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트로폴리스 / 벤 윌슨 / 매일경제신문사
이 책을 쓰기 위한 사전 연구 단계에서, 무척 대조적인 모습을 지닌 뭄바이와 싱가포르, 상하이와 멕시코시티, 라고스와 로스앤젤레스 등을 비롯해 유럽, 아메리카, 아프리카, 아시아 등지의 여러 도시를 방문했다. 이를 바탕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연대기적인 서술을 고수하면서도 특정 시기에 관한 이야기뿐 아니라 일반적인 도시 조건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는 일련의 도시들을 선택했다. 이들 도시 중에는 아테네, 런던, 뉴욕같이 선택할 만한 대상으로 보이는 도시도 있고 우루크, 하라파, 뤼벡, 믈라카 등 그리 익숙하지 않은 도시도 있다. 한편 도시의 역사를 탐구하기 위해 나는 각종 시장, 수영장, 경기장, 공원, 길거리 음식 판매대, 커피숍, 카페, 상점, 쇼핑센터, 백화점 따위에서 소재를 찾아다녔다. 아울러 도시에서의 살아 있는 경험과 생생한 일상생활을 파악하기 위해 공식 기록뿐 아니라 그림, 소설, 영화, 노래 따위도 조사했다. 도시의 총체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바라보기, 냄새 맡기, 만지기, 걷기, 읽기, 상상하기와 같은 감각을 통해 도시를 경험해야 한다. 역사상 오랫동안, 도시 생활은 먹기와 마시기, 성과 쇼핑, 잡담과 놀이 같은 감각적 요소를 중심으로 전개되어 왔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도시 생활이라는 극장을 만들어내는 그 모든 요소들을 이 책의 핵심적 내용으로 다루었다. (p.19-20)
우루크가 이 세상에 선사한 선물은 바로 도시화와 문어(文語)였다. 첫 번째 선물이 두 번째 선물로 이어졌다. 우루크는 기존의 확고한 사고방식에 대한 근본적인 혁신이나 타격을 두려워하는 사회가 아니었다. 표기와 수학은 도시라는 가마솥에서 탄생했다. 표기와 수학은 복잡성을 관리하는 행정 기법이었다. 지금까지 발견된 가장 오래된 서판 가운데 하나는 점토에 쓴 영수증이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보리 2만 9,086자루. 37개월. 쿠심(Kushim)."
그 영수증에는 상품의 양, 상품이 전달되는 기간, 회계사의 서명이 담겨 있다. 무척 일상적인 내용이다. 그러나 이름에 주목하기 바란다. 쿠심은 바로 우리가 아는 역사상 최초의 이름이다. 쿠심은 왕이나 사제도, 전사나 시인도 아니었다. 신분이 그리 높지 않은 사람이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가장 오래된 이름의 소유자는 평생 우루크에서 셈을 하고 영수증을 쓴, 부지런한 경리사원이었다.
쿠심 같은 회계사들은 기존의 일 처리 방식을 급진적으로 공격하는 보병들이었다. 그 성장하는 도시의 건축가들, 야금업자들, 양조업자들, 직공들, 도공들과 흡사하게도 쿠심과 동료 회계사들은 그들의 직업적 관행을 세련되게 다듬고자 애썼다. 쿠심의 경우를 살펴보면 그는 초기 형태의 문어와 수학을 실험했다. 그는 소유권과 제품의 움직임을 상세히 열거하는, 꼼꼼한 기록을 남길 줄 알았을 것이다. 그는 법적 계약서를 작성하고 대금을 지불하고 수확량을 예측하고 이자를 계산하고 부채를 관리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쿠심은 본인의 가슴속 깊은 곳의 생각을 적지는 못했다. 쿠심의 단편적인 글이 《길가메시 서사시》의 정서적 깊이와 시적 창의성을 담을 수 있는 전문(全文)으로 진화하려면 회계사 같은 사람들이 여러 세대에 걸쳐 지식을 점점 더 쌓고 표기법을 조금씩 개선해야 했다.
그 요란스럽게 성장하는 도시에서, 쿠심 같은 사람들은 이른바 전문 행정가들과 관료들이라고 하는 인간사에 관여하는 전혀 새로운 존재들이었다. 그들은 계약을 체결하고 집행하고, 대금 지불과 공정성을 보장하면서 급증하는 교역을 관리했다. 오늘날 그들이 찍은 인장은 교역로를 따라 저 멀리 떨어진 여러 지역에서 발견된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이 속한 사회에 더 깊은 영향을 미쳤다. 문서 기록은 구술적 의사소통과 기억에 근거한 대면 사회에서 기록과 기록 보관에 입각한, 비교적 익명성이 짙은 사회로의 전환을 의미했다. (p.63-64)
알 마문이 말했듯이, 길거리 음식은 도시 사람들이 즐길 수 있는 최고의 음식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서기 2세기의 로마나 19세기의 뉴욕 같은 거대도시에서는 넓은 공간을 차지하는 화로가 딸린 가정용 주방을 갖추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길거리 음식이 필요해졌고, 맛있는 음식을 먹는 기쁨을 중시하는 모든 도시에서는 길거리 음식이 중요해졌다. 게다가 길거리 음식과 포장 판매 음식은 거대도시들의 경제에서, 특히 이주자들과 소외집단에 속한 사람들의 생명줄인 비공식 경제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음식 판매는 음식 말고는 팔 만한 것이 별로 없는 다수의 이민자들이 도시로 진입하는 수단이었다. 현재, 멕시코시티와 뭄바이에는 각각 약 25만 명의 노점상이 있고, 그들은 전체 노동인구 중에서 꽤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19세기 중반, 런던에는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음식을 파는 행상인들 10만 명이 있었고, 그중에 500여 명은 완두 수프와 장어 스튜만, 또 300여 명은 생선튀김만 전문적으로 팔았다. (p.215)
런던 시민들은 손수레를 끌거나 광주리를 든 채 거리를 가로지르는 길거리 음식 행상인들(대다수가 여성이었다)이 파는 음식을 사 먹었다. 뜨거운 파이, 견과, 딸기, 체리, 생선, 굴, 케이크, 우유 같은 갖가지 음식을 살 수 있었다. 길가에서 소시지를 튀기는 사람들과 사과를 굽는 사람들이 구두닦이, 칼 가는 사람, 옷 수선하는 사람, 대중가요를 만들어 파는 사람, 헌 옷 파는 사람과 같은 거리의 다른 상인들과 경쟁했다.
개혁자 겸 작가이자 풍자 잡지 〈펀치(Punch)〉의 공동창간자인 헨리 메이휴(Henry Mayhew)는 1850년대의 가장 인기 높은 길거리 음식과 음료를 다음과 같이 열거했다. 생선튀김, 장어 스튜, 절인 고둥, 양 족발, 햄 샌드위치, 완두콩 수프, 푸른 완두콩 수프, 1페니짜리 파이, 건포도가 든 푸딩, 고기 푸딩, 구운 감자, 스파이스 케이크, 머핀, 크럼핏, 첼시 번, 사탕과자, 브랜디 맛 캔디, 차, 커피, 생강 맥주, 레모네이드, 뜨거운 포도주, 초유, 당나귀의 젖과 응유와 유장, 청량음료. 가난한 노동자들은 거리의 노점이나 수레에서 파는 커피와 따뜻한 음식으로 아침 식사를, "여러 종류의" 조개 요리로 점심 식사를 해결했다. 저녁에는 장어 수프, 완두콩 수프, 구운 감자 케이크, 과일 파이, 빵과자, 견과, 오렌지 등을 먹었다. 늦은 밤에 극장에 가는 사람들과 그냥 놀러 나온 사람들, 파티를 즐기는 사람들은 커피, 샌드위치, 고기 푸딩, 돼지나 양의 족발 따위로 허기를 달랠 수 있었다.
음식 행상인들로 가득한 도시에서 그들 특유의 서정적인 외침과 노래는 사람들의 집단 기억 속에 자리 잡았다. 그들의 외침은 음식 냄새와 뒤섞여 거리에 퍼지는 왁자지껄한 시의 일부분이었다. "잘 익은 체리, 잘 익었어, 잘 익었어!", "뜨거운 푸딩파이 사세요!", "브랜디맛 캔디! 브랜디맛 캔디가 왔어요! 4개에 1페니! 불처럼 매콤하고 뜨거운 생강 빵!" 같은 단조로운 가락의 외침이 연거푸 들려왔다. (p.217-218)
1839년, 찰스 네이피어 장군은 다음과 같이 썼다. "맨체스터는 세계의 굴뚝이다. 부유한 악당과 가난한 불량배, 술에 취한 부랑자, 매춘부 들이 도덕을 만들고, 비에 젖어 반죽으로 변한 검댕이 지형을 이룬다. 유일한 경치는 높다란 굴뚝이다. 지옥의 문이 열렸다!"
1840년대의 맨체스터에는 500개가 넘는 굴뚝이 짙은 석탄 연기를 뿜어내며 새로운 대량생산 기술에 동력을 공급했다. 알렉시 드 토크빌은 맨체스터의 '거대한 공장'의 모습 그리고 '용광로와 증기에서 나는 소리'에 화들짝 놀랐다. 그런 도시는 역사상 전례가 없었다. 맨체스터 곳곳에서는 매일 수천 개의 역직기가 굉음을 내며 주변 건물을 뒤흔들었다. 스웨덴의 저술가 프레드리카 브레머는 그 프랑켄슈타인 같은 산업도시의 쉼 없는 힘과 감각적 충격을 이렇게 표현했다. "내가 볼 때 맨체스터는 엄청나게 큰 거미 같았다. 주변의 모든 공장과 도회지, 교외와 마을이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입을 옷을 만들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맨체스터, 그러니까 여왕 거미는 두꺼운 비구름 속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 거미집처럼 생긴 흉측한 주택과 공장의 덩어리에 에워싸여 있었다. 맨체스터는 어둡고 답답한 인상을 풍기는 곳이었다." (p.358-359)
맨체스터와 시카고 같은 도시들은 너무 빨리 성장했고, 또 이익에 너무 집착했다. 따라서 맨체스터와 시카고에는 6,000년 전에 메소포타미아에서 최초로 탄생한 이래 도시적 정체성을 이뤘던 공공 편의시설과 위생 설비, 공공 공간과 공동체 차원의 조직 같은 것들이 없었다. 에인절 메도 같은 빈민가에서는 배수로가 없거나 문밖으로 폐기물을 배출할 수단이 없는 거리에 여러 채의 오두막을 한데 다닥다닥 모아놓는 끔찍한 방식으로 주택을 지었다. 그런 곳들에서는 보통 한 집에 여러 명이 살았다(아일랜드계 빈민가의 경우 한 집에 평균적으로 8.7명이 살았다). 따라서 여러 명의 뜨내기 막일꾼들이 간이 숙박소의 축축한 지하실에서 지냈고, 한 침대에서 3명이 함께 자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에인절 메도의 경우 250명당 옥외 화장실이 2개밖에 없었다.
맨체스터의 저지대에 자리 잡은 빈민가 구역인 리틀아일랜드(에인절 메도는 리틀아일랜드 구역의 심장부였다)에는 습기가 많았고, 주변의 강에는 분뇨가 가득했으며, 오염된 강물의 색깔은 시커맸다. 한편, 시카고 길가의 도랑이 인간과 동물의 배설물로 막히는 바람에 '형언할 수 없는 액체가 고여 있는 웅덩이'가 되어버렸다. 도랑의 악취가 얼마나 심했던지 돼지조차 몹시 진저리치며 고개를 돌릴 정도였다. 옥외 변소 때문에 식수원인 우물이 오염되었다. 단단한 점토층 위 평지에 자리한 시카고는 오물더미에서 퍼져 나오는 '죽음의 안개'로 유명한, 습기가 많고 오염된 도시였다. 강에는 오수와 산업폐기물이 그득했다. 세계적인 정육업 중심지인 '돼지고기 도시'로 부상할 무렵, 시카고에서는 매년 도살된 가축 300만 마리의 내장과 피 때문에 위생 상태가 점점 나빠지고 오염이 심해졌다. (p.366-367)
도시는 물질적 혜택을 누릴 뿐 아니라 자극과 흥분을 느끼고 개인적 혁신의 기회를 잡을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맨체스터와 시카고의 많은 시민들은 자신이 살고 있는 도시가 일종의 자유를 의미한다고 여겼다. 그것은 도시를 비판했던 빅토리아 시대 사람들이 결코 포착하지 못한 점이었다. 그 당시 비평가들은 어둠과 지저분함에 매몰된 나머지 근대적 산업 대도시에서 공동체가 재구성되는 방식을 미처 알아보지 못했다.
도시 거주자들은 농촌 사람들에 비해 더 다양한 재화와 오락을 누릴 수 있었고, 생활 방식과 숭배의 대상을 둘러싼 선택의 폭도 더 넓었다. 특유의 혐오스러운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엥겔스는 도시의 빈민가가 '농촌의 행복한 무기력에서 해방된 공간'을 의미하며 정치적 각성에 필수적인 장소라고 생각했다. 이폴리트 텐은 프랑스 소작농과 맨체스터 빈민가 거주자의 운명을 비교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전자는 '가장 자연스럽고 자유로운 존재 형태'로 더 오래 살겠지만, 후자는 더 풍족한 보상을 받았다. "맨체스터의 노동자에게는 더 많은 온갖 관념과 개념이, 사회적·정치적·종교적 사안에 관한 더 많은 지성이 있다. 간단히 말해 그의 지평이 더 넓다." 텐은 맨체스터의 직공이 신문을 더 많이 읽고, 그곳의 세계주의적 분위기 덕택에 세상에 대한 이해의 폭이 더 넓다고 말했다. "큰 조직의 한 단위인 노동자는 본인이 타인들에게 얼마나 크게 의존하고 있는지를 느끼고, 그 결과 동료들과 함께하면서 고립의 삶에서 벗어난다." (p.377-378)
애덤스와 켈리를 비롯한 여러 여성들은 정확성과 통계적 엄밀성을 바탕으로 빈민가 생활과 노동의 엄혹함을 폭로했다. 애덤스는 다양성이 풍부한 도시에서 근본적 변화를 초래할 만큼 강력한 공동체 의식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것이 바로 계급과 출신 민족이 서로 다른 사람들의 상호작용과 공동의 노력이라고 믿었다. 그런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지름길은 어린이들의 정신을 함양하는 것이었다. 애덤스가 《아이들의 정신과 도시의 압박(The Spirit of Youth and the City Stress)》(1909년)에서 주장했듯이, 도시에 사는 아이들은 생기를 잃어갔다. 도시가 아이들을 올바르게 대우하기 위해서는 뛰어놀고 운동할 수 있는 적절한 장소를 아이들에게 제공할 수 있어야 했다. 애덤스가 보기에 불행히도 '사람들을 떼어놓는 장치들이 가득한 근대적 도시 공동체 속 모든 계급의 사람들을 (하나로) 묶는 공공 오락의 힘'은 뛰어놀고 스포츠를 즐기는 아이들에게서 찾을 수 있었다.
야외 공간을 확대하고 오락 프로그램을 활성화하려는 운동은 일반 대중, 그러니까 학교 체육, 스포츠, 야외 소풍 등을 삶의 중요한 요소로 여기는 2세대 도시 노동계급 민족 공동체들(독일인들의 투른페라인, 체코인들의 체조연맹, 폴란드인들의 공제조합, 게일인들의 체육클럽)을 통해 발전되었다. 1884년, 시카고 보건국 청사 맞은편의 투른페라인 회관에서 체육 시연회가 열렸고, 시연회 참가자 중 한 사람이 시카고 공립학교의 체육 교육 프로그램을 짜는 직책에 임명되었다. 투른페라인은 시카고의 여러 공원에 수영장, 체육관, 구기장, 운동장 같은 오락 시설을 마련하기 위한 운동을 펼쳤다. 투른페라인 관계자들이 보기에 공원은 그저 일요일에 조용하게 산책하는 곳이 아니라 스포츠를 즐길 수 있는 곳이어야 했다. (p.387-388)
폐에 문제가 있는 병약한 아이였던 오스만은 해로운 악취와 먼지에 노출된 채 미로처럼 뒤엉킨 좁은 거리와 골목을 거쳐 학교까지 걸어가야 했다. 그러므로 악몽 같았던 어린 시절을 기억하는 그가 위생적이고 합리적인 도시를 갈망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오스만은 파리라는 도시를 동맥과 정맥, 기관과 폐로 구성된 인체로 여겼다. 그가 볼 때 파리에는 장기도 있었다. 오스만의 진정한 역작은 거리 밑의 지하에, 즉 하수도 설비에 있었다. 악취를 풍기는 강과 20만 개의 오수 구덩이가 260여 만 명의 배설물로 가득 차 있었던 런던에서는 1858년부터 토목 기사 조셉 바잘제트가 차집관거, 양수장, 배수 설비 등을 완비한 총연장 132킬로미터 이상의 지하 하수도망과 총연장 1,600킬로미터 이상의 길거리 하수도망을 구축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바잘제트는 하수도를 무척 넓게 만들었기 때문에 오늘날까지 유용하게 쓰이고 있다. 한편 시카고에서는 하수도관을 지하에 묻을 수 없었기 때문에 도시 자체를 위로 들어 올려 하수도관을 깔아야 했다. 1858년부터 벽돌 건물 전체를 수압식 잭과 나사식 잭으로 1.8미터 정도 들어 올리기 시작했다. 1860년에 이르러, 600명의 노동자들이 6,000개의 잭을 쓰는 한 번의 작업을 통해 한 구획의 절반을 들어 올렸다. 그들이 상점과 사무실, 영업장과 호텔이 서 있는 총중량 약 3만 5,000톤, 총면적 약 4,000제곱미터의 상가 전체를 들어 올리는 동안에도 거리 생활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평소처럼 이루어졌다. 거리가 허공에 떠 있는 동안, 하수도관을 갖춘 새로운 토대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시카고와 런던은 1850년대와 1860년대에 '지하 근대화'라는 기적을 이룩했다. 오스만은 위생과 기술 체계의 승리도 뛰어넘었다. 그의 하수도망은 그가 구상한 직선형 시가도의 복제품이었고, 지상의 대로들만큼 합리적이고 웅장하고 환했다. 하수도관과 지하 갱도는 걸어다니거나 배를 띄울 수 있을 정도로 컸고, 지하 통로는 청결하게 관리되었다. 하수도에는 도시를 여러 세대에 걸친 다층적이고 인간적인 구조물이 아니라 기계로 바라보는 오스만의 시각이 배어 있었다. 달리 말해 그는 인체의 여러 부위를 서로 이어주는 결합조직보다는 동맥과 기관에 더 관심이 많았다.
도시의 폐는 소화기관만큼 중요했다. 오스만의 비망록에 의하면 나폴레옹 3세는 그에게 다음과 같이 지시했다. "런던에서 그렇게 했듯이, 모든 가정과 아이들, 부자와 빈자 들이 휴식과 오락을 즐길 수 있는 장소를 파리 사람들에게 제공할 수 있도록 파리의 모든 행정구에 최대한 광장을 많이 지을 기회를 놓치지 마시오." 오스만은 60만 그루의 나무를 심고 18제곱킬로미터 넓이의 공터를 마련해 4개의 크고 멋진 공원을 조성했고, 24개의 광장을 새로 만들기로 했다. 이제 파리 사람들은 집에서 5분만 걸어가도 공터와 마주치게 되었다. (p.410-411)
도시는 실재하는 물리적 존재일 뿐 아니라 우리 상상력과 경험의 산물이기도 하다. 버스나 기차, 지하철을 타고 가거나, 직접 자동차를 몰고 가거나 걸어가면서 우리는 도시에 대한 나름의 정신적 지도를 만든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사람의 머릿속에는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진 여러 장소를 포함하는 몇 개의 덩어리로 구성된 개인적 도시가 있을 것이다. 자동차를 몰고 이동하는 사람의 머릿속에는 도로 체계에 따른 선형의 도시가 펼쳐질 것이다. 걸어 다니는 사람은 도시를 더 친밀하게 받아들인다. 정해진 경로에서 벗어나 도시의 결합조직, 이질적인 여러 구역들을 이어주지만 대부분의 주민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부분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적응력이 뛰어난 인간의 마음은 거대하고 신비로운 건축환경을 통제하고 싶어 한다. 인간의 마음은 혼돈 상태에 질서를 부여하고, 판독되지 않는 것을 읽어내고 싶어 한다. 도시를 걸어 다니고 도시를 글로 표현하는 것은 그런 욕구를 충족시키는 방법이다. 도시의 주관적 지형을 구축하는 행위의 역사는 오래되었다. 16세기 이전에는 도시에 대한 예술적 표현이 틀에 박혀 있었고, 성경적 이미지를 근거로 삼는 경우가 흔했다. 그러나 16세기부터 도시에 대한 건물들과 사람들을 위에서 내려다보는 듯한 조감적 관점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조감적 관점은 지상에서는 연출할 수 없는 일관성을 느끼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소설은 모든 부분을 한눈에 담으려는 그 총괄적 야심을 물려받았지만, 시선을 바꾼다. 혼란스럽고 비밀스러운 정체성, 우연한 만남, 서로 밀접하게 연관된 삶, 임의적 마주침 따위를 소재로 삼는 그 새로운 문학 형식은 도시의 복잡성이 낳은 산물이다. 소설은 18세기에 출현했고, 도시의 헝클어진 지형은 소설 줄거리의 복잡한 경로에 반영되었다. (p.432-433)
마천루 도시의 웅장한 윤곽은 가슴 설레는 장면이다. 하지만 멋진 광경 때문에 도시는 외부인들이 다가가지 못하는 특권의 보루처럼 보일 수도 있다. 알프레드 카진은 1920년대에 브루클린 동쪽의 러시아계 유대인 거주 구역인 브라운스빌에서 가난에 시달리며 유년기를 보냈다. "우리는 도시에 속해 있었지만 웬일인지 몰라도 도시에 포함되지 않았다. 내가 좋아하는 산책로를 따라 걷다가 언덕 위에 올라가면 낡은 창고가 하나 있었고, 거기서 맨해튼의 마천루들을 구경할 수 있었다. 거기서 바라보는 건너편의 뉴욕은 외국 도시 같았다. 브라운스빌에서 우리 삶이 이어졌듯이, 휘황찬란하고 환상적인 그 도시에도 나름의 삶이 있었다." (p.463)
1945년 8월 6일 오전 8시 15분, 히로시마 상공에서 64킬로그램의 우라늄이 종말을 예고하는 듯한 섬광과 함께 폭발하면서 TNT 16킬로톤에 해당하는 에너지를 뿜어냈다. 폭발로 인한 4,000도의 열기 때문에 폭심지의 건물들은 자연스럽게 연소되었고, 수천 채의 건물이 불에 타버렸다.
초당 3.2킬로미터의 속도로 퍼져나간 충격파 때문에 주변 건물들이 모조리 무너졌다. 감마선과 '검은 비'가 방사능을 더 확산시켰다. 폭발과 충격파로 반경 2킬로미터 내의 모든 것이 사라졌고, 히로시마 인구 42만 중 8만 명이 죽었다. 그리고 1945년 말까지 부상과 방사능 중독으로 6만 명이 추가로 사망했고, 수많은 사람들이 육체적 고통과 심리적 충격에 시달리며 여생을 보내야 했다. 폭심지 주변 지역은 불에 탄 황무지, 즉 '원자 사막'으로 전락했다.
전체 건물의 70퍼센트가 파괴되었지만, 히로시마는 죽지 않았다. 끔찍한 공포가 엄습한 지 불과 몇 시간 만에 학교와 창고에 임시 병원이 설치되었고, 긴급 식량공급 체제가 구축되었다. 불길이 거세게 타오르는 와중에도 어느 여고생들은 건물을 부숴 방화선을 만드는 작업을 도왔다. 원자폭탄이 터진 날, 테츠로 무카이는 폭심지로부터 700미터 정도 떨어진 전력회사 본사에서 근무를 하고 있었다. 다행히 그는 살아남았고, 온종일 발전소에서 불과 사투를 벌였다. "지금(2005년) 돌이켜보면 모른 척하고 피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전기를 다시 공급해야 한다는 사명감 때문에 피하지 않았다." 이튿날, 히로시마의 일부 지역에 전기가 다시 들어왔다. 방사능에 피폭되었지만, 무카이는 전신주를 다시 세우는 작업도 도왔다. 1주일 반 만에 히로시마 전체 가구의 30퍼센트가 전기를 다시 쓸 수 있게 되었고, 석 달 뒤인 11월에는 히로시마 전체에 전기가 다시 공급되었다. 히로시마 시 상수도부 소속 기술자로 일했던 당시 나이 41세의 쿠로 호리노는 원자폭탄이 터진 당일 오후에 심각한 화상을 입은 상태에서도 상수도 펌프를 수리하는 데 성공했다.
히로시마 시민들의 엄청난 노력에 힘입어, 정상적인 수준에 버금가는 생활상이 기본적인 공공 서비스와 더불어 나타나기 시작했다. 라디오 방송국은 핵폭발이 일어난 다음 날에 방송을 재개했다. 이틀 뒤에는 일본 은행 히로시마 지점이 다시 문을 열었다. 히로시마 역의 남쪽 구역에 임시 시장이 열리기 시작했다. 창고나 거리에서 교사들은 방사능 피폭으로 머리카락이 빠진 아이들을 다시 가르치기 시작했다. 도시 밖의 친척들과 다시 연락이 닿도록 하는 일도 중요했다. 핵폭발이 일어난 지 5일 뒤, 임시 우체국이 설치되었다. 집배원들은 잔해를 헤치고 기억을 되짚으며 부서진 집의 위치를 찾아냈다. 사람들은 폭심지 주변에 서둘러 판잣집을 짓기 시작했다. 집배원들은 서신 왕래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주소가 없는 임시주택에도 편지를 전달하려고 애썼다. 우체통이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몇십 년 뒤, 어느 우체부는 "폐허 속에 서 있는 빨간 우체통은 평화로운 시절의 상징 같았다"라고 회고했다. (p.500-501)
원자폭탄이 할퀴고 간 히로시마의 토양은 향후 75년 동안 식물이 자랄 수 없을 것으로 예상되었다. 살아남은 녹나무와 꽃이 핀 협죽도는 끈질긴 생명력을 상징하는 본보기였다. 인간의 삶은 대참사의 와중에도 언제나 존재감을 드러냈다. 스탈린그라드에서는 독일군이 항복하자마자 주민들이 돌아와 돌 부스러기 밑의 지하실에서 살기 시작했다.
전쟁이 벌어지는 동안, 바르샤바 시민들은 주로 폭탄보다는 시민의식과 연대감을 뒤흔드는 공포 장치에 더 시달렸다. 나치는 바르샤바를 파괴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동부전선에 필요한 군수품과 물자를 생산하는 바르샤바 사람들에게서 마지막 땀 한 방울까지 뽑아낸 뒤에야 이룰 수 있는 목표였다.
그런 상황에서도 비밀스러운 바르샤바가 나치 치하의 바르샤바와 공존하고 있었다. 나치는 대학교 운영을 금지했지만, 서부대학교가 비밀리에 설립되어 250명의 교사들이 목숨을 걸고 학생들을 가르치며 2,000개의 학위를 수여했다. 교사들은 수천 명의 중·고등학교 학생들도 몰래 가르쳤고, 나치에 발각되어 체포된 어른들은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아이들은 독일의 공장으로 끌려갔다. 바르샤바에서는 신문도 몰래 발행되었다. 비밀 지하실에 마련된 라디오 방송국도 있었다. 비밀리에 운영되는 극장, 시 낭독회, 정치 토론회, 문학 모임 등에 힘입어 폴란드의 문화와 바르샤바의 영혼이 살아 숨쉴 수 있었다. 사람들은 노면 전차를 타고 돌아다니기를 좋아했다. 노면 전차는 승객들이 귓속말로 농담과 풍문을 주고받는 장소였기 때문이다. 나치 치하를 겪은 어느 바르샤바 사람은 이렇게 회고했다. "노면 전차는 우리의 마음에 공감했고, 우리와 함께 증오하고 경멸했다." 몇몇 용감한 사람들은 무력저항을 계획하며 위안을 얻기도 했다.
비참하고 지저분한 바르샤바 게토에서도 도시 생활은 나름의 악덕과 미덕을 통해 존재감을 드러냈다. 어쨌든 게토는 40만 명이 거주하는 하나의 도시였다. 거기 감금된 사람들은 추악함과 모욕감과 두려움 때문에 오히려 목적과 품격을 갖춘 삶을 더 지향하게 되었다. 그들은 평의회를 결성했고, 평의회는 폐기물 처리, 공공시설 관리, 우편 업무, 보건, 노동, 상거래, 치안, 과세 등의 분야를 체계화했다. 다수의 자선단체들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식량과 복지혜택을 제공했다. 2,000개에 달하는 공동주택 위원회와 주택 위원회는 보육을 체계화하고 위생을 감독했다. 불법 학교뿐 아니라 진료소, 고아원, 도서관, 급식소, 탁아소, 직업훈련계획, 체육관 따위도 있었다. 바르샤바 게토에는 한때 47종의 지하 신문이 발행된 적도 있었다. 정치 활동도 펼쳐졌다. 좌파 시온주의 성향의 청년 단체들과 노동조합들이 비밀리에 움직이고 있었고, 훗날 그 조직들은 무력저항 운동 세력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p.512-514)
바르샤바가 직면한 딜레마는, 크게 파괴되었거나 일부분만 파괴된 런던, 도쿄, 민스크, 함부르크, 키예프, 코번트리와 같은 다른 도시들이 맞이한 딜레마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바르샤바가 해방된 지 며칠 만에, 수도재건국이 설립되었다. 바르샤바가 현대전에서 전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심하게 파괴되었다고 본다면 바르샤바의 역사적 기념물들도 유례가 없을 만큼 빠른 규모와 속도로 재건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광범위한 지역이 파괴되었고, 전쟁으로 인구의 60퍼센트가 사망했고, 국가 재정이 쪼들렸지만, 바르샤바 사람들은 강인한 의지력을 발휘했다. 기금이 조성되었고, 폴란드 도처에서 기부금이 쏟아졌다. 노동자들은 자발적으로 노동력을 제공했다. 1925년까지 바르샤바의 구도심 대부분이 복원되었다.
세밀한 부분까지 원래대로 복원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했다. 전세계에 흩어져 있는 문서, 엽서, 사진, 도면, 18세기의 그림 같은 바르샤바의 흔적이 담긴 갖가지 자료들이 수집되었다. 깜짝 놀랄 만한 방식으로 바르샤바의 모습을 기억해둔 사람들이 있었다. 독일군에 점령되었을 때, 바르샤바가 파괴될 것으로 예측한 여러 건축가들은 몰래 문서를 대조하고 역사적 건물들을 도면으로 남겨뒀다. 그들은 목숨을 걸고 바르샤바에 대한 기억을 암호화했고, 그 도시에 관한 단편적 기록과 미래상을 몰래 외부로 반출하여 수도원과 포로수용소에 은닉했다.
바르샤바의 구도심은 우리가 건축환경에 대해 느끼는 경외감과 도시의 복원력을 기리는 세계 최고의 기념물 중 하나다. 밀반입한 도면 조각과 인간의 기억 속에 존재하는 한, 도시는 결코 파괴될 수 없는 법이다. 유럽 전역에서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재건된 여러 도시들의 중심가는 야만 행위와 대학살 이전의 시절을 기리는 기념물로 자리 잡았다. 오래된 것, 친숙하고 역사적인 것에 대한 사람들의 애착은 수많은 도시들에서 분명히 확인된다. 한자동맹 시절 뤼벡의 영광스러운 모습은 그 도시의 중심지에서 서서히, 그리고 공들여 복원되었다. 프랑크푸르트에서는 폭격으로 부서진 집을 헐어내고 심벽목구조 주택을 지었다. (p.526-527)
인공적인 환경에서 동물들은 새로운 문제해결법을 배워야 한다. 그러고 나면 도시의 사정에 밝아지게 된다. 1980년대의 어느 시점에, 일본의 도시 센다이의 한 까마귀는 천천히 지나가는 자동차의 바퀴가 호두를 깨트리기에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이후 센다이에 사는 수많은 까마귀들이 그 방법을 터득했다. 오스트리아의 빈에서는 어둠을 좋아하는 성향을 극복하고 형광판 조명이 환하게 비치는 교량의 여러 구조물에 집을 짓는 거미들이 다른 거미들에 비해 4배나 많은 먹이를 잡았다. 북아메리카의 도시 라쿤들은 농촌 지역의 라쿤들보다 더 빨리 문제를 해결한다(예를 들어 문이나 창문을 더 빨리 연다). 어느 실험에 따르면 도시에서 잡힌 되새류는 시골에 서식하는 되새류보다 더 능숙하게 뚜껑을 열거나 서랍을 잡아당겨 먹이를 구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도시에서 자란 동물들은 비교적 과감하고 호기심이 많다. 그중에서 어떤 동물들은 상대적으로 공격성이 낮다. 그것은 밀집도가 더 높은 환경에서 서식하는 데 따른 결과로 해석할 수 있다. 시끄럽고 역동적인 장소에서 서식하는 동물들, 이를테면 지하철 노선 근처의 쥐는 스스로 스트레스 반응을 누그러트린다. 연구에 의하면 뒤쥐, 들쥐, 박쥐, 다람쥐 같은 도시의 소형 포유류들은 런던의 미로 같은 거리를 여러 해 동안 돌아다닌 데 따른 결과로 일반인에 비해 후부 해마의 회백질이 더 큰 택시 운전사들처럼 상대적으로 뇌가 크다. (p.596-597)
지구의 육지에서 도시가 차지하는 면적의 비중은 앞으로도 낮은 수준인 약 3퍼센트를 유지하겠지만, 문제는 오늘날 도시화가 진행되고 있는 현장이다. 우리는 동물과 식물이 선호하는 장소인 해안이나 삼각주, 강이나 초지나 삼림 근처에 있는 초목이 무성하고 물을 쉽게 이용할 수 있는 곳에 도시를 건설하는 경향이 있다. 현재 일어나고 있거나 앞으로 일어날 도시 성장 과정의 주요 무대는 36개의 생물다양성 고밀도지역들, 즉 서아프리카 기니의 삼림지대, 아프리카 동부 산악지역, 인도의 서고츠 산맥, 중국의 해안 지역, 수마트라 섬, 남아메리카의 대서양 삼림지대 등과 같이 풍부한 생태계를 갖춘 지역들이다. 급성장하고 있는 약 423개의 도시들이 이 생물다양성 고밀도지역들에 마수를 뻗치고 있고, 그 결과 3,000종 넘는 멸종위기 동식물들의 서식지가 심각한 위기에 놓여 있다.
거대도시와 거대도시권역은 세계에서 가장 비옥한 경작지들을 대규모로 잠식하고 있기도 하다. 도시화가 진행되면 삼림 벌채와 생물 자원 손실을 통해 방대한 양의 탄소가 배출되기 마련이다. 특히 생물다양성 고밀도지역과 비옥한 농경지대에서 도시화가 이루어지면 어마어마한 양의 탄소가 배출될 수밖에 없다. 도시는 주변 지역의 기상 패턴과 기후를 바꿔버린다. 사방으로 뻗은 도로망은 토착 생물종과 지형에 막대한 피해를 입힌다. 게다가 도시의 생태학적 범위는 전기와 식량, 물과 연료가 절실한 도시 자체의 면적보다 훨씬 넓다. 런던이라는 대도시를 지탱하는 데 필요한 토지의 양, 즉 런던의 생태학적 범위는 런던 면적의 125배나 된다. (p.599-600)
후이 곤살루 지 카르발류 거리의 풍경은 대도시의 미래상이 될 만한 자격이 있다. 모쪼록 그렇게 되었으면 한다. 지금 세계 각국의 도시들에서 수백만 그루의 나무들을 심고 있는 이유는, 단지 사람들의 눈을 즐겁게 하기 위해서나 벌들과 나비들에게 혜택을 주기 위해서가 아니다. 우리 인간은 가격표가 붙은 대상을 소중히 여기는 경향이 있다. 여기서 가격표는 이른바 '수목경제학'이다. 나무가 있는 부동산은 그렇지 않은 부동산에 비해 가격이 20퍼센트 높아질 수 있다. 케이프타운의 생태 환경은 51억 3,000만 달러 내지 97억 8,000만 달러의 가치가 있는 것으로 추산되었다. 중국 란저우에 조성된 27.89제곱킬로미터 넓이의 도시 숲이 해마다 제공하는 경제적 가치는 1,400만 달러로 추산된다. 뉴욕의 나무들은 매년 1억 2,000만 달러의 경제적 이익을 제공한다. 한때 장식물로 치부되었던 도시의 나무들이 이제 필수적인 존재로 인식되고 있다. 큰 나무 한 그루는 150킬로그램의 탄소를 흡수할 수 있다. 또한 대기오염원을 걸러내고(미세먼지 농도를 20퍼센트에서 50퍼센트까지 줄인다), 과열된 도시의 기온을 2도에서 8도까지 낮추기도 한다(냉방장치 사용률을 30퍼센트 줄이는 효과를 낸다). 나무는 기후변화를 멈추지는 못하지만, 인간이 기후변화의 영향을 극복하도록 돕는 역할은 맡을 수 있을 것이다. 2000년부터 지금까지 도시의 기온이 급상승함에 따라 냉방장치 사용률이 2배 증가했고, 지금부터 2050년까지 또 3배 증가할 것으로 전망된다. 전 세계적으로 냉방에 필요한 전력량은, 미국의 전력 수요량과 독일의 전력 수요량을 합친 것이자 전 세계 전력 소비량의 10퍼센트와 동일할 것이다. 실제로 건물 안의 기온을 낮출 수 있다면, 멕시코시티의 옥상 정원과 카이로의 녹화 벽면은 냉방에 의존하는 이 자멸적 현실을 타개하는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자연을 돈으로 환산해야 그 가치를 깨닫기 시작한다. 그런 과정을 겪지 않으면 도시가 도시의 생태 환경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없다. 뉴올리언스는 비극적인 홍수에 휩쓸린 2005년에 습지대가 사라진 대가를 톡톡히 치렀다. 같은 해에 홍수를 겪은 뭄바이는 홍수가 닥치기 전에 육지와 바다 사이의 장벽 역할을 맡았던 40제곱킬로미터의 맹그로브 숲이 사라진 점을 아쉬워했다. 급격한 도시화를 겪는 동안 방갈로르의 기온은 2.5도 상승했다. 현재 방갈로르는 잦은 홍수에 시달린다. 이는 식생의 88퍼센트와 습지대의 79퍼센트가 파괴된 데 따른 결과다. 켄터키 주의 루이빌은 미국에서 열기에 의한 압박이 가장 심한 도시 중 하나다. 루이빌 도심의 기온은 교외보다 10도나 높을 때도 있다. 여기에는 루이빌 도심의 식생피복률이 약 8퍼센트에 불과하기 때문인 점이 일부분 작용한다. 치솟는 기온을 제어하기 위해서는 루이빌에 매년 수십만 그루의 나무를 심을 필요가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루이빌의 민간 부문은 이에 대해 미온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
앞으로 초강력 폭풍에 시달릴지 모르는 현대 도시들과 교외들은 방대한 불침투성 콘크리트 층 탓에 물을 제대로 흡수할 수 없게 되었다. 시카고와 베를린과 상하이는 긴급 홍수예방 대책으로서의 자연적 수문학을 흉내내는 요령을 배우거나 다시 배우고 있다. 나무는 다량의 물을 흡수할 수 있기 때문에 꼭 필요하다. 상하이의 링강 지구처럼 여러 도시들은 옥상 정원, 도시 습지, 빗물 정원, 투수성 포장도로, 생태 수로 같은 시설들을 빗물을 빨아들여 서서히 내보내는 거대한 스펀지로 활용하고 있다. 그런 시설들에 흡수된 물은 여과되어 대수층과 하천으로 흘러가거나 결국 대기 중으로 증발되고, 그 과정에서 도시의 기온을 낮춘다. (p.605-607)
20세기의 막바지에는 기존의 도시 형태가 소멸하거나 쇠퇴할 것으로 전망되었다. 사실, 교외화로 인해 도시의 모습이 완전히 뒤바뀌었다. 앞으로 인터넷에 의해 그 과정이 완료될 것이고, 물리적 근접성의 필요성이 약화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그러나 결과는 정반대였다. 세계적 차원의 금융과 지식경제 분야에서 일어난 병렬 혁명의 여파로 돈과 자산, 발상, 재능, 권력이 분산되기는커녕 오히려 몇몇 세계적 대도시들에 집중되었다.
물론 그 모든 과정은 지금까지 도시들이 늘 겪은 현상의 강도를 높이게 되었다. 우루크는 순식간에 인류 최초의 도시로 발전했다. 그 비결은 바로 각자의 집에서 일하는 장인들이 한 동네에 모여 있으면서 지식과 전문 기술과 수단을 공유했기 때문이다. 집단을 이룬 장인들은 규모의 경제를 달성하고 전례 없는 정보망을 구축할 수 있었다. 도시 생활의 극심한 복잡성으로 인해 지식은 문자로 암호화되었다. 18세기의 런던에서는 훗날 유연한 교제를 통해 최초의 자본주의 경제를 형성하는 데 기여할 상인, 장인, 과학자, 탐험가, 은행업자, 투자자, 저술가 등이 만나는 비공식적인 회합 장소와 지식 거래소가 커피점 문화에 힘입어 마련되었다. 20세기의 뉴욕에서는 대형 은행, 소규모 투자회사 그리고 법률가, 보험업자, 광고업자 등이 가까운 거리 안에 모여 있었기 때문에 시장 내부의 경쟁이 치열했고, 신속한 혁신이 이뤄졌다. 앞서 언급한 우루크와 런던과 뉴욕을 비롯한 동서고금의 여러 도시들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역동성과 복잡하고 촘촘한 관계망을 갖춘 도시는 마치 대기업이나 대학교의 조직 기능 같은 역할을 수행하면서 노동, 지식 공유, 관계망 형성, 규모의 경제 같은 비공식 분과와 하위 분과의 틀을 마련했다.
21세기 지식경제도 도시적 성격을 띤다. 현대 세계를 움직이는 동력인 회사들과 산업들 이를테면 신생 기업, 기술 기업, 연구개발, 대중매체, 패션, 핀테크, 광고 등은 훨씬 더 강력한 집중화와 집단화를 추구하고, 이 초고속 디지털 연결성의 시대에도 물리적 근접성을 도시에서만 누릴 수 있는 장점으로 마음껏 즐긴다. 창의성은 대체로 자발성과 우연한 만남을 통해 생긴다. 창의성은 일과 사교 간의 상호작용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p.620-622)
과거에 리스본, 뤼벡, 바그다드, 암스테르담 같은 도시들은 교역로를 장악한 데 힘입어 번영을 구가했다. 오늘날, 도시들은 무형 자산인 인재, 기술 창업, 금융 서비스, 데이터 흐름, 부동산 투자자를 지속적으로 끌어들일 수 있을 때 눈부신 성공을 맛볼 것이다. 21세기 경제를 추동하는 에너지는 접속성(신속한 인터넷 내려받기 속도와 공항 수용량)에서 비롯된다. 내려받기 속도와 공항 수용량은 지식과 사람, 자본, 데이터의 수익성 높고 변덕스러운 세계적 흐름에 대한 특정 도시의 접근성을 좌우하는 요인이다. 지금 세계에서 가장 막강한 힘을 가진 곳 중 하나는 실리콘 밸리다. 실리콘 밸리는 사물이 아니라 인간의 생각 덕분에 번영하는 곳이다. 그리고 실리콘 밸리의 성공 비결 중 하나는 대면접촉과 인맥을 통해 생기는 기업가 정신이다. 현재 실리콘 밸리는 원거리 가상 소통 기술을 상품화하는 데 주력하고 있지만, 아직 가상공간은 도시공간을 대체하지 못했다.
치열한 인재 쟁탈전 때문에 도시들은 지식경제에 특별히 적응한 도시 생태계를 만들어내야 했다. 도시들은 초고속 광섬유와 효율적인 공항뿐 아니라 커피점과 세계 수준의 식당도 갖출 수 있어야 한다. 도시들에는 명품점, 길거리 음식, 문화적 역동성, 농산물 직판장, 인기 스포츠 행사, 오락, 밤 문화 따위가 필요하다. 최신 유행에 맞는 동네와 아름다운 도시 경관, 좋은 학교와 효율적인 교통, 깨끗한 공기와 활기 넘치는 대학교도 있어야 한다. 도시들은 번쩍거리는 사진과 영상 및 영화에 고유의 자산을 담아 살기 좋고 일하기에 알맞은 곳으로 적극 홍보함으로써 가장 중요한 상품인 인적 자본을 유치해야 한다. (p.623-624)
은유는 우리가 도시를 바라보는 방식뿐 아니라 우리가 도시를 계획하고 관리하고, 도시에서 생활하는 방식의 측면에서도 중요하다. 도시를 끊임없이 변하는 상태에 놓여있는 것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중요하다. 역사상 가장 역동적인 도시들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수십년간 쉼 없는 변화의 상태에 놓여 있었던 도쿄와 같았다. 그 같은 선천적 유연성과 적응성에 힘입어 도시들은 시시각각 바뀌는 경제적 조건과 외부 충격에 대응할 수 있다. 폭발적인 성장세를 구가하던 시절의 우루크에서는 오래된 건축물의 잔해 위에 더 크고 좋은 건축물이 들어서는 파괴와 재건의 과정이 되풀이되었다. 로마와 런던 같은 도시들도 생동감과 흥미진진함을 풍기는 역사적 기억을 켜켜이 쌓아가며 끊임없이 성장해왔다. 아시아의 다른 도시들처럼 도쿄도 급속도로 전개된 역사적 과정을 겪었다는 점에서 무척 중요하다. 1945년, 인구가 349만 명이었던 도쿄는 전쟁의 상흔과 지독한 가난을 이겨내고 오늘날 미래 지향적인 거대도시권역이자 경제적 중심지로 성장했다. 도쿄는 빠른 신진대사 속도 덕분에 근본적인 요소들을 간직하는 동시에 모든 변화를 흡수할 수 있었다. (p.642)
글자를 옮기는 사람 / 다와다 요코 / workroom(워크룸프레스)
벌린 입속, 목에, 찔려, 혀 밑에는, 못이 박혀….
내일 아침 게오르크가 날 찾아 섬에 올지도 몰랐다. 내일은 공항과 항구 모두 아침이 국제선으로 붐비는 수요일. 만약 게오르크가 온다면 내일 말고는 없었다. 그 탓에 나는 안정이 되지 않았다. 오늘 중으로 일을 끝내지 않으면 마감에 맞추지 못하게 되고 그러면 더 이상 일이 문제가 아니게 된다. 나는 섬에 올 때부터 '소설' 번역을 빨리 끝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는데 정작 실제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었다. 이제 하루밖에 안 남았는데 뭘 어떻게 옮겨야 되는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두 페이지밖에 되지 않는 이 글자들의 무리를 정말로 '소설'이라 불러도 좋은지도 나는 감이 안 잡혔다. '소설' 하면 다른 사람한테서 받은, 오래 입어서 천이 부드러워진 겉옷 같은 느낌이 있는데 그와 다르게 이 글자들의 무리는 햇볕이 달군 모래알처럼 살에 껄끄럽고, 팔을 스르륵 넣어 겉옷을 입듯이 읽기를 시작할 수가 없다. 나는 겉옷이 아니라 달군 모래알을 입고 걷고 있다.
'희생자[Opfer]'란 단어는 O로 시작했다. 그 O가 첫 페이지 가득 여기저기 흩어져 있어서 눈이 갔다. 흩어져 있다기보다는 O가 종이를 좀먹어 종이가 O로 가득 뚫려있었다. 더구나 그 뚫린 곳들은 들여다볼 수 없도록 벽으로 막혀 있었는데 그 벽을 만든 흰 종이는 점점 뚫기 힘들게 느껴졌다. 나는 만년필로 O 안을 새까맣게 칠해 봤다. 그랬더니 마음이 조금 편안해졌다. (p.14-15)
그들은, 기다리고 있다, 똑같은, 운명을, 그들은, 성장한다, 그 속으로, 제물이 되려고, 한 번도, 그러긴커녕, 그려져 있었다, 병아리가, 같이, 죽은 곳, 한 번에 쳐서, 두 마리를 한 번에….
단어들이 이어지지 않은 채 원고지에 흩어졌다. 모두 이어서 문장이 되도록 해야 하는데 생각만 들고 거기에 필요한 체력은 최소한도 없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체력보단 폐활량이 모자랐다. 하나의 문장을 천천히 숨을 쉬며 읽고 거기서 꾹 하고 한 번 숨을 멈춘 다음 머릿속에서 뜻을 풀이하고 어순을 정리할 것, 그리고 조심스럽게 숨을 내쉬면서 풀이한 문장을 쓰는 것이 요령이라고 번역가 에이 씨는 말했다. 하지만 나는 단어 하나를 읽는 데도 숨이 차서, 힘들어하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 다음 단어에는 거의 도달하지도 못한다. 그래도 적어도 나는 단어 하나하나의 낯선 감촉에 충실한 편이고 지금은 그것이 더 중요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단어 하나하나를 조심스럽게 건너편 강변에 던지는 느낌이 있었다. 그래서인지 전체가 이리저리 흩어지는 것 같기도 하지만 전체를 다 생각할 여유는 없다. 전체는 아무렴 어떠냐는 생각까지 들었다. 번역이란 것이 '건너편 강변에 건네는 것'이라면 '전체'쯤은 잊어버리고 이렇게 작업을 시작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하지만 어쩌면 번역은 전혀 다른 것일지도 몰랐다. 이를테면 변신 같은. 단어가 변신하고 이야기가 변신해서 새로운 모습으로 바뀐다. 그리고 마치 처음부터 그런 모습인 양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하고 늘어선다. 이렇게 하지 못하는 나는 분명히 서투른 번역가다. 나는 말보다 내가 먼저 변신할까 봐 몹시 무서울 때가 있다. (p.22-23)
위험한 요리사 메리 / 수전 캠벨 바톨레티 / 돌베개
부엌의 지배자라는 요리사로서, 메리는 식자재를 주문했다. 낭비하는 일이 없도록 꼼꼼히 확인했고, 가장 신선한 재료들로 선택했다. 고기는 인근 정육점에서, 빵은 가까운 제과점에서 구입했다. 과일은 인근 과수원에서, 채소는 마을 채마밭에, 우유와 달걀과 버터는 인근 낙농장에 주문했다. 그렇게 구입한 재료들로 맛깔스러운 로스트, 촉촉한 케이크, 부드러운 푸딩을 만들었다. 메리가 특별히 잘하는 수제 아이스크림도 만들었다.
절약도 기술이었다. 워런 씨는 맨해튼에 있는 링컨 내셔널 은행의 부행장이었다. 게다가 미국에서 부자로 손꼽히는 밴더빌트 가의 자산을 관리해 주는 금융인이었다. 이를테면 재료비는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집이었다. 그런데도 좋은 요리사라면 자투리 재료나 부스러기까지 활용할 방법을 찾게 마련이었다.
자투리 빵은 바싹 말린 뒤 강판으로 가루를 내서, 푸딩 소나 걸쭉한 그레이비소스를 만드는 데 썼다. 먹고 남은 토스트는 핫케이크나 브레드푸딩으로 바꾸었다. 고기 뼈다귀는 푹 고아서 콩수프의 풍미를 더했다. 자투리 채소는 수프를 만들 때 넣었다. 생선과 감자 쪼가리는 스테이크를 구울 때 나오는 기름에 튀겼다. 시큼해진 우유는 몽글몽글하게 굳혀 코티지치즈로 만들었다. 자투리 감자는 갖가지 빵으로 만들어 냈다. 달걀 껍데기조차 그냥 버리지 않았다. 표백용으로 활용했고, 냄비에 눌어붙은 육수, 젤리, 커피 찌꺼기를 제거하는 데도 썼다. (p.22)
대다수 전염성 질병이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시절에는 격리되거나 격리 병원에 수용된 사람이 많았다. 항생물질과 예방접종이 발견되면서부터는 대체로 과거의 관례가 되었다. 그렇지만 특정 상황에서는, 특별 관리를 넘어 격리를 의무화할 수 있는 질병들이 있다. 미국 질병 통제 예방 센터에 따르면, 콜레라, 디프테리아, 감염성 결핵, 페스트, 천연두, 중증 급성 호흡기 증후군(사스), 황열병 및 에볼라 등의 바이러스성 출혈열이 여기에 속한다.
오늘날에도 대다수 미국인은 감염성 질병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할 책임이 정부에 있다고 믿는다. 공중 보건법들은 전파성이 있는 특정 감염병의 신고, 감염자의 치료, 필요한 경우 감염자의 격리 치료를 의무화하고 있다. 보건 담당관들은 환자의 자율성, 자유, 사생활을 존중하도록 힘써야 한다. 그러나 그와 같은 환자의 권리가 사회 전체의 보건과 안전이 위협받는 상황에서까지 보장받을 만큼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p.111-112)
오닐 변호사는 메리 맬런에게 재판을 받을 기회를 마련해 줄 작정이었다. 그것은 수정헌법 제6조가 보장하는 권리였다. 메리는 변호사에게 도움받을 권리가 있었다. 신속한 재판과 공정한 배심 재판을 받을 권리, 불리한 증언을 하는 사람들과 대질 신문을 받을 권리, 유리한 증인을 확보하기 위한 강제 절차를 밟을 권리도 있었다. 이 모두가 수정헌법 제5조에서 보장하고 있는 적법 절차에 따라 재판받을 권리에 속한다.
그러려면 먼저 보건 당국자를 법정에 세워 메리를 구금한 이유를 밝히게 해야 했다. 오닐 변호사는 뉴욕주 대법원에 가서 인신 보호 영장 청구서를 제출했다. 그 영장이 발부되면 수감 기관 관계자는 반드시 법정에 출두하여 수감 사유를 밝혀야 하기 때문이다.
오래 걸렸지만 마침내, 메리 맬런은 법정에서 재판을 받을 기회를 얻게 되었다. (p.137-138)
나는 풀밭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메리 맬런을 떠올리며 생각에 잠겼다. 메리 맬런은 복잡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사람이었다. 보건국과 신문들이 설명하고 보도했던 것과 달리, 메리는 생각도 감정도 없는 존재가 아니었다. 기계도 인간도 아닌 존재 또한 아니었다. 마녀는 더더구나 아니었다. 열심히 일했고 실력을 인정받은 요리사였다가 하루아침에 운명이 뒤바뀐 여성이었다. 메리 맬런은 자신이 납치당하고, 모욕당하고, 자유와 평판과 생업과 정체성을 빼앗겼다고 믿었다. 메리의 유언 속에 '이승의 불확실성을 고려할 때'라는 글귀가 들어 있다는 게 조금도 놀랍지 않다.
지금껏 내가 배운 것들에 관해서도 곰곰 생각해 보았다. 내가 확실히 아는 건, 메리의 말마따나, 인생은 불확실하다는 것이다. 한 사회로서나 한 개인으로서나, 우리는 질병으로부터 건강한 사람들을 보호해 주어야 한다. 아울러 질병에 걸린 사람들을 현명하고, 인간적이고, 동정적인 태도로 치료해 주어야 한다. 우리는 이성을 잃지 말고 두려움을 잘 다스릴 줄 알아야 한다. (p.1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