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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 역사의 목격자들 / 지오바나 델오토 / 크레센도

 

 그들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와 함께 새끼양 갈비살 요리를 먹었고, 오사마 빈 라덴의 보디가드와 차를 마셨다. 피델 카스트로와 피자를,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 전사들과 함께 참치 통조림을 먹었다. 세계에서 가장 강력하고 은밀한 권력자들은 그들을 회유하고 싶어 했고, 회피하고 싶어 했다.
 그들은 레바논 베이루트, 아프가니스탄 코스트, 멕시코 타마울리파스 등 세계 곳곳에서 폭격 세례를 받고, 납치당하고, 총구 앞에 서야 했으며, 동시에 온갖 비난에 시달렸다. 폭격이 쏟아지는 미군 군함 위에서, 강렬한 지진 속에서 휘청거리는 자판을 두드려 기사를 작성했으며, 그렇게 작성한 기사가 적힌 종이와 필름을 국제공항 탑승 대기실에서 누군지도 모르는 승객의 주머니에 찔러 넣어주고는 본사에 무사히 전달되기만을 빌었다. 그렇게 역사적인 사건들의 생생한 소식이 전 세계에 퍼져 나갔다.
 미국의 미디어가 전하는 해외 뉴스를 본 사람이라면 누구든, 그들이 작성한 기사를 보았을 것이다. 그들은 과연 누구일까? 바로 AP 특파원들이다. 그들은 지난 80여 년간 미국인들은 물론 전 세계인들의 세계관을 형성하는 데 가장 큰 영향을 미쳤을 뿐만 아니라, 국제적인 의제를 설정한 장본인들이다. (p.20-21)

 

 결국 특파원 또는 특파원 역할을 하는 전문기자가 필요한 이유는, 그들이 자국 내 매체, 이해관계자, 정책입안자들에게 새로운 관점을 제공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1848년부터 2008년까지 AP를 비롯하여 미국의 주요 신문사들이 작성한 해외 뉴스를 분석하면서 나는, 일본에서 이스라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지역을 미국의 관점에서 지나치게 단순화하고 축소하는 보도와 이들 국가들에 대해 미국 정부가 막다른 궁지에 몰려 겨우 내놓는 정책들 사이에 일정한 관계가 있다는 것을 밝혀냈다. 거꾸로, 현지 상황에 기반하여 상세하게 작성된 뉴스와 국제적인 리더십을 가능케하는 현실적인 정책 결정 사이에 일정한 연관성이 있다는 것도 드러났다. 다시 말해, 양질의 뉴스가 좋은 대외정책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연관성을 사실로 받아들인다면, 해외 특파원들의 제도적, 직업적, 윤리적, 기술적 발전 과정을 이해하는 일, 다시 말해 해외 통신이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 만들어지고 있는 이유를 이해하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더욱이 해외 통신은 오늘날 갈수록 존립 위기에 처하고 있다. 미국을 비롯한 서방국가의 신문과 방송에서 해외 뉴스는 일제히 축소되고 있다. 따라서 이 책의 주제인 해외 통신의 발전 과정을 밝혀내고 정리하는 작업은 지금 이 시점에 매우 시급하고 중요한 과제다. (p.28-29)

 

 아프가니스탄 특파원 캐시 개넌은 기자라는 직업을 사랑하는 이유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정말 피곤해요. 3년 넘게 제대로 잠을 잔 적이 없거든요. 사건은 끊이지 않고 일어나고… 그래도 난, 내가 엄청나게 운이 좋다고 생각해요… 저 대단한 이야기들을 내 손으로 직접 취재하고 있잖아요. 이야기 하나를 만들어내기 위해 몇 날 며칠을 돌아다니며 파고들고… 사무실로 돌아와 아냐가 찍은 끝내주는 사진들을 내가 쓴 기사 속에 넣으면서… 내가 누군가의 삶에 대해 이처럼 많은 것을 볼 수 있고 취재할 수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꿈같은 일인가… 솔직한 마음이에요.

 개넌은 기자라는 직업이 사람들과 맺는 깊은 관계를 탐구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고 말한다. 그녀는 나와 인터뷰를 하고서 몇 달 뒤 아프가니스탄 대통령 선거를 취재하다가 테러 공격을 받아 중상을 입었다. 그녀와 함께 동행했던 사진기자 아냐 니드링하우스는 현장에서 즉사했다. (p.53)

 

 중앙아메리카에서 게릴라 전투를 취재한 베테랑 특파원 프레이져는 아이티 공화국에 처음 도착했을 때 받은 충격을 떠올렸다. 하지만 그러한 충격보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런 상황에 익숙해지는 자신의 모습이 더 혼란스럽게 느껴졌다고 말한다.

 [포르토프랭스 공항에] 내렸을 때 나도 모르게 입에서 이런 말이 나왔지. "하나님 맙소사, 이런 곳에서 사람이 살 수 있나?" 지금 이 시대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가난한 삶이 펼쳐져 있었어. 정말 열악한 환경… 너무나 불쾌하고 끔찍하고, 또 끔찍한 곳이었어. 아니, 거기서 사람이 산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으니까.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곧바로 떠나고 싶은 마음뿐이었지… 하지만 어디든 익숙해지기 마련이잖아. 하루하루 지나면서 처음 받았던 인상은 서서히 흩어졌고… 하지만 그곳 삶을 체험하는 사람도 필요하지만 낯선 시선으로 관찰하는 사람도 필요한 법이야. 이 세상에 존재해서는 안 되는 것에 익숙해지면 안 돼. 그런 것들을 일상이라고 받아들여서도 안 되고… 맞아. 매일 길거리에서 사람들이 총에 맞는데… 한 명? 어, 또 한 명? 그렇구나, 그래, 그렇지 뭐. 이런 식으로 비인간화되는 거야. 인간성이 점차 사라지는 거지. 나도 물론 예외가 아니었지만, 그런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매번 강렬한 충격을 느껴야 하는데, 어떤 시점이 지나면서 더 이상 그렇게 되지 않더군. 나는 늘 혼자서 중얼거렸지. "이건 옳지 않아. 일어나면 안 되는 일이야." 하지만 뉴스라는 게 원래 일상에서 벗어난 문제를 다루는 거잖아. 그런데 그런 일이 그곳에서는 일상에서 벗어난 일이 아니라, 그냥 일상에 불과했다고.

(p.72-73)

 

 취재원과 좋은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다소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는 두 가지 태도를 일관되게 견지해야 한다. 첫째, 취재원을 기본적으로 존중해야 하고, 둘째, 그의 말을 끝없이 검증해야 한다. 언론인들끼리 하는 우스갯소리처럼 '엄마가 날 사랑한다고 하는 말도 검증해야 한다.'
 또한 기자는 취재원의 생각이나 관점이 아무리 자신과 다르다고 해도 '그럴 수 있다'고 인정할 줄 알아야 한다. 개넌은 '테러와의 전쟁' 동안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을 취재한 경험을 회고한다. 그녀는 테러리스트들을 '미치광이 악마'로 몰아가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이야기한다.

 자신의 나라를 취재한다면 어떻게 하겠어요? 어떤 정보가 필요할까요? 무엇을 알아내고 싶을까요? 다른 나라를 취재하는 것도 똑같아요. 누굴 만나든, 어디를 가든, 존중해야 하죠… 물론 존중하기 어려운 사람도 있겠지만, 그래도 무조건 존중해야 해요… 그리고 기자는 더 의문을 품고 관심을 가져야 해요. 물론 기사에 영향을 미칠 정도로 호기심이 너무 지나쳐도 안 되겠죠… 테러리즘이든 뭐든 다 똑같아요. 현장에 있는 사람만이 이야기할 수 있는 게 있는 법이에요. 그래서 우리가 머나먼 이국땅까지 가서 취재하는 거잖아요.

(p.74-75)

 

 로젠블럼은 이렇게 말한다.

 공공연한 비밀이지만, 특파원의 피가 흐르는 사람이라면 돈을 주지 않아도 이 일을 계속할 걸.

 프라이스는 이렇게 말한다.

 특파원의 임무는… 멋지고, 고귀하고, 충만해요… 그건 선물과도 같죠. 그것만으로도 대가는 충분해요.

 베를린장벽이 붕괴하는 현장을 취재한 존슨은 이렇게 말한다.

 이 일을 계속하게 해달라고, 오히려 돈을 내고 일해야 하는 것 아닌가 생각이 들 때도 있지.

(p.85)

 

 갈등 사태가 진정되고 나면 언론의 조명도 사그라든다. 하지만 전쟁이 민간인에게 미친 영향은 그제서야 드러나기 시작하고 정상적인 삶으로 되돌아가는 험난한 과정도 이제 시작된다. 시체 수만 세는 것이 아니라, 좀 더 깊이 있는 이야기를 쓰고 싶어 하는 특파원도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 1940년대 말 독일에서 특파원 생활을 한 조지 브리아는 광산 국영화를 둘러싸고 영국과 미국의 군사정부가 갈등하는 상황을 취재하면서 루르의 30살 광부에게 초점을 맞춘 기사를 썼다. 나치의 군사재판을 취재하기 위해 뉘른베르크에 갔을 때도 재판 이야기만 기사로 쓴 것이 아니라 그 도시의 유명한 장난감 공장에 대한 기사도 썼다.

 장난감 공장 관리자가 나한테 보라고 하면서 조그만 장난감 자동차를 탁자 위에 올려놨는데, 탁자 끝에 닿으면 거기서 방향을 바꾸는 거야. 그렇게 방향을 꺾어가면서 탁자에서 떨어지지 않고 달리더군. 뉘른베르크의 장난감 산업이 부활하고 있다는 기사를 쓰면서 이 이야기를 넣었는데, 이 기사는 굉장히 주목받고, 좋은 평가를 받았지. 편집장은… '그래! 이런 게 바로 우리가 원하는 기사야'라고 말했어. [웃음] 그건 사람들 이야기, 그러면서 새로운 눈을 뜨게 만드는 이야기, 부활에 대한 이야기였지. 물론 빌어먹을 군사재판 이야기도 취재했어. 하지만 그건 내가 꼭 해야 하는 취재였을 뿐이고.

(p.108-109)

 

 제대로 취재하려면 한 나라에 어느 정도 시간을 두고 깊이 파고들어야 한다고 많은 특파원들이 입을 모아 말한다. 캄보디아, 브라질, 폴란드, 이집트 등에서 장기간 머물며 취재를 한 특파원들은 문자 그대로 킁킁 냄새를 맡으며 이곳저곳 샅샅이 뒤져 생생한 이야기들을 발굴해냈다. 잠깐 왔다 가는 사람에게는 절대 눈에 띄지 않는 뉴스들이다.

 중국에서 [취재여행을 하던 중] 한 유치원에 가게 되었는데, 아이들이 나를 위해 연극을 보여주더라고… 밭에서 무, 당근 같은 걸 캐는 이야기였는데… 정말 큰 무를 발견한 거야… 꼬마 하나가 무를 뽑으려고 하는데, 아무리 힘을 써도 안 뽑히더군. 여러 차례 시도했는데도, 꿈쩍도 안 하는 거야. 결국에는 다른 아이들을 모두 불러와서 함께 힘을 모아 무를 뽑았지… 그게 연극의 내용이었어.

 폴란드 신문에서 우연히… 카틴 여행을 광고하는 걸 봤어요. [1940년 소비에트 비밀경찰이 폴란드인 수천 명을 그곳에서 대량 학살한 이후] 카틴에는 아무도 가지 않았죠… 당시 소비에트 연방은 아직 건재한 상태였고, 베를린 장벽도 무너지지 않은 때였는데… 나는 사진작가 한 명을 데리고 카틴으로 여행하는 기차에 올랐죠. 기차에는 그곳에서 희생당한 사람들의 유족들로 채워져 있었는데… 정말 애끓는 경험이었어요… 될 수 있으면 마주하고 싶지 않은 이야기잖아요. 하지만 내가 그곳에 가지 않았다면, 누구도 이 사건에 주목하지 않았겠죠.

(p.133-134)

 

 한 지역을 파고드는 특파원은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취재할 수 있지만,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취재하는 특파원은 평범한 사람들과 '거물들(대통령, 왕족, 교황, 연예인 등)'을 균형에 맞춰 취재해야 한다. '국가, 무역, 정치 등에 관한 기본적인 뉴스'를 놓쳐서는 안 되지만, 권력 밖에서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취재하는 것 또한 AP 특파원의 오랜 임무 중 하나다. 이러한 전통은 1925년, 당시 AP를 이끌던 켄트 쿠퍼의 지시에서 출발했다고 말할 수 있다.

 다른 대륙에 사는 수억 명 사람들의 삶을 미국의 신문 독자들에게 소개하기 위해, 특파원은… 자신이 취재하는 나라에서 벌어지는 일, 또 그곳 사람들의 관심사에 대해서도 이야기해야 한다. 물론 정부에 관한 뉴스를 빠뜨려서는 안 되지만, 평범한 사람들의 삶, 그들의 다채로운 행위와 관심사, 기쁨과 슬픔, 즐거움과 헌신, 일과 놀이도 생생하게 전할 수 있어야 한다. 낯선 곳으로 여행을 다니며 미국 독자들이 들어 본 적도 없는 도시와 마을의 삶을 목격하고 취재해야 한다. 그 나라의 수도에서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사건사고를 취재하기 위해서, 또 심층취재를 하기 위해서 언제 어디로든 날아갈 수 있어야 한다.

(p.137)

 

 버지니아 교외에 있는 집에서 만난 조지 맥아더는 줄담배를 피우면서, 스스로 가장 자랑스럽게 여기는 60년 전 한국전쟁 취재 이야기를 한다. 영웅이 될 생각은 없었지만 영웅이 된 꼬마의 이야기를 전하는 400 단어로 이뤄진 기사를 '단숨에 써 내려간' 기억을 들려주었다.

 한 꼬마가 연대본부에 앉아 있었어. 새벽 3시쯤 되었는데… 갑자기 적군이 급습을 한 거야. 꼬마는 혼자 있었는데, 전쟁이 한창인 때라 여기저기 소총이 널려 있었지. 꼬마는 탄창이 꽉 차있는 M-16 소총 3개를 집어 들고 바깥으로 나가서는… 부대인지 소대인지, 보이지도 않는 그 나쁜 놈들을 향해 총을 쏘기 시작한 거야. 아침이 되니 수많은 시체들이 널브러져 있었지. 아무렇지도 않게 그런 일을 해낸 거야. 지금도 분명하게 기억나는데, 키가 크고 깡말라서 그 꼬마는 '송충이'라는 별명으로 불렸거든. 내가 쓴 기사는 왜 그런 행동을 했느냐는 질문에 대한 꼬마의 대답으로 끝을 맺지. "송충이라고 불리는 게 싫어서 그랬어요. 뭐 그래도 사람들은 계속 날 그렇게 부르겠죠."

(p.139)

 

 중동, 아프가니스탄, 멕시코 특파원들은 자신들이 현장에서 취재한 내용이 '민주주의'나 '민심 얻기'와 같은 서방의 내러티브에 맞춰져 단순화되고 왜곡되는 상황을 무수히 목격했다. 이들은 입을 모아 그 나라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어떤 상황인지 제대로 설명하려면 현지 정서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말한다.

 지금 생각해보면 매일 벌어지는 사건들을 우리는 너무 단순화하여 요약해서 보도했던 것 같아요. 사건의 전개 과정을 상세히 밝히는 것 자체가 힘든 경우가 많았거든요… 서양의 관점에서 볼 때 아랍의 봄은 독재에 항거해 민중들이 들고일어난 사건이지만, 지금 돌이켜 보면 그렇게 단순하게 말할 수 있는 사건은 아니었던 것 같아요. 지금도 탐사하고 있는 주제인데, 무언가 이곳 청년들과 연관성이 있는 사건으로 보여요. 미래가 전혀 보이지 않는 절망적인 상황과 관련된 그 어떤 폭발… 어쨌든 아랍의 봄을 독재에 맞서는 시위로 보는 것은, 지나치게 단순화된 관점이죠. 그래서 현장 경험이 어느 정도 쌓이고 나면, 단순히 눈에 보이는 사건뿐만 아니라 그러한 사건이 어떻게 촉발되었는지, 사람들을 움직이게 한 동기가 무엇인지, 사람들의 진짜 관심사는 무엇이고 또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지 볼 수 있는 눈을 갖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런 이야기를 쓸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런 훈련이 되어있지 않으면, 리비아 혁명처럼 거대한 사건이 터졌을 때 '오, 이것도 써야 하고, 저것도 써야 하는데' 하면서 정신을 차리지 못해요. 시간이 흐른 뒤 다시 돌아보면 그때 무엇을 어떻게 취재했어야 하는데 하면서 뒤늦은 후회를 하는 거죠.

(p.160)

 

 베들레헴의 맨저광장 근처에 있는 카페에서 만난 캐린 라웁은 30년 가까이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갈등을 취재하면서 대부분 사람들이 놓치고 있는 기사 주제들을 열거한다. 교회의 종소리, 이슬람 기도시간을 알려주는 목소리, 여기저기 울려대는 자동차 경적 소리… 그리고 왜 이런 주제들에 대해 기사를 쓰기 어려웠는지 이야기한다.

 의사결정의 자유가 지속적으로 박탈당하고 있다고 느끼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감정을 다른 나라들은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아요… 제2차 인티파다가 최고조에 달했을 때, 그들은 검문소 앞에서 고개를 돌리는 것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었어요. 자신들의 운명에 대해 어떠한 계획도 세울 수 없었죠… 지금까지도 웨스트뱅크 사람들은 예루살렘에 들어갈 때마다 이스라엘군의 검문을 받아야 해요. 이처럼 늘 감시받는다는 느낌, 상자 속에 갇혀있다는 느낌, 나 스스로 내 앞길을 결정할 수 없다는 느낌, 정말 끔찍하잖아요. 사람들은 이게 얼마나 괴로운 일인지 이해하지 못할 거예요.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또 다른 것은… 이 문제의 시급성이에요. "중동? 걔네들은 원래 서로 싸우잖아. 맨날 그렇게 살았는데, 뭐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살겠지." 그런 인식이 뿌리 박혀있는 듯해요. 하지만 이건 정말 위험한 접근 방법이죠… 하지만 [기자로서] 우리는 적정선을 찾을 수밖에 없어요. 우리는 여기에 취재하러 왔지 설교하러 온 게 아니니까요. 예컨대, 얼마나 상황이 심각한지 알아보기 위해서 시험 삼아 5일 동안 웨스트뱅크 검문소를 관찰했어요. "8시 5분, 500명의 사람들이 줄 서있다. 대기시간은…" 이런 식으로 뭐든 적었죠. 그곳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가장 잘 보여줄 수 있는 방법이라 생각했어요. 사람들의 목소리와 풍경을 가장 가까이서 전해주면서 전반적인 맥락도 설명해줄 수 있었죠. 우리는 이러한 일상을 전하기 위해 노력하죠. 물론 정치적인 이슈도 빠뜨려서는 안 되죠. [팔레스타인 총리] 살람 파야드가 사임했다는 소식을 전하면서, 이것이 어떤 의미인지 설명하는 기사도 중요하죠. 이처럼 모든 범위를 포괄하면서 가능한 한 공평하게 전달하고, 설명하고, 보통 사람들의 진짜 목소리를 담고, 끝까지 희망을 잃지 않기 위해 노력해요.

(p.165-167)

 

 진짜 걱정스러운 것은 '민주주의'나 '인권'과 같은 서구적인 가치를 기준으로 복잡한 현지의 상황을 단순화하거나 왜곡해버리는 행위다. 거스르기 어려운 이러한 가치와 객관적인 보도 사이에서 많은 특파원들이 곤란을 겪는다. 예컨대 아랍의 봄을 단순히 민주화운동으로 규정해버림으로써, 이 사태가 개인의 자유를 신장시키기는커녕 급진 이슬람주의의 부흥을 촉발할 것이라고는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다. 또한 무조건 '나쁜 놈들'만 끄집어내리면 된다는 짧은 생각으로 뛰어든 미국 덕분에 더 나쁜 놈들이 우위를 차지하고, 그로 인해 그 나라 사람들이 더욱 극심한 나락으로 떨어지는 상황을 보면서 좀 더 열심히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를 취재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는 특파원들도 있다. (p.168-169)

 

 '사람들의 목소리'를 의미하는 라틴어 vox pop은 미국 저널리즘에서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어떤 뉴스를 다루든 미국 언론들은 전통적으로 정치적인 관점에서 구조화된 접근을 하기보다는 개인적인 관점에서 사건을 진술하는 방식을 선호한다. 하지만 개인적인 느낌을 날 것 그대로 전달하고자 하는 집념은 문화적 장벽에 가로막히는 경우가 많다. 특히 자신의 생각을 숨기는 것을 미덕으로 삼는 사회에서는 뉴스로서 가치가 있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수집하기 어렵다. 특히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는 일본이나 공동체를 강조하는 소비에트 연방에서 AP 특파원들은 벽에 부딪힌다.

 고베 대지진이 강타했을 때, 집이 무너지면서 가족을 모두 잃은 남자를 인터뷰했어요. 그의 일터도 무너진 상태였죠. 말 그대로 집도 사라지고 직장도 사라진 거예요. "현재 기분이 어떤지 말씀해 주실 수 있나요?" 이렇게 질문을 했는데, 전혀 예상치 못한 대답이 나왔죠. "아, 저는 인내하고 있습니다." … 그 말속에 어떤 감정이 묻어있을 거라고 나는 생각해요. 그렇게 비참한 일을 겪었는데 어떻게 감정이 없겠어요… 폐허를 물리적으로 복구하는 과정도 중요했지만, 한결같이 견디려고 노력하는 일본 문화를 두 눈으로 목격할 수 있었죠. 어떤 상황이 닥쳤을 때 대처하는 방식이 나와는, 아니 우리 미국인들과는 완전히 달랐어요.

(p.203)

 

 AP 특파원들을 비롯하여 많은 특파원들이 자신들의 취재에 응해준 이름 모를 평범한 이들에 대한 무한한 감사와 경외심을 표현한다. 특히 전쟁이나 자연재해 같은 참혹한 상황 속에서도 자신의 마음을 솔직히 터놓고, 기자들에게 기꺼이 자신들의 집을 내주기도 하는 그들의 모습은 깊은 감동을 주었다.

 [허리케인] 취재를 마칠 때까지 나는 사람들과 함께 살았어요. 진짜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사람들이었어요. 그런 그들이 내게 문을 열어주고, 음식을 나눠줬어요. 그들의 삶이 어떤지 알고 싶어 하는, 일면식도 없는 나를 기꺼이 맞아주었죠… 내가 그런 상황에 처해도 그렇게 행동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p.222)

 

 북아프리카와 웨스트뱅크를 취재하던 라웁은 튀니지의 담배 행상이 자신의 몸에 불을 붙여 분신한 사건이 발생하자 실제 경제난이 얼마나 심각한지 파악하기 위해 무수히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인터뷰를 했다. 라웁이 수집한 취재원들의 구체적인 증언들은 이후 나온 공식적인 통계수치로 검증되었다.

 기자들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어떤 슬로건에 맞춰 현실을 재단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 사람들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몇 달째 급여를 받지 못하면서 웨스트뱅크는 심각한 경제난에 봉착한 상태였어요. 나는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죠. 이런 상황이 누구 때문에 초래되었다고 생각할까? 실제로 질문을 해보면 수많은 사람들이 처음에는 인샬리 즉 '알라의 뜻'이라고 말하죠. 사람들은 대체로 말을 아끼는 듯했어요. 그래도 계속 질문했죠. "지금 수입으로 어떻게 살고 있나요? 냉장고가 비지는 않았나요?" … 10분 만에 끝낼 수 있는 인터뷰가 아니었어요. 무작정 군중 속에서 아무나 붙잡고 인터뷰를 시작하더라도, 결국은 그들 집까지 따라가서 마주 앉아 커피를 마시면서 인내심을 갖고 이것저것 이야기를 해야만 그들은 진정한 속내를 드러냈죠. 물론 진실을 밝히는 데 끝내 도움을 주지 않아 허탕 치는 경우도 있어요. 어쨌든 그런 노력을 통해 그곳의 경제난이 얼마나 심각한지 파악할 수 있었죠.

(p.230-231)

 

 핸리는 AP 동료들과 함께 한국전쟁 당시 미군이 노근리에서 양민 400여 명을 학살한 사건, 이른바 '노근리 양민학살'을 탐사 보도하여 퓰리처상을 받았다. 핸리는 이 보도를 할 때 자신이 평생 취재한 사건 중 가장 광범위한 조사와 검증을 거쳤다고 말한다.
 1990년대 중반, AP 서울지국 기자 최상훈이 먼저 생존자들의 진술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자료가 수집되면서 핸리를 비롯한 AP 탐사기자들이 취재에 본격적으로 합류한다. 이들이 검증해야 할 문제는 비교적 단순했다. 생존자들은 제1기병사단이 학살에 가담했다고 주장했지만, 미군은 제1기병사단이 당시 이 지역에 있지 않았다고 부인했다. AP 기자들은 1950년 지도를 '사무실 벽에 붙여놓고' 공식적으로 기록된 미 육군 부대의 이동기록을 찾아 좌표를 찍으며 부대의 이동경로를 추적하였고, 결국 제1기병사단이 노근리에 있었다는 것을 밝혀냈다. AP 특파원들은 미군의 이동경로를 추적하면서 동시에 난민과 북한군의 이동경로도 추적하여 이것이 양민학살이라는 것을 입증해냈다. 정보공개 청구를 통해 이 작전에 참여한 병사 2,000명의 실명을 확보하였고, 핸리는 마사 멘도자와 함께 일일이 전화를 돌려 이 사건에 대하여 '증언'을 해달라고 요청했다.

 1950년 7월 전쟁상황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을 빼면 아무것도 진척된 게 없었지. 특히 대량학살을 입증해줄 만한 것은 하나도 없었어. 증언을 얻기 위해 일일이 전화를 돌렸고, 34번째 사람에게 전화를 했을 때 처음으로 짧은 증언을 확보할 수 있었지. "네, 다리 밑에서 난민 몇 명이 사살되었을 거예요." 우리는 계속 전화를 걸었고, 마침내 양민학살에 참여한 부대가 '제1기병사단 제7기병연대 제2대대'라는 사실을 밝혀냈어. 그제서야 이 부대에게 초점을 맞출 수 있게 되었지. 이 부대에 소속되어 있었던 사람 15명을 확보하여 증언을 수집하는 데 성공했는데, 문제는 증언이 완전히 일치하지 않았다는 거야. 우리는 차이가 나는 부분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지 토론했지. 물론 그때 상황을 아주 세부적으로 진술해준 사람도 있었지만, 진술을 회피한 사람도 있었고. "저는 당신들이 뭘 듣고 싶어 하는지 압니다. 맞습니다. 그런 일이 있었죠. 하지만 저는 그 일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지 않습니다." 어쨌든 이런 진술도 양민학살이 실제로 있었다는 사실을 뒷받침해 준 셈이지.

 130명에 달하는 사람들을 전화로, 또는 직접 만나 인터뷰하여 확보한 병사들의 증언은 생존자들의 증언과 소름끼치도록 일치했다. "터널 입구에 시체 더미가 쌓였고, 피난민들은 살기 위해 죽은 가족의 시체 뒤에 숨었다." 또한 피난민을 향해 발포 명령을 내린 것을 입증하는 미군의 문서도 찾아냈다. 마침내 1999년 가을. 미군이 한국전쟁에서 자행한 대량학살에 대한 생존자들의 증언과 수십 명의 재향군인들의 인터뷰를 통해 입증해낸 AP의 탐사보도가 세상에 타전되었고, 이로써 그전까지 세상에 알려진 적 없던 한국전쟁의 참상을 세상에 알리는 데 성공했다. (p.234-236)

 

 프레이져는 중앙아메리카에서 게릴라전을 취재하던 중, 폭탄 공격으로 아내를 잃었다. 그 사건을 겪은 후 프레이져는 심리적 트라우마를 겪는 민간인들의 마음을 더 잘 이해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프레이져는 엘살바도르를 취재하는 동안 뉴욕의 에디터들에게 취재원들이 말을 잘 하지 않는 이유를 설명해야만 했다.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자신과 인터뷰했던 것 때문에 불행을 겪었을지도 모를 사람들에 대해 여전히 마음의 빚을 지고 있다고 말한다.

 다섯 아이를 둔 여성과 이야기했지. 그녀는 또 임신을 해 만삭인 상태였어. 불 옆에 서서 콩 같은 것이 들어있는 냄비 밑에 나무때기를 던져 넣고 있는 그녀가 이야기했지. "그… 나쁜 놈들이 와서 남편을 잡아갔어요. 신의 말씀을 설교했다는 이유로요. 그 이후 다시는 보지 못했어요… 우리가 커피를 수확하러 가는 길에 매복해 있었어요." 그러더니 갑자기 등을 돌리면서 이렇게 말하더군. "난 못 봤어요. 아무것도 못 봤어요." 사람들은 그렇게 불현듯 공포에 휩싸였어… 뉴욕에 있는 잘나디 잘난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지. "거리로 가서 평범한 엘살바도르 사람과 이야기를 하세요. 이 사건에 대해 일반적인 엘살바도르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까요?" 나는 그런 작자들에게, 뇌 세포가 두 개 이상 돌아가는 평균적인 엘살바도르 사람이라면 입을 다물고 있다고 말해주었어. 그곳에서는 입 한 번 잘못 놀렸다가는 눈 깜짝할 새 죽을 수 있거든… 인터뷰를 하고 나서 몇 시간 후 시체로 발견되기도 해. 물론 그게 우연이길 바라지만, 누가 알아? 그런 상황은 나도 힘들어… 물론 거기서 평생 살아야 하는 사람들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p.244-245)

 

 AP에서 작성한 기사나 사진 때문에 체포당한 사람들이 있지 않을까요? AP 때문에 처형당하거나, 고문당하거나, 불구가 되거나, 다시 걷지 못할 정도로 두들겨 맞은 사람이 있진 않을까요? 또는 가족과 생이별을 한 사람은 없을까요? 가족이 박해를 당한 경우는 없을까요? 그렇습니다… 이건 현실이죠. 내가 인터뷰했던 사람들, 아주 잠시 만났을 뿐이지만, 그들은 지금도 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아요. 그 대가로 나는 지금도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그런 일을 겪은 사람들은 내가 아는 것 말고도 훨씬 많이 있을 것입니다… 나는 편안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여행을 즐기고 아이들과 함께 놀고 가족들을 베이징으로 초대하여 동물원 구경을 할 때, 그들은 과연 어떤 시간을 보내고 있을까요? 나는 늘 죄책감에 시달립니다… 나로 인해 초래되었을지 모르는 그들의 불행을 생각해보면 나는 너무나 운이 좋고 행복한 사람이지요. 나는 이 사건을 함께 취재했던 기자들 모두 똑같은 비극을 겪을 것이라고 생각해요. 모르고 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피할 수 없는 운명이죠…

 [1989년] 6월 3일 밤, 계엄군이 광장을 향해 발포하면서 돌진하기 시작했어요… 난 베이징 호텔 로비에 갇혀있었죠… 한 젊은이가… 신분증을 슬쩍 보여주면서 자신이 공안부 소속이라고 밝히며 묻더군요. "거기서 뭘 취재했나? 무슨 일을 했나?" … 비디오카메라를 꺼내 보여주었더니… 테이프를 꺼내 가져가는 거예요… 두 시간 분량의 영상이 담겨 있었는데… 정말 화가 치솟았고, 열을 내며 항변했지요. 나는 너무도 화가 나서 방으로 돌아갔다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그를 쫓아가야겠다고 마음먹었지요. 그가 호텔 밖으로 나가는 모습이 보였고, 밖에는 군중이 모여있었어요. 도망치려는 순간 그의 팔을 잡으면서 소리쳤습니다. "이 사람은 공안입니다. 내 필름을 압수했어요!" 군중들이 달려들어 그가 가진 물건을 빼앗으려고 했지만… 결국 되돌려 받지 못했어요. 나는 그 비디오테이프에 무엇이 담겨있었는지 기억하지도 못해요. 다만, 자신의 얼굴이 찍히는 것도 겁내지 않고 자신의 희망과 열망을 토로한 사람들, 왜 자신이 그 자리에 나왔는지 열변을 토하는 평범한 사람들이 기록되어 있었을 뿐이죠. 그 테이프로 인해서 그들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는… 잘 모르겠어요.

(p.246)

 

 실제로 기자들은 타인의 고통을 깊이 파고들어, 그 고통을 독자들이 실감할 수 있도록 더 드라마틱하게 기사를 작성하라는 압박을 받는다. 고통을 누그러뜨리고 완화하기보다는, 자극적이고 가학적으로 묘사할수록 더 많은 호응을 얻고 신문에 실릴 확률이 높아진다. 그래서 1960년대 콩고 내전이 한창일 때 킨샤사 공항에서 피난을 가려는 사람들 사이를 휘젓고 다니며 '영어 할 줄 아는 강간당한 분 있습니까?'라고 외친 기자도 있었다. 물론 검증이 중요하긴 하지만 취재원의 존엄성까지 해쳐서는 안 될 것이다. (p.253)

 

 특파원들은 직접 눈으로 보는 것이 직업적인 책무의 핵심이며, 그렇게 기사를 써야만 정확성을 담보할 수 있으며, 그렇게 쓴 기사가 영향력을 발휘한다고 생각한다. 역사적으로 언론이 권위를 갖게 된 것은, 기자들이 사건을 직접 목격하고 취재하여 보도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직접 목격은 단순히 속보를 취재하기 위한 것만이 아니라, 통찰을 얻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
 언론 보도가 권위를 갖는 이유는 그것이 '객관적이고 독립적인 기자가 현장에서 직접 확인했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현장에서 직접 취재한 생생하고 자세한 보도를 통해 독자들은 다른 나라의 현실을 이해한다. 소말리아 내전을 취재한 특파원 폴 알렉산더는 독자들에게 '공기 중에 떠다니는 온갖 먼지의 맛', '호텔에서도 맡을 수 있는 시체 썩는 냄새', 대낮의 혼란과 한밤의 어두운 침묵처럼 '현장의 티끌 하나까지도' 독자들에게 전달하기 위해 노력했다. (p.305-307)

 

 브라이슨은 1990년대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엄청난 시간을 투자하여 쓴 두 편의 특집기사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한 편은 학교 내 인종차별이 공식적으로 철폐된 날을 취재한 기사였고, 다른 한 편은 올림픽에서 처음으로 금메달을 따고 돌아온 흑인 선수에 관한 기사였다. 첫 번째 사건을 취재하기 위해 브라이슨은 사진기자와 함께 아침 일찍 현장에 가서 작은 소녀가 학교에 가기 위해 준비하는 과정부터 관찰하기 시작했다. 소녀가 등교하는 길목에서 '백인 시위대가 학교로 들어가는 흑인 아이들을 향해 욕하는 모습'을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생각하던 그대로였죠. 우리가 예상했던 상황을 직접 눈으로 확인한 거예요. 다음 날에도 또 갔는데, 전날과 마찬가지로 경찰이 나와있었고, 그저 자기 아이들을 안전하게 학교에 보내고 싶을 뿐이라고 소리치는 백인 부모들과 그 반대편에는 흑인 아이들의 등교를 지지하는 부모들이 죄인처럼 서 있었죠. 전날보다는 훨씬 조용하더군요. 그날 백인 소녀와 인터뷰를 했는데 아이는 정작, 주변을 둘러보며 새로운 친구들을 만난다는 생각에 상당히 들떠있더군요. 그날 학교의 일상은 평범했어요. 하루가 아닌 이틀을 취재하기로 결정한 것은 정말 좋은 선택이었어요. 첫날은 우리가 기대했던 사건이 펼쳐졌지만, 둘째 날은 훨씬 차분했거든요.

(p.340-341)

 

 기자보호위원회(CPJ)에 따르면, 1992년부터 2015년 6월까지 해외 특파원을 포함하여 취재 과정에서 목숨을 잃은 기자는 1,135명에 달한다고 한다. '위험한 현장에서 취재'를 하다가 죽은 이들도 있고, 때로는 부당한 보복에 의해 죽은 이들도 있다. 7년 동안 인질로 잡혀있는 동안 무수히 죽음의 위협을 넘긴 테리 앤더슨은 이렇게 말한다.

 사무실에서 기사를 작성하고 있는데 총알들이 갑자기 쏟아져 들어왔지. 빗발치는 총알세례 속에서 기사를 마무리하고 전송하는 데에는 성공했는데… 마침내 박격포 포탄이 날아들어왔고, 결국 총에 맞고 말았어. 나는 비명을 질렀고… 포로가 되었지.

 전쟁 취재에 따르는 위험은 전장에서 경험하는 공포가 전부가 아니다. 전장에서 느낀 공포는 일상으로 파고든다. 불에 탄 아이의 시체에서 피어오르는 연기, 강간한 뒤 살해한 여성들의 피투성이 몸뚱아리를 직접 눈으로 확인해야 한다. 특파원들이 현장에서 진실을 파헤치기 위해 마주하는 가장 불편한, 동시에 가장 자주 접하는 업무 중 하나는 바로 시체 세기다. 한국, 리비아, 멕시코, 파키스탄 등에서 송장을 세며 사망자 수를 파악했던 특파원들은 이후 깊은 트라우마를 겪으며 고통을 받았다.
 여전히 해외 특파원을 아드레날린 중독자라고 폄하하며 '자기가 좋아서 하는 일'일 뿐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많지만 여기 실린 인터뷰들은, 처참한 현장을 경험하고 난 뒤 특파원들이 얼마나 큰 고통을 당하고 있으며, 그러한 경험이 이후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보여준다. 진실을 알리기 위해, 폭력을 피할 길 없는 이들의 목소리를 세상에 전파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더라도 꼭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고 그들은 한결같이 말한다. (p.384-385)

 

 특파원들은 전투의 결과를 정확하고 진실되게 전달하기 위해 시체를 직접 세야 하는 경우가 많다. 스티븐슨도 피 웅덩이 속에서 시체를 셌다. 분쟁지역에서 이러한 임무는 특파원이 수행하는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위험한 일 중 하나다. 정부가 발표하는 정보에는 왜곡이 많기 때문에 기자는 직접 현장에 가서 사실을 확인하고 기사의 신빙성을 높여야 한다. 물론 이러한 경험은 상당한 트라우마를 남긴다.
 앤더슨은 이런 일을 두 번이나 수행했다. 1980년 인구가 100만 명에 달하는 한국의 도시 광주에서 정부군이 무자비하게 반정부 시위를 진압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광주 시민들은 계엄군에 맞서 도시를 장악했고, 계엄군은 도시 외곽을 봉쇄한 다음, 도심으로 진격하여 시민들을 무참히 학살하였다. 사건이 발생하자마자 앤더슨은 사진기자와 함께 광주로 갔다. 택시 기사는 광주로 들어가는 길목을 10여 킬로미터 남겨두고 그들을 내려주었고, 걸어서 바리케이트를 넘었다. 기사를 송고하기 위해 전화기를 사용하러 매일 계엄군 부대에 들어간 것을 빼고 나머지 시간은 모두 현장에 머물렀고, 그렇게 9일 동안 광주를 취재했다.

 광주에 들어간 첫째 날, 정신을 차리지 못할 만큼 너무나 큰 충격과 비통함 속에서 하루를 보냈어. AP가 뭐하는 곳인가? 가장 기초적인 사실을 기록하는 곳이지. 사람이 얼마나 죽었을까? 계엄군은 폭도 세 명이 죽었다고 말했지만, 정말 죽은 사람은 몇 명이나 될까? 첫날, 그날 아침, 내가 광주에 들어가자마자 한 장소에서만 센 게 179구였어. 차에 깔려 죽고, 두들겨 맞아 죽고, 사지가 잘려 죽고, 온갖 끔찍한 방법으로 살육당한 시신들… 그걸 직접 내 눈으로 확인하며 숫자를 셌어. 손가락을 들어 하나, 둘, 셋, 넷… 시내를 헤집고 다니며 눈에 띄는 시체는 모조리 셌어… 그날 저녁 기사를 전송하기 위해 도시 외곽으로 나오면서 내린 결론은, 한국 정부의 발표는… 새빨간 거짓말이라는 사실이었지. 죽은 건 세 명이 아니야. 내 눈으로 그 끔찍한 시신들을 하나하나 셌다고.

 앤더슨은 광주 전라남도청 옆에 있는 호텔에 묵었다. 도청은 계엄군이 최종 진격을 했을 때 시민군이 끝까지 저항하던 최후의 보루였다. 계엄군은 호텔을 향해서도 총격을 가했는데, 당시 앤더슨이 묵던 방의 벽에 붙어있던 숙박비 알림판에도 총탄이 날아와 구멍을 뚫었다.

 그날 새벽에 우리는 잔뜩 겁에 질려 밖으로 나왔어… 한국군 대령이 지프를 타고 지나가길래 그를 향해 소리를 질렀지. "대령, 대령, 대령!" 그가 멈춰 서더군. "김 대령님, 오늘 작전으로 사람이 얼마나 죽었습니까?" 나를 빤히 쳐다보더니 두 명이라고 대답하더군요. "군인 한 명과 반란군 한 명이 죽었소." 우리는 건물을 돌아 도청 안으로 들어갔어. 앞마당에 쌓여 있는 시신만 17구가 되더군. 그 자리에 나 말고 특파원이 두 명 더 있었는데, 최대한 흩어져서 시신을 찾아보자고 했지. 우리는 각자 구역을 나눠 흩어졌다가 다시 모였고, 그렇게 해서 확인한 시신은 수백 구에 달했어. 우리가 도청에서 알아낸 게 그 정도였으니, 광주 전체에서 죽은 사람은 도대체 몇 명이나 될까? 알 수 없지.

(p.410-412)

 

 중국 천안문에서 괴멸된 시위대를 취재할 때, 가자지구의 자발리아 난민캠프에서 진흙과 폐수 속에서 비참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취재할 때, '도무지 희망이라고는 전혀 꿈꿀 수 없는, 캄캄한 절망만이 펼쳐져있는 현실' 앞에서는 특파원도 좌절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절망감은 특파원들에게 깊은 마음의 상처를 남긴다. 라웁은 이렇게 말한다.

 희망이 없어 보이는 무언가를 계속 취재하는 것은 정말 힘든 일입니다… 누구든 행복한 결말을 쓰고 싶은 게 사실이잖아요.

 스미스는 포위당한 사라예보에 들어간 첫날, 무자비한 폭력 속에서 동료 한 명이 죽고, 또 다른 한 명은 심각하게 부상을 당하는 일을 경험했다. 그 상황에서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하는 자신의 무기력함에 가슴이 무너져 내렸다.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도 그는 당시 겪었던 구체적인 상황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으나, 자신이 실제로 그곳에서 얼마 동안 있었는지는 기억하지 못한다.

 하루하루가 녹아서 그냥 다음 날과 섞여있는 것처럼 느껴졌어요. 그건 정말로 하나로 이어진 경험이었어요… 내가 며칠을 그곳에 있었는지 기억할 수 없어요. 열흘? 2주? 그 정도… 사람들은 자주 나한테 물어요. "그곳에 있을 때 위험하다고 느꼈나요?" 아뇨. 전혀 느끼지 못했어요. 내가 해야 하는 일에 너무나 집중해 있었거든요. "오, 맙소사, 총에 맞는 거 아냐?" 그런 걱정을 할 시간도 없었어요. 물론 저격수들이 하루 종일 총구를 겨누고 있는 길을 통과해야 할 때는 정말 심장이 튀어나올 듯 무서웠죠. 하지만 매일 매 순간 그런 건 아니에요. 그렇게 느낀다면 이 일을 할 수 없어요… 절대 그런 사람은 할 수 없는 일이에요. 분별하지 말고, 그냥 마음 한켠에 밀어놓을 수 없다면… 정말 이런 것들이 신경 쓰인다면 현장에 나갈 수 없을 것이고, 따라서 취재도 할 수 없겠죠. 기본적으로 위험을 향해 뛰어들지 못하는 사람은 기자를 해서는 안되죠.

(p.422-423)

 

 미국인으로서 해외에 파견된 특파원들은 그곳에 가있는 미국의 대사관, CIA, 군대에 소속된 관료들과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다. 오랜 기간 AP 특파원들이 해외에 파견되었을 때 가장 먼저 찾아가는 곳은 바로 미국 대사관이었다. 그리고 이들과 긴밀하게 정보를 교환하는 것은 어떠한 '문제'도 없는 것처럼 여겨졌다. 하지만 냉전이 시작되면서 미국 관료들이 제공하는 정보에 대한 의구심이 들기 시작했고, 9∙11 테러 이후 이 둘 사이의 긴밀한 관계는 끝났다.
 AP 특파원과 미군과의 관계도 달라졌다. 제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에서는 '한 팀'으로 활약했으나 베트남전쟁에서는 느슨하게 협력했다. 중앙아메리카 게릴라전과 걸프전쟁에서는 미군이 언론을 조작하려고 했으며, 이라크전쟁과 아프가니스탄전쟁에서는 미군의 도움을 받기는 했으나 독립적으로 취재를 해나갔다.
 미국 정부가 구상한 시나리오에 도전하는 특파원들은 정치적인 압박을 받기도 했다. 특히 논쟁적인 정책 방향과 잔혹한 고통이 가득한 현장을 취재할 때, AP 특파원들은 객관주의라는 이상에 집착하고, 당파심이 부족하고, 모든 관점을 포괄하려고 하는 허황된 망상에 사로잡혀있다고 매도당하기도 한다. (p.534-535)

 

 이라크전쟁과 아프가니스탄전쟁부터 미군은 기자들이 부대를 따라다니면서 전장을 취재하도록 지원하는 '종군(embedding)'이라는 개념을 본격적으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이는 사담 후세인의 '거짓 선전'을 반박하기 위해 펜타곤이 고안해낸 전략으로, 기자들을 작전 수행 과정에 객관적인 관찰자로 동행하도록 하는 대신 기자는 물론 병사들이 '작전상 보안'의 범위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관리할 수 있는 방법으로 여겨진다. 이 정책을 설계하고 실행한 책임자에 따르면, 이라크전쟁에서만 종군기자로 활동한 사람은 600명에 달한다.
 'embed(종군)'를 'in bed(침대에 누워서 하는 취재)'라고 폄하하는 사람도 있지만, 두 전쟁에 연달아 종군한 특파원들은 그 나름대로 장점이 있다고 말한다. 다른 방식으로는 접근할 수 없는 이야기를 취재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논리는 다른 취재 방식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따라서 전쟁의 전모를 드러내기 위해서는 '가능한 다양한 취재원으로부터' 다양한 방식으로 취재를 수행해야 한다. (p.551)

 

 30년 동안 중앙아메리카의 게릴라 전쟁을 취재한 조셉 프레이져는 '증언을 뒷받침하는 확실한 근거는 부재한 가운데 사회 전체가 피비린내 나는 수렁으로 전락하는' 비극 속에서 끊임없이 직업적 임무와 개인적 고뇌 사이에서 괴로워했다.

 한 마을에 들어갔는데, 게릴라들이 들어와서 아버지를 죽였다고 하는 가족을 만났지. 아버지가 공직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아버지의 머리에 총을 쐈다고 하더군. 반대로 어떤 곳은 정부군이 쳐들어와서 마을을 모조리 불태워 버리고 마을 사람들을 모조리 쏴 죽였어. 이런 사건들을 취재해 보면 어느 한쪽의 증언만 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지. 세상에는 나쁜 일이 무수히 많이 발생하고 있으며, 누구나 어떤 식으로든 그런 일이 발생하는 데 기여하고 있지. 그게 기사의 일부분이 되기도 하고… 우리는 오랜 시간, 세상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이해하려고 노력했으나, 결국 우리의 힘으로는 이해할 수 없다고 판단을 내렸어. 그래서 우리는 그냥 일어난 사건을 그대로 진술하는 기사로 쓸 뿐이지. 이게 진실이야… 우리가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는 없어.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그냥 보도하는 것이지.

(p.567-568)

 

 모순되는 다양한 목소리를 듣는 것은 '지나친 단순화'라는 실수를 범하지 않고 '편향되지 않은' 기사를 쓰기 위한 방법이기도 하다. 하지만 공정성, 정확성, 균형을 잘 유지한다고 해도 이것이 '온전함'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특파원들은 잘 알고 있다.

 모두들 양쪽 이야기를 다 들으라고 말하지만… 내가 지금껏 살면서 의견이 10개 밑으로 나오는 기사는 본 적이 없어. 형편없는 기사조차 겉으로 보기에는 균형을 잘 잡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

 베트남 특파원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개인적인 견해를 가진 믹스마스터 같아… 하루는 이렇게 느꼈다가, 다음엔 이렇게 느끼고… 끊임없이 머리를 두들겨 맞으면서 빙글빙글 도는 것 같아. 전쟁을 취재하는 건 이런 느낌이야. 이쪽 진영에 붙었다가 또 저쪽 진영에 붙었다가 하는 거지.

(p.570-571)

 

 하지만 이처럼 진영마다 의견과 진술을 '동등하게' 확보하기 위해 노력한다고 해서 특파원들이 기계적인 중립성을 도덕적 신념으로 삼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이야기의 '한쪽이' 잔인하게 탄압하는 정부일 때, 특파원은 '한쪽은 이렇게 주장하고, 반대쪽은 이렇게 주장한다'라고 말하고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공정하게' 즉, 그들이 주장하는 것을 그대로 보여주기 위해 노력한다. 데이빗 크래리는 1980년대 후반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아파르트헤이트에 맞선 투쟁을 취재하던 당시 상황을 이렇게 회고한다.

 "흑인 해방운동의 주장이 옳을 수도 있고 백인 소수자 정부의 말도 옳을 수도 있으니까 50대 50으로 기사를 나눠서 써야 해." 이 복잡한 이야기를 우리는 그런 식으로 접근하지 않았어.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한 적도 없었지… 그게 언론의 중립 규정을 위반한 것일까?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흑인 해방운동에 공감하는 기사를 썼다고 해서 우리가 잘못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거야… 그곳은 매우 특별한 상황이었거든. 신체적인 위협을 받은 적도 없어. 하지만 오랜 기간 지속되는 정치적 갈등을 경험하고 취재하면서, 어느 한쪽에 훨씬 공감하기로 결정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지.

(p.573-574)

 

 몸무게가 55킬로그램에 불과했던 샘 서멀린은 한국전쟁 휴전 소식을 알리기 위해 '200명에 달하는 특파원들을 제치고 판문점에 하나밖에 없는 전화기를 향해 쏜살처럼 달려갔다.' 하지만 그가 서울특파원에게 전화를 걸어 할 수 있던 말은 '전쟁이 끝났다'라는 말이 전부였다. 그걸 받아 적은 서울특파원은 곧바로 '아래층에 있는' 검열관을 향해 달려갔고, 검열을 통과한 뒤 AP 도쿄지국으로 전화를 걸었다. 도쿄에서 곧바로 특종이 전 세계로 퍼져나갔고, 이로써 서멀린은 특종 경쟁에서 승리했다. 이것이 가능했던 가장 큰 이유는 당시 소식을 전할 수 있는 군 전화선이 단 하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p.590)

 

 특파원들은 아무리 급하더라도 신뢰성과 정확성은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두 눈으로 직접 목격하고, 부지런히 검증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안 된다. 라웁은 특히 엄청난 사건에 대한 보도가 다른 곳에서 쏟아져 나올 때, 기사를 보류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용기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2011년 그녀가 카이로 뉴스룸에 있을 때 호스니 무바라크 대통령이 사임했다는 보도가 다른 언론사에서 특종으로 나왔다. 그녀는 아랍어를 구사하는 기자에게 공식 성명을 확인해달라고 했고, 결국 번역이 잘못되었다는 결론을 얻었다.

 중동 에디터의 얼굴을 바라보던 기억이 나네요. 그의 말을 믿을 것인지 잠시 고민하다가 담담하게 말했죠. "좋아, 일단 보류하자." 하지만 압박은 정말 엄청났어요. 그 보도가 사실이라면, AP는 보도경쟁에서 몇 시간이나 뒤쳐지는 거잖아요… 특종 경쟁 속에서 신뢰성과 정확성은 갈수록 하찮게 여겨지는 것 같아요. 제대로 된 언론사라면 이러한 기준을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p.607-608)

 

 1980년대 후반 파월은 방글라데시에서 발생한 '국토의 4분의 1이 물에 잠기는 홍수'를 취재해서 기사를 전송했다.

 기사는 결국 나가지 못했어요. … 이걸 취재하기 위해 나는 방글라데시에서 목숨을 걸고 헬리콥터에 매달리기도 했는데… 왜 이 기사를 내보내지 않느냐고 따졌더니 이렇게 말하더라고요. "방글라데시는 원래 매년 홍수가 나잖아요." … 정말 좌절할 수밖에 없었죠.

(p.615-616)

 

 언론에게 가장 중요하면서도 골치 아픈 상대는 독자다. 특파원들은 해외 소식을 전하기 위해 목숨을 걸지만, 먼 나라의 소식까지 챙겨보는 독자는 많지 않다는 것을 특파원들도 알고 있다. 어느 나라에 재난이 발생해 신문 1면에 대서특필되는 경우에도 별다른 차이는 없다.
 따라서 특파원들은 그러한 독자들의 시선을 끌어들이기 위해 이야기를 구상하고 기사를 작성해야 한다. 물론 정확성, 신뢰성, 균형 등 기자의 윤리적 기준도 충실히 지켜야 한다. 그렇게 작성한 기사가 굉장한 주목을 받아 신문 1면에 실리거나 모바일 화면 상단에 걸릴 때, 궁극적으로 한 아이의 생명을 살릴 수도 있고, 때로는 귀중한 시간을 허비하게 만들었다는 이유로 비난을 받을 수도 있다.
 이처럼 세상 어디에나 존재하면서도 개별적으로 포착하기 어려운 독자라는 존재는 해외 특파원의 기사 작성에 매우 중요한 요인으로 작동한다. 독자는 이야기 전달 방식뿐만 아니라 기사 자체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 두 눈으로 직접 목격하고 힘들게 확보한 정보와 지식들을, 관심이 없던 사람들도 읽을 수 있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특파원들의 영원한 고민이다. (p.628)

 

 독자들의 관심을 파악하기 어려운 이유는, 독자들이 관심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가슴 아픈 현실이지만, 이는 경험적으로 (또 여론조사를 통해서도) 반복적으로 확인되는 것이다. 위키릭스가 수차례 터뜨린 외교문서 폭로도 '고정 독자'를 확보하고 있는 주요 신문사들이 '관심을 끌기 위한 아이템으로 포장하기 전까지는'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드물긴 했지만 전 세계가 기자들을 지켜보는 순간도 있었다. 넬슨 만델라가 감옥에서 걸어 나오는 '찰나적 순간'이나 소비에트 연방이 붕괴하는 순간처럼 당연히 관심받을 수밖에 없는 세계사적 사건들이 그렇다. 모스크바 특파원은 이렇게 말했다.

 아이오와 더뷰크에 사는 사람이 이런 것들에 얼마나 관심이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거대한 이야기라는 맥락 속에 들어가면 아주 작은 사건도 중요해지지.

 하지만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을 취재한 남부 조지아 출신 베테랑 특파원은 이렇게 말한다.

 외신이 《토마스빌타임스》의 가장 중요한 관심사가 될 수는 없는 법이지. 또 미국 사람 중에 저녁식사를 하면서 프랑스 대통령의 발언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

 심지어 전쟁이 한창 진행되고 있는 한국과 베트남에서 보내는 기사에도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미국인이 많다는 사실에 특파원들은 '충격'을 받기도 한다. (p.632-633)

 

 아파르트헤이트, 전쟁, 인질극, 재난과 같은 이야기들은 중요한 뉴스로 여겨지기도 하지만, 그런 뉴스도 계속 반복되다 보면 독자들의 관심은 떨어진다. 특파원의 눈에는 '믿을 수 없을 만큼 강력한' 이야기라고 느껴지는 것조차 새로운 형식의 스토리텔링을 활용해 선보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크래리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평등권 투쟁에 대한 기사를 쓰면서 매일, 매주 '똑같은 기사'를 쓴다는 인상을 주지 않기 위해 '점진적인 변화'와 발전 양상에 초점을 맞췄다. 테헤란의 인질 사태, 로커비 비행기 추락, 멕시코의 카르텔 전쟁, 2000년대 태평양 주변의 자연재해에 관한 보도에도 이러한 전략이 적용되었다. 하지만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는 예외였다.

 내가 그곳에 있지 않다면, 직접 경험하지 않는다면 어떠한 재해도 뻔한 이야기에 불과하죠. "어, 어제 읽은 내용이네… 아, 사고가 일어난 지 나흘이 지났네… 지진에서 회복하려면 힘들겠군." … 자연재해가 발생했을 때는 보도의 흐름이 거의 정해져 있어요. 어디서 발생하고, 규모가 얼마나 되고, 얼마나 죽었나? 국제 원조가 밀려들기 시작하면, 이야기는 거의 끝나죠… 현장을 취재하는 기자의 입장에서는 좌절감을 느끼기도 해요.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고통받고 있고, 아직도 이야기할 것들이 넘쳐나거든요. 그런 것들에 사람들이 계속 관심을 갖게 만들려면 창의적인 방식을 궁리해야 하죠… 그런데 후쿠시마 핵발전소 폭발 사고는 사람들이 싫증을 느낄 틈 없이 3개월 동안 쉬지 않고 새로운 기사가 나갔어요. 사람들이 이 사건에 관심을 가질까 신경을 쓸 필요가 없었죠.

 더 나아가 전쟁 보도에 대한 독자들의 '피로'는 특파원들에게 충격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심지어 미국이 주도한 베트남전쟁과 아프가니스탄전쟁에 대한 관심도 금방 시들해진다. 아프가니스탄에서는 미군에 의한 민간인 사망 사건이 처음엔 큰 충격을 주었지만, 계속 반복되다보니 이에 대한 관심도 사라졌다.

 사람들이 지겨워하더라도 기자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계속 보도하는 게 임무잖아요… 나는 폭탄 테러를 지나치게 과장해서 보도하지 않으려고 노력해요. 언론에서 자꾸 다뤄주니까 그런 테러가 계속 일어나는 거잖아요. 나는 그들에게 휘둘리고 싶지는 않아요… 어쨌든 말도 되지 않는 공격에 대해서 그들의 잘못을 낱낱이 밝혀내는 건 어렵지 않지만… 독자들의 '피로감'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죠… 독자들이 귀에 닳도록 들은 이야기라고 생각한다면, 죽음과 파괴의 이야기에 싫증을 낸다면, 뭐 별수 있겠어요? 그저…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더 실감 나게 보도하고, 또 앞으로 어떻게 흘러갈지 전망하는 보도를 계속할 뿐이죠.

(p.635-637)

 

 미국의 독자들이 특정 국가에 대해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은 기사를 쓰는 데 도움이 되기도 하고 방해가 되기도 한다. 특파원들은 대개 독자를 낚기 위해 그러한 고정관념을 도입부에 활용한다. 1980년대 중반 케냐를 기반으로 활동한 아프리카 특파원 데이빗 크래리는 자신의 경험에 대해 말한다.

 사람들의 관심을 유도하기 위해 'witch doctor(마귀 의사)'라는 단어를 헤드라인에 넣었지. 전통적인 방식으로 사람을 치료하는 이들을 일컫는 말로 쓴 것인데, 어쨌든 이들의 의료 기술과 철학은 현대 의술과 다르지만, 현대 의술을 다양하게 접목하면서 아프리카 사람들의 삶에서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현황을 보도하는 기사였어… 아프리카에 관한 보도를 할 때 이런 방법을 많이 사용했는데… 물론 이런 '낚시'가 아프리카에 대한 대중의 고정관념을 유지하고 더 나아가 강화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어렵잖아. 아예 그런 고정관념을 쓰지 않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고정관념을 활용해 사람들을 끌어들인 다음 그걸 깨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라고 생각해.

(p.640-641)

 

 소말리아 내전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한 AP 특파원은 독자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하루에 한 끼로 연명하는 UN 캠프에 있는 아이들의 비참한 삶을 자세하게 묘사했다. 하지만 그런 기사를 더 많이 쓰지 않았던 것을 후회한다.

 소말리아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급자족하며 목숨을 부지하던 이들의 일상을 좀 더 많이 기사로 썼더라면, 장기적으로 훨씬 의미 있는 결과가 나오지 않았을까? 민병대가 출현한 정치적 배경이나 소말리아의 권력을 잡기 위한 전쟁 같은 것에는 사람들이 그다지 신경도 쓰지 않았고, 지금도 관심이 없잖아. 사람들이 관심을 갖는 인간적인 이야기를 좀 더 많이 했더라면 소말리아 상황은 지금보다 좀 더 나아졌을지 몰라. 나 역시 그런 이야기들을 좋아하는데…

(p.651-652)

 

 이보다 30년 전, 파키스탄이 동서로 나뉘어 전쟁을 하던 중에, 로젠블럼은 동파키스탄에서 '마을을 전부 불바다로 만들고 시체를 우물 속에 처넣은' 처참한 현장을 목격한다. 하지만 기사를 써도 엄격한 검열을 통과해야만 했다. 실제 보도된 기사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달려있다.

 "로젠블럼은 해외 특파원들의 접근이 공식적으로 금지되었던 5주가 지난 뒤, 동파키스탄에 처음 입국 허가를 받은 여섯 명의 외신 특파원들 중 한 명이다. 이 기사는 파키스탄 정부의 검열을 피해 나온 것이다."

 50만에 달하는 뱅골인들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는 이 전쟁의 비극적인 규모와 공포를 독자들에게 전달하기 위해 로젠블럼은 고민했다. 그가 떠올린 전략은 '제2차 세계대전을 연상시키는 진술과 충격적인 도살과 증오로 가득한 내전을 숨김없이 묘사하는 것'이었다. 한 기사는 이렇게 시작한다.

 마음껏 고기를 뜯은 독수리들은 갠지스강 위로 날아오르는 것이 벅찰 만큼 배가 부르다. 지난 3월 이후 그들이 먹은 시신은 최소 50만 구가 넘을 것이다. 1971년 3월 25일 파키스탄 동부에서 발발한 파키스탄 내전은 이미 파산한 국가를 파멸 수준으로 쓸어 넣었다. 이곳에서 벌어지는 섬뜩한 살인과 참상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다.

 로젠블럼은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당시 상황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취재원에 따르면… 50만에 달하는 사람이 어떠어떠한 일로 사망했다." 이런 식으로는 말하고 싶지 않았지. 이 사건의 중요성과 광범위하게 펼쳐지는 끔찍한 상황을… 어떻게 전달해야 독자들의 관심을 사로잡을 수 있을까… 하지만 이 잔학 무도한 현장을 독자들에게 제대로 전달하기는 어려웠지. 노력은 했으나, 글로만 전달하기에는 너무나 역부족이었거든… 게다가 이건 파키스탄이고 인도 이야기잖아. 미국 사람들이 관심을 갖기나 하겠어? 브루클린에서 개가 사람을 물었다는 이야기가 중국 혁명보다 더 크게 기사화되는 판에 말이야.

 로젠블럼은 독자들이 관심을 끄는 것과 무관하게, 기자라면 '취재할 가치가 있는 이야기를 최고의 이야기인 것처럼 취재해야 한다'고 말한다. 독자들이 관심을 갖지 않더라도 취재할 가치있는 사건이라면 충실하게 기사를 써야 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가 50년이나 되는 기자생활을 하면서 가장 주목을 받은 기사는, 파키스탄 내전 이야기가 아니라 그의 말을 그대로 옮기자면, '쓰레기 같은' 기사 두 편이다. 하나는 루마니아에서 드라큘라에 관해 쓴 기사이고, 하나는 쿠알라룸푸르에서 쓴 '개구리전쟁' 기사였다. 개구리전쟁은 개구리들의 영역다툼을 관찰하며 인간의 길흉을 점치는 무당들의 이야기를 담은 기사다. (p.653-655)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립 예정이었던 팔레스타인의 영토에 갑자기 유대인 국가 이스라엘이 들어오면서 팔레스타인 지역을 무력으로 점령해버렸다. 조국을 잃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PLO(팔레스타인 해방기구)를 조직하고 이스라엘에 무장테러를 끊임없이 벌였다. 1982년 이스라엘은 PLO를 지원한다는 이유로 레바논을 침공한다. 이 전쟁을 계기로 레바논에서 대이스라엘 테러단체 '헤즈볼라'가 탄생한다. 이들은 1983년 레바논 주재 미국 대사관을 폭파하고, 베이루트에 평화유지군으로 주둔하던 미군과 프랑스군 막사에 자살폭탄테러를 감행하여 미군 241명과 프랑스군 58명을 몰살시킨 것으로 유명해졌다. 2006년 이스라엘은 헤즈볼라를 소탕하겠다는 명분으로 또다시 레바논을 침공했다. 한편 1987년 가자지구에서 이스라엘에 대항하는 팔레스타인 민중들의 대규모 봉기(인티파다)가 발발하였고 이 사건을 계기로 '하마스'라는 반이스라엘 무장단체가 결성된다. 하마스를 제거하겠다는 명분으로 이스라엘은 2003년, 2012년, 2014년 세 차례 가자지구를 침공하였다. (p.672)

 

 특파원들의 목적의식, 소명의식, 사명감은 기본적으로 사건을 충실하게 전해주는 것, 다시 말해 추후 분석과 토론의 근거가 되는 '사실 기록'을 작성하는 '공정하고 균형 잡힌' 취재에서 시작된다. 어떤 특파원들은 자신의 역할을 '정보를 퍼트림으로써 민주주의에 기여하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앤더슨은 이렇게 말한다.

 꽃을 쫓는 벌처럼 선과 악을 쫓는 기자는 자신의 만족이 아니라 다른 이들을 위해 꽃가루를 퍼트린다.

 레바논에서 앤더슨과 함께 활동했던 영국 《더타임스》의 로버트 피스크 또한 언론의 역할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역사를 직접 두 눈으로 보고… 최대한 정직하게 보도하고… 누구도 '우리는 몰랐다'라고 발뺌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AP 특파원으로 시작하여 《뉴욕타임스》로 자리를 옮겨 시리아 특파원으로 일하다가 2012년에 사망한 베테랑 특파원 앤서니 샤디드는 이렇게 말한다.

 기자는 그저 이야기를 전할 뿐이다.

(p.677-678)

 

 누군지도 모르는 독자들에게 머나먼 타국의 현실을 전달하기 위해 고통과 부상, 심지어 죽음까지 감수해야 하는 상황의 역설은, 바로 그러한 상황에 대해 기자가 어떠한 의견도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아프리카 미술품으로 가득 찬 집에서 만난 도나 브라이슨은 이렇게 말했다.

 독자들에게 사건을 이해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당연히 해야 할 일이지만, 어떻게 판단하고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이야기하는 것은 저널리스트의 역할을 넘어서는 것이죠.

(p.689-690)

 

 40년이 넘는 시간 동안 AP 특파원으로 일한 로젠블럼과 리드는 사람들이 세상사에 얼마나 무신경한지, 또 작은 것 하나라도 바꾸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뼈저리게 깨달았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들은 좌절하지 않고, 그래도 누군가는 세상을 더 잘 이해하고 싶어 할 것이라는 희망으로 유익하고 진실한 기사를 쓰기 위해 노력했다. 로젠블럼은 이렇게 말한다.

 콩고에서 처음 특파원 생활을 시작할 때 나는 세상 물정 모르는 얼간이처럼… 그저 잘못된 것을 기사로 쓰기만 하면 사람들이 바로 이해하고 고칠 것이라고 생각했지.

 이러한 믿음은 비아프라 기근을 취재하는 과정에서 완전히 깨지고 말았다. 기근으로 죽어가는 아이들에 대한 기사를 쓰고, 쓰고, 또 썼지만,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결국 세상 사람들에게 이 사태에 관심을 갖게 만든 것은 본사에서 내려온 사진기자가 찍은 사진 한 장이었다. 그럼에도 로젠블럼은 이렇게 말한다.

 그래도 마음을 써야 하는, 더 중요하고… 가치가 있는 이야기가 세상에는 아직 많이 남아있다고 믿어.

(p.691-692)

 

 보스니아에서 일가족 여섯 명이 점심을 먹고 있다가 포탄이 날아와 즉사한 사건을 취재하기 위해 영안실을 배회하던 알렉산더는 기자로서 비참한 세상에 변화를 이끌어내기 위해 고군분투했지만 '생각했던 만큼 기사의 힘이 크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말한다.

 우리는 폐허가 된 그 집에 들어가서 이것저것 살펴봤어요. 바닥에는 피가 굳어있었죠. 혹시라도 무언가 밟지 않기 위해 조심했어요. 이들 가족의 이야기를 통해 전쟁의 잔혹함을 독자들에게 생생하게 전달하고 싶었죠. 그러던 중 그 집이 공격받았을 때 마침 집에 없어서 화를 면했던 그 집의 큰 딸을 우연히 만났어요. 인터뷰를 하려고 다가갔는데, 아이가 갑자기 소리를 지르더군요. "당신이 뭘 하든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 거야! 이런 일은 계속될 거야. 계속될 거라고!" 나는 어쨌든 기사를 썼고, 그 기사는 거의 관심을 끌지 못했어요… 돌아보면, 내가 너무 열심히 하려고 했던 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해요. 기사를 작성할 때 이 사건에 대한 나의 감상을 박스처럼 삽입했거든요. 그 박스 때문에 기사는 아예 나가지도 못할 뻔했어요.

(p.704)

 

 베트남에서 불발탄이 터져 불구가 된 아이들, 레바논에서 폭격으로 죽은 아이들, 이라크에서 종교적 갈등으로 사람을 산 채로 불에 태운 사건 등을 보도한 특파원들은 자신은 물론 가족에 대한 무차별 비난과 협박을 받기도 하고 기자로서 갖춰야 할 능력과 진실성까지 의심받았다. 그런 상황에서도 인류애에 대한 믿음을 포기하지 않고 진실을 추구한다는 것은 사실, 매우 힘든 일이다.
 미디어에 대한 신뢰가 계속 떨어지고 있지만, 이런 신념을 갖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전문적인 특파원들을 '노트북을 가진 멍청이들'과 구별하지 못한다면, 이들이 생산해낸 기사의 차이를 구별해내지 못한다면, 우리의 미래는 더욱 암울해질 수밖에 없다.
 이 책에 나온 많은 특파원들의 인터뷰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온갖 변수를 극복하고 많은 사람들이 알아야 한다고 여겨지는 중요한 정보를 획득하여, 사람들이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전달할 때 더 흥미롭고, 더 깊이 빠져들 수 있고, 더 많은 사실을 밝혀내고, 더 심오한 이야기가 나온다.

 지금까지 이 책은 해외 특파원들이 지난 80년 간 어떻게 온갖 장애물을 헤치고 뉴스 콘텐츠를 생산해 왔는지 이야기했다. 특파원들이 이 험난한 일을 포기하지 않고 꿋꿋하게 헤쳐나가는 이유는 다음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모든 이들이 거짓말을 하는 상황에서…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최선을 다해 진실을 찾아내 전해주는 사람이 있어야 하지 않겠어?

 우리가 잘 모르는 먼 나라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들의 목소리를 통해 들려줌으로써 서로 이해할 수 있게, 개입할 수 있게 도와주어야 하지 않을까요?

(p.738-7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