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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둑맞은 집중력 / 요한 하리 / 어크로스

 

 그는 자신이 소셜미디어에서 미국 대선 같은 사건의 사소한 정보들을 몇 시간이고 생각 없이 훑으며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 사실은 부모뿐만 아니라 과학자로서의 그에게도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수네는 이렇게 말했다. “제가 깨달은 건, 어떤 면에서 제 직업은 모두와 다른 생각을 하는 일인데, 내가 모두와 똑같은 정보만 얻을 수 있는 환경에 있었다는 것, 모두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었어요.”

 

 수네는 이에 관해 오늘날 우리가 “소방 호스로 물을 들이켜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고 말했다. “너무 많은 것이 쏟아지고 있어요.” 우리는 정보에 절여졌다. 서던캘리포니아 대학의 마틴 힐버트(Martin Hilbert) 박사와 카탈로니아 개방대학교의 프리실라 로페즈(Priscilla López) 박사가 이와 관련된 미가공 수치를 분석했다. 85쪽 분량의 신문을 읽는 모습을 상상해보자. 1986년에 인간에게 쏟아지는 정보(텔레비전과 라디오, 독서)를 모두 합치면 대략 85쪽 분량의 신문을 매일 40종 읽는 것과 같았다. 두 사람은 2007년에 그 양이 하루 174종의 신문을 읽는 것과 맞먹는 수준으로 증가했음을 발견했다(2007년 이후로 정보의 양이 더 늘지 않았다면 무척 놀라운 일일 것이다). 이 같은 정보량의 증가가 전 세계의 속도가 빨라지고 있다는 느낌을 유발하는 요인이다.
 이러한 변화가 어떤 영향을 미칠까요? 내가 묻자 수네가 빙긋 웃었다. “속도는 기분을 좋게 해주는 면이 있습니다… 우리가 속도에 빠지는 건 그게 좋기 때문이기도 하잖아요. 온 세상과 연결되었다고 느끼고, 어느 주제에 관해 무엇이든 알아내고 배울 수 있다고 느끼게 되니까요.” 그러나 우리는 자신이 노출되는 정보량의 엄청난 팽창과 정보가 들이닥치는 속도를 아무 대가 없이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건 착각이다. “점점 진이 빠지게 됩니다.” 수네가 말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우리가 모든 차원에서 깊이를 희생하고 있다는 겁니다… 깊이는 시간을 요구합니다. 깊이는 사색을 요구해요. 모든 것을 다 따라잡아야 하고 늘 이메일을 보내야 한다면 깊이를 가질 시간이 없어져요. 관계에서의 깊이도 시간이 필요합니다. 에너지가 필요해요. 오랜 기간을 필요로 하죠. 거기에 전념해야 해요. 주의력도 필요하고요. 깊이를 요구하는 모든 것이 악화되고 있어요. 그게 우리를 점점 더 표면 위로 끌어올리고 있고요.”

 

 그러나 이러한 사회적 액셀 밟기가 집중력에 미치는 영향을 과학자들이 알게 된 두 번째 방법이 있다. 속도를 높일 때가 아니라 일부러 속도를 낮출 때 집중력에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를 연구한 것이다. 이 주제와 관련해 가장 훌륭한 전문가 중 한 명은 내가 잉글랜드 석세스에서 인터뷰를 한 윈체스터 대학의 학습과학 교수 가이 클랙스턴(Guy Claxton)이다. 그는 광범위한 과학 연구에서 드러난 것처럼 요가나 태극권, 명상 같은 의도된 느린 수련을 할 때 집중력에 무슨 일이 발생하는지 분석했고, 주의력이 상당히 개선된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그에게 이유를 물었다. 그는 “우리의 인지 능력에 맞추려면 세상을 좁혀야” 한다고 말했다. 너무 빨리 움직이면 우리 능력에 부담이 되고, 결국 능력이 저하된다. 그러나 인간 본성에 알맞은 속도로 이동하는 연습을 하면(이러한 속도를 일상에 적용하면) 집중력이 훈련되기 시작한다. “이러한 이유로 앞에서 말한 수련이 사람들을 똑똑하게 만드는 겁니다. 주문을 흥얼거리거나 주황색 가운을 입는 건 중요한 요소가 아니에요.” 그는 느린 속도는 집중력을 키우고 빠른 속도는 집중력을 흩뜨린다고 설명했다.

 

 얼은 내게 증거가 명확하다고 말했다. 일을 제대로 처리하고 싶다면 한 번에 한 가지에만 집중하는 방법 외에 다른 대안은 없다. 이 모든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나는 집중력을 잃지 않고 정보의 쓰나미를 흡수하고자 했던 나의 바람이 매일 맥도날드 햄버거를 먹으면서 늘씬하기를 바라는 것만큼 불가능한 꿈임을 깨달았다. 얼은 인간 뇌의 크기와 능력이 4만 년간 크게 바뀌지 않았으며, 앞으로도 좀처럼 개선되지 않을 거라고 말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사실을 착각한다. 캘리포니아 주립대학의 심리학 교수 래리 로젠(Larry Rosen)은 보통의 청소년과 청년이 자신이 동시에 여섯 개나 일곱 개의 미디어를 시청할 수 있다고 진심으로 믿는다는 것을 발견했다.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기계의 논리에 따라 살아갈 수 없다. 우리는 인간이며, 기계와 다르게 작동한다.

 

 “잘 자지 않으면 우리 몸은 그 상황을 위기로 해석합니다.” 록산느가 말했다. “잠을 빼앗겨도 살 수는 있습니다. 잠을 줄이지 않으면 아마 아이들을 키울 수 없을 거예요. 허리케인에서 살아남을 수도 없을 거고요. 우리는 분명 잠을 줄일 수 있어요. 하지만 거기에는 대가가 따라요. 그 대가는 바로 몸에서 교감신경계가 활성화된다는 거예요. 그럼 우리 몸은 이렇게 생각해요. ‘어, 잠을 줄이고 있네. 비상 상황인 게 분명해. 그러니 비상 상황에 대비할 수 있도록 온갖 생리적 변화를 일으켜야겠어. 혈압을 올리자. 패스트푸드가 당기게 만들어야지. 빠르게 에너지를 보충할 수 있도록 당도 더 당기게 만들 거야. 심박도 올릴 거고…’ 이 모든 변화는 나는 대기 상태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의 몸은 자신이 왜 깨어 있는지 모른다. “뇌는 우리가 빈둥거리면서 드라마 〈시트 크릭(Schitt’s Creek)〉을 보느라 잠을 안 자고 있다는 걸 몰라요. 우리가 잠을 안 자는 이유를 모르죠. 하지만 그 결과로 일종의 생리적 비상벨이 울리는 겁니다.”

 

 수면과 관련해서 현재 사회가 얼마나 망가졌는지를 보여주는 증거는, 이 위기 상황을 가장 심각하게 경고해야 할 의사들이 의사 자격을 취득하느라 수면 부족에 시달린다는 점이다. 의사들은 수련의 일부로서 극도로 힘든 24시간 교대 당직 근무를 서야 한다. 배우 키퍼 서덜랜드(Kiefer Sutherland)가 연기한 잭 바우어(Jack Bauer)가 테러리스트를 잡느라 잠들지 못하는 텔레비전 드라마 〈24〉가 방영된 이후, 학생들은 이 근무를 “잭 바우어 한다”라고 칭한다. 이러한 근무 형태는 환자들을 위험에 빠트린다. 그러나 우리가 만든 문화에서는 수면에 관해 가장 잘 알아야 할 사람들이 우리만큼이나 잠을 미루는 데 열심이다.

 

 그는 언뜻 보면 사람들이 하는 행동은 미친 짓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아이들에게서 영양을 빼앗지 않습니다. 그럴 생각은 하지 않아요. 그런데 왜 우리는 아이들에게서 잠을 빼앗고 있는 걸까요?” 그러나 더 큰 그림에서 보면 이 사실은 씁쓸하게도 이해가 된다. 찰스는 소비자본주의적 가치의 지배를 받는 사회에서 “수면은 커다란 문제”라고 말했다. “잠든 사람은 돈을 쓰지 않습니다. 아무것도 소비하지 않아요. 아무 상품도 생산하지 않고요.” 그는 이렇게 설명한다. “지난 [2008년의] 경기 침체 당시… 사람들은 크게 줄어든 생산량과 소비량에 대해 논의했어요. 만약 모두가 [과거처럼] 자는 데 지금보다 몇 시간을 더 쓴다면, 사람들은 아마존에 접속해 있지 않을 겁니다. 물건을 사지 않을 거예요.” 찰스는 인간이 건강에 적합한 수면 시간으로 돌아가면(모두가 내가 프로빈스타운에서 잔 만큼 잔다면) “경제체제에 지진이 발생할 것”이라고 말했다. “지금의 경제체제는 잠이 부족한 사람들에게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에요. 집중력 부진은 로드킬일 뿐이에요. 그저 사업의 대가일 뿐이죠.”

 

 오늘날 재미로 책을 읽는 미국인의 수는 사상 최저를 기록하고 있다. 미국인 2만 6000명으로 구성된 표본을 연구하는 미국 시간 사용 조사(American Time Use Survey)는 2004년에서 2017년 사이에 재미로 독서를 하는 비율이 남성은 40퍼센트, 여성은 29퍼센트 줄었음을 발견했다. 여론조사 기업인 갤럽은 한 해에 책을 한 권도 읽지 않은 미국인 비율이 1978년과 2014년 사이에 세 배로 뛰었음을 확인했다. 현재 미국인의 약 57퍼센트가 1년간 책을 단 한 권도 읽지 않는다. 이러한 경향은 점점 커져 2017년에 미국인의 하루 평균 독서 시간은 17분, 하루 평균 핸드폰 사용 시간은 5.4시간이 되었다. 복잡한 소설은 특히 수난을 겪고 있다. 현대 역사상 처음으로, 오로지 재미로 문학을 읽는 사람 수가 미국인의 절반에도 못 미친다. 미국만큼 철저히 연구되지는 않았지만 영국을 비롯한 다른 국가도 비슷한 추세로 보인다. 2008년과 2016년 사이에 영국 소설 시장 규모가 40퍼센트 줄었다. 단 한 해 동안(2011년) 페이퍼백 소설 판매량이 26퍼센트나 폭락했다.

 

 사실 세상은 복잡하다. 세상을 제대로 고찰하려면 보통은 긴 시간 동안 한 가지에 주의를 기울여야 하며, 길게 말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 말할 가치가 있는 내용 중 280자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은 드물다. 어떤 생각에 대한 나의 반응이 즉각적일 때, 내가 그 주제에 대해 수년간 전문 지식을 쌓아온 사람이 아니라면 그 반응은 얄팍하고 별 볼 일 없을 가능성이 크다. 사람들이 즉시 나에게 동의하느냐 아니냐는 내가 하는 말이 옳은지를 보여주는 지표가 아니다. 그건 스스로 생각해야 하는 문제다. 현실은 트위터와 정반대인 메시지를 택해야만 분별력 있게 이해할 수 있다. 세상은 복잡하며, 지속적으로 주의를 기울여야 이해 가능하다. 세상은 천천히 사고하고 파악해야 한다. 가장 중요한 진실은 처음에는 인기를 얻지 못한다. 나는 살면서 트위터에서 가장 성공적으로 활동했을 때(팔로어와 리트윗의 측면에서)가 인간으로서 가장 쓸모없을 때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때의 나는 관심이 필요했고, 지나치게 단순했으며, 독설을 잘 퍼부었다. 물론 트위터에서 이따금 통찰을 얻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이 정보를 흡수하는 지배적 방식이 되면 사고의 질이 급속히 낮아질 것이다.

 

 레이먼드는 우리 각자가 오늘날 인간으로 산다는 것의 작은 일부만을 경험할 뿐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소설을 읽으면 다른 사람의 경험을 들여다보게 된다. 그 경험은 소설을 내려놓은 뒤에도 사라지지 않는다. 나중에 현실에서 사람을 만나면 그들의 삶을 더욱 잘 상상할 수 있다. 사실 정보를 읽으면 아마 더 박식해지겠지만, 이처럼 공감 능력이 길러지지는 않는다.
 지금까지 수십 가지의 다른 연구가 레이먼드가 발견한 핵심 효과를 그대로 보여주었다. 레이먼드에게 그의 연구에서 드러난 소설의 영향만큼 공감 능력을 키워주는 약물이 개발된다면 어떨지 물었다. 그는 말했다. “부작용이 없다면 상당히 인기 있는 약이 될 것 같은데요.” 그와 이야기를 나눌수록 공감은 사람이 가진 가장 복잡한 형태의 주목이자 가장 소중한 주의력 중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발전 중 다수가 곧 공감 능력의 발전이었다. 다른 인종 집단도 자신들처럼 감정과 능력, 꿈이 있다는, 적어도 일부 백인의 깨달음. 그동안 자신들이 여성에게 행사한 권력이 불합리하고 심각한 고통을 낳는다는 일부 남성의 깨달음. 동성애가 이성애와 다르지 않다는 많은 이성애자의 깨달음. 공감은 발전을 가능케 하고, 인간적인 공감의 폭을 넓힐 때마다 우리는 우주를 조금씩 더 열어젖히게 된다.

 

 레이먼드와 대화를 나누며 생각했다. 사람들은 자신이 노출되는 목소리의 결을 내면화한다. 타인의 내면에 대한 복잡한 이야기에 오랜 시간 노출되면 이 이야기가 우리의 의식 패턴을 다시 형성한다. 우리는 더욱 통찰력 있고 개방적이고 공감을 잘하는 사람이 될 것이다. 반면 소셜미디어를 장악한 단절된 비명과 분노의 파편에 하루에 몇 시간씩 노출되면 우리의 사고 역시 그렇게 될 것이다. 내면의 목소리는 더 상스럽고 시끄러워질 것이며, 부드럽고 온화한 생각에 전만큼 귀 기울이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자신이 사용하는 기술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시간이 갈수록 우리의 의식이 그 기술의 모습으로 변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독서만 그런 것이 아니다. 삶도 그렇다. 딴생각은 상황을 이해하는 데 반드시 필요하다. 조너선은 내게 “딴생각을 하지 못하면 다른 수많은 것들이 사라질 겁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딴생각을 많이 할수록 더욱 체계적인 목표를 세우고 더 창의적이며, 끈기 있는 장기적 결정을 더 잘 내린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정신이 표류하면서 천천히 무의식적으로 삶을 이해하도록 내버려둔다면 우리는 이러한 일들을 더 능숙하게 해낼 수 있다.

 

 온종일 컴퓨터 앞에 앉아 스포트라이트를 비추듯 글자를 두드리는 데만 집중하면 열심히 일한 좋은 하루를 보냈다는 기분이 든다. 그날 저녁에는 내 생산성에 약간 청교도적인 자부심이 차오르는 것이 느껴진다. 우리 문화 전체가 이러한 믿음 위에 세워져 있다. 우리의 상사는 우리가 하루 종일 책상 앞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보고 싶어 하는데, 이것이 바로 상사가 생각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아주 어린 나이부터 사람들에게 주입되어서, 마커스 라이클처럼 아이들은 학교에서 공상에 빠지면 야단을 맞는다. 내가 프로빈스타운의 해안가를 목적 없이 배회한 날에 스스로 생산적이라고 느끼지 못했던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나는 내가 해이해져서 게으름을 피운다고, 방종하게 굴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연구한 네이선은 생산적인 사람이 되려면 그저 가능한 한 스포트라이트를 좁히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말했다. “저는 매일 산책을 나가서 정신이 일종의 정리를 하게끔 내버려둡니다… 의식에서 생각을 온전히 통제하는 방식이 꼭 생산적인 사고방식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느슨한 연상 패턴이 독특한 통찰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마커스도 이에 동의했다. 그는 내게 눈앞에 있는 것에 집중하는 행위는 “소화해야 할 원재료”를 제공하지만, “어느 시점이 되면 거기서 한 발짝 물러나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경고했다. “오로지 외부 세계에만 정신없이 바쁘게 초점을 맞추면 뇌가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을 소화할 기회를 놓치게 됩니다.”

 

 그가 캠프에서 배운 내용 중 하나는 마술에 얼마나 잘 넘어가느냐가 지능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는 것이었다. 훗날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보다는 더 미묘한 요소와 관련이 있습니다. 약점과 한계, 맹점, 또는 우리가 갇힌 편견 같은 것들이요.”
 즉 마술은 인간 정신의 한계를 연구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주의를 통제한다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이 내 주의를 건드리면 알아챌 거라고, 또 바로 저항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현실에서 우리는 잘 속는 고깃덩어리이며, 마술사가 파악할 수 있는 예측 가능한 방식으로 속아 넘어간다.

 

 우리 모두에게는 ‘내적 트리거’, 즉 나쁜 습관에 무릎 꿇게 하는 삶의 순간이 있다. 니르는 자신에게 그러한 순간이 “글을 쓸 때”임을 깨달았다. “글쓰기는 절대 수월해지지 않습니다. 언제나 어렵죠.” 노트북 앞에 앉아 글을 쓰려고 하면 그는 지루함이나 스트레스를 느끼곤 했다. “글을 쓸 때는 이 모든 나쁜 감정들이 끓어오릅니다.” 그럴 때면 내면에서 트리거가 눌렸다. 이런 불편한 감정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는 스스로에게 잠시 다른 할 일이 있다고 말하곤 했다. “가장 쉬운 건 이거예요. 진짜 빨리 이메일만 확인하자. 진짜 빨리 핸드폰 한 번만 열어보자. 떠올릴 수 있는 모든 핑계를 생각해냈어요.” 그는 강박적으로 뉴스를 확인하며 훌륭한 시민은 마땅히 그래야 한다고 되뇌었다. 구글에서 글쓰기와 관련이 있을지도 모를 사실을 검색하다 보면 두 시간 뒤에는 토끼굴의 밑바닥에서 전혀 상관없는 것을 읽고 있었다.

 

 잔혹한 낙관주의는 비만이나 우울, 중독처럼 우리 문화에 근본 원인이 있는 거대한 문제와 관련해 사람들에게 긍정적인 언어로 단순한 개인적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을 말한다. 이 주장은 낙관적으로 들리는데, 문제를 금방 해결할 수 있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 이 주장은 잔혹한데, 이렇게 제시하는 해결책이 너무 제한적이고 근본 문제를 전혀 보지 못하기에 결국 대다수에게 별 도움이 안 되기 때문이다.

 

 잔혹한 낙관주의는 처음에는 친절하고 낙관적으로 보이지만 종종 추악한 여파를 미친다. 잔혹한 낙관주의는 이 작고 얄팍한 해결책이 실패할 때 개인이 시스템을 탓할 수 없게 만들고, 결국 개인은 자기 자신을 탓하게 된다. 개인은 자신이 일을 다 망쳤다고, 자신이 못난 것이 문제라고 생각하게 된다. 로널드는 이러한 관점이 과로 같은 “스트레스의 사회 원인에서 주의를 돌리게” 하고, 순식간에 “피해자에게 책임을 전가”할 수 있다고 말했다. 잔혹한 낙관주의는 이렇게 속삭인다. 문제는 시스템에 있는 게 아냐. 문제는 네 안에 있어.

 

 40여 년 전 비만 위기가 시작되었을 때 우리는 다른 방식으로 대응할 수 있었다. 환경의 변화 없이 개인이 자제력을 기르는 노력만으로는 니르처럼 20명 중 한 명꼴의 사례를 제외하면 좀처럼 효과가 없다는 증거에 귀를 기울일 수도 있었다. 정부 정책을 이용해 신선하고 영양가 높은 식품은 저렴하고 구하기 쉽게, 설탕이 잔뜩 들어간 정크푸드는 값비싸고 구하기 어렵게 만들 수 있었다. 사람들이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받은 나머지 먹는 걸로 스트레스를 풀게끔 만드는 요인들을 제거할 수도 있었다. 사람들이 쉽게 걷거나 자전거를 탈 수 있는 도시를 만들 수도 있었다. 아이들을 겨냥해 정크푸드를 광고함으로써 평생 갈 입맛을 길들일 수 없게 금지할 수도 있었다. 바로 이 때문에 노르웨이와 덴마크, 네덜란드처럼 어느 정도 이러한 조치를 취한 국가들에서 비만율이 낮고, 미국과 영국처럼 과체중인 개개인에게 자제력을 기르게 하는 데 주력한 국가들에서 비만율이 매우 높은 것이다. 나 같은 사람들이 스스로를 부끄러워하고 굶기는 데 들인 에너지를 전부 이러한 정치적 변화를 요구하는 데 썼다면 오늘날 비만도 고통도 훨씬 적었을 것이다.

 

 앤드루는 회사에 한 달의 준비 시간을 주었다. 그동안 전 직원은 더욱 잘 일할 방법을 고민해야 했고, 앤드루는 학술 연구원으로 구성된 팀을 꾸려 실질적인 결과를 측정하기로 했다. 직원들은 수년간 생산성을 떨어뜨린 사소한 요소들을 파악해 마침내 해결했다. 예를 들어 자료 입력 업무를 맡았던 한 직원은 서로 다른 두 시스템이 서로 연동되지 않아 자료를 두 번 입력하느라 하루에 한 시간을 허비했다. 그 직원은 정보통신팀에 가서 이 문제를 해결해달라고 요청했다. 회사 전체에서 이와 비슷한 수백 가지의 변화가 일어났다. 다른 사무실에서는 한 직원이 여러 개의 깃발이 담긴 작은 통을 사왔고, 이제부터 일을 방해받고 싶지 않은 사람은 책상 위에 이 깃발을 꽂아서 자신이 집중하고 있음을 알리자는 데 모두가 동의했다.

 

 현재 이 같은 결정은 우리 대다수에게 불가능한 사치처럼 보인다. 사람들 대부분은 속도를 늦추지 못하는데, 그렇게 하면 일자리나 사회적 지위를 잃을까 봐 두렵기 때문이다. 오늘날 미국인의 56퍼센트가 1년에 단 1주일의 휴가를 쓴다.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사람들에게 집중력 개선을 위해 해야 하는 일들(한 번에 하나씩만 하고, 더 많이 자고, 책을 더 많이 읽고, 딴생각하기)을 말하는 것이 그토록 쉽게 잔혹한 낙관주의로 변질되는 것이다. 현재 우리 사회가 작동하는 방식에서는 그런 것들을 실천할 수 없다. 그러나 꼭 이런 식일 필요는 없다. 사회는 달라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