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t Read Code

 

아무것도 하지 않는 법 / 제니 오델 / 필로우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 더 힘든 일은 없다. 생산성이 우리의 가치를 결정하는 세계에서 우리의 1분 1초는 매일 사용하는 기술에 의해 포획되거나 최적화되어 경제 자원으로 활용된다. 소셜미디어상의 우리는 기꺼이 자유시간을 수치화하고 알고리즘 형태로 상호작용하며 퍼스널브랜드를 구축한다. 누군가는 자신의 모든 경험을 능률화하고 네트워킹하는 데서 만족감을 느낄 수도 있다. 그러나 외부 자극이 심하고 생각의 흐름이 이어지지 않는다는 불안한 느낌은 사라지지 않는다. 산만한 화면 뒤로 사라지기 전에 이러한 불안감을 간파하기는 쉽지 않다. 그럼에도 이 느낌은 시급하다.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많은 것이 휴대폰 밖의 우연과 방해, 뜻밖의 만남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기계론적 세계관이 없애려 하는 ‘비작동 시간(off time)’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보물섬』의 작가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은 1877년에 이미 바쁨을 ‘활력 부족의 증상’이라 정의하고 “바쁨은 관습적인 일을 할 때를 제외하면 삶을 거의 의식하지 않는 기운 없고 진부한 사람들의 특징”이라고 말했다. 어쨌거나 우리의 삶은 한 번뿐이다. 철학자 세네카는 「인생의 짧음에 관하여」라는 글에서 과거를 돌아보다 삶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갔다는 사실을 깨닫는 공포를 묘사한다. 이는 한 시간 동안 페이스북에 푹 빠져 있다가 막 정신을 차린 사람의 모습과 매우 유사하다.

기억을 돌이켜 생각해보라. 무엇을 잃고 있는지도 모른 채 얼마나 많은 것들을 삶에서 빼앗겼는지, 쓸모없는 슬픔과 어리석은 기쁨, 탐욕스러운 욕망, 사회의 유혹에 얼마나 많은 것을 소진했는지, 진정한 자신의 모습이 얼마나 남아 있는지. 자신의 계절이 오기도 전에 이미 죽어가고 있다는 걸 알게 될 것이다.

 집단으로 넘어가면 이 위험은 더욱 커진다. 우리가 사는 복잡한 시대에는 복잡한 생각과 대화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 복잡한 생각과 대화는 이제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시공간을 필요로 한다. 무한한 연결의 편리함은 얼굴을 맞대고 나누는 대화에서 알아챌 수 있는 미묘한 차이를 아스팔트를 바르듯이 깔끔하게 덮으며 대화 과정에서 나타나는 무수한 정보와 맥락을 잘라냈다. 의사소통이 가로막히고 시간이 곧 돈인 상황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 순간은 많지 않으며, 서로를 발견할 가능성은 더욱 희박하다. (p.15-17)

 

 나는 관심경제에 대한 비판과 생태지역 인식의 가능성을 연결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자본주의와 식민주의적 사고, 외로움, 환경에 대한 폭력적 태도가 전부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또 다른 이유는 경제가 생태계에 미치는 영향과 관심경제가 우리의 관심에 미치는 영향이 유사하다는 데 있다. 두 가지 경우 모두 공격적인 단일 문화로 나아가는 경향이 있으며, 이러한 문화에서는 ‘쓸모없는 것’으로 간주되고 (벌목꾼이나 페이스북이) 활용할 수 없는 요소들이 가장 먼저 사라진다. 이러한 쓸모의 관점은 삶을 원자화, 최적화할 수 있는 것으로 보는 잘못된 이해에서 나온 것이다. 따라서 생태계를 모든 요소가 있어야 제 기능을 하는 살아 있는 전체로 인식하지 못한다. 벌목과 대규모 농업 같은 관행이 땅을 초토화하듯이, 성과에 집착하는 분위기는 한때 개인과 집단의 생각이 풍성하게 자라던 풍경을 더 이상 아무것도 자랄 수 없을 때까지 천천히 땅을 파괴하는 몬산토 농장으로 바꾸어 놓는다. 생각의 종류가 하나씩 멸종할수록 관심의 토양도 점점 더 침식된다. (p.29)

 

 내가 이런 방식으로 작업하는 이유 중 하나는 내가 만들 수 있는 것보다 이미 존재하는 것이 훨씬 흥미롭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실 내게 〈유예된 물건들의 부서〉 프로젝트는 쓰레기장에 있는 멋진 물건들(닌텐도의 파워글러브 게임, 미국 건국 200주년 기념 세븐업 캔, 1906년에 사용한 은행 장부)을 가만히 바라보며 그 물건들이 마땅히 받아야 할 관심을 줄 핑계였다. 이처럼 어떤 대상에 거의 마비에 가까울 만큼 매료되는 현상에 나는 ‘관찰의 에로스’라는 이름을 붙였다. 존 스타인벡의 소설 『통조림공장 골목』 도입부에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나온다. 스타인벡은 표본을 자세히 관찰할 때 필요한 인내심과 세심함을 이렇게 묘사한다.

해양 동물을 수집하다 보면 어떤 편형동물은 워낙 연약해서 건드리면 부서지고 찢어지는 까닭에 온전한 형태로 붙잡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이럴 때는 그 동물들이 자기 의지로 흘러나와 칼날 위로 기어오르게 해야 한다. 그다음에 살짝 들어 올려 해수가 든 병에 집어넣는 것이다. 어쩌면 이 책을 쓰는 방식도 그와 같을지 모른다. 페이지를 펼쳐 이야기들이 스스로 기어오르게 하는 것.

(p.40)

 

 새 관찰은 꽤나 ‘저해상도’였던 내 인식의 입자감을 바꾸어놓았다. 처음에는 그저 더 많은 새소리를 알아차렸다. 물론 새들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었지만, 새소리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하면서 나는 새들이 거의 모든 곳에, 온종일, 언제나 존재한다는 사실을 새롭게 깨달았다. 그 이후 소리를 하나씩 배우며 그 소리를 새와 연결해 나갔고, 이제는 장미 정원으로 걸어 들어갈 때 새들이 마치 사람인 양 머릿속에서 무심코 알은체를 한다. ‘안녕, 큰까마귀야, 울새야, 멧종다리야, 박새야, 황금방울새야, 검은멧새야, 매야, 동고비야….’ 지금은 새들의 울음소리가 익숙해져서 어떤 새인지 알아내려고 안간힘을 쓸 필요가 없다. 이제 내게 새소리는 마치 사람의 언어처럼 입력된다. 성인이 된 후 외국어를 배워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이야기가 낯설지 않을 것이다. 실제로 한때는 그저 ‘새소리’였던 것이 내게 의미 있는 별개의 소리로 분화된 과정은 나의 어머니가 두 가지 언어가 아니라 세 가지 언어를 말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순간과 매우 유사하다. (p.44-45)

 

 알고 보니 나의 아버지도 개인적인 퇴거의 시간을 경험했다. 아버지가 지금 내 나이였을 무렵 베이 지역에서 기술자로 일하고 있을 때였다. 아버지는 하던 일에 진저리가 났고 허리띠를 졸라매면 당분간 일을 하지 않아도 될 만큼 돈을 모았다고 판단했다. ‘당분간’은 결국 2년이 되었다. 2년 동안 무엇을 했느냐고 물으니 아버지는 책을 많이 읽고 수학과 전자공학을 공부하고 자전거를 타고 낚시를 가고 친구와 오랫동안 수다를 떨고 언덕에 앉아 혼자 플루트를 익혔다고 대답했다. 그러다 일과 외부 환경을 향한 분노가 사실은 자기 자신과 관련된 문제임을 깨달았다. 아버지는 이렇게 말했다. “초라한 나와 직면하게 되는 그 순간을 견뎌야 해.” 그러나 그 시기에 아버지는 창조성과 열린 상태, 어쩌면 그에 필요한 지루함과 무(無)를 배웠을 것이다. 코미디 집단 몬티 파이선의 존 클리즈가 1991년에 했던 창조성에 관한 강연이 떠오른다. 그때 클리즈가 말한 창조성의 필수 요소 다섯 가지 중 두 가지는 시간이었다.
  1. 공간
  2. 시간
  3. 시간
  4. 자신감
  5. 유머
 이 열린 시간의 끝에 아버지는 다시 일자리를 찾기로 했고, 원래 다니던 직장이 사실은 썩 괜찮은 곳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운 좋게도 그 직장에서 아버지를 흔쾌히 다시 받아주었다. 그러나 아버지가 자신의 창조성에 무엇이 필요한지를 깨달은 뒤였기에 상황은 전과 같지 않았다. 새로 생긴 에너지와 달라진 시각으로 아버지는 기술자에서 전문 엔지니어가 되었고, 지금까지 열두 개의 특허를 신청했다. 아버지는 지금도 한동안 자전거를 탄 뒤 언덕 꼭대기에 앉아 있을 때 가장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른다고 말한다.
 나는 이 이야기를 듣고 어쩌면 외부에서 늘어난 관심의 입자가 우리의 내부로 확장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우리가 더 치밀하게 인식한 주위 환경이 놀라운 방식으로 눈앞에 펼쳐지듯이, 우리 자신의 복잡함과 모순도 그러할 수 있다. 아버지는 일이라는 한정된 맥락을 벗어나자 일이 아닌 세상 자체를 배경으로 자신을 이해하게 되었고, 그 이후로는 직장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훨씬 커다란 것의 일부로 보였다고 말했다. (p.48-49)

 

 하루 여덟 시간 노동이 보장되기 수십 년 전인 1886년, 미국의 노동자들은 ‘여덟 시간의 노동과 여덟 시간의 휴식, 여덟 시간의 우리가 하고자 하는 일’이라는 슬로건을 들고 나섰다. 노동조합연맹(Organized Trade and Labor Unions)이 제시한 유명한 그림은 이 신조를 잘 보여준다. 하루를 세 칸으로 나눈 이 그림의 첫째 칸에는 직물공이 자기 위치에서 일을 하고 있고, 둘째 칸에는 한 사람이 담요 밑으로 삐죽 발을 내밀고 잠을 자고 있으며, 셋째 칸에는 한 커플이 호수에서 보트를 타며 조합 신문을 읽고 있다.
 이 운동에는 독자적인 노래도 있었다.

더 이상 이렇게 일하지 않을 거라네
보람 없는 고된 노동에 진절머리가 난다네
근근이 살아갈 만큼 겨우 벌면서
생각할 여유가 한 시간조차 없다네

우리도 햇살을 느끼고 싶고
우리도 꽃향기를 맡고 싶다네
이는 분명 하느님의 뜻이거늘
우리는 여덟 시간만 일할 거라네

우리는 조선소와 가게, 공장에서
힘을 모아왔다네
여덟 시간의 노동과 여덟 시간의 휴식
여덟 시간의 우리가 하고자 하는 일을 위하여

 여기서 ‘우리가 하고자 하는 일’의 범주에 속한 것들이 인상적이다. 휴식과 생각, 꽃, 햇살. 이것들은 신체와 관련된 인간적인 것이며, 이 신체성에 관해서는 뒤에서 다시 다룰 것이다. 1886년의 여덟 시간 노동운동을 조직한 노동조합연맹 지도자 새뮤얼 곰퍼스는 「노동은 무엇을 원하는가?」라는 연설에서 “노동은 땅과, 땅의 충만감을 원한다”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지점은 이들이 원하는 것이 여덟 시간의 여가나 교육이 아니라, 여덟 시간의 ‘우리가 하고자 하는 일’이라는 사실이다. 하고자 하는 일에 여가나 교육이 포함될 수도 있지만, 이 시간을 설명하는 가장 적절한 방법은 그 내용을 규정하길 거부하는 것이다. (p.50-52)

 

 장미 정원은 공공장소다. 이 공간은 1930년대에 공공사업진흥국이 주도한 프로젝트였으며, 다른 프로젝트와 마찬가지로 대공황 당시 연방정부에서 고용한 사람들이 지었다. 나는 정원의 품위 있는 구조를 볼 때마다 그 시작을 떠올린다. 공익적 가치가 높은 이 장미 정원은 그 자체로 공익적인 프로그램의 결과로 탄생했다. 그러나 장미 정원이 위치한 지역이 1970년대에 콘도 부지로 변할 뻔했다는 사실을 최근에 알고 나서도 나는 그리 놀라지 않았다. 오싹하긴 했지만, 놀라지는 않았다. 또한 이 지역이 콘도로 변하는 것을 막기 위해 지역 주민이 힘을 합쳐 대지의 용도를 변경했다는 사실을 알고도 그리 놀라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런 종류의 일은 늘 일어나기 때문이다. 상업적으로 생산성이 없다고 간주되는 공간들은 언제나 위협받는다. 이러한 공간들이 ‘생산’하는 것은 측정하거나 활용할 수 없고, 심지어 파악조차 힘들기 때문이다. 그 지역에 사는 모든 사람이 이 정원의 어마어마한 가치에 대해 말한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요즘에는 우리의 시간을 두고 이와 유사한 싸움이 벌어지고 있다. 생산성과 효율이라는 자본주의적 개념이 우리 자신을 식민지로 삼는다. 누군가는 자신의 공원과 도서관이 늘 콘도로 바뀔 위협에 처해 있다고 말할는지도 모른다. 마르크스주의 이론가인 프랑코 ‘비포’ 베라르디는 저서 『미래 이후』에서 1980년대 노동운동의 패배를 ‘우리 모두 사업가가 되어야 한다’는 개념의 등장과 연결 짓는다. 그는 과거에는 경제적 위험이 자본가나 투자자의 몫이었지만, 오늘날의 상황은 다르다고 말한다. “이제 우리 모두가 자본가다. (…) 그러므로 우리 모두가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 그 개념의 본질은 우리 모두가 삶을 위험성 있는 경제 사업으로, 승자와 패자가 있는 경쟁으로 여겨야 한다는 것이다.” (p.53-54)

 

 노동자에게 경제적 안정이 사라지자 여덟 시간의 노동, 여덟 시간의 휴식, 여덟 시간의 우리가 하고자 하는 일의 경계가 무너졌고, 우리에게는 시간대나 수면 주기와 상관없이 언제나 현금화할 수 있는 24시간만이 남았다.
 깨어 있는 내내 생계를 위해 일할 수 있게 된 상황에서, 여가 시간까지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의 ‘좋아요’ 숫자로 수치화된다. 재고를 확인하듯 수시로 자신의 성과를 확인하고 퍼스널브랜드의 발전 과정을 감시할 때, 시간은 경제적 자원이 된다. 더 이상 ‘아무것도 아닌 것’에 쓰는 시간을 정당화할 수 없다. 아무것도 아닌 것은 투자 대비 수익이 전혀 없다. 너무나도 사치스러운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시간과 공간의 잔인한 교차점이다. 비영리 공간이 사라지듯이 우리도 자신의 모든 시간과 행동을 잠재적 돈벌이 수단으로 여긴다. 공공장소가 공공인 척하는 소매점이나 기업이 민영화한 수상한 공원에 자리를 내어주듯이 우리도 손상된 여가 개념을 주입받는다. 이는 ‘우리가 하고자 하는 일’과는 완전히 다른 형태의 ‘유료’ 여가다. (p.55)

 

 봉사자들이 잡초를 뽑고 호스를 정리하는 모습을 보면 예술가 미얼 래더맨 유켈리스가 떠오른다. 유켈리스의 잘 알려진 작품으로는 워즈워스 애서니엄 미술관의 계단을 청소하는 퍼포먼스 〈닦기/자국/유지: 실외(Washing/Tracks/Maintenance: Outside)〉와, 11개월 동안 뉴욕시 환경미화원 8,500명과 악수를 나누며 감사를 전하고 인터뷰를 한 〈터치 새니테이션 퍼포먼스(Touch Sanitation Performance)〉가 있다. 실제로 유켈리스는 1977년부터 뉴욕시 위생국의 평생 상주 예술가로 활동하고 있다.
 유켈리스가 유지 작업에 관심을 두게 된 것은 어머니가 된 1960년대였다. 한 인터뷰에서 유켈리스는 이렇게 설명했다. “누군가의 엄마로 사는 데에는 엄청난 양의 반복 작업이 수반된다. 나는 유지 노동자가 되었다. 그리고 내가 속한 문화권에서 완전히 버려졌다고 느꼈다. 우리 문화에는 유지 노동을 인정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1969년 유켈리스는 자신의 유지 노동을 예술로 간주하는 전시 계획인 ‘유지 예술 선언문’을 썼다. “나는 전시 기간 동안 미술관에 머물며 내가 집에서 남편과 아기를 위해 늘 하는 일을 할 것이다. (…) 나의 노동이 곧 작품이 될 것이다.” (p.70-71)

 

 동족을 위한 돌봄과 유지 작업에 대해 생각하다 보면 내가 무척 아끼는 책 『이 폐허를 응시하라』가 떠오른다. 저자 리베카 솔닛은 재난을 겪은 사람들이 악에 받쳐 이기적으로 변한다는 근거 없는 믿음을 깨부순다. 1906년의 샌프란시스코 지진과 허리케인 카트리나를 비롯한 여러 사례를 통해 솔닛은 암울한 환경에서 피어난 놀라운 기지와 공감 능력, 심지어 유머 감각에 대해 상세히 풀어놓는다. 솔닛과 인터뷰한 많은 사람이 재난 발생 직후 이웃과 함께 나눈 목적의식과 유대감에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향수를 느낀다고 말한다. 솔닛은 우리를 서로와, 또 우리 안의 보호 본능과 갈라놓는 일상생활이야말로 진정한 재난임을 보여준다. (p.73)

 

 아렌트의 말처럼 정치에서의 도피가 구체적으로 피하고자 하는 것은 ‘행위자의 다원성’에서 비롯되는 ‘예측 불가능성’이다. 플라톤의 도시를 몰락하게 하는 것 또한 실재하는 사람들에게서 결코 제거할 수 없는 다원성이다. 아렌트는 통찰력 있는 계획도 현실의 무게를 견뎌내지 못한다고 말하는데, 여기서 현실이란 ‘외부 환경이 아니라 통제 불가능한 인간관계’를 의미한다. 심리학 교수 수전 X. 데이는 『스키너의 월든 투』에 관한 글에서 이 소설에 비현실적일 만큼 친구나 연인 관계가 부재하다고 말한다. 인간뿐 아니라 모든 동물들 사이에서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유대 관계는 ‘개인의 차별화에 반드시 따라오는 것’인데도 말이다. 스키너가 소설을 쓸 때 다원성 문제로 씨름했다는 사실은 월든 투의 모든 구성원이 백인이자 이성애자라는 점뿐 아니라, 스키너가 처음에는 인종에 관한 장을 썼다가 빼기로 했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다. 개인 간의 차이와 연대가 기억과 힘을 합쳐(누군가가 역사책을 밀반입할지도 모른다) 무서운 정치적 행위로 이어지고, 월든 투라는 과학 실험에 균열을 일으킬 것을 어렵지 않게 예측할 수 있다.
 프레이저가 파시즘이라는 비난에 대한 무언의 항변으로 제시한 목가적인 장면처럼, 틸의 ‘정치에서의 도피’는 시간과 현실 바깥에 존재하는 이미지 이상이 될 수 없다. 이 계획을 ‘평화로운 프로젝트’라 칭한다면 평화는 누군가가 조작할 수 없는 자유의지를 가진 행위자들 간의 끝없는 협상의 결과라는 사실을 회피하는 것이다. 자유의지를 지닌 개인이 단 두 명만 있어도 정치 행위는 필연적으로 나타난다. 정치를 디자인으로 대체하려는 모든 시도(틸의 ‘자유기구’)는 사람들을 기계 또는 기계적 존재로 축소한다. 그러므로 틸이 ‘자유를 위한 새로운 공간을 창조할 수 있는 신기술’을 말할 때, 내 귀에는 프레이저의 말이 메아리가 되어 돌아온다. “사람들의 행동은 미리 결정되어 있지만, 그래도 저들은 자유롭습니다.” (p.109-110)

 

 내가 도망치고 싶은 것은 이런 것들이다. 최근 몇 년간 가장 우려되는 소셜미디어의 사용 방식 중 하나는 뉴스 미디어와 사용자들이 피드에서 히스테리와 두려움의 파도를 일으키는 것이다. 사람들은 끝없는 광란의 상태에 빠져 뉴스 사이클을 만들어내고 자발적으로 그 사이클의 지배를 받는다. 불안을 호소하고, 동시에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발 빠르게 뉴스를 확인한다. 광고와 클릭의 논리에 따라 미디어 경험이 결정되고, 플랫폼 디자인이 이 경험을 착취한다. 뒤처지지 않으려고 애쓰는 미디어 기업들은 일종의 ‘속보 경쟁’을 벌이고, 이 경쟁이 우리의 관심을 악용해 생각할 시간을 모조리 빼앗아간다. 군대에서 포로를 고문할 때 사용하는 수면 박탈 전략과 유사한데, 그보다 규모가 훨씬 더 크다. 2017년과 2018년에 나는 너무나도 많은 사람에게서 “매일 새로운 일들이 터져”라는 말을 들었다. (p.120)

 

 이 사실을 알기에 내 수업이 배운 내용을 쉽게 써먹을 수 없다는 점에서 실용적이지 않다는 데 학생들이 불만을 가져도 이해할 수 있다. 나는 이것이 학생들의 상상력이 부족해서 나타나는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감히 추측하건대 이건 매 순간이 돈 되는 일자리를 얻기 위한 준비 과정이어야 한다는 냉혹한 진실을 인지하고 있는 것에 가깝다. 어린 시절과 교육의 무자비한 전문화를 다룬 책 『밀레니얼 선언』에서 저자 맬컴 해리스는 “만약 대다수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살기 시작한다면 밤늦게까지 일하는 것은 남보다 유리해지기 위한 행동이 아니라 취약해지지 않기 위한 행동이 된다”고 말한다. 본인 역시 밀레니얼인 해리스는 사회적 위험이 잠재적 피고용인인 학생들에게 전가되었다고 주장한다. 이제 학생들은 언제나 접속 상태고, 늘 시간이 있으며, 수면 등의 기본 욕구를 포기할 ‘혁신적인’ 방법을 찾는, 대단히 생산적인 ‘기업가’가 되어야 한다. 학생들은 복잡한 책략을 제때 능숙하게 실행한다. 이때 한 번이라도 발을 삐끗하면(그게 성적에서 B를 받는 일이든 시위에 참여했다가 체포되는 일이든) 평생 돌이킬 수 없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관심의 맥락에서 나는 이러한 두려움이 청년들에게서 개인적으로나 집단적으로나 집중할 수 있는 능력을 빼앗는다고 생각한다. 원자화된 경쟁적 환경이 개인의 관심을 방해하는 이유는, 안정성을 두고 다투는 끔찍하고 근시안적인 전쟁에서는 안정성을 제외한 모든 것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또한 이러한 환경이 집단적 관심을 방해하는 이유는 학생들이 자신의 경계 안에 갇혀 각개전투를 벌이거나, 더 나쁘면 서로 치열하게 경쟁하게 되기 때문이다. 『밀레니얼 선언』에서 해리스는 경제적 불안정이 밀레니얼의 조직화에 미칠 영향을 지적한다. “만약 우리가 작디작은 우위를 점하기 위해 서로 싸운다면, 집단의 이익이 아닌 고용주라는 소규모 계층의 이익을 위해 협력한다면(이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우리는 더 거대한 제도적 폐해에 맞서 자신을 보호할 능력을 잃게 될 것이다.” (p.164-165)

 

 드영 미술관에서 〈일곱 개의 요크셔 풍경〉에 관해 강연할 때 도슨트들이 내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이 작품을 본 관람객 중에 전시장을 나갔다가 다시 돌아와서 “이제 바깥에 있는 모든 것이 이전과 달리 보인다”고 말한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드영 미술관은 샌프란시스코 식물원과 멀지 않은 곳에 있다. 미술관에서 바로 식물원으로 이동한 사람들은 호크니의 작품이 특정한 방식으로, 즉 아주 천천히, 하나하나 그 질감을 느끼며 세상을 바라보도록 자신을 훈련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들은 만화경 같은 아름다움 속에서 식물원을 새롭게 바라본 것이다.
 보는 것을 ‘적극적 행위’로 정의한 호크니가 이 이야기를 들었다면 아마 기뻐했을 것이다. 그에게 보는 행위는 사람들이 좀처럼 연습하지 않는 하나의 기술이자 의식적 결정이다. 우리가 기꺼이 보려고 하고, 우리에게 볼 능력이 있을 때에만 이 세상에는 ‘볼 것이 정말 많다’. 이런 면에서 호크니와 다른 수많은 예술가는 우리에게 일종의 관심의 의족을 제공한다. 그 배경에는 가까운 곳에 있는 익숙한 환경도 우리가 미술관에서 보는 신성한 작품만큼 관심을 기울일 가치가 있다는 생각이 깔려 있다. (p.184-185)

 

 그러나 실제 공연에서 케이지의 곡을 감상한 적은 없었고, 하물며 내가 보러 간 것은 평범한 관객이 있는 전통적인 심포니 공연이었다. 무대 위의 사람들은 관례대로 검은 옷을 입고 줄지어 앉아 있는 대신 평상복을 입고 타자기와 카드, 블렌더 같은 여러 소품을 옮기고 있었다. 세 보컬리스트는 기괴하고 으스스한 소리를 냈고, 한 사람은 마이크에 대고 카드를 섞었으며 또 다른 사람은 객석으로 걸어 들어가서 선물을 나누어 줬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어떤 식으로든 작품의 일부였다. 케이지의 곡을 연주하는 많은 공연에서 마찬가지일 듯한데 관객들은 자리에서 몸을 달싹이며 웃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공연장에서 웃는 것은 부적절한 행동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샌프란시스코 심포니의 지휘자 마이클 틸슨 토머스가 블렌더로 스무디를 만들자 관객들은 한계에 도달했다. 토머스는 스무디를 한 모금 마시고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 이후 관객들의 노력은 전부 물거품이 되었고, 객석에서 터져 나온 웃음이 무대로 굴러가며 작품의 일부가 되었다.
 그날 밤 부서져 열린 것은 심포니홀 공연의 관습만이 아니었다. 심포니홀에서 나와 버스를 타려고 그로브가로 걸어가는데, 모든 소리가 전에 없이 선명하게 들렸다. 자동차 소리와 발소리, 바람 소리, 전기버스 소리. 아니, 그날 이 소리를 더 선명하게 들었다기보다는 처음으로 이 소리를 들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나는 궁금했다. 4년이나 이 동네에 살았는데, 심지어 심포니홀에서 공연을 보고 이 길을 걸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닌데, 어떻게 이 소리를 한 번도 듣지 못했을까? (p.186-187)

 

 내가 새에게 먹이를 준다는 걸 알았던 숍타는 ‘위험에 처한 듯 조심스럽게’가 새를 가리킬 수도 있고 빵 부스러기를 주는 화자를 가리킬 수도 있는 위치에 있음을 지적해주었다. 이 말을 하면서 숍타는 우리 집 발코니를 찾아온 겁 많은 크로우와 크로우선에게 땅콩을 들고 다가갈 때 내가 어떻게 보일지 생각해보라고 했다.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는데 그러고 보니 까마귀와 내가 둘 다 ‘위험에 처한 듯 조심스럽게’, 거의 얼어붙은 것처럼, 서로에게 완전히 집중해서, 서로의 작디작은 움직임에 영향을 받고 그에 따라 행동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게다가 같은 까마귀를 수년간 관찰한 후에도 까마귀들의 행동은(무작위로 움직이는 듯한 디킨슨의 시 속 새처럼) 결국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영역 바깥에 있다(그만큼 까마귀들도 내 행동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디킨슨의 새가 ‘사뿐히 노 저어’ 우리가 알지 못하는 ‘집’으로 날아가는 것처럼, 새는 내려앉을 때만큼이나 갑작스럽고 격식 없이 하늘로 떠나간다. 이만큼 통렬하게 나의 세계 바깥에 무언가가 존재하고 있음을 가리키는 것은 없다. 이 모든 것이 ‘이해’나 ‘해석’(나-그것)이 불가능한 존재, 오로지 ‘인식’(나-너)만이 가능한 존재를 만든다. 그리고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변함없는 순수한 관심과 지속적인 만남을 요구한다. (p.193)

 

 최근 이러한 종류의 만남이 실제로 내 발길을 붙잡았다. 나는 샌프란시스코 현대미술관에서 미팅을 앞두고 시간을 때울 겸 여러 층을 돌아다니다 〈미국 추상주의에 다가가기(Approaching American Abstraction)〉 전시에 이르렀다. 모퉁이를 돌자 엘스워스 켈리의 〈파랑 초록 검정 빨강(Blue Green Black Red)〉이 보였다. 정확히 제목 그대로 나만 한 크기의 패널 네 개에 각 색깔이 칠해져 있는 작품이다. 처음에는 이 작품이 추상(그 뜻이 뭐든) 외의 무언가에 ‘관한’ 것이라 생각하지 못하고 빠르게 지나치려 했다. 그러나 첫 번째 패널에 가까이 다가가자 밀려드는 신체적 감각에 완전히 허를 찔렸다. 칠은 균일하고 평면적이었으나 파란색은 전혀 차분하지 않았다. 파란색은 진동하며 여러 방향에서 내 시야를 밀고 잡아당기는 것 같았다. 작품에 활기가 있어 보인다는 말 외에 더 나은 표현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것이 신체적 느낌이라는 사실은 너무나 명백했다. 부버가 말한 나무처럼 그 작품도 내 앞에서 ‘몸했다’. 나는 똑같은 시간을 들여 패널 하나하나를 들여다봐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모든 색깔이 서로 다르게 진동했고, 더 정확히 말하면 각 색깔에 대한 나의 인식이 서로 다르게 진동했기 때문이었다. 평면적인 단색의 작품을 ‘시간에 기반한 매개체’라 칭하는 것이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실제로 패널 하나하나에는 (또는 각 패널과 나 사이에는) 발견할 것들이 있었고 그 앞에서 시간을 보낼수록 더 많은 것을 발견했다. 다소 멋쩍어진 나는 저 멀리에 있어서 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해졌다. 나는 ‘아무것도 없는’ 패널을 빤히 들여다보는 사람처럼 보였을 것이다.
 이 작품은 내게 관심의 깊이와 관심의 지속 시간의 관계에 대해 알려주었고, 어떻게, 얼마나 오래 보는지에 따라 보는 내용이 달라진다는 사실을 일깨워주었다. 이는 숨 쉬는 것과 매우 유사하다. 특정한 관심은 늘 존재하지만 우리가 그 관심을 붙잡으면 의식적으로 관심의 방향을 결정하고 확장하고 축소할 수 있게 된다. 나는 신경 쓰지 않을 때 나의 관심과 호흡이 얼마나 얕은지를 느끼고 종종 놀란다. 숨을 깊게 잘 쉬려면 호흡을 상기시킬 장치와 훈련이 필요하듯이, 내가 지금까지 설명한 모든 예술 작품들 역시 관심의 훈련 장치로 여길 수 있다. 이 작품들은 평소와는 다른 규모와 속도로 인식할 것을 요구함으로써 관심을 지속하는 방법과 서로 다른 항목 사이에서 관심을 이리저리 옮기는 방법을 가르쳐준다. 이는 그 자체로 즐거운 일이다. 나아가 우리가 보는 것이 우리 행동의 기반이라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관심의 방향을 결정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더욱 분명해진다. (p.195-196)

 

 (잘 쓴 시간 캠페인의) 기술 윤리학자 제임스 윌리엄스는 옥스퍼드 대학교의 ‘실천윤리’ 블로그에 쓴 광고 차단 프로그램에 관한 글에서 우리가 지불해야 할 대가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우리는 관심경제의 외부 효과를 똑똑 떨어지는 물방울처럼 아주 조금씩 경험하기 때문에, 이 상황을 ‘거슬린다’거나 ‘산만하다’처럼 가벼운 곤혹스러움을 나타내는 단어로 표현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는 관심경제의 특성을 심각하게 오해한 것이다. 우리의 정신을 산만하게 만드는 것들은 단기적으로는 단지 우리가 원하는 것만을 하지 못하게 만든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이 시간이 점점 축적되면 우리가 원하는 삶을 살지 못하게 되고, 더 나아가서는 자신을 통제하고 성찰할 능력을 잃게 된다. 결과적으로 해리 프랑크푸르트의 말처럼 ‘우리가 원하고 싶은 것을 원하는 것’이 어려워질 수 있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자유와 안위, 심지어 온전한 자아에 대한 깊은 윤리적 함의가 숨어 있다.

(p.204)

 

 그저 관심경제에 저항하기보다는 관심의 깊이를 더욱더 깊게 만들어야 할 또 다른 이유가 있다. 그 이유는 우리가 관심을 기울이거나 기울이지 않는 것이 우리 현실을 만들어내는 매우 실질적인 방식과 관련이 있다. 어떤 ‘자료’가 주어졌을 때 우리는 과거의 경험과 자신의 추측을 토대로 결론을 끌어낸다. 편견연구소에 관한 노델의 글에서, 사회심리학자 에벌린 R. 카터는 다수에 속한 사람과 소수에 속한 사람은 (자신이 알아차리거나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을 토대로) 서로 다른 두 개의 현실을 본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백인은 인종차별적 발언만 들을 수 있지만, 유색인은 버스에서 누군가가 몸을 살짝 옆으로 피하는 것 같은 더 미묘한 행동을 알아차릴 수 있다.” (p.213)

 

 인생 대부분을 뮤지션으로 살아온 나의 아버지는 바로 그것이 좋은 음악의 정의라고 말한다. 좋은 음악은 ‘나에게 몰래 다가와’ 나를 변화시키는 음악이다. 내가 알지 못하는 방식으로 나를 변화시킬 만남을 위한 공간을 마련해둘 수 있다면, 우리 모두 자신의 이해를 넘어서는 힘들의 집합체라는 사실 또한 인정할 수 있다. 여기서 뜻밖에 마음에 드는 음악을 들을 때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나를 통해 내가 모르는 무언가에게 말을 거는 듯한 느낌을 받는 이유를 알 수 있다. 안정적이고 뚜렷한 자아를 중요시하는 사람은 이를 인정하기 힘들 것이다. 그러나 나는 원자적 자아 개념을 버린 뒤 이러한 내려놓음이 내가 살아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가장 확실한 지표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와 달리 무언가를 향해 ‘곧장 나아가는’, 기술적으로 훌륭한 알고리즘은 내가 좋아하는 것과 그 이유에 대해 늘 안정적인 답안을 제공한다. 그리하여 하나의 이미지로 나를 점점 파묻어버리는 것 같다. 사업의 관점에서 보면 당연한 일이다. 광고와 퍼스널브랜드의 언어가 ‘너 자신이 되라’고 요구할 때, 그 속에는 ‘더더욱 너 자신이 되어라’는 진짜 의미가 담겨 있다. 여기서 ‘너 자신’은 습관과 욕망, 동기로 이루어진 일관적이고 인식 가능한 패턴이며, 이러한 패턴은 더 쉽게 광고의 타깃으로 이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나는 퍼스널브랜드가 애매모호함이나 모순의 여지없이 ‘나 이거 좋아’, ‘나 이거 싫어’라고 결론 내리는 성급한 판단에서 나온 확실하고 변함없는 패턴이 아니면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더 구체적인 버전의 ‘나 자신’이 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생각해보면, 소로가 「시민 불복종의 의무」에서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을 본질적으로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자로 묘사한 것이 떠오른다. 만약 나 자신이 원하고 좋아하는 것을 내가 전부 안다면(이 모든 것이 미래로 끝없이 이어져, 나의 정체성이나 내가 나라고 지칭하는 것의 경계가 그 어떤 위협도 받지 않는다고 상상해보자) 나는 계속 살아갈 이유가 없다고 말할 것이다. 만약 우리가 책을 읽는데 갈수록 내용이 앞과 비슷해져서 결국 똑같은 내용을 반복해서 읽게 된다면 아마 그 책을 덮어버릴 것이다.
 이 내용을 낯선 이들의 영역으로 확대해보자. 우리가 현실의 교류를 이미 규정지어놓은 나의 정체성 안에서만 이어간다면 놀라거나 도전받거나 변화할 수 있는 계기도 사라질 것이다. 또한 본인이 가진 특권을 포함한 자기 자신의 바깥에서는 아무것도 보지 못할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공통점이 많은 사람에게 배울 것이 없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그 작은 파편 바깥으로 관심을 확장하지 않으면 상대의 가치나 나와의 관계 외에는 아무 의미도 없는 ‘나-그것’의 세계에 살게 된다. 그렇게 되면 나를 뒤집어엎고 나의 우주를 새로 구축할 사람, 나를 크게 변화시킬 사람과 만날 가능성도 줄어들 것이다. (p.239-241)

 

 자신을 독립적이고 방어 가능하며 ‘효율적’인 무엇으로 여기는 마음이 특히 비극적인 이유는 그러한 마음이 매우 지겨운(그리고 지겨워하는) 사람을 낳기 때문만은 아니다. 자신이 타인을 포함한 이 세상과 분리된 존재라는 생각이 완벽한 착오이기 때문에 이 마음은 더욱 비극적이다. 물론 이것은 안정감과 차별성을 갈구하는 매우 인간적인 갈망의 당연한 결과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나는 이 욕망이 아이러니하게도 변화에 대한 두려움, 시간과 가치를 평가하는 자본주의적 개념, 언젠가는 죽게 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무능력 같은, 상상 속 자아의 안팎에 있는 여러 힘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나온다고 본다. 그리고 이 욕망은 통제 욕구에 관한 것이기도 하다. 우리가 경험하는 자아가 온전히 타인에게 달려 있으며, 나의 본질이 아닌 타인과 나의 관계로 결정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어렵다.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정체성 개념과 중립적이고 비정치적인 존재 개념(젠트리피케이션에 수반되는 믿음)까지 포기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타인과의 교류에서 나오는 유동적 산물인지 아닌지는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유일한 선택지는 이러한 현실을 인정하느냐 마느냐다. (p.242-243)

 

 데이비드 어브램은 『동물 되기』에서 우리가 우리를 제외한 나머지 세상을 살아 있지 않은 것처럼 대하고 생각할 때 무엇을 잃게 되는지 설명한다.

만약 우리가 특정 대상을 타성적이고 생기 없는 물체로 대하고 생각한다면 우리와 적극적으로 관계를 맺고 상호작용할 수 있는 그들의 능력을 부정하는 것이다. 우리의 관심에 화답하고, 우리를 말 없는 대화에 끌어들이고, 우리를 교육하고, 우리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그들의 능력을 배제하는 것이다.

(p.252)

 

 먼저 즉각적인 의사소통은 중요한 정보를 눈에 잘 띄지 않게 만든다. 아무도 그 속도를 따라갈 수 없는 정보의 과부하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바라시는 활동가들이 “정보의 속도에 적응하며 끊임없이 콘텐츠를 만들어내야 한다”고 말한다. 정보의 과부하는 사람들이 아무것도 듣지 못할 수 있는 위험을 일으킨다. 바라시는 스페인의 환경단체연합 에콜로히스타스 엔 악시온의 한 활동가가 한 말을 인용한다.

모두가 인터넷에는 검열이 없다고, 있다 해도 부분적일 뿐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건 사실이 아니다. 온라인의 검열은 중대하거나 집단적인 문제에서 사람들의 관심을 다른 데로 돌리는 시시한 콘텐츠의 과잉을 통해 이루어진다.

 또한 소셜미디어의 즉각성은 ‘정치적 정교화’에 필요한 시간을 앗아간다. 온라인에 공유하는 콘텐츠는 반드시 시선을 잡아끌어야 하기에 활동가에게는 자신의 정치적 생각을 분명하게 표현할 시간과 공간이 없다. 바라시와 인터뷰를 한 활동가들은 “소셜미디어는 의사소통이 워낙 빠르고 신속하며 짧기 때문에 정치적 논의와 정교화에 적합한 공간이 아니다”라고 거듭 말한다. 한 활동가는 사람들에게 아이디어의 맥락을 설명하는 데 필요한 시간과 공간이 부재한다고 불만을 표한다. 바라시는 활동가들이 만드는 잡지나 대면 집단토론 같은 덜 즉각적인 채널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맥락이 드러난다고 말한다.
 마지막으로 즉각성이 만들어내는 ‘느슨한 유대’가 정치 활동을 위협한다. 바라시의 연구는 소셜미디어에서 구축된 네트워크가 ‘함께 공유하는 정치적 목표나 사회적 갈등에 대한 이해가 아닌, 공통의 반응이나 감정에 기초’한다는 점을 보여준다. 바라시는 강력한 연대와 정교하게 다듬은 정치적 목표는 여전히 현장에서의 행동, 대면한 상태에서의 상호작용과 토론, 숙고, 대립에서 나온다고 말한다. (p.280-281)

 

 생긴지 얼마 안 된 탈중앙적 네트워크 스커틀벗(Scuttlebutt)을 다룬 《애틀랜틱》 사설에서, 이언 보고스트는 이 터무니없는 상황에 대한 이미지를 하나 제시한다. “페이스북과 트위터가 잡담을 나눌 수 있는 휴게실이라면, 전 세계 모든 직장에 잡담을 나눌 수 있는 단 하나의 거대한 휴게실이 있는 것과 같다.” 이 표준 규격 휴게실에 대한 불만이 탈중앙화 웹으로 향하는 움직임을 일으켰다. 탈중앙화 웹은 사기업과 사설 서버 대신 피어투피어 네트워크와 오픈소스 소프트웨어를 이용한다. 그 목표는 사용자가 자기 데이터를 직접 소유하게 하고 그 데이터와 소프트웨어를 사용 지점에 더 가깝게 이동시키는 것이다. 예를 들면 마스토돈은 여러 ‘인스턴스’들로 이루어진 연합 소셜 네트워크로, 각각의 인스턴스는 커뮤니티에서 직접 운영하는 서버 위에서 무료 소프트웨어를 사용하며, 그렇더라도 사용자는 다른 인스턴스의 사용자들과 소통할 수 있다. 마스토돈의 개발자가 지적하듯이 마스토돈은 절대로 파산하거나 팔리거나 정부가 차단할 수 없는데, 오로지 오픈소스 소프트웨어로만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탈중앙화 네트워크의 분산적 연결이 다시 건강한 맥락을 도입할 수 있으리라는 걸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다. 예를 들면 마스토돈에서는 누구나 인스턴스를 만들고 참여 규칙을 직접 정할 수 있다. (이러한 이유로 LGBT와 논바이너리를 비롯해 그동안 종종 괴롭힘의 대상이 된 커뮤니티들이 마스토돈에 모여들었다.) 이를 통해 사용자는 자신이 원하는 청중을 미세하게 제어할 수 있다. (p.290-291)

 

 무슨 까닭인지 나는 공원이 그냥 ‘남겨진’ 공간이라고 생각하며 자랐으나, 모든 공원과 보호구역의 역사는 ‘연이은 재앙의 작은 틈 속에서 버틴 구원’의 이야기임을 알게 되었다. 너무나도 많은 공원이 사유와 민간 개발의 끊임없는 공격에서 적극적으로 보호되었고, 많은 곳이 그 장소를 지키기 위해 싸운 진취적 개인의 이름을 따왔다. 예를 들면 내가 샌프란시스코에 살 때 자주 방문했던 글렌캐니언 공원의 트레일은 ‘검트리 걸스(Gum Tree Girls)’의 이름을 따왔는데, 이 세 여성은 샌프란시스코에서 이슬레이스강이 유일하게 자연 상태로 땅 위를 흐르는 글렌캐니언에 고속도로가 건설되는 것을 막았다. 공원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하지 않을’ 공간과 다양한 규모의 관심 속에 머무를 시간을 제공한다. 나아가 공원의 존재는, 특히 도시나 과거 자원을 추출했던 곳의 한가운데에 있는 공원은, 그 자체로 저항을 상징한다.
 물론 공원은 우리가 중요시하고 보호해야 할 공공장소의 한 종류일 뿐이다. 그러나 공원은 공간과 저항, 관심경제의 관련성을 보여주는 유용한 사례를 제공한다. 내가 주장한 것처럼 특정 종류의 생각을 하는 데 특정 종류의 공간이 필요하다면, ‘맥락 수거’를 위해서는 온라인의 맥락 붕괴를 막는 데서 나아가 공공장소와 열린 공간, 더 나아가 사라질 위기에 처한 문화와 공동체에 중요한 모임장소까지 지켜야 할 것이다. 인류세(인간의 활동으로 지구환경이 돌이킬 수 없이 변한 지질시대)라 일컬어지는 이 시대에, 나는 이 시기를 지칭하는 도나 J. 해러웨이의 용어가 훨씬 더 유용하다고 생각한다. 해러웨이는 이 시기를 툴루세(Chthulucene)라고 칭하는데, ‘지구가 인간과 비인간 난민으로 가득하지만 피난처는 없는’ 시기를 뜻한다. 『트러블과 함께하기』에서 해러웨이는 “툴루세를 살다가 언젠가는 반드시 죽게 될 생명으로서 잘 살고 잘 죽을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은 모두와 협력해 피난처를 복원하고, 불완전하지만 굳건한 생물학적·문화적·정치적·기술적 회복과 재구성을 이뤄내는 것이다. 이 과정에는 돌이킬 수 없는 상실에 대한 애도가 반드시 포함되어야 한다”라고 말한다. 이를 염두에 두면 나는 자본주의적 생산성의 논리가 멸종 위기에 처한 삶과 아이디어를 위협하는 이 시기에, 전통적인 의미의 서식지 복원과 인간의 사고를 위한 서식지 복원이 그리 다르지 않다고 본다. (p.304-305)

 

 콘퍼런스는 곧 끝이 나고 나는 대부분의 내용을 놓쳤다. 중요하고 유용한 내용이 많았을 것이다. 나는 ‘잘 쓴 시간’에 대해 보여줄 만한 것이 별로 없다. 트위터에 올릴 간결한 문장도, 새로 생긴 인맥도, 새 팔로워도 없다. 아마 나는 한두 명의 사람에게만 내가 관찰하고 배운 내용을 들려줄 것이다. 또 운이 좋으면 언젠가 싹틀지 모를 씨앗처럼 비축해둘 것이다.
 발전과 생산적인 시간의 관점에서 보면 나의 이러한 행동은 비행으로 보일 것이다. 나는 중도 이탈자다. 그러나 장소의 관점에서 보면 나는 마침내 관심을 기울인 사람이다. 그리고 나 자신의 관점에서 보면 나는 나의 삶을 실제로 경험하고 있었던 사람이며, 나는 죽을 때 결국 이 사람에게 대답할 것이다. 나는 내가 그날 지구에서 시간을 보냈다는 것을 안다. 이런 순간이 오면 관심경제에 대한 질문 자체도 사라져버린다. 누군가가 내게 대답을 요구한다면, 나는 아마 땅에서 자라고 기어다니는 것들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로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러지 않는 편이 좋겠습니다.” (p.3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