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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3년 이하 퇴사자의 가게들 / 브로드컬리 편집부 / 브로드컬리

 

 인테리어 과정에서 어려움은 없었나?
 작업하시는 분들과 함께 일하는 과정이 정말 많이 힘들었다. 현장에 도착한 업자분들 대부분이 가장 먼저 꺼냈던 말이, 남자는 어디 있냐는 거였다. 현장에 여자 혼자 있는 게 싫은 건지, 젊다고 얕잡아 보신 건지, 상처되는 말과 무리한 요구를 매번 듣게 됐다.
 공사 경험이 부족한 내 잘못도 없지 않았겠다. 하지만 성별을 두고 문제 삼는 걸 모두 납득하긴 힘들었다. 농담이라 덧붙인다 해도, 이 나이에 남자 하나 없는 거냐, 여자가 결혼이나 하지 밖에서 뭐 하고 있냐는 말을 들으면 정말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다.
 철거 작업 과정에선 건물 외벽의 타일이 떨어지는 사고가 발생했는데, 분명히 업자분 본인의 잘못이었음에도, 도리어 나에게 복구공사 비용을 요구하셨다. 너무나 불합리한 처사이고 돈을 드릴 수 없다고 했더니, 연장을 들고 위협을 하면서 타일을 다시 부수겠다고 하셨다. 결국 경찰에 신고해 수습할 수밖에 없었다. 현장에선 해결이 됐다지만, 언제든 다시 해코지할 수 있다는 걱정이 들어서 한동안 정말 무섭고 불안했다.
 전기 공사 중에도 문제가 있었다. 150만 원을 들여 배선 공사를 했는데, 작동하지 않는 콘센트가 한두 곳이 아니었다. 업자분께 수리를 요구했더니, 출장비를 각오하라면서 으름장을 놓으셨다. 섣부른 판단일지 모르겠으나, 만약 내가 남자였다면 이런 식으로 대하셨을까 싶은 마음을 지우기가 어려웠다. (p.22-23)

 

 재료 준비에 시간이 4~5시간이나 필요한가?
 어떤 메뉴이든 요리하는 시간보다 재료 준비가 더 오래 걸린다. 예를 들어 토마토 샌드위치의 경우, 영업시간 주방에서 만드는 거만 보면 빵 위에 치즈, 토마토 올리고 소스 붓는 게 전부다. 굉장히 간단해 보인다. 그런데 그 소스를 만들려면 방울토마토를 더운물에 데쳐서 하나하나 껍질을 벗기고, 역시 일일이 씻고 손질한 양파와 함께 올리브유에 미리 재워 둬야 한다.
 시금치나 대파 씻는 거만 해도 꽤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집에서 대파 씻는 걸 상상해보라. 그 큰 걸 몇 단씩 씻으려면 오래 걸리지 않겠나.
 한 번에 많이씩 만들면 그나마 좀 편할 텐데, 이틀만 지나도 신선도가 떨어져서 사용하지 못하는 재료가 많다. 그러다 보니 거의 매일 준비 작업이 필요하다. (p.51)

 

 예를 들어 어떤 디테일이 있나?
 일반적인 책장은 서점이 아닌 독자를 위한 가구인 거 같다. 서점을 운영해보기 전엔 전혀 인지하지 못했던 부분이다. 독자는 한 종의 책을 보통 한 권씩 보관한다. 그리고 표지가 아닌 책등 방향으로 책을 정리한다. 반면 서점은 한 종의 책도 몇 권씩 보관이 필요하다. 그리고 책등이 아닌 표지 방향으로 책을 둘 필요가 있다. 책을 보관하기 위함이 아니라, 책을 소개하고 팔기 위한 디자인의 책장이 필요한 거다.
 예를 들어 책장의 아래쪽은 손님들이 살펴보기 불편하기 때문에, 차라리 재고 보관 공간으로 활용하고, 눈에 잘 띄는 높이에는 표지 방향 진열이 가능한 구조이면 좋을 거다. 이런 걸 진작 알았으면 좋을 텐데. (p.105-107)

 

 하고 싶은 일 하고 사느냐고 묻는다면?
 회사에 다닐 때도 마찬가지였고, 항상 하고 싶은 일은 하고 있다. 덧붙이면 하기 싫어도 해야만 하는 일도 항상 감당하고 있다. 서점을 하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서점이든 회사이든 내가 하고 싶은 일, 내가 잘할 수 있는 일, 싫어도 해야만 하는 일의 비율은 1:1:1로 비슷한 거 같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싫어도 해야만 하는 일의 성격이 아닌가 싶다. (p.123)

 

 퇴사를 용기 있는 결정으로 평가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개인적으로 퇴사 결정에 용기는 크게 필요치 않았다. 오히려 회사에 근속하는 쪽이 훨씬 어렵게 느껴졌다.
 다만 이런 평가는 개인이 처한 상황마다 다를 수 있는 거 같다. 퇴사에 대해서 쉽게 말을 했다가, 친구에게 하소연을 들은 경험이 있다. 누군가는 퇴사를 간절히 원함에도 책임져야 할 게 너무 많고, 상황이 녹록지 않아서 차마 실행하지 못하고 있는데, 퇴사가 뭐가 대단하냐는 식으로 말하지는 말아 달라는 거였다.
 듣고 보니 친구 말이 정말 맞는 말이더라. 이후로는 누가 용기 있다고 말해주면, 굳이 반박하기보단 좋게 봐주셔서 고맙다고 대답을 드리고 있다.
 
 미디어가 퇴사를 조명하는 방식에 대한 생각은?
 미디어에 비친 퇴사자의 모습들은 너무 진취적이고, 생산적이고, 철학적이거나, 창의적이다. 마치 퇴사가 자기계발 활동 같다. 퇴사 뒤엔 무언가를 이뤄야만 할 거 같다. 하다못해 책이라도 한 권 써야 할 거 같다. 이런 분위기가 안타깝다. 정말 회사가 너무 힘들어서 퇴사를 고민하는 사람들 마음만 괜히 조급해지는 거 같다. 퇴사는 퇴사일 뿐일 텐데 말이다. (p.127-129)

 

 비용은 예상과 어떻게 다른 거 같나?
 일단 재료값이 하나하나 비싸다. 직원일 땐 재료의 개별 가격에 대해 깊이 고민하지 못했던 거 같다. 창고에 다 준비돼 있으니까 그냥 갖다 쓰는 거였지. 우유값이 이렇게 많이 들 줄 몰랐다. 초콜릿도 마찬가지고.
 로스에 대한 부분도 고려를 못했다. 회사에선 음료 만들다가 실수 나면 별생각 없이 버렸는데, 지금은 그럴 때마다 5백 원, 1천 원 나가는 게 계산이 된다. 버리는 재료값만 모아봐도 적지 않은 돈이 나가는 거 같다.
 실수로 로스가 나기도 하지만, 열심히 준비한 디저트가 안 팔려서 폐기하는 경우도 많다. 예를 들어 티라미수 주재료인 크림과 치즈 단가가 높은 편인데, 판매되지 않으면 역시 버려야 한다. 결과적으로 비용이 된다.
 설비 유지보수 비용도 미처 계산에 못 넣었다. 에스프레소 머신에서 물이 새는 등 잔고장이 발생하면 50만 원 정도는 쉽게 지출하게 된다. 스피커 같은 부수적인 설비도 제대로 갖추려니 돈이 만만치 않고.
 식비도 따져보면 돈 단위가 꽤 크다. 직원으로 일할 때는 점심값이 나왔는데, 자영업자 되고 보니 밥값도 내 돈이다. 이렇게 이거저거 빠지고 나면 남는 돈이 정말 얼마 안 되는 거 같다. (p.171-173)

 

 퇴사를 용기 있는 결정으로 보는 관점엔 동의하는지?
 개인의 이익과 필요에 의한 판단일 거다. 입사와 다를 게 없다. 구태여 용기라고 할 이유도 없을 거다.
 
 미디어가 퇴사를 조명하는 방식에 대한 생각은?
 퇴사해서 잘된 케이스를 다룰 때, 부디 조심해 주길 바란다. 퇴사를 놓고 고민 중인 이를 두고, 허황된 환상으로 관심을 끄는 건 너무 무책임한 처사 같다. 퇴사했다고 다 같은 사람이 아니다. 퇴사를 선택한 수많은 개인, 개인일 뿐이다. 퇴사했기 때문에 잘 되는 게 아니고, 잘 될 만한 사람이 잘 되는 게 아니겠나?
 
 퇴사에 대한 환상과 현실 사이 가장 큰 괴리는 뭘까?
 퇴사는 개인의 삶에 있어 큰 변화가 분명하다. 하지만 긍정적 변화도 아니고, 부정적 변화도 아니다. 그저 변화일 뿐이다. 좋은 결과가 따를지, 혹은 반대가 될지는 퇴사 후에도 끊임없이 이어질 수많은 선택에 달려 있을 거다. 선택은 늘 쉽지 않을 거고, 회사 다닐 때와 마찬가지로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거도 있을 거다. (p.311)

 

 커피가 왜 안 팔렸을까?
 언덕길의 단점을 과소평가한 거 같다. 우리 서점이 다소 언덕 위에 있는데, 사람들이 내리막은 걸어서 내려가도, 오르막은 걸어서 올라오지 않더라. 그러다 보니 불과 몇 걸음 아래 건물에 사는 주민분도, 오픈 1년이 지나서야 서점의 존재를 알게 됐다고 한다. 언덕 위의 인구와 언덕 아래 인구는 다른 인구였던 거다.
 유동인구 성향도 잘못 파악했다. 사람이 많이 다니지는 않아도 마을버스 정류장이 바로 앞에 있어서,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을 손님으로 받을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다. 근데 가게를 열고 보니, 버스를 타기 전 몇 분 사이에 커피를 사는 사람은 거의 없더라. 망치를 들면 다 못으로 보인다고(웃음), 안일한 판단이었다.
 굳이 상권을 말하지 않더라도, 거리의 사람들이 움직이는 방향이나 목적에 대한 공부는 꼭 필요한 거 같다.
 커피를 마실 만한 공간을 제대로 제공하지 못한 잘못도 크다. 서점 중앙의 테이블은 원래 도서용 매대가 아니라 커피 테이블의 목적이었다. 한데 막상 들여놓고 보니 커피를 마시기엔 폭이 너무 좁았다. 상상만으로 설계한 탓이다. 카페를 운영해본 경험이 없으니 어떤 사이즈가 필요할지 제대로 알지 못한 거다. (p.395-397)

 

 

우리가 사랑하는 예술을 만든 이가 괴물일 때,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 콘스턴스 그레이디 / 전기가오리

 

 문학 비평이 학문이려면, 비평가들은 신비주의에서 벗어나야 했습니다. 작가의 마음속에 들어가 텔레파시를 통해 그가―당시에는 거의 언제나 '그(he)'였겠지요―독자에게 전달하려는 바를 알아내고자 하는 그 신비주의로부터요. 텍스트는 작가에게서 독립적이어야 했고, 그렇지 않다면 그건 그 글이 정말 좋은 예술은 아니라는 듯이었습니다. 신비평가들이 주장한 바에 따르면 그렇습니다.
 근본적으로, 이 주장은 모든 훌륭한 예술작품을 다루는 최선의 방법은 그것을 초월적 작품으로 대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역사의 바깥에서 홀로 서 있어 어느 시공간의 누구에게든 말을 거는 작품 말입니다. 만약 어떤 예술작품이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고 그리하여 모두에게 말을 걸지 못한다면, 그것은 정말로 훌륭한 예술작품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는 순환 논변"이라고 예일대 영어학과 교수 에이미 헝거포드(Amy Hungerford)는 지적합니다.
 진지한 문학 연구자는 이제 신비평을 활용하지 않습니다. 진지한 물리학자가 원자에 대한 1930년대의 합의를 사용하지 않는 것처럼요. 그런데 순환적이든 아니든, 신비평은 놀랍게도 교실에서는 엄청나게 유용합니다. 진지한 문학 연구자조차 학생에게 텍스트 분석을 시작하는 법을 가르칠 때는 신비평을 끌고 들어옵니다.
 신비평은 텍스트를 꼼꼼하게 읽고 깊이 파헤치며 모든 단어를 분석하는 데 바탕을 둡니다. 그 글이 쓰여진 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에는 그리 신경 쓸 필요가 없습니다. 즉, 신비평을 받아들이면, 한 번의 수업 시간으로 혹은 학생의 논문 하나만으로 탄탄하고 좋은 분석을 끝낼 수 있다는 뜻이지요. 수많은 이차 문헌을 살피느라 시간을 허비하지 않아도 됩니다. 당신은 그저 텍스트를 보면 됩니다. 당신이 알아야 할 모든 것을 그 텍스트가 말해줄 테니까요.
 그렇기에 신비평은 다수의 학생이 학교에서 처음으로 배우는 문학 분석입니다. 이와 더불어 학생은 작가와 텍스트의 관계를 고민해봤자 딱히 얻을 게 없다는 점을 배우곤 합니다. (p.10-12)

 

 이 모델을 〈가위손〉에 적용시켜본다면, 제게 전조라고 할 만한 순간은 에드워드가 소녀를 베었는데 영화가 관객으로 하여금 소녀보다는 에드워드를 위해 울게 하는 장면일 것입니다. 저는 제가 이러한 세계관에 연루하도록 영화가 요구하는 것이 아닌지를 자문해야 했어요. 상처를 입은 여자보다 상처를 준 남자에게 더 공감하고, 그리하여 그 남자가 끔찍한 범죄에서 빠져나가도록 허용하는 세계관 말이지요. 결국 영화가 정말로 제게 그런 세계관에 연루할 것을 요구한다는 결론을 내린다면, 비평가로서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는 것이 제 의무라고 결심할지도 모릅니다.
 반면에 스위프트와 헤예스-브레이디가 제안하는 모델을 따른다면, 〈가위손〉을 읽는 데 뎁의 삶에 대한 저의 지식을 접목시킬 수 있겠습니다. 저는 이 영화에 계속 관심을 기울일 수 있겠지만, 그러는 동시에 뎁이 입힌 피해 혐의를 계속 인식할 수도 있습니다. (p.25-26)

 

 비평가가 다루는 예술에 대한 비평가의 책임, 비평의 목적, 비평가가 비평 대상을 정하는 방식을 놓고 논쟁을 벌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직업상의 의무 없이 예술을 소비하는 보통의 사람들에게 예술에 어떻게 접근해야 하고, 어떤 예술을 좋아해도 되는지 안 되는지를 말할 방도는 없습니다. 보통의 사람들은 단지 그 작품이 마음에 들고 즐거움을 주기 때문에 그것을 소비하니까요.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이런 여러 가지 발상을 듣고 나서 제가 스스로 어떻게 생각을 정리했는지 설명하는 것뿐입니다. 제가 사랑하는 예술에 대해서요. 그리고 이 모든 생각과 이론을 쥐어짠 과정 끝에, 저는 제가 시작했던 곳에 다다랐습니다. 바로 〈가위손〉을 향한 제 십 대 시절의 사랑도, 조니 뎁에 대한 혐오도 되돌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당장은, 엠버 허드의 멍든 얼굴 사진에 대한 제 감정적 반응이 거의 30년 전의 좋은 연기 한 번에 대한 감정적 반응보다 강합니다. 제게 이는 철학적이거나 윤리적인 판단이 아닙니다. 감정적인 판단입니다. (p.30-31)

 

 

낙태에 대한 옹호 / 주디스 자비스 톰슨 / 전기가오리

 

 낙태를 반대하는 입장 대부분은 수정되는 순간부터 태아가 인간, 즉 사람(person)이라는 전제에 기댄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그 전제를 지지하는 근거는 허술하다. 가장 흔한 논변을 예로 들어보자. 우리는 수정에서 시작하여 출생을 거쳐 아이가 되는 인간의 발달이 연속적이라는 점을 인지하라는 요구를 받는다. 그렇다면 선을 긋는 일, 즉 이 발달 과정에서 한 지점을 택해 '이 지점 이전에 이 사물은 사람이 아니지만 이 지점 이후에는 사람이다'라고 말하는 일은 임의적 선택, 즉 그 사물의 본성 속에서 어떠한 좋은 이유도 찾을 수 없는 선택을 내리는 것이다. [이에 따라] 태아가 수정되는 순간부터 사람이라는 결론, 아니면 태아가 수정되는 순간부터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이 낫겠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결론이 [특정한 지점 이후에는 태아가 사람이라는 전제에서] 따라나오는 것은 아니다. 도토리가 참나무가 되는 발달에 관해서도 비슷하게 이야기할 수 있다. [도토리가 어느 순간부터 참나무인지 선을 긋는 일이 임의적이라고 해서, 이 점으로부터] 도토리가 참나무라는 결론이나 도토리가 참나무라고 말하는 것이 낫겠다는 결론이 따라나오지는 않는다. 이런 형태의 논변은 (표현 자체로도 그 의미가 충분히 설명되는) '미끄러운 경사면 논변'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낙태 반대자들이 이런 식의 논변에 너무 많이 또 무비판적으로 기대는 것은 무척 당혹스럽다. (p.5-7)

 

 내가 언급했던 근거에서 낙태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강간을 원인으로 하는 임신을 [낙태가 허용되는] 예외로 삼을 수 있는가? 물론이다. 그 사람들은 강간 때문에 존재하게 된 것이 아닌 한에서만 사람에게 생명권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같은 요점을] 모든 사람에게는 생명권이 있지만, 어떤 사람은―특히 강간 때문에 존재하게 된 사람은―다른 사람보다 생명권을 덜 가진다는 식으로 말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 진술은 적잖이 불편하게 들린다. 생명권을 가지냐는 물음이, 생명권을 가진다면 얼마나 가지냐는 물음이, 당신이 강간의 산물인지를 묻는 물음으로 바뀌면 안 된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실제로도 내가 언급한 근거에서 낙태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보통 사람의 생명권과 강간 때문에 존재하게 된 사람의 생명권을] 구별하지 않으며, 그러므로 강간의 경우를 예외로 삼지 않는다.
 그와 같은 낙태 반대자는 임신한 아홉 달 내내 어머니가 침대에 있어야 하는 경우도 예외로 삼지 않는다. 어머니가 매우 안됐으며 힘든 시간을 보내리라는 데에야 동의할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모든 사람에게는 생명권이 있고 태아는 사람이라는 등의 말을 이을 것이다. 사실 그들은 불가능한 일이기는 하지만 임신이 9년, 혹은 어머니의 여생 내내 이어지는 경우도 예외로 삼지 않을 것이라고 나는 의심한다.
 어떤 사람은 임신을 지속하면 어머니의 생명이 단축될 가능성이 큰 경우조차 예외로 삼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어머니의 생명을 구하기 위한 낙태조차 허용 불가능한 것으로 간주한다. 요즘에 [모든 방식의 낙태를 전면적으로 반대하는] 그러한 경우는 매우 드물며, 낙태 반대자 가운데 다수는 이와 같은 극단적 견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러한 극단적 견해는 논의를 시작하기에 좋은 지점이다. 극단적 견해를 둘러싸고 다양한 관점이 나오기 때문이다. (p.13-17)

 

 이제 우리는 생명권을 가진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물어야만 한다. 몇몇 견해에서 보자면 생명권을 가진다는 것은 생명 유지에 필요한 정말 최소한의 것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는 것을 포함한다. 하지만 생명 유지에 필요한 정말 최소한의 것이 사실은 감히 요구할 권리조차 없는 무엇이라고 가정한다면 어떨까? 내가 죽을 만큼 아픈데, 열이 나는 내 이마를 짚어줄 헨리 폰다의 시원한 손길만이 내 생명을 구할 수 있다고 해보자. 설령 그렇더라도 내게는 열이 나는 내 이마를 짚어줄 헨리 폰다의 시원한 손길을 받을 권리가 없다. 그가 내 이마를 짚어주려고 비행기를 타 할리우드에서 여기까지 온다면 정말 친절한 일이기는 하겠다. 이만큼 좋지는 않겠으나 내 친구들이 할리우드로 가 그를 여기로 데려온다면 그것도 친절한 일이기는 하겠다. 하지만 나에게는 나를 위해 그렇게 해야 한다고 누구에게든 요구할 권리가 없다. (p.35)

 

 하지만 내가 강조하고 싶은 바가 있다. 나는 사람에게 생명권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사실은 정반대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어떤 권리 이론이 받아들일 만한 것인지를 파악할 때 내걸어야 하는 우선 조건은 모든 사람에게 생명권이 있음이 참임을 그 이론이 밝혀야 한다는 점이다. 나는 생명권을 가진다는 것이 타인의 몸에 대한 사용권 내지 사용 연장권을 가짐을 보장하지 않는다고 주장할 따름이다. 누군가 자신의 생명을 위해 그러한 권리를 필요로 할지라도 말이다. 낙태 반대자들은 생명권이 자기편이라고 생각했겠지만, 생명권은 그렇게 단순하고 명쾌한 방식으로 그들에게 도움을 주지는 않는다. (p.39-41)

 

 A가 B에게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사실로부터, B를 위하여 그 무언가를 하라고 A에게 요구할 권리가 B에게 있다는 점이 따라나온다는 방식으로 '권리'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데 제기되는 반박은 또 있다. 이 반박은 한 사람에게 무언가에 대한 권리가 있는지에 관한 물음이 그 무언가를 제공하는 일이 그 사람에게 얼마나 손쉬운지를 밝히는 쪽으로 나아간다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부적절한 수준을 넘어 도덕적으로 받아들이기가 불가능한 듯하다. 헨리 폰다의 사례를 다시 가져와보자. 앞서 나는 내 생명을 구하는 데 꼭 필요할지라도 헨리 폰다의 시원한 손길로 열이 나는 내 이마를 짚게 할 권리가 나에게 없다고 말한 바 있다. 할리우드에서 여기로 날아와 그렇게 해준다면 정말 친절한 일이기는 하겠지만, 나에게는 그렇게 해야 한다고 그에게 요구할 권리가 없다는 말도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가 할리우드에 있지 않다고 가정해보자. 헨리 폰다가 걸어서 내 방으로 올 가까운 거리에 있으며, 내 이마에 살짝 손을 대었고, 그리하여, 아, 내 생명이 구해졌다고 가정하자. 그렇다면 그는 그렇게 해야 했으며, 그 일을 거절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은 일이겠다. 그렇다면 "음, 이 경우에는 그의 손길로 당신의 이마를 짚게 할 권리가 당신에게 있다는 점이 따라나오며, 그러니 그가 거절하는 것은 부당한 일이다"라고 말해야 하는가? 헨리 폰다가 제공하기 쉬운 일이라면 그 행위에 대한 권리가 나에게 있는가? 어려운 일이라면 권리가 없고? 그에게 부탁하기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그 행위에 대한] 한 사람의 권리가 희미해지다가 사라져버린다는 생각은 조잡하기 짝이 없다. (p.59-61)

 

 태어나지 않은 아이와 어머니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무언가를 요구할 권리가 태어나지 않은 사람에게 있는 경우―그러한 경우가 있을 가능성은 열어두고 있다―를 제외한다면, 다른 사람을 살아 있게 하고자 건강과, 모든 이익 및 관심사와, 모든 의무 및 헌신의 커다란 희생을 9년 동안, 아니, 9개월 동안이라도 해야 한다는 도덕적 요구를 받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p.63)

 

 한 종류의 충격적인 예외를 제외하면, 이 세상 어떤 나라의 그 누구도 다른 사람을 위해 이 정도의 일을 행하기를 법적으로 요구받지 않는다. 예외 사례가 무엇인지는 명백하다. 이 논문에 담긴 나의 주된 관심사가 낙태를 둘러싼 법률 문제는 아니지만, 이 나라[미국]의 어떤 주에서도 다른 사람에게 '최소한도로 멀쩡한 사마리아인'이라도 되라고 하는 법의 강제를 받는 사람은 없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키티 제노비스가 죽는 동안 멀뚱히 서 있던 38명을 기소할 수 있는 법은 없다. 반면 이 나라 대부분의 주에서 여성은 자기 몸속의 태어나지 않은 사람에게 '최소한도로 멀쩡한 사마리아인' 이상의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라는 법적 강제를 받는다. (p.69)

 

 

나의 문구 여행기 / 문경연 / 뜨인돌

 

 난 지금 아무것도 할 게 없기에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람이다. 해야 할 과제도, 마쳐야 할 일도 없는 깨끗한 무계획의 인간이다. 그렇기에 감정을 있는 그대로 표출하고 마구 호들갑을 떨어도 된다. 이제 막 태어난 사람처럼 온몸의 세포가 눈을 뜬 것 같다. 지금까지 내가 나를 너무 함부로 대한 것을 반성한다. 마음껏 좋아하고, 흥분하고, 슬퍼하고, 좌절하고, 행복하고, 설레고, 실망해야지. 그 사실을 깨닫고 나니 너무 좋아서 울고 싶어졌다. 이 여행이 나에게 축복이라는 것을 취업 준비생으로서의 책임감을 핑계로 부정했지만 이제 인정하고 즐겨야겠다. (p.54-55)

 

 큰 경험에 집착하지 않고, 작은 경험부터 차곡차곡 모으기로 한다. 도시 곳곳에서 볼 수 있는 차분하고 단정한 색감과 하루에 20분 정도만 볼 수 있는 파란 하늘. 땅을 울리는 트램 소리와 칠흑처럼 검은 빛깔의 슈프레강. 이것들을 매일 온몸에 두른다. 생각하고 기억한다. 그 무게가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아서 부담 없이 머물 수 있는 베를린. 나의 문구 세계는 점점 넓어지고 있고, 이 여행을 통해 나는 나를 더 사랑하게 된다. (p.80)

 

 작업을 마무리하고 세상에 내보내는 일은 무척 부끄럽다. 완벽하지 않은 것을 누군가에게 보여주는 것은 창피하다.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는 것은 쉽지 않다. 문장 하나하나 걸리는 게 많고 미적으로, 기능적으로 부족한 것 투성이인 나의 작업물을 다른 이에게 보여준다는 것이 얼마나 떨리는 일인지. 이 감정을 이겨내고 언젠가 나의 것을 제대로 마주할 수 있게 될까? (p.93)

 

 조금 가벼운 내용 또는 시원한 계절에 쓰는 편지라면 밝은 색상에 가벼운 편지지를 고른다. 가벼운 편지지일수록 볼펜보다는 굵기가 0.3 정도인 촉이 얇은 유성 펜이 잘 어울린다. 파이로트의 주스업이나 하이테크 또는 유니 스타일핏 펜이 합리적인 가격대에 필기감이 좋다. 이 펜들은 종이를 갉으면서 써져 지나치게 필체가 가벼워지는 것을 방지할 수 있고 무엇보다 볼펜 똥이 뭉치거나 수성 펜이 번져서 편지가 엉망이 되는 사태를 막을 수 있다.
 내용이 조금 무겁거나 가을, 겨울 즈음의 편지라면 약간 어두운 색상에 종이가 살짝 두꺼운 편지지를 고르는 것이 잘 어울린다. 이때 펜은 너무 얇은 유성 펜보다는 0.3에서 0.7 정도 굵기의 볼펜 또는 유성 펜, 혹은 만년필을 사용하는 것이 좋다. 추천하는 제품은 제트스트림, 무인양품 기본 볼펜, 스탈로지 유성 펜 0.7이다. 만약 아주 어두운 색의 편지지를 골랐다면 백색 펜(자바의 수성 펜 또는 펜텔의 하이브리드 겔)을 사용하면 되지만 수성 펜은 살짝만 손이 스쳐도 잘 번지기 때문에 사용할 때 매우 조심해야 한다. 물론 펜은 개인이 선호하는 펜을 잘 제어하면서 사용하는 것이 가장 좋으나, 종이의 두께와 색에 따라 어울리는 펜은 따로 있다. 개인적으로는 편지지에 따라 (더 정확하게는 어떤 종이에 글을 쓰느냐에 따라) 펜을 다르게 선택하는 것이 적합하다고 생각한다. (p.110-111)

 

 가게 주인이 나와 같은 문구 덕후임을 확신할 수 있는 몇 가지 포인트가 있다. 먼저 '기꺼이 수고를 감수한다'는 점이다. 정확히는 파는 사람 입장에서 귀찮은 방법으로 문구를 판다는 것이다. 예를 하나 들면 보통 상자 단위로 파는 클립, 집게 등을 이곳에서는 한 개씩 개별 판매하고 있다. 사는 사람 입장에서는 원하는 문구를 원하는 수량만큼 구매할 수 있어 좋지만, 주인 입장에선 가격 책정부터 포장, 재고 관리까지 판매 단계가 늘어난다. 각양각색의 클립을 조화롭게 선별하고 고객이 들고 온 낱개 제품을 계산대에서 최종 포장을 해야 하는 과정을 즐기지 않으면 유지하기 힘든 판매 방식이다. 주인의 문구 사랑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그리고 이곳은 문구를 하나라도 더 진열하기 위해 선반뿐 아니라 벽, 창가를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그리고 매대에도 최대한 많은 문구를 진열하기 위해 다양한 작은 집기들을 사용한다. 그럼에도 복잡하거나 지저분하다는 느낌은 없다. 청결도와 정돈된 인테리어에서 주인이 이 공간에 쏟는 애정을 느낄 수 있다. 이 점은 생각할수록 대단하게 느껴지는데, 그 이유는 지류는 특성상 먼지가 매우 많이 생길뿐더러 하루라도 청소를 하지 않으면 집기들 사이에 먼지가 쌓여서이다. 애정과 꾸준함 없이는 힘든 일이다. (p.143)

 

 그래도 행복을 찾아보자. 침대에 누워 이 글을 쓰는 지금은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다. 뉴욕에 도착하자마자 슈퍼에서 샴푸와 보디 로션 그리고 초코 아이스크림을 샀다. 뜨거운 물에 머리를 팍팍 감고 온몸에 좋아하는 향의 보디 로션을 잔뜩 발랐다. 뽀송뽀송해진 몸으로 책을 읽고 아이스크림을 퍼먹으며 오늘 하루를 행복하게 마무리한다. 이 행복의 기세를 이어가기 위해 내일은 뉴욕에서 가장 가고 싶었던 문방구에 가야겠다. 그럼 무조건 행복할 수 있다. (p.157)

 

 나 또는 누군가의 삶에서 온기를 담으며 제 몫을 다할 문구를 응원하다 보면 도리어 제가 응원을 받는 기분입니다. 편견 없이 나의 생각을 그대로 받아 적는 펜, 단정하고 깨끗한 모습으로 나의 첫 획을 기다리는 종이, 제 몸보다 큰 무엇인가를 붙이기 위해 힘을 모으는 스티커, 몸을 깎아 나의 실수를 지워줄 지우개, 나와 다른 이의 약속이 되어줄 영수증 책과 모두에게 공평한 자, 어둠을 밝힐 형광펜, 흔적 없이 몇 번이고 다시 일어날 마스킹테이프, 나의 손이 다시 닿기 전까진 책임지고 맡은 것을 보관해줄 집게와 클립, 말로 전하지 못한 이야기를 담아줄 편지지와 엽서…. 이들과 함께라면 어떤 기록이든 반짝이는 조각이 되리란 확신이 들 거예요. (p.262-2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