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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업자 도시 마리엔탈 / 마리 야호다, 파울 라차르스펠트, 한스 차이젤 / 이매진

 

 마리엔탈 노동자 도서관 이용 기록도 독서 활동이 줄어든 상황을 보여준다. 예전하고 다르게 대출 수수료가 폐지된 대출 건수는 1929년에서 1931년 사이에 49퍼센트 감소했다. 독자 수가 준 탓이 크지만, 계속 도서관을 이용하는 몇몇 사람도 전보다 책을 훨씬 덜 읽는다.
 도서 대출이 줄어든 이유는 도서관에 책이 부족한 때문이 아니라 관심이 떨어진 탓이었다. 물론 도서관이 지닌 잠재력이라고 해봐야 이내 고갈되고 말 정도였다. 공장이 문 닫기 직전에 이웃 마을 도서관을 통째로 인수해서 장서가 늘어났지만, 그래도 대출 건수는 계속 줄어들었다.
 흔히 실업자는 시간을 활용해서 더 교육을 받지 않는다고 여겨지지만, 문제가 그렇게 간단하지는 않다. 실업자를 둘러싼 상황을 놓고 그냥 시간만 남아돈다고 생각한다면, 독서를 향한 관심이 오히려 줄어드는 모습을 보고 놀라게 된다. 그렇지만 실업자의 심리적 상황을 한 가지 면만이 아니라 전체적으로 보면, 이런 수치는 우리가 기본적 상황에 관해 아는 내용을 확인해줄 뿐이다. 사람들도 스스로 이 점을 알고 있었다. (p.108-109)

 

 네 범주 중 세 범주를 묶는 특징은 생활비를 꼼꼼하게 관리한다는 점이다. 여성들이 대화하면서 관련된 숫자를 전부 기억해내는 모습을 보면, 우리는 그 사람들이 몇 푼 안 되는 돈이나마 어떻게 쓸지를 항상 궁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런 덕분에 우리는 앞 장에서 가계부를 쓰라고 설득은 하지 못해도 가족들의 생활비를 어느 정도 조사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이렇게 꼼꼼하게 살림을 꾸리는 사이에도 종종 말도 안 되는 지출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는 사실 또한 마찬가지로 중요하다. 때로는 이렇게 ‘돈 펑펑 쓰기’가 해체를 알리는 첫 신호일지 모르겠지만, 때로는 그냥 과거의 풍요로운 경험으로 이어지는 마지막 남은 연결 고리이기도 했다. 어느 쪽인지 판단하는 일이 항상 가능할 수는 없다. 여기 놀라우면서도 언뜻 비합리적인 지출의 사례가 몇 가지 있다.
 감자를 비롯한 채소가 중요한데도 많은 주말농장에서 꽃을 키운다. 감자 160파운드 정도를 수확할 수 있는 땅에 카네이션과 튤립, 장미, 초롱꽃, 팬지, 달리아를 가득 심는다. 우리가 왜 꽃을 심느냐고 물었더니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빵만 먹고 살 수는 없죠. 마음을 위해 뭔가 필요하니까요. 집에 꽃병에 놓아두면 기분이 좋거든요.”
 실업 급여 수급 자격이 1년 전에 끝난 가족은 돈이 없어서 설탕을 포기하고 사카린만 쓰는데다가 아이들도 전혀 돌보지 않는데, 어느 날 노점에서 겨우 30그로셴이지만 베네치아 그림을 한 장 샀다. 긴급 생계 지원을 받아 근근이 살아가는 다른 가족은 식구 한 명이 세상을 떠나자 꽤 큰돈을 들여 상복을 샀다. 그리고 어느 50세 여자는 갑자기 할부로 고데기를 사기도 했다. (p.137-138)

 

 마리엔탈 아이들이 바라는 선물의 가격은 다른 아이들이 기대하는 선물에 견주면 3분의 1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아이들은 소박한 바람조차 드러내 말하는 일이 드물었다. 마리엔탈 아이들이 쓴 작문의 3분의 1 정도가 가정법으로 쓰였다. 아이들은 보통 글의 첫머리를 ‘만약 부모님이 실직하지 않았더라면’ 같은 문장으로 시작했다. 열한 살짜리 남학생은 이런 글을 썼다.

부모님이 돈이 좀 있으면 바이올린하고 옷 한 벌, 포스터물감, 붓 하나, 책 한 권, 스케이트 한 켤레, 코트 한 벌을 받고 싶다. 겨울 코트 하나를 받았다.

 같은 나이인 여학생이 쓴 글이다.

엄마 아빠가 실직자가 아니면 아기 예수님한테 선물을 많이 달라고 했을 텐데. 안경 하나 말고는 아무것도 받지 못했다. 지도책하고 나침반이 갖고 싶었는데.

 아홉 살짜리 초등학생은 이렇게 썼다.

사진 앨범을 받으면 좋았을 텐데. 부모님이 실업자라서 아무것도 못 받았다.

 크리스마스 전에는 체념하지 않던 아이들도 그 뒤에는 마음을 내려놓았다. 마리엔탈의 아이들 대부분에게 크리스마스는 기쁨과 놀람보다는 실망을 의미했다. 받고 싶은 선물과 실제로 받는 선물이 너무 차이가 난 현실이 증거다. (p.142-144)

 

 중등학교 학생들 전체에게 ‘실업에 관한 생각’이라는 주제를 준 뒤 글을 써보라고 했다. 가정에서 실업을 겪어서 실업이 뭔지 아는 아이들과 이웃 마을 아이들 사이에 커다란 차이가 드러났다. 이웃 마을 아이들도 실업에 관해 알기는 했다. 그렇지만 마리엔탈 아이들은 무기력하게 체념하고 받아들인 반면, 다른 아이들은 자기가 실업자와 낙오자에 속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만족하는 한편 언젠가 같은 운명을 겪게 될지 모른다는 사실에 공포를 나타냈다.
 마리엔탈 인근에 사는 열두 살짜리 소년은 부모가 농민이었는데, 이런 글을 썼다.

아직 가난과 실업에 관해 생각한 적은 없지만, 그래도 아직 먹고 싶은 만큼 먹을 수 있어서 다행이다.

 인근에 사는 노동자의 아이는 이렇게 썼다.

유럽 나라들은 대부분 빈곤과 실업이 있다. 많은 부유한 가정에서 빵과 남은 음식을 버리는데, 많은 가정은 매일 빵이라도 먹으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나라가 똑같은 사정이다.

 ‘다행이라고 생각한다’는 이 구절은 자기는 행복하며 자기보다 불운한 모든 이들하고 완전히 분리돼 있다는 마음을 가장 강하게 표현하는 말이다. 그렇지만 마리엔탈 아이들은 경험에서 우러난 글을 썼다. 열두 살짜리 학생은 특히 가난에 관한 인식이 이미 마음속 상상에 침투한 모습을 분명히 보여줬다.

나는 조종사나 잠수함 함장, 인디언 추장, 기계공이 되고 싶다. 그런데 일자리를 구하기가 아주 어려울까 봐 걱정이다.

(p.145-146)

 

 노동 계급이 자기 권리를 위해 싸움을 시작한 이래로 여가 시간을 확대하려고 얼마나 끈질기게 투쟁한지를 아는 사람이라면 비참한 실업 상태에서도 사람들은 무제한적인 자유 시간의 혜택을 누리게 된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렇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런 여가 시간은 비극적인 선물이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일을 그만두고 외부 세계를 잇는 접촉이 끊어진 마리엔탈 노동자들은 시간을 활용해야 하는 물질적이고 정신적인 유인을 상실하고 있다. 이제 어떤 압박도 없기 때문에 새로운 일을 전혀 하지 않으며, 질서 잡힌 생활에서 벗어나 점점 아무 규율 없고 공허한 생활로 빠져든다. 이런 자유 시간 중에서 어느 때를 돌아봐도 별로 언급할 만한 사실을 떠올리지 못한다. (p.153)

 

 이 질문지에 추가된 다음 언급을 보면, 노동자들은 이런 식으로 시간을 쓰는 삶이 허무하다는 사실을 의식하고 있다는 점이 드러난다. “실직하면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까?” 과거에 관해서는 이렇게 말한다. “전에는 나 자신을 위한 시간이 별로 없었는데도 나를 위해서 많은 일을 했다.” “지금은 우리가 실직 상태라 바쁠 일이 전혀 없다.”
 빈에 사는 금속 노동자가 자유 시간을 쓰는 방식을 떠올리면, ‘나를 위해서 많은 일을 했다’는 발언의 의미가 특히 분명해진다. 자유 시간이 한정돼 있다는 조건을 알면 누구나 그 시간을 잘 궁리해서 활용한다. 반면 시간이 남아돈다고 느끼면 시간을 활용하려는 노력 자체가 쓸모없어 보인다. 점심 먹기 전에 하는 일은 점심 먹고 해도 되고 저녁에 해도 된다. 그러다 보면 그 일을 하지도 않았는데 어느새 하루가 지나가버린다. (p.160)

 

 ‘실업자’라는 용어는 엄격한 의미에서 남성들에게만 적용된다. 여성은 실업자가 아니라 단지 무급이기 때문이다. 여성은 살림을 꾸리는 일만으로도 하루를 전부 써야 한다. 여성들이 하는 일은 목표가 분명하며, 정해진 작업과 기능, 의무가 많아서 매일 반복해야 한다.
 (…)
 따라서 여자들은 하루 종일 쉴 새 없이 일을 한다. 밥과 빨래, 바느질을 하고, 아이를 돌보고, 꼼꼼히 가계부를 쓰고, 집안일을 하느라 여가 시간이 거의 없다. 자원이 부족한 때라 집안일이 더욱 어려워진다. 실직한 남성과 그 사람의 부인에게 시간의 의미가 다르다는 사실은 이따금 벌어지는 사소한 충돌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한 여성은 이렇게 말한다.

지금은 전에 견줘 하는 일이 한결 줄었지만, 사실 하루 종일 바쁘고, 잠시도 쉴 새가 없다. 전에는 애들 옷을 사 입힐 수 있었다. 지금은 하루 종일 옷을 수선하고 기워서 그나마 멀쩡해 보이게 만드느라 바쁘다. 남편은 나보고 무슨 일이 그렇게 끝이 없냐고 핀잔을 준다. 다른 여자들은 거리에서 잡담하는데 나는 온종일 일을 해도 끝이 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남편은 남부끄럽지 않게 항상 아이들 옷을 수선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하나도 모른다.

 다른 여성이 하는 말을 들어보자.

요즘은 점심때마다 싸움이 벌어진다. 전에는 시계처럼 시간을 지키던 남편이 요즘은 제시간에 식탁에 앉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남성들은 몇 안 남은 정해진 시간도 별로 지키지 않는다. 세상에 딱히 해야 하는 일이 아무것도 없는 까닭에 시간을 준수하는 게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p.165-167)

 

 그리하여 이 책을 마무리하면서 우리는 몇 달간 이토록 밀접하게 접촉한 이 사람들 중에서 일부의 생생한 모습을 독자에게 보여주려 했다. 전반적이고 전형적인 삶의 모습을 겨냥하면서 우리가 진행한 조사 연구와 우리가 활용한 방법론의 한계가 여기에서 드러난다. 우리는 과학자로서 마리엔탈에 와서 단 하나의 바람만을 품고 떠난다. 이런 조사 연구를 수행할 수 있는 비극적 기회가 우리 시대에 다시 생겨나서는 안 된다는 바람이다. (p.199)

 

 

낭비 사회를 넘어서 / 세르주 라투슈 / 민음사

 

 광고는 우리로 하여금 아직 가지지 못한 것을 욕망하게 하고 이미 누리고 있는 것을 비하하도록 부추긴다. 광고는 좌절된 욕망의 긴장을 조장하고 또 조장한다. 광고계의 거물들은 자랑스럽게 스스로를 “불만을 파는 상인”이라고 부른다. 프레데리크 베그베데는 거리낌 없이 선언한다. “나는 광고인이다. 이 일을 하는 사람들 중에 당신의 행복을 바라는 사람은 없다. 행복한 사람은 소비하지 않기 때문이다.”

 

 기술적 진부화가 산업의 진보 속에 불가피하게 포함되는 일부이자 모더니티의 내재적 현상이라는 것을 인정한다 해도 나머지 두 형태의 진부화 역시 그렇다고 보기는 힘들다. 진부화의 역사적 전환점은 1923년 제너럴 모터스사가 포드사와 경쟁하기 위해 쉐보레(Chevrolet) 모델을 출시한 순간이었다. 이 모델의 차별점은 기술적 우위가 아니라 겉모습에 있었다. 심리적 혹은 역동적 진부화라 할 만한 것으로, 광고를 통해 소비자를 자극함으로써 2~3년에 한 번씩 다른 모델로 차를 바꾸도록 설득하는 방식이었다. 1928년에는 ‘진보적(progressive)’ 진부화라는 말이 처음 등장했고, 1932년에는 반짝 나타났다가 사라지긴 했지만 심지어 ‘진부화주의(obsolétisme)’라는 신조어까지 등장했다.

 

 더 깊은 차원에서 보면, 갈수록 제품들의 폐기 시점을 앞당기는 것은 체제의 필요와도 잘 맞아떨어진다. 몇몇 기업은 마모되지 않는 면도날에 대한 특허를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생산을 포기했다. 귄터 안더스는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왜냐하면 그 제품들이 사실상 지니게 될 불멸성이 생산의 종말을 초래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생산이 계속되려면 제품들이 죽어야 한다. (그래서 끊임없는 재구매가 이루어져야 한다.) 즉 생산의 ‘영생’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각 생산물의 죽음이 필요한 것이다.”

 

 우리는 계획적 진부화, 상징적 진부화, 기술적 진부화의 실질적인 공존을 목도하고 있다. 이제 이 세 형태를 결합하는 방식으로 여론 조작이 진행된다. 예를 들어 나는 2년간 사용해 오던 컴퓨터가 고장 나면 이를 수리하는 대신 이 기회에 좀 더 성능이 좋은 새 모델을 구입한다. 혹은 반대로, 차가 고장을 일으킬까 봐 두려운 나머지 2년마다 새 차를 구입한다. 치명적인 고장에 대한 두려움은 우리 사회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며,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심각한 공포심을 유발한다. 즉 생활필수품이 되어 버린 기계가 고장을 일으킬 경우 수리할 곳을 찾고 수리 기간 동안 그것 없이 생활해야 한다는 생각만으로 걱정과 불안이 앞서, 방법만 있다면 그 상황을 피하고 싶어지는 것이다.

 

 가전제품을 더욱 정밀하게 만드는 것 역시 계획적 진부화의 전략에 속한다. 필요 이상의 부품들이 자꾸 추가되다 보니 잔고장만으로 제품 전체를 못쓰게 되는 경우도 많다. 아이팟의 배터리 고장 문제와 관련해 이미 살펴봤듯이 작은 부품의 고장이 새 제품 구매를 유도한다. 전문가들은 그중에서도 가장 조심해야 할 가전제품으로 토스터, 다리미, 커피 머신을 든다. 이 제품들에 공통적으로 들어가는 온도 조절 장치가 고장을 자주 일으키기 때문이다.

 

 계획적 진부화의 도덕성을 묻는 것 자체가 이상해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귄터 안더스가 지적했듯 오래전부터 이미 현대 경제 체제, 더 나아가 사회 전체에 대해 선과 악을 논하는 것 자체가 ‘진부한’ 일이 되어 버렸다. 제너럴 모터스사에 좋은 일은 미국을 위해서도 좋은 일 아닌가? 미국을 위해 좋은 일은 전 세계를 위해서도 좋은 일 아닌가? 따라서 계획적 진부화가 제너럴 모터스사를 위해 좋은 일이라면 그것은 미국을 위해서도 좋은 일이고 인류 전체를 위해서도 좋은 일인 셈이다. 특정 한계를 넘어서 버리는 순간 우리의 실행 능력은 느끼고 상상하는 능력을 무한정 초월해 버리고 만다. 안더스가 ‘프로메테우스적 괴리’라고 명명한 이 해소할 길 없는 간극은 우리의 도덕의식을 말 그대로 마비시켜 버린다. 인간의 무한정한 능력이 인류의 생존 자체를 위협하는 상황에서 계획적 진부화의 도덕성에 관한 질문은 반드시 제기되어야 한다.

 

 반대편에는 시카고의 경제·금융 전문가 시어도어 레빗이 있었다. 그는 사업가들에게 자신들의 행동이 야기하게 될 문화적, 정신적, 사회적, 도덕적 결과에 연연하지 말 것을 권고했다. 사업가의 존재 이유는 오직 하나다. 수요를 만족시키는 물건을 만들어 공급하는 것이다. 그 대가로 그들은 이윤을 챙긴다. 따라서 영혼의 구원, 정신적 가치의 수호, 인간의 존엄과 자존감 보호 등은 그들의 관심 밖이다! 조직의 명령이라면 무비판적으로 실행에 옮기는 아돌프 아이히만의 ‘도덕’과 마찬가지로, 위와 같은 생각은 악의 일반화로 향한 문을 열어 준다.

 

 프랑스의 역사가이자 사회학자인 자크 엘륄은 이런 현상을 다음과 같이 분석했다. “우리의 모든 문명은 일시적이다. 우리는 과소비를 자랑으로 여기지만, 그것은 신속한 소비를 위해 생산된 물건들을 금방 쓰고 버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더 이상 물건을 고쳐 쓰지 않는다. 그냥 내다 버린다. 값싸게 구입할 수 있는 플라스틱이나 나일론 제품들은 처음부터 잠깐 쓰고 버리도록 고안된다. 이것들은 새 제품의 윤기가 사라지자마자 버려진다. 주택들은 감가상각 기간에 맞춰 지어진다. 우리는 더 이상 미학적 세계 속에서 성당을 짓지 않는다. 대신 우리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부은, 우리의 가장 심오한 메시지를 담은 최상의 예술 작품인 영화를 만든다. 하지만 이 영화들은 몇 주만 지나면 잊히고 만다. 오직 소수의 애호가들만이 시네마테크를 뒤져 지난 영화들을 찾아볼 뿐이다. (……) 인간의 재능이 결집된 보물들, 어마어마한 노동의 결집체, 인간의 열정 등이 모든 활동의 측면에서 이런 일시적인 대상들을 만드는 것으로 귀결된다. 그리고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 우리는 훗날 잘 갈린 부싯돌 하나 남기지 못할 것이다.”

 

 다른 한편, 지나친 낭비를 조장하는 생산과 가속화된 소비에 비례하여 증가하는 쓰레기들을 처리할 방법이 없다. 한때 나폴리의 쓰레기 대란이 화제가 되기도 했지만, 산더미같이 쌓인 쓰레기들을 처리할 방법을 찾지 못해 고심하는 건 다른 나라들도 마찬가지다. 만만치 않은 비용이 들어갈 뿐 아니라 아무리 좋은 시설을 갖춰도 환경 오염 물질의 배출이 불가피한 쓰레기 소각로는 모순적인 해결책일 뿐이다. 소중한 잠재적 자원을 파괴할 뿐 아니라 에너지 생산 효율도 높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전자 제품들이 골칫거리다. 평균 18개월 정도 사용되고 버려지는 휴대 전화는 비소, 안티몬, 베릴륨, 카드뮴, 납, 니켈, 아연 등 생물체에 유해한 다량의 독소를 포함한 쓰레기 더미들을 만들어 낸다. 이것들을 소각한다는 것은 다이옥신과 푸란, 그 밖의 오염 물질을 대기 중으로 뿜어낸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2002년 미국에서는 여전히 작동 가능한 휴대 전화 1억 3000만 대가 폐기 처분됐다. 이런 추세는 앞으로 더욱 심해질 것으로 보인다. 휴대 전화를 한 대만 소유하는 것이 양말 한 켤레로 살아가는 것만큼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되는 시대가 곧 올 것이다.

 

 전쟁이 끝난 후, 성탄절 전야에 놓아둔 신발 속에 오렌지 하나가 들어 있는 것을 처음 발견했던 순간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나는 그게 헤스페리데스 정원의 황금 사과라도 되는 양 기쁨의 탄성을 내질렀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난 한여름밤, 집에 냉장고가 있었던 부잣집 아이가 가져온 정육면체의 얼음 조각들을 달콤한 사탕이라도 되는 양 맛있게 씹어 먹던 기억도 난다. 상품만이 넘쳐 나는 가짜 풍요는 우리에게서 자연의 멋진 선물들(혹은 그 선물들을 변형하는 인간의 기발함)에 감탄할 수 있는 능력을 앗아가 버렸다. 이런 감탄의 능력은 우리 마음속에 어머니-대지의 소중함을 깨닫고 그것에 복종하며 살아가는 자세, 더 나아가 일종의 노스탤지어를 고양시켜 준다. 이 능력이야말로 인류의 계획적 진부화라는 암울한 운명을 극복하고 건강한 탈성장 사회를 건설하려는 계획이 성공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조건이다.

 

 

평등은 없다 / 해리 G. 프랭크퍼트 / 글담출판사

 

 평등주의는 종류를 막론하고 기본적으로 중요한 도덕적 이상으로 간주되지만, 나는 이러한 생각을 단연코 거부한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세상에 널리 퍼져 있는 불평등을 수긍하거나 거기에 무관심하거나 불평등을 제거 혹은 개선하려는 노력들에 반대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오히려 나는 그러한 많은 노력들을 지지한다. 내가 그러한 노력들을 지지하는 것은 평등이 그 자체로 도덕적으로 바람직하기 때문에 평등주의적 목표들도 본질적으로 가치 있다고 확신해서가 아니라, 실용성에 기초한 경험적 믿음으로 볼 때 대개의 경우 더 많은 평등이 사회적 혹은 정치적으로 바람직한 목표들을 추구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 보기 때문이다. 나는 평등 자체에는 내재적 혹은 근본적인 도덕적 가치가 없다고 확신한다.

 

 어떤 사람이 자신이 사용할 수 있는 자원에 만족해야 할지 아닐지 알고 싶거나 자신의 복지 수준을 평가하고 싶을 때, 정말로 중요하게 고려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 그의 평가는 개인적이다. 다시 말해 그의 평가는 자신의 구체적인 삶의 질과 관계가 있다. 분명 그는 자신의 삶의 과정이 자신의 개인적 능력과 얼마나 잘 부합하는지, 자신의 특정한 필요를 얼마나 잘 충족시키는지, 자신이 가진 잠재력을 얼마나 잘 실현하는지, 자신이 관심 가지는 것을 얼마나 잘 제공하는지 등에 대한 현실적 추정치를 토대로 평가를 내릴 것이다.
 이런 점들을 고려할 때 그가 다른 사람의 상황과 비교해 자신의 상황을 평가하는 것은 본질적이지 않다. 물론 그런 비교가 종종 도움이 될 수는 있다. 그 사람이 자신의 상황을 더 분명하게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렇다 해도 도움이 될 뿐 문제의 핵심과 관련이 있지는 않다.

 

 우리 삶에서 평등에 대한 요구는 존중에 대한 요구와 매우 다른 의미를 갖는다. 자신을 평등하게 대우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자신의 현실적 조건과 부합하고 자신의 이해관계와 필요를 가장 적절하게 실현해줄 수 있는 것보다는 타인들이 가진 것에 기초해 자신의 요구를 계산하는 것이다. 그의 평등 욕구에는 자기 자신에 대한 적극적 주장이 없다. 그와 반대로 사람들은 단지 타인들과의 평등에 대한 관심 때문에 자신의 특성이나 자신의 상황이 구체적으로 필요로 하는 것과는 다른 고려들에 의거해 자신의 목표를 정한다. 타인들과의 평등에 대한 관심은 그들로 하여금 자신의 진정한 꿈을 인식하지 못하게 하는 경향이 있다. 진정한 꿈은 타인들의 생활 조건이 명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삶의 특징에서 나온다.
 평등주의적 목표의 추구가 종종 강력한 정치적·사회적 이상들을 촉진하는 데 실질적으로 큰 쓸모가 있음은 두말할 필요 없이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세상에 널리 퍼져 있는, 평등이 그 자체로 중요한 도덕적 이상으로서 근본적 가치를 갖고 있다는 믿음은 틀렸을 뿐만 아니라 정말로 근본적인 도덕적·사회적 가치를 지닌 것들을 알아보지 못하게 만드는 장애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