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만든 가난 / 매슈 데즈먼드 / 아르테
가난은 트라우마를 남긴다. 그런데 사회는 그걸 치료하는 데 투자하지 않기 때문에 가난한 사람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자신의 고통에 대처할 때가 많다. 내 친구 스콧은 어릴 때 성폭력을 당했다. 성인이 된 그는 알약들을, 그다음에는 펜타닐을 발견했다. 그는 한 번에 20달러를 내고 평화를 구입했다. 40대가 된 그는 약을 끊고 몇 년을 그렇게 버티다가 다시 약에 빠져서 호텔 방에서 혼자 죽어 갔다. 나의 예전 룸메이트 킴벌, 또는 많은 사람이 아는 이름대로 부르자면 우(Woo)는 마약에는 전혀 손대지 않았고 술도 가끔씩만 마셨다. 하지만 어느 날 우리가 밀워키에서 같이 지내던 낡아 빠진 복층 아파트에서 그는 못을 밟았고, 거기에 신경을 쓸 여력이 없어서 상처를 방치했다가 아래쪽 다리를 잃었다. 당뇨 때문에 감염이 악화되어 목숨이 위태로워졌기 때문이다.
가난은 통증일 뿐만 아니라 불안정이기도 하다. 지난 20년 동안 임차인들의 소득은 하락했지만 임대료는 치솟았다. 그런데도 연방정부는 수급 자격이 되는 가정 네 곳 중 한 곳에만 주택을 지원한다. 빈곤선 이하인 임대주택 가정 대부분은 최소한 소득의 절반을 주택비로 지출하고, 네 곳 중 한 곳은 임대료와 공과금에만 소득의 70퍼센트 이상을 지출한다. 이런 여러 가지 요인들이 겹치면서 미국은 저소득 임차인들이 퇴거를 비일비재하게 겪는 나라가 됐다. 아비규환이 일상이 됐다. 미국에서는 평균적으로 1년 동안 360만 장이 넘는 퇴거 통지문이 문에 붙거나 거주민에게 전달되는데, 이는 2010년 금융위기가 극에 달했을 때 착수된 압류의 수와 거의 맞먹는다. (p.51-52)
가난은 쪼그라든 삶과 인성이다. 그것은 당신의 사고방식을 바꾸고 당신이 잠재력을 온전히 발현하지 못하게 막는다. 그것은 당신이 어떤 결정에 쏟아야 할 정신적인 에너지를 위축시켜서 다른 모든 희생을 감수하고 가장 최근에 있었던 스트레스 요인―납기일이 지난 가스 요금이나 실직 같은―에만 온 정신을 쏟게 만든다. 누군가가 총격으로 목숨을 잃으면 같은 구역에 사는 어린이들은 그 사건 이후 며칠 동안 인지 테스트에서 훨씬 낮은 수행 능력을 보인다. 폭력은 이들의 마음을 짓누른다. 시간이 지나고 영향이 사그라들 때쯤 또 다른 이가 쓰러진다. 가난 앞에선 누구든, 결핍에 시달려 본 적이 없는 우리에게는 무분별해 보이는, 심지어는 명백히 어리석은 결정을 내릴 수 있다. (p.59-60)
가난한 노동자들은 임금이 인상되면 건강이 크게 좋아진다. 여러 연구는 최저임금이 인상되면 아동방임률, 미성년자 음주율, 10대 출산율이 내려간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흡연 역시 감소한다. 거대 담배 회사들은 오랫동안 저소득층 주거지역을 공략해 왔지만, 최저임금 인상이 저소득 노동자들의 흡연율을 감소시킨다는 확실한 증거가 있다. 임금인상은 가난의 고통을 완화시켜 사람들을 흡연의 굴레에서 해방시킨다.
빈곤에 동반되는 만성적인 스트레스는 우리 몸에도 영향을 미친다. 한 연구는 2008년부터 2012년 사이에 뉴욕시가 겨우 7달러를 조금 넘는 수준인 최저 시급을 15달러로 인상했더라면 그 기간에 발생한 조기 사망을 5500건까지 예방할 수 있었으리라고 결론 내렸다. 최저임금 인상은 항우울제이자, 수면 보조제이자, 스트레스 완화제다. 미국에서 뇌에 여유 공간이 있고 목소리가 큰 일부 대중은 빈곤에서 벗어나려면 당사자들이 행동을 바꿔야 한다고 믿는 듯하다. 더 좋은 일자리를 얻어라. 아이를 그만 낳아라. 돈 문제에 대해 더 똑똑한 결정을 내려라. 하지만 실은 그와 정반대다. 더 나은 선택의 발판은 경제적 안정이다. (p.117-118)
미국에는 슬럼을 착취해 온 기나긴 역사가 있다. 슬럼은 돈이 됐고 그래서 돈은 슬럼을 만들었다. 오늘날은 어떤가? 가난한 미국인들은 여전히 높은 주거비용에 시달린다. 임대료는 지난 20년 동안 세입자들의 소득보다 훨씬 빠르게 올라서 두 배 이상 늘어났다. 중위 임대료는 2000년 월 483달러에서 2021년 1216달러로 증가했다. 이 나라의 모든 지역에서 주거비가 치솟았다. 2000년 이후로 중위 임대료는 중서부의 경우 112퍼센트, 남부는 135퍼센트, 북동부는 189퍼센트, 그리고 서부는 192퍼센트 인상됐다. 어째서 이렇게까지 빠르게 치솟았을까? 전문가들은 이 질문에 앵무새처럼 기계적인 대답을 내놓고 있다. 주택공급이 충분하지 않은데 수요가 너무 많다. 정부 규제와 용도 제한 때문에 건축비가 더 비싸졌고, 이런 비용이 세입자들에게 전가된다. 임대주들이 적당한 비율의 소득을 올리려면 임대료를 올릴 수밖에 없다. 정말 그럴까? 우리가 어떻게 알겠는가? 옛날 토지 소유주들은 돈과 이윤에 따라 움직였는데, 요즘에는 그저 보이지 않는 시장의 힘에 의해 조종당하고 정부 관료에게 멱살이 잡혀 있다는 건가?
우리에겐 더 많은 주택이 필요하다. 그걸 부정할 사람은 없다. 하지만 임대료는 아파트가 남아도는 도시에서도 급등했다. 2021년 말 앨라배마 버밍햄에서는 임대용 아파트의 19퍼센트 가까이가, 그리고 뉴욕 시러큐스에서는 12퍼센트가 공실이었다. 하지만 두 지역의 임대료는 지난 2년 동안 각각 약 14퍼센트와 8퍼센트 상승했다. 데이터를 보면 최근 몇 년 동안 특히 가난한 동네에 있는 다세대 부동산의 경우 부동산 소유주의 임대 소득이 지출보다 훨씬 빠르게 늘어났다는 사실 역시 확인할 수 있다. 임대료 상승은 단순히 운영비 상승만을 반영하는 게 아니다. 또 다른 역학도 작동한다. 가난한 사람들―특히 가난한 흑인 가족들―은 어디서 살지라는 문제에서 선택지가 많지 않고, 바로 이 때문에 임대주들은 이들에게 과도한 임대료를 뽑아낼 수 있다. 그래서 그렇게 한다. (p.123-124)
마지막은 서비스에 비용을 매겨라다. 수표 현금 교환소는 수표의 종류에 따라 총액의 1~10퍼센트를 수수료로 떼어 간다. 이는 시급 10달러를 받으며 2주에 걸쳐 100시간을 일한 뒤 1000달러짜리 수표를 받은 노동자가 수표 현금 교환소에 가면, 자신이 번 돈을 현금으로 바꾸기 위해 10~100달러를 지불해야 한다는 뜻이다. 사실상 한 시간에서 최대 열 시간의 노동이 날아가는 것이다. (많은 노동자가 자동으로 수수료를 공제하는 전통적인 은행의 예측하기 어려운 착취보다는 이쪽을 더 선호한다. 매도 알고 맞는 게 더 나은 법이니까.) 대기업들도 이 짓에 가세했다. 월마트는 이제 수표를 최대 1000달러까지 현금으로 바꿔 줄 것이다. 2020년 미국인들은 순전히 수표를 현금으로 바꾸는 비용으로만 16억 달러를 지출했다. 만일 가난한 사람들이 비용을 들이지 않고 자기 돈에 접근할 수 있는 길이 있었더라면 팬데믹이 낳은 불황기가 이어지는 동안 10억 달러가 넘는 돈이 이들의 수중에 그대로 남아 있었을 것이다. (p.134-135)
매년 초과 인출 수수료로 10억 달러 이상, 수표 현금화 수수료로 16억 달러, 고금리 소액 대출 수수료로 최대 98억 달러가 징수된다. 주로 미국의 저소득층으로부터 매일 징수되는 수수료는 6100만 달러 이상이다. 전당포와 자동차 담보대출, 임대 후 매입 거래 방식을 통해 징수되는 연 수입은 계산하지 않은 것이다. 1961년 제임스 볼드윈이 “가난하게 산다는 건 극도로 돈이 많이 드는 일”이라고 말했을 때 이런 비용들은 상상하지도 못했으리라. (p.140-141)
빈곤은 단순히 충분한 돈이 없는 상태만이 아니다. 충분한 선택지가 없고, 그 때문에 이용당하는 상태다. 사람들이 빈곤의 수렁에서 헤어나지 못하도록 착취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를 간과할 때 우리는 기껏해야 부실하고 최악의 경우에는 아무런 실효성이 없는 정책을 설계하게 된다. 주거 위기는 해결하지 않고 입법을 통해 밑바닥층의 소득을 증대할 경우―가령 아동 세액 공제(Child Tax Credit)를 확대하거나 최저임금을 인상함으로써―결국에는 그 입법이 도움을 주고자 했던 가족이 아니라 집주인에게만 좋은 일일 때가 많다. 필라델피아 연방준비은행(Federal Reserve Bank of Philadelphia)이 2019년 실시한 연구에 따르면 주정부가 최저임금을 인상했을 때 가족들은 처음에는 임대료를 내는 데 숨통이 트였다. 하지만 집주인들은 임대료를 인상함으로써 임금인상에 발 빠르게 대응했고, 이 때문에 정책 효과가 희석됐다. (코로나19 구제책이 시행된 이후에도 이런 일이 일어났지만, 논평가들은 이 문제를 혹독한 인플레이션 때문으로 설명하는 쪽을 더 선호했다.) (p.142-143)
어쩌면 초기 자본주의 이후로 가난한 사람들을 게으르고 의욕 없는 자들로 보도록 사람들을 길들여 왔기 때문인지 모른다. 전 세계의 초기 자본가들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산업계의 거물들이 상대하는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어떻게 대중을 공장과 도살장으로 밀어 넣어서 법과 시장에서 허용하는 가장 낮은 돈을 받고 일하게 만들 것인가라는. 이 문제에 대한 자본가들의 해답은 굶주림이었다. “부유층 사람들을 행동하게 만드는 자존감, 명예, 야망 같은 동기가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거의 없다. 일반적으로 그들을 채찍질해서 노동으로 몰아갈 수 있는 건 굶주림뿐이다.” 잉글랜드의 의사이자 성직자인 조지프 타운센드는 1786년 자신의 논문 「인류의 행운을 비는 한 사람이 쓴 구빈법 연구(A Dissertation on the Poor Laws, By a Well-Wisher of Mankind)」에서 이렇게 적었다. 그리고 그가 주창한 입장은 근대 초기 내내 상식으로, 그 뒤로는 관습법으로 자리 잡게 된다. 타운센드는 이어서 굶주림의 “끝없는 압박”이 “산업에 가장 자연스러운 동기”를 제공한다고 말했다. (p.151)
반면 나머지 우리, 그러니까 보호받는 계급에 속하는 우리는 점점 복지 프로그램 의존도가 높아졌다. 2020년 연방정부는 주택 소유자 보조금으로 1930억 달러 이상을 썼다. 이는 저소득 가구의 직접적인 주택보조금에 들어간 금액(530억 달러)을 훨씬 넘어서는 수치다. 이런 보조금을 누리는 가정은 대부분 억대 연봉을 받는 백인 가정이다. 가난한 가정은 운이 좋아서 정부 소유의 아파트에 살게 되더라도 곰팡이와 심지어는 납 성분이 들어간 페인트를 면하지 못할 때가 많은데, 부유한 가정은 첫 번째 집과 두 번째 집에 대해 주택담보대출 이자 감면을 신청하는 실정이다. 가난한 가정의 부모에게 지급되는 현금 복지는 일생 동안 5년으로 한정되어 있지만, 주택담보대출 이자 감면을 신청하는 가정은 그 대출 기간 동안 그렇게 할 수 있는데, 이게 보통 30년이다. 15층짜리 공공주택과 담보대출이 있는 교외 주택 둘 다 모두 정부 보조금이 들어가 있지만, 그렇게 보이고 느껴지는 건 한쪽뿐이다.
연방정부가 제공하는 모든 공공보조금을 계산할 경우 (국내총생산 대비) 미국의 사회복지는 프랑스 다음으로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규모다. 하지만 이는 정부 보조금을 받아서 고용주가 제공하는 퇴직금, 학자금대출과 529플랜, 아동 세액공제, 주택 소유자 보조금처럼 빈곤선보다 훨씬 잘사는 미국인들에게 쏠리는 보조금을 포함시켰을 때 이야기다. 만일 이런 세금 우대 조치를 제외하고 저소득층을 겨냥한 프로그램만을 국내총생산 대비로 계산할 경우 빈곤 경감에 대한 우리의 투자는 다른 부유한 국가들에 비해 훨씬 적어진다. 미국의 사회복지는 편파적이다. (p.161-162)
미국 정부는 도움이 가장 적게 필요한 사람들에게 가장 많은 도움을 준다. 이것은 우리 사회복지의 진정한 속성이며, 우리의 은행 잔고와 빈곤 수준뿐만 아니라, 우리의 심리 상태와 시민정신에도 광범위한 영향을 미친다.
여러 연구는 근로장려세제를 청구한 미국인들은 그것을 청구하지 않았거나 청구할 수 없었던 비슷한 배경의 사람들에 비해 스스로를 정부의 수혜자로 볼 가능성이 더 높지 않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하지만 현금 복지를 수령한 사람들은 스스로를 정부 보조금의 수혜자로 인식했다. 이와 유사하게 학자금대출이나 529플랜에 의지한 사람들은 삶의 궤적이 유사하지만 이런 프로그램에 의지한 적이 없는 사람들에 비해 자신의 삶에서 정부의 역할을 더 많이 의식하진 않았다. 하지만 제대군인지원법(GI Bill of Rights)의 혜택을 누린 미국인들은 자신이 국가의 조치를 통해 새로운 기회를 얻었다는 인식을 분명하게 가졌다. 실제로 (공공주택이나 푸드스탬프처럼) 가장 눈에 띄는 사회 프로그램에 의지하는 미국인들은 정부 덕분에 자신이 더 나은 삶을 살게 됐음을 인식할 가능성도 가장 높지만, (세금 우대 조치처럼) 가장 보이지 않는 프로그램에 의지하는 미국인은 정부가 자신에게 도움을 주었다고 믿을 가능성이 가장 낮다.
정부의 보조금에서 가장 많은 혜택을 입는 사람들―일반적으로 회계사를 거느린 백인 가정―이 가장 강력한 반정부 정서를 품는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은 자신의 삶에서 정부의 역할을 인정하는 시민들보다 투표율이 더 높다. 이들은 정부지출 삭감을 약속하는 정치인들에게 표를 던진다. 철퇴를 맞게 되는 건 자신들의 이익이 아니라는 걸 정확히 알고서. 주택담보대출 이자 감면을 청구하는 유권자는, 적정가격 주택에 대한 투자 증대에 반대하는 바로 그 사람들이다. 고용주가 지원하는 의료보험을 수급한 사람들이 부담적정보험법 폐지를 밀어붙인 사람들이었듯. 이것이 정치의 속 터지는 역설 중 하나다. (p.166-167)
사람들이 돈을 많이 축적하면 할수록 공공재에 대한 의존도는 낮아지고, 그러면 공공재를 유지하는 데에 대한 관심도 줄어든다. 사람들이 세금 감면 혜택 등의 수단을 통해 원하는 바를 손에 넣으면 공공재는 방치되어 악화하는 반면 개인의 부는 커져 간다. 공공주택, 공교육, 대중교통이 점점 부실해질수록, 그것은 점점, 그러다가 거의 전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의 전유물이 된다.
그러고 나면 사람들은 공공부문을 싸잡아서 폄하하기 시작한다. 마치 뿌리부터 썩었다는 듯, 마치 부자들은 그걸 초토화해도 아무런 관심이 없다는 듯. 부자와 빈자가 이내 대동단결하여 공공재에 대한 반감을 드러낸다. 부자들은 자신이 필요하지도 않은 것에 돈을 내기가 싫어서, 가난한 사람들은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 너무 허접하고 제 기능을 못 하는 상태여서. 집단이 공유하는 것은, 특히 계급과 인종을 구분하지 않고 공유되는 것일 경우에는 더 미천한 것으로 인식되는 지경이다. 미국에서는 공공서비스에 의존하는 것이 분명한 가난의 표지고, 거기서 멀수록 넉넉하다는 분명한 표지다. 충분한 돈은 “재정적 독립”을 가능케 하는데, 그것이 노동으로부터의 독립이 아니라 공공부문으로부터의 독립을 의미한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있다. 한때 미국인들은 직장 상사가 없는 삶을 꿈꿨다. 그런데 이제 우리는 버스 기사가 없는 삶을 꿈꾼다. 넓은 지역사회에서 빠져나와 좀 더 배타적인 장소에 스스로를 격리시킬 자유를, 그래서 가난한 사람들로부터 점점 멀어지다가 그들을 아예 의식할 필요도 없는 그런 세상에서 살 자유를 꿈꾼다. (p.182-183)
미국인 대부분은 나라에서 저소득층 가구를 위해 더 많은 공공주택을 짓기를 바라지만 그게 (또는 종류를 막론하고 다세대 주택이) 자기 동네에 들어오는 걸 원치는 않는다. 민주당원들은 공공주택을 관념적으로 지지할 가능성이 공화당원들보다는 더 높지만, 주택 소유주로서는 막상 자기 동네에 신규 공공주택 단지가 들어온다고 하면 그걸 좋아할 가능성이 더 높지는 않다. 한 연구는 보수성향의 임대업자들이 사실 자유주의 성향의 주택 소유주보다 120세대 아파트 건설 계획에 찬성할 가능성이 더 높다고 밝히기도 했다. 어쩌면 우리가 그렇게까지 양분된 게 아닐 수 있다. 소득수준이 어느 정도 이상이면 모두가 분리주의자인지도 모른다.
부유한 백인 자유주의자들이 주로 지지하는 진보적인 정책들은 그들의 부에 실제적인 위협을 전혀 가하지 않는 것들이었다. 민권운동 기간 동안 백인 엘리트들이 공원과 공설 수영장의 인종 분리 철폐를 지지했던 것은 어차피 자기들은 그 공간을 사용하지 않았던 까닭이다. 그들은 사적인 클럽이 있으니까. 이는 백인 노동계급의 분노를 샀고 성난 백인 노동계급은 인종 분리 철폐를 “부자를 뺀 나머지 모든 사람의 통합”이라고 불렀다. 1970년대에 부유한 백인 자유주의자들이 자기 동네의 토지를 좀 더 포용적인 방식으로 이용할 수 있도록 법률을 변경하는 것에는 저항해 놓고 강제적인 버스 통학제를 지지한 것은 그들이 사는 교외 동네에는 그 정책이 적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p.195-196)
레프 톨스토이는 『전쟁과 평화』와 『안나 카레니나』를 출간한 뒤 1881년 러시아의 시골에서 모스크바로 이사했다. 53세인 그는 자신의 집을 관리할 하인을 한 무더기 고용할 수 있을 정도로 부유한 남자였다. 모스크바에 살기 시작한 톨스토이의 눈에 제일 먼저 들어온 것은 그곳의 가난이었다. 그는 이렇게 적었다. “나는 시골의 가난은 알았지만 도시의 가난은 낯설고 이해하기 힘들었다.” 도시의 거리를 걷다가 극심한 굶주림과 절망이, 도를 넘는 허영과 경박함에 뒤얽힌 모습을 보고 톨스토이는 충격에 빠졌다. 이 충격에서 벗어날 길이 없었던 톨스토이는 답을 찾아 나섰다. 사창가를 방문했고, 걸인을 체포한 경찰에게 질문을 했고, 심지어 어린 소년을 입양하기도 했다. 아이는 결국 도망쳐 버리긴 했지만. 이 위대한 문호는 빠르게 깨달았다. 문제는 노동이 아니라는 것을. 가난한 사람들은 절대 일을 멈추지 않는 것 같았다. 톨스토이의 결론은 궁극적으로 빈둥거리며 사는 자신을 비롯한 부자들이 문제라는 것이었다. “나는 다른 사람의 등에 올라탄 채 그 사람의 목을 조르고 그 사람이 나를 데리고 다니게 만들지만, 나 스스로는 그리고 주변 사람들에게는 마치 그 사람에게 대단히 미안하다는 듯, 어떻게 해서든 그 사람이 더 편한 삶을 살면 좋겠다는 듯 행동한다. 그 사람의 등에서 내려올 생각은 하지 않고.”
그 시절 그곳에서도, 지금 이곳에서도 맞는 말이다. 우리가 이렇게 잘사는데도 불구하고 이 땅에 그 많은 가난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잘살기 때문에 바로 가난이 사라지지 못하는 것이다. 문제는 그들이 아니다. 우리다. 톨스토이는 이렇게 썼다. “그건 정말 아주 간단하다. 내가 가난한 사람들을 돕고 싶으면, 그러니까 가난한 사람들이 가난하지 않도록 거들고 싶으면, 나부터가 그들을 가난에 빠뜨려서는 안 된다.” (p.203-204)
우리는 가난을 해소하는 것보다 풍요에 돈줄을 대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 미국은 세금을 가지고 꼼수를 쓰는 기업과 가정을 강력하게 단속하고 거기서 새로 확보된 세수를 돈이 가장 절박하게 필요한 사람들에게 재할당하기만 해도 적자를 늘리지 않고 빈곤을 효과적으로 종식시킬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 대신 부자들을 마음대로 하게 내버려 놓고 이미 많이 가진 사람들에게 한껏 몰아줌으로써 부유층에게 대단히 유리한 복지 시스템을 만든다. 그리고 우리의 선출직 관료들은 뻔뻔하게도―진짜 파렴치하게도―가난한 사람들이 정부 원조에 의지한다는 이야기를 날조하고 비용이 너무 많이 든다는 이유로 빈곤 감소안을 사장시킨다. 그들은 아동빈곤을 절반으로 줄이거나, 모든 미국인이 의사의 진료를 받을 수 있게 하는 프로그램의 가격표를 힐끗 본 뒤 입을 쩝쩝 다시며 “근데 우리가 그 돈을 어떻게 감당하지?” 하고 묻는다. 우리가 그 돈을 어떻게 감당하냐고? 이 얼마나 죄받을 질문인가. 이 얼마나 이기적이고 정직하지 못한 질문인가. 마치 그 답이 우리 앞에 뻔히 놓여 있다는 걸 모른다는 듯이. 미국 국세청(IRS)이 제 할 일을 하게 만들기만 해도 그 돈을 감당할 수 있다. 우리 중 잘사는 사람이 정부에서 더 적게 가져가기만 해도 그 돈을 감당할 수 있다. 부유한 사람들의 돈을 지켜 주는 게 아니라 기회를 확장하는 방식으로 복지 시스템을 설계하기만 해도 그 돈을 감당할 수 있다. (p.205-206)
유의미하고 아주 구체적인 변화가 이루어졌지만 우리는 그것을 알아보지 못했다. 무엇이 효과가 있는지를 알아보기를 거부할 때 우리는 아무것도 소용없다는 거짓말을 믿어 버릴 위험이 있다. 미래를 또 다른 오늘로만 상상할 위험이 있다. 어쩌면 모든 감정 중에서 가장 발뺌하기 좋은 절망에, 어쩌면 모든 신념 체계 중에서 가장 보수적인 냉소에 굴복할 위험이 있다. 이는 유의미한 대책을 질식시킬 수 있고, 당연히 다른 사람들이 대의에 동참하도록 고무하지 못한다. 1978년 신학자 월터 브루그먼은 “자유주의자들은 비판에는 능하지만 약속은 전혀 하지 않을 때가 많다”고 썼다. 하지만 약속의 말이 없으면 우리는 정처 없이 부유하며 반빈곤의 정치가 쏙 빠진 반빈곤 정체성을 양산할 위험이 있다. 실효성 있는 정책에 어떤 아쉬움이 있더라도 우리는 그 실효성에 경의를 표해야 한다. 그렇게 해야 구체적인 변화의 가능성이 뿌리를 내릴 수 있으므로. 아무리 암담한 시기라도 우리는 새로운 사회계약을 상상하고 거기에 경탄해야 한다. 그렇게 해야 현 상황에 대한 불만과 그것의 비영구성이 모두 드러나므로. “우리는 그것이 현실적인지 실제적인지 성공 가능한지가 아니라 그것이 상상 가능한지를 질문해야 한다”고 브루그먼은 썼다. “우리의 의식과 상상력이” 기존 질서에 “너무 공격당하고 포섭되어서 대안적인 생각을 할 수 있는 용기나 힘을 빼앗긴 건 아닌지를 질문해야 한다”. (p.224-225)
빈곤이 없는 미국은 유토피아도, 회색으로 통일된 땅도 아닐 것이다. 둘러보라. 우리보다 빈곤이 훨씬 적은 자본주의 나라가 얼마나 많은지. 빈곤이 사라진 미국에서도 디즈니월드는 건재할 것이다. 시장과 사유재산권도 건재할 것이다. 에르메스 핸드백, 테슬라 자동차, 리바이스 청바지, 나이키 운동화도 여전히 허용될 것이다. 여전히 일확천금을 얻을 수도 있다. 빈곤의 종식은 사회적 붕괴로 이어지지도, 소득불평등을 없애지도 않을 것이다. 오늘날의 미국은 소득불평등이 워낙 심해서 우리가 빈곤을 종식시킬 수 있을 정도로 평등을 의미 있게 이룬다 해도 여전히 최상위층과 밑바닥층 사이의 간극은 메울 수 없다. 보수주의자들은 자기는 (모든 사람이 똑같은 걸 갖는) 조건의 평등이 아니라 (모두가 똑같이 시도해 볼 수 있는) 기회의 평등에 찬성한다고 말하기를 좋아한다. 우리가 기회의 평등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진짜로 노력하기만 한다면 나도 좋다.
빈곤의 종식이 빈곤선 밑에 있는 수백만 노동자와 부모와 세입자와 아이들에게 무슨 의미일지를 일일이 다 설명하기는 힘들다. 그것은 완전히 다른 존재 상태를, 더 나은 안전과 건강, 더 많은 공정함과 안정이 주를 이루는 삶을 의미할 것이다. 생존 쟁탈전이 아니라 열정과 포부가 주도하는 삶을 의미할 것이다. 마침내 숨 쉴 수 있는 상태를 의미할 것이다. 국가가 전체의 이익을 위해 두 팔 벌려 빈민들을 포용함을 의미할 것이다. 빈곤을 종식시킨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빈곤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회악의 촉매이자 근원인 까닭에, 빈곤을 마침내 도려낼 경우 삶의 많은 측면이 엄청나게 개선될 것이다. (p.288-2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