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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어떤 정치인은 다른 정치인보다 위험한가 / 제임스 길리건 / 교양인

 

 20세기에 미국의 부가 가장 편중된 시기 중 첫 번째는 대공황이 일어날 때까지 공화당이 정권을 잡은 1920년대였고 두 번째는 196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까지(특히 1980년대의 레이건 집권기)였다. ‘광란의 20년대’에 공화당이 이루어놓은 부의 양극화를 뒤집은 것은 1933년부터 1960년대 후반까지 이어진 뉴딜 합의였다. 이것은 어려운 사람에게 처음으로 지급된 소득 보조금(사회 보장비, 실업 수당 등), 실업 감소, ‘최저 임금’과 병행하여 최고 소득세를 90퍼센트까지 끌어올려 부가 소수에게 집중되는 것을 막은 사실상의 ‘최고 임금’ 제도 도입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이런 제도들을 비롯한 다양한 정책은 일부 경제사학자들이 소득과 재산의 격차가 크게 줄어들었다는 데서 ‘대압착(Great Compression)’이라고 부르는 결과를 낳았다. 대략 1940년부터 1970년에 이르기까지 미국은 가장 번영했을 뿐 아니라 경제적으로 가장 평등하고 가장 비폭력적인(적어도 나라 안에서 벌어진 폭력만 보자면) 시대를 누렸다. 하지만 1969년에 공화당이 정권을 되찾자 평등의 시대는 끝나고 레이건 시대에 와서는 재산과 소득의 불평등이 1920년대 수준으로 되돌아갔다(폭력 치사 발생률 역시 그때 수준으로 다시 높아졌다). 불평등이 심화하는 속도는 1990년대의 클린턴 정부 때 주춤해서 전임 공화당 대통령들 때에 비해 겨우 3분의 1 수준으로 떨어졌다. 클린턴이 실업률과 실업 기간을 줄이고 최고 소득세율, 근로 장려세(직업이 있지만 소득이 낮은 사람에게 돈을 주는 마이너스 소득세), 평균 임금, 최저 임금을 끌어올리고 국민 전체의 재산과 소득 중 적어도 일부를 부유한 자한테서 가난한 자에게로 재분배하는 효과를 낳는 정책을 성공적으로 도입한 덕분이었다. 그렇지만 사회를 불평등한 쪽으로 밀어가는 힘은 여전히 강해서 1998년 즈음에도 미국의 최상류층 1퍼센트가 여전히 전체 부동산 자산의 38퍼센트와 전체 금융 자산의 47퍼센트를 차지했다. 다시 말해서 가장 잘사는 1퍼센트가 나라 부동산의 거의 40퍼센트를 소유하고 돈과 기타 유동 자산(주식, 채권 등)의 거의 절반을 소유한 것이다. (p.96-97)

 

 수수께끼는 바로 이것이다. 무슨 수를 썼기에 인구의 1퍼센트를 차지하는 소수의 부자가 인구의 99퍼센트를 차지하는 다수에게 명백히 불리한 쪽으로 돌아가는 체제를 받아들이도록 다수를 설득했단 말인가? 상대적 빈곤을 키우는 정당을 지지하도록 다수 유권자를 설득하기 위해 공화당이 내놓은 해법은 중하류층과 극빈층을 이간질해서 내 지갑을 얇게 만드는 주범이 상류층(과 상류층의 이익을 대변하는 정당)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초점을 흐리는 것이었다. 겨우 입에 풀칠을 하는 사람들이 입에 풀칠도 제대로 못하는 사람들과 티격태격하는 한, 이 두 집단은 부자들을 상대로,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인구를 소수의 최상류층과 절대다수의 어려운 사람들로 양분하는 사회·경제 체제를 상대로 싸움에 나서지는 않을 것이다. (p.98-99)

 

 우리는 경제적 불평등이 커지면 살인과 자살이 늘어남을 안다. 그러나 우리는 경제적 불평등이 커지면 아주 잘사는 사람들에게 이익이 됨도 안다. 불평등의 의미가 바로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재산과 소득에서 부유한 자와 가난한 자의 격차가 커진다는 것은 나라 전체의 재산과 소득 중에서 잘사는 사람이 차지하는 몫이 커지고 못사는 사람이 차지하는 몫이 줄어듦을 뜻한다. 그래서 잘사는 국민 1퍼센트가 더 잘사는 데 따르는 경제적 이익은 나머지 국민 99퍼센트가 나라 전체의 재산과 소득에서 더 큰 몫을 차지하는 데 따르는 이익은 물론이요 덜 폭력적인 사회에서 살아가는 데 따르는 이익과도 객관적으로 충돌한다.
 앞에서 말한 대로 폭력 범죄의 주된 희생자는 못사는 사람이므로, 폭력 범죄가 늘어난다 하더라도 잘사는 사람은 어차피 경비원이 지키는 공동 거주 구역 안에서 살거나 비싼 돈을 주고 사설 경비업체를 고용하므로 별로 위협을 느끼지 않는다. 오늘날 미국에서 참으로 놀라운 사실은 잘사는 사람이 사설 경호업체에 퍼붓는 돈이 경찰 운영에 드는 돈과 나머지 국민 전체가 방범에 들이는 돈보다 많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충돌하는 이익이 또 하나 있으니 바로 정치적 이익이다. 폭력 범죄율이 올라가면 중산층이 저소득층한테 느끼는 거부감과 저소득층이 같은 저소득층한테 느끼는 거부감, 다시 말해서 폭력을 휘두르지 않는 다수가 폭력을 휘두르는 소수를 자신에게 가장 직접적인 위협을 가할 수 있는 존재라고 느끼는 데서 오는 거부감도 커지므로 유권자를 분할 정복하기가 쉬워져서 아주 잘사는 사람에게는 유리하다. 그런 일이 벌어지면 중산층은 (못사는 사람을 폭력적이고 위험한 집단으로 보기에) 못사는 사람의 이익을 지켜주는 정당을 찍으려는 마음이 줄어들고 못사는 사람도 (처벌을 강화하면 폭력 범죄율이 늘어나는 것이 아니라 줄어든다는 잘못된 믿음으로 말미암아) 범죄자에게 덜 엄격한 정당을 찍으려는 마음이 줄어든다. 빈곤도 폭력도 쉽게 식별이 가는 인종 집단과 민족 집단에 집중되므로 공화당은 주류 인종 집단과 주류 민족 집단에 속하면서 소수 집단으로부터 위협을 느끼는 빈민층과 중하류층 유권자들이 품은 두려움을 우려먹을 수 있다.
 범죄율과 폭력 발생률이 높아질수록 중산층과 저소득층은 서로를 증오하도록 농락당하며 자기 주머니를 진짜 털어 가는 사람은 자신들 가운데 있는 비교적 소수인 무장 강도가 아니라 더 소수인 아주 잘사는 사람들과 그들을 대변하면서 돈을 저소득층과 중산층의 손에서 최상류층으로 옮기는 공화당 정치인임을 깨닫기 어려워진다. 가난한 사람은 총을 들고 강도질을 하지만 부자는 펜을 들고 강도질을 한다는 옛말이 딱 들어맞는다. (p.103-104)

 

 예민한 사회과학자들은 진작에 그 사실을 알았다. 크리스토퍼 젠크스는 그것을 이런 식으로 표현한다.

투표일에 내리는 비처럼 범죄는 공화당에 유리하다. 범죄가 늘어나는 것처럼 보이면 상당수의 미국인은 어김없이 진보적 관용 정책을 비난하고 보수 성향의 후보로 돌아서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보수 성향의 후보가 한편으로는 자녀를 키우고 공권력을 확립하고 범죄자를 응징하는 데 더 단호한 입장을 내세우기 때문이고 또 한편으로는 흑인을 비롯하여 범죄를 많이 저지르는 못사는 사람들에게 정부가 ‘거저 주는’ 데 반대하기 때문이다. ‘강경한 대응’은 도움이 안 되며 범죄를 줄이는 길은 더 정의롭고 기회가 더 균등하게 돌아가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라는 정통 진보 진영의 답변은 유권자를 거의 움직이지 못했다. 범죄율이 올라가면 진보주의자들은 거의 언제나 수세에 몰린다.


 에드거 Z. 프리덴버그는 이렇게 썼다.

(중요한 것은) 범죄가 범죄자들이 아니라 공동체 전반의 특정한 구성원들에게 어떻게 남는 장사인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 사회 지배 집단에게 범죄는 자신의 삶을 잘 지켜내지 못하는 가난한 사람들이 주로 값을 치러야 하는 현상이며 우리의 자본주의를 효과적으로 만든 가치관을 운용하는 데 따르는 부작용일 뿐이다. 폭력 범죄를 없앤다? 폭력 범죄가 없으면 한 발도 움직이지 못하는 사람들이?

(p.106-107)

 

 우리가 범죄로 치부하는 마약들은 그 자체로는 폭력 행동을 유발하지 않지만 의학적 문제는 일으킬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범죄로 다룰 것이 아니라 공중 보건의 문제로 다루는 것이 바람직하다. 마약 중독자가 중독을 극복하는 데는 감옥에 가두는 것보다는 약물 남용 치료를 하는 것이 훨씬 치료 효과가 높을뿐더러 투옥보다 비용도 훨씬 싸게 먹힘을 보여주는 연구가 많다. 그런데도 공화당이 ‘범죄’와 ‘마약’을 상대로 벌이는 ‘전쟁’ 덕분에 미국 국민은 계속해서 수십억 달러나 되는 세금을 허비하고, 미국은 사실상 경찰 국가가 되어 어느 나라보다도 높은 수감률(실제 경찰 국가들하고 비교해도 더 높다)을 기록하고, 감옥을 자꾸만 지으면서 비폭력적인 마약 중독자들을 ⒜ 투옥보다 비용이 적게 들고 ⒝ 투옥보다 덜 잔인하고 ⒞ 투옥보다 치료 효과가 높은 수단으로 치료하기보다는 무조건 감방에 집어넣는다(이 비폭력적인 마약 중독자들은 교도소 안에 들어가면 폭력에 시달리거나 폭력을 휘두르게 되는 경우가 너무나 많다.) (p.113)

 

 어느 해 나는 동료들과 함께 수감자들이 받을 수 있는 재활 치료 프로그램 중에서 어떤 것이 재범을 예방하는 데 가장 효과적인지를 출소하여 사회로 돌아간 사람들을 대상으로 조사했다. 재범을 예방하는 데 100퍼센트 확실한 효과를 보인 프로그램은 단 하나, 교도소에서 학위를 따는 것이었다. 보스턴 대학 교수들은 25년 동안 자원봉사로 매사추세츠 주에 있는 교도소들에서 대학 과정 수업을 가르쳤다. 25년 동안 모두 200명에서 300명쯤 되는 수감자들이 적어도 학사 학위 이상을 땄는데 이중 단 한 사람도 새로 범죄를 저질러서 교도소로 돌아오지 않았다. 처음에 나는 우리가 실수를 했거나 무언가를 빠뜨렸다고 생각했지만 알고 보니 다른 교도소에서도 같은 결과가 나왔다. 인디애나 주 전체 교도소에서 재범자가 전무했고 캘리포니아 주 폴섬 교도소도 재범률이 0퍼센트였다. 교도소에서 적어도 학사 학위 이상을 받은 사람 중에서는 대체로 그런 결과가 나왔다. 물론 모든 교도소가 그렇게 완벽한 결과를 얻은 것은 아니었고 우리도 기간을 30년으로 늘려 잡았을 때는 재범자가 두 명 나왔다. 하지만 그래봐야 30년 동안 재범률이 1퍼센트에도 못 미쳤다. 미국의 평균 재범률이 출소 뒤 겨우 3년이 지난 시점에서 65퍼센트라는 것과 비교하면 놀랄 만한 수치다. 마찬가지로 미국 전역의 주 단위 교도소 기록을 보아도 고등 교육이 단순히 효과가 있는 차원을 넘어서 재범률을 줄일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이고 독보적인 프로그램인 것으로 드러났다. (p.114-115)

 

 하버드 대학에서 한 강연에서 내가 이 연구 결과를 보고했더니, 강연을 들은 내 친구 하나가 하버드를 나온 검사 출신으로서 “죄수들에게 육체 노동의 즐거움을 다시 맛보이겠다”는 선거 공약을 내걸고 당선이 된 신임 공화당 주지사에게 내 강연록을 건넸다. 주지사는 그때까지만 해도 교도소에서 고등 교육을 무상으로 제공하는 프로그램이 있다는 것을 몰랐다. 그는 며칠 안 가서 기자 회견을 열더니 이 프로그램을 없애야지 안 그랬다간 대학에 갈 형편이 안 되는 사람들이 교도소에 들어와서 공짜로 대학 교육을 받으려고 범죄를 저지르기 시작할 거라고 했다. 그리고 실제로 프로그램을 박살내는 데 성공했다. 이것은 그저 한 주에서 정치인 한 명이 한 행동이 아니었다. 3년 뒤인 1994년 뉴트 깅리치 전 하원의원의 지휘 아래 의회 다수석을 차지한 공화당은 미국 전역의 교도소에 수감된 재소자에게 대학 교재와 학비를 대주는 데 필요한 비교적 소액의 연방정부 지원금을 없애버렸다. 그러니까 공화당 정치인들은 범죄와 싸우고 범죄자에게 본때를 보여주겠다는 명목으로 사람들이 범죄와 폭력으로 점철된 생활을 청산할 수 있게 해주는 방법 가운데 우리가 지금까지 알아낸 가장 효과적인 프로그램 하나를 고의적이고 체계적으로 망가뜨렸다. 그리고 이런 비이성적이고 자기 파괴적인 행동을 일컫는 ‘범죄와의 전쟁’은 ‘마약과의 전쟁’과 마찬가지로 영어 단어의 평범한 뜻을 완전히 뒤집어엎는 효과를 가져온다. 그 본보기는 조지 오웰이 보여주었다. 오웰의 《1984년》에서도 ‘전쟁은 평화’고 ‘노예는 자유’라는 구호가 난무한다. (p.115-116)

 

 자살을 개개인의 정신 질환으로 보고 살인을 마찬가지로 개개인의 윤리적 결함으로 보는 것은 이 두 가지가 부분적으로는 사회·경제·정치적 압력으로 말미암아 벌어지는 정도가 얼마나 높은지를 도외시하는 태도다. 유전이라든지 인생 경험이라든지 개인의 성격 구조 같은 허다한 개인적 변수가 개인이 자살이나 살인을 저지르는 경향을 높이거나 줄일 수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런 폭력 치사가 전염병 수준으로 일어나는 것은 정치와 경제를 포함한 사회 환경에서 생겨난 변화 탓이다. 유전자가 갑자기 달라졌거나 성격이 갑자기 바뀌어서 공화당 대통령이 나오기만 하면 수만 명의 사람이 갑자기 더 자살을 하고 살인을 저지르기로 마음먹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p.120)

 

 성경에 나오는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를 읽건, 《일리아스》를 읽건, 셰익스피어의 희곡을 읽건, 일간지를 읽건, 살인을 저지른 사람과 이야기를 하건, 자살 충동을 느끼는 사람의 이야기를 듣건 폭력 문제가 나오면 모든 길은 수치심으로 통한다. 예전에 쓴 글에서 나는 결핵균이 결핵 발병의 필요 조건이지만 충분 조건은 아니듯이 폭력 행위를 낳는 으뜸 가는 원인을 수치심으로 지목하면서 수치심은 폭력 행위를 낳는 데 충분하지는 않아도 꼭 필요한 병원체라고 말했다. 수치심은 이런저런 이유로 누구나 느끼지만 (결핵을 ‘일으키는’ 미생물에 노출되어도 대부분의 사람은 결핵에 걸리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대부분의 사람은 심각한 폭력 행위를 저지르지 않는다. 따라서 기질, 문화, 사회 계급, 나이, 성별 등 폭력 행위를 결정하는 그 밖의 다른 요인들이 많은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폭력이 발생할 때는 수치심과 굴욕스런 경험, 또는 이런 경험을 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반드시 작용한다. (p.123-124)

 

 수치심이 흔히 간과되는 이유는 부끄러움을 느끼는 사람이 자신이 부끄러움을 느낀다는 사실과 얼마나 부끄러움이 큰지 드러내기를 부끄러워할 때가 많아서 그렇다. 부끄러움을 느낀다는 사실 자체가 수치스러운 것이다. 얼마나 약하고 무능하고 모자라고 열등하면 수치심을 느끼겠는가 하는 심리가 깔려 있기 때문이다. 수치심을 일으키는 사건이 객관적으로 ‘사소한’ 것일수록 수치심이 더욱 커지는 것도 그래서 그렇다. 그래서 수치심을 더 많이 느끼는 사람일수록 폭력이라는 허세의 가면 뒤로 수치심을 숨기려 든다. (p.124-125)

 

 정신역학으로 보았을 때, 수치심은 ‘자기 앞가림’을 할 줄 아는 능동적이고 자립적이고 주체적이고 독립적인 성인과는 정반대로 남에게 사랑과 보살핌을 받고 싶어 하는 수동적이고 의존적이고 유치하고 (남자들 눈에는) 사실상 ‘여자 같은’ 것으로 보일 수 있는 부끄러운 소망을 억누르는 동기로 작용한다. 수치를 느낄 줄 아는 능력은 만일 그것이 포부와 성장과 발전과 성취를, 실력과 지식의 습득을, 그리고 자립의 또 다른 필수 조건인 자존감과 남들로부터 존경을 얻는 힘을 키워주는 동기로 작용한다면 사람이 성숙하는 데 도움이 된다. 그러나 문제는 하나부터 열까지 의존적으로만 살아가는 사람도, 하나부터 열까지 독립적으로만 살아가는 사람도 이 세상에는 없다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늘 상호 의존적이다. 남들로부터 도움과 지원을 받아야 하는 자신의 상황을 사람이라면 누구나 맞닥뜨리게 마련인 인간 조건(나는 환자에게 가끔 “얻을 수 있는 도움은 최대한 얻는 것이 좋다”고 말한다)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내가 못나고 약한 증거라고 잘못 규정하는 사람은 지원을 받아야 하는 자신의 처지를, 사기와 조작으로 부당하게 많은 복지 수당을 받으면서 놀고먹는다는 이른바 ‘복지 여왕’에게 투사하여 모욕하고 부정하고 질책한다. 수치심은 그런 식으로 우파적인 정치·경제적 태도와 가치관을 자극할 수 있다. 수치심에 휘둘리는 사람에게 ‘복지’에 기대는 ‘의존성’은 동정의 여지가 없으며 부끄러워해야 하고 꾸짖어야 하고 내몰아야 하고 질타해야 하는 아주 몹쓸 짓이다.
 그러나 수치심의 더 파괴적인 부작용은 사람이 ‘수동적이고 의존적이고’ 싶은 자기 마음(남들에게 사랑과 보살핌을 받고 싶은 마음)을 지우기에 급급한 나머지 정반대의 극단으로 나가서 남들에게 적극적이고 공격적으로 굴며 폭력까지 불사할 때 나타난다. 가령 오바마 대통령이 발의한 의료개혁안을 공화당의 만장일치에 가까운 반대를 뚫고 민주당이 통과시켰을 때 아픈 사람을 제대로 보살펴주려는 시도를 지지한 사람들을 죽이겠다는 협박이 미국 곳곳에서 튀어나왔다. 수치의 심리가 얼마나 중증이고 심각한지를 알 수 있다. (p.130-131)

 

 수치심의 윤리는 수치와 굴욕이, 다시 말해서 불명예와 치욕이 가장 큰 악덕이고 수치의 반대, 곧 자부심과 명예(존경)가 가장 큰 미덕으로 통하는 도덕 체계다. 죄의식의 윤리는 죄가 가장 큰 악덕이고 죄의 반대, 곧 순결이 가장 큰 미덕으로 통하는 도덕 체계다. 두 가지 체계는 상극이다. 가령 기독교라는 죄의식의 윤리에서는 죽음에 이르는 일곱 가지 죄악 중에서 가장 몹쓸 죄악이 바로 수치심의 윤리에서 가장 큰 미덕으로 통하는 자부심(‘교만’)이다. 따라서 죄의식의 윤리는 아무도 남들에게 우월감을 못 느끼도록 (그래서 아무도 열등한 존재로 여겨지는 데서 오는 수치와 굴욕을 맛보지 않도록) 평등주의를 옹호하고, 반면 수치심의 윤리는 우월한 사람이 있으며 그런 사람은 자부심과 명예(존경받음)를 만끽하고 열등한 사람은 열등감과 수치심을 느끼는 위계화된 사회 체제를 미화한다. 죄의식에 젖은 사람은 우리는 모두 죄인이라고 생각하며 우리가 남들에게 끼친 위해에 대해 남들로부터 용서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므로 남들이 우리에게 끼친 위해에 대해 남들을 용서하지 않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위선이라고 생각한다. 유대교의 죄의식 윤리에서는 ‘속죄의 날’에 유대인들은 앞으로 불려 나가서 자기들이 전에 괴롭혔거나 죄를 지은 사람들한테 용서를 구해야 하며 세 번 용서를 구했는데도 용서하지 않는 사람은 용서를 거부한 죄인이 된다. 반대로 수치심에 사로잡힌 사람은 나에게 해를 끼친 사람한테 내 손으로 복수하지 못하는 사람을 ‘명예’롭지 못한 자로 보고 복수는 허용되어야 마땅할 뿐 아니라 꼭 필요한 것이라고 본다.
 자부심의 반대는 겸손이고 겸손은 순결의 필수 조건이므로 죄의식의 윤리에서는 겸손을 가장 높은 미덕의 하나로 꼽는다. 반면에 수치심의 윤리에서는 겸양은 자기 모욕에 맞먹기에 가장 몹쓸 악덕으로 본다. 이런 가치관의 차이로 생겨나는 한 가지 결과는 죄의식의 윤리로 살아가는 사람은 자부심을 누르고 겸손을 품는 길의 하나로 사회적 신분이 낮은 사람들에게 동질감을 느끼려 하고, 반대로 수치심의 윤리로 살아가는 사람은 자부심을 끌어올리고 자신의 수치심과 열등감을 누그러뜨리는 길의 하나로 사회·경제적으로 우월한 신분에 있는 사람에게 동질감을 느끼려 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좀 더 쉬운 말로 표현하면 죄의식의 윤리로 살아가는 사람은 약자에게 동질감을 느끼는 성향이 강하고 수치심의 윤리에 젖은 사람은 강자(‘초인’을 앞세우면서 예수의 ‘노예 윤리’에 맞서 ‘주인 윤리’를 역설한 니체도 수치심의 윤리를 부르짖으면서 후기 저작에서 자신은 ‘적그리스도’라고 밝혔다)에게 동질감을 느끼는 성향이 강하다. (p.132-133)

 

 서유럽 현대사에서 순수하고 극단적인 수치 문화의 가장 극단적인 예를 찾자면 그것은 나치 독일이다(동아시아 현대사에서는 2차 세계대전 때 독일의 동맹국이었던 일본이다). 히틀러는 “베르사유의 수치를 바로잡겠다”는 선거 공약으로, 다시 말해서 베르사유 조약의 ‘전범’ 조항과 연합국이 독일에 요구한 전쟁 배상금으로 말미암아 실추당한 국가 명예를 독일 국민 전체에게 되찾아주겠다는 공약으로 정권을 잡았다. 히틀러는 치욕을 바로잡고 국가 명예를 되찾는 유일한 길은 사실상 무제한의 폭력을 휘두르는 것임을 분명히 밝혔다. 수치심과 폭력이 한몸임을 보여주는 좀 더 가까운 정치적 예로는 2001년 9월 11일 뉴욕 쌍둥이 빌딩이 무너지고 나서 오사마 빈 라덴이 처음 내놓은 정치적 발언을 들 수 있다. 빈 라덴은 그날 일어난 폭력은 온 이슬람 민족이 유럽과 미국에게 당한 ‘80년의 모욕과 경멸’을 서양도 맛보게 만드는 길이었다고 말했다. 앞에서 언급했듯 수치 문화 속에 살며 수치심에 휘둘리는 인격에 걸맞은 가치관을 심어주는 수치심의 윤리에서, 수치심은 폭력이라는 수단으로만 지워버릴 수 있으므로 치욕을 당했을 때 폭력은 정당할뿐더러 도덕적 책무가 된다. (p.141)

 

 수치심에 휘둘리는 정치적 가치 체계는 명예와 수치의 위계 구조에서 우월한 지위를 놓고 다투는 데 주안점을 두는 정당을 낳을 것이고 그런 정당이 사회를 자꾸만 위계적이고 불평등한 수치 문화로, 즉 폭력이 일어나기에 안성맞춤인 세상으로 몰아가리라는 것이야말로 참으로 수치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더 평등주의적인 정치 이념은 지위의 차이를 줄여서 사람을 수치로부터 지켜준다. 지위의 높낮이를 가르는 기준 자체가 없으므로 그런 이념이 지배하는 사회에서는 높은 자리도 없고 낮은 자리도 없다. 사람들이 수치와 불명예를 느낄 위협에 노출되지 않고 하루아침에 신분이나 지위가 뚝 떨어지는 추락을 겪지 않아도 되는 사회에서는 폭력의 수위가 낮아진다. 20세기 미국에서 두 정당이 집권하는 동안 나타난 폭력의 역사는 이것을 뒷받침하는 증거로 보인다. (p.142-143)

 

 실직은 그 사람의 가족과 공동체에도 직간접적으로 큰 영향을 끼친다. 분석의 단계를 더 높여보면 높은 실업률은 실업자만 해치는 것이 아니라 아직 직장이 있는 사람에게도 객관적으로나 주관적으로 모두 해를 입힌다. 높은 실업률은 임금을 낮추고 불안감을 높이는데 이것은 그 자체로도 고통스럽지만 임금 인상과 노동 조건 개선을 위한 효과적 협상에 걸림돌로 작용한다. 결국 실업의 ‘파급 효과’는 모두에게 피해를 입힌다. 예외라면 노동 비용을 줄이고 노동자의 안전을 무시해도 되는 고용자겠지만, 빈곤이 만연하면 상품과 서비스를 구매할 여력이 있는 잠재 고객이 사라지는 셈이니 길게 보면 고용자도 피해를 본다.
 실업률이 높아지거나 실업 기간이 길어질 때 살인이나 자살(혹은 둘 다)로 반응하는 사람이 꼭 실업자 중에서만 나타나지 않는 것은 바로 그래서다. 실업률이 올라가기 전에 이미 사회·경제적으로 말 못할 어려움을 겪고 있었던 사람들은 실업률이 올라가면서 임금이 깎이고, 취업 기회가 줄어들고, 단체 교섭력이 약해지고, 불만을 호소할 통로가 줄어들고, 죽어라 일해도 가까운 미래에 유일한 소득원을 잃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고, (내가 급할 때 도움을 청할 수 있는 친척과 친구는 줄어들면서) 직장을 잃어서 도와주어야 하는 친척과 친구가 늘어남에 따라 봉급 생활자라면 누구나 느낄 수밖에 없는 회사와의 관계에서 생겨나는 뚜렷한 변화, 다시 말해 ‘일자리 불안’으로 인한 스트레스와 좌절감을 도저히 피할 길이 없다. (p.148-149)

 

 뉴먼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며 수치와 명예의 심리적 역학이 저변에 깔려 있음을 짚어낸다.

취업 사회에서 배제되었다는 것이 왜 그토록 지독한 사회적 고립을 낳는 것일까? 우리는 사람들에게 돈을 건네줄 수는 있어도 …… 명예를 건네주지는 못한다. 명예는 우리 문화의 이런 주무대에 참여하는 데서 나오고 그런 참여에서 맛보는 긍정적 자기 인식에서 나온다. 대공황 시기에 루스벨트는 이 점을 이해했기에 공적 자금으로 일자리를 수없이 만들어서 국립공원을 세우고 기차역을 짓는 일에 사람들을 동참시키는 방식으로 대응했다. ….. 1930년대에 실업을 연구한 사회과학자들에 따르면 받는 돈은 별로 차이가 없었어도 공공사업진흥국에서 만든 일자리를 얻은 사람들이 실업 수당을 받는 사람들보다 훨씬 행복하고 건강했다. 공공사업진흥국 노동자들은 가난해도 존엄을 잃지 않았지만 실업 수당을 받는 사람들은 욕을 먹었고 자신의 존재를 정당화할 수 없었다.


 이 모든 것은 우리가 분석한 수치의 생리와 일맥상통한다. 뉴먼은 정신 건강을 잃지 않기 위해서라도 일은 꼭 필요하며 일이 없으면 사람은 정서적으로 파괴된다고 결론짓는다. (p.150-151)

 

 정치 문화와 정치 성향에서 나타나는 이런 차이를 뒷받침하는 수많은 증거 중에는 총기, 군사주의, 고문, 극형, 투옥, 아동 체벌과 그밖의 폭력, 완력, 강압을 나타내는 지표들에 대한 관행과 가치관과 태도에서 2000년과 2004년 대선에서 적색 주와 청색 주가, 공화당 투표자와 민주당 투표자가 어떤 차이를 보였는가를 살펴본 몇 가지 연구가 있다. 가령 퓨 리서치센터는 2004년 대선을 치른 달에 2천 명의 성인을 면담하여 공화당 투표자와 민주당 투표자 사이에 완력과 폭력의 사용과 관련하여 가치관과 태도의 차이가 여러 차원에서 뚜렷이 드러남을 확인했다. 이 면담을 토대로 퓨 리서치센터는 ‘정치 유형 분류 체계’를 개발했는데, 이에 따르면 사회 문제와 갈등을 해결하는 효과적이고 용납 가능한 수단으로 폭력에 기대려는 경향이 민주당 지지자보다 공화당 지지자에게서 훨씬 높게 나타나는 영역이 수두룩했다. 예를 들면 퓨 리서치센터는 “민주당 성향의 집단과 공화당 성향의 집단은 폭력의 사용을 어떻게 보느냐에서 주로 갈렸다”라고 보고했다. 이 차이는 개인적 차원에서 정치적 차원에 이르기까지 삶의 모든 측면에서 나타났다. (p.158-159)

 

 고 루이스 브랜다이스 대법관은 1928년에 “우리 정부는 무소부재의 막강한 교육자다. 좋은 뜻에서든 나쁜 뜻에서든 자신의 처신을 모범 삼아 온 국민에게 가르침을 준다”고 썼다. 브랜다이스는 정부 관리들이 법을 어기지 않는 것이 왜 그렇게 중요한지에 대해서도 말하는데, 브랜다이스가 범법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나는 폭력에 초점을 맞추고 싶다. 브랜다이스에 따르면 “범죄는 전염된다. 정부가 범법자가 되면 법을 경시하는 풍조가 생기고 만인이 만인의 법을 들고 나오면서 무질서가 판을 친다.” 브랜다이스의 말을 바꿔 말하면, 폭력은 전염된다. 정부가 살인을 범하면 비폭력을 경시하는 풍조가 생기고 만인이 살인자로 나서면서 무질서가 판을 치고 극형을 통해서 수호하겠다고 되뇌던 ‘법질서’ 그 자체가 무너진다. (p.163)

 

 이 책에서 내가 다루는 주제는 폭력 치사이고, 폭력 치사 발생률은 한 국가가 심리적·사회적·정치적으로 얼마나 건강한지를 말해주는 척도라고 볼 수 있다. 내가 의사로서 한 일은 안 좋은 건강 상태를 진단하고 원인이 무엇인지를 찾아내고 병을 고치고 몸이 나을 수 있도록 치료법을 처방하는 것이다. 남을 비난하고 모욕하는 데 끼어드는 것은 그런 치료와는 거리가 멀지만, 요긴한 사실들을 파악하고 공표하는 일은 비록 처음에는 그런 사실들 앞에서 수치심을 느끼는 사람이 있다 할지라도 치료에 해당한다고 나는 믿는다. 여기서 의미 있는 사실 가운데 하나는 사람들에게 수치심을 안겨주는 것이 폭력을 키운다는 것이다. 또 한 가지 의미 있는 사실은 사람들에게 폭력에 기대지 않고도 수치스러운 경험을 견뎌낼 힘이 되어주는 개인적·문화적·경제적 자원을 제공해주는 것이 폭력을 예방하는 한 가지 길이라는 것이다. (p.176-177)

 

 미국 국립과학원은 1993년 이 문제를 논의하면서 이렇게 결론을 맺었다.

교도소 인구를 늘리는 것이 폭력 범죄 수준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 아주 미미해 보인다. …… 범죄당 평균 수감 기간을 3배로 늘렸을 때 범죄 예방 효과가 강하게 나타났다면 폭력 범죄율은 떨어져야 했을 것이다. …… 분석에 따르면 폭력 범죄 한 건당 평균 복역 기간을 더 늘린다면 1975년부터 1989년까지 (복역 기간을) 늘렸을 때보다 더 큰 비율로 재범률이 올라갈 것이다. …… 이 분석은 예방 전략이 폭력에 대한 형사 사법적 대응만큼이나 중요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사실은 질문의 방향을 바꾸어 대량 투옥 정책이 정반대 효과를 낳은 것은 아닌지 자문해야 한다. 오랜 옛날부터 감옥은 ‘범죄 학교’로, 실은 범죄와 폭력의 대학원으로 알려지지 않았는가 말이다. 나의 동료 서니 슈워츠는 감옥을 ‘괴물 공장’이라고 부른다. 우리는 비폭력 범죄를 저지른 사람까지 자꾸 투옥하면서 우리가 만든 감옥이 포화 상태가 되도록 꽉꽉 채웠다. 그리고 지난 40년 동안 내가 거듭 관찰했고 모든 재범 통계가 보여주는 바에 따르면, 비폭력적인 사람을 폭력적인 사람으로 바꾸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그 사람을 감옥으로 보내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비폭력적인 사람들을 자꾸자꾸 더 오래오래 감옥에 집어넣는 것이 폭력이라는 전염병을 줄이거나 끝내기보다 사실은 늘리거나 악화시키는 결과를 낳는 것이 아닌지, 그리고 클린턴 행정부 때(1993~2000년) 극적으로 일어난 폭력 치사 발생률의 급격한 감소가 대량 투옥 열풍 때문에 일어났다기보다는 대량 투옥 열풍에도 불구하고 일어난 것이 아닌지 물어야 한다. (p.207-208)

 

 임상 의학에서는 개별 환자가 병에 걸린 다음에 그 환자를 치료하는 의사, 병원, 약에 강조점을 둔다. 아무리 예방 의학이 훌륭하더라도 병을 100퍼센트 예방할 수는 없기에 그런 방식이 언제나 필요하기는 하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훨씬 강조해야 하는 것은 폭력 치사라는 전염병은 공중 보건과 예방 의학의 방향에서 접근해야 한다는 점이다. 19세기에 우리는 청결한 식수 공급과 하수 체계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의사, 약, 병원보다 죽음을 예방하는 데 훨씬 효과적임을 깨달았다. 20세기에 우리는 식중독에 걸리고 나서 치료하는 것보다 식품이 오염되지 않도록 만전을 기하는 것이 훨씬 싸고 효과적이라는 사실을 배웠다.
 같은 맥락에서 21세기에 우리는 자살, 살인이라는 전염병을 막고 다스리려면 그런 전염병과 직접적으로 결부된 불평등, 치욕, 절망이라는 병인을 줄여서 청결한 정치·경제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 그런 위험 요인에 이미 노출된 사람들을 치료하거나 처벌하는 데 우리의 한정된 자원을 쏟아붓는 것보다 훨씬 효과적이라는 사실을 배울 필요가 있다. 미국 공중위생국 질병통제예방센터는 이미 폭력예방부를 만들었다. 이곳에서 일하는 핵심 간부 두 사람은 이런 글을 썼다.

기존의 폭력 예방 자원은 폭력 행동을 유발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개인적 변수들을 조정하려는 노력에 주로 투입된다. 폭력을 유발할 수 있는 사회적 변수들을 바로잡는 데 기울이는 과학적·정책적 관심은 훨씬 적다. …… 그러나 과학적 연구는 뚜렷한 사회·경제적 격차가 근본적으로 폭력의 병인이 된다는 것을 시사한다. …… 빈곤과 실질적인 취업 기회의 결여는 …… 자존감을 떨어뜨리고 앞날에 희망을 품지 못하게 만들고 가정 불화를 일으켜 폭력을 조장하기 십상이다. 인종주의와 남녀차별은 사회·경제적 불균형을 악화한다. …… 좀 더 굵직한 사회·경제적 문제를 짚어주면서 어떻게 하면 우리가 폭력을 줄일 수 있을지 길잡이 노릇을 해줄 연구와 정책 개발에 더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p.222-223)

 

 이 책에 이론적 틀과 영감을 주었고 이 책의 기본 전제가 되는 수많은 통찰을 제시한 사람 중에 19세기의 위대한 의사로 손꼽히는 루돌프 피르호가 있다. 피르호는 의학을, 증거 못지않게 인습과 미신에 바탕을 두어서 득보다는 해를 더 끼치기 일쑤였던 관습들의 조잡한 조합에서 자연과학과 인간과학이 제공하는 경험적·이론적 토대에 바탕을 둔 현대 응용 과학으로 변모시키는 기획에 역사상 누구보다도 크게 기여한 공로자로 널리 알려진 사람이다. 피르호는 세포병리학(생체 조직 검사에서 사체 부검에 이르기까지 현대 과학의 핵을 이루는 과정에 모두 피르호의 손길이 스며 있다), 공중 보건, 예방 의학, 사회 의학(빈민의 주거와 영양을 개선하는 일부터 베를린에서는 처음으로 위생적이고 오염되지 않은 상하수도 시설을 설계한 일에 이르기까지) 같은 의학의 중요한 전문 분과를 설립한 주역 중 한 명이다. 또 인류학이라는 사회과학을 만들어낸 개척자의 한 사람으로 널리 알려졌지만 그 시대의 진보 정치에도 마찬가지로 중요한 기여를 했다. 피르호에게 정치 활동은 의사로서 자신의 역할을 다하고 질병을 고치는 것과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 있었다. 가령 〈오버슐레지엔의 티푸스 발생에 관한 보고〉(1848)에서 그는 전염병은 식품, 주거, 의복 관련 법을 조금 바꾼다거나 약으로 개별 환자를 치료하는 것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고 (주로) 가난한 사람들의 여건을 사회·경제적으로 한꺼번에 끌어올리는 급진적인 정책을 통해서만 해결할 수 있다고 썼다. 이 결론은 미국이 주기적으로 겪는 살인과 자살이라는 전염병에 관해 이 책에서 내가 말하는 내용과 동일하다. 젊은 시절 피르호는 1848년 혁명 세력의 일원으로 싸웠고 나중에는 베를린에서 비스마르크에 맞서 다년간 야당 의원으로 활동했다. 가슴을 울리는 피르호의 대범한 발언을 인용하면서 이 책을 끝맺을까 한다.

의학의 진보는 궁극적으로 사람의 생명을 연장하겠지만 사회적 여건의 개선은 이러한 결과를 더 신속하게 더 성공적으로 성취할 수 있다. (바로 그래서) 의사는 본디 가난한 사람의 변호인이고 사회 문제는 넓게 보면 의사의 영역에 들어간다. 인간을 다루는 과학으로서 의학은 사회 문제를 자신의 문제로 인식하고 문제를 해결할 수단을 제시해야 할 책임이 있다. 의학통계학은 우리의 측정 기준이 될 것이다. 우리는 생명의 무게를 생명으로 달고 어디에 시신이 더 두텁게 쌓였는지를 볼 것이다. …… 의학은 사회과학이고 정치는 규모를 키운 의학일 뿐이다.

(p.224-2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