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t Read Code

 

왜 읽을 수 없는가 : 인문학자들의 문장을 돌아보다 / 지비원 / 메멘토

 

 일상적인 글과 학술적인 글 사이에는 쉽게 오갈 수 없는 간극이 있다는 사실만 누구나 경험적으로 알고 있을 뿐, 이들 사이를 어떻게 좁혀야 하느냐는 그다지 논의되지 않았다. 일상적으로 읽고 쓰는 글은 어떤 글들인가? 이들과 학술적인 글 사이의 간극은 과연 어느 정도인가?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가? 이런 현상은 언제부터 비롯했다고 볼 수 있는가? 일반 독자와 연구자를 잇는 좋은 글의 예로 어떤 것이 있는가? 비록 정치한 학술적 논의는 못 되더라도 일상적인 글과 학술적인 글 사이에 끼여 있으면서 늘 고민하던 것들을 한번 이야기해보고 싶다.

 

 나는 나 혼자 뭔가 읽었다고 해서, 그리고 혼자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해서 그것이 곧 자랑도 아니고 기쁨도 아니라는 사실을 책을 만들면서 배웠다. 책이란 독자에게 다가가지 않는 한, 때로 존재만으로는 인정받지 못한다. 널리 읽히지 않으면 그게 곧 실패를 뜻할 수도 있는 것이 책의 속성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다. 책은 언제나 ‘나만 알고 나만 읽자’고 내는 것이 아니다. 이 일은 더욱더 많은 이들과 읽고 싶다, 읽어주기를 바란다는 바람 없이는 할 수 없다.
 그렇기에 오늘도 나는 묻는다. 왜 어떤 글은 읽을 수 있고 어떤 글은 읽을 수 없는가? 읽고 싶다, 읽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왜 읽을 수 없는가?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달달 외어야 하는 주입식 교육과 작별하고, 대학교를 졸업하면 전공 서적마저 버려도 상관없는 것이 현실이다. 읽지 않고 살아도 상관없지만 그럼에도 어려운 글을 읽겠다고 도전했다가 실패만 거듭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왜 실패하는지 잘 설명할 수는 없어도 의문을 갖는 이들이 있다면 그들과 같이 고민하고 싶다. 그 고민을 사회적 고민으로 한번 만들고 싶다. 이것이 이 책의 소박한 소망이다.

 

 변화하는 매체 환경에 발맞추어 동영상과 접목하고 그래픽 요소를 활용하는 것도 의의가 있고 중요하다. 하지만 기존의 뉴스는 과연 누가 읽는가, 매체에서 확장성 있는 글(문장)이란 어떤 것인가를 좀 더 고민해보는 게 낫지 않을까? 일반적인 언어생활과 크게 동떨어져 있고, 확장성도 부족한 듯싶은 매체의 글이 많다. 대중 매체의 기본은 뭐니 뭐니 해도 글 아닌가. 과연 누구를 위해 글을 쓰며, 그 글의 구체적인 독자는 누구인지, 기존에 독자가 아니었던 사람들도 끌어들일 수 있는 글쓰기는 없는지, 또 앞으로 매체의 중요한 독자가 될 청소년층까지 고려하는 글쓰기란 무엇인지, 소외되었던 노인층을 위한 시사 뉴스, 인문학 등을 고민하는 글들을 매체에서 어떤 식으로 쓸 수 있는지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신서의 전성기가 1980년대였음을 생각해본다면, 현재 각종 매체에 칼럼을 쓰는 필자들이, 당신들의 전공 공부와는 별도로 바로 이런 책들을 당대의 ‘교양’으로 흡수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다루는 사회과학 서적, 새로운 민족 문학의 차원을 보여준다는 소설들과 이들을 다루는 최신 평론집, 세계화 담론을 주도한다는 사회학자 이매뉴얼 월러스틴과 프랑스의 구조주의 비평가 롤랑 바르트의 번역서가 ‘신서’로서 책꽂이에 나란히 꽂혀 있는 풍경을 머릿속에 그려보자. 지금 보면 분명 공부를 직업으로 선택한 사람의 책꽂이에 가깝겠지만, 1980년대에는 이런 책들을 새롭게 익혀야 할 교양이라고 생각한 사람들도 분명 존재했을 것이다. 신서뿐만 아니라 당시 이와 유사한 성격의 책을 출간한 유명 출판사들의 출간 목록을 보고 있자면, 학술과 교양을 어떤 식으로 구분했는지 좀처럼 짐작이 가지 않는다.
 그 책들이 담았던 지식과 문장의 자장에 오늘날의 인문학과 교양이 아직까지도 휘둘리고 있다면 너무 지나친 말일까? 한편으로는 신서의 세례를 받은 특정 세대의 일부 구성원이 왜 저 책들을 읽었는지 궁금하기도 하며, 어떻게 저 책들을 다 읽어냈는지 정말 존경스럽기도 하다. 반면 어렵고 까다로운 학술서들을 공부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교양으로 읽은 이들이, 학술의 세계와 일상 세계를 좁히는 측면에서의 ‘교양’을 어떤 문장과 내용으로 담으면 좋을지를 보여준 모범이 될 만한 책은 읽지 못했겠구나 하는 생각도 든다. 그래야 그들에게 전공과 상관없는 학술서가 ‘신서’로서 교양을 담당했고, 그런 배경에서 써온 ‘논문 아닌 글’이 왜 그렇게 어려운지 설명이 되지 않을까 한다.

 

 아렌트와 바우만을 모른 채 이 책을 집어 든 사람은 어떻게 되는가? 여기서 ‘우리’라는 지칭은 절대 고의는 아니겠지만 누군가를 배제하고 난 뒤의 ‘우리’다. 아렌트와 바우만의 책을 알고 있어도 그 책들이 어떻다고 쉽게 말할 수 없는 처지에서 예문 3을 읽었을 때 느낀 것은 소외감이다. 나는 분명 저 ‘우리’ 안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런 소외감을 안고 책을 읽어야 하는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결코 쉽게 읽을 수 없는 아렌트와 바우만의 ‘이야기’를 다 읽고 다시 이 ‘글’을 읽어야 하는가? 그렇다면 독서의 선후가 잘못된 것이 아닐까?

 

 언제부터 써왔는지, 어떻게 쓰게 되었는지 알 수 없고, 언어 내 번역도 거의 불가능하여 앞으로 나아갈 수도 없는 상태. 변화하는 시대·사회·언어와 동시대적으로 호흡하지 못하는 완고한 상태. ‘이 정도는 알고 있겠지’라는 안일한 전제. 배경지식을 공유한다고 생각한 ‘우리’를 대상으로 삼지만 정작 정체를 알 수 없는 ‘우리’. 공부가 직업이 아닌 사람들에게 생소한 개념을 필자 스스로도 소화하지 못하면서 문장 안에 그대로 가져오는 글쓰기 습관. 이것이 내가 그동안 부족하나마 여러 인문교양서를 읽으면서, 또는 읽으려고 애쓰면서 생각하게 된, ‘인문학이 사람들에게서 점점 멀어지는 이유’다. 짧지 않은 세월 동안 상당히 많이 발간된 철학 안내서, 사상가 입문서나 해설서 같은 책이 인문교양서의 주류 자리에서 완전히 밀려난 것은 이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 중요성에 대해서는 아직도 수많은 사람이 이야기하고 또 공감도 하는데 말이다.

 

 ‘철학’이라는 말을 100여 년 전쯤, 소위 근대화 과정에서 만든 사람이 있고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이 학문 안에 존재하는 수많은 개념이 만들어졌다면, 그 개념들 또한 ‘여기서’ 만든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나는 이 사실을 깨달았을 때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당연히 내 것인 줄만 알았던 것이 ‘만든 사람’이 따로 있어서 온전히 ‘내 것’이라고 말하기가 참으로 어려운 심정이었다. 엄밀한 의미에서 ‘저작권’을 주장할 수 없는 상황이 아닌가? 게다가 이 사회에서는 오랫동안 ‘일제의 잔재’를 없애려고 노력해 왔다. 그중에는 ‘일어 순화’라는 용어에서 볼 수 있듯이 늘 말이 포함되어 있었다. 바꿀 수 있는 말을 바꾸어 쓰려는 노력을 폄하하려는 것이 아니다. 내가 지적하고 싶은 것은 ‘바꿀 수 없다고 생각되는 말은 외면해버리는’ 이중 잣대다.
 철학은 일본에서 만든 말이다. 정치도 경제도 과학도 대통령도 국회의원도 헌법도 다 일본에서 만든 말이다. 똑같은 일본 출신 말인데 왜 어떤 말은 배제하고 어떤 말은 한국어의 울타리 안에 포함시키는가. 평생을 귀에 못이 박이도록 ‘일어 순화’라는 말을 듣고 산 나로서는 이해되지도 용납되지도 않는 논리였다. 똑같은 일본어인데 쫓아내도 좋은 말이 있고 쫓아내면 안 되는 말이 있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런 가정을 해볼 수 있다. 만약 이 말들을 한국어의 울타리 밖으로 쫓아내려 할 때, 상당히 곤란한 사태가 벌어지는 게 아닐까?

 

 굳이 따지자면 나는 어떤 개념의 번역보다 그 개념을 설명하려는 노력이 훨씬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새로운 말에는 만드는 사람의 자의성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자의성을 보편성으로 만드는 게 이를 설명하려는 노력이라고 믿는다. 현재 한국 인문사회계 학술 용어의 현황은 이 ‘자의성’의 역사성에 대한 성찰이 부족할 뿐만 아니라, 이를 더 보편적인 것으로 인정받게 하려는 노력도 부족하다. 현상적으로 남아 있는 것은 ‘이것이 보편적인 학술 용어다’라는 인식뿐이다. 이래도 괜찮은지, 학술 용어의 기원에 관심이 있는 사람으로서 늘 걱정이 앞선다. 이 말들은 정말로 한국어인가? 한국어라면 어떤 논리와 근거로 한국어임을 증명할 수 있는가? 음독하여 들여오는 것도 번역이라면 번역 가운데 어느 정도의 위상을 차지하는 번역인가? 음독하여 들여오는 번역을 인정한다면 이는 중역인가, 아닌가?

 

 ‘원어에서 직접 번역하지 않고 어떤 언어로 번역된 것을 매개로 다시 번역함을 중역이라 한다’는 원칙을 세우고 이 원칙을 곧이곧대로 적용했을 때, 실제로 중역이 아니라고 할 만한 학술 용어가 매우 드물다. 당장 ‘학술’이라는 말부터가 문제다. 이 말은 「백학연환」에서 볼 수 있듯이 일본에서 만들어졌고 그대로 받아들여졌다. 이런 용어가 ‘중역’이 아니라고 단언할 수 있을까? 아니라고 대답한다면 이 용어가 어떻게 한국어가 되었는지 이제 역사를 좀 더 객관적으로 파악할 필요가 있다. 용어가 유입된 시기, 유입된 배경, 그리고 정착하기까지의 과정을 학술적으로 정립하지 않는다면 언제고 ‘중역’ 문제가 다시 고개를 내밀지 모른다.

 

 책이나 글을 읽으면서 자기 글의 독자가 누구이고 그 독자를 잘 이해하지 못한다고 보이는 필자가 많았다. 글, 특히 논문을 써야 하는 사람들은 늘 평가하고 평가받는 일에 익숙하다. 그런데 그 ‘평가’가 자신들과 비슷한 지적 수준에 이른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대체로 망각한다. 문제는 이 망각이 ‘자신의 무지를 인정하고 그 무지를 벗어나고 싶어 하는 마음’을 지닌 많은 사람에게 은연중에 ‘그렇다면 배워라, 이 정도는 알고 있어야 하는 게 아니냐! 이 정도는 당연히 따라와야 하는 게 아니냐’, 하는 식의 강요로 이어진다는 사실이다. 그 때문에 ‘배우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실제로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떻게 살아가는지 알려고 하거나 고민한다는 인상을 받지 못했다.
 ‘나는 저 사람을 이해하고 싶지만 저 사람은 나를 이해하려고 들지 않는다.’ 이 말은 어떤 느낌을 주는가? 일방통행, 불통, 오만 같은 말이 떠오를 것이다. 많은 인문교양서가 고의는 아니더라도 이 길을 걷고 있다. 인문교양서는, 특히 입문서라면 책을 읽고자 하는 사람의 마음가짐도 중요하지만, 책이 그 사람을 이해하는 측면이 있어야 한다. 이해란 독자의 무지를 무조건적으로 포용해야 한다거나 사실상 불가능한 일대일 맞춤식 집필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당신이 모른다면 왜 모르는지, 그 이유를 필자 자신도 포함하는 ‘보편적 경험’에서 찾으면서 짚어줄 필요가 있다는 뜻이다.

 

 일을 하면서, 또 잠깐이나마 공부를 하면서 가진 문제의식은 지금까지도 거의 풀리지 않았다. 나는 직업상 책을 만들 때나 번역을 할 때마다 더 많은 이들이 읽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고 그러자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좋아하는 선생님들이 많지만 그 선생님들의 글쓰기가 왜 특정한 사람들에게만 가닿는가, 왜 확장성이 그렇게 약한가 하는 문제의식. 그분들이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수많은 어려운 개념들이 결국 이 땅에서 태어난 게 아니라는 문제의식. 매체 환경이 지난 20여 년 간 급속도로 변했지만, 인터넷이 없던 시절에 독서와 공부로 일가를 이룬 분들이 이제 더이상 통하지 않는 독서와 공부에 대한 고담준론을 늘어놓는다는 문제의식. 떼어놓고 보면 다른 문제 같지만 한국에서 학술 용어가 성립된 근원을 들여다보면 인문교양서의 독서가 왜 그렇게 까다롭게 느껴지는지 실마리를 잡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은 문제의식을 제시하는 것에 그칠 수밖에 없다는 것도 안다. 그래도 문제의식이라도 들어보자 하는 사람이 있다면 용기를 내자고 마음먹었다.

 

 

지구에 아로새겨진 / 다와다 요코 / 은행나무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건 상당히 힘든 일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태가 견딜 수 없어지면 인터넷으로 도망치곤 했지만, 오늘은 디스플레이가 내뿜는 빛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혐오감이 솟구쳤다. 사람을 억지로 끌어내 밝은 무대 위에 데려다 놓을 것만 같은 빛. 스포트라이트로 눈이 부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화려한 무대 위에서 나는 허구의 스타가 된다. 어리석은 짓이다. 그럴 바엔 차라리 텔레비전을 보는 게 낫다. 내가 노출된다는 느낌이 없으니 소파에 나뒹굴며 일방적으로 출연자의 얼굴을 볼 수 있다. 조금도 웃기지 않는 코미디 프로, 빈약한 어휘의 유행가, 한두 번 쓰고 안 쓸 것 같은 부엌용품을 파는 홈쇼핑 프로. 그러다가 우연히 맞닥뜨린 게 이런저런 식당을 도는 프로그램이었다.

 

 하지만 유럽에 와서, 일반 사람들이 글씨 쓰듯 가볍게 그림을 그리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다. 붓은 뭉크 같은 천재나 손에 쥐는 것이며, 보통 사람들은 그림 그리는 일을 부끄럽게 여겼다. 애초에 미술은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 손재주와 상관없이, 그림 그리는 일을 천명으로 느끼는 사람이나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그건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아이들을 위한 포스터나 전단지가 필요할 때나 아이들이 부탁할 때, 일러스트 정도는 가볍게 그릴 줄 알아도 되지 않을까 싶다. 그런데도 도르테와 다른 동료들은 그림동화 그리기를 결코 도와주지 않는다. 서예가의 눈에는 차마 눈 뜨고 봐줄 수 없는 글씨를 우리는 매일 쓰고 있으니, 예술가의 눈에는 아무런 가치가 없는 그림을 그려도 좋을 텐데 말이다. 아무래도 이 사람들은 글씨와 그림이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믿는 듯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못 쓴 글씨는 부끄러워하지 않으면서, 못 그린 그림은 이렇게 부끄러워할 이유가 없다.

 

 나의 못된 점은 잘하는 것도 없으면서 “이런 일을 하면 좋을 것 같아요”라는 이야기를 번지르르하게 잘한다는 것이다. 존재하지 않는 것에 형태를 부여하고, 색을 칠해, 이것이야말로 모두가 원하는 미래다, 라고 믿게 만들 수가 있다. 이런 능력이 내가 나고 자란 나라에서는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오히려 말수가 적고 근면한 사람이 신뢰를 받았다. 몇십 년이고 자기 의견 없이 묵묵히 일을 하다가 어느 날 슬쩍, “이제껏 제가 해온 일이 어쩌면 이런저런 일이 아니었나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하고 작게 중얼거리는 인간이 인정받았다. 거꾸로 이런 일을 하면 어떨까, 저런 걸 만들어보면 어떨까, 이런 점은 바꾸는 게 낫지 않을까, 나한테 맡겨주면 이렇게 새로운 일도 가능하다, 어쩌고저쩌고 시끄럽게 제안을 해대는 젊은 사람들은 정수리에 언어의 쇠망치를 맞았다. ‘튀어나온 말뚝이 두들겨 맞는다’는 속담도 있었고, 튀어나온 말뚝을 때릴 완력을 기르기 위해 ‘두더지잡기’라는 게임이 개발되기까지 했다.

 

 나는 일자리를 잡은 덕분에 비자를 받아 덴마크에 체류할 수 있었다. 어릴 때 텔레비전에서 ‘불법 체류자’라는 말을 들으면 먼 나라에서 온 나쁜 사람들 이야기 같았지만, 지금은 운 나쁘면 내가 곧장 ‘불법 체류자’가 되어버린다. 잘 생각해보면 지구인이니까 지상에 위법하게 체류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 그런데도 어째서 매년 불법으로 체류하는 사람이 늘어나는 것일까. 이대로 가다가는 조만간 인류 전체가 불법 체류자가 되는 날이 오리라.

 

 부엌 왼쪽 방은 침실로 쓰고 있어서, 음식 냄새가 들어가지 않도록 늘 문을 닫아둔다. 냄새뿐만이 아니다. 책을 읽다가 신경 쓰이는 말을 침실로 가지고 들어오면, 깊은 밤 모기처럼 그 말이 날아다녀서 잠을 못 자는 일이 있다. 예를 들면 얼마 전, ‘캄차카’라는 지명이 시끄러워서 아침까지 잠들지 못한 적이 있다. 그래서 침실은 활자금지구역으로 지정하고 잡지 한 권 안 들인다.

 

 때마침 어느 책에서 사회는 주상복합건물과 같다는 글을 읽었다. 같은 건물에 산다고 해서 같은 이상을 품고 모여드는 것은 아니다. 화재를 피하고 싶어 하는 마음은 공통되지만, 타인이 내면에 어떤 고통을 품고 있는지는 신경도 쓰지 않는다. 평등이나 인권에도 관심이 없다. 국가 차원에서 존중받는 원칙이 침해를 받고, 이웃집 사람이 분뇨를 뒤집어쓴다고 해도, 자기 집에만 냄새가 나지 않으면 간섭하지 않는다. 주상복합건물은 타인의 입장이 되어보는 능력을 퇴화시키면서 완성되었다. 화장실이 되어보지 않으면 화장실의 기분을 알 수 없다, 라는 글을 읽고, 그렇다면 나는 화장실이나 수위실이나 구내식당과 같이 다양한 장소가 되어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어떠한 ‘직업’을 갖는 사람이 된다는 건 환상에 불과하며, 실제로 인간은 어떠한 ‘장소’에 놓이는 것이다, 라고 생각했다. 냄새나는 장소, 평화로운 장소, 언어의 폭력에 내몰리는 장소, 추운 장소, 보호받는 장소 등 다양한 장소가 있다. 대학에 들어가 자동으로 착취하는 입장이 되는 장소에 끌려가는 것은 싫다.

 

 신형청소기를 실제로 본 적 없는 아버지가 고객 질문에 정성껏 응답하는 것을 듣고 있으면 이상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나는 그렇게 귀로 영어를 배웠다. 같은 전화가 수차례 걸려 오자 아버지도 화가 났는지, “설명서를 읽으시면 이해가 빠르실 텐데요” 하고 은연중에 비꼬는 말을 끼워 넣었다. 그러면 상대방은, “설명서 영어는 컴퓨터가 쓴 거라서 읽을 마음이 안 나요. 그런 걸 로봇 문체라고 하는 걸까요. 반대로 당신 영어는 듣고 있는 것만으로도 기운이 나요” 하고 대답할 때가 있었다. 그러면 아버지는 갑자기 힘이 펄펄 나서 하염없이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청소기랑 상관없이 그저 외로워서 전화를 거는 사람도 있는 듯했다. 매주 아버지를 지명해서 전화를 거는 여성도 있었다. 내가 ‘콜 보이’라고 부르며 놀리면 아버지는 정색하고 성을 냈다.
 회사 측은 전화가 항상 연결된 상태인지 아닌지는 물론, 고객 만족도까지 멀리서 체크하고 있었다. 하루 열여섯 시간 계약이므로 아버지는 식사하는 도중에도, 화장실에서 힘을 주는 동안에도, 전화 헤드셋을 늘 머리에 끼고 있었다. 그런 탓에 나는 그 청소기가 함께 자란 남동생 같다는 기분마저 든 적이 있다.

 

 한편 어머니는 스위스 산골에 있는 웰니스 호텔에 취직했다. 투숙객의 혈압이나 칼로리를 기록하고 분석하여, 한 사람 한 사람의 일과를 만든 다음 거기에 맞춰, ‘8시 10분 전입니다. 조깅 준비가 되셨습니까?’ 하는 메시지를 보낸다. ‘오늘은 의욕이 안 생겨요’ 등의 메시지가 오면, 매번 진정성 있는 위로의 말을 보내야 한다. 같은 대답을 보내면 컴퓨터 프로그램이라는 오해를 사기 때문에 그때마다 다른 메시지를 써야 하고, 심지어 가끔은 일부러 스펠링을 틀려서 인간미를 드러냈다. 다만, 개인적인 우정관계를 맺는 일은 금지되어 있었다.
 덕분에 우리 집 통장에는 늘 돈이 들어왔고, 나는 사는 데 어려움 없이 자랐다. 인터넷으로 주문만 하면 파인애플 통조림이든 햄스터든 축구공이든 다 배송되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모든 세대가 집 안에서 인터넷만으로도 세계경제와 이어진 채 살아가게 되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혹시라도 디스플레이에 나타난 세계가 누군가 만들어낸 것이고, 실제로는 이미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면 어떨까. 주문한 상품은 분명 배달이 된다. 하지만 만약 바다 건너에 우리가 주문한 제품을 생산하는 공장 하나만 남고, 세계가 이미 사라져버렸다면.

 

 조지랑 딱 한 번 격한 말싸움을 벌인 적이 있었다. “지구온난화 때문에 에스키모의 수렵문화가 위협받고 있어.” 조지가 꺼낸 이 말이 발단이었다. 나는 갑자기 어머니에게 빙의된 사람처럼 말했다. “하지만 온난화 덕분에 채소를 재배할 수 있게 되었어. 무조건 옛날 생활을 고집할 필요는 없지.” 조지는 조금 놀라며, “그래도 수렵문화가 너희 생활문화의 중심 아니었어? 그게 쇠퇴하는 건 지구온난화랑 동물보호단체의 압박 때문이잖아” 하고 반론했다. 이번에 나는 아버지에게 빙의된 사람처럼, “애초에 에스키모도 좋아서 사냥을 시작한 게 아니라, 필요최소한으로 동물을 죽이고, 고기는 보존식품으로 소중히 여기고, 그 가죽으로 자기 옷이나 신발을 만들었어. 그랬는데 외국에서 온 모피 상인들에게 속고, 협박당하고, 모피를 높은 가격에 팔 수 있는 해달 같은 동물을 닥치는 대로 죽이는 시대가 계속되었어. 가까운 곳에 사냥감이 없으면 멀리 원정을 갔지. 떠올리고 싶지도 않은 악몽 같은 시절이야. 우리는 그런 시절이 끝나서 안심하고 있어” 하고 대답했다. 아버지가 이런 이야기를 했을 때는 귀찮다고 생각하며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는데, 이제 와서 한 자 한 자 다 기억나다니 신기하다. 게다가 ‘우리는’ 어쩌고 하면서 모두의 대표가 된 것처럼 잘난 척 떠들고 있다. 조지는 내 기세에 놀라, “알았어, 알았어. 너의 견해가 더 깊다”고 말하며 퇴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초에게 스시 만드는 법과 맛있는 장국 우리는 법과 완벽한 두부튀김조림을 만드는 법을 누구한테 배웠느냐고 물어봤더니, 파리 호텔에서 근무하는 프랑스인에게서 배웠다고 했다. 내가 깜짝 놀라자, 수수께끼 같은 말을 뱉었다. “오리지널이 소멸된 뒤로는 최상의 카피를 찾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어.” 나는 어쩐지 두려워져서 그 의미를 되물을 수가 없었다.

 

 실은 나도 네이티브라는 단어가 예전부터 마음에 걸렸다. 네이티브는 영혼과 언어가 완전히 일치한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 모어는 태어날 때부터 뇌에 심어져 있다고 믿는 사람도 아직 있다. 그런 건 물론 과학의 투명망토조차 걸치지 않은 미신이다. 아울러 네이티브가 쓰는 말은 문법적으로 옳다고 믿는 사람도 있는데, 그것도 ‘많은 사람들이 쓰는 표현에 충실하자’는 것일 뿐 반드시 옳은 것도 아니다. 또 네이티브는 어휘가 풍부하다고 믿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바쁜 일상에 쫓겨 정해진 말만 쓰게 된 네이티브와, 다른 언어를 번역하는 수고로움을 반복하는 가운데 언제나 새로운 언어를 찾는 비네이티브 중, 누가 더 풍부한 어휘를 가지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