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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의 고수 / 신주영 / 솔

 

 아무리 최선을 다해도 과거에 있었던 사실관계를 100퍼센트 정확하게 복기할 수 없는데, 사실관계는 1퍼센트만 다르게 확정되어도 판결은 180도 달라질 수 있다. 법률은 아 다르고 어 다른데 법관의 의지에 따라 해석에 다소 차이가 날 수 있고 그 작은 차이는 한 개인에게는 하늘과 땅만큼 다른 결과로 돌아온다. 그보다 더 잘할 수 없이 법률에 통달하고 성실한 변호사, 철두철미 원칙에 따르는 검사, 균형 감각이 뛰어난 판사가 달라붙어도 오류가 개입할 여지는 늘 있다. 더구나 분쟁의 해결 과정이 한 개인의 읍소와 함께 사법 시스템으로 옮겨가는 순간부터 무수히 맞닥뜨리게 되는 해명의 요구와 반복되는 설명, 그 사이사이 개입되는 분노와 억울함의 재생산. 절차가 끝난 뒤에는 아무리 정의에 가까운 판결을 얻었다 해도 패소자는 말할 것도 없고 승소자도 잘해야 본전인 상태에 서게 되는 일이 허다하다.
 재판을 겪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동의할 것이다.
 “그 일은 애당초 시작되지 말았어야 했다.”
 누구나 송사에 휘말리게 되면 그 송사의 단초가 되었던 그날 그 순간의 일을 후회할 것이다. 내가 그날 거기에 가지 않았더라면, 그가 말할 때 한 번쯤 더 참아주었더라면, 차라리 돈을 주고 말걸 하고 말이다. (p.24-25)

 

 “법원이 지나치게 온정주의적으로 흐르는 것도 문제지만, 그 피고인의 경우 네다섯 살 무렵 서울로 이사 오다가 그만 가족을 잃어버렸어요. 그래서 오로지 배고픔을 면하기 위해서 하루하루를 살았어요. 역전에서 구걸로 연명하다가 소매치기 일당들에게 붙잡혀 매 맞아가면서 소매치기 기술을 배웠어요. 그다음부터는 교도소를 들락날락하게 되었는데, 전국 마약사범들이 집결해 있는 공주교도소에 이송된 후 마약사범과 친구가 되어 그만 마약까지 하게 되었죠. 그리고 범죄를 저지를 때마다 한 번의 집행유예도 없이 계속 실형만을 선고받았어요. 그 사람의 인생에는 가족의 보살핌이나 용서라는 것이 없었던 거예요.”
 “…….”
 “저는 그동안 아주 다이내믹한 경험을 많이 했어요. 그리고 나 자신에 대해서도 과연 나라고 해서 그렇게 도덕적이고 선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지 고민하게 됐어요. 저는 인간은 모두 죄인이라는 것이 맞는 것 같아요. 과연 내가 피고인의 처지였던들 무엇이 크게 달랐을까 하는 것이 저의 기본 생각이었어요.” (p.59)

 

 “무죄판결 받은 사람들로 책 한 권 만들 수 있을 정도라면 대단하신데, 무슨 비결이라도?”
 “글쎄, 내 목표는 변론요지서를 무죄판결문처럼 쓰는 거야. 판사가 내가 낸 변론요지서를 그대로 인용하면 바로 무죄판결문이 되도록 말이야. 판사는 처음부터 끝까지 객관적인 입장을 계속 유지해야 하고 그것이 어렵지 않은 반면, 변호사는 의뢰인의 편에 치우치거나 주관적이기 쉽지. 그래서 주관적으로 치우치려는 자신의 관점을 계속 객관적으로 보려고 노력하는 것이 좋은 변호사가 될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인 것 같아.”
 “그런 점에서는 판사 출신 변호사들이 좋은 변호사가 되기 유리하겠군요.”
 “꼭 그렇지는 않아. 판결문을 써보지 않았더라도 판결문을 가지고 연구하면 되지. 무죄판결문을 보면서 판사들이 쓰는 용어, 논리 구조, 글투 같은 것을 따라 연습해보는 거야. 누군가를 설득하려면 그 사람의 언어로 이야기하는 것이 최상의 방법 아니겠어? 마치 영어를 하는 사람에게 영어로 이야기하고, 어린아이들에게는 아이들의 용어로 야단을 쳐야 하는 것처럼 말이야. 판사도 사람이기 때문에 자기에게 익숙한 언어로 말하는 사람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게 될 수밖에 없어.” (p.85-86)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그리고 변호사 생활을 하면서, 내 삶이 관념 덩어리가 아니라 살과 핏덩이로 이루어져 있으며, 평면이 아니라 입체라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아이가 삶에 들어오면 흑백 텔레비전이 컬러 텔레비전으로 변한다고 표현하지 않던가.
 변호사는 판례나 실무 제요는 뒤져도 법철학 책은 더 이상 뒤지지 않는다. 학자의 이론보다는 의뢰인의 하소연에 더 많이 귀를 기울이게 된다. 삶은 추상적인 철학이나 이론과는 결별하고 사람들 사이에서 부대끼게 되며 그것이 더 익숙하고 자연스러운 일이 된다. 운이 좋으면 여기에서 자기만의 철학을 연꽃처럼 건지기도 하고. 연역적인 삶이 귀납적인 삶으로 옮겨간다고나 할까. 배운 것을 적용하기 전에 일단 부딪치고 적응하면서 배워가는 것이다. (p.273-274)

 

 사실 판사는 변호사와 달리, 인성(人性)이 없다. 같은 ‘사’자 돌림이라도 의사는 ‘스승 사(師)’, 변호사는 ‘선비 사(士)’를 쓰지만, 판사는 ‘일 사(事)’자를 쓴다. 판사의 판단 기준은 법이지 자신의 도덕관이나 철학이 아니다.
 그럼에도 판사에게 도덕관이나 철학은 중요하다. 그것은 판사로 하여금 실정법이 자연법과 합치하는지를 고민하게 만들어서 더 합리적이고 사람을 위하는 법에 맞도록 개선하고자 하는 의지를 일으켜 주기 때문이다.
 판사야말로 살아 있어야 한다. 판사는 법을 제일 잘 알기 때문이다. 판사가 법을 고치지 않으면 국민이 고달파진다. 법이 삶의 장애가 된 국민의 비명이 쌓인 뒤에야 법이 고쳐지기 때문이다. (p.278-279)

 

 생각이나 관점이란 건 언제든지 바뀔 수 있고 또 바뀔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기 생각이나 관점이 곧 자기 자신이라도 되는 양, 생각이나 관점을 공격받으면 감정적으로 상처받고 방어적이 되면서 필사적으로 자기 생각을 관철시키려고 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대화나 토론이 결론 없는 전쟁이 되기 일쑤다. 법정 공방도 마찬가지고.
 그러나 생각이나 관점이란 각자의 입장에서 주관적으로 자리 잡는 것일 뿐 그 사람의 인격 자체가 아니기 때문에, 생각이 다르다고 해서 사람의 인격까지 의심하면서 서로 대립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대화와 토론을 통해 자신의 불완전한 관점을 보충할 수 있어야 하고 서로에게 하나의 진실을 추구해나가는 동반자 역할을 해주어야 하는 것이다. (p.295)

 

 

사회가 가둔 병 / 정신건강사회복지혁신연대 / 스리체어스

 

 정신 질환자는 누구인가? 연예인들이 방송에서 밝히는 공황 장애에서부터 우울, ADHD, 알코올 중독, 그리고 불치병으로 여겨지는 조현병까지, 정신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은 모두 정신 질환자다. 보건복지부 국립정신건강센터 정신건강연구소의 《2021년 정신건강실태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정신 질환 평생 유병률은 27.8퍼센트다. 전 국민 네 명 중 한 명은 평생 동안 한 번 이상 정신 질환을 앓고 있는 셈이다. 건강보호심사평가원의 《2019년 건강보험 통계연보》에 따르면, 정신 및 행동 장애로 병원을 찾는 환자는 335만 명이다. 암으로 병원을 찾는 환자 380만 명과 큰 차이가 없다. 더군다나 코로나19로 인해 국민들의 정신 건강이 전반적으로 나빠졌다. 국민 다섯 명 중 한 명에게서 우울 위험이 나타났으며, 자살을 생각하는 비율도 9.7퍼센트에서 최고 16.3퍼센트까지 높아졌다. 더 이상 정신 질환은 특정 소수만의 문제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신 질환에 대한 사회의 이해도는 매우 낮다. 몇몇은 여전히 귀신이 들렸다고 여겨 굿을 하거나 기도를 하는 등, 종교적 방법을 빌리려 한다. 정신 질환을 생각조차 못한 채 나약함과 게으름을 탓하며 적절한 치료시기를 놓치는 경우도 많다. 혹은 이상함을 느끼면서도 정신 질환자임을 스스로 인정하기 싫어 외면해 버리기도 한다. 정신 질환을 앓고 있어도 정신 건강 서비스를 이용하는 경우는 22퍼센트에 그친다. 정신적 어려움으로 고통을 호소하지만 적절한 도움을 받지 못한 채 고립되는 경우가 많다. (p.9-10)

 

 코로나19 대유행으로 정신 건강의 지표들이 더욱 나빠진 것은 비단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OECD 주요국에서 우울감과 불안 장애를 보이는 사람들이 세 배 이상 증가했다. 코로나19로 인한 감염과 사망에 대한 공포, 소득과 학업 중단으로 인한 우울과 불안, 일상생활 및 대인관계 제한으로 인한 고립은 정신 건강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정신 건강의 가장 큰 적신호라고 할 수 있는 자살률에 있어 한국은 지난 10년간 OECD 국가 중 압도적인 1위를 유지해 오고 있다. 2019년 기준 OECD 회원국의 평균 자살률은 인구 10만 명당 11.3명인데, 한국은 24.6명으로 두 배 이상 높은 수준이다. 2019년 한 해 동안 1만 3799명이 자살했다. 서울의 웬만한 동 하나가 사라질 수 있는 규모다. 하루 평균 37.8명, 한 시간 동안 1.6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운수 사고로 인한 사망자보다 세 배 이상 높은 수치다. 우리나라의 자살률 추이는 실업률 추이, 상대적 빈곤율의 증감률과 거의 일치한다. 자살을 한 개인의 비극이나 정신적 결함의 탓으로만 돌릴 수 없는 이유다. 자살은 폭넓은 접근이 필요한 사회적 문제다. (p.16-17)

 

 정신과 진단과 약물 치료가 가진 많은 한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만드는 권력은 강력하다. 정신과 의사는 환자의 정신에 대한 절대적 권위를 가지게 된다. 진단은 치료적 개입의 근거가 될 뿐 아니라, 장애 등록의 필수 요건이기도 하다. 게다가 사회적으로 나쁜 행위를 아픈 행위로 바꿔줌으로써 교도소에서 처벌받을 사람이 병원에서 치료받을 수 있도록 만들기도 한다. 문제는 정신 의학의 여전한 과학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미치는 영향력은 절대적이라는 데 있다. 정신과 의사가 내리는 조현병이나 양극성 기분 장애라는 진단은 일종의 사회적 선언이 되어 환자의 삶을 규정한다. 잠재적 정신 질환자에서 공식적 정신 질환자로 신분이 전환되는 것이다. (p.41-42)

 

 정신과 진단을 받고 나면, 치료는 전문가의 권위에 종속되고, 환자는 치료에 순응해야 한다. 외과 수술과 같이 환자의 수동성이 긍정적으로 작용하는 신체 질환과 달리 정신 질환은 환자의 역할이 중요하다. 증상을 인지하는 것도, 처방받은 약을 꾸준히 먹는 것도, 그 약이 효과가 있는지를 확인하는 것도 결국 환자의 역할이다. 모든 약이 그렇듯이 정신과 약물도 부작용이 따른다. 가볍게는 입 마름, 변비에서부터 하루 종일 졸리고 몸이 가라앉는 진정 작용, 성기능 장애, 그리고 틱 증상과 유사하게 얼굴 근육이 불수의적으로 움직이는 지연성 운동 장애 등 삶의 질을 떨어뜨리는 심각한 부작용도 있다. 치료를 위해 감내해야 하는 부작용이 당사자에게는 증상만큼 고통스러운 경우가 많다. 환자는 약을 먹어 증상이 나아진다고 해도, 부작용으로 인해 일상생활을 유지할 수 없어 결국 약을 끊게 된다. 따라서 자신에게 잘 맞는 약의 종류와 용량을 찾아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그를 위해서는 약에 대한 반응을 가장 정확하게 알고 있는 환자 당사자가 치료에 주체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또한 무조건적으로 약물을 강요하거나, 당연한 감정도 약으로 통제하는 것은 정신 질환자에게 또 다른 폭력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인지해야 한다. 하지만 정신과 치료에서 약물 치료는 절대적이다. (p.43-44)

 

 WHO는 정신 건강을 단순히 정신 질환이 없는 상태 이상임을 강조한다. 정신 건강은 ‘한 개인이 자신의 능력을 실현하고 일상적인 삶의 스트레스에 대처하고 생산적으로 일할 수 있으며, 자신이 속한 지역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안녕 상태’다. 정신 건강을 위해서는 개인 수준의 생물학적, 심리적 요인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한다. 빈곤, 교육 수준, 경제적 수준, 가족 관계, 학교나 직장 생활, 지역 사회 환경 등이 영향을 미친다. 소득 불평등 혹은 사회적 불평등이 심화할수록 정신 건강 악화에 영향을 미친다는 연구들이 있으며, 경기 침체에 따른 긴축과 복지 정책의 변화가 국민의 정신 건강 문제를 늘리고, 정신 건강 문제는 실직의 문제에 영향을 미치면서 불평등 확대를 가져왔다는 연구도 있다. 열악한 주거 환경이 정신 건강을 위협한다는 결과가 보고되기도 했으나, 아직까지 정신 건강을 현실의 구조적 문제와는 동떨어진 개인의 문제로만 바라보는 경우가 많다. 정신 질환의 원인을 한 개인의 생물학적 문제로만 치환하여 바라보고, 치료의 대상으로만 여기는 것을 ‘의료 모델(medical model)’이라고 칭한다. 정신 건강의 문제가 의료 모델 깔때기를 거치는 순간, 정신 질환을 둘러싼 다양한 사회적 요인들은 배제되고 오로지 개인의 생물학적 문제로만 귀결된다. (p.54-55)

 

 회복은 사람들과 의미 있는 사회적 관계를 다시 만드는 과정이다. 섬처럼 고립된 상태에서 회복은 일어날 수 없다. 회복의 여정은 사람들과 다시 연결되는 과정이다. 결국 회복 지원에서 가장 중요한 첫걸음은 정신 질환자들이 고립에서 벗어나 다시 사람들과 연결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이러한 관계 맺기에서 꼭 필요한 사람이 동료 지원가다. 동료 지원가는 정신 질환으로 인한 치료와 회복의 경험을 가진 당사자가 공통의 어려움을 겪고 있는 동료에게 상호 간의 지지를 제공하는 전문가다. 동료 지원가는 이미 상처를 입고 치유하는 과정을 겪었다. 이들은 유사한 고통을 겪는 정신 질환자에게 동료로 다가간다. 치유의 경험을 공유하는, 상처 입은 치유가라고 표현할 수 있다.
 오랜 시간 우리 사회는 정신 질환을 감추거나 고치거나 교정되어야 할 상태로만 바라봤다. 정신 질환의 경험이 다른 사람을 돕는 치유의 원천이 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정신 질환을 가지고 잘 살아가는 데 최고의 전문가는 이미 그렇게 살아본 사람이다. 같은 어려움을 가진 사람들을 돕는 동료 지원가는 증상, 치료, 회복이라는 삶의 과정에서 경험의 전문가가 된다. 미국 등 서구에서는 이미 2000년대 이후 동료 지원가 전문 자격 과정을 만들고, 정신 의료 기관 및 지역 사회 기관에서 이들을 정식으로 고용한다. 우리나라도 2010년 이후 일부 정신 건강 기관에서 시작하여, 2021년에는 국립정신건강센터에서 표준화된 동료 지원가 양성 과정을 개발했다. 훈련받은 동료 지원가가 정신 건강 기관에서 실제로 역할을 할 수 있는 제도화의 첫걸음을 뗀 셈이다. (p.68-69)

 

 

매일 같은 밥을 먹는 사람들 / 권기석 등 / 북콤마

 

 배가 고파 먹을 것을 훔치는 사람도 있느냐는 질문에 오창익 국장은 단호하게 “없어요”라고 답했다. 한국 사회에 굶어 죽는 사람은 이제 없다는 것이었다. 인권 전문가마저 고전적 의미의 아사는 사라졌다고 보고 있었다. 오창익 국장은 다만 ‘밥은 먹지만 피자는 못 먹는다’는 말을 했다. ‘밥은 먹지만 치킨은 못 먹는다’는 말도 했다. 굶지는 않지만 먹고 싶은 걸 먹지 못하는 사람은 여전히 많다는 뜻이었다. 그러면서 “굶지 않는다고 인간으로서 존엄하냐는 건 다른 질문”이라고 말했다. (p.13)

 

 돈에 대해 승수씨는 목소리를 낼 줄 안다. 뉴스와 유튜브를 본 덕분이다. “우리나라 수급자 제도를 보고 복지국가가 다 됐다고 하는데, 생계급여와 주거급여를 전체적으로 한 50퍼센트 정도 올리면 좋겠어요. 한 친구가 다치면서 기초생활수급자가 돼 돈을 받는데 그 얘기를 하더라고요. 50만 원에서 75만 원으로 올려주면 숨통이 좀 트일 것 같다고. 지금 수급비는 정말 주는 것도 안 주는 것도 아닌 수준이라고요. 국회의원 연봉이 한 1억 원 되잖아요. 우리나라 기초생활수급자와 차상위계층이 300만 명 정도 되거든요. 수급비를 전체적으로 50퍼센트 올리면 국가 예산이 좀 들겠지만 대한민국이 진짜 선진국이 되려면 그렇게 해야 하지 않나 생각해요.”
 대한민국 일인당 국민소득이 3만 달러를 넘지 않던 2018년 말 기준 기초생활보장제도 수급자는 모두 174만 3690명이었다. 생계가 곤란한 저소득층에게 생계·의료·주거·교육 문제를 해결할 돈을 주거나 현물을 지원하는 제도다. 2년이 흐른 2020년 말 수급자 수는 213만 4186명으로 늘었다. UN 산하에 있는 국제연합 무역개발협의회(UNCTAD)는 다음 해 7월 대한민국에 선진국 지위를 부여했다. 중진국에서 선진국으로 넘어간 대한민국에선 수급자가 늘고 있다. 2010년 155만 명에서 2014년 132만 명까지 줄었다가 2015년 164만 명으로 급증한 뒤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p.96-97)

 

 돈이 주어진다면 저소득층은 좀 더 나은 식사를 할 수 있을까. 만약 나라에서 지원금을 준다고 하면 식비에 쓰는 돈을 늘리겠느냐는 질문을 건넸을 때 세 자녀를 키우며 투병 생활을 하는 이현진 씨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병원비를 마련하기 위해 적금을 들고 싶다고 했다. 당뇨 합병증으로 왼쪽 다리에 마비가 온 이승수 씨도 밥보다 치료비를 골랐다.
 “얼마 전 병원에 가니까 의사가 갑상선 초음파 검사를 해보자고 하더라고요. 목이 안 좋은 거 같다고. 근데 비급여라는 거야. 20만 원. 내가 지금 생계급여와 주거급여로 받는 돈이 총 85만 원인데 20만 원이면 상당히 큰 비중이란 말이에요. 그래서 생각해보겠다고 하고 일단 나왔어요. 돈이 더 있으면 이것부터 해봐야죠.”
 열악한 주거 환경은 식비보다 더 시급한 문제다. 서울 월곡동 반지하방에 사는 일흔네 살 이원이 할머니는 월 60만 원 수입 중 30만 원을 월세로 낸다. 반지하방은 점점 낡아가지만 서울에서 월세 30만 원으로 구할 수 있는 방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돈이 있으면 다른 것보다 방세에 보태고 싶어. 방세가 너무 비싸니까. 방세 도움을 주면 좋겠다 싶어.” (p.117)

 

 사진이 보도에서 얼마나 큰 역할을 할 수 있는지 깊이 각인된 보도가 있다. 미국 콜로라도주의 지역지인 덴버 포스트가 2003년 보도한 ‘계급의 배신’(Betrayal in the Ranks)이다. 이 보도는 미국 군부대에서 폭력과 성폭력을 당한 여성들의 이야기다. 피해자들은 폭력을 당한 뒤 이를 고발했지만 제대로 된 보호 조치를 받지 못했다고 털어놨다. 가해자 조사와 처벌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고 오히려 피해자가 처벌을 받은 사례가 많았다. 덴버 포스트는 9개월간 취재하면서 60명이 넘는 여성을 만나 군부대 성폭력이 어떻게 처리되고 있는지를 상세히 보도했다.
 기사의 압권은 피해자들이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 신문 1면이었다. 기사 첫 회, 덴버 포스트는 피해자 16명의 사진을 1면에 실었다. 성폭력 피해자가 자신을 드러내는 것은 미국에서도 쉽지 않은 일이다. 얼굴을 공개한 피해 여성들은 후임 여성들이 자신과 같은 일을 겪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여론은 군에 대해 거센 비판 반응을 보였고 결국 변화가 일어났다. 콜로라도주 상원 의원의 주도하에 미 의회가 조사를 요구했다. 미 국방부는 이를 받아들여 군 내 성폭력 실태와 처리 과정에 대한 조사를 실시했다.
 변화를 끌어낸 핵심 요인은 덴버 포스트 기자들의 방대한 취재와 인터뷰일 것이다. 하지만 피해자의 모습을 공개한 사진도 기사의 파급력에 힘을 더했다고 생각한다. 독자들은 신문 1면에 공개된 피해자 모습에 문제의 심각성을 더 크게 느꼈을 것이다. (p.122-123)

 

 작은 스마트폰 화면 속에서 우리는 부자와 빈자의 풍경을 자유롭고 안락하게 본다. 유튜브 알고리즘은 노량진 컵밥이 가난한 공시생의 유일한 하루 식사라는 것을 4분짜리 영상으로 일깨워 준다. 돈이 없는 대학생이나 사회 초년생을 위한 하루 세끼 1000원 식단은 조회수가 꽤 높다. 한 유튜버는 ‘라면 끓이는 팁’ ‘밥 말아 먹었을 때 맛있는 라면 1위’ ‘오래 연구한 가성비 식단’을 설명했다. 라면에서 면만 먹고 다음 끼니를 위해 국물을 남길 경우 물을 먹으면 좀 든든할 것이라고 했다. “위 안에서 불어서 포만감이 들 거예요.” 그 유튜버는 남은 국물을 5시간 뒤 햇반에 말아 먹는 장면을 보여줬다. 댓글에는 “17세 여자 고딩이 명품 쇼핑하는 브이로그를 보다가 이 영상이 떴네요. 인생이란 뭘까”라는 문장이 달렸다.
 알고리즘은 가난을 극복하는 방법도 안내한다. ‘나도 모르게 가난해지는 습관들’ ‘가난할수록 살찌는 충격적인 이유’를 주의 깊게 보며 우리는 생활 습관을 점검하고 허리를 바로 세운다. 영상 속 빈곤은 악순환이자 그림자이고 상속이자 수렁이다. 가난한 남매가 식당에서 음식을 1인분만 시켰을 때 벌어지는 일도 유튜브는 보여준다. 초등학교 저학년 오빠와 여동생은 식당에 들어가 음식을 하나만 주문한다. 주인과 직원들은 웅성거리다 서비스로 여러 음식을 듬뿍 내어줬다. 오빠와 여동생은 자신들이 몰래카메라를 위한 아역 배우임을 밝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식당 주인과 웃으며 사진을 찍었다. ‘훈훈한 가난’은 조회수가 높고 악플이 없었다. (p.179-180)

 

 저소득층의 식사를 향해 다들 이렇게 먹지 않느냐고 하는 말에는 저소득층의 식사라면 이 정도 수준보다 못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함의가 담겨 있다. 밥은 생기 없고 푸석해야 한다. 떡과 빵에는 곰팡이가 피어 있고 식탁엔 고기나 생선 반찬 대신 풀때기만 있어야 한다. 그리고 외식 같은 배부른 소리를 하면 안 된다는 식의 경계선이 깔려 있다. 선의 기준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지만 그 선을 넘으면 안 된다는 점은 분명했다.
 어려운 형편의 아이들이 돈가스 집에서 밥을 먹는 모습을 본 누군가가 불쾌하다며 센터(복지관 등)에 항의했다는 에피소드가 인터넷에서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일반 분식집도 아니고 돈가스 집에서, 세금이 투입된 식권으로 아이들이 호의호식하는 것을 보며 기분이 잡쳤다는 민원인의 항변을 보고 많은 이가 엇갈린 평가를 내놨다. 대체로 어려운 집의 아이는 맛있는 음식도 먹어선 안 되냐며 민원인을 비판하는 의견이 많았다. 하지만 그 돈마저 아껴 쓰는 평범한 사람들이 많은데 시혜성 복지를 어디까지 세금 들여 해줘야 하냐는 반론도 적지 않았다.
 어느 주장이 옳은지와 별개로, 우리 사회에 가난한 이들에 대한 일종의 기준이 존재한다는 것은 부정하기 어렵다. 빈자는 기준을 넘어선 안 된다. 동정과 연민의 대상으로 그 역할에 머물러야 한다. 가난한 사람들은 자신보다 좋은 음식을 먹어선 안 되고 브랜드 제품을 써선 안 된다. 도움에 감사하며 약자의 포지션에 머물러야 한다. 그 기준을 넘어설 경우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사회 전반의 분위기와 개개인의 가치관에 따라 다르다. 빈곤한 식사를 바라보는 관점은 우리 사회가, 자기 자신이 어느 위치에 서 있는지를 나타내는 바로미터와 같다.
 식사 지원에 대한 시혜적인 관점은 수혜자들로 하여금 군말 없이 감사히 받아들여야 한다는 무언의 압박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불만이 있어도 말로 표현해선 안 된다. (p.221-2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