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쉿 잡 / 데이비드 그레이버 / 민음사
유고프 여론조사가 밝혀낸 바에 의하면, 영국에서는 풀타임 직업을 가진 사람들 가운데 자신의 직업이 세상에 어떤 식으로든 의미 있는 기여를 한다고 여기는 사람은 50퍼센트에 불과하며, 전혀 그렇지 않다고 여기는 비율이 37퍼센트에 달한다. 네덜란드의 스하우턴앤넬리선(Schouten & Nelissen)이 실시한 조사에서는 후자의 수치가 40퍼센트까지 상승한다. 생각해 보면 이것은 대단한 통계 수치다. 어쨌든 누구도 무의미하다고 여기지 못할 일들이 일자리 가운데 아주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간호사, 버스 운전사, 치과의사, 도로 청소부, 농부, 음악 교사, 설비 수리공, 정원사, 소방수, 무대장치 디자이너, 배관공, 기자, 보안 관리자, 음악가, 양복 재단사, 학교 건널목 관리자들 중 "당신 직업이 세상을 조금이라도 의미 있게 하는가?"라는 질문에 아니라고 대답한 사람은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 내가 한 조사에 따르면, 상점 점원, 레스토랑 직원, 그 밖의 다른 하급 서비스업 직종 근무자들도 본인의 업무가 불쉿 직업이라고 느끼지 않는다. 그들 중 자기 일을 싫어하는 사람은 많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조차 자신이 하는 일이 세상을 어떤 식으로든 의미 있게 달라지게 만든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한 나라 노동 인구 중 37~40퍼센트에 달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업무가 어떤 차이도 만들지 못한다고 주장하는데, 또 그만큼 적지 않은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고 추정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들이 불쉿 직업에 종사한다고 남몰래 믿는 것으로 추정되는 사무직 노동자가 정말 이렇게 믿고 있다고 결론지을 수밖에 없다. (p.38-39)
세상에는 쓸모없는 관리가 얼마든지 있다는 것을 부정할 사람이 있는지 모르겠다. 그래도 내게 중요한 것은 요즘은 공공 부문만이 아니라 민간 부문에서도 쓸모없는 관료를 충분히 많이 볼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은행이나 핸드폰 매장에서 양복 입은 남자가 알아들을 수도 없는 규칙과 규제를 읽어 대는 짜증스러운 상황은 여권국이나 지역구 의원회(Zoning Board)에서만큼이나 흔하다. 더욱이 공공 부문과 민간 부문의 관료제는 갈수록 너무 심하게 뒤엉켜 버려서 그 둘을 구분하기 매우 힘들 때가 많다. 이 장을 독일 군대와 계약한 민간 기업에서 일하는 남자의 이야기로 시작한 이유이기도 하다. 이 이야기는 불쉿 직업이 대부분 정부 관료제에서만 나타난다는 짐작이 얼마나 틀렸는지를 조명해 줄 뿐 아니라 '시장 개혁' 역시 거의 언제나 관료제를 줄이기보다는 어떻게 더 확대하는지를 보여 준다. 이전 저서인 『관료제 유토피아(The Utopia of Rules)』(2015)에서 지적했듯이, 당신의 거래 은행이 보여 주는 관료제적 행태에 대해 불평하면, 은행 직원들은 십중팔구 그것이 모두 정부의 규제 때문이라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규제가 실제로 어디에서 발생하는지 조사해 보면 대개 은행 자체의 지시임을 알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간 부문은 근검절약하는 데 비해 정부는 과잉 고용 요구와 필요 이상의 행정 관료적 계층제 때문에 가분수가 되어 있다는 추측은 이제 사람들 머릿속에 너무나 확고하게 박혀 버렸다. 아무리 증거를 들이대도 떨쳐 내지 못하는 것 같다. (p.55)
사실 1980년대에 기업 통폐합과 합병 광풍이 불어닥친 이후 기업들에 구조 조정을 하고 효율성을 높이며 불필요한 인력을 해고하라는 압박이 배가되었다. 하지만 이 압박은 거의 전적으로 먹이 피라미드의 밑바닥을 받치면서 실제로 물건을 만들고 유지하고 보수하고 운송하는 사람들에게 가해졌다. 가령 매일 노동을 하면서 유니폼을 입어야 하는 사람은 십중팔구 압박을 심하게 받는 사람일 것이다. 페덱스나 UPS의 배달 노동자들은 '과학적' 효율성에 의거하여 설계된 등골이 휠 정도로 힘든 작업 스케줄을 따라야 한다.
그러나 같은 기업 상층부의 사정은 다르다. 원한다면 이 현상을 경영에서의 효율성 숭배 문화가 갖는 핵심적 약점, 그 아킬레스건까지 소급하여 추적할 수 있다. 경영자들이 가장 효율적인 시간과 에너지로 인적 노동력을 활용하는 방법에 대한 과학적 연구를 들고 나왔을 때, 그들은 같은 기술을 스스로에게는 절대 적용하지 않았다. 설사 적용했더라도 결과는 그들의 의도와 정반대로 나타났다. 그 결과 블루칼라 부문에서 작업 속도 증가(speed-up)와 구조 조정(downsizing)이 가장 가차 없이 적용되던 기간에 거의 모든 대기업에서 무의미한 경영진과 관리자 일자리가 급속히 증가하는 현상이 발생했다. 마치 공장 바닥에서는 끝없이 살을 깎아 내면서, 그로 인해 쌓이는 저축액을 위쪽 사무실의 불필요한 노동력을 확보하는 데 쓰는 것 같았다. (앞으로 보겠지만 일부 회사에서는 이 말이 문자 그대로 실현되었다.) 최종적으로 보자면, 사회주의 체제가 수백만 개의 허깨비 프롤레타리아 일자리를 만들어 낸 것과 똑같이 자본주의 체제는 수백만 개의 허깨비 화이트칼라 직업을 만들어 냈다. (p.56-57)
나는 경제의 불쉿화가 심각하게 중요한 사회적 이슈임을 어떤 의미로도 부정하지 않는다. 위에서 든 수치만 고려해도 좋다. 37퍼센트에서 40퍼센트의 직업이 완전히 무의미하며, 무의미하지 않은 사무실 업무 가운데 적어도 50퍼센트가 똑같이 무의미하다면, 우리 사회에서 행해지는 노동의 적어도 절반은 사라져도 별 상관이 없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그 수치는 실제로 더 높을 것이 틀림없다. 위의 결론에서는 이차적 불쉿 직업, 즉 불쉿 직업 종사자들을 지원하기 위해 진짜 일을 하는 업종은 고려하지도 않았으니 말이다. (이 유형은 2장에서 다루려고 한다.) 우리는 이미 어렵지 않게 여가를 누리는 사회를 만들 수 있고, 주 20시간 노동을 제도화할 수 있다. 주 15시간 노동도 가능하다. 그런데도 그렇게 하지 않고 사람들이 거의 모든 시간을 직장에서 보내도록, 하든 말든 세상에는 아무 영향도 없다고 느끼는 그런 일을 하도록 만드는 사회에 살고 있는 것이다. (p.69)
톰 본인은 자기 직업이 불쉿 직업인 것이 소비문화 자체에 반대하기 때문이라고 보지 않는다. 그보다는 그가 말하는 "미화 작업"이 원천적으로 고압적일 뿐 아니라 사람들을 휘두른다고 보기 때문에 비판하는 것이다. 톰은 정직한 착각과 부정직한 착각을 구분했다. 공룡이 우주선을 공격하는 장면을 보고 그것이 실제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무대에서 공연하는 마술사도 마찬가지다. 그런 기술이 주는 재미의 절반은 속임수가 벌어지고 있음을 다들 안다는 데 있다. 단지 그것이 정확하게 어떻게 가능한지 모를 뿐이다. 이와 반대로 유명 인사의 외모를 미묘하게 개선시킬 때는 일상 현실(여기서는 남녀 신체에 관한 현실)이 원래 어떠해야 한다는 시청자들의 무의식적 가정을 바꾸려고 한다. 그렇게 해서 그들이 살아온 현실이 진정한 실재에 못 미치는 대체물이라는 불쾌감을 이끌어 내는 것이다. 정직한 착각이 세계에 기쁨을 더해 준다면, 부정직한 착각은 의도적으로 사람들로 하여금 세상이란 허접하고 비참한 곳이라고 믿게끔 한다. (p.90)
여전히 스스로를 교수나 학자로 여기기를 좋아하며 학문의 방앗간에서 고생스럽게 일하는 사람들은 이제 '전략적'이라는 단어를 두려워한다. "전략적 임무 보고(Strategic mission statements)"(더 심하게 말하면 "전략적 비전 자료")는 특히 공포감을 심어 준다. 이런 것들이 기업 경영 테크닉(수행 평가를 위한 정량적 방법을 설정하고, 교수와 학자들이 실제로 일하는 시간을 줄이고 대신 그들이 하는 일을 평가하고 정당화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쓰도록 압박하는 기술)을 학계에 주입하는 일차적 수단이기 때문이다. 품질, 탁월성, 리더십, 투자자 같은 단어를 주로 쓰는 자료에도 동일한 의혹을 품을 수 있다. 그래서 나는 클로이가 "전략적 리더십" 지위에 있다는 말을 듣고 즉각 그녀의 직업이 불쉿 직업일 뿐만 아니라 타인의 삶에도 적극적으로 불쉿 업무를 끼워 넣었으리라는 의심이 들었다. (p.110)
고전 경제학 이론에 따르면, 호모 이코노미쿠스 즉 '경제적 인간'(경제학에 의해 만들어지는 모든 예측의 배후에 있는 모델 인간)은 무엇보다 비용과 편익의 계산을 행위 동기로 삼는다. 고객이나 대중의 눈을 어지럽히는 경제학자들의 수학 공식들은 단순한 가정 하나, 모든 인간은 혼자 내버려 두면 최소한의 자원과 노력을 소모하여 최대한의 이익을 얻을 수 있는 행동을 선택한다는 가정에 기초하고 있다. 방정식이 성립할 수 있는 것은 공식이 단순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동기가 복잡함을 인정하게 되면 고려해야 할 요소가 너무 많아져서 제대로 측정하기가 불가능하며, 따라서 예측은 불가능해질 것이다. 경제학자는 물론 인간이 정말 이기적인 계산 기계가 아니라는 걸 모두가 안다고 말하겠지만, 그렇게 가정하는 것이 인간이 하는 일의 아주 많은 부분을 설명해 주며 이 설명 가능한 부분(그리고 이것만)이 경제학의 주제다.
여기까지는 어느 정도 합리적인 발언이다. 문제는 인간의 삶에서 그런 가정이 확실히 통하지 않는 영역이 많다는 점이다. 또 그중 일부가 정확하게 '경제학'이라 불리는 학문 영역 속에 들어 있다. 최소-최대(최소 비용-최대 이익)의 가정이 옳다면, 에릭 같은 사람은 자신의 상황에 대해 기뻐할 것이다. 자원과 에너지를 거의 하나도 소모하지 않으면서 많은 보수를 받으니 말이다. 그가 쓰는 것은 버스 요금과 사무실에서 돌아다니고 전화 몇 통 받는 데 드는 에너지뿐이다. 그런데 다른 모든 요인들(계급, 기대치, 성품 등등)은 이런 상황에 처한 사람이 불행한지 아닌지를 결정해 주지 않는다. 그런 상황에 처하면 누구나 불행해 보일 테니까. 다른 요인들은 이들이 얼마나 불행한지에 대해서만 영향을 미친다.
일에 대한 대중적 담론 가운데 많은 부분은 경제학자들의 모델이 옳다는 가정에서 출발한다. 사람들은 강요당해야만 일한다. 빈민들이 굶어 죽지 않도록 구호물자를 받을 경우, 구호품은 가장 굴욕적이고 성가신 방식으로 전달되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들은 의존적이 되고 제대로 된 직업을 찾을 동기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그 기저에는 사람들에게 기생충이 될 선택지가 주어진다면 당연히 그것을 선택하리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사실 수집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증거에 따르면 이 가정은 틀렸다. 분명히 인간은 불필요하거나 저열해 보이는 일을 하게 되면 괴로워하는 경향이 있다. 1920년대 이후 '과학적 관리자들'이 주장한 작업 속도나 강도에 맞추어 일하고 싶어 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사람들은 또 굴욕당하는 데 특히 거부감이 있다. 하지만 그냥 내버려 두면 거의 예외 없이 쓸모 있는 일을 전혀 못 할지도 모른다는 전망 때문에 더욱 괴로워할 것이다. (p.151-153)
"당신은 내 시간을 소비하고 있다. 당신이 노닥거리라고 봉급을 주는 것이 아니다."라는 현대의 도덕성은 아주 다르다. 이것은 자신의 것이 강탈당한다고 느끼는 사람의 분노다. 노동자의 시간은 노동자의 것이 아니고, 그 시간을 구매한 사람에게 속한다. 일하지 않는 고용인은 고용주가 많은 돈을 낸(혹은 한 주가 끝나면 많은 돈을 주기로 약속한) 어떤 것을 훔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도덕적 논리에 의하면 게으름은 위험한 것이 아니다. 게으름은 도둑질이다.
이는 밑줄 쳐 강조할 만하다. 한 인간의 시간이 타인에게 속할 수 있다는 생각은 실로 아주 특이하기 때문이다. 이제껏 존재한 거의 모든 인간 사회는 그런 생각을 절대 해 본 적이 없을 것이다. 위대한 고전학자 모지스 핀리는 이렇게 지적했다. 고대 그리스인이나 로마인은 도자기공을 보고 그의 도자기를 산다는 생각을 할 수 있다. 또 도자기공을 사겠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고대 세계에서 노예제는 흔히 있는 제도였으니까. 하지만 도자기공의 '시간'을 살 수 있다는 생각 앞에서는 말 그대로 혼란스러워할 것이다. (p.162)
시간은 일을 측정하는 좌표가 아니다. 일 자체가 척도이기 때문이다. 영국 역사가 E. P. 톰슨은 근대 시간 감각의 기원을 다룬 「시간, 노동규율, 산업자본주의(Time, Work Discipline, and Industrial Capitalism)」라는 굉장한 논문에서 "하나가 다른 하나를 추진하면서 움직이는 도덕적인 동시에 기술적인 변화가 발생했다."라고 지적했다. 14세기가 되자 거의 모든 유럽 마을에는 시계탑이 만들어졌다. 대개 그 지역 상인 길드가 자금을 대고 건설을 독려한 시설물이었다. 책상에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로서 두개골을 올려 두는 습관을 만든 것도 바로 그런 상인들이었다. 시계가 한 번 종을 울릴 때마다 죽음에 한 시간 더 가까워지는 것이니 시간을 잘 활용해야 한다고 스스로에게 상기시키는 것이다.
(…)
일단 시간이 곧 돈이 되자, 그냥 '시간을 보낸다'기보다 '시간을 소모한다'고 말할 수 있게 되었고, 마찬가지로 시간을 허비하고, 시간을 죽이고, 시간을 아끼고, 시간을 잃고, 시간에 늦지 않으려고 애쓴다는 등의 표현이 가능해졌다. 청교도, 감리교도, 복음주의 전도사 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신도들에게 "시간 농사(husbandry of time)"에 대해 설교하고, 시간 계획을 신중하게 세우는 것이 도덕성의 본질이라고 주장했다. 공장에서는 시간기록계를 쓰기 시작했다. 노동자들은 공장에 들어오고 나갈 때 시간을 찍어야 했다. 빈민들에게 규율과 시간성을 가르치기 위해 만들어진 자선 학교는 모든 사회 계급 출신의 학생들이 종소리에 따라 한 시간마다 일어나 이 방에서 저 방으로 행진해 가는 공립학교 체제로 바뀌었다. 이것은 아이들에게 장래에 겪게 될 유급 공장 노동을 훈련시키기 위해 의식적으로 설계된 조처였다. (p.165-166)
걸핏하면 고용주의 도덕성과 고용인들의 상식 간의 정면충돌로 이어지는 이 역사를 알지 못하면 현대 노동의 정신적 폭력을 이해할 수 없다. 고용인들은 아무리 초등학교에서 시간 규율에 훈련되었다 하더라도 할 일이 있든 없든 상관없이 하루 여덟 시간씩 꾸준한 속도로 일하라는 요구를 들으면 상식에 대한 도전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지시받은 일만을 위한 일을 지독하게 분통 터지는 일로 여길 것이다.
나는 내 첫 직업을 생생히 기억한다. 어느 해변의 이탈리아 식당에서 접시 닦는 일이었다. 여름 시즌이 시작할 때 고용된 10대 소년 셋은 미친 듯이 바빴던 첫날을 기회로 여겼다. 가장 영웅적인 최고의 접시 닦이임을 입증하려고 결심한 것이다. 우리는 번개처럼 효율적인 설거지 기계가 되어 기록적인 시간에 엄청난 분량의 반짝이는 접시 무더기를 만들어 냈다. 그런 다음 주저앉아 우리가 달성한 업적에 자랑스러워하면서 아마 담배를 한 대 피우거나 대마초를 하나쯤 맛보려 했다. 그러자 보스가 나타나더니 왜 이렇게 노닥거리고 있느냐고 물었다.
"지금 당장은 씻을 접시가 없더라도 상관없어. 지금은 내 시간이야! 너희 시간이 되면 놀러 다녀도 돼. 일하러 돌아가!"
"그러면 우리는 무얼 해야 합니까?"
"철수세미 가지고 와. 걸레받이를 문질러 닦아."
"걸레받이는 이미 닦았는데요."
"다시 닦으라고!"
우리는 교훈을 배웠다. 시간제로 일한다면 너무 효율적으로 일하지 말라. 아무리 잘해도 무뚝뚝하게 고개 끄덕이는 정도(우리는 정말 그 정도만 기대했는데)의 보상도 없을 테니까. 대신 무의미한 분주한 노동이라는 벌을 받게 된다. 그리고 일하는 척하라고 강요당하는 것이 가장 지독한 모욕임도 알게 되었다.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은 것을 하는 척하기란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이는 순수한 불명예이며, 순전히 보스의 권력 그 자체를 위해 권력을 행사하는 것이다. 걸레받이를 닦는 척할 뿐이라는 것은 문제되지 않았다. 걸레받이를 닦는 척하는 내내 마치 학교 불량배들이 어깨너머로 우리를 고소해하며 구경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물론 이번에는 법과 관습이 그 불량배 편이라는 점이 다를 뿐이었다. 그래서 다음번에 손님이 몰려들 때 우리는 확실하게 즐거운 시간을 질질 끌도록 행동했다. (p.168-169)
불쉿 고용의 무의미함 자체가 모든 위계적 관계에 잠재적으로 존재하는 사도마조히즘적 역학을 악화시키곤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그런 추세는 불가피한 것은 아니다. 어떤 감독관들은 관대하고 친절하다. 하지만 공통의 목적의식이 결여된 것, 그리고 집단의 행동이 어떤 방식으로든 직장 밖에 있는 사람들의 삶을 더 낫게 하거나 조금이라도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고 믿을 만한 이유가 결여된 것은 직장 생활에서 행해지는 사소한 모욕, 절제 부족, 원망, 잔인함을 확대하는 경향으로 흘러갈 것이다. 왜냐하면 직장 내 정치는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많은 이들이 애니처럼 건강을 잃을까 봐 두려워 한다. 독방에 수감된 죄수가 두뇌 손상을 겪지 않을 수 없는 것처럼, 목적의식이 사라진 작업자는 흔히 정신적, 신체적 쇠퇴를 경험한다.
(…)
상대적으로 양호한 사무실 환경에서도 목적의식의 결여는 사람들을 좀먹는다. 노동자들은 실제로 심신의 퇴화를 겪지는 않을지 몰라도 최소한 공허함이나 무가치함의 감정과 씨름하게 된다. 이런 감정은 그런 지위가 흔히 수반하는 특권, 존경, 후한 보상 같은 것으로도 전혀 누그러지지 않고 오히려 더 심화된다. 릴리언처럼 불쉿 직업 종사자들은 자신이 실제 생산적인 업무를 담당하는 부하들보다 더 많은 보수를 받는 것 같다는 의혹으로("만약 그렇다면 이게 얼마나 빌어먹을 일인가?"), 아니면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미워할 타당한 이유가 있다는 생각으로 남몰래 괴로워할 수도 있다. 이 문제로 인해 많은 이들이 스스로 어떤 기분이어야 하는지에 대해 진심으로 혼란스러워했다. 어떤 도덕적 나침반도 없었다. 일종의 '도덕적 대본 없음'이라고 볼 수 있다. (p.213-215)
레이철 내 직업에서 가장 괴상하고 (직책명과는 별개로) 아마 가장 심하게 불쉿인 요소는 실제로는 할 일이 별로 없음이 전반적으로 인정받는데도 겉으로는 일하지 않는 모습을 드러내선 안 된다는 사실이다. 인터넷이 도입된 초기 시절이 떠오르는 분위기였는데, 심지어 트위터와 페이스북도 금지되었다. 학교에 있을 때 내 전공 주제는 상당히 재미있었고 공부를 많이 해야 했으므로, 아침에 일어나 종일 사무실에 앉아 눈에 띄지 않게 시간을 허비하려고 애쓰면서 끔찍한 공포를 느끼게 되리라고는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다.
"쓰레기 같은 사무실 업무"가 세상의 끝은 아니라고 생각하던 레이철은 결국 세상의 끝이 차라리 낫겠다는 결론을 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p.224-225)
마지막 지푸라기는 몇 달씩 불평이 이어진 다음, 한 주 동안 지독한 불쉿 작업을 한 뒤 친구 민디를 만나 술을 한잔하고 있을 때 왔다. 그날은 "가지면 좋을 것들, 가져야 하는 것들, 미래에 가지면 좋을 것들"을 보여 주는 "마인드 맵"에 색칠을 하라는 요구가 내려왔다. (아니, 나도 저런 용어가 무얼 뜻하는지 전혀 모른다.) 민디도 비슷하게 불쉿 프로젝트에서 일하고 있었다. 아무도 읽지 않는 회사 사보의 지면에 내용을 채우는 일이었다. 그녀는 내게 울화를 털어놓았고 나는 그녀에게 분통을 터뜨렸다. 나는 열기로 가득 찬 장광설을 편 끝에, "해수면이 상승해서 세계의 종말이 오기까지 기다릴 수가 없어. 이 빌어먹을 바보짓을 하고 있느니 차라리 낚시로 물고기를 잡고 내가 직접 장대로 만든 창으로 사냥을 해서 살겠어."라고 소리쳤다.
우리 둘 다 한참을 웃은 다음, 나는 울기 시작했다. 나는 그다음 날 사직했다. 대학 생활 내내 온갖 종류의 이상하고 비천한 직업을 전전한 데서 얻은 큰 보상은 이거다. 언제라도 쉽게 일자리를 구할 수 있다는 것. 그렇다. 나는 쾌적하게 에어컨이 작동하는 사무실의 열기에조차 녹아 버리는 눈송이 세대의 유리 공주지만, 하느님 맙소사, 노동 세계는 쓰레기다.
여기서 끝내야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알아 두어야 할 약간 다른 형태의 사회적 고통이 하나 더 있다. 그것은 자신이 인류에게 어떤 종류든 혜택을 주고 있는 척해야 하는데 실상은 완전히 그 반대임을 알고 있는 데서 오는 비참함이다. 왜 그런지는 명백하겠지만, 정부나 비정부기구(NGO)에서 일하는 사회복지 활동가들에게 보이는 가장 흔한 사례다. 그들은 거의 모두 형식적 서류 작성 의례에 간여하고 있지만 대다수가 자신이 하는 일이 무용지물 수준에도 못 미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원래 도와주기로 되어 있는 사람들에게 피해를 입히고 있기 때문이다. 시히는 지금은 화가이지만 예전에는 뉴욕에서 커뮤니티 치료사로 일했다.시히 1990년대와 2000년대에 나는 브롱크스의 커뮤니티 정신 건강 센터에서 치료사로 일했다. 나는 사회복지사 자격증을 갖고 있다.
(p.226-227)
내 고객들은 소소한 말썽(클린턴의 범죄 소탕안에 따르면)을 부려 '관리'받도록 위임되었거나, 수감 생활을 한 뒤 일자리와 집을 잃었거나, 아니면 일자리 복지 센터나 사회보장국에 그들이 정신적인 질병이 있어서 사회보장 보조금 SSI(supplementary security income)나 다른 식품 및 집세 보조금이 필요한 사정임을 입증해야 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들 중 일부는 정말로 중증 정신 질환자였다. 하지만 그 외 대다수는 지독하게 가난할 따름이었고, 경찰로부터 끊임없이 학대당하고 있었다. 누구든 그들의 생활 여건에 놓인다면 정신병에 걸릴 것이다.
내가 일하는 곳에서 행하는 치료법은 근본적으로 그런 여건이 그들 자신의 잘못 때문이며, 삶을 개선하는 것은 그들 자신의 책임이라고 말해 주는 것이었다. 만약 그들이 치료 프로그램에 매일 참석하여 회사가 의료보험료(Medicaid)를 청구할 수 있다면 직원들은 그들의 의료 기록을 복사하여 사회보장국에 보내고, 장애 연금을 신청할 수 있다. 차트에 적힌 내용이 많을수록 기회도 더 많아진다.
내게는 "분노 관리", "적응 기술"과 같은 식으로 관리되어야 하는 그룹들이 있었다. 그런 것은 너무 심하게 모욕적이고 부적절한 방식이었다! 제대로 된 음식도 없는 상태에서 어떻게 견뎌 내며 경찰의 학대를 받을 때 느끼는 분노를 어떻게 통제할 수 있겠는가? 내 직업은 쓸모도 없고 해로운 것이었다. 불평등이 만들어 내는 참상을 통해 이득을 얻는 NGO가 너무 많다. 내가 한 일에서 얻은 수입으로는 아주 가난하게 살 수밖에 없었지만 그래도 빈곤에 기생하여 살았다는 사실은 나를 깊이 괴롭힌다.
영국 정부가 장애자 명단에서 최대한 많은 시민을 몰아내기 위해 고용한 프랑스 회사인 아토스(그 후 몇 년간 2000명 이상이 아토스가 "노동 적합"이라고 판정하여 지원금을 끊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사망한 것으로 밝혀졌다.)에서 일한 조지는 굴하지 않고 버텼다. 그는 회사에서 일하는 모든 사람은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고 있고, "조용한 절망감 속에서 아토스를 혐오한다"고 전한다. 다른 사례에서, 정부 노동자들은 자기들 외에는 자신들이 하는 일이 얼마나 무용하고 파괴적인지 모른다고 확신한다. 비록 그들에게 자신의 견해를 동료들에게 직접 이야기한 적이 있는지 물어보자 거의 예외 없이 하지 않았다고 대답했지만, 그 동료들 역시 실상을 파악하고 있는 것이 자신들뿐이라고 확신했을 가능성은 남아 있다. (p.229-230)
앞에서 보았듯이, 구체적 여건은 각각의 불쉿 직업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 몇몇 노동자들은 무자비한 감독을 받는다. 일부 노동자들은 몇 가지 필수 과제를 요구받지만 대체로 혼자 방치된다. 대부분의 노동자는 그 사이에 있다. 하지만 최선의 경우라 해도 대기 상태로 있어야 한다는 것,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는 데 어느 정도는 에너지를 써야 한다는 것, 거짓 표정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 너무 눈에 띄게 몰두한 것처럼 보이지 말아야 한다는 것, 타인과 온전하게 협동할 수 없다는 것…… 이 모든 것은 20세기 중반 복지국가 여건에서 탄생한 로큰롤 밴드나 마약 복용 상태에서 쓴 시, 실험극장 같은 것들보다는 컴퓨터게임과 유튜브에서의 수다 떨기, 밈, 트위터 토론 문화에 훨씬 잘 어울린다. 지금 우리가 목도하는 것은 사무직 노동자들이 아무것도 할 일이 없는데도 그런 사실을 공개적으로 인정할 수 없는 일터에서 은밀하게 쓸 수 있는 산만하고 파편적인 시간 조각동안 생산하고 소비할 수 있는 대중문화 형태의 성장이다. (p.236-237)
불쉿 직업을 활용해서 다른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먼저 평평해지고 균질화되었다가(모든 노동시간이 제임스의 표현을 빌려 "삭막한 사무실 환경"에 놓이는 경향이 있으므로) 그다음에는 제멋대로 부서지는 시간에서 어쩌다 큰 파편으로 남은 부분을 가져다가 생각과 창의성을 요하는 프로젝트에 사용하려면 독창성과 결단력이 필요하다. 그런 일을 해낸 사람들은 자신의 시간을 고양이 밈보다는 더 야심 찬 일에 쓸 수 있는 위치에 올라가기 위해 이미 창조적 에너지를(아마 유한한 것일 텐데) 엄청나게 소모해 버렸을 것이다. 고양이 밈이 나쁘다는 건 아니다. 나도 아주 멋진 것들을 본 적 있다. 하지만 우리 젊은이들이 보다 큰 일을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하고 싶다. (p.238-239)
정말 불쉿인 직업에서는 우리가 정말 무슨 일을 하고 있어야 하는지, 무엇을 하고 있고 무엇을 하고 있지 않은지에 대해 어떤 말을 할 수 있는지, 누구에게 무엇을 물어볼 수 있는지, 일하는 척하도록 예상되는 범위가 어느 정도이고, 얼마나 많이 그렇게 해야 하는지, 그 대신 어떤 종류의 일을 해도 되고 하면 안 되는지가 완전히 불분명할 때가 자주 있다. 이런 상황은 비참하다. 건강과 자존감에 참혹한 영향을 미칠 때가 많으며, 창조성과 상상력이 와해되어 버린다.
사도마조히즘적인 권력 역학은 자주 등장한다. (사실 목적 없는 하향식 상황에서는 거의 예외 없이 등장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그런 것이 등장하지 못하게 하는 명시적인 노력이 행해지지 않는 한, 또는 그런 노력이 행해지더라도 말이다.) 내가 그 결과를 "정신적 폭력"이라 부른 데는 이유가 없지 않다. 이 폭력은 우리의 문화와 감수성에 영향을 미쳤다. 무엇보다 우리의 젊은이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특히 유럽과 북아메리카의 젊은이들이 그런 영향을 크게 받았지만, 전 세계의 점점 더 많은 젊은 층이 쓸모없는 직업을 할 심리적 준비가 되어 있고, 일하는 시늉을 하는 것에 훈련되어, 다양한 수단에 의해 거의 누구도 의미 있는 목적에 봉사한다고 믿지 않는 직업으로 인도된다. (p.244)
어떤 면에서는 금융 부문 전체가 일종의 사기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스스로는 상업과 제조업에서 이윤이 날 가능성이 높은 곳에 투자한다고 소개하지만 실제로 거의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금융 부문의 압도적으로 많은 비중은 다양한 부채 형태를 창조하고 거래하고 조작하기 위해 정부와 공모하는 데서 나온다. 이 책에서 주장하려는 것은 금융 부문에서 하는 많은 일이 그렇듯이 성장에 동반한 정보산업 부문의 직업 역시 기본적으로는 교묘한 속임수라는 것이다. (p.254)
내가 마다가스카르에 있던 시절 미국의 노숙자 현상을 친구들과 처음 논의하던 때를 기억한다. 그들은 세계에서 제일 부유하고 강력한 나라인 미국에서, 길거리에서 잠을 자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입이 딱 벌어졌다. "미국 사람들은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아?" 한 친구가 내게 물었다. "그들은 정말 부자잖아! 온 세상 사람들이 그것을 국가적 수치라고 여기는 줄을 다들 알아도 상관없다는 말이야?"
나는 그것이 좋은 질문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왜 미국인들은 이 현상을 국가적 수치라고 보지 않았을까? 미국 역사상 어떤 기간에는 분명히 그렇게 보았을 것이다. 만약 1820년대, 혹은 1940년대에도 대도시에서 많은 수가 노숙 생활을 했다면 어떤 조치가 취해졌을 것이다. 아주 좋은 조치는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어떤 시기에는 아마 부랑인들을 작업장에 데려다 놓는 방식이었을 것이다. 또 다른 시기에는 공용 주택을 짓는 방법으로 처리되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떤 방식이든 사람들이 길거리의 종이 상자 안에서 고통받도록 방치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1980년대 이후 거의 모든 미국인들이 보인 반응은 사회가 어쩌다가 이런 지경까지 왔는지에 대한 분노가 아니라, 첫째 층위를 해명하는 쪽으로 기울어졌다. 그리고 자기들이 보고 있는 것은 인간의 허약함이 낳은 어쩔 수 없는 결과물에 불과하다고 결론지었다. 인간은 변덕스러운 존재다. 항상 그랬다. 누가 무슨 일을 해도 이 사실을 바꾸지는 못한다. (p.258-259)
1852년에 이미 찰스 디킨스는 『황폐한 집(Bleak House)』에서 잔다이스 대 잔다이스(Jarndyce and Jarndyce) 사건으로 법률 직업을 조롱하고 있다. 그 사건에서 변호사 두 팀은 거대한 장원을 두고 소송을 벌여 고객이 죽은 뒤에도 끝을 내지 않았고, 전리품을 몽땅 집어삼킨 뒤에야 간단하게 그 문제를 미결로 선언한 다음 다른 업무로 넘어갔다. 이 이야기가 주는 교훈은 이윤 추구 기업이 엄청난 거액의 돈을 분배하는 업무를 맡았을 때, 최대치의 이익을 챙기려면 최대한 비효율적으로 일하면 된다는 것이다.
물론 FIRE 부문 전체가 기본적으로 이런 일을 한다. 먼저 (대출을 통해) 돈을 만들고 그 돈을 흔히 지독하게 복잡한 방식으로 다양하게 움직여, 모든 거래에서 조금씩 자기 몫을 챙긴다. 그 결과 은행 직원들은 보험회사가 고용인들로 하여금 젖소에게서 젖 짜는 법을 고의로 잘못 훈련시키는 것처럼 전체 업무가 하나같이 무의미하다고 느끼게 된다. 심지어 자신이 속한 은행업의 진짜 존재 이유가 무엇인지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은행 직원들이 놀랄 만큼 많다. (p.280-281)
고전적 의미의 자본주의에서 이윤은 생산의 관리에서 창출된다. 자본가들은 물건을 만들거나 건설하거나 수선하거나 유지하기 위해 사람들을 고용하며, 제품이나 작업에 대해 고객들이나 의뢰인에게서 받는 소득 가치보다 전체 경상비(노동자와 계약자들에게 지불하는 금액까지 포함하는)가 더 적게 나오지 않는 한 이윤을 가져갈 수 없다. 이런 고전 자본주의 여건에서는 불필요한 노동자를 고용하는 것이 정말 이치에 닿지 않는다. 이윤을 극대화한다는 것은 최소한의 노동자에게 최소한의 돈을 지불한다는 뜻이다. 심한 경쟁 시장에서 불필요한 노동자를 고용하는 회사는 살아남기 힘들다. 물론 이것은 교조적인 자유방임론자나 정통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언제나 우리 경제가 불쉿 직업들을 수용할 여유가 없다는 주장을 펼치는 이유다. 그들은 불쉿 직업이 분명 착각이 아닐 수 없다고 말한다.
반면 경제적, 정치적 고려가 구분되지 않는 봉건제 논리에 따르면 같은 행동이 완벽하게 이치에 맞게 된다. 지급보증보험금 분배자들처럼, 중요한 것은 적에게서 훔치든 수수료나 관세나 임대료나 세금이라는 형식으로 민간인들로부터 수탈했다가 재분배하든 약탈물 단지를 손에 넣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추종자 무리를 만들어 낸다. 그들은 자신의 허세와 장대함을 보여 주는 가시적인 척도인 동시에 정치적 총애를 분배하는 수단이다. 예를 들면 잠재적 불평분자를 매수하거나, 충실한 동지들('깡패')에게 보상을 해 주거나, 또는 명예와 작위 계급을 정교하게 설정하여 하급 귀족들이 그것을 두고 서로 다투게 만드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대기업의 내부 작동 방식과 아주 비슷하다면, 그 유사성은 우연의 일치가 아닐 것이다. 그런 기업들은 물건의 제작, 건설, 수선, 관리와 유지에는 힘을 점점 덜 쏟고 돈과 자원을 책정하고 분배하고 할당하는 정치적 과정에 점점 더 많은 힘을 쏟는다. 무엇보다 이것은 또다시 정치와 경제의 구분이 점점 더 어려워진다는 뜻이다. 이는 정부가 은행을 규제하는 바로 그 법률을 정하는 자가 로비스트로 일하는 '대마불사' 은행의 출현, 나아가 금융 이윤 자체가 "직접적인 법적, 정치적" 수단을 통해 축적된다는 사실에서 엿보인다. 예를 들어, 미국 최대 은행인 JP모건 체이스의 보고에 따르면 2006년 수익의 대략 3분의 2가 "수수료와 위약금"에서 나왔으며, "금융"이란 일반적으로 다른 사람들의 빚(물론 법정에서 강요할 수 있는 빚)을 거래하는 것을 가리킨다. (p.293-294)
지난 40여 년 동안 자본주의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설명하고 싶다면, 가장 좋은 예는 아마 프랑스 마르세유 외곽에 있는 엘리펀트 티(Elephant Tea) 공장일 것이다. 현재 그곳은 직원들에게 점거되어 있다. 몇 년 전 그 공장에 가 본 적이 있는데, 한 점거자(나와 내 친구들을 데리고 공장을 견학시켜 준 사람)가 사연을 들려주었다. 원래 그곳은 지방의 기업이었다가 기업 인수 합병 시대에 세계 최대 차 생산 회사인 립톤으로 넘어갔다. 처음에 그들은 대체로 공장이 알아서 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기계를 가지고 이리저리 궁리하는 사람들이었으므로 개선을 거듭해서, 1990년대가 되자 생산량이 50퍼센트 이상 증가했고 시장 이윤도 늘어났다.
1950년대, 1960년대, 1970년대에는 산업화 세계의 많은 지역에서 기업의 생산성이 높아지면 그로 인해 증가한 이윤의 일정 몫을 임금과 혜택의 증가라는 형태로 노동자들에게 재분배한다는 것이 암묵적으로 합의되어 있었다. 그런데 1980년대 이후로는 그런 일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 이렇게 된 것이다. 우리를 안내한 직원이 말했다.그들이 그 돈을 조금이라도 우리에게 주었는가? 아니다. 노동자를 더 많이 고용하거나, 새 기계를 들여오거나, 사업을 확장하는 데 그 돈을 썼는가? 아니다.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러면 그들은 무엇을 했는가? 화이트칼라 직원을 더 많이 고용했다. 원래 우리가 여기서 일하기 시작했을 때는 사무직원이 딱 두 명 있었다. 사장과 인사부 직원. 오랫동안 그런 식으로 유지되어 왔다. 그러다 갑자기 양복을 입고 어슬렁거리는 직원이 셋, 넷, 다섯, 일곱 명이 되었다. 회사는 그들에게 이런저런 근사한 직함을 붙여 주었지만 기본적으로 그들은 모두 뭔가 할 일을 생각해 내려고 애쓰면서 시간을 보낸다. 그들은 매일 캣워크를 오르락내리락하고, 우리를 노려보고, 우리가 일하는 동안 메모를 끄적거린다. 그런 다음 미팅에 참석하고 토론하고 보고서를 쓴다. 하지만 그래도 자기들이 그 자리에 있어야 할 진짜 핑계를 생각해 내지 못한다. 그러다가 마침내 그들 중 하나가 해결책을 찾아냈다. "공장 전체를 폐쇄해 버리고, 노동자를 해고하고, 사업을 폴란드로 옮겨 버리면 되잖아?"
일반적으로 여분의 관리자들은 효율성을 증진시킨다는 확고한 목적을 위해 채용되지만, 이 공장의 경우 더 이상 개선할 여지가 없었다. 노동자들이 스스로 효율성을 최대한 개선시켰으니까. 그런데도 관리자가 채용되었다. 이것은 여기서 우리가 다루는 문제가 효율성과는 아무 상관이 없고, 기업의 도덕적 책임에 대한 인식을 바꾸는 것임을 시사한다. (p.296-297)
불쉿 직업의 증가가 낳은 더 큰 사회적 결과를 검토해 보면 상황은 더 비정상적으로 보인다. 우리가 수행하는 일의 절반이 지워져도 전체 생산성에 큰 영향이 없다는 것이 정말 사실이라면, 왜 나머지 절반의 일을 재분배해서 모든 사람이 하루 네 시간만 일하지 않을까? 일주일에 나흘 일하고 1년에 넉 달씩 휴가를 가도 좋지 않을까? 아니면 그만큼 작업을 느긋하게 배치하는 방향은? 왜 전 세계의 작업기계를 정지시키려 하지 않을까? 무엇보다 지구온난화 속도를 늦추기 위해 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일 텐데.
100년 전 많은 사람들은 기술과 노동 절약 수단이 꾸준히 발전하면 지금쯤 그런 일이 가능해질 거라고 추측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의 추측은 옳았을 것이다. 우리는 주 20시간, 혹은 주 15시간 노동도 어렵지 않게 달성할 수 있었다. 그런데도 어떤 이유에서인지 우리 사회는 수백만 명의 인간이 삶의 큰 부분을 스프레드시트를 입력하는 척하거나 홍보용 미팅을 위한 마인드맵을 준비하는 데 할애하는 편이 뜨개질을 하거나, 개와 놀거나, 개러지 밴드를 시작하거나, 새 요리법을 실험하거나, 아니면 카페에 앉아 정치 토론을 하고 친구들의 복잡한 다중 연애에 대해 잡담하는 것보다 낫다고 집단적으로 판단한 것이다.
어쩌다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이해하려면 대형 신문이나 잡지사 논설위원들이 어떤 계급의 사람들이 너무 열심히 일하니 일을 줄이는 게 좋겠다는 글을 써 줄 가능성이 얼마나 작은지 생각해 보면 된다. 특정 계급 사람들(젊은이, 가난한 사람들, 다양한 형태의 공적 부조를 받는 사람들, 특정 국적이나 인종 집단의 사람들)이 일하기는 싫어하면서 권리는 누리고, 패기나 동기가 부족하며 자기 손으로 벌어먹으려고 하지 않는다고 투덜대는 글은 찾기 쉽다. 인터넷에는 그런 이야기가 사방에 널려 있다. 레이철이 4장에서 말했듯이, "페이스북을 검색할 때마다 우리 세대의 특권 의식이나 일하기를 꺼리는 성향에 대해 훈계하는 글을 만나게 된다." 위기가 닥치면, 그것이 생태적 위기일지라도, 집단적 희생에 대한 호출이 울려 퍼진다. 이런 호출은 항상 사람들을 더 많이 일하게 만드는 것 같다. 앞에서 말했듯이 생태학적 기준에서는 노동시간을 대폭 줄이는 것이 지구를 구하는 가장 빠르고 쉬운 길인데도 그렇다.
여론 필자들은 우리 시대의 도덕주의자다. 그들은 전도사의 현대식 버전이며, 일에 대해 글을 쓸 때도 노동을 신성한 의무로, 저주인 동시에 축복으로 규정하며, 인간을 선천적으로 죄에 물든 존재로, 할 수만 있다면 의무를 기피할 것이라 예상되는 게으른 존재로 보는 아주 오랜 신학적 전통을 반영한다. (p.318-319)
어떤 계급의 사람들이 그냥 사라진다고 상상해 보라. 어느 날 아침 일어나 보니 간호사, 버스 운전수, 기계 정비공, 야채가게 직원, 소방수, 출장 요리사 등이 모두 다른 차원으로 이송되어 버렸다고 가정하면 즉각적이고 전면적인 재난이 벌어진다. 초등학교 교사들이 사라진다면 대부분의 초등학생들은 하루나 이틀 정도는 신이 나겠지만 그로 인한 장기적 영향은 더욱 큰 재난일 것이다. 예술가들이 사라진다면, 한동안은 데스메탈 대 클레즈머의 상대적 장점에 대해, 혹은 연애 소설 대 SF 소설의 상대적 장점에 대해 토론하며 지낼 수는 있다. 물론 특정한 범주의 작가나 화가, 음악가가 갑자기 사라져도 무관심하거나 더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세상이 훨씬 더 우울하고 음침한 곳으로 변할 것이다.
그러나 펀드 매니저, 정치 컨설턴트, 마케팅 구루, 로비스트, 기업 변호사, 목수가 오지 않은 사실에 사과하는 일을 직업을 가진 사람들에 대해서는 같은 이야기를 할 수 없다. 4장에 나온 핀은 자신의 소프트웨어 회사에 대해 "내가 월요일에 출근했는데 회사 건물이 사라졌더라도 사회는 물론 나도 상관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세상에는 그냥 사라진다면 세상이 훨씬 더 나아질 그런 사무실 건물들이 있다. 나는 이 책을 읽는 사람들도 당장 머릿속으로 그런 건물을 여러 개 떠올릴 수 있을 거라고 확신한다.
물론 이들 중 많은 수는 최고 연봉을 받는 사람들이다. 사실 조직의 최정상부에서 외견상 핵심일 것 같은 자리가 오랫동안 공석으로 있는데도 별다른 가시적 영향이 없고, 심지어 그 조직 자체에도 별 영향이 없는 경우가 상당히 자주 있다. 벨기에는 오랫동안 헌정상 위기를 연달아 겪는 바람에 일시적인 행정부 공백 상태에 빠졌다. 수상이 없었고, 보건, 교통, 교육 담당 장관이 공석이었다. 이 위기는 상당 기간 동안(541일로 기록되었다.) 지속되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도 국민들의 보건과 교통과 교육에서 눈에 보일 만한 부정적 영향은 생기지 않았다. 만일 이런 사태가 수십 년 지속된다면 상황이 다를지도 모른다. 하지만 얼마나 많이 다를지, 또 그로 인한 긍정적 영향이 부정적 영향을 능가할지 어떨지 분명치 않다.
이와 비슷하게, 이 책을 집필할 무렵 세계 최고의 역동적 기업 가운데 하나로 여겨지는 우버에서 창립자 트래비스 캘러닉과 최고 집행부 여러 명이 사임했다. 우버는 "현재 최고경영자(CEO), 최고운영책임자(COO), 최고재무책임자(CFO), 최고마케팅책임자(CMO) 없이 작동하고 있다." 모두 외견상으로는 일상적인 회사 운영에 미치는 영향이 별로 없다.
금융 부문에서 일하는 사람들, 또 전반적으로 지극히 고액의 봉급을 받는 사람들이 거의 한 번도 파업을 하지 않은 데는 이유가 있다. 1970년 아일랜드에서 은행이 6개월간 파업에 들어간 적이 있었다. 그런데 경제는 파업 조직자가 예상한 것처럼 정지 상태에 들어가지 않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저 계속해서 수표를 사용했으며, 수표가 하나의 통화 형태로 유통되기 시작했을 뿐 그 외에는 예전과 다르지 않게 흘러갔다. 그러나 2년 전 뉴욕에서 쓰레기 수거 업자들이 고작 열흘 동안 파업했을 때는 도시가 거주 불가능한 곳으로 변하는 바람에 정부가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어야 했다. (p.341-343)
그러나 직업의 사회적 혜택과 보상 수준이 반비례하는 이유는 전혀 다른 문제다. 뻔해 보이는 대답 가운데 어느 것도 옳은 것 같지 않다. 가령 교육 수준은 봉급 수준을 결정하는 아주 중요한 요인이지만, 이것이 단순히 교육과 훈련의 문제라면 미국의 고등교육 시스템은 결코 지금과 같은 상태가 아닐 것이다. 그러니까 탁월한 훈련을 받은 박사 수천 명이 보조 교사로 지내면서 생계를 겨우 잇거나 심지어 구호 식품에 의존하여 살아가는 상황에 처하지는 않을 것이다. 반면 이것이 단지 수요와 공급의 문제라면, 현재 미국에서 숙련된 간호사는 심각하게 부족하고 로스쿨 졸업생은 공급과잉 상태인데도 왜 미국의 간호사들이 기업 변호사들보다 훨씬 적은 보수를 받는지 이해하기는 불가능할 것이다.
그 이유가 무엇이든(나는 계급의 권력과 계급 충성도가 큰 관련이 있다고 믿는다) 더욱 짜증 나는 점은 너무 많은 사람들이 그 반비례 관계를 인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이 옳다고 여긴다는 사실이다. 고대 스토아학파가 주장했듯이, 덕성은 그 자체가 보상이라는 거다. (p.347-348)
실제로 공장노동자가 노동자의 대부분을 차지하던 시대는 이제껏 한 번도 없었다. 심지어 카를 마르크스나 찰스 디킨스 시절에도 노동계급의 동네에는 하녀, 구두닦이, 청소부, 요리사, 간호사, 운전수(마차꾼), 교사, 매춘부, 관리인, 행상인 등이 광부나 직물공장 직공이나 제철소 직공들보다 훨씬 많았다. 이런 과거 직종들이 '생산적'인가? 어떤 의미에서 생산적이며, 누구를 위한 생산인가? 누가 수플레를 '생산'하는가? 이런 애매모호성 때문에 가치에 대해 논할 때 이런 이슈들은 보통 무시된다.
하지만 이 무시는 여성 노동이든 남성 노동이든 거의 모든 노동 계급의 노동이 실제로는 우리가 기본적으로 여성의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더 비슷하다는 현실에 눈을 감게 한다. 그러니까 망치질하고 새기고 물건을 옮기고 추수하는 등의 일보다는 동식물, 기계, 다른 사물들을 보살피고 감독하고 유지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사람들을 돌보고, 그들의 요구와 필요를 채워 주고, 설명하고, 확신시키고, 보스가 원하거나 생각하는 것을 미리 알아서 해 주는 일들 말이다. (p.383-384)
'돌봄 노동'은 일반적으로 타인을 향한 일이며, 언제나 해석, 공감, 이해의 노동을 포함한다. 어느 정도까지는 이것이 진짜 일이 아니라 단지 삶이라고, 또는 제대로 산 삶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인간은 천성적으로 공감하는 생물이며, 서로 소통하기 위해서는 언제나 상상력을 발휘하여 자신을 타인의 입장에 세워 봐야 하고, 타인이 무엇을 생각하고 느끼는지를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이는 곧 타인에 대해 적어도 조금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 모든 공감과 상상적 동일시가 한쪽에만 치우칠 때 그것은 일이 된다. 상품으로서의 돌봄 노동의 핵심은 일부 사람들은 돌보는데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 아니다. '서비스'(이 오래된 봉건적 용어가 지금도 남아 있는 것을 보라.)에 대해 돈을 내는 자들이 상대방 마음을 해석하는 노동에 참여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는 것이다. 만약 벽돌공이 타인에게 고용되어 일한다면, 그런 벽돌공의 경우에도 이는 사실이다. 아랫사람들은 보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끊임없이 지켜봐야 한다. 그러나 보스는 신경 쓸 필요가 없다.
이것이 심리학 연구에서 노동계급 출신 사람들이 부유층은 물론 중산계급 사람들보다 타인의 감정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공감하고, 돌보는 능력이 더 크다는 결과가 수시로 나오는 한 가지 이유라고 생각한다. 타인의 감정을 읽는 기술은 어느 정도까지는 단지 노동계급이 실제로 하는 일들이 낳는 결과일 뿐이다. 부자들은 노동계급 사람들처럼 해석 노동을 잘하는 방법을 배울 필요가 없다. 타인을 고용하여 자기 대신 일을 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타인의 관점을 습관적으로 이해해야 하는 사람들은 타인에게 신경 쓰는 성향을 갖게 된다. (p.386-387)
오늘날 대부분의 경제학자들은 노동가치이론을 경제학의 초창기 때부터 있었던 신기한 주제로 본다. 또 가격 형성의 패턴을 이해하는 것이 일차적 관심사라면 사실 더 좋은 도구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노동자들의 운동을 위해서는(그리고 아마도 카를 마르크스 같은 혁명가들에게는) 절대 그것이 진짜 요점이 아니었다. 요점은 철학적인 것이다. 바로 우리가 사는 세계는 우리가 집단적으로 사회로서 만들어 낸 것이며, 따라서 지금과 다르게 만들 수도 있었다는 인식이다.
이는 언제라도 손에 쥘 수 있는 어떤 물리적 사물의 경우에도 사실이다. 사물 하나하나는 우리가 어떤 모습일지, 또 우리가 무엇을 원하거나 필요로 할지를 누군가가 상상하고 생각하여 이를 기초로 제작하거나 길러 낸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 '정부' 같은 추상물의 경우에는 더욱 사실이다. 그것이 존재하는 것은 오직 우리가 그것을 매일 생산하기 때문이다. 현대 마르크스주의자들 가운데 아마 가장 시적인 사람일 존 홀러웨이는 "자본주의를 그만 만들라(Stop Making Capitalism)"라는 제목의 책을 쓰겠다고 했다. 홀러웨이의 말에 따르면, 우리는 마치 자본주의가 우리를 위에서 압도하는 거대한 괴물인 것처럼 행동하지만, 실제로 자본주의는 우리가 만든 것에 불과하다. 매일 우리는 자본주의를 재창조한다. 어느 날 우리가 뭔가 다른 것을 만들기로 결정한다면, 더 이상 자본주의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뭔가 다른 것이 있게 된다.
이것이 모든 사회 이론과 혁명적 사유의 핵심 질문이라고 할 수도 있다. 아마 궁극적으로는 유일한 질문일지 모른다. 우리는 함께 우리가 사는 세상을 창조한다. 우리 중 누군가가 우리가 살고 싶은 세상을 상상한다면, 누가 현재 존재하는 것과 똑같은 세상을 상상하겠는가? 우리는 더 나은 세상을 상상할 수 있다. 그런데 왜 그런 세상을 창조하지 못할까? 왜 그저 자본주의 만들기를 중단한다는 것이 생각도 못할 일로 보일까? 아니면 정부를 그만 만드는 것은? 아니면 적어도 나쁜 서비스 제공자와 짜증 나는 관료제적 규제를 그만 만드는 것은? (p.388-389)
이런 평가는 현대의 수많은 연구로 확인되었다. 유럽이나 미국이 역사적으로 사람들의 본업을 영원의 눈으로 판단해야 하는 종류의 것으로 보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묘지에 가서 '증기 파이프 설치 기사', '부통령', '공원 감시인', '점원'이라는 말이 새겨진 묘비를 찾으려고 해도 헛수고다. 죽고 난 뒤 한 영혼이 지상에 존재했던 핵심은 그들이 남편과 아내와 아이들과 때로는 전쟁에서 함께 복무한 동료들에게 느꼈던, 그리고 그들에게서 받았던 사랑으로 표시된다. 이런 것들은 모두 강렬한 감정적 몰입, 생명의 주고받음을 포함하는 일이다. 이와 반대로 그들이 살아 있는 동안 누구든 타인을 만날 때 던졌을 법한 첫 질문은 "당신 직업은 무엇인가?"이다.
이런 상황은 계속된다. 그것이 지금도 존속한다는 사실은, "부의 복음"과 그 이후 소비자주의의 증가가 모든 것을 변화시켰다고 알려져 있으니만큼, 사라지지 않는 패러독스 같은 것이다. 더 이상 우리는 생산한 것을 통해 자신을 표현하는 존재로 여기지 않는다. 존재는 소비한 것을 통해 표현된다. 어떤 종류의 옷을 입는가, 어떤 음악을 듣는가, 어떤 스포츠 팀을 응원하는가 하는 것들이다. 특히 1970년대 이후 누구나 SF 소설 애호가, 애견가, 페인트볼 애호가, 마리화나 애호가, 시카고 불스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팬이라는 부족적 하위문화로 자신을 분류하려고 한다. 절대 항만 노동자나 재난 위험 분석가를 내세우지 않는다. 어떤 차원에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기 직업 이외의 것으로 규정되고 싶어 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면서도 모순적이게도 삶에 궁극적 의미를 주는 것은 일이며, 실직은 심리적으로 참혹한 영향을 미친다고 이야기한다. (p.392-393)
20세기 동안 일에 대한 조사, 연구, 설문, 민속학적 연구가 엄청나게 이루어졌다. 일에 대한 연구는 그 자체로 작은 산업이 되었다. 이 연구들이 도달한 결론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자잘한 변수는 있지만 이 내용은 전 세계 어디에나 있는 화이트칼라와 블루칼라 노동자들에게 해당되는 것으로 보인다.첫째, 거의 모든 사람들의 존엄에 대한 감각과 자존감은 생계를 위한 노동에서 회복된다.
이것을 '현대 노동의 패러독스'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산업 관계는 말할 것도 없고, 노동사회학이라는 과목 전부가 대체로 이 두 가지가 어떻게 동시에 참일 수 있는지를 이해하려는 노력과 관련된다. 알 지니와 테리 설리번이 1987년에 한 말을 보자.
둘째, 거의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직업을 싫어한다.지난 25년 동안 100건을 훨씬 넘는 연구에서 노동자들은 매번 자신의 직업을 신체적으로 지치고, 지루하고, 심리적으로 위축시키며, 개인적으로 굴욕적이고 의미 없는 것이라고 묘사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그들은 어느 층위에서는 일이 인간의 성격 형성에 결정적으로 중요하며 심리적으로는 비할 데 없는 역할을 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일하고 싶어 한다. 일은 그저 생계 수단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내면의 삶을 이루는 가장 중요한 구성 요소 가운데 하나다. (……) 일하기를 거부당한다는 것은 그 일을 한 대가로 살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많은 것을 거부당하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규정하고 존중할 능력을 부정당하는 것이니까.
이 주제로 오랫동안 연구한 지니는 마침내 일이 갈수록 목적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목적 그 자체로 여겨지게 되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즉 프로젝트를(내가 말했듯이 가족, 정치, 공동체, 문화, 종교 등 경제적인 것 이외의 가치들을) 추구할 수 있게 해 주는 자원과 경험을 획득하는 길이 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일은 거의 모든 사람들이 해롭고 굴욕적이고 억압적이라고 느끼는 목적 그 자체이기도 했다. (p.393-394)
미국에서 게으르고 자격 없는 빈민의 전형성은 오래전부터 인종주의와 연루되어 있었다. 여러 세대에 걸친 이민들은 노예 후손들의 소위 규율 부족을 경멸하라는 배움을 통해 "근면하게 일하는 미국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배웠다. 일본인 노동자들이 한국인을, 영국인 노동자들이 아일랜드인을 경멸하도록 배우는 것처럼 말이다. 오늘날 주류 언론은 대개 더 섬세하게 활동해야 하는데도 빈민과 실직자들, 특히 공공 구호품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험담의 북을 끝없이 두드린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현대 도덕주의자들의 기본 논리를 받아들이는 것으로 보인다. 즉 사회는 공짜로 뭔가를 바라는 사람들의 포로가 되었다는 논리, 빈민은 일할 의지와 훈련이 부족하기 때문에 가난하다는 논리, 하고 싶은 정도보다 더 열심히 일한, 되도록 혹독한 감독자 휘하에서 열심히 일한 사람만이 동료 시민들의 존경과 배려를 받을 자격이 있다는 논리다. 그 결과 4장에서 설명된 노동에서의 사도마조히즘적 요소는 직장에서 하향식 지휘 계통이 낳는 예측 가능하지만 추악한 부작용이라기보다는 일 자체를 정당화하는 핵심 요소가 되어 버렸다. 고통은 경제적 시민이라는 증표가 되었다. 그것 없이는 어떤 주장도 내세울 권리가 없다. (p.395-396)
도덕적 시기심은 충분히 이론화되지 않은 현상이다. 이 주제로 책을 쓴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도덕적 시기심은 인간사에서 분명히 중요한 요인이다. 여기서 도덕적 시기심이란 상대방이 부자이거나 재능이 있거나 운이 좋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행동이 시기하는 자 본인보다 더 높은 도덕적 기준을 구현하는 것으로 여겨질 때 느끼는 시기심과 원망의 감정을 가리킨다. 그 감정의 기본은 "어떻게 저 사람이 감히 (나보다 낫다고 내가 진정으로 인정하는 방식으로 행동함으로써) 나보다 낫다고 주장하는가?"인 듯싶다. (p.406)
미국에서 다른 이유로는 설명할 수 없는 적대감이 초등학교와 중등학교 교사들을 겨냥하고 있는 사정도 마찬가지다. 학교 교사란 물론 보수가 낮고 스트레스가 크다는 사실을 충분히 알면서도 사회적으로 중요하며 고상한 소명을 선택한 사람들의 본보기 그 자체다. 타인의 삶에 긍정적 영향을 미치고 싶은 사람이 교사가 되는 것이다. (뉴욕 지하철의 교사 구인 광고에는 이런 문구가 있었다. "아무도 20년 뒤에 전화해서 당신이 그토록 좋은 보험 손해평가사여서 감사하다고 말해 주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번에도 그들을 버릇 나쁘고, 권리만 요구하고, 보수를 너무 많이 받는 세속적이고 박애주의적인 반미주의 분출자라고 비난하는 사람들의 눈에는 이런 비난이 정당하게 보이는 모양이다. 그런 점을 감안하면 공화당 활동가들이 왜 교원 노조를 공격 대상으로 삼는지 이해할 수 있다. 교원 노조는 민주당의 핵심 지지 세력 중 하나다. 하지만 교원 노조에는 교사들과 학교 행정관도 포함되는데, 행정관들은 공화당 활동가들이 반대하는 거의 모든 정책에 실제로 책임이 있는 이들이다. 왜 그들에게 집중하지 않을까? 그랬더라면 교사들이 응석받이에 버릇이 나쁘다 해도, 봉급을 많이 받는다는 점에서는 학교 행정직의 문제가 더 심하다고 지적하기가 훨씬 쉬울 텐데 말이다. 엘리 호로위츠는 이렇게 지적한다.여기에서 놀라운 점은 공화당 지지자와 다른 보수파들이 학교 행정직에 대해 실제로 불평했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거기서 그들은 멈추었다. 무슨 이유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런 목소리(애초 극소수인 데다 아주 작았으니까.)는 대화가 시작되자마자 더 가라앉아서 거의 없어질 지경이었다. 결국 교사들은 더 가치 있는 일을 하는데도 더 효과적인 정치적 타깃이 되고 말았다.
다시 한번 나는 이것이 오로지 도덕적 시기심 탓이라고 생각한다. 교사는 자신을 자기희생적이고 공공 의식으로 무장한 존재로 과시하듯 드러내는 사람, 20년 뒤 "감사합니다. 선생님이 제게 해 주신 모든 일에 대해 감사합니다."라는 전화를 받고 싶어 하는 사람으로 비춰진다. 이런 사람들이 노조를 결성하고, 파업하겠다고 위협하고, 더 나은 노동조건을 요구하는 것은 거의 위선으로 여겨진다. (p.409-410)
내가 보건대 보수파 유권자들은 대체로 부자들보다 지식인들을 더 원망하는 것 같다. 왜냐하면 그들이나 자녀들이 부자가 되는 시나리오는 꿈꿀 수 있지만, 문화적 엘리트층의 멤버가 되는 시나리오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면 이런 판단은 부당한 평가가 아니다. 네브래스카주 출신 트럭 운전수의 딸이 백만장자가 될 확률은 아주 낮지만(요즘 미국은 아마 선진국 가운데 사회적 유동성이 가장 낮은 나라일 것이다.) 그래도 그런 일은 일어날 수 있다. 그런데 그 딸이 국제 인권 변호사가 되거나 《뉴욕 타임스》 연극 평론가가 될 가능성은 사실상 없다. 설사 그녀가 알맞은 학교에 갈 수 있더라도 학교를 졸업한 다음 뉴욕이나 샌프란시스코에서, 그 분야에서 반드시 거쳐야 하는 무급 인턴 생활을 하면서 살아갈 방도는 분명 없다. 설사 유리 직공의 아들이 자리가 좋은 불쉿 직업에 발끝을 담그는 일이 생기더라도, 그는 십중팔구 에릭처럼 자기 직업을 필요한 인맥을 쌓는 토대로 바꾸지 못하거나 그렇게 하기를 꺼릴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방벽이 수천 개는 있다.
6장에서 제시한 '가치'와 '가치들'의 대립을 이런 식으로 표현할 수도 있다. 돈을 많이 벌고 싶다면 방법이 있을지도 모른다. 반면 다른 종류의 가치(진실(언론, 학문), 아름다움(예술계, 출판계), 정의(사회운동, 인권), 자선 등)를 추구하는 것이 목표라면 그 일을 하면서 생계비를 벌기 원할 것이다. 그러다가 어느 정도 재산이나 사회적 인맥이나 문화적 자산을 가진 집안 배경이 없다면 장벽을 뚫고 나갈 길이 없음을 알게 된다.
그렇다면 '진보 엘리트'란 돈 외의 어떤 이유로든 할 만한 일을 하면서 보수를 받을 수 있는 일자리를 사실상 자기들 몫으로 챙겨 둔 사람들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은 자신들을 미국의 신흥 귀족으로 자리매김하려고 노력했고, 대체로 성공했다. 어떤 의미에서 그들은 할리우드의 귀족층처럼, 물질적으로 잘살면서도 보다 높은 목적에 봉사한다고 느낄 수 있는, 말하자면 고상한 기분을 맛볼 수 있는 모든 직업에 대한 세습적 권리를 독점하고 있다. (p.412-413)
이 모든 것이 군대를 지지하는 것과 무슨 관계가 있을까? 글쎄, 만약 트럭 운전수 딸이 이기적이지 않고 고결한 정신을 추구하면서도 집세를 내고 의료보험과 연금을 유지할 수 있는 직업을 찾겠다고 단호하게 결심했다면 어떤 선택지가 있을까? 종교적 기질의 소유자라면 지역 교회를 통해 방도를 찾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런 직업은 아주 드물다. 쉽게 택할 수 있는 것이 군대다.
내가 이런 현실을 처음 깨달은 것은 10년도 더 전에, 캐서린 러츠의 강의를 들을 때였다. 브라운대학교의 인류학자인 러츠는 해외 미군 기지를 연구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었다. 그녀는 기지들 대부분이 외부 활동 프로그램을 운영한다는 아주 흥미로운 사실을 관찰했다. 병사들이 근방의 소도시와 마을에서 교실 수리나 치과 치료 등의 봉사 활동을 하는 것이다.
이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외견상 이유는 지역 공동체와의 관계 개선이었지만 그 측면에서는 별 효과가 없었다. 이런 사실이 밝혀진 뒤에도 프로그램은 계속 유지되었다. 병사들에게 엄청난 심리적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다. 봉사 활동에 대해 나중에 설명하면서 황홀한 기분을 맛보는 병사들이 많았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내가 군대에 들어간 건 그것 때문이야." "군 복무의 진정한 목표가 여기 있어. 그냥 나라를 지키는 것만이 아니라 사람들을 돕는 일 말이야."
연구자들은 공공 서비스 임무를 수행했던 병사들의 재입대 비율이 두세 배는 높다는 것을 알아냈다. 이렇게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잠깐만, 이 많은 사람들이 실은 평화봉사단에 들어가고 싶은 거라고?" 그리고 자료를 충분히 살펴본 끝에 평화봉사단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당연하게도 대학 졸업장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미국 군대는 좌절한 이타주의자들을 위한 피난처였다. (p.414-415)
자동화가 수백만 명을 일자리에서 몰아냈거나 몰아낼 것이라는 경고는 적어도 대공황 때부터 있었다. 당시 케인스는 "기술적 실업"이라는 용어를 만들어 냈고, 많은 사람들이 1930년대의 대량 실업은 미래 사태의 신호라고 짐작했다. 그런 주장은 언제나 약간은 경고론자처럼 보이지만, 이 책이 주장하는 바는 정반대다. 그 예언들은 전부 옳았다. 자동화가 대량 실업을 초래한 것은 사실이었다. 우리는 그저 억지로 만든 허수아비 직업을 추가해 간극을 메워 왔을 뿐이다.
우파와 좌파 양편에서 오는 정치적 압력, 유급 고용만이 완전한 도덕적 인간을 만들 수 있다는 대중의 뿌리 깊은 감정, 그리고 조지 오웰이 1933년에 이미 지적한 대로, 노동자 대중의 손에 너무 많은 여가 시간이 주어질 때 어떤 일이 벌어질지에 대해 상류계급이 느끼는 공포감이 배가되어, 현실 상황과 관계없이 부국에서 공식적인 실업률은 3~8퍼센트 범위를 절대 넘어서면 안 된다는 선이 확실히 그어졌다. 하지만 불쉿 직업과 그들을 지원하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진짜 직업을 지운다면, 1930년대에 예견된 재난은 실제로 일어났을 것이다. 인구의 50~60퍼센트가 실제로 일자리를 잃는 것이다.
물론 그것이 재앙이어야 할 이유는 전혀 없다. 지난 수천 년의 세월 동안 '사회'라 부를 수 있을 인간 집단 수천 개가 별 존재감도 없이 존재했고, 그들의 절대다수는 그들이 익숙해진 스타일로 살아남기 위해 해야 하는 과업들을 분배할 방법을 모색해 냈다. 거의 모두가 어떤 식으로든 기여할 수 있고, 지금 사람들처럼 깨어 있는 시간 대부분을 하지 않았으면 싶은 과업을 수행하느라 소모하지 않아도 되는 방법 말이다.
더욱이 과잉 여가 시간이라는 '문제'를 만난 사회의 주민들은 스스로 즐기거나 다른 방식으로 시간을 보낼 방법을 전혀 어렵지 않게 알아냈다. 그런 과거 사회에 태어난 사람의 관점에서 보면 우리는 이온 티치의 눈에 보인 풀족만큼이나 비합리적인 사람들로 보일 것이다.
그렇다면 현재의 노동이 지금과 같은 식으로 배분되어 있는 이유는 경제나 인간 본성과 아무 상관이 없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정치적인 이유다. 돌봄 노동의 가치를 수량화하려고 시도할 이유는 없었다. 그런 노력을 계속해야 하는 이유는 정말로 없다. 우리는 멈출 수 있다. 하지만 일을 재구성하고 또 일의 가치를 평가하는 방법을 재구성하는 캠페인을 시작하기 전에 현재 작동하는 정치적 힘을 다시 한번 주의 깊게 살펴봐야 한다. (p.430-431)
레슬리는 자산 조사 시스템이 어떻게 설계되든 적법하게 혜택을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들의 적어도 20퍼센트는 신청을 포기하고 만다는 것을 입증한 연구에 대해 말해 주었다. 그것은 규정에 따라 적발할 수 있는 '속임수'보다 분명히 더 많은 수치다. 사실 정직하게 실수를 범한 경우를 고려하더라도 이 수치는 1.6퍼센트에 그친다. 20퍼센트라는 수치는 공식적으로 혜택을 거부당한 사람이 실제로는 아무도 없더라도 적용될 것이다.
물론 규정들은 최대한 많은 신청자가 그럴듯하게 거부당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그 규정들의 제재와 변덕스러운 적용 사이에서 이제 영국 실업수당 자격자들의 60퍼센트가 수당을 받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다른 말로 하면, 레슬리가 서술하는 모든 사람, 즉 규정을 제정한 관료들부터 노동 연금 부서와 강제집행 법정, 변호사, 그런 변호사들을 고용하는 NGO를 위한 신청을 처리하는 기금 단체에서 일하는 직원들, 그리고 그들 모두를 포함하는 군집 전체가 인간이란 당연히 게으르고 사실은 일하기 싫어하는 존재이며, 따라서 설사 그들이 문자 그대로 굶어 죽지 않도록 보장할 책임이 사회에 있더라도, 삶을 지속하는 수단을 최대한 혼란스럽고 오래 걸리고 굴욕스러운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착각을 유지하기 위해 존재하는 단 하나의 방대한 기구의 일부다.
그렇다면 그 직업은 본질적으로 형식적 서류 작성과 임시 땜질의 끔찍한 복합물이며, 의도적으로 작동하지 않게 설계된 돌봄 시스템의 비효율성을 메워 주는 것이다. 수천 명의 직원이 에어컨이 나오는 사무실에 앉아 오로지 빈민들이 스스로를 계속 부정적인 존재로 여기게 만드는 일을 하면서 안정적인 봉급을 받으며 살아가고 있다. (p.442-443)
기본소득 운동이 궁극적으로 제안하는 것은 생계를 노동과 분리하자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그것을 시행한 어떤 나라에서든 즉각 관료 수가 대폭 줄어드는 현상이 나타난다. 레슬리의 경우에서 보듯이, 정부 기구들의 엄청난 규모, 그리고 거의 모든 부자 사회에서 정부 기구를 둘러싸고 있는 반쯤은 정부 기업인 NGO의 애매모호한 구역은 그저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괴감을 안겨 주기 위해 존재할 뿐이다. 대체로 쓸모도 없는 세계적 노동 기구를 설립하는 것은 지독하게 값비싼 도덕적 게임이다.캔디 예를 하나 들어 보자. 최근에 나는 위탁모를 해 볼까 생각했다. 그래서 관련 조항들을 살펴보았다. 아주 후한 내용이었다. 위원회가 주는 아파트를 받고, 그 외에도 아이를 돌보는 비용으로 매주 250파운드를 받는다. 그러다가 깨달았다. 잠깐. 이건 매년 아이 한 명에 드는 비용이 1만 3000파운드와 아파트 하나라는 거야. 그런데 아이의 친부모는 거의 틀림없이 이 정도 돈이 없다. 그렇다면 그 돈을 부모들에게 준다면, 애당초 그 아이들을 위탁 양육하기 위해 처리해야 하는 그 많은 문제를 겪을 필요가 없다. 그리고 물론 위탁모를 배치하고 감독하는 공무원들의 봉급, 그들이 일하는 사무실 건물과 유지 관리 비용, 그런 공무원들을 감독하고 통제하는 다양한 단체들과 그 단체들이 일하는 사무실의 건물과 유지 관리 비용 등은 셈에 넣지도 않았다.
(p.450-451)
보편적 소득이 무엇인지, 또 그것이 있으면 왜 좋은지에 대한 근본적으로 다른 비전들이 있다는 사실이 상황을 더욱 혼탁하게 만든다. 무상교육이나 의료보험 같은 기존의 복지국가 보급을 완전히 없애고 모든 것을 시장에 내주는 핑계로 얼마 안 되는 연금을 제공하려는 보수파의 버전부터, 레슬리와 캔디가 지지하는 것처럼 영국 국가 의료 서비스 같은 기존의 무조건적 보장이 그대로 존속하리라고 가정하는 급진적 버전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한편에서는 기본소득을 계약 방법으로 보며, 다른 쪽에서는 그것을 무조건적 영역을 확장할 방법으로 본다. 나는 후자를 지지한다. 이는 반국가적인 나 자신의 정치적 입장과 아주 명백하게 상반된다. 무정부주의자로서 나는 국가가 완전히 해체되기를 기대하며, 국가에 더 많은 권력을 주는 정책에는 아무 관심이 없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것이 내가 기본소득 운동을 지지할 수 있는 이유다. 기본소득 운동은 국가 권력의 거대한 팽창으로 보일 수도 있는데, 아마 그 돈을 만들고 분배하는 것이 국가(아니면 중앙은행 같은 준국가기관)이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와 정반대다. 정부의 거대한 부문(그리고 정확하게는, 일반 시민들의 도덕을 감시하는 데 가장 깊이 개입하므로 가장 주제넘고 뻔뻔스러운 부문들)이 즉각 불필요해질 것이고 그냥 폐쇄될 수 있다.
그렇다, 수백만의 하급 공무원들과 레슬리 같은 수당 자문관들은 현재 일자리를 잃게 된다. 하지만 그들 역시 기본소득을 받을 것이다. 아마 그들 중 일부는 레슬리가 제안하듯이 태양광 패널을 설치하거나 암 치료법을 발견하는 것 같은 정말 중요한 일을 하게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들이 저그밴드를 결성하든, 골동 가구 복원에 헌신하든, 동굴 탐험에 나서든, 마야 상형문자를 해독하든, 노년 섹스 분야에서 세계기록을 갱신하려 하든 상관없다. 나중에 무슨 일을 하든 그들은 틀림없이 지금 현재보다는, 이력서에 기입할 세미나에 지각했다고 실직자들에게 제재를 가하거나 노숙자들이 신분증 세 가지를 갖고 있는지 점검하는 지금 상태보다는 행복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새로 행복을 찾으면 다른 모든 사람도 더 나아질 것이다. (p.451-452)
어떤 게임이 확정된 것이지만(어떤 사람들은 이유가 무엇이든 확정된 게임을 좋아한다.) 가끔 거기서 나가지 못할 때가 있는 그런 경우가 아니다. 그렇다면 질문은 이렇게 제기되어야 한다. 보스에게, 아니면 감당하기 힘든 관리나 학대하는 남자친구에게 '오렌지'라고 안전 용어를 말하는 것과 대등한 것이 무엇일까? 어떻게 하면 나가고 싶을 때는 언제나 나갈 수 있기 때문에 하고 싶어지는 게임을 만들 수 있을까?
경제 부문에서는 적어도 그 대답이 명백하다. 직장 정치에서 당연시되는 사디즘은 모두 "난 나갈 거야."라고 말해도 아무런 경제적 여파를 겪지 않을 능력이 없는 데 달려 있다. 애니가 몇 달 전 고친 문제점 때문에 또다시 불려 나가는 데 진저리를 치며 직장을 떠나더라도 수입이 줄어들지 않는다는 것을 그녀의 보스가 알았다면, 그 보스는 애당초 애니를 사무실로 호출하지 않는 게 낫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기본소득은 이런 면에서 정말로 보스에게 '오렌지'라고 말할 힘을 노동자들에게 준다.
여기서 두 번째 주제로 넘어간다. 소득이 보장되는 세계에서는 최소한 애니의 보스가 약간이라도 존중하는 태도로 애니를 점잖게 대할 필요를 느끼게 되는 데 그치지 않는다. 보편적 기본소득이 제도화되면, 애니와 같은 직업이 계속 존재하리라고 생각하기도 힘들다. 살아남기 위해 일할 필요가 없는 사람이 치과 조수나 장난감 제작자가 되거나 영화 안내인이나 예인선 조종자, 심지어 하수도 처리 시설 감독관을 직업으로 선택하는 것은 얼마든지 상상할 수 있다. 심지어 이런 직업 몇 개를 함께 선택하는 모습도 더 쉽게 상상할 수 있다.
그러나 재정적 어려움 없이 사는 사람이 의료비 관리 회사에 낼 서류 양식을 집중 검토하는 데 많은 시간을 쏟는 것은 상상하기 힘들다. 부하 직원들이 허락 없이 발언하지 못하는 직장이라면 더욱더 그렇다. 그런 세상이라면 애니가 유치원 교사를 포기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그 일에 관심이 없다고 스스로 판단하지 않는 한 말이다. 그리고 만약 의료비 관리 회사가 계속 존재한다면 그들은 자기 양식을 집중 검토할 또 다른 방식을 궁리해 내야 할 것이다. (p.455-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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