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산조각 난 신 / 와타나베 기요시 / 글항아리
오늘도 하루 종일 골방에서 빈둥거렸다.
신문에 태평양전쟁 기간에 발생한 육·해군의 전사자 및 부상자 수가 발표됐다. 육군성과 해군성이 국회에 제출한 자료인데, 이에 따르면 육군은 전사자 35만 명, 중상자 및 질환자 461만6000명, 해군은 군인과 군무원을 합쳐서 8월 현재 전사자 15만7321명, 실종자 1430명, 합계 15만8751명이라고 한다.
나는 이 숫자에서 한참 동안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어쨌거나 해군의 전사자다. 이 15만 어쩌고 하는 숫자는 나에게 그저 추상적인 기호가 아니다. 단지 눈길만 닿았는데도 그 숫자 뒤로 함께 싸우다 죽은 동료들의 얼굴이 염주 알처럼 줄줄이 떠오른다. 살아 있을 때의 입버릇과 몸짓마저 생생하게 기억난다. 그리고 나 역시, 전장에서 그들과 함께 죽을 운명이었다. 그런데 실로 사소한 우연 때문에 서로 유명을 달리하게 됐으니 남의 일로 여길 수가 없다. 이렇게 나만 살아남은 것이 어째서인지 께름칙하기만 하다. 도무지 피할 길 없는 어떤 존재에게 혹독하게 심판당하는 기분이다. (p.38-39)
그래봤자 나는 둘째 아들이다. 식구들한테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덤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니까 언젠가 집을 떠나야 한다는 것쯤은 나도 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걸 생각하고 싶지 않다. 앞일이야 어찌 되든 내 알 바 아니다. 어떻게 돼도 상관없다. 무엇보다 나는 앞으로 남은 내 인생에 어떤 희망도 없다. 정열도 없고, 기대도 없다. 그런 건 이미 한참 전에 포화와 초연 속으로 날아가버렸다.
나는 전쟁터에서 사람의 머리가 으깨지고 가슴이 갈라지며 팔다리가 나뭇잎처럼 바다로 날아가는 광경을 봤다. 피투성이가 돼서 갑판을 뒹굴다가 발에 짓밟힌 애벌레처럼 죽어가는 동료를 봤다. 그토록 끔찍한 인간의 최후를, 지금도 자다가 가위에 눌릴 만큼 수도 없이 이 두 눈으로 지켜봤다. 그리고 그 경험을 통해 내가 똑똑히 깨달은 것은, 달리 비길 데도 없는 인간의 비정함과 허무함이었다. 내 몸뚱이에 새겨진 것만 같은 무상감이었다. 어차피 이런 내가 제대로 된 인생을 다시 시작할 수 있을 리가 없다. 혹시라도 시작한다면 뭔가 살짝 바꿔치기한 가짜 인생일 것이다. (p.52)
저녁에 신문을 읽다가 느낀 점인데, 요즘 신문들이 표변한 꼬락서니가 정말이지 지독하다. 잘도 이렇게까지 변했구나 싶다. 그건 라디오도 마찬가지다.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성전 완수’니 ‘1억 명이 불덩어리 되어’라느니 ‘신주 불멸’ 같은 소리를 공공연히 떠들던 주제에, 항복하기가 무섭게 이번에는 “전쟁은 처음부터 군벌과 재벌과 관료가 한통속이 돼서 벌인 것이며, 성전은커녕 정의에 어긋난 침략 전쟁이었다” 같은 소리를 열심히 쓰고 또 방송한다.
그야말로 사람을 바보 취급하고 있다. 그렇다면 왜 더 일찍, 적어도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똑바로 쓰지 않았는가. 어째서 사실은 이러이러하다고 정직하게 보도하지 않았는가. 그것이 본래 신문과 라디오의 사명일 텐데. 그런데 이제 와서 무슨 바지를 뒤집듯이 너무도 간단히 전에 한 말을 뒤집는다. 되는 대로 지껄이는 일구이언에 왜곡 보도, 무책임한 것도 정도가 있다. 언젠가 “신문에 진실이라고는 부고 기사뿐이다”라고 말한 사람도 있었지만, 나는 이제 신문이나 라디오 따위는 결코 믿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 쓰고 말하는 내용이 언제 똑같은 손과 입으로 뒤집힐지 모르기 때문이다. (p.75-76)
낮에 점심을 먹고 툇마루에서 잠깐 쉬고 있으려니, 넝마주이 김씨가 홀쭉한 부대를 등 뒤에 걸친 채 찾아왔다. 귀환 후에 김씨와 만나기는 이때가 처음이었는데, 지저분한 긴 머리도 이마가 튀어나온 벌건 얼굴도 5년 전과 똑같았다. 그래봤자 예전에도 얼굴을 마주하고 이야기를 나눈 적은 한 번도 없었건만, 김씨는 나를 용케 기억하고 곁에 있던 어머니한테 말했다.
“이야, 해군에 갔던 아드님, 무사히 돌아왔네요. 거참 잘됐네요, 잘됐어요. 이런 경사가…….”
그러더니 내 얼굴을 찬찬히 보면서 웃었다. 홑꺼풀 눈이 스르륵 일자가 되는 상쾌한 웃음이었다. 나도 홀린 듯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귀환한 후에 진심으로 ‘경사’라고 말해준 사람은 김씨 한 명뿐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물론 나 스스로는 조금도 경사로 여기지 않았지만, 김씨가 내 걱정을 해준 것 같아서 기뻤다. 어머니는 김씨한테 “모처럼 들렀는데 오늘은 내놓을 물건이 없어서 미안해요”라며 폐품 대신 문간에 걸어놓고 말리던 고구마를 신문에 싸서 건넸다.
어머니한테 들으니 김씨는 연말에 조선으로 돌아갈 거라고 한다. 그는 열두 살 때 고향인 경상도를 떠나 28년 동안이나 일본 각지를 전전하며 일했다고 한다. 그러는 동안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유독 차별을 당하고 심한 꼴이 되거나 모진 일도 꽤 겪은 듯하지만, 이제는 떳떳하게 독립한 조선의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됐다. 얼마나 기쁠까. 남의 일인데도 왠지 나까지 후련해지는 사연이다. (p.105-106)
“전쟁은 인간과 인간이 서로 죽이는 것, 그 외의 어떤 것도 아니다.” “전쟁은 문명과 문화를 파괴하는 것, 인류에 대한 최악의 범죄 행위다.” 저번에 요시코 누나에게 빌려온 잡지에서 보고 적어놓은 문장인데, 지금의 나는 싫든 좋든 이 문장에 담긴 진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아무리 고집스럽게 부정해봐도 전장에서 얻은 체험이 그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떠오르는 답은 ‘맞아, 맞아’라는 공감이다. 분하지만 역시 인정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p.115)
논일을 시작하고 나서부터 인근에 흩어져 사는 부랑자들이 이삭을 주우러 곧잘 나타나곤 한다. 가끔은 어른도 있지만 대개는 어린 애들인데, 아직 대여섯 살밖에 안 된 아이가 섞여 있을 때도 있다. 보고 있으면 다들 허리를 굽힌 채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삭을 줍는다. 떨어진 낟알을 한 알 한 알 정성껏 집는 사람도 있다. 주운 이삭은 나중에 절구로 겨를 벗겨서 밥을 지어 먹는 모양인데, 마을 사람들은 어째서인지 자기들은 줍지도 않는 주제에 이들이 주워가는 것을 보고 질색한다.
오늘도 가만히 보고 있자니, 벌겋고 커다란 대머리 때문에 멀리서도 대번에 눈에 띄는 히가시마쓰 씨네 기스케 아저씨가 고함을 지르면서 이삭을 주우러 온 아이들을 내쫓고 있었다. 그러더니 그길로 우리가 벼 훑기를 하는 논에 와서 두툼한 윗입술을 핥으며 말했다.
“저 꼬맹이 놈들 정말 못 말리겠다니까. 아무리 야단쳐도 하루가 멀다 하고 끈질기게 기어오는데, 아주 닭보다 더 지독해. ……게다가 말이지, 저 녀석들 이삭만 주워가는 게 아니야. 저번에 우리 고구마 밭이 엉망이 된 것도 분명히 저 꼬맹이들 짓이야. 진짜 이대로 가다간 마을에 일부러 도둑놈을 키우는 꼴이 된다고. 전쟁도 끝났으니까 어디로든 돌아가버리면 좋을 텐데. 저렇게 쫄쫄 굶는 꼬맹이들이 있으니 뒷간을 가려고 해도 마음 놓고 자리를 비울 수가 있나…….”
옆에서 듣고 있으려니 너무 야박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겨우 이삭 아닌가. 그냥 두면 어차피 비를 맞고 땅에 묻히든가 어디로 흘러갈 것이다. 그렇다면 그냥 줍게 놔둬도 되는 것 아닌가. 그런데 무슨 큰일이라도 난 양 호들갑을 떨다니……. 기스케 아저씨는 우리 부락에서 둘째가는 부자라는데, 부자일수록 쩨쩨하다는 말이 사실인가보다. (p.120-121)
무사시에서는 천황의 사진을 전방 주포 발사 명령소 옆의 봉안실에 보관했다. 360밀리미터 구경 포탄에 직격당해도 버틸 수 있도록 두께 300밀리미터짜리 특수 강판으로 둘러싼 방이었다. 당시 함장은 침몰을 피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생존자들에게 퇴함 명령을 내리는 동시에 봉안실의 어진영을 즉시 함 외부로 “받들어 모시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아래층 봉안실에 있던 어진영이 위로 옮겨졌을 때, 이미 좌현 쪽으로 기운 노천 갑판은 탈출로를 찾는 생존자와 부상자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나는 함교 아래쪽 해치를 통해 용케 위로 올라왔는데, 그때 누군가가 성난 목소리로 날카롭게 외쳤다.
“어진영이다, 비켜! 어진영이다, 비켜, 비켜!”
깜짝 놀라서 돌아보니 맨 앞의 위병 장교는 한 손으로 나팔을 만들어 입에 댄 채 악을 쓰고 있고, 그 뒤에 하얀 무명천으로 둘둘 싼 네모난 것을 끈으로 둘러멘 부사관이 허리를 구부정하게 숙이고 따라오고 있었다. 그것이 어진영이었는데, 받들어 모시던 부사관은 결국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 아무래도 커다란 유리 액자를 짊어지고 바다로 뛰어들었으니 제대로 헤엄도 못 쳤을 테고, 그래서 함으로부터 멀어지기 전에 그만 소용돌이에 휘말렸을 것이다.
어쨌거나 그 부사관은 고작 천황 사진 한 장 때문에 지킬 수도 있었던 목숨을 헛되이 버려야 했다. 물론 다른 군함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을지 모른다. 민간인들 중에서도 학교에 불이 나 천황의 사진이 타버리는 바람에 그 책임을 지려고 자살한 교장이 메이지 시대부터 몇 명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런 불길한 사연이 있는 사진을 또 배포한다고 생각하니 소름이 끼친다. (p.151-152)
오늘 그 남자한테서 손자 얘기를 듣다보니 저절로 천황 일가가 생각났다. 천황은 분명 자식이 여섯이었다. 아들 둘에 딸 넷. 하지만 이번 전쟁에서 천황은 자식을 한 명도 잃지 않았다. 여섯 명 모두 멀쩡하니까 머잖아 손자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손자의 귀여운 얼굴을 보며 기뻐할 것이다. 그러나 천황을 위해 소중한 아들을 전사케 한 그 남자는 이제 평생 손자를 볼 수도, 손자를 안을 수도 없다. 이 세상에 살았다는 증거가 자신과 함께 사라져버리는 것이다. 이번 전쟁으로 그처럼 가엾은 부모들이 온 일본에, 아니, 온 세계에 얼마나 많이 생겼을까. 정말이지 전쟁만큼 죄스러운 것도 없다. 전쟁은 죽은 사람뿐 아니라 뒤에 남은 사람의 일생마저 엉망으로 만들어버린다. (p.160)
생각해보면 이른바 훌륭한 사람일수록 이 모양일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말과 행동이 따로따로면서도 모순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오히려 평범한 사람들 위에 서서 그럴듯한 소리를 늘어놓을 수 있는 게 아닐까. (p.199-200)
밤, 독서. 『근세경제사상사론』의 제2강 ‘맬서스와 리카도’ 편을 읽었다. 저번에 요시코 누나가 자본주의와 산업혁명에 관해 자세히 얘기해준 덕분에 맬서스의 인구론과 리카도의 지대론이 나오게 된 배경이 이해가 가는 듯했다. “인구가 무제한 증가하지 않도록 억제하려면, 또 사람들로 하여금 ‘힘과 재능을 한껏 발휘해 저마다 특성을 성취할 수 있게’ 하려면, 그 자극제가 되는 빈곤을 사회에 반드시 남겨둬야 한다.” 이런 내용이 담긴 맬서스의 인구론을 읽고 나는 깜짝 놀랐다. 맬서스 말대로 빈곤을 사회의 필수 자극제로 남겨둬야 한다면 우리처럼 가난한 사람들은 끝장이다. 살아날 길이 아무것도 없지 않은가. (p.219-220)
밤, 『빈곤론』을 읽었다. 수요와 생산의 ‘근본적 결함’에 관해 이것저것 생각해보게 됐다. 저자는 ‘7-2항’에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그러므로 아무리 부자라고 해도 위장의 크기가 가난한 이와 크게 다르지 않고 발 또한 가난한 이와 마찬가지로 두 짝뿐이라면, 그가 스스로 소비하려고 돈을 내고 사는 쌀이나 신발 따위에는 일정한 한도가 있게 마련이다. 그래서 부자들의 수요 가운데 큰 몫은 저절로 사치품으로 향한다. (…) 따라서 사치품의 수요가 매우 커지는 동시에 가난한 이의 생활필수품에 대한 수요는 사치품 수요에 완전히 압도당하고 만다. 그런데도 오늘날의 경제 조직에서는 모든 생산자가 오로지 수요가 있는 물건만 생산할 뿐, 아무리 긴요한 물건일지라도 그 수요가 재력을 동반하지 않는 한 거들떠보지도 않는 것이 원칙이다.”
요즘 세상은 간단히 말해 부자 중심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이 한 구절만 봐도 단박에 알 수 있다. (p.237-238)
너무 추워서 뼛속까지 얼어붙는 밤이다. 뒷문 창을 통해 보이는 후지 산의 등성이는 밤하늘을 뚫고 수묵화처럼 시커멓게 우뚝 솟아 있다. 낮에는 온통 은백색이던 봉우리도 별빛에 밀려 간신히 흰 빛을 띨 뿐이다. 그 위로는 금방이라도 쏟아질 듯한 별들이 하늘 가득 떠 있다. 별 한 개 한 개가 물로 씻은 것처럼 티 없이 맑게 반짝인다. 솔로몬 제도의 툴라기 섬에서 야간 공격 작전을 벌이던 날 밤에도 딱 지금처럼 아름다운 별하늘 아래였다. 함이 방향을 틀 때마다 머리 위의 별자리도 은으로 만든 판자처럼 거칠게 흔들렸다. 그때는 함교의 관측대에 있던 동기 마쓰다와 구와모토가 죽었다. 이렇게 별이 가득한 밤에는 죽은 동료들이 자꾸만 생각나서 견디기가 힘들다. (p.238)
도쿄에 있는 예전 육군성에 극동국제군사재판소가 설치됐다. 이제껏 지명 체포한 전범자를 거기서 재판하는 모양이다. 맥아더 사령부는 이 재판에서 “평화와 인도의 적을 처단한다”고 공언하는데, 애초에 그런 거창한 소리를 늘어놓을 자격이 미국에 있단 말인가. 일본이 일방적으로 쳐들어가서 학살과 약탈을 마음껏 저지른 중국이나 동남아시아 국가들이 그렇게 말한다면 납득할 만할 것이다. 특히 오랫동안 큰 피해를 입은 중국에 대해서는 아무리 심하게 규탄당한다 해도 이쪽에서 변명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내 생각에 미국과 일본은 적어도 50 대 50, 피장파장이다.
진주만을 기습해서 먼저 전쟁의 도화선에 불을 지핀 쪽은 분명 일본이지만, 미국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하지 않았던가. 진주만의 표적은 명백히 군함이었지만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살상당한 이들은 대부분 비전투원인 노인과 여성과 아이들이었다. 게다가 미국은 이를 알면서도 폭탄을 투하했다. 그런데도 결백한 척하면서 일본만이 “평화와 인도의 적”이라는 소리를 잘도 뻔뻔하게 늘어놓는다. 그쪽도 자신들의 더럽혀진 손을 잘 보고 나서 말을 해도 할 일이다. 어쨌거나 상대의 허물을 일방적으로 들춰내서 자신의 죄를 은폐하려는 것은 비겁한 짓이다.
하지만 미국은 끝까지 이처럼 강압적인 방식으로 일관할 것이다. 법정에서는 언제나 승자의 핑계만을 정의로 받아들일 것이다. 그리고 거기서 어떤 판결이 나올지는 문외한인 나조차도 대강은 짐작할 수 있다. 승자의 판결은 재판이라는 이름을 빌렸을 뿐 패자에 대한 복수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이는 동서고금의 진리가 아닌가. (p.262-263)
신문에 따르면 전사자 유골 가운데 아직 인수할 사람이 나타나지 않은 것이 전국에 3만1000구나 된다고 한다. 하카타나 가고시마 출신이 가장 많고 우라가, 마이즈루 출신도 상당수 있는데 지금은 안치할 곳도 마땅치 않아서, 인근의 절에 잠시 맡겨둔 유골도 꽤 되는 모양이다. 그 밖에도 난리 통에 원래 살던 집이 어딘지 알 수 없는 경우나 함부로 다뤄서 유골함의 이름표가 떨어지는 바람에 누구 것인지 모르는 경우가 2만1000구나 된다고 한다. 정말이지 처참한 소식이다. 전쟁 중에는 ‘영령’이니 ‘호국의 혼’이니 하다가 하루아침에 패하고 나니 이 모양 이 꼴이다. 만약 전사자가 말을 할 수 있다면 뭐라고 할까. 틀림없이 몸서리를 치며 분노할 것이다.
인수할 사람이 없는 유골이라고 해도 그렇지, 어째서 그렇게 기약 없이 방치하는 걸까. 예컨대 난리통에 유족이 사망했다고 해도 소속 부대만 알면 어디 출신인지 쉽게 밝힐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출신지 관청이 책임지고 유골을 인수하면 된다. 그런 다음 고향으로 가져와서 정중하게 장례를 치르는 것이 최소한의 예의다. 그건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다. 어쨌거나 우리는 전사자들이 소중한 목숨을 희생한 덕분에 지금 이렇게 살아 있기 때문이다. 그 점은 잠시도 잊으면 안 된다. 죽은 이들이 살 곳은 이제 산 자들의 마음속뿐이므로……. (p.268-269)
교육은 무섭다. 때로는 인간을 죽음으로 이끌 만큼 무서운 것이다. 교사들은 교과서에 먹칠을 하는 이유와 더불어 그 무서움을 학생들에게 어떻게 설명하고, 어떻게 납득시켰을까. 아사코 누나한테 거기까지 물어보지는 않았지만, 아무리 그럴듯하게 설명한다고 해도 그걸로 교사의 책임이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거짓을 가르친 책임은 그대로 남는다. 또한 교과서에 먹칠을 하라고 시킨 일 때문에 학생들의 신뢰를 모조리 잃어버릴지도 모른다. 학생들은 그런 사실을 입 밖에 내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마음으로는 이 일을 민감하게 받아들일 것이다. 어쨌거나 교사로서 이토록 부끄러운 일은 없을 것 같다.
만약 내가 교사였다면 그런 치욕은 도저히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학생들에게 거짓을 가르쳐서 미안하다고 사과하며 그 자리에서 사직했을 것이다. 내 생각에 학생을 속인 죗값을 치르는 방법은 그것뿐이다. (p.272)
이는 전쟁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나는 분명 전쟁에 관해 아무것도 몰랐고,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다. 정의를 위해서라고 한결같이 배웠던 전쟁이 실은 무모한 침략전쟁이자 타국에 대한 뻔뻔한 강도질이었다는 것은 패전 후에야 배울 수 있었다. 그거야 아무래도 좋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내가 그 전쟁을 찬양했고, 심지어 지원까지 해가면서 거기에 참가한 인간이라는 사실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침략을 수행한 병사 가운데 한 명이었다는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 그것만은 나 아닌 누구에게도 떠넘길 수 없다. 나 스스로 내 책임으로 떠맡는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몰랐다, 속았다 같은 말은 책임을 피하는 변명이 될 수 있어도 책임 자체를 없애지는 못한다. 몰라서 속았다면 무엇보다 그렇게 속아 넘어간 나 자신에게 책임이 있을 것이다.
법으로 따지자면, 인간의 책임 연령은 만 14세라고 한다. 평범한 사람은 이 나이가 되면 자신의 행위와 그로 인한 결과를 스스로 판단할 책임 능력이 있다는 얘기다. 군대에 지원했을 때 내 나이는 열다섯이었다. 이미 그 나이를 지났던 것이다. 그러므로 당연히 자원입대를 하는 결정적 순간에 자신이 지금 무엇을 위해 어떤 목적으로 군대에 지원하는지, 또 장차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 진지하게 생각해야 했다. 그러나 나는 그러지 않았다. 그런 것은 처음부터 생각도 하지 않았다.
전쟁은 악이다. 왜냐하면 인간을 괴롭히고 같은 인간끼리 서로 죽이는 짓이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지극히 당연한 이 불변의 진리조차 당시의 나는 전혀 떠올리지 못했다. 그리고 그런 상태로 전쟁을 광신적으로 찬양했고, 어떤 두려움도 없이, 그야말로 소풍이라도 가는 양 들뜬 기분으로 해군 훈련소의 문을 나섰던 것이다. 더 나아가 그로부터 4년 동안이나 피비린내 나는 살육 현장에 머물면서도, 전쟁의 악에 눈을 뜨지 못했다.
그랬던 내가 전쟁의 악에 눈을 뜨기까지는 동포 이백 수십만 명이, 아니, 세계적으로는 수천만 명이 넘는, 정신이 멍해질 정도로 많은 인명이 희생돼야 했다. 생각해보면 얼마나 가혹한 대가인가. 수천만 명이 피 흘린 끝에 겨우 깨달은 책임의식이다. 게다가 내 안에서 싹튼 것이 아니라 전쟁에 패하면서 바깥으로부터 주어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렇게 죽지 않고 살아 있다. 죽을 자리를 놓치고 바다 위에서 육지 위로 올라왔다. 하지만 끝까지 살려고 해서 살아남은 것은 아니다. 내 손은 수많은 사람의 피로 더럽혀졌다. 나는 무사시에서도 하야나미에서도 함포 사수였다. 그래서 포를 발사했다. 사적으로는 어떤 적의도 느끼지 않았던 미군을 죽였던 것이다. 또 해전이 벌어질 때마다 많은 동료가 죽었다. 머리가 으깨진 사람, 유리처럼 산산조각 나서 바다로 흩어진 사람, 단말마에 몸부림치며 함과 운명을 함께한 사람도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 수많은 동료의 주검이 바다 밑에 가라앉도록 내버려둔 채, 때로는 죽어가는 동료마저 외면한 채, 혼자만 살아서 돌아왔다. 나는 천황이라는 문제와 더불어 이 점 또한 스스로에게 다시금 철저히 확인시켜두고 싶다.
오늘 여기까지 생각을 밀어붙인 덕분에 귀환한 후로 줄곧 답답했던 부분이 어느 정도 정리된 것도 같지만, 기분은 오히려 전보다 더욱 팽팽하게 긴장된 것 같다. 까닭 없이 초조한 느낌이 든다.
사람은 책임을 모른 척하고 넘어갈 수는 있다. 그러나 스스로를 속일 수는 없다. (p.294-296)
요시코 누나는 나를 볼 때마다 학문이 사람한테 얼마나 중요한지 얘기해준다. 그런 점을 보면 역시 학교 선생님이다. 오늘 밤에도 가난한 무사 집안 출신으로 힘들게 공부해서 학문으로 이름을 날린 후쿠자와 유키치 이야기를 자세히 들려줬다. 그런 식으로 내가 중학교에 진학하게 유도할 생각인가보다. 하지만 나는 학문이 그토록 중요한 것이라고는 도무지 생각할 수가 없다. 누나 말에 따르면 학문은 진·선·미를 추구해서 인류에 봉사하는 것이라지만, 그런 학문이 전쟁에는 어떻게 봉사했던가. 이번 전쟁에서 수많은 사람이 고통을 겪었고, 수많은 사람이 피를 흘렸고, 수많은 사람이 희생됐다. 그런데 진리를 추구해서 인류의 행복에 봉사해야 할 학문이 그 전쟁을 끝내 막지 못했다면, 이 세상의 학문과 예술과 문화는 모두 거짓말이고, 모두 무의미하다. 나는 그렇다고 생각한다. (p.302-303)
밭 거름에 쓸 건초를 베러 인노 들판에 갔다. 줄다리 바로 앞의 바위가 드러난 산기슭 길을 터벅터벅 올라갔다. 숲 여기저기에 동백꽃이 피어 있었다. 마취목의 하얀 꽃도 지금이 한창때다. 개울 건너편 둑에 어린애 대여섯 명이 쭈그리고 앉아서 쑥을 뜯고 있었다. “이쪽에도 연한 쑥이 잔뜩 나 있어”라며 재잘거리는 소리가 졸졸 흘러가는 시냇물 소리와 섞여서 들려왔다. 2~3일 따뜻하고 화창한 날이 이어진 덕분인지, 후지 산도 하얀 눈옷을 4부 능선까지 벗고 진갈색 등허리에 볕을 쬐고 있다. 건초는 저녁때까지 두 마지기 분량을 논까지 지고 날랐다. (p.358)
저녁에 세이이치한테 달걀을 갖다주러 갔더니 화롯가에서 아저씨와 아주머니가 말싸움을 하는 중이었다. 부부 싸움은 언제 들어도 짜증스러운데, 오늘은 식량을 사러 온 사람 때문에 다툰 모양이었다.
우리 집에도 도시 사람들이 식량을 사러 곧잘 찾아온다. 우리 어머니는 원래부터 사람이 좋아서 뭐든 듬뿍 퍼주기 때문에, 누가 와도 싫은 내색을 안 한다. 우선 다른 곳의 시세를 물어보고 교환할 물건을 찬찬히 살펴본 다음, 다른 곳보다 훨씬 더 싼 가격에 식량을 내준다. 아버지는 그 점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이따금씩 버럭댄다.
“하여튼 밑 빠진 양동이 같은 여편네야. 뭐 하나 남기는 법이 없어.”
“그럼 당신도 한번 식량을 구하러 돌아다녀봐. 직접 다녀보면 그딴 소리는 꺼내지도 못할걸.”
그때마다 어머니는 지지 않고 성난 얼굴로 받아치는데, 어머니 말이 백번 옳다. 그저께 식량을 사러 온 사람한테 들으니 도쿄는 벌써 열흘 넘게 배급이 늦어지고 끊기기도 하는 모양이다. 쌀은 하루에 약 300그램, 가끔 나오는 구호미도 한 사람당 고작 150그램 정도라고 한다. 수중에 식량이 있으면 내놓는 것이 도리다. 이럴 때 인색하게 구는 것은 차라리 죄악에 가깝다. 어머니는 다섯 살 무렵에 외가가 파산하는 바람에 학교를 못 다녀서 읽고 쓰기도 제대로 못 하지만, 인품으로 따지면 천성이 제멋대로인 데다 인색하고 돈이 최고라고 생각하는 아버지보다는 훨씬 더 훌륭하다. (p.360-361)
밤, 『러시아 작가 3인집』에서 고리키의 「첼카시」를 읽었다. 첼카시가 비 내리는 바닷가에서 한패인 가브릴라에게 지폐 다발을 내던지고 호통치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300루블, 500루블 같은 푼돈에 영혼까지 팔다니……!”
첼카시는 도둑이기는 해도 확실히 긍지를 지닌 인간이다. 그에 비하면 농민인 가브릴라는 욕심이 많고 부끄러움을 모르는 꼬락서니가 꼭 바퀴벌레 같다.
나는 이 단편을 읽고 인간에게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새삼스레 배운 기분이 든다. 앞에 실린 체호프의 단편은 『귀여운 여인』 말고도 두세 편 읽어봤는데, 나한테는 조금 지루해서 어디가 좋은지 잘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날카롭게 깎은 연필처럼 장식 없이 간결한 문장은 마음에 들었다. 외국 소설은 이 책이 처음인데 앞으로도 이것저것 읽어보고 싶다. (p.373-374)
“한 표에 500엔이라는 소문도 있는데, 이 근방에서는 대강 200엔에서 300엔이 시세인 것 같아. 뭐, 아무리 돈을 많이 뿌려도 당선만 되면 본전은 금방 거둬들이니까 싼 거지.”
도시에서는 암시장에서 쌀을 잔뜩 사다가 자기 이름이 적힌 봉투에 한 되씩 넣어 선거 운동원들한테 나눠주는 후보자도 있다고 한다.
정말이지 지독하다. 그런 주제에 선거 공보를 보면 어느 후보랄 것도 없이 온갖 거창한 말을 늘어놓고 있다. 도의와 민주주의를 확립하겠다, 암거래를 박멸하고 생활을 안정시키겠다, 문화국가를 건설하겠다, 평화국가를 건설하겠다…… 그리고 그 밑에는 한결같이 “공약을 지키기 위해 사리사욕을 버리고 신명을 바칠 각오가 돼 있습니다”라고 적혀 있다. 다들 말은 그럴싸하지만, 결국 뒤에서는 돈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면서 그것을 말로 덮을 뿐이다. 말하자면 듣기 좋은 상투어를 두서없이 지껄이는 것뿐이다.
그 증거로 ‘나는 이러이러한 것은 할 수 있지만 저러저러한 것은 약속할 수 없다’라는 식으로 자기 말에 확실히 책임을 지고 정견을 발표하는 후보자는 한 사람도 없다는 것을 들 수 있다. 다들 못 하는 일이 없는 팔방미인이다. 뭐든 다 할 수 있다는 말은 결국 아무것도 못 한다는 뜻인데도……. (p.403-404)
인생의 맛 모모푸쿠 / 데이비드 장 / 푸른숲
돌아보면 아버지는 전형적인 한국 남자였다. 아시아계 울타리 밖의 미국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게 없었다. 그들은 아이가 나쁜 성적을 받거나 사소한 말썽을 부릴 때 혼을 냈다. 흔히 말하는 훈육 수준이 아니었다. 조건부라는 느낌이 확실히 드는 사랑이었다. 아시아계의 호랑이 육아(tiger parenting)는 용어부터 문제다. 자식에게 고통을 주고 기를 죽이는 육아법이 귀엽다고 생각하게 한다. 게다가 아시아계 학생이라면 부모가 몰아붙여 키우므로 공부를 잘할 거라는 선입견까지 만들어냈다. 물론 전부 사실이 아니다. 모든 아시아계 부모가 호랑이 육아를 하지는 않는다. 이 방법이 꼭 성공한다는 보장도 없고, 아시아계 아이라고 해서 반드시 공부를 잘하는 것도 아니다. 그들을 하나로 뭉뚱그려 생각할 수도 없다. 미국에 사는 젊은 아시아인들은 다 똑같다는 취급을 받지 않기 위해 각 분야에서 다방면으로 싸워야 했다. (p.17)
나는 언제나 동료들보다 뒤처졌지만, 매일매일 주방에서 새로운 기회를 마주했다. 주방에서는 골프와 달리 모자란 재능을 순수하고도 우직한 의지력으로 메울 수 있었다. 나는 도마 앞에서 느리게 움직였지만, 점점 성과를 냈다. 나는 주방에서 삶의 목적을 찾았다. 퇴근 후에는 집에 돌아와 소파에 처박힌 채 녹화해둔 PBS 방송국의 요리쇼를 보면서 조리 기술을 다듬었다. 나는 몇 시간 동안 감자, 당근, 순무를 둥글게 돌려 깎았다. 그때는 요리와 요리 공부 말고 어떤 일도 한 기억이 없다. (p.38-39)
“저는 언더그라운드 음식이 오버그라운드로 올라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유럽과 아시아의 음악, 미술, 패션에서 그런 현상이 벌어졌다. 그렇다면 음식은 왜 안 될까? 왜 미국에서는 안 될까? 나는 함께 요리하는 이들과 이런 아이디어를 이야기할 수 없었다. 당시 뉴욕에서 외식이란 여전히 돈 많은 특권층을 위한 영역이었다. 적어도 내 친구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좋은 음식점에서 저녁을 먹자고 이야기하면 돈을 세절기에 넣고 돌려버리자는 이야기처럼 받아들였다.
하지만 아시아에서는 완전히 반대였다. 일본의 식료품점이나 야키토리 가게, 베이징의 후통에 늘어선 노점 등 식도락은 삶의 기본이었다. 외식은 비싸지 않아 할 만했으며 일상에서 중요한 부분이었다. 버지니아주의 하위 중산층 아시아인 가정조차 중국집에서는 매주 한 번 외식할 수 있었다. 가난한 사람은 좋은 음식을 누릴 수 없다는 생각은 잘못됐다. 나는 엘리엇 박사에게 전통적인 셰프의 길에서 벗어나고 싶다고 말했다. 이미 실패한지라 실패가 두렵지는 않았다. 나에게 다른 길이 있을 거라 믿었다. 파인 다이닝 레스토랑에서 내가 원하는 것과 거리가 있는 음식을 요리해서 얻을 게 없었다. 카페 불뤼를 그만뒀을 때 나는 스스로를 살릴 생각도 하지 않았다. 이미 죽을 각오가 돼 있었고, 그전에 가슴에 쌓인 응어리를 털어내고 싶었다. (p.57-58)
언제 일이 끝나고 시작되는지 아무도 몰랐다. 우리는 한참 시간이 흐른 뒤에야 이해할 수 있는 무엇인가의 일부였다. 우리는 함께 세계를 만들어나갔으며 때때로 일에 압도될 것 같았지만, 온 힘을 기울였다는 게 특권이었음을 이제야 깨달았다. 나이를 먹을수록 일에 집중하기 어려워진다. 화로에서 멀어질수록 일이 잘된다. 오늘날까지 퀴노와 만나 저녁을 먹거나 맥주를 마실 때마다 우리는 모모푸쿠의 탄생기가 인생 최고의 시기였다고 말한다. 그 점에서 향수란 참 웃긴 감정이다. 다른 이들에게 강요하지는 않겠지만 모두가 당시의 기억을 나만큼이나 소중하게 여겼으면 좋겠다. (p.130-131)
셰프가 되고 싶다고 백 퍼센트 확신하더라도 요리학교보다 일반 대학교를 가라. 요리학교는 요리사를 배출한다. 셰프가 되고 싶다면 요리보다 더 넓은 세계를 알아야 한다. 사람들과 어울릴 줄 아는 동시에 비판적이고 창조적인 사고가 필요하다. 수학과 과학도 알아야 한다. 역사는 물론이다. 양서를 읽어왔다면 도움이 된다.
공학, 화학, 미생물학, 역사, 철학, 문학 등을 전공하기 위해 대학에 가라. 셰프가 되든 안 되든 도움이 될 것이다.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의 역사를 배우고 세계 문화의 발전에 주의를 기울여라. 메디치 가문, 오토만 왕조, 칭기즈칸, 아즈텍 부족, 재레드 다이아몬드, 다윈주의를 공부하라. 나는 대학에서 역사를 전공했는데 바가바드 기타를 배우고 인생이 바뀌었다. 논리와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도 같은 영향을 미쳤다. 토론 모임에 가입하고 피아노를 배우라. 대학 신문 기자로 일해라. 친구들과 그들의 이야기에 관심을 기울여라. (p.371-372)
이 책에서 이미 몇 번이나 말한 이야기를 한 번 더 강조한다. 분명 나쁜 아이디어는 있지만, 모든 아이디어는 발전시켜볼 만한 가치가 있다. 때로 보나 마나 실패라고 확신한 아이디어가 생각보다 좋은 결과를 내서 놀랄 수도 있다. 하지만 하나의 아이디어를 최대한 발전시켜보고 여러 방향으로 살펴본다면 틀림없이 가치 있는 무엇인가를 배울 수 있다. 너무나 많은 젊은 셰프가 첫 시도만으로 생각을 접는다. 모든 요리와 서비스가 데이터를 모을 기회다. 배우지 않으려 든다면 손해일뿐이다. (p.3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