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식량위기 대한민국 / 남재작 / 웨일북
이미 변해버린 것을 부여잡고 변화가 언제 올지를 묻는 사람에게 변했다는 것을 이해시키기는 쉽지 않다. 《기후전쟁》의 저자 하랄트 벨처는 이를 ‘지시 프레임(reference frame)’의 관점에서 설명한다.미디어나 주변을 통해 더 자주 특정 정보를 접하게 되면 사람들은 비정상적인 상황을 정상적인 것처럼 여기게 되는 ‘바탕 교체(baseline shift)’ 현상을 겪게 된다. ‘바탕 교체’는 나란히 달리는 기차를 바라보면서 마치 정지해 있다고 느끼는 것처럼, 무엇이 옳고 그른지 방향을 안내하는 ‘지시 프레임’을 변화시킨다.
1997년 IMF가 올 때까지 우리나라 경제가 얼마나 심각한지 몰랐던 것처럼 우리는 변화를 잘 인식하지 못한다. 여기에 덧붙여 사회 이슈는 손쉽게 논쟁으로 발전하는데, 담배 회사들이 담배가 유해하다는 주장을 ‘물타기’할 때 쓰던 기법이다. 우리가 언론에서 매일같이 보는 논쟁도 결국 담배 회사들의 성공적인 방법을 따라 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과학적 증거를 들이밀면 일단은 부인한다. 그리고 그 반대되는 사실을 과학적 증거로 제시한다. 눈앞에서 벌어지는 사실을 논쟁으로 만들면, 사실에 대한 기억 대신 논란에 대한 이미지만 남는다. 하늘 위에 명확히 떠 있는 달을 가리켜도 사람들의 인식에는 손가락만 남는다. 기후변화에 대한 선전포고가 있은 지 오래지만, 오후에 있을 수영 강습을 더 신경 쓰는 것이 우리이다.
기후변화만 그런 것도 아니다. 가습기 살균제에서도 똑같은 일이 있었다. 가습기 살균제가 위해하다는 정부 발표는 몇몇 학자들의 불완전한 연구 결과로 희석되었다. 언론은 기계적 중립을 지킨다. 사실과 거짓 앞에서 진실의 편에 서기보다는 기계적 중립을 선택한다. 논란은 커져가고 결국 지루한 법적 공방을 거쳐 사실이 인정될 때까지 피해는 확산된다. 미국의 담배 소송에서 벌어졌던 일이고, 우리나라의 가습기 살균제 사건에서 벌어졌던 일이다. 가장 흔하게는 정치적인 공방에서 ‘달의 손가락화’를 보게 된다. 우리 기억 속에 무엇이 자리 잡고 있든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기후는 이미 변했다. 얼마나 더 변할까? 그것은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다. (p.22-24)
2020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코로나19는 전혀 다른 지구를 만들었다. 사람들의 이동이 멈추자 다른 세상이 나타났다. 자동차 소리가 잦아들자 새들의 울음소리가 들리기 시작했고, 대양에서 오가는 배들이 줄어들자 해양 동물의 번식이 더 활발해졌다. 그중 가장 놀라운 경험은 보지 못하던 세상이 보인 것이다.
애플 티브이에서 방영한 다큐멘터리 〈그해, 지구가 바뀌었다〉에서는 코로나19로 촉발된 록다운 기간 동안 자연 생태계가 어떻게 회복되었는지 보여주었다. 잘란다르는 인도 펀자브주에 있는 인구 100만 정도의 작은 도시이다. 이 도시에 사는, 다큐멘터리 출연자 안슐 초프라는 옥상에 올랐을 때 놀라운 광경을 본다. 멀리서 히말라야산맥이 보였기 때문이다. 200킬로미터 이상 떨어진 히말라야산맥이 사람들의 이동이 멈추자 거짓말처럼 나타났다. 30년 동안 같은 집에서 살았지만 보이지 않던 광경이었다.
“히말라야산맥은 그동안 계속 오염된 하늘 뒤에 숨어 있었어요”라는 청년의 말이 무척 생소하게 들렸다. 불과 록다운 12일 만에 하늘을 뒤덮은 스모그가 사라지고 히말라야산맥의 하얀 능선이 보였다. 이 순간을 찍은 안슐의 사진은 트위터를 통해 퍼져나갔고, 다큐멘터리를 만들던 팀에게까지 닿았다. 첫 느낌은 “도대체 우리가 이 지구에 무슨 짓을 한 걸까?”였다. (p.57-58)
토양은 1센티미터가 형성되는 데 대략 200년이 걸린다. 《총, 균, 쇠》의 저자 재레드 다이아몬드는 문명의 번성은 토양의 두께와 비례한다고 말한다. 처음 농경을 시작할 때는 두텁고 비옥한 토양 덕분에 작물의 생산량이 높다. 정착민 수가 늘어나고 경지 면적이 확대되면서 숲은 점차 줄어든다. 유기물 층에 덮여 있던 토양이 공기에 노출되면서 비바람에 의해서 토양이 유실된다. 비옥하던 토양은 시간이 흘러 자갈이 드러나면서 농업 생산성은 떨어진다. 그리고 토양 유기물이 분해되고 토양 수분이 감소하면서 강수량도 줄어든다. 흉작이 드는 해가 많아지고 문명은 쇠퇴기에 접어든다.
토양은 이렇듯 문명의 근간을 이루는 핵심 자원이다. 인간이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4F(식량Food, 사료Feed, 섬유질Fiber, 연료Fuel)를 생산하는 기반이다. 비옥한 토양은 풍요로운 문명의 토대가 되지만, 토양 역시 화석연료처럼 유한한 자원이다. 경운을 하고 비바람에 노출될 때부터 토양침식이 시작된다. 스위스 바젤대학교와 유럽위원회(EC)의 공동 연구에 따르면 매년 토양 360억 톤이 물과 산림 벌채에 의해 유실된다고 한다. 세계에서 가장 큰 댐인 중국 삼협댐 250개를 건설하는 데 들어간 콘크리트 무게와 맞먹는 양이다.
토양이 사라지는 것도 문제이지만 숲과 초지, 농지가 사라지는 것 역시 농업을 위태롭게 한다. IPCC에서는 기존의 토지이용이 다른 형태로 변하는 것을 ‘토지이용 변화’라고 정의한다. 네이처 커뮤니케이션에 게재된 논문에 따르면 1960년대 이후 매년 72만 제곱킬로미터, 독일 2배 크기의 지표면이 변하고 있다고 한다. 인간의 훼손에서 자유로웠던 열대우림 지역이 농경지로 전용되고, 세계 각지에서 일어난 도시화와 산업화에 따라 농지와 산림지는 도시로 바뀌었다. 그렇지만 토지이용 변화의 86퍼센트는 농업과 관련되어 있다. 2005년 이후 이러한 추세가 완화되는 것이 관찰되었는데, 이는 2007~2008년 금융 위기의 여파로 추정된다. 2019년 IPCC에서 발표한 특별보고서에 따르면 2007년부터 2016년 사이 인간이 초래한 총 온실가스 배출량의 4분의 1이 농림 및 기타 토지 사용에 기인했다. 농업과 토지이용 변화는 글로벌 온실가스 배출 지표에서 전기와 열 생산 다음으로 2위를 차지한다. (p.81-82)
화학비료가 부족한 아프리카 일부 국가는 아직도 굶주림에 허덕인다. 경지면적당 식량 생산량이 적으니 더 많은 산림을 훼손해야만 하고, 더 많은 사람이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농업에 매달려야 한다. 실제로 아프리카의 원조 기관에서 근무한 선배들의 경험담을 들으면 화학비료가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는다.한 가족의 생계가 옥수수밭에 달려 있는 경우가 많아. 옥수수가 키도 작고 너무 빈약하길래 비료를 옥수수밭에 조금 뿌려주었더니, 그다음에 방문했을 때 사람 키만큼 옥수수가 자라 있더라고. 화학비료 한 포대면 한 집안의 식량문제를 해결할 수 있어.
원로 연구자의 눈에 질소비료는 대가족의 굶주림을 면하게 해주는 마법 가루이지 않았을까? 그때 이후 나 역시 화학비료에 대한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 그렇지만 화학비료는 강과 호수의 부영양화를 일으키고 기후변화를 가중시키는 원인 물질이기도 하다. (p.102)
화석연료를 사용해 생산된 비료는 곡물 생산량을 늘렸고 그 곡물은 가축 수를 늘렸다. 미국과 브라질의 대평원에서 뿌려진 질소비료는 한국에서 가축을 거쳐 퇴비가 되어 토양에 뿌려져 쌀이 되고 채소가 되어 우리 식탁에 오른다. 식량 수입국에서 질소 과잉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일지도 모른다.
명절날이나 동네 잔치가 열리는 날에 겨우 먹던 고기는 이제 우리나라 사람들의 주식의 반열에 올라섰다. 농업 공무원은 서민들이 소주 한 잔에 삼겹살을 먹는 데 부담이 없도록 해야 한다는 마음으로 농축산물 가격을 안정화시키기 위해 불철주야 애쓴다. 청년들은 재벌도 즐긴다는 치킨으로 배를 채우며 밝은 미래를 꿈꾼다. 우리는 질소순환을 다시 예전으로 되돌릴 수 있을까? 과연 그것을 원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p.105-106)
숲은 일반적으로 이산화탄소의 흡수원으로 인정된다. 세계 곳곳에서 온실가스 흡수를 위해 나무를 심자는 운동이 진행되고 있다. 화석연료 연소로 대기 중에 배출된 이산화탄소는 식물이 광합성을 하지 않으면 그대로 공기 중에 머물게 된다. 그러니 지구온난화를 막으려면 화석연료의 사용을 줄여야 하는 것은 물론 이미 배출된 이산화탄소를 흡수해야 한다. 이렇게 이산화탄소를 흡수해 대기에서 제거하는 것을 오프셋(offset)이라고 한다. 식물의 광합성은 이산화탄소를 오프셋 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다. 해양의 녹조류 역시 이산화탄소를 흡수하지만 인간이 개입할 수 있는 여지는 거의 없다. 그런데 식물이나 미생물이 이산화탄소를 흡수해 탄수화물로 고정하더라도, 즉 탄소 고정(carbon fixation)을 하더라도 이산화탄소가 다시 분해되어 대기 중으로 배출되지 않아야 한다. 일년생 초본류는 죽은 후 1년 내에 대부분 분해되어 다시 대기 중 이산화탄소로 되돌아가 결과적으로 탄소 흡수에 거의 영향을 주지 않는다. 이렇듯 대부분의 작물은 탄소순환에 참여하지만 대기의 탄소 증감에 영향을 주지 않는 탄소중립에 해당한다.
농업 관련 토론회에 가면 농업은 이산화탄소를 흡수해 지구온난화를 방지한다는 주장을 가끔 듣는다. 그렇지 않다는 것을 설명하지만 잘못된 지식이 전파되는 속도를 따라잡기에는 역부족이라는 느낌이 들 때가 많다. (p.140)
환경 운동가들은 탄소중립을 위해 전기 요금을 인상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에너지 전문가들은 원가보다 싼 전기 요금이 부당하다고 주장한다. 우리나라의 전기 요금 중 산업용은 OECD 평균의 87퍼센트 정도이고 주택용은 독일의 3분의 1로 OECD 평균의 절반을 조금 넘어간다. 전체 전기 수요에서 산업 부문이 60퍼센트를 차지해 전기 요금은 산업 경쟁력에 미치는 영향도 크다. 전기 가격이 다른 에너지보다 상대적으로 저렴하니 전기를 많이 쓰는 구조로 바뀌었고, 전기 요금이 끼치는 영향이 크니 가격을 올리기 어려운 구조가 되어버렸다.
모든 세상일이 그렇듯이 원인이 있으면 결과가 있기 마련이다. 이 부담은 누군가 질 수밖에 없는데, 이번에도 정부의 통제하에 있는 한국전력공사와 여섯 개 발전 자회사들이 2021년 한 해 동안 4조 원의 적자를 떠안았다. 시민들은 풍요롭게 전기를 사용했지만 그 영향은 다음 정권, 다음 세대로 넘겨졌다. 전력은 생존 필수품이자 복지의 시금석이 된 지 오래이다. 전력 회사의 적자가 누적되어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때가 오면 어쩔 수 없이 전기 요금을 올려야 할지도 모른다. 물론 그렇다고 국민의 분노가 한 줌도 덜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폭탄 돌리기에 당첨된 정권은 분노 속에서 속죄양이 될 운명에 처할 수밖에 없다. 과연 누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까? (p.146-147)
만약 OECD의 기준을 적용하면 우리나라 재생에너지 생산량은 1차 에너지(석탄, 석유, 천연가스, 수력, 원자력 등 직접 에너지원으로 사용되는 것을 말한다) 공급량 2억 9207만 6000티오이 대비 2.4퍼센트에 불과하다(2019년 기준). 이탈리아 18.2퍼센트, 독일 14.6퍼센트, 프랑스 10.7퍼센트, 영국 12.5퍼센트, 미국 7.9퍼센트, 호주 7.1퍼센트, 일본 6.2퍼센트 등 다른 선진국들과 비교해도 차이가 크다.
이런 이유로 우리나라에서는 재생에너지에 대해 회의적인 시선이 여전히 우세하지만 이미 정해진 경로를 한 나라가 바꿀 수는 없다. 그런 시도는 수레바퀴 앞에 선 사마귀처럼 위태롭다. 미래의 일자리와 경제는 기후변화와 탄소중립이라는 문명의 전환기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p.148-149)
이는 농업계 역시 마찬가지이다. 농업용 전기 요금은 평균 판매 단가 대비 44퍼센트에 불과하다. 이런 이유로 농업에서 유류 사용량은 줄어드는 대신 전기 사용량은 빠르게 늘어났다. 농가 소득 향상을 위해 논에는 유리온실과 시설 하우스가 빠르게 생겨났다. 우리나라는 중국 다음으로 온실이 많은 나라이다. 그 온실에서는 전기 온풍기를 사용해 겨울철에 딸기, 토마토, 참외, 그리고 아열대 작물을 생산한다. 시설 원예 작물의 에너지 비용은 순 생산비의 30~60퍼센트 정도에 이른다. 어려운 농촌의 현실을 생각하면 전기 요금을 올리는 것이 가능할까? (p.149)
가끔 이런 생각도 들었다. 우리가 재생에너지를 설치할 공간이 없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 여유가 없는 게 아닐까? 재생에너지 시대에는 누구도 발전소와 동떨어져 살아가기는 어렵다. 울산의 공업탑이 세워지던 시절에는 소음과 검은 연기가 사람들의 심장을 뛰게 만들었다. 지금은 기겁을 할 내용이지만 그 시대는 그만큼 절박했다. 만약 다시 절박한 때가 오면 달라질까?
각자 서 있는 입장에 따라 서로 상충되는 주장이 난무한다. 원자력은 위험해서 안 되고, 태양광은 우리 집 앞에는 안 되고, 전기의 대부분을 생산하던 화력발전은 없애야 하고, 그렇지만 전기 요금은 올리면 안 되고, 건조기와 식기세척기 등 전력을 많이 쓰는 새 가전은 더 많이 필요하고, 농사용 전기 요금 제도는 농가의 생존을 위해 계속 유지되어야 하고…. 우리는 이런 시민들의 요구를 모두 충족할 수 있을까? 아니면 무엇을 채택하고 무엇을 외면할 수 있을까? 어떤 결정이든 정치적일 수밖에 없다. 이번에는 누가 희생을 해야 할까? 과연 이 시대에도 누구에게 희생하라고 요구하는 것이 옳을까? 에너지 전환은 사회에 잠재된 갈등을 밖으로 드러내면서 절정을 향해 치닫고 있다. 결론은 속도를 늦추거나 결국 다음 정권, 다음 세대로 미루는 것이 모두가 만족하는 대안이 될 확률이 높다. (p.153)
독일은 재생에너지 선두 국가 중 하나이다. 2020년 온실가스 배출량은 1990년 대비 42.3퍼센트나 감소했다. 여기에는 성공적인 에너지 전환이 큰 역할을 했다. 전력 소비량 중 재생에너지 비중은 46퍼센트를 넘어섰고, 1차 에너지 소비량 대비 재생에너지 비중은 17퍼센트에 달했다. 재생에너지는 석유(34퍼센트)와 천연가스(27퍼센트)에 이어 세 번째로 큰 에너지원이었고, 석탄(16퍼센트)과 원자력(6퍼센트)보다 더 많은 비중을 차지했다. 우크라이나 사태는 독일이 얼마나 천연가스에 목을 매는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주었다.
독일이 재생에너지 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러시아까지 직접 연결된 노르트 스트림(Nord Stream) 가스관이 크게 작용했다. 러시아 북서부 비보르크에서 출발해 발트해의 해저를 지나 독일의 루프민까지 연결되는 1200킬로미터의 노르트 스트림 1 가스관은 매년 550억 세제곱미터의 천연가스를 독일에 공급한다. 한 해 독일에 필요한 천연가스의 절반에 가까운 양이다. 독일은 값싼 러시아산 가스를 추가로 공급받기 위해 러시아 북서부 우스트루가에서 루프민까지 연결되는 새로운 가스관의 건설을 시작했다. 2018년부터 시행한 대공사는 완료된 후 허가가 떨어지기만을 기다렸다. 그런데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이 발발하면서 노르트 스트림 2 가스관은 가동이 불투명해졌다.
석유의 시대를 가능하게 했던 것은 석유 공급망 전체에 미치는 미국의 강력한 군사력이었다. 반면에 러시아에서 출발한 가스관에는 미국의 군사력이 미치지 못했다. 원자력 발전을 멈추고 석탄발전소를 폐쇄하면서 시작된 독일의 에너지 전환은 러시아에 의존한 천연가스 공급망에서 취약성을 드러냈다. 반면에 치솟은 유가와 천연가스 가격 덕분에 미국 에너지 업계는 큰 이익을 남겼다. 화석연료의 시대가 쉽게 저물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전 세계인들에게 각인시킨 것이다. (p.160-161)
우리나라는 뛰어난 전력망 덕분에 세계적으로 전기 품질이 우수한 나라에 속한다. 그리고 어지간해서는 정전을 겪지 않는다. 반면에 내가 라오스에 한동안 머물 때는 언제 전기가 나가도 이상하지 않게 느껴졌다. 수시로 정전이 되었고, 전압이 불안정해서 전자 기기는 고장 나기 십상이었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정전이 되면 큰일 나는 것처럼 반응한다. 마치 절대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 벌어진 것처럼 호들갑을 떤다.
그런데 이것이 또 다른 문제를 만든다는 사실을 많은 사람이 알지 못한다. 모든 시설이 그렇듯이 시간이 지나면 전력망도 수리나 교체를 해야 한다. 대부분의 국가에서는 수리가 필요한 지역의 전력 공급을 중단하고 작업을 한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고압의 전기가 흐르는 상태에서 교체 작업을 하는데, 절대로 전기가 끊어지면 안 된다는 믿음을 충족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믿음 때문에 많은 전력 노동자가 감전 사고를 당한다는 것을 알면 좀 달라질까? 2016년부터 5년 동안 한국전력공사에서 일하는 노동자 32명이 사망했다.
우리나라의 전력망은 단 하나로 구성되어 효율적이기도 하지만 위험에는 취약하기도 하다. 만약에 전력 수요가 공급을 초과하면 전국이 동시에 정전될 위험이 있다. 한국전력공사에서는 이런 블랙아웃 상황을 막기 위해 전력 예비율이 일정 수준으로 떨어지면 강제로 일부 지역을 정전시키기도 한다. (p.161-162)
우리나라의 전력망은 석탄화력발전소 60기, 원자력발전소 24기, 액화천연가스 발전소 4기 등이 하나의 전력망에 연결되어 있다. 앞으로도 전력 수요가 계속 증가할 것이기 때문에 발전소는 계속 지어지고 있다. 2050년 탄소중립 시나리오에서 전기 공급량은 현재 550테라와트시에서 1200테라와트시까지 늘어나는 것으로 설정되어 있다. 석탄발전소가 담당하는 부분을 재생에너지 발전소가 이어받아 전체 전력 생산량 대비 재생에너지 비율은 60퍼센트 이상으로 늘어나게 된다. 이를 위해서는 500기가와트 정도의 재생에너지 발전소가 추가되어야 한다. 풍력발전소가 일부분 담당하겠지만 대부분은 태양광발전소가 기존의 화력발전소를 대신할 것이다. 그리고 재생에너지의 간헐성을 극복하기 위해 액화천연가스 발전도 어느 정도 유지될 전망이다. 또한 재생에너지가 남아돌 때 전력을 저장할 수 있는 에너지 저장 시스템(ESS)과 수소 연료 전지 시스템도 도입되는 것으로 계획되어 있다. 여기서 이 담대한 계획을 실현할 수 있을지를 논하는 것은 아니다. 나 역시 주변의 전문가들의 의견에 귀를 기울인다. 단지 이 말은 부연하고 싶다. 에너지가 바뀌면 모든 것이 바뀐다.
단 하나의 거대한 망으로 구성된 그리드(grid)라 불리는 전력 공급망은 재생에너지 시대에는 수많은 작은 그리드로 분산될 것이다. 이를 분산 전원망 또는 마이크로그리드라고 부른다. 산업통상자원부에서는 농촌형, 도시형 등 여러 유형의 마이크로그리드 시범 사업을 시작했다. 우리나라 산업화 시대를 이끌었던 전력 공급망은 대변화에 직면하고 있다. 기술적으로는 어려울 것이 없지만 엄청난 투자와 이를 안정화할 시간이 필요하다. 에너지 업계에서도 전통적인 일자리가 사라지고 재생에너지와 마이크로그리드 분야에서 새로운 일자리가 생겨날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생활과 인식도 변할 것이다.
화석연료를 중심으로 움직이던 시절에는 발전소가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했다. 그런데 재생에너지 시대가 열리면서 누구도 발전소로부터 벗어날 수 없게 된다. 주차장, 건물 옥상, 공터, 주택 등 태양광을 설치할 수 있는 곳이면 어디든 태양광 패널이 설치된다. 그런데 여전히 문제는 남는다. 우리는 이런 변화를 정서적으로 받아들일 수가 있을까? (p.163-164)
우리는 식량 공급망을 어떻게 안정화할지 여러 혁신적인 시도를 해나가면서 미래를 맞이할 준비를 할 것이다.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글로벌 농업에 대한 이해이다. 농업을 전공하는 대학생과 대학원생들이 여러 개발도상국의 대학과 연구 기관에서 그 나라의 연구자들과 함께 농업을 연구하도록 지원하는 것이 필요하다. 캐나다, 러시아, 우크라이나, 호주 및 뉴질랜드 등 농산물 수출 대국들은 미래에도 여전히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다. 우리나라와 농업 협력을 강화할 수 있도록 농업 투자와 전문가 교류를 적극적으로 해나가는 것 역시 중요하다. 이 분야에서 많은 일자리가 만들어지고 이 과정에서 우리가 세계를 바라보는 시야도 넓어질 것이다. 우리 산업 중에서 농업 분야는 가장 발전이 더디지만, 다른 의미로 그만큼 발전할 잠재력이 크다는 뜻이기도 하다. 글로벌 경쟁력을 갖춘 다른 산업처럼 농업 역시 같은 길을 걸어갈 것이다. (p.325)
지난 10년 동안 온실가스 배출량은 더 늘어났지만 오히려 미래에 대한 비관적인 생각은 더 줄었다. 온실가스 배출량을 줄이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기후변화에 대한 대비도 제대로 못할 것이라는 걱정도 덜 하게 된다. 이미 글로벌 테크 기업과 식품 기업들은 탄소중립과 지속 가능한 발전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여기고 있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그 기업의 핵심을 이루는 젊은 직원들과 소비자들이 그렇게 인식하기 때문이다. 이는 많은 과학자와 기후 활동가의 외침이 공허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유치원부터 초중고등학교, 대학교의 선생님들이 학생들에게 기후변화에 대해 꾸준히 가르쳐온 노력이 힘을 발휘하고 있다. 물리학자 막스 플랑크는 “새로운 과학은 당대의 반대론자들을 설득해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자들이 모두 죽은 후 새로운 세대에게 수용되면서 승리를 거두는 법”이라는 명언을 남겼다. 기후변화에 대한 대응 역시 마찬가지일지 모른다. 기후변화를 초래한 것은 우리 세대이지만 우리는 결코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다음 세대가 정치적 의사 결정의 전면에 등장하면서 기후위기도 해결 국면에 접어들 것이다.
앞으로 우리가 고민해야 할 부분은 어떻게 하면 더 잘할 수 있을지이다. 우리는 성장에 매몰되어 속도를 중요시했다. 그렇지만 지금부터는 오히려 문제의 복잡성을 인식하고, 해결해야 할 문제의 위계와 층위를 구분하고, 기후 불평등을 완화할 합리적 접근 방법을 찾아가는 과정이 더 중요하다. 민간에서도 우리나라 탄소중립을 위한 가장 합리적인 경로를 찾아가는 노력을 시작했다. 정부 역시 이러한 움직임에 호응하면서 함께 상승작용을 일으킬 것이다. 이런 접근을 통해서 전체적인 자원의 소모와 갈등을 줄이고, 목표에 이르는 시간을 단축해 나갈 것이다. 탄소중립과 이어지는 생물 다양성을 높이는 경로를 지나면서 우리는 더 나은 미래를 만들어갈 수 있다. (p.326-327)
읽는 생활 / 임진아 / 위즈덤하우스
방과 후, 친구를 데리고 기세등등하게 우표 가게로 달려가 벨을 누르고 그 앞에 앉아 주인아주머니를 기다린다. 이 기다림 또한 수집의 과정 중 하나였다. 몇 분 뒤, 방금까지 뭘 했는지 대략 짐작할 수 있는 상태로 등장하는 주인아주머니는 늘 나를 환영하며 맞아준다. 손에 묻은 물기를 닦다 말고, 먹던 밥을 씹다 말고, 낮잠을 자다 말고 내려오는 모습을 봐도 서로 아무렇지 않던 시절이다. 그렇게 우표 가게에 들어가면 언제나 내 대사는 정해져 있다.
“새로 나온 거 뭐 있어요?”
오빠가 말하는 걸 보고 따라 한 것뿐이지만 나는 이 대사가 꽤 멋지다고 생각했다. 무언가에 익숙하기까지는 시간을 필요로 하고 그렇기에 멋지니까. 헤매지 않고 할 말이 정해져 있다는 건 진짜 대단한 일이니까. 혼자서 쌓아온 시간이 살짝 엿보이는 기가 막힌 순간이니까.
온통 유리로 된 가구로 채워져 있던 우표 가게는 카운터 또한 유리 진열대를 썼다. 어린아이들이 손바닥을 대고 눕듯이 우표를 구경해도, 몇십 장의 우표를 오래도록 구경만 해도 웃음으로 허용되던 곳이었다. 심지어 어린이들은 그 누구보다도 환영받는 손님이었다. 우표를 한 장 한 장 즐겁게 모으며 가게를 정기적으로 찾는 손님은 어린이들이었다. 우표만 그득하게 채워져 있는 공간이라는 게 얼마나 특별한 곳인지를 당시의 나는 몰랐다. 그 우표들 사이에서 내 것이 될 우표를 골라 작은 봉투에 담아 나오는 일이 얼마나 무구한 것인지도. 오늘의 추천 우표와 새로 나온 우표를 꺼내주면 하나하나 살펴보는 시선이 얼마나 당당했는지도. (p.47-48)
누군가와 함께 사는 일이 아주 긴 소설을 두고두고 읽는 일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소설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종이를 넘고 넘어 나와 다른 선택을 하고, 나와 다른 시선으로 세상을 본다. 그럴 땐 그저 그렇구나 하면서, 또 다른 세계를 나에게 살짝 더해본다. 그런데 어떤 소설은 읽다가 멈추기도 한다. 도무지 나랑 맞지 않는 행동을 할 때, 이해되지 않는 말을 내뱉을 때, 어제와 다른 행동을 할 때. 소설의 한 대목을 읽고 나서야 내 삶의 한 부분이 제대로 조명되는 때가 있기도 하지만, 나를 기준으로 삼고 책을 읽다 보면 소설의 이야기에 집중하지 못하기도 한다.
어느 날, 도무지 좁혀지지 않는 문제로 동거인과 싸울 때 고개를 숙이고 생각했다. 나는 이 소설을, 이 사람의 더 깊은 페이지를 끝까지 읽어나갈 수 있을까. 정적이 흐르는 가운데 번뜩하고 날카로운 대답이 나에게서 출발해 나에게로 도착했다. 나는 이 소설을 끝까지 읽어보고 싶다. 그것이 오늘의 싸움보다 중요하다고. (p.87)
매일 쓰레기와 싸우는 기분이다. 기왕이면 쓰레기를 덜 만들기 위해, 버릴 거라면 제대로 버리기 위해, 내 손에서 가뿐한 모습으로 떠날 수 있도록 분투하고 있다. 그렇다 보니 편의점에서 음료 하나를 고르더라도 곧 쓰레기가 될 모습이 떠오르고, 빵을 먹다가 남기고 싶어질 때면 음식물 쓰레기 봉지를 여는 내 모습이 그려진다. 쓰레기를 이렇게나 신경 쓰고 살지만 쓰레기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생겨난다. 쓰레기는 끝이 아니다. 잘 버려질 때에 비로소 새로운 과정이 시작된다. 그런 믿음이 있기에 쓰레기를 위해 시간과 마음을 쏟을 수 있다. 결코 사랑할 수는 없지만, 끝내 포기할 수 없는 그런 것. (p.136-137)
종일 흐르는 대로 지내다 보니 당연히 밤이 된 것 같지만, 침대 위에 눕듯이 앉아 있는 나는 알고 있다. 마침내 무사히 맞이한 밤이다. 아무렇지 않은 밤 같지만 사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겨우 무사한 밤이다. 이 안전한 밤의 시간은 꼭 딱딱한 씨앗 같아서 나는 그 안에 들어가기 위해 찐득한 열매 속을 하루 종일 뚫어야만 한다. 겨우 씨앗 안에 도착하면 비로소 오늘의 밤이 되고, 아침이 되면 다시 열매 밖에 있는 것만 같다. 일상의 소름은 모두가 조용한 밤, 나의 머리 위에 찾아온다. 저릿한 기운이 느껴지걸랑 공포와 곁을 나누고, 동시에 안도가 잠자리에 깃든다.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세상이다. 저릿한 기운이 때때로 자리하는 이유는 지나온 경험 속에 분명히 존재한다. 내가 무사하지 못할 뻔한 이유는 여러 가지였다. 그날 거기에 있어서, 흰옷을 입어서, 힘이 모자라서, 창문을 열어둬서, 모처럼 신이 나서, 괜히 지하철 한 대를 그냥 보내서, 내일이 아닌 오늘 외출해서, 혹은 집에만 있어서였다. 단지 운이 나빴던 건지도 모른다. 태어나 보니 여자였고, 그저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해서였다. (p.148-149)
같은 일을 하더라도 사소한 부분에 만족하고, 만족하기 위해 사소한 부분을 신경 쓰는 사람들이 분명 있다. 책을 만드는 세상에서 여전히 쓰임이 있는 사람으로 일하면서, 그런 사소한 부분이 얼마나 다르고 다양한지를 끝없이 배운다. 책 한 권을 만들더라도 책에 잘 어울릴 특정 종이를 쓰고 싶어서 깊게 고심하는 사람을, 후가공 하나 때문에 동료들을 거듭 설득하는 사람을, 교정지를 집에 가져가서 몇 번이나 읽어보는 사람을, 인쇄 감리를 보다가 종이를 들고 밖으로 나가 자연 빛에 색을 확인하는 사람을, 마냥 일을 좋아하는 사람으로만 볼 수 있을까. 일에 대한 책임감과 흥미, 그리고 나를 위한 만족과 모처럼의 열중이 더해진, 일을 하는 사람들의 반짝이는 순간들. 이 순간들이 모여 좋은 책, 오래 기억될 책이 만들어진다. 적어도 책을 만든 사람에게만큼은 좋은 책으로 남는다. (p.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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