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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기자의 고심 / 믿기자 / 편않

 

 ‘지방’에서 기자 일을 시작한 뒤로부터 촌놈과 지방, 서울 같은 단어들은 그냥 지나가는 생각거리가 아니라 평생의 화두가 됐다. 지방 소멸과 지역 균형 발전 등에 관한 취재를 필연적으로 여러 차례 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면서 지방이라는 용어가 왜 모멸적인지 진정으로 이해하게 됐다.
 무엇보다 이건 차별과 무지에 기반한 말이다. 너희는 우리와 다르다는 ‘타자화’를 추구한다는 점은 차별이다. 도저히 비슷하다고 볼 수 없는 무수한 도시와 농촌과 어촌과 산촌을 뭉뚱그리는 건 무지다. 순천, 순창, 춘천은 다른 곳이다. 영양, 영주, 영천도 같은 곳이 아니다. 이름 석 자 밝히듯이 ‘순서’ 할 때 순(順), ‘천도복숭아’ 할 때 천(天), 이렇게 말해 줘야 차이를 알까? 한국이나 일본이나 중국이나 그게 그거인 ‘아시안’이라고 부르면 기분이 어떤가?
 외부의 왜곡된 시선만 있다면 사정이 좀 나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존재하는 비서울의 열등함, 그리고 거기서 비롯된 열등감은 ‘지방’이라는 말을 더 참담하게 만든다. 긴급히 맹장 수술을 할 수 있는 소아외과 전문의가 없어 다른 지역의 대학병원을 전전해야 했던 어느 아이의 이야기, 몇십 년 뒤에는 마을이 통째로 사라질 거라는 ‘지방 소멸’의 우울한 전망……. 하루라도 빨리 여기서 벗어나야 하나? 그들 말대로 우리는 2등 국민인 건가? 이런 생각이 들지 않을 수가 없다. (p.24-25)

 

 그런데 왜 서울은 하고많은 기사 중에 주로 그런 기사들을 요구하는가? 30면이 넘는 일간지에 실린 지역 소식들은 왜 항상 흥미 위주인가? 내가 공들여 쓴 예산 감시 기사에는 왜 관심이 없나? 지역민들의 삶에 실질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문제들이 사건·사고와 동등한 비중으로 서울 미디어에서 다뤄지는가? 서울이 아닌 지역은 늘 그런 일들만 발생하는 곳인가?
 이런 시선 속에서 비서울은 특정한 사건명의 머리글자에 자리하게 된다. ‘밀양 여중생 사건’, ‘제주 중학생 살인 사건’, ‘인천 아동학대 사건’처럼 말이다. 실은 지역명과 사건 내용은 별 관계가 없다. 특정 지역이라서 일어난 사건은 매우 드물다. 그러나 대중의 머릿속에서 지역명이 각인되는 계기는 이런 사건에 동네 이름이 붙었을 때다. 잔혹한 살인이 일어난 곳, 현대판 노예가 있던 곳이라며 비서울은 야만적인 공간으로 형상화된다. 강준만 전북대 교수는 이를 두고 ‘변고적 지방’, 그러니까 어떤 재앙이나 사고가 일어나는 공간으로 지방을 보는 시선이라고 지적한다(강준만, 『지방 식민지 독립선언』, 개마고원, 2015). 지방은 뭔가 열등한 인간들이 기상천외한 사고를 치는 곳이라는 서사가 여기서 만들어진다. (p.33-34)

 

 댓글 다는 사람들이 나쁜 거야. 이렇게 단순하게 넘기고 누리꾼들을 악마화한다면 기자 마음은 편할 수도 있다. 그러나 문제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내가 쓴 기사들이 혐오 정서에 먹이를 주는 건 아닐까? 내 기사에 달린 댓글을 보고 누군가 지역 혐오를 더 강하게 가지게 되었다면, 애초 기사를 생산한 나에게 책임이 있는 것은 아닐까? 특히 지방 권력을 감시하자는 뜻에서 힘줘 쓴 고발 기사들이 지역 혐오의 기제가 되는 것처럼 보일 때 이런 고민은 더 깊어진다. 기사를 통해 바뀌거나 개선되는 것은 별로 없고, 지역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만 많아지는 것 아닌가 하는 의심에 빠지게 된다. 공리주의적인 관점에서 볼 때 내 기사가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달성하는 데 오히려 부정적인 영향을 주는 건 아닐까?
 이 같은 의심은 그 자체로 취재에 방해가 된다. 조금 ‘하드’한 취재를 하려고만 들면 자기 검열의 덫에 걸려들기 때문이다. 기자들의 이런 정서를 기가 막히게 파고들며 기사를 막으려는 이들도 있다. 기자님, 그거 쓰면 우리 고장을 욕보이는 꼴이 되지 않겠어요? 부정적인 기사를 반드시 낼 필요가 있겠어요? 누워서 침 뱉기 아니에요? 말이 되는 것 같지만 사실은 말이 안 된다. 기사를 작성할 만한 다른 요건이 충족된다면, 지역 이미지를 나쁘게 만들 가능성이 있는 기사라고 하더라도 쓰지 않을 수는 없다.
 그리하여 오늘도 쓴다. 그리고 오늘도 혐오를 마주한다. 또 괴로워한다. 이런 악순환을 끊을 방법은 없을까? 누워서 침을 뱉되, 그 침이 우리 동네에 떨어지지 않게 할 묘책은 없을까? 여전히 해결하지 못한 질문이다. (p.41-42)

 

 해법을 내놔야 한다는 강박증이 오히려 제대로 된 해법 제시를 막는 일도 있다. 구조적 글쓰기를 직업적으로 훈련받는 기자들은 기사의 틀, 업계 용어로 하자면 ‘와꾸’에 집착한다. 기획 기사를 쓴다면 ‘① 사례, ② 문제 분석, ③ 통계 제시, ④ 대안 제시’의 틀을 일단 갖춰야 한다고 생각한다. 마치 김밥에 햄과 단무지와 맛살과 우엉이 들어가듯이, 하나라도 빠지면 하자가 있다는 인식이 있다. ①번 항목의 사례가 없으면 데스크는 “밋밋한데? 사례 찾아와”라고 할 것이다. ③번 항목의 통계가 누락된다면 “의원실이든 어디든 전화 돌려서 통계 빨리 확인해 봐”라고 말할 게 분명하다. 이런 맥락에서 ④번의 대안 제시 역시 어떻든 간에 기사에 들어가기는 해야 할 것만 같은 느낌이다. 없다면 “그래서 뭐가 어떻다는 건지 모르겠어”라는 데스크의 촌평이 나올지도 모른다.
 그래서 ‘쾌도난마’, 그러니까 한 방에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 정리해 주는 해법이 등장해 버린다. 마치 그리스 연극에서 ‘데우스-엑스-마키나’가 등장해 혼란스러운 인간 세상의 문제를 정리하듯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해결책이 나타난다. 마침 기자가 듣고 싶은 말이면 어떤 멘트든 해 주는 전문가 그룹도 존재한다. 그러나 그런 부류의 해법이 실제로 실행 가능한지, 실례로 검증됐는지, 긍정적 변화를 이끈다는 보장이 있는지는 의문이다. 복잡다단한 사회의 피곤한 문제들은 엉킨 실을 단칼에 자르는 대안으로 해소되기 어렵다. 칼럼니스트 박권일이 “문제는 비명을 지르지만, 해법은 속삭인다”라는 유명한 말을 “문제는 비명을 지르고, 해법은 제각기 절규하며, 끝내 최악의 해법이 실현된다”(박권일, 「답보다 질문」, 『한겨레』, 2019.12.12.)라고 비튼 이유도 여기에 있다. (p.47-48)

 

 이런 상황에서 지역, 로컬은 솔루션 저널리즘을 실천하기 매우 좋은 마당이다. ‘솔루션’이 필요한 문제 대부분은 서울이든, 아니면 ‘지방’이든 특정 지역을 배경으로 한다. 해당 지역을 대상으로 하는 지역 언론의 입장에서는 손 닿는 범위에 문제가 있는 셈이다. 풀어야 하는 이슈가 가까운 만큼 대안도 멀리 있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주체들이 그 지역에 있다는 말이다. 언론의 관심이 분산될 만한 거대 담론 역시 지역에서는 많지 않다. 그러니 신문 1면에 매우 세세한 내용을 올려도, 몇 날 며칠이고 방송 뉴스에서 같은 주제를 다뤄도 거부감이 적다. 세상의 변화에 조금은 비껴 나 있는 지역의 특성이 오히려 장점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기자들이 뭔가를 외친다고 해서 그렇게 바뀌는 세상이 더이상 아니라고 하지만, 지역에서는 아직도 언론의 외침이 생각보다 잘 통하는 경우가 더러 있다.
 ‘솔루션 저널리즘’이라는 타이틀을 걸지 않더라도 지역 언론이 문제를 해결하는 사례는 그래서 생각보다 차고 넘친다. 2018년 『부산일보』는 형제복지원 사건을 드러내 재조사를 이끌어 냈다. 같은 신문은 2021년 중금속 범벅인 폐광산이 도심에 산재해 있음을 알리고, 출입 통제·전수조사가 이뤄지도록 했다. 『강원일보』는 2020년 춘천 미군기지의 부실 정화 문제를 보도해 두 차례의 조사를 진행하도록 했다. 2021년엔 납북됐다 귀환한 어부들의 간첩 조작 사건을 다뤄 피해자들의 명예를 회복했다. 경기 북부 지역에 있는 CJ헬로(현 LG헬로비전) 나라방송은 경기 양주에서 일어난 LP가스 폭발 사고를 열 차례 보도해 피해자들이 보상받을 길을 열기도 했다. (p.49-50)

 

 기자에게 ‘가오’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물불 가리지 않고 정의를 위해 뛰어다닌다는 이미지에서 나올 것이다. 그런데 이런 척박한 현실에서 과연 그런 취재가 가능할까? A군의 행정 문제를 취재하러 갔더니, 우리 회사의 중요한 행사에 후원하고 있는 지자체라고 한다면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다. 지역 대기업 공장에서 일어난 산업재해 사고를 취재한다고 해도, 주요 광고주라는 사실을 머릿속에서 깨끗이 지워 버리기는 어렵다. 취재를 원천 봉쇄하거나 기사를 내지 못하게 하는 촌스러운 방식으로 언론 통제가 일어나지는 않을 것이다. 그보다는 기자의 자체 검열로, 데스크의 ‘마사지’로 기사의 톤이 약해질 개연성은 매우 크다. 자유롭게 쓸 수 있는 기사는 점점 사라진다. ‘성역이 없다’는 관용구는 ‘성역 없는 곳이 없다’는 말로 수정돼야 할지도 모른다.
 이렇게 돈벌이가 힘들면 회사가 망하는 게 정상일 것이다. 그러나 생각보다 지역 언론사가 쉽게 문을 닫지는 않는다. 적자가 나더라도 언론사를 소유하는 게 사주에게 이득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힘을 얻는다. 언론사를 운영함으로써 무형의 문화 자본과 사회 자본을 쉽사리 획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언론사를 갖고 있어야 사주가 지자체장과 쉽게 만날 수도 있고, 필요할 때 칼을 휘두를 수도 있다는 뜻이다. (p.69-70)

 

 과거사 문제를 들여다보니 눈에 띄는 점이 있었다. 주로 지역 이름에서 명칭을 따온다는 것이었다. 대표적인 사건만 나열해 봐도 그렇다. 노근리 양민 학살 사건, 거창 양민 학살 사건, 대전 골령골 사건, 대구 10월 사건, 제주 4·3 사건, 여순(여수·순천) 사건, 부마(부산·마산) 항쟁……. 지역 기자가 봤을 때 한눈에 들어오는 공통점이 있다. 바로 서울이 아닌 전국 방방곡곡, ‘지방’의 이름이 붙어 있다는 점이다. 2005년부터 2010년까지 활동한 ‘제1기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원회)’가 규명한 사건들만 봐도 이런 경향성은 뚜렷하다. 규명 사건 461건 가운데 명칭에 ‘서울’이 붙은 사건은 3건뿐이다(‘진실화해위원회’ 누리집 참고). 대부분은 비서울 지역의 이름을 땄다.
 왜 억울한 일들이 서울이 아닌 곳에서 많이 일어났을까? 이런 관점에서 과거사 문제에 접근한 연구나 보도는 쉽게 찾아보기 힘들다. 그러나 몇 가지 추측은 가능할 것이다. 과거사라고 명명될 정도의 사건은 역사의 소용돌이가 급박하게 돌아갈 때 탄생한다. 쇠사슬은 가장 ‘약한 고리’부터 끊어진다는 ‘미니멈의 법칙’은 여기서도 적용된다. 억울한 일이 일어난 지역이야말로 약한 고리였다. 정치적 의도와 목적에 따라 희생양을 만들어야 할 때 시선은 그곳으로 향했다. (p.87-88)

 

 그렇다면 과거사를 제대로 취재하는 역할은 그 지역민이 당사자이고 피해자인 지역 언론에 부여될 수밖에 없다. 이미 지역 언론은 그런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 왔다. 제주 4·3 사건이 대표적이다. 4·3 사건은 이제 대통령이 기념식에 참석하는 것이 관례로 자리 잡았고, ‘셀럽’들도 기리는 역사가 됐다. 아직도 과제가 남아 있지만 모범적인 과거사 해결의 사례로 꼽힌다. 4·3 사건 해결에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한 건 한 지역 신문이었다. 『제민일보』는 1980년대 후반부터 ‘4·3은 말한다’라는 기획 보도를 연재했다. 1999년까지 10년이 넘는 세월에 걸쳐 6천 명을 인터뷰하고 수백 편의 기사를 써냈다. 어린아이까지 집단 학살된 ‘다랑쉬굴 사건’을 밝혀내기도 했다. 이후 2000년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약칭: 〈4·3사건법〉)이 제정되었고, 2003년에는 국가의 공식 진상 조사 보고서가 나왔다. 밑바탕에는 『제민일보』의 오랜 노력이 있었다(양조훈, 『4·3 그 진실을 찾아서』, 도서출판 선인, 2015).
 그러니 지역 기자로서는 아무리 어렵더라도 과거사 취재를 멈출 수 없고, 멈춰서도 안 된다. 당사자들이 모두 사라지기 전에 하루빨리 그들의 증언을 받아 내야 한다. 아직도 어딘가에서 빛을 보기를 기다리는 자료를 발굴해 진상을 밝혀내야 한다. 가해자에게는 사과를 요구하고, 국가에는 해결을 촉구해야 한다. 그리고 이걸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 사건이 일어난 날에만 제사를 지내듯 일회성 발생 아이템을 다루는 방식으로는 안 된다. 평생에 걸친 기획이라 생각하고 꾸준히 관심을 가져야 한다. 과거사 연구의 주요 사료 가운데 하나가 언론 기사다. 내가 쓴 기사가 후대에 연구 자료로 쓰일 수 있다고 생각하면 절대 허투루 할 수 없는 일이다. (p.90-91)

 

 문제는 확실한 주제를 전달하는 데 지나치게 몰두한다는 거다. 선과 악은 늘 상대적이다. 칼로 무 자르듯 나눌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 게다가 얻을 수 있는 정보마저 제한적이다. 그런 상태에서 ‘야마’를 잡으려고 하다 보면 사안을 왜곡하기 매우 쉽다. 논지를 강화하는 데 도움이 되는 정보는 취하고, 해가 되는 정보는 버린다. 논조에 따라 같은 사안도 다른 방식으로 비틀어 본다. 하나의 소실점으로 시선이 모이듯, ‘야마’를 선명하게 하는 데 기사의 모든 요소가 사용된다.
 심지어 사소해 보이는 조사마저 그렇다. 기사에서 정말 자주 쓰이는 조사가 ‘-도’이다. 기사 하나에도 여러 번 쓰고, 심지어는 한 문장에 두 번씩 쓰기도 한다. 바로 직전 문장처럼 말이다. ‘~라는 전망도 나온다’, ‘~하는 상황에 놓일 수도 있다’, ‘~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고 쓰는 식이다. 기사의 야마를 강화하는 근거를 열거하거나 멘트를 붙일 때마다 ‘-도’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한정의 의미를 가진 조사 ‘-만’도 눈에 띈다. 이 조사는 주로 숫자 앞에 튀어나온다. ‘피해액만 1200억 원’, ‘횡령액만 수십억 원’ 등의 표현을 쉽게 볼 수 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사실 ‘-만’을 붙일 이유는 별로 없다. 액수를 한정함으로써, 금전적인 것 외에 다른 요소도 존재한다는 뉘앙스를 전달해 주는 장치다.
 이러다 보면 이야기는 매끄러워지고 맛깔이 난다. 그러나 진실과는 멀어질 위험이 점점 커진다. 기자들이 기사를 지나치게 단순화하는 데는 특정한 정치적 목적 같은 의도가 있어서일 수도 있다. 그러나 기사 작성의 문법과 관습을 따르며, 그럴듯한 기사를 만들려다 보니 ‘야마’에 함몰되는 사례를 더 자주 목격한다. 평소 삼각형이 익숙하다는 이유로, 실제로는 17각형인 진실을 자르고 다듬어 세모로 만든 뒤 내다 파는 것이다. (p.101-103)

 

 

펜타닐 / 벤 웨스트호프 / 소우주

 

 한편 1990년대 미국 의료계에는 또 하나의 거대한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었다. 환자를 보다 인도적으로 치료하려는 열망이 퍼진 것이다. 전통적으로 의사는 환자를 치료할 때 체온, 호흡수, 혈압, 맥박수 등 네 가지 ‘바이탈 사인(vital sign, 활력 징후)’을 중요시했다. 하지만 1990년대 중반 미국 통증학회에서는 통증을 새로운 ‘다섯 번째 바이탈 사인’으로 간주하자고 요구했다. 이로 인해 이전에는 중독성이 있다는 이유로 오피오이드 처방을 주저했던 의사들은 직-포터 서신을 근거로 오피오이드가 실제로 안전하다면 환자를 고통에 방치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을 바꾸게 되었다. 보스턴의 통증 전문의 너새니얼 카츠는 『드림랜드: 미국의 아편류 유행에 관한 진실』에서 저자 샘 퀴노네스에게 “오피오이드가 안전하다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알려 세상의 고통을 치료하는 것은 우리의 신성한 사명이었습니다”라고 말하며 새로운 통념이 자리 잡게 된 과정을 설명했다. “중독에 대한 모든 소문은 잘못된 걸로 여겨졌습니다. … 심지어 제 전임의 시절 지도교수님은 ‘통증이 쾌감을 흡수하기 때문에 아편류에 중독될 수 없다’고 말하기도 했어요.”
 적극적인 오피오이드 처방으로 환자의 통증을 줄여줘야 한다는 이 새로운 관점 덕분에 옥시콘틴의 소유주인 새클러 가문은 억만장자가 되었다. 옥시콘틴이 개발되기 훨씬 전부터 닥터 아서 새클러는 제약 광고 분야의 선구자였다. 1952년 아서는 그의 형제 레이먼드, 모티머와 함께 회사를 인수했고, 이 회사는 나중에 퍼듀 파마(Purdue Pharma)가 되었다. 광고와 제약이라는 본질적으로 상충 관계에 있는 두 분야를 접목한 퍼듀는 1996년 옥시콘틴을 시장에 출시하면서 고용량의 오피오이드 옥시코돈을 함유한 서방형 제제의 장점을 선전했다. 회사의 주장에 따르면, 옥시콘틴은 약효가 12시간 지속되므로 하루 두 알만 복용하면 되고(이는 다른 진통제보다 적은 양이다) 중독은 극히 드물었다.
 퍼듀는 수백 명의 영업 사원을 배치해 의사들을 포섭하고, 만보계, 헤드기어, 심지어 옥시콘틴의 브랜드 음악인 ‘스윙 이즈 얼라이브(Swing Is Alive)’가 실린 CD를 무료로 나눠주는 등 대대적인 마케팅 공세를 펼쳤다. 또한 의사들을 휴양지로 초대해 ‘통증 관리 세미나’를 열었는데, 1996년 이 행사에 참석한 의사들은 그렇지 않은 의사보다 옥시콘틴을 처방한 비율이 두 배 이상 높았다. 내부 보고서에 따르면 원래 옥시콘틴은 암 환자에게 사용하도록 홍보되었지만, 회사는 그 시장이 너무 작다고 판단했다. 다양한 만성 질환을 앓고 있는 환자에게도 이 약을 판매할 수 있다면, 최대 약 2억 6000만 달러로 추정한 연간 매출이 13억 달러까지 가능할 것으로 보았다. 실제로 1996년 5000만 달러에 불과했던 매출은 2000년이 되자 10억 달러 이상으로 증가했다. 옥시코돈이 미국에서 가장 많이 처방되는 약물이 된 것이다.
 그러나 약효가 반나절 내내 지속되지 않고 몇 시간 일찍 사라지면서 많은 환자들이 금단 증상을 경험하기 시작했다. 퍼듀의 영업 사원은 의사에게 옥시콘틴 복용 환자의 1% 미만이 중독될 것이라고 말했지만, 1999년 퍼듀의 자체 연구에 따르면 그 비율은 13%에 달했다. (p.42-44)

 

 이러한 새로운 화학 물질 중 하나가 1959년 얀센과 그의 팀이 페티딘(pethidine)이라는 진통제의 화학 구조를 실험하며 처음 합성한 펜타닐이다. 얀센은 당시 최고의 진통제였던 모르핀의 대안을 찾고자 했다.
 양귀비의 수지에서 추출되는 모르핀은 19세기 초 독일의 약사 프리드리히 제르튀르너가 화학적으로 분리해,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꿈의 신 모르페우스의 이름을 따서 명명했다. 얀센은 펜타닐을 비롯한 여러 화합물의 효과를 테스트하기 위해 실험용 쥐를 가열판에 올려놓고 서서히 열을 높여 반응을 측정했다.
 펜타닐은 얀센 제약에 큰 수익을 안겨주었다. 의사들은 작용 기전을 토대로 펜타닐이 모르핀보다 우수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펜타닐은 모르핀과 마찬가지로 뇌의 수용체(오늘날 이는 ‘뮤’ 수용체라 불린다)와 결합해 통증을 완화한다. 하지만 펜타닐은 효과가 더 빨리 나타나고 훨씬 강력했으며 메스꺼움을 유발할 가능성이 적었다. 훗날 얀센은 이렇게 기록했다. “펜타닐 덕분에 처음으로 장시간 수술이 가능해졌다. 이는 후속 약물과 함께 수술실의 혁명을 예고했다. 펜타닐과 그 유사체인 수펜타닐이 없었다면 오늘날 시행되는 개심 수술(open-heart surgery)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p.55-56)

 

 펜타닐의 유행 가능성을 과소평가한 사람은 마빈 윌슨과 그의 동료들만이 아니었다. 의료진부터 일류 과학자까지 다양한 전문가들은 펜타닐이 엄청나게 강력하고 중독성이 강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사람들을 장악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불과 얼마 전인 2015년에도 DEA는 펜타닐의 잠재력을 과소평가했다. DEA는 그해의 마약 남용 동향에 관한 국가 마약 위협 평가(National Drug Threat Assessment) 개요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펜타닐이 비밀리에 생산되는 현재 상황이 지속되는 한 이 약물은 여전히 위협이 되겠지만, 오피오이드 시장의 상당 부분을 차지할 가능성은 낮다. 펜타닐은 사망률이 높고 약효가 지속되는 기간이 짧기 때문에 지속 시간이 길고 위험성이 낮은 헤로인에 비해 선호도가 떨어진다.”
 1년 후, 펜타닐은 헤로인을 제쳤다. 펜타닐은 해마다 미국 역사상 그 어떤 마약보다 많은 미국인의 목숨을 앗아가고 있으며, 점점 더 빠른 속도로 개발 및 판매되고 있는 펜타닐 유사체들은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고 있다. 2012년부터 2016년까지 유엔마약범죄사무소에 17개의 펜타닐 유사체가 보고되었는데, 이 중 일부는 30~40년 전에 발표된 과학 논문에서 찾아낸 정보를 바탕으로 개발된 것이다. 옥펜타닐, 푸라닐펜타닐, 아세틸펜타닐, 부티르펜타닐을 포함한 이들 펜타닐은 시판되는 약물로 출시된 적이 없다. 이러한 화학 물질은 서류상으로만 존재했지만, 오래된 연구에 대한 접근성이 그 어느 때보다 높아진 지금에 와서야 비로소 실체화되었다. (p.75-76)

 

 마약과의 전쟁은 리처드 닉슨의 첫 번째 임기 중에 시작되었다. 닉슨 대통령은 1971년 기자회견에서 “미국의 공공의 적 1위는 마약 남용”이라고 말했다. “이 적과 싸워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전면 공세를 펼칠 필요가 있습니다.”
 마약과의 전쟁에 공공 자원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09년 미국의 아편 금지법은 중국 이민자들이 흡연용으로 선호하는 아편을 대상으로 한 것으로, 상점에서 판매되는 ‘의료용’ 아편을 겨냥한 것은 아니었다(하지만 의료용 아편 역시 흔히 오용되었다). 연방 마약국 국장 해리 앤슬링거는 아편 사용자를 범죄자로 규정하는 방안을 추진함으로써 아편 중독 치료를 후퇴시켰다. 최고 고문 존 얼리히만의 회고에 따르면, 닉슨 대통령도 마약과의 전쟁 대상은 히피족과 흑인이라고 말했다. 닉슨은 특히 LSD를 표적으로 삼았는데, DEA가 설립된 1973년은 오렌지 선샤인의 공급책이었던 ‘영원한 사랑의 형제단’ 조직원들이 체포될 즈음이었다.
 레이건 대통령은 닉슨 대통령이 추진했던 마약과의 전쟁을 더욱 강경하게 밀고 나갔다. 영부인 낸시 레이건은 1980년대 후반 미국 사회에서 보편화된 “그냥 싫다고 말하세요(Just Say No)”라는 문구를 만들었다. 그러나 레이건 정부가 남긴 유산은 미국의 마약 문제를 근절한 것이 아니라 마약 범죄에 대한 최소 형량 의무화 등 엄격한 처벌 규정을 제정한 것이었다. 민주당의 빌 클린턴 대통령은 1994년 ‘삼진 아웃제’를 골자로 하는 범죄 법안에 서명하면서 마약 범죄에 더욱 강력하게 대처했다. 이러한 무관용 정책으로 인해 전국의 교도소는 비폭력 마약 범죄자들로 가득 찼고, 특히 흑인과 라틴계 범죄자들이 많이 수감되었다. (p.315-316)

 

 미국에서 금지된 약물은 슬로베니아에서도 대부분 금지 대상이다. 그러나 슬로베니아에서는 마약 사용과 마약 밀매를 명확히 구분한 2008년 법에 따라 개인적 용도로 소량 소지하는 경우 40~200유로(약 6만~28만 원)의 소액 벌금이 부과되며, 마약 치료 프로그램에 참여할 경우 벌금도 면제된다. 그러나 마약 제조 및 거래에 연루되면 수감되기도 한다. 슬로베니아는 사용자를 가두는 것이 아니라 약물 남용과 관련된 피해를 최소화하는 데 주력한다. 애덤 옥터는 “슬로베니아 정부는 약물 남용과 관련해서는 전 세계에서 가장 자유로운 국가입니다”라고 말했다. 슬로베니아에는 드로가르트(Drogart)와 같이 최신식으로 운영되는 유해 물질 피해 감소 단체가 있다. 이 단체는 젊은 자원봉사자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스스로를 ‘동지(peers)’라고 부르는 이들은 유흥 현장에서 좋은 평판을 받고 있다. 이들은 뮤직 페스티벌 현장 화장실에 코카인 흡입에 사용되는 종이를 비치하고 상담과 약물 검사를 받을 수 있도록 하지만, 누구에게도 강요하지는 않는다. 또한 피해 감소를 주제로 “물을 마셔요(Drink Water)”, “레이브에 오기 전에 먹어요(Eat before Rave)” 등의 제목을 붙인 노래를 수록한 컴필레이션 앨범을 제작하기도 했다. 이러한 활동은 누구나 잠복 경찰이 될 수 있는 미국의 일렉트로닉 댄스 뮤직 이벤트와는 매우 다른 환경에서 이루어진다. 드로가르트 회원들은 공개적으로 솔직하게 소통하기 때문에 사용자들은 안전하게 약물을 복용하는 방법에 대한 조언을 따를 가능성이 크다.
 슬로베니아는 위험한 마약의 폐해를 억제하는 데 특히 성공적이었다. 2017년에는 전체 인구 200만 명 중 약물 과다 복용으로 인한 사망자가 47명에 불과해, 같은 해 매일 4배 이상 많은 사람이 약물 과다 복용으로 목숨을 잃은 미국에 비해 사망률이 훨씬 낮았다. 슬로베니아는 엄격한 법과 질서보다는 공중 보건의 관점에서 마약 문제에 접근함으로써 중독자를 돕는 데 적극적인 관심을 기울인다. 류블랴나 경찰 역시 이러한 노력을 지지한다. 실제로 마약 검사는 경찰이 직접 관여한다. 사용자가 마약 샘플을 드로가르트의 사무실에 맡기면 경찰이 이를 수거하여 순도를 검사한 후 결과를 알려주는 방식이다. 해를 끼치지 않으면 처벌하지 않는 것이다. (p.340-342)

 

 나는 학자, 활동가, 약물 남용 상담사, 공무원, 법 집행관, 마약 제조업자, 밀매업자, 사이코너트, 화학자 등 함께 이야기를 나눈 사람들에게 NPS 과다 복용을 막고 펜타닐과 같은 치명적인 마약의 확산을 제한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물었다. 놀랍게도 여러 법 집행관과 마약 딜러를 포함한 대다수가 피해 감소의 필요성에 대해 이야기했다. 마약 금지론자는 소수에 불과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면서, 사용자를 투옥하는 것보다 NPS의 부정적인 영향을 제한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목표라는 데 의견을 같이했다.
 피해 감소를 어떻게 정의하든, 이는 약물 사용을 완전히 막는 것은 불가능하며 가능한 한 안전하게 사용하도록 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인식에서 비롯된다.
 대부분의 피해 감소 정책은 상식적이고 생명을 구할 수 있는 쉬운 방법처럼 보이지만, 많은 정부는 이러한 관점에서 바라보지 않는다. 2018년 11월, 러시아의 피해 감소 단체인 안드레이 릴코프 재단(깨끗한 주삿바늘을 비롯해 여러 서비스를 제공하는 단체)은 합성 카티논 사용자에게 안전한 약물 투여 방법을 조언하는 글을 게시한 혐의로 80만 루블(약 1330만 원)의 벌금을 납부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마약과의 전쟁이 여전히 대규모로 진행되고 있는 미국에서도 피해 감소 전략이 광범위하게 시도된 적은 거의 없다. 댄스세이프나 마약 정책 연합 같은 단체는 성과를 보이긴 하지만 극히 제한된 예산으로 운영된다. 그러나 유럽에서는 중독자에게 헤로인을 직접 제공하는 정부 프로그램을 포함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고 획기적인 결과를 얻었다. 예를 들어 스위스에서는 만 18세 이상이고 중독된 지 2년이 지났으며 기존 치료법에 실패한 사용자라면 클리닉에서 처방약과 같은 고품질의 헤로인을 무료로 제공받을 수 있다. 이들은 헤로인을 클리닉에서만 사용해야 하며 가지고 나가는 것은 금지된다.
 적절한 양을 복용한다면 헤로인 자체로 목숨을 잃는 경우는 거의 없다. 헤로인과 혼합되는 펜타닐, 오염된 주삿바늘, 약에 취한 상태에서 초래되는 여러 문제, 길거리 생활에서 발생하는 매춘과 폭력이 주된 사망 원인이기 때문이다. 스위스에서는 이 프로그램을 통해 사망자 수, 마약 거래 및 범죄 발생 건수가 감소했는데, 이는 프로그램에 등록한 사용자들이 약값을 마련하기 위해 더 이상 도둑질이나 마약 밀매를 하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이다. 헤로인 처방 프로그램에 참여한 사람들에서 자동차 절도는 55%, 빈집 털이 및 강도는 80% 감소했으며, 마약을 판매할 가능성은 거의 95% 감소했다. 이 프로그램은 네덜란드에서도 성공을 거두어 40세 미만에서 헤로인 사용이 급격히 감소했다. 미국에서도 선례가 있다. 1914년 정부가 헤로인을 금지했을 때에도 의사는 중독된 사람들에게 헤로인을 투여할 수 있도록 법으로 허용했다. 하지만 의사의 헤로인 처방을 금지하자, 범죄 발생률과 건강 문제가 급격히 증가하기 시작했다. (p.349-351)

 

 아편류 중독에 초점을 맞춘 슬로베니아의 공중보건 단체인 스티그마는 류블랴나에서 주삿바늘 교환 센터를 운영한다. 센터 내부에는 조용히 커피나 주스를 마실 수 있는 작은 방이 있고, 앞쪽에는 다양한 모양과 크기의 플라스틱에 담긴 주삿바늘 수백 개가 놓인 테이블이 있다.
 노숙자 쉼터의 퀴퀴한 냄새가 풍기긴 하지만, 이곳을 비롯해 슬로베니아 전역에 있는 비슷한 센터들은 놀라운 성과를 거두고 있다. 슬로베니아에는 아편류나 오피오이드 사망자가 거의 없으며, HIV 감염률도 현저하게 감소해 현재 유럽 국가 중 가장 낮은 편이다. 이는 분명 중독자에게 다가가기 위한 정부의 지원 노력 덕분이다. 스티그마의 디렉터인 데어 코흐무르는 이 단체가 말 그대로 외부에서 사람들을 끌어들인다고 했다. “길거리에 있는 사람들을 안으로 끌어들임으로써 간과되고 있는 집단의 문제를 해결합니다. 우리는 그들을 판단하지 않습니다. 마약 사용을 장려하지는 않지만, 불필요한 피해를 없애는 것이 목표입니다.” (p.370-371)

 

 “피해 감소만이 유일한 해답입니다.” 코흐무르는 미국에 조언을 건넸다. “학교에서 1차 예방을 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의료 시스템으로 모든 중독자를 깨끗하게 치료할 수도 없고, 모든 마약 사용자를 체포할 수도 없습니다.”
 미국 내 긴장감은 한 주사 클리닉의 개원 시도에서 잘 드러난다. 2018년 10월, 전 펜실베이니아 주지사 에드 렌델은 당시 미국 주요 도시 중 오피오이드 사망률이 가장 높았던 필라델피아에 이러한 시설 설립을 보조할 계획이라고 발표했다.
 2020년 초, 연방 판사는 이 클리닉이 연방법을 위반하지 않았다는 판결을 내렸고, 이 책이 출간될 무렵, 미국 법무부는 이 결정에 항소했다.
 로드 로젠스타인 미국 법무부 차관이 이 시설을 열면 연방 당국이 즉시 폐쇄할 것이라고 위협하자 렌델이 답했다. “로젠스타인 장관에게 전할 메시지가 있습니다. 와서 먼저 나를 체포하시죠.” (p.3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