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질 수 없는 사람들 / 제니퍼 M. 실바 / 문예출판사
내가 만난 사람 대부분은 날로 심각해지는 경제적 불평등과 그들을 빈곤과 착취, 수치심에서 보호해주지 못하는 정치인들에게 극도로 비판적이다. 하지만 안정적인 블루칼라 일자리, 노조, 결혼과 대가족 네트워크, 교회, 사회적 모임, 정당 등 역사적으로 개인의 고난과 집단의 투쟁을 매개하던 제도들은 약해졌을 뿐만 아니라 배신의 현장이 되었다. 이 공백 속에서 노동계급은 자신의 고난을 견딜 만하고 이해할 만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개별화된 전략을 개발한다. 고통을 이겨낸 이야기는 이들의 정체성을 고정시키고, 응당 그래야 할 것과 그래서는 안 되는 것을 극명하게 구분하는 도덕적인 경계를 세우며, 서로 상충하는 듯 보이는 정치적 관점들을 한데 엮는다. 민주적 과정이 부자들에게 유리하게 조작되어 있다고 확신하는 많은 노동계급 사람들은 인터넷상의 음모론이나 자기 계발 산업에서 의미를 찾는다. 두 가지 모두 이들이 서로에게 날을 세우거나 내부로 방향을 돌리게 하는 외로운 전략이다. 이들이 개인적인 고난과 불신, 정치적 정체성 사이에 놓는 상상의 다리는 정치적 이탈을 안전하고 힘을 북돋는 약은 선택으로 정당화하는 역할을 하곤 한다. (p.20)
얼핏 보면 브리와 에릭의 정치관은 다소 일관성이 없고 비합리적인 것 같다. 브리는 부자 증세를 지지했다가 바로 뒤이어 공화당의 억만장자를 대통령으로 인정했고, 수년에 걸친 가정 폭력으로 자기 몸이 무너지는 경험을 했으면서도 남성의 지배에 관한 생각들을 옹호했다. 에릭은 사법 제도 안에 자신 같은 저소득 유색 인종의 발목을 잡는 위험이 존재한다며 비판했지만 11월 투표장에는 가지 않을 계획이었다.
이 역설을 이해하려면 ‘이해관계’가 이미 정해져 있거나 자명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을 내려놓는 태도가 필요하다. 대신 사람들의 세계관에 들어 있는 특별한 내용, 사람들이 그런 관점에 도달한 과정, 정치가 사람들의 삶 경험과 공명하는 이야기들, 세상에 대한 사람들의 관점을 정치 행위 또는 그 부재와 연결하는 메커니즘을 깊이 파고 들어갈 필요가 있다.
대중 여론조사는 개인을 그들의 사회적 환경에서 떼어놓고 정량적인 예측의 언어로 정치적 세계관을 설명하는 경향이 있다. 가령 한 사람의 교육 수준을 토대로 투표 참여 여부나 증세 지지 가능성을 예측할 방법을 알아내려 할 수 있다. 캐서린 크레이머는 위스콘신주 전역에서 수십 개의 정치 집단을 대상으로 실시한 획기적인 연구에서 이런 정량적인 접근법을 사용하면 서로 다른 부류의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들의 의견이 태도 척도상에서 어디에 해당하는지는 파악할 수 있지만, 그들이 이런 상황에 어떻게 도달했는지는 파악하지 못한다고 주장했다. 독립 변수와 종속 변수를 서로 연결하는 해석 작업은 사람들이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어떤 일을 겪어왔는지, 자기 삶이 어땠어야 하는지에 대해 들려주는 이야기로 이루어진다. (p.34-35)
나는 1960년 북동부의 한 도시에서 백인 노동계급 남성들을 상대로 심층 인터뷰를 실시한 정치학자 고 로버트 레인의 연구에서 접근 방식에 대한 영감을 얻었다. 레인은 “삶의 경험을 사회적 사고와 연결하고, 인생의 사건들이 어떻게 남성들을 억울하고 수동적인 패배자로 만들었는지, 이런 특징들을 어떻게 입맛에 맞는 정치이데올로기를 형성하는 데 사용했는지 보여주고자” 했다. 나는 주로 참여자들의 집이나 동네 커피숍에서 대화 중심의 개방적인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사람들이 자신의 삶과 정치를 알아서 연결하도록 했다. 이 책을 쓰면서 사람들이 마치 자기 인생을 제대로 이해할 능력이 없다는 식으로 대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들이 틀린 부분에 집중하는 대신, 그들이 자기 경험에 비추어 진실이라고 믿는 것 바탕에 깔린 사려 깊게 공들여 도출한 추론을 드러내고자 했다. 나는 연구 참여자들 스스로가 현실에 대한 서로 다른 규정들을 직접 판단하게 했고 그들의 믿음을 공격하지 않았다. 사실의 정확성은 그들 세계관의 진실을 바꾸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들 언어의 결점이나 틀린 정보를 꼬집는 것은 이들의 자아 감각을, 이를 공유하면서 내게 보여준 그들의 신뢰를 잔인하게 난도질하는 기분을 자아낸다. 대신 그들 서사의 개인적이고 심리적인 설명을 그들이 사는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공간들과 연결했다. 우리가 그들의 눈으로 현실을 볼 수 있게 되면 이 세상에 대한 그들의 설명이 이해 가능하고, 자명하고, 심지어는 생존을 위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으리라 믿는다. (p.40-41)
브리와 에릭은 복잡한 정치적 경관을 파악하고자 할 때 어떤 사람이 되고자 하는지에 대한 스스로의 이해, 그동안 내려야 했던 어려운 선택들, 자신과 비교되는 사람들, 자기 삶을 규정한 충실과 배반을 끌어온다. 고통과 타협하기, 고통을 넘어서면 도덕적 보상이 보장된다며 자신을 설득하기는 이들의 정체성을 조직하는 데 엄청나게 많은 일을 한다. 그들은 자신의 고난이 생산적이고 명예롭다는 기분이 들도록 고통스러운 경험과 정치적 정체성 사이에 직접 상상의 다리를 놓는다.
고통이라는 경험은 두말할 나위 없이 사적이지만 그 원인과 결과는 정치적일 때가 많다. 우리는 자신의 고통을 남의 탓으로 돌리는가, 아니면 가차 없이 스스로에게 화살을 돌리는가? 고통을 학습 기회로 여기는가, 아니면 약물로 사라지게 만드는가? 공감을 우리 옆에서 힘들어하는 사람들에게 확장하는가, 아니면 다른 사람들의 고통은 사기라며 일축하는가? 역사학자 키스 웨일루는 21세기 미국에서 고통 관리가 누구의 고통이 타당하고 정부의 보상을 받을 만한지, 누구의 고통이 사기이고 공공 개입이 필요하지 않다고 일축해야 하는지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난처한 정치적 실천”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미국에서는 장애법과 장병의 혜택을 둘러싼 초기의 투쟁부터 정부 원조에 노동 요건과 시간제한을 설정한 1996년의 복지 개혁, 2000년대의 부담 적정 보험법을 둘러싼 전투에 이르기까지, 고통은 정치적 투쟁이 반복되는 현장이었다. (p.41-42)
이들 다양한 집단에서 공통으로 나타나는 것은 바로 내부를 향한 시선, 즉 자기 보호, 인내, 개인적 구원에 대한 강조다. 사회 변화를 향한 외적이고 집단적인 전략에 의지하는 대신, 이들은 자기 자신보다 더 큰 무언가를 믿을 정도로 자신이 바보가 아니라는 데서 힘을 얻는다. 타인의 고통을 무시하는 것, 타인을 돕기 위해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않는 데서 힘을 얻는 것이 도덕적이고 필수적인 선택으로 부상한다. 고통은 개인의 의지력을 가늠하는 테스트가 되고, 이는 노동계급이 혼자 힘으로 고통을 견디고 살아남은 사람이라는 정체성을 구축하도록 부추긴다. (p.45)
언어학자이자 철학자인 조지 레이코프는 정치적 추론에 인지 과학을 적용해 권위주의 정치는 엄한 아버지 은유와 같은 방식으로 강화된다고 주장했다. 정확한 옳고 그름의 규칙을 지지하고, 확실한 범위를 설정하고, 잘못된 행실을 처벌하고, 개인에게 실패의 책임을 묻는 그런 아버지 말이다. 루이지애나 티파티 구성원에 대한 앨리 혹실드의 연구에서 보수주의자들은 고생, 희생, 개인의 책임 같은 엄격한 아버지 코드를 드러냈다. 이 연구에서 기억할 만한 인물인 재니스는 “만일 사람들이 일하지 않겠다고 하면 그냥 굶게 둬야 해”라고 당당하게 선언한다. 이는 “언니가 그냥 죽게 내버려 두겠다”는 엘런의 말과 포개진다. 혹실드는 이런 지향이 자신의 희생을 인정받고 노력을 보상받는다는 기분인 사회적 명예의 필요에서 기인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앨리 혹실드의 티파티 구성원들이 뿜어대는 열렬한 자기확신은 엘런의 경험과 딱 맞아떨어지지 않는다. 엘런은 이미 두 손 들어버린 공허한 감정과 우울감에 맞서 싸우며 긴 하루를 마치고 집에 돌아온다. 그러고는 천사가 천국에서 내려와 조카를 두 팔로 감싸는 상상을 하는 시각화 훈련을 한다. 그다음에는 천사가 언니를 감싸 안는다고 상상하고, 그다음에는 견뎌낼 수만 있다면 천사가 학대를 일삼고 마약을 팔던 언니의 전 남자 친구들을 모두 안아주게 한다. 이 연습을 하면서 엘런은 순간적이나마 마음의 평화를 찾는다. “죽게 내버려 두라”는 일견 가혹해 보이는 태도는 엘런의 영혼을 일시적으로 담금질하여, 언니가 또다시 중독과 절망의 먹잇감으로 전락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데서 오는 실망과 비통함을 견딜 수 있게 하는지 모른다. 이런 태도는 친절함은 이용당할 수 있고 언제든 사라져버릴 수도 있다는 불편한 인식에 맞서는 부실한 방패로 기능한다. (p.68-69)
역사적으로 권력자들은 노동계급 내부, 특히 아프리카계 미국인과 북동부의 백인 또는 남부의 백인 포퓰리스트 사이의 적개심과 분열을 이용해서 강력하고 단합된 노동계급이 등장할 가능성을 줄였다. 20세기 중반의 사회 보호 장치들은 집단적인 경제 정의의 약속에서 숱한 흑인과 라틴계 노동자들을 배제하도록 주의 깊게 다듬어졌다. 뉴딜 정책에 구조적으로 자리 잡은 배제를 교정하려는 시도, 즉 1970년대와 그 이후에 보호 조치들을 아프리카계 미국인, 여성, 이민자들에게로 확대하려는 시도는 블루칼라 민주당원들의 적개심과 맞닥뜨렸다. 블루칼라 민주당원들은 민주당이 당을 위해 공을 세운 유권자들을 희생 제물 삼아 새로운 집단을 보호하려 한다고 느꼈다. 백인 노동계급은 한때 자신들의 이익이 하향 재분배를 지향하는 미국 정부와 일치한다고 생각했지만 점차 정부가 자격 미달 집단의 이익을 자신들의 이익에 앞세운다고 믿게 되었다. 이런 억울함은 사회의 단층선을 다시 상상하도록 하는 데 불을 붙였다. 이 새로운 상상에서 “진짜 미국인들”은 자격도 없는 이민자, 소수 인종, 국기를 불태우고 정치적 올바름만 앞세우는 자유주의자들과 맞붙어 싸웠다. (p.74)
에이드리언이 정부를 비밀스러운 살인 집단으로 몰아갈수록 그가 정치적으로 뭔가를 할 가능성에 대한 믿음도 당연히 잦아든다.
가브리엘과 에이드리언 모두 기존의 정치 변화 경로를 거부한다. 가브리엘이 가정과 행복에 조심스럽게 초점을 맞추고 에이드리언이 정부를 적이라 결론 내릴 때, 두 사람은 정치적 참여와는 완전히 거리가 멀어진다. 사람들이 충성심, 정체성, 타인을 향한 애착을 기반으로 서로 얽혀드는 민주적 참여에 대한 새로운 이해로 움직이고자 할 때, 우리는 불리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어째서 애당초 다른 사람들과 관계 맺기를 거부하는지를 질문해야 한다. 가브리엘과 에이드리언의 설명에서 외부 세계에 얽히지 않음은 무관심, 무지 또는 무사안일함의 단순한 표출이 아니다. 집단행동에 대한 이들의 거부는 또 하루를 통과하고 고통을 학습 기회로 전환하며 자신을 절망에서 보호하기 위한 실용적인 전략으로 기능한다. (p.87-88)
가족을 부양하려고 발버둥 치는 일부 백인 남성들은 노동자를 위한 경제 정의, 공정함, 존엄을 정치의 핵심에 놓고 노동자의 권리를 위해 싸우는 데 실패한 정치인들을 비난한다. 이 남성들은 자신들의 끈질긴 투쟁, 개인적인 진실함, 타인을 향한 관대함을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데 좌절을 느낀다. 이들은 이에 대한 보상심리로 집단적인 보조금에서 소수 인종, 이민자, 난민, 비노동자를 배제해야 한다는 입장을 피력한다. 한편 집단으로서의 노동자와 경영자 간 사회계약에 대한 의식이 전혀 없는 일부 노동계급 남성들에게는 고된 노동과 자기희생이 중요한 정체성이다. 이들은 스스로를 자랑스럽게 노동자라고 규정하지만, 공동의 경제적 운명을 짊어진 노동자들로 바라보지는 않는다. 그들 중 누구도 몸을 망가뜨리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손에 넣을 수 없는 현실을 탓하지 않는다. 이들은 자신의 고생을 미화하면서 의존적인 삶에 굴복한 사람들을 가장 혹독하게 경멸한다. 소수의 남성은 가치 있는 삶을 산다는 게 무엇인지를 재규정하려고 하면서 임금 소득, 극기, 공격성을 남성성과 분리한다. 이런 분리의 과정은 이들을 어린 시절의 정치적 전통에서 분리하는 결과로도 이어진다. (p.94)
경제가 점점 약탈적으로 변하고 다른 사람들에 대한 신뢰가 사그라들자, 에드는 자신과 자기 가족의 유산을 자부심 넘치던 원래의 자리에 되돌려놓을 수 있기를 절박하게 희망한다. 불법 이민자들을 쫓아내고, 미국을 영어만 쓰는 나라로 만들고, 에드만큼 열심히 일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혜택을 삭감함으로써 말이다. 정치인에 대한 맹렬한 불신 때문에 민주당에서 멀어진 이들의 마음은 자신들의 문제를 다시 이 나라의 주요 우선순위로 되돌려놓을 마지막 희망을 안겨준 외부 후보자에게 기울었다. (…) 도로시는 남성의 권위 상실에 두려움을 표출한다. “사람들은 그런 높은 자리에 있는 남자를 더 많이 존경해요. 그런 사람을 더 무서워해. 우리한테는 뭔가를 단호하게 달성할 사람이 필요해요.” 이들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세상에서는 지금이야말로 미국을 납치한 사람들에게서 다시 미국을 되찾아와야 할 때다. 이들에게 트럼프는 새로운 시작을, 자신의 아버지가 열심히 싸우고 많은 것을 포기하며 성취한 미국의 근간을 썩게 만든 도덕적인 오염을 씻어냄을 상징한다. (p.101)
남성성은 지속해서 입증하고, 여성성과 구분 짓고, 공개적으로 인정받고, 개인적으로도 승인받아야 한다. 과거의 연구들은 어떻게 노동계급 백인 남성들이 수치와 굴욕에 대한 위협 때문에 착취적인 노동을 수행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보여주었다. 가령 폴 윌리스는 육체노동에 종사하는 노동계급 젊은 남성에 관한 연구에서 노동계급 남성 청소년들이 육체노동은 여성에 대한 남성의 지배를 표현한다고 보기 때문에 굴욕적인 일자리를 수용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유색 인종 남성들이 가장 천하고 더러운 일자리에 한정되는 것 역시 이들의 우월감을 강화했다. 그러나 지불 노동이나 가족에 대한 권위에 정체성의 닻을 내릴 수 없는 브라이언에게는 “나라는 사람”의 근원으로 호소할 수 있는 것이 오직 백인이라는 사실밖에 없다. (p.104)
가난의 끄트머리에서 살아가며 가스와 석유에 관련된 일을 하는 조는 환경 규제를 걱정한다. 2016년 7월, 그는 이렇게 우려했다. “만약에 버니나 힐러리가 되면 그 일은 이제 어려울 거예요. 그 사람들은 그거 100퍼센트 반대하잖아요. 그 사람들은 뭘 가지고 에너지를 얻으려는 걸까요? 전부 태양 발전으로 되겠어요?” 그는 말을 하다가 격앙된다. “석탄하고 가스 수준으로 에너지를 생산하려면 패널이 얼마나 많이 필요한지 알아요? 훨씬 많아야 해요. 근데 그것들도 사실 아주 해롭단 말이에요. 부서지면 그 안에서 화학 물질이 나온다니까요. 그 안에 있는 화학 물질은 아주아주 독해요. 부서지면 말이에요. 그리고 풍력 터빈, 그건 태양 발전보다 화학 물질이 훨씬 많이 들어가요. 그걸 어디에 설치한다는 거예요?” 조는 진보적인 민주당원인 매형에 대해 이야기한다. “내가 했던 모든 일자리에 노골적으로 시비를 걸었어요. 석탄도 반대해, 가스도 반대해. 내가 그랬죠. 내가 교도소에서 일자리를 얻으면 그것도 반대할 거냐고.” (p.116)
조는 노동 환경의 안전을 향상시키거나 노동 시간을 더 정규화하거나 임금을 증대하기 위한 규제 강화 같은 정책을 제안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일하다가 죽을 수 있다는 점을 자랑스러워한다. 다만 자신의 희생이 “햄버거를 뒤집는” 누군가의 희생보다 더 인정받는다는 사실을 확인받고 싶어 한다. 조는 무엇보다 자신의 고생이 가치 있다는 기분을 원하는데, 그러려면 경제적 최저 요건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요구가 틀렸다는 사실을 입증해야 한다. (p.119-120)
라파엘은 미국의 역사, 기회와 정의로 가득한 황금 같은 과거의 신화를 주저 없이 비판한다. “난 아메리칸드림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요. 당신이 어떻게 성장했는지는 모르지만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같은 건 절대 있을 수가 없어요. 한 번도 위대했던 적이 없으니까요. 한 번도 위대해본 적이 없어요. 사람들이 여기에 와서 인디언들에게서 땅을 뺏고 천연자원을 가져갔어요. 쌀을 얻으려고, 커피를 얻으려고, 석유를 얻으려고, 가스를 얻으려고 다른 장소에서도 똑같은 짓을 해요. 그냥 깡패들이에요.” 그는 다른 나라의 자원을 약탈할 기회만 노리는 탐욕스러운 존재일 뿐인 미국에 일말의 믿음도 없다. “테러리즘이 왜 일어나는지 알아요? 그 사람들이 천연자원을 차지하고 싶어서 오만 데서 깡패짓을 하고 다니잖아요. 그냥 그걸 가져가고 싶어 해요. 그래서 종교나 다른 온갖 걸 이용해서 그 전쟁을 덮어버리려고 하고.” 그는 이런 배신감을 자신의 생애와 연결한다. “내 말은, 우리 아버지는 여기에 제대로 배운 것도 없이, 아무것도 없이 내려왔어요. 심지어 영어도 몰랐어요. 그런데 그 사람들은 아버지를 그냥 바로 베트남으로 징집했다고요. 그게 내가 투표를 안 하는 이유예요.” (p.229-230)
한 사람이 고통, 혹사, 실패, 허점을 되돌아보면서 증인의 공동체에 증언할 때는 일상생활의 흐름에서 떨어져나와 어째서 그런 방식으로 일이 벌어지게 되었는지를 자신의 언어로 설명해야 한다. 고통을 억울함과 책망 속에 감춰두는 대신 이름을 붙이고 바깥세상을 향해 집어던지면, 수치스러운 경험으로 남게 될 것으로 사회적 유대를 빚어낼 가능성이 싹튼다. 이야기 전달자는 J. D. 밴스가 《힐빌리의 노래》에서 그러하듯 다른 이들을 대신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경험한 동료로서 다른 이들과 함께 이야기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고통을 들려줄 수 있다. 자기 단절에 맞서고, 고통과 해법을 공개적으로 공유할 수 있는 튼튼한 공론장의 형성은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집단적인 동원의 발판을 제공할 수 있다. (p.338)
CIA 분석가가 알려 주는 가짜 뉴스의 모든 것 / 신디 L. 오티스 / 원더박스
인쇄기 덕분에 사람들은 책, 소책자, 기타 인쇄물을 대량으로 만들어 낼 수 있었으며, 그것도 한 가지 표준 규격으로 만들어 낼 수 있었다. 구텐베르크가 인쇄한 최초의 책은 1452년에 간행한 성서였다. 이 책은 180부 제작되었는데, 각 권당 1,300페이지에 달했다. 구텐베르크의 인쇄기가 발명된 때로부터 고작 50년이 지났을 무렵, 유럽에는 1,000대 이상의 인쇄기와 약 50만 권의 인쇄본이 있었다. 어떤 역사가들은 인쇄기 이전에만 해도 유럽에서 문해력을 갖춘 이가 전체 성인 가운데 겨우 25퍼센트 이하였지만, 이후 더 많은 사람들이 문헌에 접근할 수 있게 되면서 160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는 그 비율이 두 배로 늘어나게 되었다고 추산했다.
인쇄기가 나오기 전에만 해도, 사람들이 가진 정보와 대중에게 알릴 내용 모두는 대부분 왕실과 부유층과 교회의 통제를 받았다. 하지만 인쇄기는 이 모든 상황을 바꿔 버렸다. 마치 수문을 열어 놓은 격이 되어서, 새로운 생각과 사상과 정보가 그 어느 곳의 그 어느 사람에게나 쏟아지게 되었던 것이다. 인쇄기의 발명과 더불어 읽기와 정보의 기회도 일반인에게 훨씬 더 많이 열렸으며, 덕분에 많은 사람들은 자기들이 이전까지만 해도 결코 갖지 못했던 뭔가를 갖게 되었다. 그 뭔가란 바로 목소리였다. 그런데 알고 보니 사람들은 말할 내용이 참으로 많았다. (p.47-48)
역사가들과 문학 비평가들은 포의 저술이 의도적인 날조인지, 아니면 그가 단지 풍자의 천재였는지를 놓고 여전히 논쟁하고 있다. 진실은 아마도 그 사이의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그의 시각에서는 어쨌거나 삶이야말로 하나의 커다란 날조였기 때문이다. 포는 사람들이 천성적으로 잘 속아 넘어갈 뿐만 아니라, 어떤 인간도 모든 것을 알 수는 없다는 단순한 사실 때문에라도 항상 기만 상태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고 믿었다. 날조는 사람들이 취약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훌륭한 경고였다. 포가 보기에는 그런 취약성이 그리 나쁜 것도 아니었다. 그의 생각에 따르면, 삶이란 허구와 현실 사이의 경계를 흐리게끔 “반쯤 감은 눈”으로 바라볼 때에 최상이었으니까. (p.81-82)
그로부터 12년 전, 조지프 퓰리처는 뉴욕에서 가장 큰 신문인 《뉴욕 월드》를 매입했다. 퓰리처의 배경은 허스트와 더 이상 다를 수가 없을 정도로 판이했다. 허스트가 가문의 재산을 물려받았던 반면, 퓰리처는 열일곱의 나이로 헝가리에서 미국으로 이민 왔고, 성년 초기의 대부분을 집도 없이, 땡전 한 푼 없이, 일자리를 찾아 전전하며 보냈다. 퓰리처는 미주리 주 세인트루이스의 공립 도서관에서 책을 읽으며 영어를 독학했고 훗날 기자로 취직했다. 하루 16시간씩 일한 퓰리처는 머지않아 정상으로 뛰어올라 세인트루이스에서 가장 성공한 신문 가운데 한 곳을 건설하게 되었으며, 급기야 《뉴욕 월드》를 인수했던 것이다.
허스트와 퓰리처는 신속하게 격렬한 전투에 돌입했는데, 양쪽 모두 자신의 신문을 뉴욕에서 가장 성공적인 간행물로 만들려고 작정한 상태였다. 이를 위해서 두 사람은 각자의 신문에 극적인 헤드라인, 화려한 서체, 눈길을 끄는 만화와 삽화 다수, 섬뜩하거나 흥미진진한 (일부는 진짜이지만, 또 일부는 완전히 거짓인) 기사를 가득 채웠다. (p.98)
또한 나치는 사람들의 기존 편견과 그 당시의 인종차별주의를 이용했다. 제아무리 가짜 뉴스라 해도 우리의 정신을 완전히 바꿔 놓을 수 있는 경우는 흔치 않다. 즉 우리가 이전까지 믿었던 내용과 정반대되는 내용을 믿도록 만들 수 있는 경우는 드물다는 뜻이다. 대신 가짜 뉴스는 우리의 기존 믿음을 이용하며, 단지 우리가 옳다는 점을 스스로 더 확신하게 만들 뿐이다. 제2차 세계대전 직전과 도중에 상당수의 독일인은 이미 이성애자이며 백인이고 신체가 튼튼한 독일 국적의 기독교인이 우월한 인종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랬기에 나치의 선전이 그저 슬쩍 자극한 것만으로도, 독일인들은 그 범주에 맞아떨어지지 않는 모든 사람을 기꺼이 표적으로 삼게 되었던 것이다. (p.112)
1937년에 H. G. 웰스는 인터넷의 창조를 예견했다. “인류 전체의 기억에 모든 개인이 접근할 수 있게 될 것이며, 아마도 짧은 시간 안에 그렇게 될 것이다.” 그는 이렇게 썼다. 같은 해의 어느 강연에서는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세계 어느 지역에서나, 그 어느 학생이라도, 각자 편할 대로, 자기 방의 투사기 앞에 앉기만 하면, 그 어느 책이나 그 어느 문서도 정확한 복제본으로 살펴볼 수 있는 때가 가까워졌습니다.” 그 당시에만 해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발상을 혁명적이라고 간주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리 먼 이야기도 아니었다.
1960년대에 미국 국방부의 자금 지원을 받은 몇몇 대학의 연구자들은 서로를 모조리 연결해 주는 컴퓨터 네트워크를 만든다면 사람들이 서로 정보를 더 손쉽게 공유할 수 있으리라는 발상을 떠올렸다. 이들은 여기에 고등 연구 프로젝트 기관 네트워크(Advanced Research Projects Agency Network), 약자로 아르파넷(ARPANET)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최초의 인터넷 브라우저인 월드 와이드 웹(World Wide Web)은 1989년에 만들어졌지만, 그 당시에만 해도 대개 과학자들을 위한 용도였다. 더 나중인 1990년대 중반에 인터넷이 더 널리 이용 가능하게 되자, 마치 인쇄기의 발명 직후와도 약간은 비슷한 상황이 되었다. 차이가 있다면 인쇄기가 정보의 홍수를 만들어 냈다면, 인터넷은 정보의 쓰나미를 만들어 냈다는 것뿐이었다. (p.153-154)
사실에 관한 사실들
- 우리가 검증할 수 있는(아울러 검증할 수 있어야 마땅한) 진술이다.
- 믿음이나 느낌에 근거하지 않는다.
- 특정한 입장을 옹호하여 주장하거나, 독자를 설득하려 시도하지 않는다.
- 실험이나 관찰을 통해 입증될 수 있다.
- 그게 참인지 여부는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와 무관하다.
- 보통 정확한 언어나 척도를 사용한다. 예를 들어 날짜, 장소, 숫자 같은 것 말이다.
- 측정되거나 입증된 것이 아닌 경우에는 단언적 표현을 멀리하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모두가’, ‘항상’, ‘절대로’, ‘아무도’ 같은 것이 그런 표현이다.
의견에 관한 사실들(p.220-221)
- 우리가 검증할 수 없는 느낌, 시각, 생각, 판단, 믿음이다.
- 때로는 사실에 대한 누군가의 해석과 분석에 근거하며, 결론으로 제시된다.
- 때로는 이것, 또는 저것을 선호하는 논증으로 제시된다.
- 입증될 수 없으며, 누군가는 정반대 시각을 가질 수도 있다.
- 예를 들어 ‘내 생각에는’, ‘너는 당연히’, ‘마땅히’, ‘내 느낌에는’, ‘내가 믿기로는’ 같은 표현과 유행어를 자주 사용한다.
- 예를 들어 ‘최고’와 ‘최악’ 같은 단어를 비롯해서 뭔가를 판단하고 설명하는 용어를 사용한다.
- 예를 들어 ‘모두가’, ‘항상’, ‘절대로’, ‘아무도’처럼 단언적 표현을 자주 사용한다.
사회심리학자 리온 페스팅어, 헨리 W. 리켄, 스탠리 샤크터는 마틴과 탐구자들에 관해서 연구한 후에 인지적 부조화의 이론을 처음으로 저술했다. 이들이 그 연구를 토대로 1956년에 내놓은 저서 『예언이 끝났을 때』에서는 인지적 부조화를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확신을 지닌 사람은 변화되기가 어렵다. 만약 우리가 동의하지 않는다고 말하면, 그는 외면하고 돌아설 것이다. 우리가 사실이나 수치를 보여주면, 그는 우리의 출처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할 것이다. 우리가 논리에 호소하더라도, 그는 핵심을 파악하지 못할 것이며 …… 결국에 가서 그가 자신의 믿음이 잘못되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를, 그것도 명료하고도 부정할 수 없는 증거를 마주한다고 가정해 보자.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날까? 그 사람은 십중팔구 그런 곤경에서 빠져나올 것이며, 단지 믿음이 흔들리지 않을 뿐만이 아니라, 자신의 믿음의 진실성에 대해서 오히려 이전보다 더 확신하고 있을 것이다.
(p.237-2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