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이스 (논)픽션 / 정지돈 / 마티
물론, 어디까지나 이론적인 이야기일 뿐이다. 나는 화이트큐브의 추종자가 된 이후에도 블랙박스, 그러니까 영화관에 자주 갔다. 내가 극장을 이용하는 방식은 다음과 같다. 평일 심야 시간으로 티켓을 구매한다. 팝콘은 사지 않지만 콜라는 꼭 산다. 인체공학적으로 만들어진 멀티플렉스의 푹신한 좌석에 앉아 콜라를 한 모금 마시면 평온함에서 비롯한 한숨이 나온다. 영화가 시작되면 얼마 지나지 않아 잠이 든다… 잠에서 깬 후에는 화장실에 다녀온다. 이쯤이면 러닝타임이 한 시간 정도 남는다. 중간중간에 핸드폰을 보며 영화가 끝나길 기다린다. 영화가 끝나면 텅 빈 거리를 천천히 거닐며 집으로 돌아온다. 포털에서 영화에 대한 리뷰를 찾아보기도 한다. 이 영화 안 본 눈 삽니다(별 하나). 쯧쯧… 그러게 뭐하러 봤어(혼자 중얼거리는 나). 나의 영화 감상기를 들은 친구 역시 같은 말을 한다. 쯧쯧… 그러게 뭐하러 봤어. 나는 대답한다. 콜라 마시려고. 콜라는 집에서 마셔도 되잖아? 음… 좀 걷고 싶어서. 그냥 산책하면 되잖아. 음… 잠깐 자고 싶어서? 그것도 집에서… 잠깐만, 너 대체 극장은 왜 가는 거야?
사실 나는 공항이나 기차역이라면 모두 질색하는 종류의 사람이다. 반면 철학자 로지 브라이도티는 그 반대다.나는 여행과 관련된 경유 공간에 특별한 애정이 있다.
여행을 좋아하거나 출장이 잦은 지인 중에도 경유 공간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 공항과 기차역, 버스 터미널 같은 곳에는 묘한 낭만이 있다. 다양한 인종과 젠더의 사람이 오가는 곳. 움직임을 위해 존재하는 공간. 기대와 설렘, 포기와 낙담, 수많은 감정과 신체, 경험이 교차하는 곳.
기차역, 공항 대기실, 트램, 셔틀버스, 체크인 구역. 모든 연결 고리가 차단되는 중간 영역에서 시간은 일종의 연속적인 현재로 연장된다. 무소속의 오아시스, 분리의 공간. 임자 없는 땅.
그러나 나는 방금 열거한 이유들 때문에 경유 공간이 싫고 경유 공간이 너무 싫은 나머지 여행이 싫을 정도다. 특히 공항에서의 경험은 나를 불쾌하게 만든다. 게이트를 통과할 때마다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신분증 사진과 대조하고 틈만 나면 신발을 벗기고 가방을 뒤지고 좁은 공간에 신체를 쑤셔 넣는다. 공항의 모든 절차가 내가 누구인지, 어떤 위치에 서 있는지 (스스로) 확인하도록 종용한다. 공항은 가장 노골적인 계급 사회의 공간이다. 다른 곳에서는 격차가 적거나 은밀하게 작동하는 계급이 공항에서는 천연덕스러울 정도로 적나라하게 얼굴을 드러낸다. 물론 당신이 퍼스트 클래스나 미국 국적의 백인이라면 문제는 다르다. 당신은 세계 모든 곳을 앞마당처럼 거닐며 먹고 기도하고 사랑할 수 있다(여담이지만 2007년 출간되어 지금까지 1000만 부 이상 팔린 베스트셀러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는 자아 찾기에 대한 에세이가 아니라 모빌리티 권력에 대한 이야기다). “지배자들은 그들이 특정한 세계 안에 위치 지어져 있다는 것을 지각하지 못한다.”
이스탄불의 출근 시간 교통문제를 민족지적으로 연구한 베르나 야지지는 교통을 “도시 불평등이 일어나는 사회적 장소”라고 분석했다. 바다를 사이에 두고 아시아와 유럽에 걸쳐 있는 이스탄불은 교통체증으로 악명 높다. 매일 아침 100만 명이 넘는 통근자들이 두 대륙을 잇는 다리를 이용하는데 계층에 따라 이동 수단이 상이하다. 일용직은 트럭 짐칸에 실려 이동했고 직장인은 만원 버스를 탔으며 부유한 사람들은 자차를 이용했다. 흥미로운 건 계급의 극단에 있는 사람들이었다. 최상류층은 교통체증을 피해 헬리콥터로 이동하거나 구급차-택시로 도시를 가로질렀다. 구급차-택시는 최상류층이 소유한 개인 구급차를 일컫는 말이다. 한편 빈민층은 그냥 걸어다녔다. 도시의 치안이나 날씨 등 궂은 환경에도 불구하고 걷는 것 말고는 다른 대안이 없었다. 한쪽은 도시 교통을 면제받았고 다른 한쪽은 배제당했다. 그러니까 요약하면 이동(수단)은 정체성이자 권력이며 이데올로기다.
일그러진 몸 / 캐런 메싱 / 나름북스
이 일화가 내게 가르쳐준 것이 있다. 우리 대부분이 젠더 차별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걸 극도로 두려워한다는 점이다. 통신 기술자들처럼 그 교수 역시 자신이 일터에서 차별을 겪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왜냐하면 차별을 인정하는 순간 공공연하고 “정치적인” 문제가 되어, 묵묵히 능력을 발휘했던 자신의 평범한 기술로 대처하기에 너무 거대해지기 때문이었다. 비전통적인 직업에 접근하기 위해 이 모든 여성이 많은 장애물을 하나씩 극복했고, 인내심과 집요함이 효과가 있기도 했다. 여성들은 모욕과 적대를 겪었지만, 이를 악물고 끝까지 버텨냈다. 통신 기술자들의 일은 급여가 괜찮은 일자리이고, 과학자들은 연구비를 받고 부러움을 살만한 대학에서의 지위를 갖고 있었다. 계속하지 않을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하지만 안타깝게도, 아프거나 직장을 그만둔 수많은 여성에게서 볼 수 있듯이 하나의 싸움은 여기에서 그친다.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야만 그 사람들이 계속 남아있을 수 있다. 일터의 사회적 관계 면에서의 변화뿐만 아니라 직장 훈련, 작업 도구, 설비에서의 변화, 또 기록 보관, 사고 예방, 노동조합 활동에서도 변화가 필요하다. (p.47)
많은 청소노동자는 처음부터 힘겹게 살았다. 그들 대부분은 그저 제시간에 일터에 오기 위해 매일 분투해야 하는, 불어가 능숙하지 않은 이민자들이었다. 이들 중 일부는 인종 차별적 욕설 중에서도 가장 끔찍한 것을 참아야만 했던 유색인들이었다. 그들이 웃으려고 노력하는 걸 지켜보기가 너무 가슴 아파서 우리는 “관찰자”의 자세를 버리고 끼어들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근무 스케줄을 정하는 문제는 그들의 삶을 더욱 힘들게 만들었다. 한 주는 양육권이 있고 다음 한 주는 양육권이 없는 어떤 이혼한 남성들은 육아 문제에 대처해야 했다. 하지만 우리가 본 가장 극단적인 스케줄 문제는 여성 노동자들과 관련되어 있었다. 야간 근무조는 놀랍게도 엄마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왜냐하면, 이 시간대는 선택 경쟁이 거의 없고 밤에 일하면 낮을 가족과 관련된 일에 “자유롭게” 쓸 수 있기 때문이다. 한 싱글맘이 들려준 근무일정, 작업팀, 그리고 아들의 수많은 병원 예약 이야기는 우리를 울게 했다.“작년에는 암이나 다른 큰 병에라도 걸릴 것 같았어요. 너무 아프고, 죽을 것만 같았어요.” (청소노동자, 만성질환을 앓고 있는 아이를 둔 엄마)
멜라니는 이 연구를 하는 동안 우리의 이해에 매우 결정적이었던 중요한 관찰을 했다. 바로 일이 가정생활에 압박을 가하는 요인 중 근무일정이 유일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직업적인 삶과 개인의 삶은 여러 면에서 밀접하게 얽혀있다. 먼저 피로도 관리가 있었다. 일은 힘들었고 청소노동자들은 화나고 불편해졌다. 그들은 지치고 기분 나쁜 상태로 집에 들어가지 않도록, 그래서 가족들에게 퉁명스럽게 굴지 않도록 일터에서의 삶을 관리해야 했다. 그들은 휴식시간이 근무 시작이나 끝에 배치되는 걸 피하려고 휴식시간 결정에 영향을 끼치는 다른 서비스 담당자들에게 친절하게 굴어야 했다. 마찬가지로, 그들은 직장에서 서로 돕는 사회생활을 해나갈 필요가 있었다. 아이를 돌보는 문제나 집에 갑자기 일이 생겨 늦게 될 경우, 일을 대신해줄 사람이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팀 동료 및 다른 동료들에게 의지해 근무일정에 대한 정보와 팁을 얻기도 했다. 따라서 그들은 작업팀을 선택하고 그들과 관계를 형성하는 데 많은 힘을 쏟았다. (p.179-181)
나사(NASA)가 작은 사이즈의 우주복이 충분하지 않다는 이유로 여성 비행사를 배제했을 때, 이 사실은 대서특필되었다. 그러나 문제는 훨씬 더 일반적이다. 작업대, 훈련 기술 및 장비는 일반적으로 남성의 신체 능력, 치수, 힘에 알맞게 설계되었다. 그래서 중량물을 들어올리는 데 어려움을 겪는 여성들은 적절한 장비를 지급받지 못했거나 여성의 신체 형태, 크기, 무게중심에 알맞은 기술을 배울 수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잘못 들어올렸기 때문이라고 지적받을 수밖에 없었다. 업무는 남성 신체의 노력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짜였다. 이제 다양성으로부터 이익을 취할 수 있도록 조직적인 재편이 필요하다. 팀 단위의 업무 수행은 여성과 남성 모두의 허리에도 좋지만, (수행 업무가 매일 바뀌는 한 노동자에게 각 환자를 배정하기보다는) 여러 환자로 구성된 그룹을 안정적인 병원 노동자 팀에 할당하는 관행을 만들고, 더 규칙적인 업무 배치 방안을 창출해 팀워크를 촉진할 필요가 있다. (p.243-244)
스테파니 프렘지는 나와 캐서린 리펠과 함께 몬트리올의 의류공장에서 일하는 여성과 남성 이민 노동자를 연구해 박사학위를 받았다. 노동조합은 이민자라는 지위가 여성의 직업 건강에 영향이 있는지, 그렇다면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알고 싶어 했다. 노동자들과의 첫 회의에서 만난 지역 노동조합 대표는 아이티 출신 재봉틀 작업자였다. 그는 자신의 업무 관련 어깨 질환에 대해 어떻게 산업재해 보상을 요구해왔는지를 말해주었다. 자신의 증상, 직장에서의 어려움, 그리고 산업재해 보상 위원회를 상대로 고군분투한 이야기들이었다. 이 노동조합 대표는 자기 경험을 말하는 도중에 계속해서 “저는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게 아니에요”라고 말했다. “진짜로 아파요. 지금 거짓말하는 거 아니에요.” … “일을 그만둬야 할 정도였어요. 거짓말이 아니에요.” … “집에서 침대 정리하기도 힘들었어요. 거짓말 아니에요.” … 결국, 나는 당신이 진실을 말하고 있다는 걸 의심하지 않는다고, 왜 우리가 의심한다고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그는 자신의 이웃, 가족, 심지어 몇몇 다른 노동자들도 재봉틀을 돌리는 일이 통증을 유발할 수 있다는 생각을 잘 하지 못한다고 대답했다. 아주 쉬운 일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결국 스테파니는 연구 결과를 정리하고 나서야 왜 노동자들이 통증을 겪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들은 개수임금제로 일했는데, 이는 생산한 옷의 수량에 따라 임금이 정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고국의 가족들에게 보낼 돈이 절실한 이민자들은 비좁은 상태에서 불편한 자세로 반복 동작을 하며 정말 빠르게 일하고 있었다. 그들은 휴식시간에도 일했고, 교대조가 끝난 이후에도 남아서 계속 일했다. 그러고 나서 저녁 식사를 만들고 아이들을 돌보기 위해 집에 꼭 갈 필요가 없는 사람 중 대다수는 저녁반 언어 수업을 들으러 가곤 했다. 쉴 틈 없이 과로하던 끝없는 날들은 상과염, 어깨건염, 손목터널증후군을 불러왔다. 하지만 그들의 일은 이웃과 가족, 심지어 자신들에게조차 위험하게 여겨지지 않았다.
미투 운동 전에 여성들이 성폭력을 신고했을 때 우리는 부정과 조롱, 무관심과 맞닥뜨렸다. 우리는 너무 많이 혹은 너무 늦게 불평했고, 불행을 자초했으며, 아무것도 아닌 일에 큰 소란을 피우고 있었고, 실제론 고통을 겪지 않은 사람으로 치부됐다. 직업성 통증을 호소하는 여성들도 비슷한 장애물에 부딪힌다. 우리의 통증은 하찮고, 그것은 우리가 너무 예민하거나, 너무 뚱뚱하거나, 너무 늙었기 때문에 생긴 것처럼 느끼게 한다. 우리가 올바른 자세로 일하지 않아서, 우리가 하던 집안일 때문에, 우리가 운동을 충분히 안 해서, 갱년기라서, 너무나 작고 사소한 것에 대해 불평했다는 것이다. (p.246-248)
여성 노동자들은 남성 노동자들보다 직업성 근골격계 질환을 더 많이 앓고, 이는 공장에서의 극심한 반복 작업처럼 수작업을 하는 여성들에서 특히 더 그렇다. 짧고 격렬하게 한 철 동안 게를 자르고 포장하는 해산물 가공 노동자들은 어깨와 팔에 심한 통증을 겪었는데, 이 통증은 고용량의 약물을 복용해야만 줄일 수 있었다. 작업장에서 바짓가랑이 두 쪽을 한 손으로 높게 치켜들고 재봉틀에 실을 끼워야 하는 재봉틀 작업자들에게는 결국 그쪽 어깨에 통증이 생겼다. 그러나 노동자들의 부상에 대한 산업재해 보상은 거부되었다. 왜냐하면 그들의 일이 눈에 띄게 위험하지 않기 때문이다. 3초당 1개씩의 비율로 소포를 들어올리고 분류하는 집배 노동자들이 상과염에 대한 산업재해 보상을 주장해 왔지만, 그들이 낸 청구 건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킬로그램이 채 안 되는 소포는 통증을 유발할 만큼 무겁지 않은 것으로 추정되었기 때문이다.
불편한 자세로 갇혀 있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만성적인 통증을 유발할 수 있다. 자리에 앉지 못하고 장시간 서서 일하는 접수원, 가게 점원, 혹은 바리스타는 허리나 하지에 통증이 생길 수 있다. 키보드 위로 머리를 숙여 작업하는 사무직 노동자는 만성 어깨 통증과 목 통증이 생길 수 있다(그리고 성희롱을 당하는 것은 목의 긴장을 유발해 통증 또한 악화시킬 수 있다).
만성 통증을 유발하는 반복적인 업무와 불편한 자세에 노출되는 것은 여성뿐만이 아니지만, 남성의 수작업은 대개 더 큰 힘을 발휘해야 하는, 분당 반복 횟수가 더 적은 작업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들의 위험은 관찰자에게 더 깊은 인상을 주고, 결국 더 명백하고 더 확실한 손상처럼 된다. 여성과 남성이 무거운 것 들기 같은 유사한 작업을 수행할 때, 그들 모두 많은 사고와 부상을 호소한다. 예를 들어, 환자를 들어올리고, 옮기고, 자세를 바꾸는 여성과 남성 노동자 모두는 높은 수준으로 인정되는 직업성 근골격계 질환을 가지고 있다. (p.248-249)
우리는 중독을 사랑해 / 도우리 / 한겨레출판
오늘의집 슬로건에 또 숨어 있는 뜻을 찾아보자. 내가 찾은 건 이거다. ‘누구나 (돈만 있으면) 예쁜 집에 살 수 있어. (좋은 주거 환경은 보장되지 않지만).’
인테리어는 주거(housing) 개념의 일부일 뿐이다. 그런데 그렇게 많은 방 이미지들에선 주거의 질에 대한 이야기는 지워져 있다. 아무리 좁은 원룸이어도 넓어 보이게, 로망대로 실현하는 노하우 수준에서만 이야기된다. 평수나 환기 시설이 최저 주거 기준에 미달하는 집이 넘치고, 성폭력 범죄에 대한 치안 비용을 여성 개인만 감당하는 문제 같은 건 러그나 포스터 뒤편에 그대로 가려져 있다. 가난은 더 이상 이전과 같은 방식으론 눈에 보이지 않게 됐다. 오늘의 집들은 모두 다른 시공간에 살고 있다. 그리고 그런 주거 현실은 비포 앤 애프터처럼 스펙터클하게 바뀔 수 없다. (p.83-84)
예전에 요양 보호사분들을 인터뷰한 적이 있다. 한 어르신을 간병하기 위해서 요즘 어르신들이 좋아하는 트로트를 리스트 업해뒀다가 어르신이 울적한 기색이면 한 곡 뽑아 분위기를 전환하고, 날씨·입맛·질병을 고려해 냉장고 재료를 파악해가며 요리를 해내고, 몸의 상태를 파악해 마사지를 하고, 어르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미리 다 경청해둔 다음에 추억을 회상하게 하거나 치매의 경과를 알아보기 위해 중간중간 질문을 던지고, 보호자와의 관계까지도 고려한다고들 하셨다. 그 전문성에 압도되었고 그럼에도 너무 적은 보수와 열악한 노동 처우에 망연했었다. 이런 돌봄노동의 영역에서는, 아무리 일잘러여도 일잘러로 잘 드러나지 않는다. 미국 인류학자 데이비드 그레이버가 《불쉿 잡》에서 “우리 사회에는 어떤 직업이 다른 사람들을 이롭게 하는 것이 확실할수록 정당한 보수를 받을 확률은 더 낮아진다는 일반 원칙이 있는 것 같다”라고 지적했듯이, 돌봄노동을 잘하는 데 관심을 기울일수록 사회적·경제적 인정을 받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누군가를 살리고 살아가게 하기 위해서는 그를 총체적으로 배려하고 감정을 싣고 몸을 쓰며 관계를 맺는 돌봄노동이 필수다. 20년 후 즈음엔 우리나라에선 3명 중 1명이 노인이 되고, 그로부터 10년 뒤엔 세계인의 절반 이상이 생존 불가능해질 근미래를 앞둔 우리에겐 더욱 그렇다. (p.105-106)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라는 독일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의 명명은 유명하다. 언어란 단지 뜻을 전달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세계를 보고 겪는 방식 자체이기도 하다는 통찰이다. 그런 존재의 집이 점점 홈오피스로 변하고, 광고 전단지들이 쌓이고 있다. 대화의 프롤레타리아 처지다. 물론 메시지를 전하는 수단은 역사적으로 계속 발명돼왔다. 먼 옛적의 봉화나 전보부터 우편, 전화, 이메일, 문자, 카톡 같은 메신저 플랫폼까지. 하지만 카톡엔 과거의 메신저들과 질적으로 다른 포인트가 있다. 메시지 자체가 돈이라는 것. 카톡이 없어진다면 실직할 노동자들, 매출이 반토막 날 기업들이 널려 있다. 카톡을 통해 실시간으로 연결돼 노동을 지시받고 노동하는 사람들, 카톡을 통해 광고하고 소비를 추천하는 기업들 말이다. 최근에 카톡은 기존에 주고받은 메시지, 사진, 파일, 링크 등을 무제한으로 저장할 수 있는 기능을 구독 서비스로 전환했다. 넷플릭스 CEO 리드 헤이스팅스가 “우리는 수면과 경쟁하고 있다”라고 했듯, 카톡의 최대 경쟁자는 진정한 대화 시간이 아닐까? 역사상 우리가 동시에 이렇게 많은 사람과 문어발식으로 연결돼 대화하게 된 적은 없었다. 콘센트 과열 상태에서 대화의 진정성 농도가 짙어질수록 거의 폭발하거나 퓨즈가 끊어지기 직전이 될 것이다. 그래서 애인과 통화할 때 예전에는 “지금 누구랑 있어?”라고 물었다면, 요즘에는 “지금 스피커폰이야?(설마 게임하거나 딴짓하는 건 아니지?)”라고 추궁하게 됐다.
더 심각한 건 카톡이 경제뿐 아니라 권력과 권리의 장소가 되었다는 점이다. 하루라도 카톡 앱을 쓰지 않으면 학교, 직장에서 정상적인 사회생활이 불가능하다. 거의 전기나 수도에 맞먹는 필수재다. 그런데 아직도 카카오가 공기업이 아니라니. 카톡 감옥에 갇혀 사이버불링을 당해도 차단하거나 단지 다른 앱을 쓰는 방식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이유다.
콜포비아나 톡포비아를 호소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젊은 세대로 지목된다. 그것은 단지 면대면 대화를 꺼리거나 사회화가 덜 된 미숙한 탓이라기보다, 메신저 플랫폼을 통해 초연결 노동과 갑질, 폭력에 더 쉽게 노출되는 청년의 현실과도 이어진 문제다. (p.145-147)
정체성은 같은 정체성끼리는 묶고, 다른 정체성과 구별짓는다. 그래서 힙한 이미지는 정체성일 뿐 아니라 미학적 신분증이기도 하다. 힙이 터지는 카페의 입장권은 단지 연어덮밥 가격에 맞먹는 손톱만 한 까눌레 하나를 사 먹을 돈(그것도 2시간 이용 시간제한을 감안하고)만 있어서는 안 된다. 나 자체도 그 카페의 소품처럼 인스타그래머블하게 차려입어야 한다. 연구자 심선희가 말한 ‘심미 노동’을 해줘야 하는 것이다. 심미 노동은 노동자의 신체를 상업적으로 활용하는 노동으로 패션 매장, 바(bar), 카페 같은 ‘스타일 시장’에서 요구된다. 노동자는 기업·브랜드를 홍보하는 ‘걸어다니는 광고물’로 가정된다. ‘말쑥한 외모, 잘 갖춰진 외양, 능숙한 언변’ 등이 자격조건이 된다는 것이다. 이 노동을 수행하기는커녕 울고, 보채고, 값비싼 소품을 깨트릴 수 있는 어린이들은 ‘노 키즈 존’으로 입장을 제한당한다(단, 유럽 어린이라면 괜찮다).
물론 이미지 정체성과 실제 그 사람의 고유한 인격은 다른 문제다. 하지만 그건 자연스럽게 드는 게 아니라, 굳이 부러 한번 떠올려주어야 하는 생각이다. (p.207-2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