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 ‘공덕동 식물유치원’입니다 / 백수혜 / 세미콜론
재개발 단지에 살던 사람들이 재개발 소식을 듣고 좋았을지 막막했을지 나는 모른다. 주민들의 사정은 저마다 다를 것이다. 그들이 떠난 자리는 유령도시 같은 적막감과 쓰레기만 남아 여느 공포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하지만 한 발자국 더 가까이서 살펴보니 여유롭게 걸어 다니는 길고양이들과 말 그대로 폭풍 성장하고 있는 식물들이 원래 이 터전의 주인은 우리라는 듯 그들만의 세상을 만들며 인간이 만든 정적을 깨고 있었다. 그래, 사람이 살기 전엔 자연의 것이었지. 넓어진 ‘초록 시야’를 장착하고 재개발 단지를 자주 산책하다 보니 구석구석에 숨어 있는 식물들이 눈에 띄었다. 심지어 냄새나서 고개 돌리던 쓰레기장에서도 보였다. 온갖 것을 버리고 간 인간이 만들어낸 냄새는 지독했지만, 그 틈에서 굴하지 않고 생명을 유지하는 식물들이 있었다. 어떤 이유인지 알 수 없지만, 멀쩡한 화분에 담긴 다육이와 장미허브가 쓰레기 더미에 초라한 모습으로 누워 있었다. 한참 바라보다 윙윙대는 파리와 모기 사이에서 화분을 끄집어냈다. 마침 내가 좋아하는 예쁜 청록색 도자기 화분이었다. (p.19-21)
공덕동, 연희동, 노량진 등의 재개발 단지를 돌며 식물을 구조하다 보니 나름의 노하우라든가 방침이 생겼다. 당연하지만 버려진 식물인지 확실히 확인할 것. 재개발 단지엔 때때로 남들보다 늦게 이사 가는 집이 있기 때문에 빈집 앞에 버려진 화분인지 꼭 확인한다. 대체로 버려진 식물은 방치되어 지낸 기간이 눈에 보인다. 사람 손을 타지 않은 기간을 얼추 가늠할 수 있달까.
그리고 일년생 식물은 웬만하면 구조하지 않는다. 지금 있는 장소에서 적응해 살 날도 많지 않은데, 굳이 무리하게 구조하다 상처를 입히는 것이 더 나쁜 선택인 것 같다.
마지막으로 틈새에 뿌리를 깊게 내린 식물은 구조하지 않는다. 아스팔트 틈에서 자라는 식물을 뽑으려다 몇 번이나 뿌리를 뚝 끊어버렸다. 구해주려다 오히려 죽여버린 셈이어서 마음이 쓰렸다. 모든 구조가 성공적일 순 없다고 스스로를 다독거려도 영 마음이 나아지지 않았다. 혹여나 꼭 구조하고 싶은 마음이 들 때면 뿌리내린 보도블록이나 아스팔트 틈 사이에 흙이 있는지, 살살 파볼 만한지 꼼꼼히 확인한 후에 구조한다. 이제는 살짝 흔들어보면 감이 온다.
수많은 식물이 자리 잡은 재개발 단지의 정글을 보며 항상 다짐한다. 내가 모든 식물을 구조할 수 없다고. 재개발 단지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능력만큼만 최선을 다해 ‘계속해서’ 식물을 구조하는 일뿐이다. (p.26-27)
신기하게도 식물 덕분에 온라인뿐만 아니라 오프라인 친구들과의 관계도 더 돈독해졌다. 알고 지낸 지가 몇 년인데 서로가 식물에 관심이 있는 줄 몰랐다. 친구 제제에게 식물 구조 활동 이야기를 하니 본인은 제라늄을 키우기 시작했다며 키우는 식물들을 자랑하는 것이 아닌가. 반가운 마음에 그에게 졸업반 친구들을 선물했다. 몇 달 후, 제제가 보내준 사진을 보고 나는 그가 엄청난 ‘초록손(식물을 잘 키우는 사람의 손을 일컫는 표현)’의 소유자라는 걸 깨달았다. 비실댔던 식물도 그의 손에 길러지면 건강해지는 것은 물론이요, 더 크게 자라기도 했다. 우리 집에선 이런 크기의 잎사귀를 피운 적이 없었는데…! 제제네 집에선 식물들이 잘 클 뿐만 아니라 꽃도 잘 핀다. 비법 좀 알려달라 해도 분갈이 잘해주고 물 잘 주면 다 된다며 별거 없다고 손사래를 치는 그는 진정 초록손이었다. (p.53)
애벌레들이 아기 레몬 잎을 엄청나게 갉아먹었지만 얘네가 커야 나비를 또 보겠거니 싶어 내버려두었다. 심지어 한 애벌레는 크기도 다른 친구들보다 큰 데다가 포켓몬스터에 등장하는 애벌레 캐릭터 ‘캐터피’와 똑같이 생겨서 놀랐다. 피카츄마냥 캐터피도 현실감 없는 캐릭터라 생각했는데 실사 고증이 제대로 된 몬스터였던 것이다. 귀여운 캐터피 사진을 SNS와 가족 단톡방에 올렸더니 반응은 극과 극이었다. 귀엽다고 하는 이들과 징그럽다고 하는 이들 사이에서 의아했던 반응은 “얼른 없애!”였다. 농사짓는 아버지에게서 “쟤네를 얼른 없애버려야 해ㅠㅠ”라고 답장이 왔다. 농부의 입장에선 캐터피는 소중한 농작물을 갉아먹는 나쁜 곤충이었던 모양이다. 어떤 시각으로 보는지에 따라 이렇게 반응이 다르다니. 나도 식물을 팔아야 할 상품으로 생각했다면 해치워야만 하는 곤충으로 봤을지도 모른다. 물론 판매하지 않더라도 애지중지 키우긴 하지만, 여기는 모두가 공생하는 공덕동 식물유치원이자 곤충유치원이니까. 누구든 환영합니다. 모기 빼고요. 슬프게도 캐터피는 어디로 갔는지 자고 일어나니 사라졌지만, 사진으로나마 귀여운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다. (p.69)
때마침 등산 모임에서 알게 된 언니가 ‘모야모’라는 어플을 이용하면 식물 사진으로 쉽게 이름을 알 수 있다고 알려줬다. ‘뭐야 뭐’라고? 희한한 이름을 가진 어플을 얼른 다운받아 그동안 찍어둔 식물 사진을 올렸다. 30초나 지났을까. 핸드폰이 띠롱띠롱 울렸다. 인공지능이 아니라 모야모 어플 회원분들이 실시간으로 식물 이름을 댓글로 달아주었다. 토끼풀이랑 비슷한 잎사귀 형태지만 생김새가 다른 노란 꽃이 피는 식물은 괭이밥. 어느샌가 마당 화분 틈틈이 무수히 자라나는 생명력 강한 친구다. 괭이밥과 비슷한 노란 꽃을 지녔지만 잎 모양이 다른 식물은 애기똥풀. 손으로 줄기를 자르면 손에 주황색 물이 든다. 구조 현장에서 제일 많이 마주쳤던 길쭉한 토끼귀 모양의 잎을 가진 식물은 비비추. 여름에는 연보라색 꽃도 핀단다. 이름을 알게 되어도 계속 잊어버려서 다시금 찾아보곤 했는데 모야모 덕분에 자주 보는 친구들은 이제 이름이 익숙해졌다.
과학기술이 발전한 지금, 모든 걸 인공지능이 알려줄 줄 알았는데 아직도 사람 손이 필요한 곳들이 남아 있다. 식물도감만큼 많은 식물 이름을 아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도 굉장히 신기했다. 언제 이 많은 식물의 이름을 다 배운 걸까? 비록 온라인상이지만 친절한 답변을 받으면 왠지 어떤 인디언 마을 공동체의 아이가 된 것만 같다. (p.134-135)
예전엔 동네 부동산이나 미용실, 식당에서 식물 키우는 사람들을 보면 신기하고 멋지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땐 그게 다였다. 그런데 요즘은 가게만 가면 식물부터 본다. 얘는 이름이 뭘까? 어떻게 이렇게 멋지게 키우셨지? 이 식물은 꽃 보기 힘들다고 하던데 멋지게 피었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관찰하다 보면 가게에 왜 들어왔는지 깜빡하기 십상이다. 어느새 나타난 가게 사장님의 “예쁘죠?”라는 말로 식물 대화는 시작된다. 식물의 이름부터 어쩌다 키우게 됐는지, 번식은 어떻게 하는지 등 여러 정보를 공유하다 보면 대화의 마지막은 언제나 “조금 나눠줄까요?”로 끝난다.
대전에 여행 갔을 때, 맛집이라는 짜글이 식당에 갔다. 가게 입구를 빼곡히 채우고 있던 많은 식물, 그중에서도 ‘삼색달개비’가 유독 눈에 띄었다. 나도 삼색달개비를 키우고 있었지만 풍성하게 자란 모습이 신기해서 넋을 놓고 있으니 어느새 사장님이 내 곁에 와 말을 거셨다. “예쁘죠? 딸이 못 키우겠다고 해서 내가 데려왔는데 이렇게 많이 자랐어.” 심지어 가게 처마 밑에 매달린 화분에 심어진 달개비도 정말 풍성했다. “진짜 잘 자라. 한번 키워봐요!” 사장님은 금방이라도 몇 뿌리 담아주실 태세였다. “저도 키워서 괜찮아요! 정말 잘 키우셨네요. 너무 멋져요!” 어쩐지 음식 맛도 좋더라니 방금 만난 식물 애호가 사장님과 어느새 친구가 되어 한참 이야기꽃을 피웠다.
어느 날은 신촌의 한 편의점에 들렀는데, 편의점 식사 테이블 한쪽에 보리가 자라고 있었다. 서울 한복판 편의점 안에서 한겨울에 자라고 있는 보리라니. 궁금한 마음에 살펴보고 있으니 사장님이 슬쩍 말을 거셨다. “이게 보리예요, 보리. 신기하죠? 키워볼래요? 너무 잘 자라. 참 예뻐!” 나도 모르게 내민 손에는 보리 씨앗이 열 알쯤 놓여 있었다. “감사합니다! 잘 키워볼게요.” 얼떨결에 받아 든 보리 씨앗을 심은 지 두 달이나 되었을까? 초록색 싹들이 훌쩍 자라났다. 마침 날도 풀려 큰 화분에 심어 옥상에 두니 한 달 좀 지나니까 큰 키를 자랑하는 멋진 청보리로 자랐다. 생각해보니 인테리어용 조화 보리나 보리차 마실 때 보는 볶은 보리 말고 흙에 심어져 있는 보리는 처음 보는 거였다. 식물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소매넣기는 언제나 새로운 경험을 선사한다. (p.139-141)
재개발 단지를 돌아다니며 기웃기웃 구경하다 보면, 이곳에서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문득 궁금해진다. 저 집 담장 안의 커다란 대추나무는 혹시 자녀의 탄생을 기념하며 심었을까? 감나무가 있는 저 집은 가을에 고운 주황빛으로 익었을 감들을 기다란 장대로 땄을까? 화분이 많은 이 집은 주인이 식물을 엄청 좋아했나 보다. 능소화로 뒤덮인 담벼락은 여느 벽화보다 아름답고, 장미 덩굴이 장악한 담벼락이 길게 늘어선 골목에선 바람이 불 때마다 짙은 꽃향기가 코끝을 간질인다. 빈집을 보며 이런저런 상상의 나래를 펼치면서 지금은 떠난 주민들이 살던 당시 북적이던 마을의 모습을 그려보곤 한다. (p.170)
페이퍼맨 : 종이를 코딩하는 디자이너 / 최규호 / 안그라픽스
기술적인 부족함도 개성이자 장점으로 거듭날 수 있지 않을까? 장점으로 무장한 기술들이 모였다고 꼭 좋은 결과물이 만들어지진 않는다. 샌드위치나 햄버거는 다양한 영양소가 고루 들어간 훌륭한 식품일 수 있지만 재료의 품질, 비율, 조합에 따라 영양 불균형의 칼로리 폭탄 음식이 될 수 있다. 경험상 기술에는 언제나 양면성이 있고 장단점이 따르기 마련이다. 그래서 당장 극복하기 어려워 보이는 기술적 한계가 있다면 그 부족함을 개성이자 장점으로 승화시키는 방법이 있을 것 같았다. 페이퍼맨은 서버를 활용하지 않고 만들어졌다. 외부 URL을 연결해 둔 일부 기능을 제외하면 인터넷 연결 없이 모든 기능이 정상적으로 작동한다. 실제로 해본 건 아니지만 가령 페이퍼맨 엑스레이의 바코드 스캔 서비스는 비행기 모드를 켠 채 기내에서 도서 바코드를 스캔하여 종이 정보를 얻을 수 있다. 그 외에도 페이퍼맨의 모든 기능은 실행 과정에서 서버와 통신하는 일이 없기 때문에 기기가 오프라인 상태여도 작동한다. 그렇게 된 데에는 서버를 활용한 앱을 만들어본 경험이 없는 내 역량의 부족함이 가장 컸지만 오히려 그 덕분에 의외의 장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p.14-15)
Q. 두 편집자님은 책을 만드는 과정에서 가장 기쁜 순간은 언제였나요?
광현 저는 가장 기쁠 때가 책을 만들 때마다 있습니다. 표1(앞표지) 문안이 완성됐을 때입니다. 저는 표1 문안 만들기가 가장 어렵거든요. 이미 잘 나온 표1 문안들이 세상에 너무 많습니다. 무엇을 만들어 내놓아도 성에 안 차는 느낌입니다. 클리셰에 클리셰를 더하는 죄책감도 들고요. 제가 잘 뽑아냈다고 생각해도 다른 사람은 그렇게 느끼지 않는 경우도 많고요. 힘든 과정이니만큼 표1을 제대로 완성했을 때 가장 기쁩니다.
구홍 아무래도 앞표지와 뒤표지뿐 아니라 모든 지면을 연결하는 동시에 자로 잰 듯 깔끔하게 제 역할을 수행하는 책등을 바라볼 때죠. 책등은 그 이름처럼 책의 척추로서 책을 책답게 만듭니다. 책등이 없는 책을 상상할 수 있을까요? 책등의 역할뿐 아니라 편집자, 디자이너, 인쇄 및 제본 담당자 등이 완벽에 가까운 책등을 위해 들이는 공을 고려하면 책등은 지금보다 훨씬 더 존중받아야 합니다. (p.209)
Q. 광현 님과 구홍 님은 실제로 만들어져 나온 책이 상상과 달라 속상했거나 상상한 그대로여서 기뻤던 적이 있나요?
구홍 앞선 답변과 연결되는데, 속상한 순간은 아무래도 두께를 잘못 계산해 너무 두꺼워지거나 얇아진 책등을 바라볼 때죠.
광현 디자이너님, 제작 담당자님, 기장님, 그 외 관련된 모든 분이 열심히 해주시기 때문에 크게 속상했던 기억은 없습니다. 기뻤던 특정 순간을 꼽기는 어렵습니다. 어떤 책이든 제가 일하는 곳에 책이 입고되어 책을 직접 만져보는 매 순간이 기쁩니다. 책을 만들 때마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책을 제작하는 모든 과정에서 생긴 의외성을 존중하는 것입니다. 책을 만들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책을 받아 들기까지 매 순간 예상치 않았던 문제가 생깁니다. 일이 완벽하게 술술 풀렸다고 해도 막 입고된 책을 제가 직접 집어 드는 순간, 제 예상과는 약간 다릅니다. 근데 그 의외성이 오히려 점점 소중하게 느껴지더군요. 의외성이 오히려 책을 풍성하게 만들어줍니다. (p.213-2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