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t Read Code

 

4000주 / 올리버 버크먼 / 21세기북스

 

 ‘생활의 지혜’라는 말은 우리의 삶을 최적의 상태로 고칠 필요가 있는 하자 많은 물건으로 취급하는 듯하다. 근무 시간, 운동, 심지어 수면 패턴까지 사용자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어플리케이션과 웨어러블 디바이스들이 끊임없이 개발되고 저녁식사 시간을 최소화할 수 있는 위한 식사 대용 음료인 소이렌트(Soylent)까지 등장했다. 수천 개의 주방용품부터 온라인뱅킹에 이르기까지 천여 가지 제품과 서비스의 판매 포인트는 효율적인 시간 사용에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시간 관리에 대한 대부분의 조언들이 간과하고 있는 무서운 진실이 있다. 시간은 천방지축 뛰어다니는 어린아이와 같다는 것이다. 시간을 통제하고 자신의 의제에 맞추려 하면 할수록, 시간은 멀리 도망간다. 시간의 여유를 가져다줄 것이라고 장담하던 기술들의 예를 들어보자. 논리적으로 생각하면 식기세척기, 전자레인지, 그리고 비행기를 사용하면 삶은 더 풍족해지고 느긋한 시간적 여유가 보장되어야 한다. 하지만 나는 그런 사람을 본 적이 없다. 삶의 속도는 더 빨라지고, 사람들은 더 조급해졌다. 오븐 요리를 2시간 동안 느긋하게 기다리던 우리는 지금 전자레인지 앞에서 기다리는 2분도 참지 못하고 약이 올라 수시로 전자레인지 안을 들여다본다. 과거에는 우편으로 사흘이 걸려 받던 소식지를 온라인으로 찾아보며 웹페이지가 열리는 10초도 참지 못해 새로고침 버튼을 누를 준비를 하고 있다.

 

 ‘생산성’은 우리 인생의 덫이다. 꽤 그럴듯해 보이는 효율성을 높이는 삶은 더 빨리 돌아가는 삶을 보장할 것이고, 업무를 빨리 처리할수록 그 자리엔 더 많은 업무가 쌓이게 될 것이다. “일과 생활의 균형”이라는 것을 정확히 정의할 수 없지만, 그 고지에 도달한 도인들의 사례는 찾기 힘든 것이 사실이다. “성공하는 사람들의 오전 7시 전 생활 패턴 6가지”와 같은 행동을 따라한다고 일과 생활의 균형이 어우러진 삶을 산다고 말할 수는 없다. 모든 찰나를 내가 통제할 수 있는 날은 절대 오지 않는다. 받은 편지함의 이메일은 비우기가 무섭게 채워지고 다이어리 속 일정이 반으로 줄 일은 없을 것이며, 회사와 집에서 내가 해야 할 임무를 완전히 수행하고 쉴 수 있는 날이나 데드라인을 놓치거나 실수로 일을 엉망으로 만들었을 때 모두가 아무렇지 않게 넘어가주는 그런 신기한 날들은 절대 오지 않을 것이다. 이처럼 바쁜 생활에 완전히 적응할 때에 마침내 우리의 삶이 지향해야 할 것들에 집중할 수 있게 된다. 패배를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하자. 이 모든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혹시 아는가? 절대 이룰 수 없는 목표를 인정하는 것이 인간에게 더 큰 기쁨이라는 것을.

 

 인간이 시간과 충돌하는 이유는 대부분 고통스러운 현실적 제약들을 피하려는 데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생산성을 높이려는 각종 방법들은 오히려 더 안 좋은 결과를 초래하는데, 그런 전략들이 실제로 현실을 회피하도록 부추기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길지 않다는 현실을 마주하는 것은 고통스럽다. 결국 우리는 힘든 선택들을 피할 수 없고, 한때 꿈꾸어왔던 모든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던 시간은 절대 주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나에게 주어진 시간을 내가 완전히 통제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역할을 잘 수행할 체력, 재능 또는 다른 자원이 부족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의 한계를 직시하기보다는 회피하는 전략을 통해서 무한함을 느끼려 한다.
 우리는 일과 삶의 완벽한 균형이라는 환상을 쫓으며 자신을 더 강하게 밀어붙이거나 힘든 선택이 필요하지 않도록 모든 일에 시간을 분배할 수 있다고 약속하는 시간 관리 시스템을 이용한다. 아니면 아예 시작도 하지 않고 모든 일을 나중으로 미루는데, 이것 역시 삶을 전지전능하게 통제할 수 있다는 느낌을 유지하기 위한 또 다른 수단일 뿐이다. 시작도 하지 않는다면, 성공할 자신이 없는 프로젝트에서 실패를 하면서 좌절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는 심리적으로 무감각해지기 위해 관심을 돌릴 다른 일거리를 찾아 분주하게 그 일에 몰두하며 마음을 채운다.

 

 현실을 부정하는 것은 결코 효과가 없다. 현실을 부정하면 내가 생의 어느 순간 모든 것을 다 장악할 수 있는 날이 오지 않을까 하는 착각에 잠시 안도감을 느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충분히’ 잘 하고 있다거나 존재 자체로 ‘충분하다’는 느낌은 받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현대 사회에서 ‘충분하다’는 것은 모든 것을 완벽하게 통제하는 것을 의미하지만, 사실 그것은 그 누구도 도달할 수 없는 경지이기 때문이다. 그 대신 현실을 통제하기 위해 끝없이 싸우며 더 불안하면서도 성취감은 느낄 수 없는 삶을 가져올 것이다. 예를 들어, 철저하게 시간을 관리해서 모든 일을 시간에 맞춰 해낼 수 있다고 믿을수록 더 많은 일들을 떠맡으면서 각각의 업무가 당신의 시간에 부합하는 가치가 있는지 묻지 않게 된다. 즉 당신이 가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일들로 당신의 시간을 채우게 되는 것이다. 더 서두를수록 굳이 서두를 필요가 없는 일들과 마주치며 더 좌절하게 되고, 미래에 대한 계획을 더 확실하게 세울수록 여전히 남아 있는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 때문에 더 불안해진다. 그리고 자신의 시간에 대한 완전한 지배력을 얻으려 할수록 더 외로워질 것이다. 이 모든 것을 ‘한계의 역설(paradox of limitation)’로 설명할 수 있다. 한계의 역설이란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완전히 통제하고 인간에게 주어진 불가피한 제약에서 자유로워지기 위해 시간을 관리하려 할수록, 삶이 더욱 불안하고 공허해지며 좌절감이 커지는 것을 의미한다. 반면에 인간의 한계성을 마주하고 그 한계성을 받아들이면 삶은 더 생산적이고 의미 있고 즐거워진다. 불안감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자신의 한계를 받아들이는 데에도 분명 한계가 있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어떤 시간 관리법도 현실을 직시하는 것만큼 효과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우리가 눈앞에 놓인 해야 할 일들을 보며 불가능하다는 느낌을 받는다면 그것은 단지 느낌만은 아니다. 엄밀히 말해서 그런 느낌을 받았다는 건 자신이 모든 일을 처리하는 것이 실제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내가 ‘할 수 있는’ 일보다 더 많은 일을 ‘반드시 해야만 하는’ 경우라는 것은 없다. 그런 개념은 말이 되지 않는다. 만약 내가 하고 싶은 일이나 해야 한다고 여기는 일, 다른 사람들이 부탁한 일을 모두 할 수 있는 시간이 없다면, 그건 정말로 시간이 없다는 이야기다. 모든 일을 다 해내지 못해서 심각한 결과가 발생한다고 해도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니 엄밀히 말하면, 할 일들을 끝없이 적어놓고 불안해한다는 것 자체가 비이성적인 행동이다. 우리는 단지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양의 일만을 할 수 있다. 결코 그 이상을 할 수는 없다. 따라서 끝없이 적어놓은 할 일을 다 해치워보라는 폭압적인 내면의 소리는 분명히 잘못된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자신의 한계를 직면하는 고통을 피하기 위해 조용히 앉아 곰곰이 내면의 소리를 이성적으로 생각해볼 시간조차 갖지 않는다.

 

 영국의 역사학자 시릴 노스코트 파킨슨(Cyril Northote Parkinson)은 1955년 ‘파킨슨의 법칙(Parkinson’s law)’으로 알려진 자신의 가설을 정립하며 “작업은 주어진 시간이 완전히 소진될 때까지 늘어진다”라고 말했다. 이것은 단순한 농담이 아니며, 일에만 적용되는 것도 아니다. 이 법칙은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 적용된다. 이는 곧 ‘해야 할 일’은 그 행위를 위해 주어진 시간을 다 채우고 나서야 비로소 끝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효율성의 함정(efficiency trap)’이다. 생산성을 높여준다는 다양한 기술을 사용하고 더 열심히 일을 하도록 자신을 몰아붙이면서 효율적으로 생활하면 여유로운 삶을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다. 다른 모든 조건이 동일하다면, 효율적이고 생산적으로 살수록 새로운 요구사항들이 늘어나면서 당신이 즐기는 여유로운 삶을 상쇄해버릴 것이다. 결국 효율적인 삶은 당신의 일을 끝내기는커녕 새로운 일을 만들어내게 될 것이다.

 

 시간을 더 잘 활용하게 해주고 더 많은 시간을 만들어준다고 약속하는 인터넷 때문에 이런 고통이 더 커진다는 것은 분명하다. 따라서 삶을 최대한 활용하기 위해 사용하는 바로 그 도구 때문에 더 많은 것을 놓친다는 느낌을 받는다. 예를 들어, 페이스북은 내가 참석하고자 하는 행사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효율적인 방법이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내가 참석하고 싶은 더 많은 행사에 대한 정보를 알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다.
 데이트 어플리케이션인 오케이큐피드는 데이트할 이성을 만나는 데 더할 나위 없이 효과적인 방법인 동시에 데이트를 할 수 있는 더 매력적인 사람들에 대한 정보를 끊임없이 제공해주는 역할을 한다. 이메일은 넘쳐나는 메시지에 즉각 응답할 수 있는 탁월한 도구지만, 이메일이 없었다면 애초부터 그런 메시지를 받을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우리가 ‘모든 것을 정복하기’ 위해 사용하는 기술은 결국 ‘우리를 실패하게 만드는’ 도구가 된다. 우리가 정복하려는 ‘모든 것’의 크기를 한없이 키워가기 때문이다.

 

 생산성 중독자로서의 나의 인생은 나 자신을 너무나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모든 것을 해낼 수 있는 사람이라고 내 자신을 믿었지만, 내가 부지런히 처리했던 일들은 내 인생에서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일들이었다는 뼈아픈 사실을 나중에서야 깨닫게 되었다. 그러는 와중에 정말 중요한 것들은 뒤로 점점 밀렸다가 영원히 연기되거나 아니면 마감 직전에야 내 능력에 반도 발휘하지 못한 채 서둘러 처리해야 했다. 신문사 IT 부서에서 정기적으로 비밀번호를 변경하라며 보내온 이메일은 무시해도 상관없었지만 빠르게 비밀번호를 바꿨을 것이다. (제목에 “꼭 읽어보세요!”라고 적혀 있는 이메일은 일반적으로 내용을 읽을 필요가 없다는 표시다.) 반면에 뉴델리에 살고 있는 오랜 친구에게서 받은 이메일과 내가 몇 달 동안 준비해온 기사를 위한 자료는 보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중요한 이메일은 사소하고 긴급한 일들을 다 처리한 다음에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봐야 한다고 스스로에게 말하곤 했다. 그래서 나는 충직하고 성실한 선원처럼 갑판을 치우는 데 전력을 다해서 작은 물건들까지 깨끗하게 치워버렸지만, 그렇게 하루 종일 청소를 해도 갑판은 밤새 다시 새로운 물건들로 빼곡히 채워졌다. 결국 뉴델리에 있는 친구에게 답장을 보내거나 기사를 위한 중요한 자료를 조사할 시간은 결코 오지 않았다. 이렇게 수년을 허비하며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들을 체계적으로 미루는 습관을 기르게 되었다.

 

 우리는 가능한 한 분명하게 우리의 한계를 인정하고, 하이데거가 “죽음을 향해 가는 존재”라고 말한 것이 바로 삶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며 자신의 인생을 살아야 한다. 또한 인생은 리허설이 아니며, 우리의 선택에는 무수한 희생이 뒤따르고, 시간은 오늘, 내일 그리고 다음 달이 지나가면서 계속 닳아서 없어지고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이것은 상투적인 표현처럼 하루하루를 마치 인생의 마지막 날인 것처럼 사는 문제가 아니다. 핵심은 정말로 오늘이 마지막 날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다. 따라서 불분명한 미래에 전적으로 의지해서는 안 된다.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이 유한하다는 진실에 저항하는 강력한 방법 중 하나는 여러 가지 일을 동시에 시작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 순간 여러 분야에서 일들이 빨리 진행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하지만 그럴 경우 한 분야의 일이 잘 풀리지 않거나 두려워지거나 지루하게 느껴질 때마다 다른 분야의 일로 갈아타면서 정작 어떤 일도 제대로 진행하지 못하게 된다. 모든 일을 다 통제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 대신 결국 중요한 것은 하나도 마무리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눈부시게 독창적이면서도 고전적으로 균형이 잡혀 있고, 웅장하면서도 가식이 없는 숨 막힐 듯한 아름다움을 간직한 그 사원의 설계도를 본 사람은 누구나 그 설계도를 사거나 훔치고 싶어 했을 정도였고, 유명한 건축업자들은 그 사원을 자신이 짓게 해달라고 매일 찾아와 간청했다. 하지만 그 건축가는 사흘 밤낮으로 서재에 틀어박혀 설계도를 유심히 바라보다 마침내 설계도를 불태워버렸다. 그는 천재였을지 모르지만, 완벽주의자이기도 했다. 그가 상상한 사원은 완벽했고, 그것을 실제로 구현해내기 위해 타협해야 하는 것들이 밤낮으로 그를 괴롭혔다. 아무리 훌륭한 건축 기술가도 그의 설계를 현실에서 완벽히 구현해지 못할 것이고, 세월의 풍파 때문에 그의 사원을 언제나 원상태로 유지할 수도 없을 것이다. 사원을 실제로 건축함으로써 유한성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는 것은 그가 감당할 수 없는 현실을 직면하는 것을 의미했다. 건축가는 이상적인 환상을 간직하는 것이 모든 한계와 예측 불가능함을 인정하고 현실에 체념하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하고는 설계도를 불태운 것이다.
 브라다탄은 우리가 중요한 것을 미루고 있음을 알게 될 때 보통 이와 비슷한 태도를 보인다고 설명한다. 우리는 자신의 아이디어를 현실로 구현하기 위해 아무리 노력해도 그 모든 시도는 결국 우리의 완벽한 꿈에 미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거나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현실은 환상의 세계와 달리 완벽한 통제가 불가능한 영역이며, 우리 머릿속에 있는 완벽한 기준을 충족시켜줄 리 만무하다. 재능의 한계와 시간적 제약이 있고 다른 사람들의 행동과 상황을 완전히 통제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가 만든 것들은 언제나 완벽할 수 없다. 이 말이 허무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여기에는 자유로운 메시지가 담겨 있다. 자신이 맡은 프로젝트를 잘 해내지 못할 것 같은 걱정에 망설이고 있다면, 한시름 놓아도 좋다. 당신의 상상 속 흠잡을 데 없는 기준으로 판단했을 때는 잘 할 수 없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니 일단 시작하는 것이 중요하다.

 

 카프카가 바우어를 만나기 20년 전에 1,000킬로미터나 떨어진 파리에서 프랑스의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Henri Bergson)은 그의 저서 《시간과 자유의지(Time and Free Will)》에서 카프카가 겪은 문제의 핵심을 파고들었다. 베르그송은 “우리가 마음대로 상상하는 미래는 하나같이 다 매력적이고 다양한 모습이기 때문에” 한 가지 길을 선택하기보다는 언제나 우유부단한 결정을 하게 된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우리는 직업적으로 성공을 하고 부모이자 배우자로서의 역할 훌륭하게 해내는 동시에 마라톤 연습이나 명상 수련에 전념하거나 지역 사회에서 자원봉사를 하는 삶에 대한 환상을 갖기 쉽다. 상상 속에서는 이 모든 것이 동시에 완벽하게 펼쳐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삶들 중 어느 하나라도 선택해서 실제로 살기 시작하는 순간, 다른 일 때문에 한 가지 일에 충분한 시간을 쏟지 못하는 등 타협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또한 모든 일들이 생각처럼 완벽하게 실현되지 않고, 그 결과 실제 삶은 생각했던 것보다 너무나 실망스러울 수밖에 없음을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베르그송은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미래를 상상하는 것은 실제 미래보다 더 생산적일 수 있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가 “소유보다 희망에서, 현실보다 꿈에서 더 많은 매력을 찾는 이유”라고 설명한다. 다시 말해, 절망적으로 보이는 베르그송의 말은 사실 우리를 강박에서 해방시켜주는 메시지일 수 있다. 현실 세계에서 우리가 어떤 삶을 선택한다는 것은 곧 다른 대안의 삶을 포기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어떤 것도 잃지 않을 수 있다는 일말의 희망으로 지금 해야 할 일을 미루거나 책임을 지지 않으려 해서는 안 된다. 중요한 하나를 얻기 위해 나머지를 잃는 것은 당연하다. 다행스럽게도 버스는 이미 출발했다.

 

 게다가 구딘은 우리가 ‘정착’하는 삶을 그가 ‘고군분투’하는 삶이라고 칭한 것 혹은 ‘최선을 다해 사는 삶’과 흔히 비교한다고 지적한다. 하지만 이것은 잘못된 비교인데, ‘정착’하는 것이 불가피하기 때문이 아니라 최선을 다하는 삶에도 ‘정착’하는 것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그는 “어떤 것에 쏟은 노력을 인정받기 위해서는 비교적 지속적으로 그것에 ‘정착’해야 한다”라고 말한다. 다른 분야에 대한 잠재적 가능성을 포기하고 법률, 예술, 정치 등 한 분야에 ‘정착’하지 않는다면 그 분야에서 최고로 인정받는 자리에 오를 수 없다는 것이다. 여기 저기 기웃거리기만 하면 어느 분야에서도 결코 성공할 수 없다. 남녀관계도 마찬가지다. 그 어떤 관계도 완벽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 관계에 적어도 마음먹은 기간 동안 정착하려는 의지, 즉 더 나은 연인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수없이 많은 유혹들을 떨쳐버리는 용기가 없다면 절대로 만족스러운 관계를 만들 수 없다.

 

 유한성을 마주하지 않기 위한, 다시 말해 상호 배타적인 선택사항들 중에서 선택할 필요가 없다는 믿음을 지키기 위한 우리의 노력 중에서 가장 큰 아이러니는 번복할 수 없는 방식으로 선택을 하게 했을 때 자신의 선택에 더 큰 행복을 느낀다는 것이다. 우리는 유한함 속에서도 무한히 자유로운 미래에 대한 환상을 유지하기 위해 환상으로 가는 다리가 불타 없어지는 것을 어떤 방식으로든 막으려 할 것이다. 하지만 일단 그 다리를 태우고 나면 대부분은 자기 앞에 놓인 유한함에 대해 만족한다.

 

 사람들의 주의력을 ‘자원’으로 묘사한다는 것 자체가 우리 삶에서 그것이 갖는 중요성을 미묘하게 왜곡하고 있다. 음식, 돈, 전기와 같이 우리가 의존하고 있는 대부분의 자원들은 삶을 편리하게 해주지만 일정 기간 동안은 그것들 없이도 살 수 있다. 반면 주의를 기울인다는 것은 곧 삶 그 자체를 의미한다. 다시 말해, 살아 있다는 경험은 다름 아닌 내가 관심을 기울였던 모든 것의 집합이다.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되돌아보면 매 순간 우리가 관심을 기울인 것이 곧 우리의 삶이 되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별로 가치를 두지 않는 일에 주의를 기울인다는 것은 인생을 대가로 치르는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산만함’을 문자메시지의 도착을 알리는 알림음이나 끔찍한 뉴스 때문에 일을 하다가 순간적으로 집중력이 떨어지는 현상으로 국한할 필요는 없다. 업무 자체가 산만함을 의미할 수도 있다. 가령 의미 없는 일에 관심의 일부, 즉 인생의 일부를 투자하는 것도 산만함이라고 할 수 있다.

 

 전 페이스북 투자자이자 현재는 비판가로 돌아선 로저 맥나미(Roger McNamee)는 소셜미디어가 갖춘 시스템의 효율성이 무자비할 정도의 수준에 도달한 지금 사용자들을 “판매 중인 제품”이라 부르는 상투적 표현조차 적절해 보이지 않는다고 말한다. 결국 사용자들은 기업으로부터 그들이 만든 제품보다 못한 취급을 받는다. 맥나미는 이쯤 되면 사용자에 대한 올바른 비유는 ‘연료’ 정도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고 말한다. 즉 실리콘밸리라는 불에 던져진 통나무처럼 우리의 모든 것이 소진될 때까지 가차 없이 비인간적으로 착취당하는 ‘관심사 저장소’와 같다.

 

 현재의 경험이 고통스러우면 도망가고자 하는 욕망이 생긴다. 이것은 맨몸에 얼음물을 끼얹거나 주사를 맞는 것과 같이 신체적 고통을 참기 어려워 다른 곳으로 관심을 돌릴 필요가 있는 경우에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리고 이것은 조금 더 미묘하지만 일상생활 속 산만함에도 적용된다.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소셜미디어에 눈길이 갈 때, 보통 열정적으로 집중을 하고 있지는 않다. 사실 지금 하고 있는 일에서 받는 불편한 느낌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 일을 외면할 수 있는 작은 구실을 찾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는 마지못해서가 아니라 약간의 위안을 얻기 위해 트위터의 파일온이나 가십 사이트에 슬그머니 접속한다. 실리콘밸리의 침략자들이 ‘우리의 관심을 차지하기 위한 쟁탈전’을 벌이고 있다고 이야기하는데, 그게 사실이라면 전쟁터에서 우리는 적과 협력하고 있는 셈이다.

 

 반드시 살펴봐야 할 정말 이상한 사실이 하나 있다. 왜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하고 싶었던 중요한 일에 집중하는 것을 그토록 불편하게 생각하는 걸까? 그리고는 별로 하고 싶지 않았던 일에 정신이 팔려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너무 불쾌하거나 두려운 일들을 피하고 싶은 마음은 그다지 놀랍지 않다. 하지만 현대인들의 더 큰 문제는 지루함이다. 지루함은 아무런 예고도 설명도 없이 모습을 드러낸다.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들이 갑자기 너무나 지루하게 느껴져 한순간이라도 더 집중할 수 없게 되어버리는 것이다.
 이 미스터리에 대한 해답은 우리가 주의를 산만하게 하는 요소에 굴복하는 순간순간들이 바로 인간의 유한성을 마주하는 고통스러운 상황을 회피하려는 노력의 하나라는 것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한정된 시간은 물론이고, 특히 산만함에 있어서는 시간을 완벽하게 통제하지 못하고 성과를 확신할 수 없게 만드는 상황까지, 모두가 외면하고 싶은 삶의 요소들이다. (언젠가 죽음이 이 모든 것을 끝낼 것이라는 매우 불쾌한 확신은 제외하고 말이다.) 특히 우리는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에 집중하려고 할 때 한계에 직면할 수밖에 없는데, 자신이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 일의 경우에는 그 한계가 더욱 불편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그런 불편함을 외면하고 싶은 순간에 우리는 지루함을 느끼며 중요한 일에서 멀어지려 한다.

 

 망망대해 같은 온라인상에서 주의가 산만해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대륙 건너편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이 실시간으로 업데이트되고, 원하는 방식으로 자유롭게 자신을 표현할 수 있으며, 무한히 올라오는 뉴스피드를 계속 스크롤할 수 있는 곳이 바로 온라인 공간이다. 평론가 제임스 듀스터버그(James Duesterberg)가 “공간에 구애받지 않고 시간이 무한한 현재로 지속되는 영역”이라고 표현한 온라인 공간에서 우리는 끝없이 표류하며 방황한다. 요즘은 인터넷에서 시간을 때우는 것이 특별히 재미난 일이 아닌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재미를 느낄 필요는 없다. 유한성의 고통을 무디게 하기 위해서는 제한되지 않는 자유로움을 만끽하기만 하면 된다.

 

 이 시점에서 산만함의 충동을 뿌리칠 수 있는 비결을 공개해야 할 듯하다. 가치 있게 여기는 일이나 선뜻 포기할 수 없는 일에 정해진 시간 동안 집중하려 할 때 불쾌함을 덜 느낄 수 있는 방법 말이다. 유감스럽지만 그런 비결 따위는 없다. 강력한 산만함이라는 적에 맞서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그저 ‘상황이 다를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는 것’뿐이다. 다시 말해 불쾌한 감정은 유한한 인간이 아주 어렵지만 가치 있는 일을 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삶을 완전히 통제할 수 없다는 한계에 직면할 때 느끼는 감정이다.

 

 분명하게 이야기하자면, 원하는 미래를 위해 계획을 세우거나 은퇴를 위해 돈을 모으거나 투표를 하는 것이 절대 나쁘다고 지적하는 것이 아니다. 미래에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우리의 노력이 문제가 아니다. 우리를 불안하게 하는 것은 현재 상황에서 지금 하는 노력이 성공이라는 대가로 돌아올 수 있을지를 확인하고자 하는 우리의 욕구다. 물론 연인이 떠나지 않기를 바라면서 행복한 미래를 위해 상대방에게 최선을 다하는 것은 바람직하다. 하지만 앞으로 두 사람의 관계가 어떻게 될지 지금 확인하고자 하는 것은 죽을 때까지 스트레스를 받는 삶을 살겠다고 작정한 것이나 다름없다. 따라서 불안감에 대한 놀랍고도 효과적인 해독제는 미래에 대한 확신을 얻고자 하는 우리의 욕구는 결코 충족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뿐이다. 수없이 체계적인 계획을 세우고 조바심을 내며 여유 있게 공항으로 출발한다고 해도 미래에 대한 확신을 얻을 수는 없다.

 

 이처럼 미래에 초점을 맞추면 ‘언젠가 마침내’와 같은 마음을 가지고 살게 된다. “‘언젠가 마침내 내가 맡은 모든 일을 다 해낼 수 있게 되면’, ‘언젠가 마침내 내가 선택한 후보자가 선출되면’, ‘언젠가 마침내 나의 이상형을 만나면’, ‘언젠가는 마침내 내 심리적 문제를 해결하면’ 그때서야 마음놓고 자신이 추구하던 삶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런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은 자신이 만족감과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이유가 아직 목표한 것을 이루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목표로 한 것을 이룰 때 비로소 자신이 자기 시간의 주인이며 스스로 자신의 삶을 책임지고 있다는 느낌을 가질 수 있다고 여긴다. 그들은 이런 방식으로 지금 이 순간 안정감을 찾으려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하다. 현재를 더 나은 미래로 가기 위한 통로로 여기는 상태에서는 현재에서 만족감이나 안정감을 느낄 수 없다.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모두 해내고 이상형의 배우자를 만난다고 해도 그들은 만족감을 다음으로 유보할 만한 다른 이유를 찾아낼 것이 분명하다.

 

 영국의 극작가 톰 스토파드(Tom Stoppard)는 자신의 희곡 《유토피아의 해변(The Coast of Utopia)》에서 난파선에 빠져 익사한 아들의 죽음을 받아들이기 위해 애쓰는 19세기 러시아 철학자 알렉산드르 게르첸(Alexander Gertsen)의 대사를 통해 어른이 되는 결실을 맺지 못했다고 해서 아들의 인생이 가치가 없는 것은 아님을 강력하게 표현한다. 게르첸은 “아이들은 성장하기 때문에 우리는 아이의 목적이 성장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아이의 목적은 아이가 되는 것이다. 자연은 단 하루만 지속되는 생명이라도 그 생명을 멸시하지 않는다. 그 생명은 자신이 사는 그 하루에 모든 것을 쏟아붓는다. … 인생의 풍부함은 그 흐름 속에 있다. 나중에는 너무 늦다”라고 게르첸은 말한다.

 

 이와 같은 역사적 맥락 속에서 여가의 의미를 이해하고 나면, 적어도 여가의 일부를 오로지 즐거움을 위해 ‘낭비하며’ 보내는 것이 시간을 낭비하지 않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암암리에 이도 저도 아닌 미래지향적 자기계발에 시간을 쏟기보다 푹 쉬라는 것이다. 단 한 번뿐인 인생을 온전히 느끼기 위해서는 모든 여유 시간을 개인적인 성장을 위해 사용해서는 안 된다. 이런 관점에서 빈둥거림은 용납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상 의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시몬 드 보브아르는 이런 말을 남겼다. “노인에게 와인 한 잔을 마시는 행위가 아무런 만족을 줄 수 없다면, 인간의 생산성과 부는 한낱 의미 없는 신화에 지나지 않는다. 생산성과 부는 개인이 되찾을 수 있을 때, 생생한 즐거움으로 그것을 만끽할 수 있을 때에만 의미가 있다.”

 

 철학자 존 그레이(John Gray)는 “현대 사회에서 나태함만큼 낯선 개념은 없다”라고 말한다. 또한 “하나의 행위가 다른 목적을 이루기 위한 발판이 되지 못하면 무의미하다고 간주되는 시대에 어떻게 놀이가 존재할 수 있겠는가?”라고 덧붙인다. 이런 시대에 10킬로미터 달리기를 완주하기 위해 훈련을 하고 영적인 깨달음을 얻기 위해 명상 수련에 참가하는 것과 달리 오로지 휴식만을 위해 잠시 하던 일을 완전히 멈추는 것은 즐거움보다는 불편한 감정만을 불러올 뿐이다. 하지만 그 불편한 감정이 휴식을 위한 휴식을 취하지 말라는 신호는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온전한 휴식을 취해야 한다는 신호이다.

 

 그러나 인생에서 문제가 없는 상태란 결코 오지 않는다. 더 중요한 건 우리는 절대 그런 상태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문제가 전혀 없는 삶에서는 어떤 일도 할 가치가 없으며 따라서 삶 자체가 무의미해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정말로 ‘문제’라는 것은 무엇일까? 문제란 일반적으로 스스로 고민해서 해결할 것을 요구하는 모든 것을 의미한다. 이런 요구가 없는 삶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모든 문제를 해결해 뿌리째 뽑아버리겠다는 말도 안 되는 목표를 포기하는 순간 인생이란 그저 꼬리에 꼬리를 무는 문제들을 끊임없이 해결하는 과정이며, 그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시간을 들이는 것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된다. 다시 말해, 우리 삶에 문제가 생겼다는 건 의미 있는 존재에 결함이 있다는 걸 의미하는 게 아니다. 문제란 존재의 본질 그 자체다.

 

 심리학 교수인 로버트 보이스(Robert Boice)는 동료 학자들의 글쓰기 습관에 대해 연구했는데, 가장 생산적이고 성공적으로 글을 쓰는 학자들은 일반적으로 다른 사람들에 비해 일상의 작은 부분을 글쓰기에 할애하며 매일 꾸준히 글을 써온 이들이었다. 그들은 하루하루에 많은 글을 쓰지 못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인내심을 길렀으며, 그 결과 장기적으로 훨씬 더 많은 글을 쓸 수 있었다. 그들은 매일 짧게는 10분에서 최대 4시간 동안 글을 썼고, 주말에는 어김없이 쉬었다.
 보이스는 이 규칙을 박사과정의 학생들에게 가르쳐주려 했지만 학생들은 그런 이야기를 들을 여유가 없었다. 논문 마감일이 다가오면서 그들은 항의했고, 보이스가 말한 자유로운 작업 방식을 감당하지 못했다. 그들은 논문을 끝내는 것에 급급했다. 그것도 아주 빨리! 그러나 이와 같은 학생들의 반응은 보이스가 주장하는 것의 핵심을 보여준다. 적절한 속도 이상으로 서두르면서 결승점까지 질주하려는 학생들의 조바심은 경주에 방해가 될 뿐이다. 창의적인 활동을 위해서는 그에 걸맞는 적정한 속도가 있는데, 학생들은 그 속도를 스스로 통제할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느끼는 불편함을 견디지 못했다. 그들은 그 불편함에서 벗어나기 위해 작업에는 손도 대지 않거나 하루 종일 스트레스를 받으며 그야말로 폭주하듯 글을 써내려갔다. 그 결과 그 모든 과정에 필요한 노력을 싫어하게 되면서 모든 일을 다시 나중으로 미루게 되었다.
 급진적 점진주의 접근법에서 가장 강조하는 것 중 한 가지는 활기가 넘치고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다는 느낌이 들더라도 정해진 시간이 끝났다면 기꺼이 작업을 멈추는 것이다. 이는 생산성에 대한 일반적인 조언에 역행한다. 주어진 프로젝트를 50분 동안 하기로 결정했다면 일단 50분이 지나면 손을 떼는 것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보이스가 설명했듯이, 자신이 정해놓은 시간 이후에도 계속 작업을 하려는 충동은 “그 일을 끝내지 못할 것 같고 충분히 생산적이지 못하며 다시는 그런 시간을 갖지 못할 것이라는 조바심” 때문이다. 하지만 멈추는 것은 그 프로젝트를 계속 이어갈 수 있게 해주는 인내의 근육을 강화해주고 평생 일하는 동안 생산성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된다.

 

 다른 모든 조건이 동일하다면, 돈과 마찬가지로 시간도 많을수록 좋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시간을 혼자 경험해야 한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시간을 가지고 사람들을 만나고, 데이트를 하고, 아이들을 기르고, 사업을 하고, 정치 활동을 하고, 기술 발전을 이루는 등 셀 수 없이 많은 중요한 일들을 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의 시간과 자신의 시간을 동기화할 필요가 있다. 사실 시간이 아무리 많아도 그 시간을 다른 사람과 함께 사용할 기회가 없다는 건 그저 그 시간은 쓸모없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끔찍할 정도로 불쾌한 경험이 된다. 이런 까닭에 전근대 사람들에게 가장 무서운 형벌은 소속된 집단의 생활 리듬을 따라갈 수 없도록 물리적으로 추방되어 외딴 곳에 버려지는 것이었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하는 시간을 위해 자신의 시간에 대한 통제권을 일부 포기할 때 얼마나 큰 이익을 얻는지 알 수 있는 또 다른 방법은 사람들을 억지로 그렇게 하지 못하게 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지켜보는 것이다. 역사학자 클라이브 포스(Clive Foss)는 과거 소련 지도부가 국가를 효율적인 기계처럼 바꾸려는 열망에 사로잡혀 스스로 시간을 재설계하기 시작했을 때 얼마나 끔찍한 일이 벌어졌는지 설명한다. 소련은 오랫동안 효율성 전문가인 프레드릭 윈슬로 테일러(Frederick Winslow Taylor)로부터 영감을 얻었는데, 그가 말한 “과학 경영(scientific management)” 철학의 목표는 미국 공장 노동자들로부터 가능한 최대의 생산량을 짜내는 것이었다. 당시 요제프 스탈린(Josef Stalin)의 수석 경제학자였던 유리 라린(Yuri Larin)은 소련의 공장들을 1년 내내 쉬지 않고 매일 가동시키겠다는 터무니없이 야심찬 계획을 세웠다. 1929년 8월, 그는 이제부터 일주일은 7일이 아니라 5일이며, 4일 동안 일을 하고 하루 휴식을 취하게 될 것이라고 발표했다. 이 시스템의 가장 결정적인 부분은 모든 노동자들이 같은 달력을 따르는 것은 아니라는 발상이었다. 즉, 노동자들을 노란색, 녹색, 주황색, 보라색, 빨간색의 5개의 그룹으로 나눈 다음 5개 그룹이 서로 다른 날을 휴일로 삼게 하여 공장이 하루도 운영을 중단하지 않게 한 것이다. 한편 소련 당국은 이 시스템을 도입하면 프롤레타리아 계층에게도 많은 혜택이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쉬는 날이 많아지면서 문화 시설과 슈퍼마켓에 고객들이 꾸준히 유입되는 대신 덜 붐비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작가 주디스 슐레비츠가 설명했듯이, 이 시스템이 소련의 일반 시민들에게 미친 효과는 사회생활의 가능성을 파괴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근무 시간을 조정하는 간단한 문제였다. 하지만 서로 다른 그룹에 배정된 두 명의 친구는 결코 같은 날에 자유롭게 어울릴 수 없었다. 남편과 아내는 같은 그룹에 배정되기로 되어 있었지만 가끔은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었고, 그것이 가족들에게 극심한 스트레스가 되었다. 명백한 이유로 일요일 종교 모임에도 지장이 생겼다. 모스크바의 관점에서는 둘 다 문제가 되지 않았는데, 국가 권력의 경쟁 세력인 가족과 교회의 핵심을 약화하는 것이 공산주의 사명의 일부였기 때문이다. 이 실험에 대해 기록한 역사학자 에드워드 리처즈(Edward G. Richards)는 “훌륭한 마르크스주의의 방식에 따라, 레닌의 미망인은 일요일에 모든 가족이 모인다는 사실이 일요일을 폐지해야 할 충분한 이유가 된다고 여겼다”라고 적고 있다. 한 노동자는 대담하게도 관영신문인 〈프라우다(Pravda)〉에 불만을 토로했다. “아내가 공장에 있고 아이들은 학교에 있는데, 집에서 무엇을 해야 할까요? 공공 찻집으로 가는 것 말고는 뭘 할 수 있나요? 모든 근로자가 교대로 근무하면서 함께 쉬지 못한다면 그것을 인생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혼자서 기념해야 한다면 그것은 휴일이 아닙니다.” 개편된 근무체계는 1940년까지 지속되다가 기계 정비 문제로 폐지되었다. 시간의 가치는 자신이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나 많은지가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과 얼마나 삶의 리듬을 맞출 수 있는지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소련 정부가 우연히 입증한 후에 일어난 변화였다.

 

 당신과 당신의 배우자, 그리고 당신의 가장 친한 친구들은 모두 소련에서 서로 다른 작업 그룹에 배정된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아내와 내가 진지한 대화를 하기 위해 일주일 중 1시간을 내는 것이 힘든 이유는 엄밀히 따져보면 보통 우리가 말하는 ‘시간이 없기 때문’은 아니다. 시간은 충분하지만, 관련된 모든 사람이 같은 시간에 마주앉을 가능성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신만의 개인적인 일정을 자유롭게 추구하면서 오직 일에 얽매인 채 서로 맞물릴 수 없는 삶을 구축하고 있다.
 이 모든 것에는 정치적인 의미도 있는데, (회의, 집회, 시위, 투표권 행사 등의) 풀뿌리 정치는 비동기화된 사람들은 참여하기 힘든 중요한 협력 활동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 결과 생겨난 집단행동의 공백을 독재자들이 채우게 되는데, 이런 독재자들은 (서로에게서 멀어져서 소파에 틀어박혀 TV 선전에 현혹된 채) 단절되어 있는 사람들의 대중적 지지를 통해 권력을 얻게 된다.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는 자신의 저서 《전체주의의 기원(The Origins of Totalitarianism)》에서 “전체주의 운동은 원자화되고 고립된 개인들이 집단적으로 조직화된 것이다”라고 썼다. 독재자의 지지자들 사이의 유일한 유대감은 오직 독재자에 대한 지지여야 한다는 것은 독재자 자신의 이익을 위한 것일 뿐이다. 2020년 미니애폴리스 경찰에 의해 조지 플로이드가 살해된 후 전 세계적으로 시위가 벌어졌던 것처럼 동시적 행동이 고립을 뚫고 나오는 경우, 시위자들이 윌리엄 맥닐이 “개인적 확대감이라는 이상한 감각”이라고 말한 것과 같은 시간이 점점 짙어지고 강해지며 일종의 황홀감에 빠져드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고 말하는 것을 종종 들을 수 있다.

 

 시간과 에너지가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필연적으로 모든 것을 성취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런 전략적 미성취에는 큰 이점이 있는데, 삶의 여러 가지 영역 중에서 탁월하게 해낼 수 없는 분야를 미리 결정해둘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과 에너지를 더욱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 처음부터 실패하려고 했던 일에 실패한다고 해서 실망하지는 않을 것이다. 작가 존 애커프(Jon Acuff)는 “모든 것을 할 수 없다고 느낄 때 우리는 수치심을 느끼며 포기하게 된다. (하지만) 어떤 것들을 망쳐버릴지 미리 결정해두면 … 수치심으로 인한 아픔에서 벗어날 수 있다”라고 말한다. 자신의 에너지를 전혀 사용하지 않을 목표로 ‘정원 관리’ 또는 ‘깔끔한 부엌’을 선택하면 잘 관리하지 못한 정원이나 뒤죽박죽인 부엌에 그리 신경을 쓰지 않게 될 것이다.

 

 소셜미디어는 잘못된 것들에 관심을 기울여서 시간을 낭비하게 만드는 거대한 기계지만(106~111쪽), 동시에 같은 이유로 너무 많은 일들에 관심을 쏟게 만드는 기구이기도 하다. 비록 그것들이 논쟁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가치가 있다 하더라도 말이다. 오늘날 우리는 끝없이 이어지는 잔혹하고 불공정한 상황들을 목격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 시간을 쏟고 기부를 하는 것이 마땅할지는 몰라도 그 모든 잔혹한 행위는 전체적으로는 결코 한 사람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이다. (더욱 나쁜 것은 사회 운동가들이 ‘관심경제’의 논리에 따라 자신이 다루고 있는 문제가 그 어떤 상황보다 위급하다고 선전하게 된다는 것이다. 어떤 단체도 모금을 하면서 자신들의 명분이 네 번째나 다섯 번째로 중요하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일단 이런 메커니즘을 이해하면, 어떤 자선 활동이나 사회 운동, 정치 활동에 참여할지 쉽게 결정할 수 있다. 가령 앞으로 2년 동안 자신의 여가 시간을 교도소 개혁을 위한 로비 활동이나 지역구에서 식사 봉사를 하는 데 사용한다고 해서 그것이 아마존 밀림의 화재 문제나 난민 문제가 중요하지 않기 때문은 아니다. 변화를 가져오기 위해서는 유한한 자신의 역량을 관심사에 집중해야 한다는 것을 이해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