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t Read Code

 

이그노런스 / 스튜어트 파이어스타인 / 뮤진트리

 

 나는 지식보다는 무지를 대하는 것이 더 편하고 좋다. 방대하게 축적된 지식은 난공불락으로 보인다. 산더미 같은 저 많은 사실들은 기억하는 것은 고사하고 과연 배울 수나 있을까 의문이다. 도서관을 보면 경외심이 들면서 동시에 기가 꺾인다. 우리가 세상과 자신에 대해 무엇을 알고 무엇을 생각하는지 수 세대에 걸쳐 기록한 노고로는 대단한 작업임에 틀림없지만, 저 안에 가득한 책들을 내가 티끌만큼도 읽지 못하리라는 것을 생각하면 의기소침해진다.
 이런 역동성이 과학에서보다 더 여실히 드러나는 곳은 없다. 10년에서 12년마다 과학 논문의 수가 대략 두 배로 늘어난다. 이것은 최근 들어 새로 생긴 현상이 아니다. 뉴턴 시대 이후로 계속 그래왔고 과학자들이 이에 대해 불평한 것은 어제오늘이 아니다. 과학적 방법을 주창한 계몽주의의 시조 프랜시스 베이컨은 1600년대에 벌써 엄청나게 축적된 지식이 감당하기 어렵고 다루기 곤란하다며 불평했다. 계몽주의 사상가들이 분류에 매혹되고 백과사전에 매달린 원동력이 아마 이것이었을 것이다. 지식을 실제로 다 담지 못한다면 최소한 알파벳순으로 배열이라도 하자는 생각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지식이 급증하여 상황이 더 나빠졌다. 뉴턴 시대에 정보가 두 배로 늘어났다 함은 새로운 책이나 논문이 몇십 권 나오는 정도였지만, 요즘 정보가 두 배가 된다는 것은 백만 권 이상의 새 책이 쏟아진다는 뜻이다. 주눅이 들게 하는 것은 증가세만이 아니라 실제 양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과학자로서 첫발을 내딛는 것조차 만만치 않은 일이다. 그리고 훈련된 과학자가 느끼는 두려움이 이 정도라면 평균적인 시민은 말할 필요도 없다. 괜히 과학이 가장 헌신적인 사람에게나 관심을 끄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과학이 그토록 접근하기 어려워 보이는 이유일까? (p.21-22)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사실을 깎아내리려는 의도가 아니다. 나는 사실을 보다 정확한 관점에, 적어도 현역 과학자들의 관점에 두려는 것이다. 사실은 우리가 과학에서 얻으려고 애쓰는 것이지만, 실제로 과학자 사회에서 거래되는 통화는 아니다. 비과학자에게 의아하게 보일 수도 있겠지만 모든 과학자들은 믿을 수 없는 게 사실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새로운 도구들로 무장한 다음 세대 과학자들로부터 안전한 자료는 없다. 알려진 것은 결코 무사하지 않다. 결코 충분치 않다는 말이다. 직관적으로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사실은 정확할수록 의심을 살 가능성이 높아진다. 정확한 측정은 항상 더 정확하게 수정될 수 있고, 결정적인 예측은 가능한 여러 결과를 허용하는 모호한 예측보다 틀린 것으로 밝혀질 가능성이 높다.
 과학을 실제로 연구하는 사람에게 보다 흐뭇한, 그리고 어떻게 보면 살짝 짓궂기도 한 즐거움 하나는 누군가가 틀렸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자신이 과거에 틀렸음을 증명하는 것도 포함해서 말이다. 과학자들은 자신이 뭔가를 알 때를 어떻게 확신할까? 뭔가가 이만하면 만족스럽게 알려진 것임을, 사실이 최종적인 것임을 어떻게 알까? 현실에서는 오로지 거짓 과학만이 ‘사실’을 숭상한다. 거짓 과학만이 밝혀진 사실이 영원하다고 생각하고, 모든 것을 다 알 수 있고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예측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예컨대 점성술 같은 것이 그렇다. 실제로 새로운 증거가 나와 과학자들이 이론을 수정해야 하는 상황은 패배가 아니라 승리로 여겨진다. 양자역학의 혁명을 불러온 저명한 물리학자 막스 플랑크는 과학이 얼마나 자주 바뀌었느냐는 질문에 “장례식을 한 번 치를 때마다”라고 대답했다. 세대가 바뀔 때마다 과학의 패러다임이 바뀌었음을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새로운 세대의 과학자들, 전 세대의 아이디어와 ‘사실’에 구애되지 않는 과학자들이 등장할 때마다 개념의 구상과 이해의 틀이 혁명적이고 점증적인 방식으로 바뀐다. 진짜 과학은 항상 고쳐지는 과정에 있다. 단속적으로 무지를 딛고 앞으로 나아간다. (p.29-30)

 

 이렇듯 세상에는 결코 알 수 없는 것들이 있지만 이것이 중요하지는 않다. 예컨대 우리는 원주율의 정확한 값을 모르지만 그렇다고 기하학을 행하는 데 실질적인 장애가 있지는 않다. 프린스턴 대학의 천체물리학자 피어트 허트가 강조했듯이, 초창기 피타고라스학파는 2의 제곱근이 수직선에 정확하게 표시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한동안 연구를 이어가지 못했다고 한다. 당신은 2의 제곱근에 상응하는 지점에서 선을 잘라 새로 얻어진 두 개의 선을 가질 수 없다. 양쪽 변의 길이가 1인 가장 단순한 직각삼각형의 빗변의 정확한 값이, 무한하게 펼쳐진 수직선에서 특정 지점을 갖지 않으면 대단히 곤란하다. 하지만 역설처럼 보여도 이것이 존재한다는 증거가 엄연히 있다. 출처가 불분명한 이야기에 따르면, 이렇게 이상하고 당시로서는 이단적인 발견을 한 피타고라스학파의 히파소스는 동료들에 의해 물에 빠트려져 죽었다고 한다. 제대로 된 질문을 한 대가치고는 고약했다. 당시에는 수학이 지금보다 훨씬 거칠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얼마 뒤에 수학자들은 해결책을 개발했다. 2의 제곱근 같은 수들이 더 존재한다는 것이 드러났고, 이것들은 ‘무리수’라고 불린다. 타당하지 않다는 뜻이 아니라 두 개의 수의 비율인 분수로 나타낼 수 없다는 뜻이다. 이런 무리수들이, 수직선에 특정 지점으로 표시되는 더 흔한 ‘유리수’들과 더불어 우리가 ‘실수’라고 부르는 집합을 이룬다. 이제 우리는 무리수를 아무런 문제 없이 다룰 수 있다. 유리수와 거의 똑같이 다루며 여기에 대해 걱정하지 않는다. 아마도 걱정해야 한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을 것이다. (p.52-53)

 

 힐베르트의 전략은 무지를 예측했다는 것이다(여기서 우리가 교훈을 얻을 수도 있다). 그는 대답을 예측하지 않았다. 문제가 해결되는 시한을 정하지 않았고, 문제가 해결될 수 있는지조차 확신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20세기 벽두에 힐베르트가 제안한 연설이 수학에 긍정적 영향을 미쳐 100년 넘게 그 분야의 많은 의제들을 효과적으로 마련했다는 데 동의하지 않는 수학자는 거의 없다.
 과학에서 진보의 예측을 이런 식으로 사용하면 그저 이목을 끄는 활동 이상이 된다. 과학 정책 수립에 기여하여, 제한된 자원을 어떻게 연구에 쏟을지 결정하는 데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무지를 사실만큼 신중하게 다루어야 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다. 과학 연구 기금 수십억 달러를 책정할 때, 합리적인 프로그램이 있어서 그것대로만 하면 바람직한 결과를, 혹은 최소한 진보라고 불릴 만한 무엇을 얻을 수 있다고 믿으면 마음이 든든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무지에 대한 불확실한 판단에 근거한 잘못된 든든함이다. 무엇이 이루어지고 무엇이 이루어지지 않을지 내다보기는 어렵다. 우리는 제트팩을 메고 하늘을 날지 않으며, 일회용 옷을 입거나 봉지에 담긴 농축 영양소로 식사를 하지 않는다. 말라리아나 암을 뿌리 뽑지도 못했는데, 모두 오래전에 이루어지리라 예측된 일들이다. 그 대신 전 세계를 연결하는 인터넷이 있고 발기를 돕는 알약이 있다. 50년 전, 아니 25년 전만 해도 이런 것을 예측한 자료는 없었다. 엔리코 페르미가 말했듯이 미래와 관련된 예측은 위험부담이 큰 사업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학적 목표를 어떻게 세워야 할까? 무지를 줄이는 것이 아니라 키우는 방향으로 생각해야 한다. 다시 말해 지평선을 옮기는 것이다. 특정한 발달을 목표로 삼는 것보다 보다 깊은 이해를 얻으려는 전략이 더 유용하다. 빈둥거리며 놀라는 말처럼 들릴 수도 있겠지만,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과학과 기술에서 대부분의 위대한 진전들은 이런 식으로 일어났다. 근본적인 메커니즘을 깊게 파고들면 그때서야 응용 방법이 명확히 드러난다. (p.59-60)

 

 기초 연구와 응용 연구로 딱 잘라 나누는 것의 문제는 그것이 근본적으로 잘못된 구별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결코 해결되지 않을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도 우리는 하나의 연구 활동이 아니라 마치 두 개의 따로 떨어진 영역처럼 여기 붙었다 저기 붙었다 한다. 무지를 좇다 보면 멋진 발명에 이를 때가 종종 있다. 그러나 지름길을 찾으려고 하거나 곧장 응용으로 나아가려고 과정을 싹둑 자르면 좀처럼 가치 있는 것을 만들지 못한다. 예컨대 컴퓨터로 대화하게 만들려는 것을 인지 신경과학의 심오한 논점이 아니라 그저 프로그래밍 문제로만 여기고 이에 접근한 수많은 연구들을 생각해 보라. 궁극적으로 우리는 발명의 원천이 어디에 있는지 묻게 된다. 에디슨 같은 이들인가, 아인슈타인 같은 이들인가? 선택이 주어진다면 우리는 에디슨을 더 원할까, 아인슈타인을 더 원할까? 에디슨은 뛰어난 발명가였지만, 마이클 패러데이의 기초적 실험과 수식을 통해 전기를 이해하지 못했다면 어떤 것도 이루어낼 수 없었고, 그렇게 할 생각조차 못했을 것이다. 패러데이나 아인슈타인의 순수한 지식에서 뭔가를 만들어내려면 에디슨 같은 인물이 종종 필요하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말을 매지도 않고 마차를 달리게 할 수는 없다. 어찌 됐건 패러데이는 전기로 어떤 이로운 일을 할 수 있는지 전혀 몰랐다. 그는 전자기장의 쓰임새에 대한 질문을 받고 이렇게 대꾸했다. “갓난아이가 무슨 쓸데가 있겠어요?” 이 표현은 벤저민 프랭클린이 했다는 말에서 가져온 것이 분명하다. 프랭클린은 최초의 열기구 시범을 보고 나서 누군가 하늘을 나는 것이 무슨 소용인지 묻는 말에 대답하면서 그 비유를 들었다. 뭔가의 쓰임새를 알고 싶어 하는 사람이 뛰어난 상상력을 가진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p.62-63)

 

 우리가 대학원생들에게 해주는 이야기가 있다. 늦은 밤에 과학자가 가로등 아래의 땅을 살펴보는 이야기다. 어떤 남자가 그에게 다가가 무엇을 잃어버렸는지 묻는다. 과학자는 자동차 열쇠라고 말하고, 남자는 친절하게도 그가 찾는 것을 돕는다. 한참을 찾았지만 성과가 없자 남자는 정말 열쇠를 잃어버린 곳이 여기가 맞는지 묻는다. “아뇨, 내 생각에는 저쪽 같아요.” 그러면서 과학자는 거리의 어두운 쪽을 가리킨다. “그런데 왜 여기를 찾는 거죠?” “글쎄요,” 약삭빠른 과학자의 말이다. “여기가 더 환해서요.” 이 이야기는 열쇠를 찾는 사람(과학자가 아니라 술꾼이라는 이야기도 있고 술 취한 과학자라는 이야기도 있다)을 웃음거리로 만들려고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내 생각에는 정반대다. 과학에서 가장 괜찮은 전략 하나는 뭔가를 찾을 가능성이 높은 곳을 살피는 것이다. 무엇이든 괜찮다. 이 이야기의 교훈은 관찰할 수 있는 것의 가치를 알아보고 측정 불가능한 것은 뒤로 미루라는 것이다. 그리고 어쨌든 당신이 술에 취했다면 자동차 열쇠를 찾지 못하는 편이 더 낫다. (p.75)

 

 자신이 일하는 뒷마당에 있는 무지가 때로는 가장 파악하기 어려운 것이다. 〈네이처〉나 〈사이언스〉 같은 저널은 매주 발행되며 대단히 중요하다고 판단되는 기사들을 싣는다. 이런 저널에 논문이 실린다는 것은 대규모 사업 계약을 따낸 것과 마찬가지다. 과학자의 경력에 큰 도움이 되거나 제대로 된 출발을 하게 한다. 전 세계 실험실의 박사 과정 학생과 박사후 연구원들이 매주 이런 저널을 열심히 읽으며 자기 분야의 최신 성과들을 접하고 자신들도 〈네이처〉에 이름을 올리려고 그 주제의 다음 실험을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당연히 너무 늦었다. 논문을 쓴 친구들은 이미 다음 실험을 생각했고, 어쩌면 거의 마무리했을 수도 있다. 내 동료 한 명은 학생들에게 실험의 아이디어를 얻으려면 〈네이처〉나 〈사이언스〉의 지난 호 기사를 보지 말고 최소한 10년 이상 된 연구를 들여다보라고 말한다. 다시 살펴보고 수정할 때가 된 연구들이기 때문이다. 이런 자료들에도 질문들이 숨어 있다. 당시에는 기술의 한계 때문에 대답하지 못했지만 이제 때가 무르익은 질문들이 있고, 어쩌면 당시 사고방식의 틀에 맞지 않아 생각하지도 못했던 질문들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런 것들이 이제 갑자기 가능하고 잠재적이고 유망한 질문들로 되살아난다. 이미 알려진 것에서 무지를 찾는 것은 의외로 풍성한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p.79-80)

 

 내 수업에서 좋은 질문으로 밝혀졌던 것들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당신의 분야에서 도저히 알 수 없는 것들이 있다고 생각하세요? 어떤 것들입니까?
 당신의 연구에서 현재 기술적 한계는 무엇입니까? 언젠가는 해결될 수 있다고 봅니까?
 당신은 현재 무엇에 관심이 있습니까?
 당신은 모르는 것에 대해 어떻게 말합니까?
 마지막으로 작성한 보조금 신청서의 요지는 무엇이었습니까?
 다음에 작성할 신청서의 주요 내용은 무엇이 될 것 같습니까?
 연구해보고 싶지만 그럴 수 없을 것 같은 주제가 있습니까?
 기술적 한계 때문인가요? 비용이나 인력 때문인가요?
 당신의 분야에서 10년 전, 15년 전, 25년 전 무지의 상태였던 것은 무엇이었고, 그것이 어떻게 바뀌었습니까?
 다른 실험실에서 나온 자료들 가운데 당신의 결과와 일치하지 않는 것이 있습니까?
 추측을 얼마나 자주 합니까?
 놀랄 때가 자주 있습니까? 언제 놀랍니까?
 문제가 저절로 풀리기도 합니까?
 현재 당신이 만들고 있는 질문은 무엇입니까?
 현재 당신이 만들고 있는 무지는 무엇입니까? (p.97-98)

 

 우리는 ‘무지’라는 말을 원시적인 혹은 어리석은 믿음의 집합을 가리키는 뜻으로 자주 사용한다. 나는 ‘설명’이 자주 원시적이거나 어리석다고, 그리고 무지의 인식이 과학적 담론의 출발점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뭔가가 미지의 것이고 설명할 수 없는 것임을 인정할 때 그것이 연구해볼 가치가 있다는 것도 인정한다. 천문학자 데이비드 헬팬드는 바람에 대한 우리의 견해가 원시적인 것에서 과학적인 것으로 바뀐 과정을 추적한다. 맨 처음 “바람이 화가 났다”에서 “바람의 신이 화가 났다”로 바뀌었고, 마지막으로 “바람은 측정 가능한 에너지 형태다”가 되었다. 앞의 두 진술은 완전한 설명을 제시하지만 확연히 무지하다. 세 번째 진술은 우리의 무지(우리는 아직 날씨를 예측하거나 바꿀 수 없다)를 보여주지만 확실히 덜 무지하다. 무지보다는 설명이 오히려 지적 편협함의 전형적 특징이다. (p.178-179)

 

 

지위 게임 / 윌 스토 / 흐름출판

 

 사람들이 우리를 추종하거나 존경하거나 추앙하거나 칭찬하거나 우리가 그들에게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끼치도록 허락해주는 상태, 이것이 지위다. 이런 상태는 우리를 기분 좋게 한다. 이것은 인간의 본성이다. 인간의 기본 설계와 진화와 DNA에 새겨져 있다. 월드컵에서 골을 넣거나 죽음의 별(Death Star)을 날려버리는 정도의 엄청난 목적을 달성해야만 그런 기분을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한 번의 대화나 지나가는 사람이 보낸 눈길 하나로도 지위의 부드러운 감촉을 거듭해서 느낄 수 있다.
 사람들이 있는 곳이면 어디서든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우리는 평가와 판단의 대상이 된다. 그리고 사람들이 어떤 결론을 내리는지가 우리에게 중요하다. 어떤 심리학 연구든 지위와 안녕감이 강력히 연결되어 있음을 이야기한다. 123개국 6만 명 이상을 조사한 연구에서 안녕감은 항상 “남들에게 존중받는 정도에 달려 있다”는 결과가 나왔다. 지위를 얻거나 잃는 것은 “장기간에 걸친 긍정적 감정과 부정적 감정의 가장 강력한 예측 요인”이었다. 학술 논문을 광범위하게 살핀 한 연구에서는 “문화와 성별, 나이, 성격과 상관없이 사람들에게 지위가 공통적으로 중요한 요인으로 나타났다. … 관련 증거들은 지위를 향한 욕망이 인간의 기본 조건임을 말해준다”고 밝혔다. (p.29-30)

 

 심리학자들은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는 느낌이 인간에게 매우 바람직한 상태라고 이야기한다. 반대로 관계를 맺지 못할 때 우리의 몸과 마음에 어떤 반응이 일어나는지에 관한 연구도 있다. 여러 연구에서 우울한 사람은 남들보다 “훨씬 적은” 집단에 속하는 경향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자기 집단에 더 많이 동일시할수록―그 집단에 자아 의식을 더 많이 투영할수록―우울감이 더 크게 호전되는 것으로도 나타났다. 반대로 사람들과 관계를 맺지 못하면 실제로 몸이 아플 수도 있다. 다수의 연구에서도 한 사람이 타인과 의미 있는 관계를 맺는 정도를 살펴보면 그 사람의 수명을 예측할 수 있다는 결과가 나왔다. 심리학자 수전 핑커는 캘리포니아주 앨러미다 카운티의 주민 약 7000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 조사에서 “노년까지 살 가능성이 가장 큰 사람들은 직접 대면하는 공고한 관계를 유지하는 사람들”이라는 결과가 나왔다고 밝혔다. 사람들이 맺는 관계나 관계의 결핍은 “건강한 정도나 부유한 정도나 신체 건강의 수준과 별개로 수명을 예측”했다.
 사회적 동물에게 단절은 두려운 상태다. 단절은 인생이 실패했고 세상은 적대적인 곳이 되었다는 경고 신호다. 말하자면 이 세상에서 그 누구와도 관계를 형성하지 못하고 보호받지 못한다는 뜻이다. 고립되면 우리는 존재가 바뀔 만큼 심각하게 손상된다. 심리학자 존 카치오포는 고립되면 “방어적으로 움츠러들면서” 다시 거절당할까 두려워 계속 방어하려 한다고 이야기한다. 고립되면 타인에 대한 인식도 왜곡된다. 남들이 “우리를 더 비판하거나 우리와 더 경쟁하려 하거나 우리를 더 비하하려 하거나 적어도 우리를 반가워하지 않는다”고 보는 것이다. 이런 잘못된 해석은 “이내 기대가 된다.” 이런 안 좋은 기대 때문에 우리는 산만해지고 억울해하고 부정적으로 바뀌고, 이런 마음가짐에서 “부부 갈등이 심해지고 이웃과 더 많이 다투고 사회생활 전반의 문제가 더 심해진다.” (p.33-34)

 

 인생이 지위 게임이라고 할 때 지위를 완전히 박탈당하면 어떻게 될까? 자신이 무가치한 존재라는 자각이 끊임없이 든다면 어떻게 될까? 모욕감은 지위와 정반대 개념으로 보일 수 있다. 지옥이 천국의 반대 개념인 것처럼. 지위와 마찬가지로 모욕감도 남들에게서 온다. 지위와 마찬가지로 모욕감은 사회적 서열에서 우리의 위치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와 관련이 있다. 지위와 마찬가지로 평가하는 사람의 지위가 높을수록, 그런 사람이 많을수록 그들의 평가는 더 강력해진다. 그리고 지위와 마찬가지로 그런 평가가 중요해진다. 연구자들은 모욕감을 “정서의 핵폭탄”이라고 표현하고, 모욕감은 주요 우울장애와 자살, 정신증,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의 주요 특징”을 비롯해 극단적 분노와 극심한 불안을 유발한다고 설명한다. 강력범죄 전문가 제임스 길리건 교수는 여기에 덧붙여 모욕감을 “자아의 절멸”이라고 말한다. 교도소와 교도소 병원을 대상으로 수십 년에 걸쳐 폭력의 원인을 연구한 그는 “만나본 중 가장 폭력적인 남자들과의 면담에서 그들이 유년기에 반복적으로 모욕감을 경험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지위 게임의 논리에서는 모욕감(그리고 이보다 강도는 약하지만 비슷하게 창피함, 상상의 청중에게 평가받는 괴로운 감정)은 사람마다 다르게 파국적이다. 심리학자 레이먼드 버그너 교수와 월터 토레스 박사는 모욕감은 지위와, 지위를 얻는 능력을 철저히 박탈당한 상태라고 말한다. 두 연구자는 모욕적인 사건의 네 가지 전제 조건을 이렇게 밝혔다. 첫째, 우리는 대다수가 그렇듯이 자신이 지위를 얻을 자격이 있다고 믿어야 한다. 둘째, 모욕감을 자극하는 사건은 공개적으로 발생한다. 셋째, 우리를 비하하는 상대에게 어느 정도 지위가 있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지위를 얻으려는 지위를 거부”당해야 한다. 이 책의 관점에서 말하면 지위 게임에서 완전히 거부당해야 한다. (p.96-97)

 

 완벽한 행복. 그들은 앞으로도 완벽하게 행복하지 못할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결함이다. 우리가 현실을 기반으로 해 만든 꿈의 일부다. 꿈은 우리에게 목적지가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우리는 더 원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특정 상황에서 깊은 내면의 자신과 분리되면서 가면 증후군(Imposter Syndrome)에 시달릴 수도 있지만 결국은 우리 쪽으로 밀려오는 지위를 아주 능숙하게 받아들일 것이다. 게임 맨 꼭대기에 있는 엘리트에게도 중요한 대목이다. 그들도 받아들인다. 그리고 익숙해진다. 지위를 측정하는 무수한 방식에 익숙해진다. 돈, 권력, 영향력, 아첨, 옷과 보석, 교통수단과 배정된 자리, 휴가지와 주거지 위치, 직원 수, 집과 직장의 규모와 화려한 정도, 농담에 대한 반응, 눈 맞춤, 몸짓 언어, 컵에 받은 오렌지 주스의 양까지. “그들은 얻어냈다!” 그리고 더 원한다. 더 얻는다. 그리고 다시 익숙해진다. 이렇게 우리의 상사와 정치인과 유명인들은 지위에 취하고 그사이 그들의 행동은 점점 광기에 휩싸인다.
 지위에 취하는 모습은 특이하면서도 평범한 현상이고 게임이 인간의 인지를 어떻게 중독시키는지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신문에는 유명인의 무리한 요구에 관한 기사가 심심치 않게 실린다. 톰 크루즈는 조용히 식사할 수 있게 레스토랑을 통째로 비워 달라고 요구했고, 카니예 웨스트는 분장실 카펫이 “울퉁불퉁”하다면서 카펫을 다려 달라고 요구했으며, 마돈나는 “소독팀을 불러 분장실의 DNA를 제거해 달라”고 요구했다. 모두 아찔하게 올라간 지위를 상징하는 권력 행사의 사례다. (p.130-131)

 

 국가의 지위가 개인의 행복에 끼치는 영향에 관한 연구를 보면 나만 그런 것은 아닌 듯하다. 지난 2세기 동안 영국에서 나온 책과 신문 기사의 언어를 분석하는 방법으로 행복을 추적한 연구에서는 1880년대에 민족주의적 분위기가 거셌던 것으로 나타났다. 가난과 질병과 아동 노동이 만연한 시대였지만 대영제국이 세계적 지위 게임에서 최정상에 가까이 올라가면서 제국으로서 정점을 찍은 시대이기도 하다. 그 시대가 사람들에게 선사한 쾌락은 영국 작가 로리 리가 1920년대의 교실을 회고한 글에서 엿볼 수 있다. “교실 벽에 우리 제국이 점령한 식민지가 붉게 표시된 지도가 붙어 있고 우리는 그 앞에 앉아 있었다. 그 시절 우리는 가난에 허덕였다. 양배추를 삶아 먹고 구워 먹으면서 겨우 연명할 정도로 지독하게 가난했지만 누구도 불평하지 않았다. 우리는 거기 앉아 그 지도를 보면서 생각했다. 우리가 세계 최고다. 지도 위에, 그 세계지도 위에 붉은 조각이 모두 우리 것이다. 아프리카 전체, 인도 전체, 태평양의 모든 섬. 우리는 로마의 백인대장이라도 된 양 서로를 보았다.” (p.151)

 

 이런 제도가 어떻게 유지되는 걸까? 인간이 본래 야심 찬 게임 플레이어라면 어째서 불가촉천민은 수천 년 동안 이처럼 황당하리만치 모욕적인 꿈에 협조해 왔을까? 그들 다수가 이 꿈을 믿었기 때문이다. 신앙심이 깊은 불가촉천민은 전생에 죄를 지어서 계층이 추락한 것이고 현생에서 주어진 규칙에 순응해야만 다음 생에 높은 지위로 올라간다고 믿는다. 이것은 주요 종교들이 사람들이 예속된 처지에서도 서로 협조하도록 강요해 온 방식이기도 하다. 사후에 주어질 보상을 기대하고 자기 자리를 인정하고 인내해야 결국에는 승리한다는 논리다. 이 논리에서는 신이 만물을 창조했으니 인간은 신이 정한 자리에 머물러야 한다고 주장한다. 기독교의 찬송가에 이런 구절이 있다. “성안의 부자, 그 문 앞의 가난한 자, 하나님은 그들을 높거나 낮게 만드시고 그들의 재산을 명하셨네.” (p.156)

 

 확고한 신념마저 게임에 흡수되는 현상을 보여주는 심리학 연구가 상당히 많다. 정치적 신념도 예외가 아니다. 한 연구에서는 복지 제도와 관련해 공화당이나 민주당의 주장이 분명해 보이는 정책을 바꿔서 제시하자 각 당의 지지자들이 제도에 대한 지지 의사를 바꾸었다. 이들은 조작당하는 줄 모를 뿐 아니라 새로 바꾼 신념을 지지하는 근거를 찾아내 자기가 그 신념에 이르게 된 과정을 간단히 설명할 수도 있었다. 심리학자 릴리아나 메이슨 박사는 이렇게 지적한다. “국민은 대개 어떤 정책에 대한 의견에 따라 지지 정당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지지하는 정당에 따라 정책에 대한 의견을 바꾼다. 대개는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인지하지 못하고, 이런 가능성을 언급하면 화를 낸다.”
 우리의 뇌는 온갖 술수를 부려서 세상에 대해 게임이 만들어낸 이야기를 수용하고 그 이야기가 전개되는 대로 믿게 만든다. 그 이야기는 우리 집단의 구성원이 다른 집단의 구성원보다 더 똑똑하다고 말해주고, 우리 집단의 신념과 주장에 반박하는 주장에 대해서는 논리적 근거를 찾기 어렵다고 말해주고, 우리가 이미 동의하는 의견은 사실로 처리해주며, 우리와 신념이 다른 사람들은 우리보다 어리석고 편견에 치우치고 도덕적이지 못하고 믿을 만하지 않다고 전제하면서 그들의 신념을 무시하기 쉽게 만들어준다.
 여기서 지능은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반대다. 똑똑한 사람들은 집단의 거짓 신념을 뒷받침할 증거를 찾을 때 지능을 발휘한다. 뛰어난 머리로 현실을 왜곡하는 이야기를 더 능숙하게 확인시킨다. 종교와 정치와 사회적 정체성이 개인의 신념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에 관한 심리학 연구에서는 교육 수준이 높고 숫자를 잘 다루고 지능이 높을수록 자기 집단의 극단적 개념을 수용할 가능성도 커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기후 변화와 백신 접종과 진화를 부정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똑똑한 사람일수록 과학적 합의를 부정할 가능성이 크다. 우리는 우리 연합체에서 믿기를 바라는 것을 믿기 쉽다. 인류학자 존 투비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연합체의 마음가짐으로 인해 과학자를 비롯한 누구나 개인으로 존재할 때보다 연합체로 묶일 때 훨씬 어리석어진다.” (p.186-187)

 

 유럽의 마녀사냥은 15세기에서 17세기 사이에 가장 성행했다. 험악한 기후로 작황이 실패하고 식량이 부족해지자 집단에 압박이 심해졌다. 역사가 피터 마셜 교수는 이런 압박으로 인해 “사회적 순수성과 획일성에 대한 요구가 강해지고 일탈자 중 가장 비정상적인 사람들을 배척하는 조치로 이어졌다.” 기상학상의 사건으로 인해 사악한 꿈이 만들어졌다. 이 꿈은 초자연적 힘을 지닌, 게임의 ‘거짓 신자’들이 사람들 사이에 섞여 살면서 이상 기후를 일으켰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하지만 이 거짓 신자들이 부린 마법을 증명하기란 쉽지 않았다. 게임이 이런 상태까지 떨어지면 대체로 집행자들은 특수한 상황이므로 법적 보호를 예외적으로 느슨하게 풀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마녀 사냥꾼 앙리 보게는 이렇게 말했다. “마법은 별개의 범죄다. … 이런 범죄에 대한 재판은 특별한 방식으로 진행되어야 한다. 일반적인 법과 일반적인 절차를 엄격하게 따를 수는 없다.” 프랑스 정치가 장 보댕은 “악마를 가리키는 증거는 모호하고 난해해서 정상적인 법적 절차를 일일이 따르다 보면 백만 명의 마녀 중 한 명도 처벌하지 못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마녀사냥이 절정이 이른 한 세기 반 동안 8만 명 이상이 재판을 받았고, 그중 절반 정도가 처형되었다. 대다수가 빈곤층 여성이고 주로 과부들이었다. 독일의 한 도시에서는 하루에 400명 정도가 살해당했다. (p.257)

 

 작가 앨런 베넷은 케임브리지 킹스칼리지 예배당에서 연설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사립학교 교육은 공정하지 않습니다. 교육을 제공하는 사람들은 압니다. 교육비를 대는 사람도 압니다. 교육비를 대기 위해 희생하는 사람들도 압니다. 그리고 교육받는 사람들도 알고, 또 알아야 합니다.” 영국은 법조계와 정부, 언론계, 예술계의 명성 게임에 사립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과도한 비율로 포진해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영국인의 7퍼센트 정도가 사립 교육을 받지만 이들은 법정 변호사의 70퍼센트 이상과 오스카상 수상자의 60퍼센트를 차지한다. 인구의 1퍼센트 미만이 옥스퍼드나 케임브리지에 다녔지만 이들 대학의 졸업생이 영국의 총리 대다수를 배출했다. 2019년의 한 연구에서는 부장 판사의 71퍼센트, 장관의 57퍼센트, 신문 칼럼니스트의 44퍼센트가 옥스퍼드나 케임브리지 출신으로 나타났다. 2010년에서 2015년까지 의회를 구성한 총리와 야당 대표의 학력 역시 정확히 일치했다. 모두 옥스퍼드에서 철학, 정치학, 경제학을 전공했다(야당의 예비 내각 총리, 외무장관, 재무장관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불공정의 주요 원인은 상류층 게임에 진입할 수 있게 해주는 ‘명문 사립학교 동문 인맥’이다. 이튼은 동문 연락처에 평생 접근할 수 있도록 데이터베이스를 유지한다. 그밖에 더 교묘한 불공정 형태가 있다. 이들 명문 사립학교 졸업생들은 기업의 중역 회의실이나 회원제 클럽에서 만나면 그들만의 언어로 말한다(물론 마법의 단어도 사용한다). 그들의 가상현실 시스템이 같은 공장에서 제조되었기 때문에 이들은 서로 무수한 문화적 단서를 감지하면서 한눈에 ‘우리 팀’임을 알아본다. 이 과정은 대부분 무의식 중에 발생한다. 그들은 자연히 서로의 존재에서 힘을 얻고, 서로 지위를 부여하고, 서로의 존재를 통해 자신들이 꾸는 꿈의 진실성을 확인한다. 이튼을 비롯한 명문 사립학교에서 교육받은 사람들이 느끼는 강력한 유대감은 외부의 다른 야심 차고 능력 있는 사람들이 끼어들지 못하게 가로막을 수 있다. 유능한 인재도 그들만의 무의식적 지위의 언어로 소통하지 못해서 결국 갈피를 잡지 못하고 배제된 느낌을 받을 수 있다. (p.347-348)

 

 우리는 남들에게 지위를 줄 수 있고, 그러는 데 비용도 들지 않으며, 지위가 다 떨어져 바닥날 리도 없다는 점을 쉽게 잊는다. 작은 명성의 순간을 만든다는 말은 항상 명성을 사용할 기회를 찾는다는 뜻이다. 남들에게 지위가 높아졌다고 느끼게 해주면 그들도 우리의 영향력을 인정할 가능성이 커진다. 부하 직원에게 부탁을 하든 업무를 맡기든 미묘하게라도 지배의 신호를 보내지 않는 것이 좋다. 그래야 그들이 압박감에 짓눌리지 않고 ‘올바르게’ 결정할 수 있다. 어떤 사안에서 자기에게 선택지가 없다는 생각이 들면 자기가 하는 행동을 좋게 생각하기 어려워진다. 그리고 그 방법도 저마다의 문화적 규칙에 따라 다르고, 특히 서구에서 아시아권으로 넘어가면서 달라진다. 다만 연구에 따르면 개인주의 사회에서는 개인의 ‘자유를 상기시키는’ 방법이 상대를 설득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 연구에서는 참가자들에게 버스 요금을 빌려 달라는 사람의 부탁을 “들어주거나 거절할 수 있다”고 알렸을 때 부탁을 들어주는 비율이 16퍼센트에서 40퍼센트로 높아졌다. 나는 이것이 지위로 인해 나타난 현상이라고 추정한다. ‘옳은’ 일을 해야 한다는 압박감을 느끼면 아무리 부드러운 압박이라도 지배에 순응해 행동하는 게 될 뿐이다. 그러면 지위는 플레이어들이 즐길 수 있는 그들의 것이 아니라 그들이 순응한 상대의 것이 된다. 반면에 자유롭게 결정했다고 생각한다면 플레이어들은 자신이 나약하지 않고 도덕적이며 따라서 너그러운 행동의 대가로 정당하게 보상을 받았다고 느끼게 된다. (p.398)

 

 어떤 지위는 다른 지위보다 손쉽게 얻을 수 있다. 당신은 그냥 남들을 판단하기만 하면 된다. 지위는 상대적인 개념이므로 남을 깎아내리면 내 마음속에서나마 내 지위는 올라간다. 스마트폰과 SNS로 인해 옳고 그름에 대한 평가와 판단이 따르는 세계적인 도덕 게임이 우리 주머니 속으로 들어왔다. 따라서 지금은 이렇게 ‘평가’로 도덕적 지위를 얻는 것이 그 어느 때보다 편리해졌다. 하지만 여기에는 대가가 따라서, 이 지위로 남들을 비참한 처지로 떨어트릴 수 있고, 특히 지배 행동이 결합되면 과격해지기도 한다. 이를 극복하려면 도덕의 영역을 의식적으로 줄이면 도움이 된다. 남들을 판단하는 데 얼마나 많은 시간을 들이는가? 그래서 값싸고 오염된 지위를 얼마나 얻는가? 도덕 영역을 줄인다는 것은 우리의 내면으로 시선을 돌려서 남들의 행동이 아니라 우리의 행동에 관심을 둔다는 뜻이다. 우리가 이해하려 하지도 않고 우습게 보고 증오하기 쉬운, 우리와는 동떨어진 꿈을 꾸는 사람들을 무심히 비난하는 행동을 멈춘다는 뜻이다. (p.4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