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t Read Code

 

홍보가 아니라 소통입니다 / 정혜승 / 창비

 

 포털의 기사는 언론에서 보내주는 순서대로 걸린다. 종이신문 마감 시간에 맞춰 기사를 온라인에 띄우는 것도 오랜 관행이다. 그러니 이건 포털에 대한 신뢰 문제다. 신뢰가 없으니 포털이 또 무슨 장난을 치는 건 아닌지 의구심을 가졌을 법하다. 좋은 기사 위주로 거는데 신문 문패가 무슨 상관이냐 싶지만, 그 균형에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논란을 피하기 위해 네이버는 통신사인 연합뉴스의 기사를 압도적으로 많이 걸기도 했다. 2016년 네이버 PC의 ‘많이 본 뉴스’에서 연합뉴스 기사가 54퍼센트를 차지했다는 분석이 있었다. 같은 시기 다음 PC의 ‘많이 본 뉴스’에서 연합뉴스 기사의 비율은 14.8퍼센트로, 네이버에 비해 약 4분의 1 수준인 것으로 나타났다. 포털이 계약을 맺고 기사를 사 와서 편집하는 언론사의 숫자가 100개를 훌쩍 넘는데 연합뉴스의 기사 노출이 절반을 넘는 건 괜찮은 것일까? (p.21-22)

 

 최근 포털은 알고리즘으로 ‘많이 본 뉴스’만 뽑아서 보여준다. 그런데 혐오를 자극하고 분노를 부르는 기사일수록 ‘많이 본 뉴스’에 자주 올라온다. 더 많이 보고, 더 많은 댓글을 다는 뉴스가 꼭 좋은 뉴스는 아니다. 네이버 뉴스의 경우, 비슷한 기사가 ‘많이 본 뉴스’ 10위권 중 절반을 넘어가는 일도 종종 나타난다. 알고리즘이 처리할 뿐, 인간 에디터의 세심한 관리가 없는 탓이다. 언론사는 뉴스를 점점 더 보지 않게 된 배경에 좋은 기사를 주목하지 않은 포털이 있다는 책임론을 꺼낸다. 하지만 포털이 없었다면 다 괜찮았을까? 좋은 기사를 쏟아내고 브랜드로 승부해서 디지털 유료 구독자를 끌어 모을 수 있었을까? 매체의 유료화 전략 부진에 포털 핑계를 대는 것은 아니었을까? 유료 구독을 목표로 했던 IT 전문 매체 ‘아웃스탠딩’이나 기업정보 매체 ‘더벨’은 아예 포털에 의존하지 않는 유통 전략으로 시작했다. 다른 나라의 사례를 보아도 마찬가지다. 제아무리 명망 높은 언론사라도 구글, 페이스북 등 플랫폼에만 의존하다가 흥망성쇠를 겪는 사례가 수도 없이 많다. 플랫폼의 시대에 언론사가 어떤 전략을 세워야 하는지는 더 깊은 고민을 필요로 한다.
 나는 다른 상상도 해본다. 포털이 미디어 플랫폼으로서 보다 적극적으로 강단 있게 미디어의 역할을 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몇몇 언론사와 정치권은 반발했겠지만, 이용자 만족도가 높아지는 품격 있는 미디어가 될 가능성은 없었을까. 포털과 언론사가 서로 책임을 회피하면서 달려온 끝에, 우리는 이제 더이상 뉴스를 보지 않는 시대에 당도했다. (p.40-41)

 

 이런 알고리즘에 대한 내부의 고민과 갈등이 바깥세상으로 터져나온 사건이 있었다. 유튜브에서 추천 프로그램 개발을 담당했던 구글 전 엔지니어 기욤 샤스로는 유튜브 추천 알고리즘이 이용자의 체류 시간을 늘리는 것을 목표로 하기 때문에 진실하거나 균형을 잡거나 건강한 정보를 추천하는 쪽으로 최적화되어 있지 않다고 폭로했다. 그는 2018년 2월 가디언과의 인터뷰에서 유튜브는 가짜뉴스를 억제하고 이용자에게 추천하는 동영상의 질과 다양성을 높이도록 알고리즘을 바꿀 수 있는데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고 털어놓았다. 특히 2016년 미국 대선을 앞둔 시점에는 도널드 트럼프를 검색하든 힐러리 클린턴을 검색하든 유튜브 추천 알고리즘은 친 트럼프 콘텐츠를 추천할 가능성이 높았다고 밝혔다. 가디언은 자체 조사를 통해 유튜브 추천 동영상 중 트럼프 선호 영상이 클린턴의 6배로 나타났다고 보도했다.
 기욤 샤스로는 또 자신의 트위터에 “구글의 알고리즘은 미국에서 가장 취약한 사람들에게 알렉스 존스의 동영상을 150억번 이상 추천했다”라고 밝히기도 했다. 알렉스 존스는 이민자와 무슬림, 트랜스젠더를 공격하며 폭력을 찬양하던 미국의 극우 유튜버다. 유튜브는 샤스로의 폭로 이후 그해 8월 애플, 페이스북과 함께 알렉스 존스의 콘텐츠를 차단하는 결정을 내렸다. (p.64-65)

 

 이준웅 서울대 교수는 언론의 중립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좀 길지만 인용해본다. “예를 들어, 조선일보의 독자가 거의 대부분의 한겨레 기사에 대해 편파적이라고 비난하며 한겨레 독자는 거의 대부분의 조선일보 기사가 편파적이라고 외면할 때, 두 독자 집단은 사실 편파를 결정하는 기준에 대해 합의하지 못한다. 그리고 이러한 조건에서 수행되는 중립성 및 편파성 논쟁은 흔히 악순환을 초래한다. 특정 사안에 대해 편파를 문제 삼는 비판 자체가 다시 편파성 시비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 특정 언론이 논쟁적인 사안에 대해 중립적이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나의 기사가 어떤 주관적 평가나 견해도 없이 무색무취하게 사실만 나열해야 하는 것을 의미하는가, 아니면 양시양비적 평가를 제시하는 것을 준칙으로 채택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혹은 한 지면에서 한 기사는 이 편을 들고 다른 기사는 다른 편을 드는 균형을 취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아니면 이번 사안에 대해서는 이 정파의 이해를 따르고 다른 사안에 대해서는 반대 정파의 이해를 따라야 한다는 것인가? 그리고 균형이 정량적 균형이 아니라 가치적인 것이라면, 가치의 가중치를 결정하는 기준은 또한 무엇인가? 결국 이러한 조절 및 재구성을 위한 준칙의 선택은 어떤 것을 채택하더라도 일시적이며 수단적일 뿐 결정적이지 않다. 그리고 종국적인 결과는 누구에게도 만족스럽지 않고 오히려 편파 논쟁을 가속시킨다.” (p.92-93)

 

 SNU팩트체크와 16개 국내 주요 언론사가 지난 19대 대선 기간 공동으로 실시한 후보 검증 보도 분석 결과, 177건 중 거의 50퍼센트에 가까운 88건이 가짜뉴스로 나타났다. 비중이 결코 낮지 않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대선 기간 4만 222건의 위법 게시물에 대해 삭제 요청을 했다. 네이버 밴드 1만 1,891건, 페이스북 8,384건, 트위터 7,936건 등 대부분이 소셜미디어를 통해 유통된 것이었다. 선거법 위반에 해당되는 게시물의 상당수는 근거 없는 비방이다.
 이처럼 가짜뉴스가 범람해도 대응은 간단하지 않다. 가짜뉴스가 선거에 출마한 후보자 관련 내용이라면, 국내법상 가장 강력하고 신속하게 처리할 수 있는 곳은 중앙선거관리위원회(선관위)다. 선관위는 공직선거법에 따라 언론사든, 1인 미디어든, 블로그나 카페든 후보자나 가족에 관한 허위사실에 대해서는 언제든 삭제 명령을 내릴 수 있다. 포털에 업로드된 가짜뉴스에 대한 규제도 그나마 간단하다. 한국은 인터넷 규제 선진국이라는 오명이 있을 정도로 게시물 삭제에 대한 강력한 법 절차가 있다. 블로그나 카페 등의 게시물은 당사자가 명예를 훼손당했다고 주장만 하면 영구 삭제되거나 30일간 임시조치로 숨김(blind) 처리된다. 방송통신심의위원회도 시정 요구 권한을 갖고 있다. 명백한 허위라는 것이 확인되면 삭제되고, 허위 여부나 명예훼손 여부를 알 수 없는 경우라면 임시조치라도 해야 한다. 다만 공인의 경우, 한국인터넷자율정책기구(KISO)의 기준에 따라 허위 정보라는 사실까지 소명되어야 임시조치가 가능하다. (p.124-125)

 

 엄경철 KBS 보도국장은 국장 임명동의 투표를 앞두고 ‘출입처 폐지’를 공약으로 내세웠다. 그는 출입처를 폐지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 “진실은 복잡하고 관점은 다양해지는 사회로 진화해가는 세상의 흐름 속에서, 한국 언론의 기사 생산 구조인 출입처 제도는 한계에 봉착해 있다”라고 설명했다. 예컨대 차량호출 서비스 타다 논쟁의 경우, “산업적 측면에서 혁신의 의미, 과거형 서비스라는 택시 업계의 피해와 사회적 연대, 소비자 만족 등에 대해 각각의 출입처는 종합적 사고를 가로막는 역기능으로 작동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정부 부처 조직조차 외교부, 통일부, 국방부가 협업하고 머리를 맞댈 일이 많아 21세기에도 나뉘어 있는 게 맞나 싶을 때가 있다. 미래의 교육 문제는 교육부와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함께 풀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정부 재구성까지는 어렵더라도 언론사라도 먼저 최소한 출입처 제도 전면 개혁 등을 통해 이 칸막이를 뛰어넘어 현안과 주제별로 가는 게 맞지 않을까? (p.144-145)

 

 영국 정부 사이트가 2013년 영국 디자인 뮤지엄이 주관하는 ‘올해의 디자인 상’ 수상작이라는 것은 나중에 알았다. 영국 국무조정실은 ‘정부 디지털 서비스’라는 조직을 꾸렸고, 젊은 프로그래머와 해커들이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애썼다. 각 정부기관 웹사이트의 10년간 접속 기록을 분석해 사람들이 가장 자주 검색하는 데이터가 무엇인지 살폈다고 한다. 그 결과 24개 정부 부처와 공공기관 300개 등 총 2,000개의 공공 홈페이지를 하나로 통합한 정부 사이트를 만들었다. 이후 전세계 정부가 디지털 소통 전략을 고민할 때 롤모델이 됐다고 한다. 다만 영국 정부 사이트는 2013년 디자인상 수상작이니, 2017년에는 또 완전히 달라야 하지 않을까. 한편으로는 영국 정부 사이트 같은 정책 플랫폼 역할도 탐났지만, 이는 청와대가 아니라 정부 부처 차원에서 고민할 일이다. 결과적으로 청와대 국민소통플랫폼은 이후 가끔 서버가 다운될 정도로 흥행에는 성공했다. 국민청원 덕분이다. (p.194-195)

 

 2009년 6월 영국에서 수백명의 의원들이 세비를 부당하게 챙긴 스캔들이 터졌다. 난리가 난 이후에야 정부는 100만 장이 넘는 청구서와 영수증을 분류도 않고 그냥 공개해버렸다. 영국 일간지 가디언이 게임 개발자를 찾아 이 사건을 의뢰했다. 7일간 개발자들은 날것의 데이터를 45만 8,832개의 온라인 문서로 변환시켰고, ‘의원 세비 조사단’ 프로젝트로 네티즌들에게 게임 참여를 유도했다. 가이드는 명확했다. 첫째, 문건을 찾아라. 둘째, 유형을 파악하라. 셋째, 미심쩍은 청구 항목을 옮겨 적어라. 넷째, 왜 정밀 조사가 필요한지 이유를 정리하라.
 무려 2만명이 참여했고 17만여 건의 전자문서를 분석했다. 세비 스캔들로 결국 의원 수십 명이 사퇴했다. 이 프로젝트의 교훈이 내게는 깊게 와닿았다.
 “사람들이 자신의 시간을 기꺼이 할애하여 어떤 일을 하려면 무엇보다도 ‘아, 내가 하는 일이 효과가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 해야 합니다. 이렇게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느낌이 들지 않으면 사람이 모이지 않습니다.”
 이 게임을 이끈 개발자 사이먼 윌리슨의 말이다. 게임의 두 번째 조건은 목표를 달성하면 보상이 주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 보상이 효능감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윌리슨의 말대로 “내가 하는 일이 효과가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도록 해야 한다. 이 같은 이유에서 최고 책임자의 책임 있는 답변이 반드시 나오도록 설계했다. ‘최고 책임자’라면 적어도 각 부처 장관급이, 청와대에서 답변하는 경우 수석급은 나와야 한다고 생각했다(나중에는 청원이 너무 많이 올라오는 바람에 비서관급으로 답변자 풀을 대폭 넓혔다). (p.264-265)

 

 앞서 소개한 글로벌 청원 사이트 체인지의 「2018 임팩트 보고서」를 살펴보면, 2018년 이곳에서만 월 2만 5,000건의 청원이 올라왔다. 흥미로운 것은 주제가 우리의 국민청원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이다. 일단 여성의 권리 관련 청원이 한 해 무려 1만 6,203건이다. 강제 결혼 후 강간하려는 남편을 살해한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은 수단의 10대 소녀를 구하려는 청원은 프랑스에 사는 16세 여학생이 올렸다. 170만 명 이상이 동의 서명을 했고, 영국 BBC, 미국 CNN, 뉴욕타임스 등에 보도되면서 전세계의 관심을 모았다. 보건의료, 장애인 권리 주제에도 1만 9,965건의 청원이 몰렸다. 동생의 자살을 겪은 한 영국 청년은 정부에 자살 예방 특별 장관직을 신설할 것을 요구하는 청원을 올렸다. 40만 명 가까이 서명했고, 영국 정부는 이를 수용하기로 했다. 이어 동물의 권리 관련 청원 1만 3,922건, 환경 문제 청원 1만 3,713건 등이 그해 뜨거운 이슈를 몰고 다녔다. 여성의 권리, 동물의 권리를 지키고 늘리고자 하는 흐름이 어느 한 개별 국가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 그리고 변화를 바라는 뜻이 어떤 식으로든 모이게 된다는 점은 이 시대의 중요한 특징으로 기록될 것 같다. (p.280-281)

 

 11월 초 늦가을의 햇빛이 쏟아지는 이화여대 연구실에서 대화와 토론, 이른바 소통이 어떤 것인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들었다. 다시 생각해보니, 그 많은 토론회, 세미나, 공청회에서 제대로 된 토론이란 것을 본 기억이 없다. 대개 정해진 시간 내에 서로 자기 얘기를 하고 끝나는 자리였다. 주관하는 측에서 입맞에 맞는 결론을 정리해 공개하면 그것으로 마무리되곤 했다. 사실 토론회니 공청회니, ‘했다는 것’이 중요하지 실제 토론에는 관심이 적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제대로 된 토론을 경험한 적이 있던가? 배워본 적은 있던가?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토론 프로그램인 「백분토론」만 봐도 어떤 때는 고수들의 현란한 논리와 지식을 나눠 받기도 하지만, 어떤 때는 싸움만 보다가 끝나지 않았던가. 최 교수는 미국 ABC 심야뉴스 프로그램 「나이트라인」의 진행자 테드 코펠을 예로 들었다. 테드 코펠은 중요한 질문을 던질 때 미리 예고했다고 한다. 문제의 핵심은 이건데 저쪽 분과 이야기하고 난 다음 다시 돌아오겠다고 하면서 생각할 시간을 주는 방식이다. 진행자가 토론자를 궁지로 몰아넣거나 날카로운 질문을 하는 것이 능력처럼 보이지만, 사실 토론의 중요한 목적은 상대의 논리를 들어보는 것이다.
 최 교수는 토론이란 순서를 정해서 한 사람씩 발표하는 것이 아니라 한없이 이야기하는 것, 하고 싶은 말을 다 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소통이 어려운 이유는 다들 남의 말은 안 듣고 싶고 남이 내 말을 듣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최 교수는 ‘discussion’을 ‘숙의’로 번역했는데, 남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신의 생각을 다듬는 것이 목적이지 자신의 의견을 관철시키는 것이 목적이 아니란 얘기다. (p.316-317)

 

 저널리즘 역사를 연구하는 미첼 스티븐스 뉴욕대 교수는 관점 대신 객관주의에 매달린 미국의 저널리즘이 문제였다고 지적한다.
 “사실에 굶주린 언론은 이용당할 수도 있다. 언론은 관료들이 하는 말을 받아 적는다. 공산주의자들이 정부에 침투했다는 조지프 매카시 상원의원의 말을 그대로 적었던 것처럼 말이다. 이 기사는 1952년 4월 22일 뉴욕타임스에 등장했다.”
 그동안 대세는 ‘퀄리티 저널리즘’이었다. 옳고 그름을 판단하지 않고 어느 취재원이 뭐라고 말했다고 전하면 사실 보도이기는 하다. 그러나 이것이 객관적인 보도일까? 기자들은 사실이라는 나무를 쫓느라 저널리즘이라는 숲을 보지 못했다.
 19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단순 사실 보도는 기자들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저급하다”라고 했던 미국의 뉴스들이 단순 사실 보도, 객관성에 소명을 걸게 된 것은 일종의 자기보호였다. 스티븐스 교수에 따르면, 미국 독립 무렵 연방주의자 존 애덤스는 연방 반대주의 편집장의 작업을 테러리즘이라 불렀다. 중국이 반정부 의견을 모두 반테러법으로 잡겠다는 최근 움직임도 역사적 맥락이 있는 셈이다. 대통령이 된 애덤스는 1798년 선동금지법에 서명했다. 많은 연방 반대주의 편집자들이 기소됐고 감옥에 갇혔다. 그런데 1800년 대통령이 된 토머스 제퍼슨은 연방 반대주의 쪽이었다. 그는 연방주의 신문에 더 불만이 많았다고 한다. 정권 교체에 따라 ‘정답’이 달라지다니, 기자가 어떤 논리나 주장에 대해 의견을 말하는 것 자체가 위험한 일이 되어버렸다. 기자들은 단순 사실 보도라는 객관성 뒤에 숨기 시작했다.
 대신 의견은 오피니언 지면에 갇혔다. 이 ‘객관적 저널리즘’의 전통은 그대로 이어져 내가 기자로 일하던 때도 기자는 의견을 숨겨야 한다고, 최대한 불편부당해야 한다고 배웠다. 오피니언 자리는 경력이 오래된 몇몇 고참 논설위원의 몫이었다.
 하지만 의견을 내지 않으면 중립적이고 공정한 보도일까? 애초에 어떤 걸 보도할지, 보도하지 않을지에 대한 판단도 선택이다. 그 선택에 따라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이 만들어진다. 100개 중 10개의 사실을 골라내는 것도, 어떤 취재원을 인용할 것인지 선택하는 것도 편향성을 가질 수밖에 없다. 기계적 중립을 지키며 객관적으로 보도했다는 행태는 공정하지 않은 때가 더 많다. 예컨대 2020년 초 트랜스젠더 합격자의 숙명여대 등록 포기 사건에서 일부 언론은 중립 뒤에 숨어서 혐오에 힘을 실어줬다. 혐오와 혐오를 비판하는 주장을 동등한 선에 놓고 보도하는 것은 무책임하다. 확대해서는 안 되는 혐오를 하나의 의견처럼 다루면서 혐오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은 중립적이고 공정한 일이 아니다. 공정성을 앞세우면서 객관주의 보도를 논해도, 늘 정답인 것은 아니다.
 스티븐스 교수는 “객관성, 공정성, 불편부당 그리고 균형 등은 때론 저널리스트들이 마땅히 해야만 할 일을 하지 않는 핑계”라고 지적한다. 정치적 성향을 드러내기 두려워하는 언론이 지나치게 몸조심한다는 얘기다. 게다가 “관점이나 견해 없이 단순한 관찰자 시선으로 쓰인 뉴스 기사들은 시민 사이에서 정치적 혐오증을 조장할 수 있다.” 반면 의견은 시민들을 화나게 만들기도 하는데 “분노한 일부 시민 없이 민주주의가 역동적이고 자연스럽게 작동하는 것을 상상하긴 힘들다”는 게 핵심이다. 오히려 의견이 가치를 더하고 시민 참여를 독려할 수 있다. 사실을 전달한다는 이유를 앞세운 밋밋하고 소심한 보도는 독자의 외면만 부른다. 관심을 기울이지 않게 만든다. 이쪽도 저쪽도 다 옳다거나, 다 그르다는 식의 보도는 무책임하다. (p.326-328)

 

 플랫폼의 역할, 저널리즘이 나아갈 방향을 모색하는 시도들은 매우 중요하다. 현재진행형 이슈에 대해 정치적인 공방에 밀리지 않는 뚝심도 필요하겠지만, 이런 고민들을 둘러싼 제대로 된 공론장이 형성되어야 한다. 우리 사회에서 가장 부족한 게 공론장 아니던가. 지적 담론이 없으니 학계에서 풀어야 할 문제도 법원에 가져가 판결해달라고 하는 사회가 아니던가. 대체 줄기세포의 진실을 어떻게 검사와 판사가 판단할 수 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종교에 대한 공론장이 없으니 가끔 문제가 곪아 터질 때쯤 방송국 시사 프로그램이 다루고, 방송하지 말라고 가처분 소송을 내고, 그래도 방송되면 분노의 집회를 여는 구조 아니던가. 그나마 신문은 감히 건드리지 못하는 성역이다. 공론장이 없으니 갈등과 다툼이 제대로 길을 찾지 못하는 현실을 보면 최재천 교수가 말하는 ‘대화와 토론의 복원’을 더 간절하게 바라게 된다. (p.331-332)

 

 이 사건과 관련하여 보호받지 못하는 여성들도 봐야 한다. 불법촬영 범죄는 왜 처벌이 약한 것인지, 관련 판결 전수조사라도 해서 선고에 일관성은 있는지, 판사에 따라 처벌이 약하다는 오해가 정말 근거 없는 불신인지 아닌지, 새롭게 등장하고 점점 더 심각해지는 불법촬영 범죄의 처벌 강화 입법은 왜 더딘지, 법안은 발의됐는지, 누군가 준비 중인지, 법 개정의 걸림돌은 무엇인지, 성폭력에 대한 입증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지, 다른 문제는 없는지, 해외와는 무엇이 왜 다른지, 많은 여성들을 분개하게 한, 감자탕 고기를 남자의 접시에 덜어준 것을 두고 ‘성관계를 묵시적으로 동의한 것일 수 있다’며 강간 혐의 무죄를 선고하는 판결의 법리는 무엇이 문제인지, 피해자를 최우선하지 않고 가해자 앞날을 걱정하는 관행이 되풀이되는 것 아니냐는 의구심은 근거가 있는 것인지, 무작정 판사에 분개할 게 아니라 법리와 양형, 판결에 대해 체계적인 분석이 필요하다. 마땅히 던져야 할 질문들을 챙기는 것이 허망하게 떠내보낸 이들에게 덜 미안한 길이다. 우리는 이런 문제에 소통할 자세가 되어 있다고 믿는다.
 다들 치를 떠는 문제가 되어버렸지만 ‘악플 문제와 표현의 자유’도 차분하게 봐야 한다. 도입 5년 만에 위헌 결정을 받은 실명제를 다시 고민해야 하는지, 그 제도가 왜 위헌 결정을 받았는지, 도입 당시 실효성은 있었는지를 질문해야 한다. 연구 결과에 따르면 실명제 효과는 거의 없었다. 사실 페이스북만 봐도 실명 악플을 도처에서 볼 수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악플 처벌 현황은 어떻게 되는지, 트위터·인스타그램·페이스북·유튜브 악플에 대해 왜 속수무책인지, 왜 유럽에서는 규제가 가능한데 우리는 안 되는지, 여성 혐오 발언은 결국 차별금지법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지적에 대해 여론 지형은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지, 입법 좌절 배경은 무엇인지, 다른 나라는 어떤지, 한때 절대적 가치였던 표현의 자유로 보호받는 영역에 대해 사회적 공감대는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지, 나 역시 궁금하다.
 이런 일을 겪을 때마다 인권 감수성 문제와 인권 교육의 현황과 한계도 알고 싶다. 비통한 누군가의 자살 소식에 ‘유작’ 운운한다는데, 대체 인권 교육과 성평등 교육은 어떤 식으로 이뤄지고 있는지, 그릇된 일부 인식들은 어떤 과정에서 형성되는 것으로 추정되는지, 여성 혐오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일각의 문제에 해법은 없는지. (p.352-353)

 

 

오버타임 / 윌 스트런지, 카일 루이스 / 시프

 

 마르크스를 비롯해 분업을 다룬 숱한 분석가들이 주장했듯이, 자본주의 하에서 대다수 직업은 인간의 기술을 업무에 유용한 정도까지만 발달시킨다. 우리는 이메일을 보내기 위해 문서 작성법을 배운다. 라테 만드는 법을 배우는 것은 판매를 위해서다. 대인 기술을 향상시키는 것은 주로 기업의 일상적인 운영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서다. 노동자들에게 업무 시간에, 회사 재정을 이용해 그들 자신이 선택한 방법으로 스스로를 개발할 기회가 주어지는 건 믿을 수 없을 만큼 드문 일이다. 이런 일은 고소득 직종에서만 일어나는데, 주로 직원들이 일을 그만두지 않게 하거나 극심한 스트레스를 견디게 하기 위한 당근으로 제시될 뿐이다.
 우리가 일생을 보내는 직장들은 자기개발 기회를 아주 제한적으로 허용하며, 워낙 판에 박혀서 누가 고용되든 해치울 수 있는 업무를 중심으로 짜여있다. 자기실현을 위한 시간, 자기개발을 위한 시간은 다른 곳에 있다. 근대 경제학의 아버지로 널리 알려진 (그리고 꾸준히 오해에 시달리는) 애덤 스미스조차 분업과 표준화가 인간에게 무슨 짓을 하는지 매우 잘 알았다. 그 덕분에 노동자로서 우리의 생산력이 향상되기는 했지만 “결과가 거의 항상 빤한 몇 가지 단순 공정을 수행하며 일생을 보낸 사람에게는 자신의 이해력을 발휘할 기회가 없다”고 스미스는 경고한다.
 노동시간 단축은 경제적 평등에 의미를 갖는 만큼 인간 잠재력에도 의미를 갖는다. 필요노동이 최소한으로 줄어든 문화의 거대한 잠재력을 알아본 사람들 가운데 가장 눈에 띈 인물은 영국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이었다.

지금까지도 노동에 진저리 치게 되는 건 대개 긴 노동시간 때문이다. 표준노동시간을 (가령) 4시간으로 단축한다면 지금은 부담으로 느껴지는 아주 많은 노동이 더 이상은 그렇게 느껴지지 않을 텐데, 이는 조직 방식을 개선하고 과학적인 방법을 동원하면 충분히 가능하다.

 러셀은 당대 아나키즘과 사회주의 철학을 샅샅이 훑으면서 가장 유망한 아이디어만을 골라내고자 했다. 그는 노동시간 단축이 재정적으로 안전할 뿐만 아니라 인류에게 가장 해방적이고 바람직한 목표라고 생각했다. 노동시간을 줄이면 ‘빈둥’댈 것이라거나 심지어는 게으른 사회가 될 거라는―노동을 둘러싼 논의에 자주 등장하고, 노동윤리가 깊이 배어 있는―비난에 대해 러셀은 이렇게 말한다.

빈둥거리는 인간으로 분류될 만한 치들 중에는 예술가, 저술가, 추상적인 지적 활동에 전념하는 이들, 그러니까 살아 있을 때는 사회로부터 경멸받다가 죽고나면 존경받는 모든 이가 포함될 것이다. (…) 얼마나 많은 시인들이 사재를 가진 이들이었는가를 아는 사람이라면, 가난 때문에 얼마나 많은 시적 재능이 개발되지 못했을지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부자들이 더 많은 시적 재능을 타고난다는 생각은 어처구니가 없을 테니 말이다.

 이는 자유시간이 오직 엘리트만 관심을 갖는 사치라는 주장에 대한 중요한 반박이다. 이는 주객이 전도된 주장이지만 동시에 분명한 사실을 서술하고 있을 뿐이다. 가장 유명한 예술가, 작가, 지식인들은 집안이 부유한 경우가 많다. 이들은 재력 덕분에 매일 ‘밥벌이를 해야 하는’ 고난을 멀리할 수 있었고, 더 창의적인 것을 추구하는 데 에너지를 쏟을 수 있었다. 러셀도 분명 알았으리라. 그 스스로가 (우리가 ‘그 자체로 목적’이라고 부를 만한) 인생의 이런 측면에 공간과 시간을 들여 즐길 수 있는 특권을 가진 소수였기 때문이다. 이 세상 다수에게 단지 무언가를 자유롭게 시도해 볼 만한 시간이나 물질적 안정이 없어 얼마나 많은 미술품, 음악, 시, 영화가 빛을 보지 못했는지는 상상에 맡길 뿐이다. 이런 가상의 시나리오에서 최소한 제2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존재해왔고 실제로 존재하는 노동계급의 문화적 생산물은, 케인스가 꿈꾸었던 주 15시간 노동에 우리가 조금이라도 근접했더라면 가능했을 결과물의 극히 일부일 뿐이다. (p.54-57)

 

 영국 통계청은 2016년 영국에서 여성이 남성에 비해 60% 더 많은 부불노동을 수행했음을 보여주었다. 이 조사는 또한 여성이 전체 자녀 돌봄시간의 74%를 제공했으며, 부불 가사노동을 하는 데 평균적으로 주당 26시간을 썼음을 보여주었다. 반면 남성은 부불 가사노동에 주당 16시간을 썼다. 이것이 사회학자들이 말하는 2교대 근무, 3교대 근무다. 여성이 임금노동과 가사노동과 감정적인 돌봄노동까지 도맡아 불균형한 부담을 짊어지는 구조적인 방식인 것이다.
 따라서 여성이 주로 종사하는 일자리들은 스트레스, 번아웃, 소진에 취약할 뿐만 아니라 그것이 가하는 압력은 여성들이 계속 짊어지고 있는 부불 가사노동에 대한 끈질긴 기대에 의해 더욱 가중된다. 데보라 하그리브스가 주장하듯이, 노동자로서 여성은 이런 부불노동의 부담을 짊어지지 않는 이들을 위해 설계된 고용세계에 적응하고 스스로를 끼워 맞춰야 한다. “직장은 남성의 커리어 패턴에 맞춰, 남성들에 의해 확립되었다. (…) 100여 년간 서구세계에는 근본적인 구조적 변화가 거의 없었다.”
 특히 오늘날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노동시간과 노동형태는 직장 업무 이외에 재생산노동을 하리라는 기대를 거의 받지 않는 남성을 중심으로 짜인, 왜곡되고 젠더화된 체제의 주요 증상이다. 케이시윅스는 20세기 초 하루 8시간 노동을 위해 투쟁하고 승리한 남성 노조활동가들을 고찰하면서 “만약 그들이 부불 가사노동을 책임졌다면, 그들이 하루에 최소 8시간을 일할 수 있으리라고 확실히 기대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라고 지적한다.
 다시, 코로나 위기는 이 젠더화된 시간의 불평등을 밝게 조명했다. 여러 연구는 팬데믹 1차 국면이 진행되는 동안 육아 책임과 함께 표준 주당 노동시간에 따라 일하는 여성 가운데 86%가 일정한 형태의 정신건강 문제를 경험했음을 보여주었다. 컴퍼스싱크탱크, 오토노미싱크탱크, 주4일노동캠페인에서 작성한 보고서에 따르면 코로나 팬데믹 기간 동안 여성이 표준 주당 노동시간을 초과하여 일할 가능성은 남성보다 43% 높게 나타났다. 재택원격근무로 대표되는 새로운 노동세계가 여성에게는 시간 박탈의 심화로 경험되는 것이다. (p.80-82)

 

 적게 일하기 위한 투쟁에서 승리하는 것은 하루 노동시간에 대한 정량적인 감정을 바꾸는 것과도 관계가 있을 것이다. 세계 많은 나라에서 토요일은 고된 노동으로부터 자유로운 날이라는 생각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지만, 이는 원래부터 그랬던 것이 아니라 역사적 성취라는 사실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대다수 노동자들은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당연시하는 이틀간의 주말을 누리지 못했다. 이틀간의 주말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진 것은 노동자가 매주 이틀을 연이어 쉴 수 있는 권리를 정치적 의제로 만들고 캠페인을 벌인 노동조합과 사회운동이 힘겨운 투쟁 끝에 얻어낸 승리 덕분이었다.
 20세기 노동자운동이 이틀간의 주말을 위해 싸웠듯, 21세기에는 금요일을 일하지 않는 날로 지정하기 위해 싸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이 투쟁은 더 이상 공장에 국한되지 않고 가정에서 여성이 부불 노동자로서 수행하는 노동에 도전하고 이를 되찾는 과정을 거치며 모든 사회 영역에서, 그리고 우리 아이들의 미래 세계에서도 벌어져야 한다. (p.121-122)

 

 

낭만적 은둔의 역사 / 데이비드 빈센트 / 더퀘스트

 

 모여서 책을 낭독하는 데서 혼자 조용히 읽는 것으로 트렌드가 변해갔다. 혼자 지내며 타인의 인생 드라마에 빠져 이제 주변 사람들과 대화하지 않는 게 새로운 문젯거리였다. 문맹 타파, 늘어난 읽을거리, 여가 시간의 증가, 집의 안락함이 더해져 개별적인 독서가 가능해졌다. 남의 낭독을 들을 필요 없이 각자 문학 여행을 할 수 있었다. ‘고삐 풀린 혼자만의 소설 읽기’라는 위협을 바로잡으려고 부모들, 특히 어머니들은 자녀들에게 눈으로 읽기를 금지하고 책을 읽어주었다.
 책 읽기는 18세기와 19세기를 거쳐 소리 없는 독서로 옮겨갔지만, 함께 모여 읽는 일은 여전히 매력적이었다. 낭독은 다양한 윤리적·실용적 기능을 수행했다. 3부작 소설을 구입하는 건 사치였기에 가족들이나 다른 집안과 책을 공유하기도 했다. 더불어 민간과 공공 도서관 이용이 증가했다. 이어 출판업계도 도서 가격을 내렸지만 신간 소설에 대한 욕구는 중산층 독자의 구매 능력을 앞섰다. 새로 교육받은 이들의 경우 아직 독해력이 부족한 데다, 독서광이 되고 싶어도 책이 비싸고 귀한 문제가 더해져 19세기 내내 다른 도서 구매자들과 비공식적 또는 조직적으로 협동해야 했다.
 중요한 건 혼자 또 여럿이 활동하는 일이 유연하게 전환됐다는 점이다. 여럿이 낭독하는 대중보다는 경제력과 교육 수준이 높을수록 조용한 독서나 낭독을 더 쉽게 받아들였다. 빅토리아 시대에 성장한 중산층 출신의 회고록에 독서가 소란한 가족을 피할 방도였다는 구절이 자주 나온다. 독서는 타인과 함께 있는 것을 견디는 수단이었다. (p.109-110)

 

 동시에 독자들은 청취자나 낭독자로서 계속 책을 공유했다. 대단한 부유층만 책을 개인 소유물로 여겼다. 독자들은 서로 책 제목을 추천하고 친구나 가족에게 빌렸다. 출판이 늘고 기차와 우편으로 배달이 용이해질수록, 지역 대출 문고가 전국적인 업체로 변했다. 특히 1842년부터 무디의 ‘셀렉트 라이브러리’가, 1860년부터는 W. H. 스미스의 경쟁업체가 영업했다. 가정에서 책 낭독은 사교 행사나 바느질 등 다른 일에 몰두한 가족을 즐겁게 해주는 수단이었다.
 혼자 읽기와 함께 읽기의 변화 양상은 확장된 초등교육 제도의 산물이기도 했다. 19세기에 인쇄물은 모든 가정에서 익숙한 물품이 되었다. 전에는 기껏해야 종교서나 해진 싸구려 통속소설을 읽었지만 이제 소책자, 정기간행물, 신문, 어찌어찌 굴러온 문건이 많아졌다. ‘가족생활과 일 경험’ 구술 역사 조사의 참가자는 에드워드 시대에 인쇄물이 기본 가재도구를 대체했다고 증언했다. “흔히 식사하면서 신문을 읽느라 바빴습니다. 왜냐하면 그게 식탁보였거든요. 신문을 식탁보 삼아서 식탁에 펼쳤습니다.”
 그러나 중류층 가정에서는 이런 전환이 일어나기가 훨씬 어려웠다. 따라서 독서라는 행위의 무게는 개인보다는 집단 쪽으로 기울어졌다. 조사에 참여한 어느 집안에서는 글을 아는 아버지가 문맹인 아내에게 디킨스와 엘리엇을 읽어주었고, 학교에 다니는 자녀들은 동네 도서관의 책을 직접 읽었다. 이런 가정들에서 책을 들고 물러나는 순간은 특권이었고, 여성의 경우 특히 그랬다. 다른 조사 참여자는 회고했다. “아, 아버지는 많이 읽었어요. 어머니는 시간이 나면 읽었고요. 하지만 어머니의 경우는 옷을 짓고, 집안일과 식사 준비를 하니 시간이 별로 없었지요. 겨우 세 식구였는데도 말입니다.” 그런 환경에서 바랄 수 있는 건 시간이 많고 글을 아는 어른이 가사노동에 몰두한 다른 어른에게 낭독해주는 것이었다. 어느 가정에서는 어머니가 다림질하는 동안 아버지가 책을 읽어주었다. (p.111-112)

 

 4장에서 봤듯이 단독 여가활동은 가정의 재력, 편리한 통신 제도, 복지 제도의 도입 덕분에 증가할 수 있었다. 단독 취미에 쓸 돈이 더 많아지고, 가정 내 공간이 넓어졌다. 기술 발전, 연금 확충, 지방 및 중앙 정부 차원의 지원도 있었다. 새로운 욕구가 생긴 게 아니라 욕구를 실현할 능력이 커졌다. 하지만 고독을 즐길 시간, 공간, 재원을 확보하는 것은 여전히 물리적·사회적 조건이 따랐다. 여성의 경우가 유독 심해서 남성들이 개발한 은둔 속 여가를 즐기게 된 것은 20세기 중반을 넘어서야 가능했다.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에 나오는 제약들은 아직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1998년 여성들의 고독을 다룬 책을 내면서, 딜리스 웨어는 작가들이 대부분 “부양가족이 없는 백인 특권층”이라는 점에 유의했다.
 개인과 집단의 경제력이 추락하면서 외로움을 억누르며 고독을 즐기기는 어려워졌다. 정의와 측정이 어려운 분야지만, 최근 데이터를 보면 인구의 5분의 1 이상인 1,400만 명이 궁핍하며 150만 명이 빈곤하다. 부족한 주거, 취미활동에 쓰기에는 부족한 생활비, 교통 시스템과 인터넷을 잘 이용하지 못하는 결핍은 고독 경험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최근 사회학자 에릭 클리넨버그가 주장했듯 빈곤한 사회 인프라는 노약자를 더욱 소외시켰고, 정신과 신체의 고통을 겪게 한다. 4장의 결론에서 논의했듯이 개인들은 기껏해야 산책, 독서, 어디나 있는 텔레비전 시청 같은 기본적인 단독 여가활동으로 회귀할 수밖에 없다. 빈곤층은 외로움의 위협을 완화해줄 서비스를 누리지 못한다. 정신과 신체 고통의 관계에 대한 논의는 여전히 불확실한 와중에, 예전부터 위중한 건강 상태와 장애는 외로움의 원인으로 꼽혔다. 노인층에만 해당하진 않지만 유독 노인층에서 외로움이 심하다. 장애인 자선 단체인 ‘스코프’는 근로 연령 장애인의 45퍼센트와 젊은 성인 장애인의 85퍼센트가 외로움을 경험한다고 말한다. 이것은 빈곤 지역에서 병원에 가고 수술을 받는 문제, 해당 지역의 장기적인 지원에 대한 과제를 낳는다. (p.305-3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