 있습니다. 또 자신의 가족을 여의고 나서도, 옆자리 환자가 생존해 있으면 잘 있는지 계속 찾아오기도 하고요. (p.43)

 

김호성 통증 기간과 통증 평균보다 더 의미 있는 것은, 가장 큰 통증과 가장 마지막 통증의 평균값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 앞서 말기 환자들의 시간이 ‘선형적이지 않고 장소와 인간관계에 의해서 비선형적으로 구성된다’고 이야기했는데요, 그것과 이 연구는 맥이 닿아 있습니다. 즉 말기 환자와 그를 돌보는 가족들의 시간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느끼는 선형적 경험보다는, 타인에 의해 구성되어 만들어지는 기억의 총화에 가깝습니다.
 이 이론을 호스피스에 적용해보면 어떨까요? 환자·보호자들은 어떻게 해야 호스피스에서 잘 지냈었다고 기억할까요? 얼마나 더 오래 살았는지 하는 것만이 가장 중요한 게 아닙니다. 호스피스 입원 이후 환자의 심한 고통을 경감시키고, 또 마지막에 좋은 기억이 남도록 환경을 조성하면, 결과적으로 환자와 보호자들이 의미 있는 경험을 하게 될 가능성이 있다는 뜻입니다. 이는 환자의 재원 일수, 더 나아가 이전 투병 기간에 겪은 고통들에 대한 해석마저 달라지게 할 수 있습니다. 호스피스에서 사별가족들과의 마무리를 중요하게 여기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볼 수 있습니다. (p.60-61)

 

김호성 말씀을 들으면서 ‘자율성’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게 됩니다. 호스피스에서 어느 중년 남성 환자는 스스로 화장실만 못 가도 삶의 의미를 잃어버리고 많이 우울해하더군요. 책임감이 강하고, 자기 결정에 대한 감각이 발달한 분이었죠. 만약 한국 사회가 자율성이 조금 제한된 사람도 큰 무리 없이 사회적 관계를 영위할 수 있는 곳이었다면, 어쩌면 그분의 자기 인식도 사뭇 다르지 않았을까요? 옛날에는 동네에서 어떤 어르신이 좀 이상한 말을 하더라도 주변 분들이 “응, 응” 하고 장단을 맞춰주고 그랬잖아요. 인지적인 어려움을 겪더라도 주변 사람들이 그의 삶의 리듬을 존중하고 관계를 잘 유지한다면 질병의 경험이 달라질 것 같습니다.

송병기 ‘인구소멸’이니 ‘가족해체’니 하는 말이 유행가처럼 울려퍼지는 요즘, 그런 관계를 기대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오히려 친족과 공동체에 대한 새로운 상상과 실천이 필요할 때입니다. 한편, 환자는 질병 때문에 단지 ‘아프기’만 한 사람이 아닙니다. 오히려 질병을 ‘경험’하며 이전과 다른 삶의 서사를 쓰고 있다고 봐야 합니다. 기존에 갖고 있던 습관, 성격, 가치, 일상이 정지하거나 증발하는 게 아니라, 질병을 경험하며 그것이 재해석되고 재구축되는 시기인 것이죠.
 그런데 현실에서 우리는 질병을 어떻게 경험하고 있나요? 가령 말기를 투병의 결과, 즉 병과 싸워서 진 상태로 보고 있는 건 아닐까요? 몸의 기능 부전이 인생의 손상으로 이어지고 있는 건 아닌지요? 생애 말기가 무가치한 것으로 취급되거나 주변 사람들에게 부담으로 여겨지고 있지는 않을까요? 환자의 일상과 서사는 주변화되고 오로지 ‘몸 그 자체’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는 건 아닐까요? 우리가 질병을 인식하고 경험하게 하는 ‘현실’이란 무엇인지 질문해야 합니다. (p.65-66)

 

송병기 저도 검사, 응급, 수술 등으로 바쁘게 돌아가는 이른바 큰 병원에 호스피스 병실을 만드는 게 가능한지, 괜찮을지 의문이 듭니다. 말기 환자가 지내기에는 동백 성루카병원 같은 호스피스가 더 나을 것 같습니다. 차라리 종합병원은 그동안 해왔던 일을 더 잘하게 하고, 완화를 목적으로 디자인된 호스피스는 따로 만들어가는 게 훨씬 현실적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이를 치료 공간과 돌봄 공간의 분리로 보면 곤란합니다. 그보단 ‘의료 다양성 증진’으로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수술을 전문으로 하는 병원이라고 해도 돌봄은 중요하고, 완화를 전문으로 하는 병원이라고 해도 치료가 부재한 것은 아닙니다. (…)
 단순히 병원 수를 늘리는 게 아니라, 선생님 지적대로 다채로운 공간이 많아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골절로 거동이 불편한 환자가 회복 때까지 단기간 입원해 돌봄을 안심하고 받을 수 있는 공간이 동네에 하나쯤 있으면 어떨까요? 환자의 평소 삶의 리듬을 존중하는 재택의료가 늘어나면 어떨까요? 이는 말기 환자나 노인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나이와 상관 없이 누구에게나 해당될 수 있습니다. 누구나 아플 수 있으니까요. (p.72-73)

 

송병기 저는 바로 그러한 ‘사회적 상상’을 비판적으로 살펴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건강, 정상, 독립, 자율로 대표되는 몸이란 과연 무엇일까요? 거기에 한 사람의 일상, 관계, 돌봄, 상호의존성에 대한 이야기는 어디로 증발했을까요? 또 언제 도래할지 모르는 치료라는 가능성, 그 불투명한 미래에 현재를 저당 잡혀야 할까요? 의료가 이제껏 이런 방식으로 발전해왔고, 우리의 생각과 삶의 방식을 재단한 측면은 없을까요?
 지금도 각종 매체에서 ‘100세 시대’ 운운하며 인간이 자연스레 겪는 아픔, 의존, 나이듦, 죽음을 리스크로 만들고 각종 의료기술과 금융상품으로 대비해야 한다고 다그치는 소리와 이미지가 넘쳐납니다. 거기에는 현재 삶의 위상을 발견하게 하는 과거도 없고, 총체적 삶이 전제된 미래도 없습니다. 그러한 현실에서 ‘생명’은 철저히 평가되고, 사람들이 기대하는 ‘이상적인 몸’도 사라집니다. 이제, 다른 삶의 방식을 이야기할 때가 되었습니다. (p.75)

 

송병기 사람에게 음식은 ‘영양’의 차원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입맛’의 차원도 있습니다. 한 노인요양원에서 현장연구를 할 때 이야기를 잠깐 하면, 아침마다 예쁜 컵에 레몬즙을 떨어뜨려 물을 마시던 할아버지가 있었습니다. 레몬즙 두세 방울이 들어간 물이 영양학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어떤 방문객은 그의 행동을 마뜩잖게 봤습니다. 앞으로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사람이 쓸데없는 짓을 한다고 말이죠. 하지만 할아버지에게 그건 매우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입소하기 전부터 해왔던 습관이었고, 자신의 개성을 표현하는 수단이었습니다. 요양원에서 단체생활을 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나’라는 고유한 존재가 여기 살고 있음을 나타내는 의례였습니다. ‘당뇨와 치매가 심한 202호 어르신’과 ‘아침마다 레몬즙이 들어간 물을 마시는 할아버지’의 차이는 매우 큽니다. 예쁜 컵, 레몬즙, 물의 조합은 요양원의 대다수 구성원들을 할아버지의 일상으로 초대했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인생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시간이 꽤 흘렀지만 여전히 제가 그분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p.89)

 

송병기 콧줄에 대한 질문을 이렇게 한번 바꿔볼까요? 나는 콧줄을 한 채 하루 종일 병상에 누워 있고 싶은가? 그렇게 사는 게 좋은 삶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만약 아니라면, 콧줄을 한 채 하루 종일 누워 있는 환자를 그냥 두고 보는 게 괜찮을까? 나는 싫은데, 저 사람은 왜 그런 대우를 받아야 할까? 물론 좋은 삶이란 게 딱 정해져 있지는 않죠. 각자 삶의 방식은 다르니까요. 그럼에도 ‘모두에게 비판적으로 좋은 삶’이 무엇인지 질문을 멈출 수는 없습니다. 그 질문은 내가 추구하는 삶을 존중받기 위해서도 필요합니다. (p.109)

 

김호성 말기 진단은 항암치료의 종결점이지만, 동시에 연명의료 계획 및 호스피스의 시작점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할 점은 말기 진단에는 의사, 환자, 보호자의 판단과 의지와 감정 등 여러 요소들이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일반인들은 말기 진단이 의학적으로 분명하고 정확하게 내려지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의료인류학자 강지연의 연구에서 알 수 있듯, 말기란 의학적 권위에 의해 수동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의사, 환자, 보호자의 관계 안에서 능동적으로 ‘만들어져 활성화되는 것’에 가깝습니다. 즉 의사, 환자, 보호자의 생각이 일치하는 시점에 본격적인 말기라는 상황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이는 어느 한 주체라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말기 상황이 생기지 않는다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말기 진단의 경계가 분명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말기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환자가 호스피스에 입원하면, 통증이 심하지 않아도 심리적으로 불안해하고 힘들어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p.127-128)

 

김호성 더불어 질병에 따라 말기의 경과가 다르다는 점도 알아야 합니다. 말기 암 환자와 말기 비암성 환자 간에 차이점이 있습니다. 먼저 암 환자의 경우, 수술이나 항암치료에 한계가 생기는 말기에 체력이 급격하게 떨어집니다. 통증이나 섬망 등의 증상으로 고통을 받게 되며, 비교적 여명이 예측 가능합니다. 이분들을 위해 한국에는 입원형 호스피스 제도가 있습니다. 호스피스에서 생애 말기 돌봄 계획을 집중적으로 의논하게 됩니다.
 하지만 암이 아닌 환자의 경우, 말기가 되어도 예후가 단시간에 떨어지지 않고 치료 면에서도 변수가 많아 예측이 어렵습니다. 요양원이나 요양병원에 있는 노인 환자들이 여기에 해당되죠. 이분들의 돌봄 경로는 불안정합니다. 대개 이들은 집에서 지내다가 기저질환의 악화로 급성기 병원에 갑니다. 급성기 병원에서 적극적인 치료를 받고 어느 정도 호전은 되지만 다시 집에서 지내기에는 불안한 상태가 됩니다. 그러면 요양원이나 요양병원에 입소하게 됩니다. 거기서 상태가 나빠지면 다시 급성기 병원에 갑니다. 비암성 질환을 겪는 환자들은 그러한 순환을 거듭하게 됩니다. (p.130)

 

김호성 말씀하신 것처럼 한국에서 의료기술의 문제는 항상 보험 급여와 연계되어 있습니다.

송병기 더 나아가 특별한 의료와 통상적 의료의 관계는 정치적 성원권의 문제가 되기도 합니다. 2000년대 초, 만성골수성 백혈병 치료제 글리벡을 둘러싼 갈등이 떠오릅니다. 다양한 쟁점은 차치하고, 그 갈등을 아주 거칠게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다국적 제약회사 노바티스는 효과 좋은 신약의 가격을 비싸게 유지하려 했고, 반면 환자들은 약값을 낮추려고 했죠. 그 둘 사이에서 정부는 조정자 역할을 했습니다. 이른바 대화와 타협의 시간을 거쳐 마침내 글리벡은 건강보험 급여를 적용받는, 즉 진료현장에서 폭넓게 쓰이는 약이 되었습니다.
 제가 주목하는 점은 새로운 약이나 기기 등이 제도화되는 과정도 순탄치 않지만, 한번 제도화된 의료를 환자, 보호자, 의료진이 중단하거나 보류하는 것도 굉장히 어렵다는 겁니다. 이런 현실을 말기 진단 및 연명의료결정과 연결해서 생각해볼 수도 있지 않을까요?

김호성 중요한 지적입니다. 이런 논의는 사실 의료계, 정부, 환자단체가 지속적으로 ‘협상’을 하는 주제이기도 합니다. 말씀해주신 ‘특별한 의료’가 ‘통상적 의료’가 되기 위해서는 의학적 효용만이 아니라 비용 문제가 항상 동반되며, 이는 ‘어디까지’ 공동체가 감당할지에 대한 ‘정치적·경제적’ 이야기로 사실상 넘어가게 됩니다. 보통 환자단체는 말기 환자에게 끝까지 사용할 수 있는 약물에 대한 접근성을, 의료계는 의학적 효용을, 정부는 비용을 강조하곤 하죠.
 다만 말기 환자에게 ‘유용한’ 약물이란 어떤 것일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비용을 천문학적으로 들이고도 생존 여명을 조금밖에 늘릴 수 없다면 과연 유용하다고 할 수 있는가. 더 나아가 그 여명이라는 것이 얼마나 삶의 질을 유지해주는가. 고민스러운 질문들입니다. 물론 최신 치료를 빠르게 급여제도 안에 들여와서 환자에게 접근권을 보장하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하지만 어떤 의사 분들은 그것이 말기 환자에게 실질적으로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에 대해 회의적인 이야기를 하기도 합니다. (p.139-140)

 

김호성 일반 사람들에게는 연명의료결정법이 모호하고 생소한 법률일 것 같습니다. 법의 정식 명칭은 ‘호스피스 완화의료 및 임종 과정에 있는 환자의 연명의료결정에 관한 법률’입니다. 이를 간략히 줄여서 ‘연명의료결정법’이라고 부르는 것이죠.
 이 법은 말기 돌봄의 근간입니다. 다시 말해, 현장의 실천이 이 법의 테두리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법이 무엇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연명의료결정법상에 ‘말기’는 무엇이라고 정의되어 있을까요? 제가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말기 환자란 적극적인 치료에도 불구하고 근원적인 회복의 가능성이 없고 점차 증상이 악화되어 수개월 이내에 사망할 것으로 예상되는 진단을 받은 환자를 말한다.”

 또한 특이하게 ‘임종기’를 별도로 구분해놓았는데요. 역시 읽어보겠습니다.

“임종 과정이란 회생의 가능성이 없고, 치료에도 불구하고 회복되지 아니하며, 급속도로 증상이 악화되어 사망에 임박한 상태를 말한다.”

 말하자면 시한부가 수개월인 ‘말기’가 있고, 그 이후 죽음이 임박했을 때를 ‘임종기’라고 규정한 것입니다. 당연히 외국에도 말기에 대해 정의가 되어 있지만, 이렇게 한국처럼 말기와 임종기를 법으로 명확하게 구분하는 나라는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p.144-145)

 

송병기 앞의 이야기와 연결되는데, 근본적으로 ‘신뢰’의 문제입니다. 신뢰할 수 없는 환경에서 사람들은 돌봄을 하기도, 받기도 어렵죠. 환자, 보호자, 의료진이 함께 논의하거나 의료결정을 내리기도 쉽지 않고요. 현재 연구를 하고 있어서 자세히 말하기는 어렵지만, 저는 한국의 의료현장에서 언급되는 자기결정권 같은 권리들, 또 그곳에서 표출되는 권리들 간의 부딪힘이 불신의 경험에서 형성되고 강화되는 측면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편, 연명의료결정법 18조에 대한 논의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환자의 의사를 확인할 수 없고 환자가 의사표현을 할 수 없는 의학적 상태인 경우”, 가족이 연명의료결정을 대리하는 것에 대한 조항인데요. 저는 법이 환자의 의사를 대리할 수 있는 이를 ‘가족’으로 제한한 점이 오히려 환자가 대리판단을 받을 권리를 축소한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게다가 법이 말하는 그 ‘가족’이란 무엇인지도 의문입니다. 그건 다름 아닌 결혼한 이성부부 중심의 가족입니다.
 다양한 형태의 삶의 방식이 존재하고, 가족의 형태도 빠르게 변하고 있습니다. 이제 4인가구가 아니라 1인가구가 ‘정상가족’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시대입니다. 외동도 많고, 사별하고 홀로 지내는 분들도 많죠. 또 비혼 1인가구, 동성 커플, 동거 관계 등의 형태로 지내는 분들도 많습니다. 그런데 이런 경우 평소 환자와 깊은 관계였다고 해도, 그를 대리해 연명의료결정에 참여하긴 어렵습니다. (p.157-158)

 

송병기 종종 사회과학자들은 자본의 끝없는 증식을 암 세포에 빗대어 표현하는데, 저는 그것을 은유로만 보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암은 정말로 자본의 증식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한국인 사망 원인 1위 암’은 생명을 위협하는 질환인데, 눈으로 비교적 쉽게 보고 판단하며, 치료할 수 있는 여지를 준다는 점, 여러 과의 의료진이 협력해야 한다는 점, 높은 수가가 보장된 각종 검사, 치료제 등 비급여 진료가 가능하다는 점, 최신기기, 신약, 임상 데이터를 끊임없이 촉진한다는 점, 그러한 의료에 있어 시민들의 접근성 향상을 위해 정부가 관여한다는 점, 또 그것이 자본 증식의 새로운 활로가 된다는 점을 생각하면 그렇습니다.
 암이 ‘시각적’이라는 말, 즉 의료기기가 생산하는 ‘이미지’는 자본의 선험적인 조건이라고 할 수 있는 물화된 인식과 경험의 구축을 뜻한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오늘날 아픔, 고통, 말기, 죽음을 둘러싼 구체적인 삶의 조건, 관계, 서사, 역사는 의료기기가 찍어내는 이미지와 부합하거나, 그 이미지로 설명되거나, 그 이미지 저편으로 밀려납니다. 진료실에서 의사가 환자보다 모니터 속 이미지에 더 큰 관심을 보이는 것을 서양의학의 특징으로만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자본과 의료가 밀착된 한국에서 의료기기의 이미지로 재현되지 않는 아픔, 혹은 재현 불가능한 아픔을 어떻게 ‘재현’할 수 있을지를 고민해야 하는 난감함이 있습니다. (p.163)

 

김호성 말기 환자는 사회적으로 ‘소수자’적인 위치에 놓이게 됩니다. 여기서 소수자란, 개성이 없어지고 단지 집단 정체성으로만 그 사람을 설명하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삶의 개별성이 사라지고 말기 환자라는 정체성으로 뭉뚱그려지게 되죠. 제가 학부 의대생 실습 때 느꼈던 말기 암 환자의 모습이 있습니다. 통증 때문에 잠을 못 이루고, 우울해하고, 의사소통이 안 되는 사람들. 병실에서 얼굴이 밝은 암 환자를 거의 못 봤죠. 물론 통증을 비롯한 생물학적인 반응의 결과였을 수도 있겠지만, 그와 동시에 암 환자라는 처지에 맞게 형성된 사회적 자아의 모습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뭐라고 할까요.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사회적 관계가 끊어져버린 모습이었습니다. 호스피스 완화의료의 목적은 이전 삶의 모습을 최대한 회복시키고, 저마다 이전에 가지고 있던 개성을 발휘하게 하는 것입니다. 자기 주도적으로 삶을 유지하는 모습 자체를, 저는 경험적으로 삶의 질이 좋은 상태라고 직감합니다. (p.175)

 

김호성 호스피스가 각기 다른 환자의 고통을 현대의 의료체계 안으로 가져오는 과정은 때로 경외감을 느끼게 합니다. 또한 그것이 여전히 현재의 치열한 문제라는 사실도 절감합니다. 가령 환자가 수용하기 어려워하는 고통이 무엇인지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요? 또 의료진이 최선을 다했지만 어떠한 노력도 도움이 안 될 때 완화적 진정을 한다지만, 그 ‘최선’이라는 것을 어떤 기준으로 판단할까요? 다학제팀마다, 병원마다 판단이 다 다릅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개인이 수용하기 어려운 고통을 종교기관이 아닌 의료 시스템 안에서 평가하고 완화시키려는 시도와 노력인 것 같습니다.

송병기 그렇게 보면 고통이란 말은 유동적으로 쓰이고 있는 셈입니다. 내가 느끼는 고통과 남이 보는 나의 고통이 꼭 일치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저는 시슬리 손더스의 1960년대와 마거릿 소머빌의 1990년대 사이의 시간에도 주목합니다. 그사이에 개별화된 고통을 의학적 언어로 전환하는 ‘고통의 제도화(institutionalization)’가 이루어졌습니다. 예컨대 1970년대 베트남 전쟁에서 패배한 미국의 참전군인 상당수는 고통을 호소하며 자신들을 피해자로 규정하고자 합니다. 그들은 정부로부터 보상금과 구직 지원 등을 얻고자 했고, 그러기 위해선 고통이 전쟁으로 인한 것으로 파악되어 사회적으로 인정받아야 했습니다. 이때 중요한 역할을 한 개념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 Post Traumatic Stress Disorder)’입니다.
 이러한 흐름은 1960년대부터 본격화된 페미니즘 운동과도 연결됩니다. 가령 성폭력을 당한 피해자들의 고통은 개별적 문제가 아닌 구조적 성차별에 희생된 사건으로 조명받았고, 그 고통은 어떤 점에서 나치 수용소 생존자의 고통에 비유되기도 했습니다. 피해자의 고통을 정치적 문제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PTSD와 같은 과학적 언어는 유용했습니다. 의료계 또한 그러한 사회적 요구에 부응하고자 했고, 1980년 DSM-III(미국 정신의학회에서 발간하는 정신장애의 진단 및 통계 편람)에 정식으로 PTSD가 등재됩니다.
 즉, 1960년대와 1990년대 사이에 개인의 고통에 대한 사회적 정당성을 입증하기 위한 움직임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자신의 고통을 인정받기 위해 고통에 대한 표준 지침이자 도덕적 질서를 따른 것이었으며, 이를 자신의 역사성을 상실하는 과정이었다고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요컨대 앞서 언급한 역사적 맥락들 속에서 저는 호스피스 완화의료도 말기 환자의 고통을 새롭게 바라보고, 그 의미를 천착해오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p.233-234)

 

김호성 저는 그런 해결에 대해 쉽게 비판할 수가 없더라고요. 실존적인 문제가 깊이 얽혀 있으니까요. 개개인의 죽음의 선택은 존중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고령화가 진행되면서 근래 한국에서도 의사조력자살 이슈가 회자되고 있습니다. 한 실존의 결단을 개인적으로 판단하는 것을 넘어, 관련 제도를 만드는 것에 대한 논의지요. 다만, 다른 나라와 달리 한국에서는 의사조력자살 논의의 시발점이 개인의 자기결정권보다는 열악한 돌봄 시스템이라는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노인 자살률이 OECD 1위인 나라에서, 또 말기 환자의 대부분이 노인인 상황에서, 그들에게 실존적 선택을 하게 열어주는 ‘제도’를 마련하는 것이 과연 시급한가 하는 회의가 있습니다. 그보다는 이른바 ‘고통’을 세분화하여 면밀하게 접근하는 것이 더 필요하지 않을까요? 육체적 고통, 심리적 고통, 실존적 고통, 사회적 고통을 나누고, 그에 맞추어 전문가가 적절히 개입하는 사회적인 인프라 말입니다. 더 나아가, 그러한 세분화된 고통을 총체적으로 바라보는 호스피스의 전인적 돌봄이라는 가치가 중요하게 여겨지는 사회가 되어야지 싶습니다. (p.238-239)

 

송병기 고통을 함께 나눈다는 말이 와닿습니다. 호스피스 완화의료의 핵심은 고통을 없애는 게 아니라, 고통을 마주하며 함께 나누는 것(com/passion)이라고 생각합니다. 대개 개인이 느끼는 고통은 피하거나 없애야 할 부정적인 것으로 간주되지만, 역설적으로 개인이 고통을 덜기 위해서는 자신의 취약함을 타인에게 알리고 또 나눠야 합니다. 타인이 그 고통에 응답해야 한다면, 그 삶에 관심을 갖고 조심스러운 개입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고통을 통해서 우리는 서로 연결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고 보면 고통은 현실을 다르게 보고 재구성할 수 있는 가능성이기도 합니다. (p.242-243)

 

김호성 돌봄을 생각할 때, 저는 거꾸로 돌봄이 필요하지 않은 상황을 상정해봅니다. 성인이 되었을 때, 신체의 건강이 유지될 때, 스스로 자율적 판단을 할 수 있을 때 등등이 있을 것 같아요. 그런데 이 말은 그런 상황 외에는 돌봄이 필요한 상황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즉 돌봄이 필요하지 않은 시기가 특수한 상황이며, 그 외 삶의 대부분은 누군가의 돌봄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송병기 어쩌면 그 ‘온전한 자율의 시간’도 허상이 아닐까요? 일상은 진공 상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가족, 애인, 친구, 동료, 버스 기사, 식당 종업원, 반려동물 등과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갑니다. 또 물, 전기, 도로 등을 이용하면서 살아갑니다. 누군가는 수도관을 연결하고, 전선을 설치하고, 도로를 깔아야 하죠. 그렇게 범위를 조금씩 넓히면, ‘자율적 인간’이 얼마나 많은 인간들과 비인간들에게 돌봄을 받고 있는지 깨닫게 됩니다.
 더욱이 저희의 대화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듯이 자율성, 즉 목적의식적 의사결정을 할 수 있는 역량이라는 것도 몸, 공간, 사람, 제도, 관습 등에 영향을 받습니다. 환자, 보호자, 의료진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이른바 ‘이성 능력을 갖춘 성숙한’ 사람도 진공 상태에서 의사결정을 하지는 않습니다. 또 예컨대 사람들이 공공장소에서 규칙이나 질서를 지키는 것처럼, 자율성은 공존 가능한 범위에서 조율될 수 있습니다. 요컨대 현실에서 ‘자율’과 ‘의존’은 중첩되어 있습니다.

김호성 그럼에도 중첩보다는 배제의 관점이 작동하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의존과 돌봄은 삶에서 배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닌데 말입니다. (p.248-249)

 

김호성 한국의 현실에서 의료와 돌봄은 분리되어왔고, 또 그렇게 유지되고 있습니다. 이런 분리의 목적은 학문적 개념 정리의 필요성도 있지만, 저는 이것이 기본적으로는 사회의 자원 분배에 관련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의료보험의 적용 대상이 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겠지요. 한국에서는 기본적으로 수술이나 약물 처방 같은 ‘의료’의 영역이, 이를테면 병자 부축이나 목욕, 기저귀 교체 같은 ‘돌봄’의 영역과는 질적으로 다르다는 인식이 있어왔습니다. 다시 말해 의료가 돌봄보다 더 중요하고, 공적인 재원이 더 투여되어야 마땅하다는 사회적 합의가 있어온 것이죠. 그래서 의료는 공적으로 담당한 반면, 돌봄은 사적으로 해결해온 겁니다. 그런 분위기에서 ‘케어(care)’를 돌봄으로 번역했을 때에 생기는 뉘앙스, 그 사회적 함의에 대한 고민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송병기 한편, 돌봄은 젠더 및 계급 문제와 분리할 수 없는 관계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컨대 현재 병원이나 요양시설에서 환자 돌봄을 담당하고 있는 요양보호사와 간병사의 대부분은 중년 여성입니다. 대개 이들은 최저임금 수준의 급여를 받거나 비정규직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이를 우연으로 보기는 어렵죠. 그런데 이들은 ‘환자만’ 돌보는 게 아니라, 환자, 가족, 의료진 사이의 간극을 좁히는 역할도 맡습니다. 돌봄은 환자와 질병 간의 관계, 또 환자를 둘러싼 복잡한 인간 관계를 고려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대개 집에서도 환자 돌봄은 여성이 맡습니다. 보호자와 간병인 역할도 수행하죠. 돌봄은 ‘모든 인간의 삶에서 선결적이며 필수불가결한 실천이자 가치’이지만, 현실은 여성이 취약한 존재를 돌보면서 본인의 삶도 함께 취약해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돌봄은 자원 분배의 문제일 뿐 아니라 책임을 분배하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돌봄을 특정한 개인의 문제, 특히 의무니, 사랑이니, 헌신이니 하는 개인 윤리의 문제로 만드는 사회적 구조란 무엇일까요? 또 의료와 돌봄의 구분을 당연시하는 사회적 상상이란 무엇일까요? (p.250-251)

 

김호성 어떤 환자는 호스피스에 와서 어색해하기도 합니다. 본인이 생각하는 ‘치료’를 하는 곳도 아니고, 죽으러 왔다고 생각하는 공간에서 이른바 환대를 하니 낯선 것이죠. 저희는 그저 환자에게 인사하고, 평상시대로 대하는 것일 뿐인데 말입니다. 사실 현대 사회에서 다른 사람을 ‘도와준다’는 것은 이상한 일입니다. 사람은 기본적으로 본인의 생존욕구와 이익을 도모하는 존재로 상정되죠. 타인을 돕는다는 것은 친족이나 지인, 혹은 장단기적으로 상호이익이 있는 관계를 전제로 해야 성립되는 실정입니다.
 그런데 돌봄의 핵심은 도움이 아니라 ‘환대’입니다. 이 환대에는 어느 조건이 있지 않습니다. 당신이 연약한 인간이고 지금 취약한 상황이니 그에 맞는 안전한 장소와 따뜻한 돌봄을 한다, 이게 전부입니다. 제가 호스피스 기관을 몇 군데 경험한 바로는, 모든 기관들이 항상 동일한 수준은 아니지만 환자를 돌보는 일을 의료적 처치만큼 중요하게 생각하며, 그 돌보는 일의 핵심에는 환대가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환자와 보호자의 입장에선 ‘나를 사람으로 대우한다’고 느낄 테죠. ‘사람으로 대우한다.’ 어쩌면 고루하게 들릴 수 있겠지만, 이것은 호스피스 기관의 가장 중요한 명제입니다.

송병기 그러고 보면 돌봄은 사람이 어떻게 대우받아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에 관해 생각해보죠. 먼저, 정치철학자 김희강은 돌봄을 “취약한 인간에 응답하는, 모든 인간의 삶에서 선결적이며 필수불가결한 실천이자 가치”로 규정합니다. 취약한 인간은 따로 정해져 있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우리 모두 경험적으로 알고 있듯이 인간은 태어나서, 또 죽기 전 일정 기간 타인에게 의존하게 됩니다. 생의 초와 끝자락만이 아니라 삶의 모든 과정에서 돌봄은 필수입니다. 미국의 정치학자 조안 트론토(Joan Tronto)는 민주주의의 본질은 돌봄 책임을 분배하는 것이라고 힘주어 말합니다. 현재 민주주의는 돌봄을 하거나 받는 시민들을 시민으로서 동등하게 대우하지 않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돌봄에 연루된’ 사람들은 경제 활동을 하기도 어렵고, 정치에 관심을 갖기도 어렵고, 공적인 목소리를 내기가 어려운 상황 속에 있기 때문이죠. 한편, 특정한 사람들이 돌봄을 떠맡으면서 또 다른 일부 사람들은 돌봄 활동에 동참하는 것에서 벗어나는, 이른바 돌봄의 무임승차 문제도 지적합니다.
 영국의 ‘더 케어 콜렉티브(The Care Collective)’라는 단체는 가장 가까운 관계부터 가장 먼 관계에 이르기까지 돌봄의 관계를 재정립하며 증식해가자고 주장합니다. 가족에서부터 공동체, 시장, 국가, 땅, 물, 우주적인 규모에 이르기까지 돌봄을 확장적인 방법으로 실천하자는 겁니다. (p.263-265)

 

김호성 역사적으로 한국 정부는 단기간에 많은 사람들에게 의료혜택을 주기 위해 행위별수가제를 채택했습니다. 국가의 재정이 충분하지 않을 때 국민의 의료혜택을 민간에 위임하는 형태로 시작한 것입니다. 즉 민간병원이 대부분인 현실에서 의료진에게 적절한 보상을 주어, 누구나 병원에 쉽게 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선택이었지요. 기본적으로 진찰료나 상담료처럼 사람에 의해 행해지는 의료행위는 단가가 싸게 매겨지고, 영상검사나 혈액검사처럼 의료기기에 의해 이루어지는 행위는 상대적으로 단가가 높게 매겨졌습니다.
 이런 수가제도는 의료의 장기적 지속성을 담보하기는 어렵지만, 의료 소비자는 싸게 의료를 이용할 수 있고, 의료 공급자는 행위의 양을 늘리거나 비급여 부분을 만들어내는 식으로 어느 정도 고소득을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정부는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을 만들어 무분별한 수요와 공급을 통제하려고 했지요. 수십 년간 이러한 제도의 장점도 분명히 있었지만, 돌봄보다는 치료에 중점을 둔 문화가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데 일조하기도 했습니다. 기본적으로 누구나 원하면 치료와 검사가 쉽게 이루어지니까요.

송병기 문제는 의료기관의 대부분이 민간병원이고, 말씀해주신 것처럼 환자 진찰이나 수술에 대한 건강보험 수가는 낮게 책정되어 있는 반면 혈액검사나 영상검사에 대한 수가는 높게 책정되어 있다는 겁니다. 민간병원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수익성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고, 보통 회사처럼 비용은 최소화하고 생산은 최대한 늘리는 일을 하게 됩니다. 병원이 ‘합리적’으로 선택하는 방법은 노동 강도를 강화하고, 임금을 낮게 유지하고, 이윤이 많이 남는 서비스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예컨대 한국의 의료시스템은 병원이 진료 시간은 짧게, 환자는 많이 보는 방식으로 진료량을 늘리고, 각종 검사를 실시하고, 건강보험 범위 안에 없는 비급여 진료를 확대하는 데 동기를 제공합니다. 병원은 불필요한 의료 서비스를 과다 제공할 가능성이 커지고, 의료자원도 낭비되기 쉽습니다.
 주목할 점은 병원의 이윤극대화 추구와 환자의 첨단기술 선호가 맞물린다는 겁니다. 대중매체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듯이 환자들에게 인기 있는 병원은 진단과 치료를 잘하는 ‘명의’와 최첨단 의료장비를 갖춘 곳입니다. 이런 현실에서 호스피스가 환자들에게 인기가 없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돌봄은 의료의 변두리를 맴돌고 있습니다. 상품성이 떨어지는 일, 효과를 측정하기 어려운 일, 부차적인 일, 개인이 알아서 하는 일로 치부됩니다. 이에 따라, 병원이 많은 대도시와 특정한 의료 영역에는 자원이 쏠리는 한편, 농어촌 지역과 필수의료 및 완화의료 영역은 주변화되고 있습니다. (p.295-296)

 

송병기 선생님의 성찰적 태도와 실천이 제 마음에 와닿습니다. 한편, 선생님 삶의 여정이 인상적이고 또 외롭게도 느껴집니다. 그것은 어떻게 보면 호스피스 자체를 떠올리게도 합니다. 현실에서 호스피스는 외딴섬처럼 보입니다. 긍정적으로 말하면 여유가 있다고 할 수 있죠. 환자를 총체적으로 돌보는 곳이니까요. 반대로 말하면 지속가능성에 의문이 든다고 할 수 있습니다. 도무지 돈이 안 되는 일을 하는 곳이니까요. 호스피스가 이상적으로 보이는 한편, 이상한 곳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다 보니 호스피스에서 일을 하는 사람들은 도대체 누구인가라는 근본적 물음도 생깁니다.

김호성 선생님 말씀처럼 대부분 호스피스 기관들의 재정 상태가 여의치 않습니다. 대개 종교단체나 상급병원에 소속되어 어떻게든 적자를 보전하며 운영하고 있죠. 한계에 부닥친 호스피스 기관들은 폐업을 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다학제팀 운영은 많은 인력이 연관되어 있는 데다, 간병인 고용을 지원하는 국가 제도도 튼튼하지 못해 인건비가 만만치 않습니다. 하지만 한국의 다른 모든 분야가 그렇듯, 의료 분야에서도 인력에 대한 수가가 원가에 못 미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다학제팀, 돌봄 인력을 적절히 운영하려면 호스피스 기관의 재정에 손해가 날 수밖에 없는 구조입니다. 장기적 생존이 어려운 것이죠. 지금 호스피스의 돌봄이나 환대라고 하는 것들이 전부 구성원들의 신념, 아니 그것을 넘어 구성원들의 희생에 의해 유지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심각한 상황이죠. (p.298-299)

 

김호성 저는 국가의 재정적인 측면만을 보더라도, 정부에서 호스피스 완화의료를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실행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현 급성기 중심의 의료체계에서 말기 질환에 무의미하게 낭비되는 의료자원이 상당합니다. 호스피스 완화의료는 그러한 낭비를 줄이는 면도 있습니다. 건강보험을 운용하는 공단 입장에서 적절한 호스피스 완화의료의 확산은 장기적으로 보험의 재정적 안정성을 증가시켜줄 것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정책의 일관성과 지속성, 그리고 추진력이 떨어집니다. 일단 공무원들이 호스피스 완화의료 현장에 대해 잘 모르는 데다, 치료적 접근이 제일이라는 도그마에서 벗어나지 못하거든요. 물론 여러모로 노력하고 있는 공무원도 있겠지만 현실의 벽은 상당히 견고합니다. 한 번은 담당 공무원에게 호스피스의 어려운 현실을 토로해본 적이 있습니다. 그때 담당자가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돌봄은 의료의 영역이 아니다”라고 하더군요. 절망적이었지요. (p.301)

 

송병기 여전히 사회보장은 임금노동자를 중심으로 작동하고 있고 돌봄은 가치가 낮은 일로 취급됩니다. 이런 사회적 맥락에서 국가와 의료의 관계를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의료는 임금노동자의 노동력 유지 및 재생산, 그리고 자본 축적이 기여하는 방식으로 발전해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회는 마치 독립적이고 생산적인 개인들로 가득 찬 장소처럼 보입니다. 그곳에서 독립과 의존은 서로 대립되는 개념으로 통용됩니다. 의존적인 사람은 사회적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비사회적 존재’로 취급됩니다. 누군가의 돌봄을 받는 게 미성숙이나 민폐로 인식됩니다. 최근 한 노인복지관에서 어르신들을 대상으로 강의를 했습니다. 생애 말기를 고통스럽게 만드는 현실을 함께 살펴봤습니다. 강의 후반에 이 현실을 어떻게 타개할 것인지 논의를 하는데, 대부분의 어르신들이 “그러니까 가급적 오래오래 건강하게 살면서 자식에게 폐 끼치지 말아야 하고”, “내 스스로 못 먹거나, 움직이지 못할 정도가 되면 빨리 가야 한다”라고 말하더군요. 어르신들은 의존과 돌봄이 어떤 의미인지 경험적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p.306)

 

송병기 끝으로 호스피스에서 돌봄이란 가치의 원동력에 대해 살펴보면 좋겠습니다. 다학제팀이 환자에게 갖는 기본적인 태도나 마음이 있는 것 같습니다. 예컨대 환자의 고통을 마주하며 함께 나누려 한다든지, 환자의 관계와 서사에 관심을 기울입니다. 그런데 외부자인 제가 보기에 그 돌봄의 실천은 굉장한 에너지를 요하는 일입니다. 체력적으로도 그렇고, 정신적·감정적으로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저는 다학제팀이 어떻게 소진되지 않고 그러한 돌봄을 할 수 있는지 무척 궁금합니다. 직업적 사명감, 말기 환자에 대한 연민 같은 것으로는 그러한 돌봄을 지속하기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경제적 보상이 큰 것도 아니고, 제도적으로 특별한 지원을 받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스피스에서는 돌봄이란 가치가 끊이지 않고 생산되고 유통됩니다. 그 원동력은 무엇일까요?

김호성 호스피스에서 오랫동안 일을 하는 사람들끼리 회식 자리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곤 합니다. “왜 도망치지 않고 여기에서 지금도 일하고 있어요?” “그러게요. 저도 잘 모르겠어요.” 저는 물론이고 호스피스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직업윤리에는 충실해야 되겠지만, 반드시 윤리적인 사람이 되어야 이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빨리 그만두게 됩니다. 기대가 큰 만큼 실망도 큰 법이니까요. 여기는 의료계 내에서도 쉽지 않은 현장입니다. 우선 실질적인 노동 강도가 상당합니다. 더불어 온갖 사람들의 고통과 슬픔을 비롯해, 다양한 모습들을 보게 되어 정신적으로 힘든 지점들이 있거든요. 그래서 실질적으로 의료진의 소진에 대한 이슈가 중요합니다.

송병기 윤리나 사명감만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봅니다. 제 주변 다른 의사 선생님들도 공통적으로 하는 말입니다. 어떤 일이든 특정한 목표나 의미만을 추구하며 지속하기는 어렵죠. 돌봄을 하면서 오히려 자기 삶이 취약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타인을 돌보는 사람들이 저임금, 위험, 모욕의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돌봄을 주고받는 관계도 중요하지만, 동시에 그 관계를 돌보는 것에 대해서도 활발한 논의가 필요합니다.

김호성 직업적인 소진이 있음에도, 왜 수많은 의료인들이 이 일을 계속하는가. 제 생각에, 사람은 자기의 유익을 추구하는 본성도 있지만, 그와 함께 다른 사람을 이롭게 하면서 내적 기쁨을 얻는 면도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타인을 위한 헌신이라기보다, 타인에게 유익이 있을 때 내가 기쁘다는 거죠. 이런 맥락에서 저의 경우에도, 죽음의 두려움을 앞두고 있는 환자와 보호자들을 돌보는 일은 힘들긴 해도 큰 보람을 줍니다. 존재의 기쁨이라고 할까요.
 또한 환자의 임종 후에 보호자와의 만남에서 돌봄이 순환되는 것임을 느낍니다. 그건 보호자가 의료진을 돌보는 순간이거든요. 그러고 보면 환자, 보호자, 다학제팀 서로가 서로를 돌보고 있는 거죠. (p.307-309)

 

김호성 얼마 전에 오랫동안 호스피스 영역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온 기관들이 재정 문제 등의 사정으로 폐쇄되었습니다. 해당 기관에서 일해오던 말기 돌봄 전문가들이 순식간에 현장을 떠나게 되었지요. 단순한 의료기관의 폐쇄를 넘어, 말기 돌봄 영역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심란하게 하고 근로 동력을 떨어뜨린 사건이었습니다. 안 그래도 육체적·심리적 소진을 겪는 호스피스 종사자들에게 현실적 여건들이 썩 좋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간다면 더욱 힘들어질 것 같습니다. 적자를 구조적으로 만들어내는 현 제도를 보완하고 호스피스 인력에게 적정 급여를 지급하도록 수가의 구조를 개선해야 합니다. 그래야 말기 돌봄에 적절한 장소를 지속적으로 유지할 수 있고, 그래야 생애 말기의 고통을 덜어낼 수 있습니다. (p.313)

 

송병기 ‘환자의 몸을 따라간다’는 선생님의 말씀을 음미하게 됩니다. 왜냐면 일반적으로 환자의 의사는 말이나 글로 표현된다고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의료윤리가 강조되는 요즘, 환자의 의사를 존중해야 한다는 소리는 상식이 됐습니다. 병원에 가면 환자의 권리와 의무를 담은 게시물도 쉽게 볼 수 있죠. 이때 환자는 올바른 의료정보를 숙지하고, 의료진을 존중하며, 정해진 절차에 따라 의료결정에 참여할 역량을 갖춘, 자율적이고 독립적인 사람으로 상상됩니다. 즉 환자의 의사를 존중하기 위한 일종의 문화적 각본이 있는 셈입니다. 그런데 임종기에 접어든 환자에게 그 각본을 적용할 수 있을까요? 환자가 말과 글로 의사를 표현할 수 있는 건강상태도 아닐뿐더러, 그 각본이 임종기에 적절한지도 의문스럽습니다. ‘환자의 몸을 따라간다’는 표현은 오늘날 의료윤리가 상정하는 환자상이 무엇인지, 또 임종기 돌봄의 핵심이 무엇인지를 성찰하게 합니다.

김호성 현대 사회에서 한 개인의 존재는 ‘언어’로 상징되며 표현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만의 언어를 사용하려 하죠. 그러한 서로의 언어를 존중하는 것이 이른바 다양성 존중의 원칙이고요. 하지만 임종기 환자처럼 언어 사용 자체가 불가능할 때에는 어떻게 그 존재를 한 사회의 구성원으로 인정할 수 있을까요? 전혀 다른 시선, 이른바 ‘몸의 윤리’가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이 몸의 윤리는 현대 사회의 기초를 이루는 이성의 윤리와는 방향이 사뭇 다릅니다. 물론 우리는 ‘언어’를 사용하기에 인간이지만, 그 이전에 심장이 뛰고 땀이 나는 ‘몸’을 가진 생명이지요. 몸은 말보다 깊고 넓습니다. 이는 말기 환자만이 아니라 의사소통이 불가능한 장애인, 더 나아가 비인간 생명들까지 넉넉히 품을 수 있는 철학적 시선이라고 생각합니다. (p.324-325)

 

송병기 선생님 말씀이 의미심장하게 들립니다. 누군가에게 가족이란 상처나 멍에로 다가올 수도 있습니다. 한편, 우리가 말하는 가족은 여전히 이성애로 결합한 부모와 자녀로 구성된, 즉 ‘정상가족’이란 프레임 속에서 이해되고 있는 건 아닌지 묻게 됩니다. 그 특정한 가족의 형태와 가족의 모습을 전제로 말기 돌봄에 관한 ‘문화적 각본’을 구상하고 있는 건 아닐까요?
 최근 김희경 작가의 『에이징 솔로』를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청년은 미혼, 중년은 이혼, 노년은 사별”로 요약되는 국내의 1인가구 정책과 담론을 다시 생각하게 하는 책이었습니다. 비혼 중년이 경험하는 생애 주기와 나이 듦에 대한 이야기를 따라가면서 다양한 삶의 형태를 알게 되었고, 또 가족이란 형태는 끊임없이 바뀐다는 역사적 사실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제 주변에 30~40대 솔로 여성들의 친목 모임이 있습니다. 누가 아프면 돌아가며 돌보고, 조만간 본인들만의 상조회도 만든다고 해요. 그 모임에는 반려동물도 중요한 성원입니다. 저는 다양한 가족의 형태에서 이전에 생각하지 못했던 돌봄의 실천이 등장할 거라고 봅니다. 요컨대 돌봄의 기준을 가족에 두는 것에 대해서 활발히 토론해야 하고, 가족에 대한 사회 규범도 갱신해야 합니다. (p.338-339)

 

송병기 동백 성루카병원 영성부의 한 수녀님은 저와의 인터뷰에서 “처음에 병원에 와서 수시를 하는데 여러모로 쉽지 않았다”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그 말을 듣고 조금 당황했는데 왜냐면 수녀님은 성직자니까 죽음에 대해 어떤 어려움도 없을 거라고 믿고 있었던 거죠. 수녀님은 그전에는 한 급성기 병원에서 원목활동을 했었는데, 당시 환자와 보호자에게 가장 많이 했던 말이 “2주 뒤에 또 봐요. 힘내서 치료 열심히 해봅시다!”였답니다. 그 말을 듣고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습니다. 급성기 병원에 계셨던 수녀님이 호스피스에 와서 돌봄을 생각하고 배우고 실천하는 과정을 거쳤던 거죠. 그렇게 지금까지 500명이 넘는 환자의 임종을 지켜보고, 수시에도 참여했다고 합니다. (…)

김호성 수녀님뿐 아니라, 저를 포함한 다른 다학제팀 팀원들 모두가 처음에는 환자의 임종 모습이 당황스럽고 어려웠을 것입니다. 의사나 간호사들도 환자의 죽음과 보호자의 슬픔을 처음 마주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생각나는 것은, 주변에 경험이 많은 수녀님, 사회복지사, 간호사, 의사들이 이미 앞서 이 일을 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낯설지만 그들이 했던 대로 따라 했던 것이죠. 결국 이러한 임종 돌봄도 전통, 문화, 관계 안에서 학습되고 적응된 것입니다. 일종의 문화적 자산인 것입니다. 이전에 근무하던 사람들이 환자를 어떻게 돌보았는지, 그리고 뒤에 온 사람들이 그것을 어떻게 유지하고 발전시켜나갔는지 하는 것들이 한 호스피스 시설의 돌봄 수준을 판가름한다고 봅니다. (p.342-344)

 

송병기 ‘좋은 죽음’과 ‘편안한 죽음’에 대해 말씀해주셨습니다. 저도 선생님과 비슷한 생각을 합니다. 좋은 죽음은 가치 판단이 강하게 들어간 말입니다. 모든 일이 끝나고 난 뒤, 평가를 할 때나 쓸 수 있는 표현이 아닐까 싶습니다. 예를 들면, A는 평소 어디가 아팠지만 투병도 잘 하고, 가족의 사랑도 있었고, 간병인도 친절했고, 의료진도 유능했다, 그래서 그는 편안하게 눈을 감았다, 좋은 죽음이었다, 이런 식으로 평가할 때 쓰기 좋은 말이죠. 혹은 남들이 보기에 ‘좋은 죽음’도 있습니다. 예컨대 내 주변을 보니, 혹은 TV를 보니 이러저러하게 죽는 게 좋은 죽음인 것 같다고 판단하는 것이죠.
 하지만 제일 중요한 것은 나의 죽음, 또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입니다. 각자의 삶이 다 다르듯이, 생의 끝자락도 다양할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편안한 죽음’은 죽어가는 과정에 가치를 둔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어떻게 환자가 편안함을 느끼는지, 또 환자가 편안함을 느낀다는 게 무엇인지 계속 질문해야 하기 때문이죠. 환자의 편안함을 생각하면 자연스레 환자의 일상, 역사, 관계에 주목할 수밖에 없습니다.

김호성 너무 많은 기대를 하고 오는 분들이 간혹 있습니다. 호스피스에 오면 하나도 안 아프고, 무슨 요법을 받아 마음이 끝까지 편안해진다는 등의 기대 말이죠.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 것도 있습니다. 그래서 가끔 “저희한테 너무 많은 기대를 하지 마세요”라고 말씀드립니다. 우리의 목표는 고통을 없애는 게 아니라 고통을 줄이는 데 있습니다. 현실적인 목표는 환자가 통증을 두 번 겪을 것을 한 번으로 줄이고, 밤에 한 시간밖에 자지 못한다고 하면 두세 시간으로 늘리는 것입니다. 환자가 편안함을 느끼는 게 중요합니다. ‘좋다’는 것에 대해선 가치판단이 저마다 다를 수 있고, 또 너무 이상적인 것들을 바라게 되면 오히려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올리버 색스(Oliver Sacks)라고 미국의 유명한 의사이자 작가가 있는데, 안구의 암이 장기에 퍼져서 작고했습니다. 그분은 생의 마무리를 참 아름답게 잘했다고 해서 회자가 많이 되곤 하죠. 이른바 ‘좋은 죽음’이라고들 합니다. 반면 어떤 환자들은 삶의 투지를 끝까지 놓지 않기도 합니다. ‘내가 왜 죽어야 되는지 모르겠고, 나는 억울하고, 나는 끝까지 살고 싶다.’ 이런 생각을 표현하며 마지막까지 화가 차올라 있죠. 자, 그러면 그런 환자들의 경우 ‘나쁜 죽음’일까요? 저는 알 수 없다고 봐요. 그런 것들을 판별하는 건 어려운 일이고 심지어 위험할 수도 있다고 봅니다. 이른바 ‘좋은 죽음’이란 환자의 입장이 아니라, 돌보는 입장에서 권고하고, 더 나아가 요구하는 또 하나의 강요일 수도 있는 거지요. 물론 임종기 때에 호스피스가 지향하는 목표는 있지만, 그렇게 저희가 좋다고 판단하는 가치들이 모든 사람들에게 항상 일어나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입니다. 지향으로서의 가치는 있되, 현실적인 죽음의 이야기가 저는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p.345-346)

 

김호성 저는 그러한 의미에서, 고통이라는 ‘필연’을 삶의 아름다운 ‘우연’으로 채워가는 게 호스피스 완화의료라고 생각합니다. 병의 진행으로 인해 필연적으로 생기는 고통의 과정을 호스피스의 노력을 통해 삶의 의미, 아름다움, 환희 같은 우연적인 순간들로 만들어 가는 거죠. 고통으로 단절된 삶의 서사를 그런 우연의 순간들로 이어 붙이는 겁니다. 무릇 공동체는 개개인의 고통을 해석하고 나름대로의 대처 방법을 찾으려 합니다. 호스피스 전문기관도 그중 하나이겠지요. 그러나 그 대처는 중환자실에서도, 일반 병실에서도, 집에서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p.347-348)

 

김호성 그래서 좋은 죽음이라는 정의가 규범적일 수 있고 폭력적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삶의 경과는 다양하고, 행복의 모습도 다양하고, 실존의 풍경도 다양하잖아요. 제 생각에, 본인 스스로 편안하고 다른 사람도 편안한 순간들을 잘라낸다고 했을 때, 그 삶의 절단면들을 최대한 많이 이어 붙여 적분 값이 크다고 하면, 그게 바로 좋은 죽음인 것 같습니다. 물론 어디서 임종을 맞았는지 장소도 중요하지만, 설사 중환자실에서 홀로 마지막 순간을 맞이한다고 해도 최선을 다해 자기 가치를 지키다가 그렇게 된 거라고 하면 누구도 그걸 평가절하할 수 없다고 봅니다. 극심한 통증에도 불구하고 자기 아이들의 공부를 가르치면서 책임감 있게 돌보려 했던 그분처럼 말이죠. 설령 호스피스에 와서 있다고 해도 시간을 잘 못 보내는 경우도 많거든요. (p.349-350)

 

김호성 호스피스 완화의료는 누군가에겐 낭비 그 자체처럼 보일지도 모릅니다. 곧 임종을 맞이할 말기 환자의 삶의 질, 그리고 보호자의 평안이 얼마나 경제적 효과가 크냐는 겁니다. 그런데 달리 생각해보면, 호스피스 완화의료는 상급병원에서 말기 환자에게 과도하게 투여되는 재원을 적절하게 조절해줍니다. 장기적으로는 사별 가족들의 신체적·정신적 건강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고요. 이는 곧 사회경제적으로 의료자원의 낭비를 덜어주게 됩니다.
 비단 경제적 가치만이 아니라 사회적 가치도 상당합니다. 말기 환자도 우리 사회의 구성원이며, 끝까지 환대받을 자격이 있는 존재임을 알려주는 것이죠. 이는 말기 환자뿐 아니라 다른 사회적 약자에 대한 관심 및 돌봄의 선순환이 일어나게 하는 원동력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호스피스 완화의료의 가치를 정확하게, 그리고 지속적으로 이야기해야 합니다. 어떤 유용함이 있는지 적극적으로 알려야 합니다. 호스피스 현장에 있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시민들에게 가닿을 때 여론이 움직이게 되고, 이는 다시 정치가나 정책 담당자에게 영향을 미쳐 우리의 현실을 바꿀 것입니다. 아직까지는 한국에 기회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지금 준비하지 않으면 정말 큰 위기가 올 것 같습니다. 세계에서 보기 드문 고령화의 파고를, 각종 질환과 말기 환자의 밀려드는 물결을 면밀한 준비 없이 직격으로 맞을 때, 유례없는 고통이 한국 사회에 넘실댈 것입니다. 호스피스 완화의료의 가치를 이해하고 현실을 정비해야 합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분들이 점점 많아지면 좋겠습니다. (p.365-366)

 

 호스피스에 오는 말기 환자들 대부분은 말로 어찌 표현하지 못할 만큼 병세가 깊습니다. 그 깊은 필연은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 환자들의 육체적 어려움과 심리적 불안, 두려움 그리고 실존적인 낙심과 무의미는 거센 파도와 같습니다. 그 파도를 맞으며, 사회적 관계는 끊어지고 자아는 바스러집니다. 생물학적 죽음 이전에 심리적 죽음이 찾아오고, 그전에 사회적 죽음이 찾아옵니다. 많은 이들은 이러한 과정 속에서 깊은 고통을 겪습니다. 몸이 아픈 것도 아픈 것이지만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경우를 포함한 사회적 소외를 경험합니다. 이러한 고통스런 소멸의 경과에서 우리 한 개인 개인의 능력은 작고 어떻게 보면 보잘것없습니다. 종교가 있는 사람은 종교가 있는 대로, 종교가 없는 사람들은 종교가 없는 대로 실존적 위기를 겪습니다.
 하지만 거스를 수 없는 필멸의 운명을 타고났다 해도 우리는 죽기 전까지 ‘순간을’, ‘더불어’ 사는 존재들입니다. 70년 전 영국의 시슬리 손더스 여사가 현대 호스피스 운동을 시작하며 이야기했던 것은 총체적인 고통에 대한 새로운 정의라기보다, 그러한 총체적인 고통을 다루는 말기 돌봄 영역에서 사회 구성원들에게 ‘할 일’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말기 환자에게 관심을 가지고 그들을 돌본다면, 고통스러운 필연의 소멸 과정에서도 우연적인 환희의 순간들을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한 우연적인 삶의 순간들이 쌓이면 환자는 자신이 다시 사회의 한 구성원이라는 느낌을 받게 되고, ‘힘들어도 삶은 살 만한 것’이라는 소박한 생각을 문득 품게 됩니다. 사실 호스피스 완화의료가 추구하는 것은 그리 대단한 일이 아닙니다. 그 ‘소박한 생각과 느낌’에 대한 것이죠. (p.377-3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