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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도시 / 임우진 / 을유문화사

 

 쐐기돌은 조적조가 사라진 후에도 장식으로 남았다. 배산임수가 사라져도 남향은 남았을 뿐 아니라 주택 시장을 독점했다. 그런데 모든 아파트가 남향으로 지어졌으니 모든 사람이 남쪽에서 살게 됐을까? 한국인이라면 누구라도 떠올릴 수 있는 아파트의 구조는 거실과 안방은 남쪽, 두 개의 애들 방과 주방은 반대쪽인 북쪽에 배치된, 4인 가족 기준 32평 표준 평면이다. 일전에 인테리어 설계 의뢰를 해 온 한 가족에게 각각의 방에서 자신이 보내는 시간을 타임워치로 측정해 보게 한 적이 있다. 측정 결과는 그곳에 사는 사람조차 믿기 어려울 정도로 놀라운 것이었다. 해가 드는 남쪽의 안방과 거실은 해가 진 후에나 비로소 사람이 들기 시작했고, 심지어 가장 좋은 자리의 안방은 저녁 10시까지 아무도 들어오지 않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러나 북쪽에 있는 주방과 아이들 방은 오후 내내 형광등을 켜 놓고 사용하고 있었다. 그들은 남향집이 아니라 북향집에 살고 있었다. (p.89-91)

 

 방석과 이부자리와 밥상은 이 온돌이 만들어 놓은 필연적인 ‘쐐기돌’이었다. 그런데 실내에서도 신을 벗지 않는 서양식 입식 문화의 산물인 소파, 침대, 식탁이 수입되어 집을 점령하자, 익숙한 바닥 난방의 포근함을 포기할 수는 없고 그렇다고 힘든 양반다리 하지 않고 허리에 무리를 주지 않는 입식 생활을 거부할 수도 없는 정신 분열적 상황을 맞이한다. 엉덩이에 전해지는 온기가 필요했으니 소파를 등받이로 쓰고 바닥에 앉았고, 따뜻한 공기만으로는 아쉬워 으슬으슬한 몸을 ‘지지기’ 위해 침대 위에 전기장판을 깔고 잠을 청했다.
 인간의 오감 중 촉각은 후각과 더불어 가장 원초적이고, 일단 그것이 습관화되어 체내화되면 그 후에는 더 이상 벗어나기 힘들 정도로 중독성이 강한 메커니즘이다. 열원과의 직접적인 접촉으로 온기를 인지하는 데 익숙해진 사람들은 피부의 직접 접촉이 없으면 춥다 덥다는 문제를 떠나 기본적인 감각의 결핍을 먼저 느낀다. 한국인이 외국 여행 중에 묵게 되는 호텔 방이나 유스호스텔에서 라디에이터로 잘 데워진 실내 온도에도 불구하고 차가운 타일 바닥 때문에 뭔가 서늘하고 어색하다고 느끼면서 원래 호텔에서 신발을 벗던 사람들도 벗지 못하는 이유다. 항상 발바닥에 전해지던 온기가 빠졌기 때문이다. 한국인은 신발을 벗지 못하거나 바닥에 앉을 수 없으면 집 같은 안정감을 느끼지 못한다. (p.104-105)

 

 아파트의 브랜드 전쟁 덕분에 20년도 안 돼 많은 사람이 ‘부촌처럼 보이는 곳’에서 살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수많은 아파트 브랜드가 난립하고 정말 부촌이 아닌 곳까지 ‘명품’ 브랜드 유치에 성공하는 경우가 속출하자 브랜드 가치의 동반 하락 위험을 걱정한 건설사들은 남들보다 더 부자로 보이고 싶은 소비자의 욕망에 새로운 답을 줘야 했다. 기존 브랜드에 보조 브랜드 명칭(펫네임)을 붙여 ‘캐슬’, ‘카이저’, ‘레전드’, ‘피오레’, ‘아인스’, ‘자이언트’, ‘클래식’, ‘골드’, ‘더 퍼스트’, ‘프레스티지’, ‘노블레스’, ‘센트럴스카이’ 등 온갖 고급스러운 영어 단어를 붙이기 시작한 것이다. 일부 아파트 단지에는 ‘베라힐즈’, ‘블레스티지’, ‘팰리스’, ‘퍼스티지’, ‘첼리투스’ 등 정체불명의 이름을 덧붙이는 경우도 있다. 서울시 서초구 반포동에 있는 래미안 아파트에 ‘퍼스티지’라는 단어를 더해서 ‘반포 래미안 퍼스티지’라는 이름을 지었고, 동부이촌동의 렉스아파트를 재건축하여 지은 아파트에는 ‘래미안 첼리투스’라고 이름 붙였다. 이런 아파트의 분양 광고를 위해서 건설사와 광고 대행사는 “0.1퍼센트”, “VVIP” 같은 고객의 마음을 흡족하게 할 신조어를 만들어 내야 했다.
 그런데 이런 브랜드 인플레이션 현상에 동참하기는커녕 무시한 동네가 있었다. 전통적으로 부자들이 사는 국내 최고의 부촌 아파트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압구정 현대아파트의 경우, 반대로 시공사 측에서 먼저 ‘압구정 아이파크’로 이름 변경을 제안했으나 주민 반대로 무산된다. ‘압구정 현대아파트’의 브랜드 가치가 더 높다고 판단한 것이다. 삼청동은 그들에겐 ‘서민들의 집’인 아파트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압구정동은 그들에겐 ‘요즘 서민들의 아파트’인 아이파크를 용납하지 않았다. ‘부촌’ 분당 구민은 ‘서민 도시’ 성남 시민과 구분되려 하고, ‘기품 있는’ 청담 동민은 ‘돈만 많은’ 강남 구민과 차이를 두고 싶어 한다. 신분과 구분의 역사는 러시아 인형 마트료시카처럼 이 지역에서 저 동네로 무한 복제되어 계속된다. (p.126-127)

 

 광장의 근원을 알아보기 위해 서구 광장의 역사적 기원이나 발전 과정 같은 서양 건축사의 큰 부분까지 설명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여기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어떠한 경우라도 광장은 건물주나 지주 같은 개인이 만든 적이 없다는 점이다. 대부분은 왕이나 교황의 명에 의해 주교나 시장이 건설을 관할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말하자면 광장이라는 존재는 왕권이건 독재자건 혹은 종교의 이름이건 개개인의 영역 위에 있는 ‘권력’이 주도해 만들어 놓은 산물이라는 것이다. 개인이 자기 땅에 무언가를 지어 사익을 찾을 때 권력은 큰 땅에 아무것도 짓지 않는 것으로 그 위엄을 세웠다. 건물을 높이 짓는 것처럼, 건물을 지을 수 있는 비싼 땅에 아무것도 짓지 않는 것 또한 권력의 영역이라는 의미다.
 역사라는 것은 논리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지금은 민주주의와 소통의 장소로 인식되는 광장은, 바로 권력이 그 자신의 필요에 의해 건설한 장소라는 것이 바로 이 역사의 진짜 모습이다. 역사상 가장 짧은 기간 동안 가장 많은 광장을 만든 이가 바로 히틀러나 스탈린 같은 독재자라는 사실이 의미하는 바는 분명하다. 신권의 존엄성을 좀 더 크게 보이도록 하려고 당대의 모든 기술과 예술을 동원해 가장 높고 아름답게 만들어 낸 고딕 교회. 그 높고 아름다운 건물이 대중을 강렬하게 압도하도록 교회 앞은 아무것도 짓지 않고 빈 공간으로 놔뒀고 그것은 오늘날 도심의 중심, 사람들이 만나는 ‘광장’이란 이름으로 남았다. 숭고한 교황을 수천의 신도가 알현하기 위해 필요했던 곳은 성 베드로 성당이고, 영웅 나폴레옹의 전쟁 승리를 선전하기 위해 대규모 군중 동원을 위해 필요했던 큰 공간은 오늘날 전 세계에서 관광객이 가장 많이 모인다는 콩코르드 광장이 되었으며, 남북 대치 시절 적국에게 자신의 군사력을 과장해서 전시하기 위해 건립된 곳은 오늘날 여의도 광장으로 남았다. 왜 천 명도 안 사는 유럽의 조그만 도시에도 근사한 광장이 있는지는 중세 교회의 지배력이 그 조그만 도시에도 그만큼 강력하게 미쳤다는 역사적 맥락과 이어진다. 그런데 황제의 전쟁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우둔한 민중에게 전쟁의 필요성을 선동하기 위해, 누구도 도전할 수 없는 교회의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건립된 그 광장에서, 성경이 찢기고 왕의 참수가 일어나고 독재자의 동상이 무너졌다는 것 또한 광장을 둘러싼 진짜 역사의 아이러니였다. (p.135-137)

 

 아파트에 관련된 모든 이들(정부, 기업, 개인)에게 짭짤한 이득을 가져다주던 부동산 게임이 몇십 년 같은 논리로 지속되자 어느덧 불변의 진리처럼 공고해졌고, 덩치를 급격히 불리기 시작한다. 1970~1980년대 초창기에 지어진 아파트의 재개발 주기가 돌아오자 시장은 지금까지의 부동산 사업 가치를 뛰어넘는 더 큰 보물섬을 발견한다. 기존 아파트의 입주민 협의회가 조합을 설립해서 단지의 크기를 키울수록 조합원에게 돌아오는 혜택이 많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결국 인근 소규모 택지까지 아귀처럼 흡수해 몸집을 불린 거대 단일 아파트 단지가 속출하게 된다. 수십 년간 그랬던 것처럼 국가(지자체 포함)는 단 한 푼의 예산 투입 없이 낙후된 지역(30년 전에는 이곳이 막 새로 개발된 현대적이고 ‘모범’적인 지역이었다)이 깔끔하게 재개발되니 강 건너 불구경하듯 바라본다. 그나마 개발 이익을 환수해 다른 곳에 투자케 하는 정도의 개입이 드물게 시도되나 그것도 공룡처럼 커진 부동산 조합과 금융 자본의 극렬한 반대로 쉽지가 않다. 바로 이 지점을 박인석 교수는 공공의 ‘책임 방기’의 결과라고 지적한 것이다.
 공공은 뒷짐 지고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사이, 한 사람 한 사람의 끈질긴 이기심은 서로 힘을 합해 도시 속에 거대한 그들만의 성을 쌓았다. 이런 단지는 규모가 작고 그 수가 적었을 때는 눈에 띄지 않다가, 이미 도시를 불구로 만들기 시작하고서야 그 문제가 세상에 알려진다. 길은 끊어지고, 통행은 막히고, 교류는 사라지는 도시적 ‘진공 상태’가 된 지역이 곳곳에 속출했다. 남을 못 들어오게 자기 단지를 막으면, 자신도 남의 단지에 못 들어가는 처지가 된다. 그렇게 도시가 진화하면 결국 자신이 도시에서 지낼 수 있는 곳은 (아마도 잘 가꾸어진) 자기 단지밖에 남지 않는다. 결국 모두가 자신의 단지 속에 ‘갇혀 버리는’ 것이다. 누구나 상상할 수 있는 이런 도시의 암울한 미래 시나리오는 지금 당장 내가 얻게 될 분양 이익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멀고 비현실적인 가치일 뿐이다. 공공의 이익은 멀고 모호하지만, 개인의 이득은 쉽고 직관적이다. (p.226-227)

 

 예전보다 화려하고 높게 짓는 건물은 점점 더 사회 원심적으로 지어진다. 4~5층의 저층 아파트 발코니에 서서 집 앞 놀이터에서 노는 아이들을 향해 외쳤던 엄마의 “저녁 먹어라”라는 소리는 반사 강화 삼중 유리로 막힌 30층 고층 아파트 거실에 앉아 핸드폰 GPS로 아들의 위치를 확인하는 엄마의 손가락으로 대체되었다. 아파트 발코니의 엄마와 지상 놀이터의 아이가 서로 보인다는 사실은 건축물과 외부 공간이 서로 연결된, 즉 공간적 구심력이 작용한다는 의미다. 오늘날 우리가 ‘발코니 확장’으로 얻게 된 몇 평의 실내 면적 대신 잃은 것의 실체가 바로 이것이다. 지금 지어지는 고층 아파트는 멀리(사람이 아니라 하늘과 건물)까지 보이는 탁 트인 조망을 가져다줬을진 몰라도 사람과 외부를 완전히 단절시킨다. 한강 조망과 도시 전경은 시각적으로 멋질 수는 있다. 하지만 사람이 없는 ‘무생명의 풍경’일 뿐이다. 그 장면을 장시간 바라보는 사람이 ‘멍해지는’ 이유는 그것이 아름다워서가 아니라, 그 시각 정보에 특별한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아파트 복도나 골목길에서 공을 차던 동네 아이들은 이제 매달 회비를 내고 학원 버스가 데려다주는 스포츠 학원으로 가야만 또래 친구들과 공을 찰 수 있다. 아파트 복도나 골목길에서는 고함 소리 한 번으로 친구들을 불러낼 수 있기 때문에 구심적이지만, 차 타고 가는 학원은 그 선택적 접근성 때문에 원심적이다. 가볍기 때문에 건물을 높게 짓는 데 유리한 재료인 ‘반사 유리’는 공간 내부의 모습을 거리로부터 차단시켜 철저하게 내부를 가려 숨기는 (엄폐) 역할을 한다. 길을 걸어가는 보행자는 건물의 존재만 인지할 뿐 그 안에 있는 사람의 존재는 느끼지 못한다. 바로 옆에서 걸어가면서 수백 명이 일하고 있는 건물 속 사람의 존재를 느끼지 못한다는 사실만큼 사람이 서로 단절돼 있다는 것을 더 잘 보여 주기는 힘들다. (p.259-260)

 

 꽃 가꾸기 경쟁이 만들어 내는 놀라운 변화를 인정한 프랑스 정부는 1972년 별도의 심의회로 독립시켜 심사를 전담케 했고, 2001년에 ‘꽃 마을 국가위원회’라는 이름으로 개명해 확대되었다. 이 위원회는 경쟁의 규칙을 더 가다듬어 생물 다양성을 증대할 수 있는 녹지 공간, 생활 스포츠 공간으로 병행 가능한 녹지 공간 같은 새로운 과제를 부여해 도시 간 경쟁의 수준을 끌어올렸다. 매년 제시되는 주제들은 시민들과 공유되어 갖가지 아이디어를 생산하게 한다. 도입된 지 60년이 넘은 이 꽃 마을 콩쿠르는 지금까지 프랑스 전역에서 4,885개의 도시가 하나 이상의 라벨을 획득했고 그중 265개의 도시만이 최고 등급인 4성 라벨의 영예를 안았다. 매년 40개 정도의 마을에만 주어지는 4성 라벨을 따내기 위해 올해도 이들 도시와 시민들은 그 경쟁에 기꺼이 나서고 있고, 그럴수록 도시는 더욱 아름다워지고 마을 공동체는 더욱 굳건해진다. 그 경쟁은 내년에도 변함없이 계속되겠지만 그 경쟁의 종점은 승리한 이는 있어도 패배한 이는 없는, 모두가 이기는 경쟁이다. 모두를 승자로 만드는 이런 것을 우리는 ‘공공’이라 부른다. (p.279-280)

 

 보통 4인 이상의 가족이 스트레스 없이 생활하려면 기본적으로 약 80제곱미터(24평)의 면적이 필요하다. 그러나 항상 쪼들리는 사회 주택 예산에서 한 가족에게 그 정도 면적을 할애하기 위한 금액을 마련하기는 불가능한 터였다. 건축가는 주어진 예산으로 건설 가능한 40제곱미터의 공간뿐 아니라 차후에 증축할 수 있는 또 다른 40제곱미터의 빈 공간을 함께 분양하자는 기발한 제안을 한다. 비어 있는 절반을 꼭 지어야 할 의무는 없었으나 자신이 노력만 하면 지금 집보다 두 배로 큰 집을 가질 수 있다는 희망과 목표가 생긴 입주자들은 다른 사회 주택 입주자와는 다르게 변해 갔다.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기꺼이 주말에도 일했으며 돈이 모일 때마다 조금씩 집의 반쪽을 자신의 힘으로 완성해 나가는 게 아닌가. 건축가는 절반의 필요와 절반의 희망을 같이 판 것이다. 같은 단지 내의 다른 이의 집이 그럴듯한 모습으로 바뀌어 가자 이웃들은 약간의 안도감(자신도 할 수 있다는)과 약간의 경쟁심(자신은 더 잘하겠다는)으로 동기 부여되었고, 이웃들끼리 자재를 공동 구매하거나 동마다 공통된 색으로 채색을 의논하는 등 서로 대화하고 모이기 시작했다. 자신이 노력하는 데 비례해 집이 변해 가고 자신이 채운 집의 반쪽이 동네 전체 분위기를 바꾸는 데 일조한다는 느낌을 받자, 사람들은 긍정적이고 밝아졌다. 자신의 집을 더 멋지게 가꾸기 위해 더 열정적으로 일터로 향했고, 몇 년 후 동네 입주민 대부분의 가족이 받던 기초 생활비를 받지 않아도 될 정도로 자신만의 힘으로 빈곤에서 벗어났다. 입주민 스스로 지을 수 있는 빈 공간을 준비해 준 것뿐이데 파생된 결과는 번듯한 동네가 생긴 것 이상이었다.
 수십 년 동안 세계에서 아름답고 값비싸며 작품성 있는 건물을 지어 온 서구 선진국의 건축가에게 주어져 온 건축의 노벨상 프리츠커상은 2016년 가장 값싸고 가장 볼품없는 건물을 지어 온 남미 조그만 나라의 이 건축가에게 깊은 감사와 존경의 뜻으로 수상 소식을 전했다. 반쪽 집은 전 세계 많은 건축가와 주택 당국자의 영감을 자극해 가나, 남아공, 태국, 멕시코의 사회 주택에 적용되고 있고, 계속 확산되고 있다. (p.288-290)

 

 

허락되지 않은 내일 / 이한솔 / 돌베개

 

 ‘유별나다’라는 말이, 우리 사회에서는 보통 부정적인 의미로 쓰인다. 누군가 유별나다는 소문이 들리면, 그는 대개 그가 속한 조직에서 꽤나 성가시게 생각하는 사람일 것이다. ‘유별난 것’은 무엇일까. 수직적 문화가 공고한 한국의 조직사회에서는 기존의 문화와 질서를 그대로 따르지 않는 사람들이 보통 이에 해당한다. 이런 유형의 유별난 사람이 집단에서 어떻게 되는지는, 대한민국에 사는 사람이라면 결과를 쉽게 예측할 수 있다. ‘내부 고발자’는 곧장 ‘프로불편러’가 되고, ‘모난 돌이 정 맞아서’ 결국 ‘부적응자’로 낙인이 찍힌다. (p.27)

 

 장애인은 시설로 보내고, 성소수자는 특정 구역에 들어가서 축제를 열라는 사회다. 집단에서 성폭력이 발생해도 “해일이 밀려오는데 조개나 줍고 있다”는 비난에 불편함을 표현할 수 없는 공동체가 즐비하다. 기존 질서와 터부에 균열이 가는 것은 용납되지 않는다. 문화권력이든 사회자본이든, 가진 사람들은 특히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위한 변화를 거부하기 마련이다. 그렇기에 오히려 우리 사회에는 유별나서 불편한 사람들이 꼭 필요하다. 불편함이 세상을 바꿔내고 있다. 다른 방송국 피디로 일하는 친구 예리는 형 덕분에 정상이 무엇인지 다시 인식하게 된 것 같다고 말했다.

방송문화가, 한빛 오빠가 그렇게 하지 않았으면 어땠을까요? 오빠로 인해 정상이 무엇인지를 다시 인식하게 된 것 같아요. 오빠의 행동으로 인해, 이런 게 잘못되었다는 것을 우리도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어요. 여전히 ‘고인물’들은 그렇게 폄하하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장기적으로는 52시간도 정착하고, 방송 현장도 되게 나아지고 있거든요. (예리)

(p.29)

 

 ‘자살’에 대한 몇 가지 오해가 있는 듯하다.
 청년의 죽음은 그것이 사고든 본인의 선택이든 주변 사람들에게 슬픔과 별개로 큰 당혹감을 준다. 죽음 앞에 살아온 시간의 무게는 평등하지만, 죽음 뒤에 남겨진 시간의 가치는 다른 것으로 여겨진다. 사람들은 아무래도 청년에겐 삶을 바꿔나갈 기회가 남아 있다고 기대하는 듯하다. ‘살아 있기만 해도 지금까지와는 다른 삶이 있지 않았을까?’, ‘살아남았다면 얼마나 더 많은 일을 해냈을까?’ 수많은 질문들 사이에는 안타까움과 아쉬움, 황망함이 짙게 배어 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청년의 죽음 중에서 절반은 스스로 선택한 것이다. 남아 있는 삶에 대한 기대가 달라서일 테다. 혹은 지나온 삶에 대한 해석이 달라서일 수도 있다. (p.33)

 

 어떤 청년의 모습은 청년 일반을 대표하지 못한다고 비판받기도 하고, 목소리 큰 사람의 주장이 청년의 모습인 것처럼 호도되기도 한다. 때로는 이런 질문이 따라붙기도 한다. 김용균, 이한빛, 이선호, 변희수 등등 우리가 기억하고 있는 이 이름들은 특이한 청년일까? 모르긴 몰라도 하나는 분명하다. 청년도 한 명의 사람이다. 사회구조 속에 존재하지만, 고민할 것도 많고, 하고 싶은 것도 많고, 희망과 한계를 동시에 경험한다. 사람이라는 존재는 누구나 자기만의 서사를 가지고 있고 다층적인 면모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표면에 드러나는 행위만 보고 말하면 오류가 나기 마련이다. ‘이대남’, ‘이대녀’는 어떤 특징이 있다느니, 90년대생은 어떤 마음가짐으로 살고 있다느니, 이해를 위한 분석은 일정 부분 필요하더라도, 우선은 외적으로 드러나는 특정 집단의 모습을 일반화하지 않아야 꼬인 논의의 실타래가 조금씩 풀릴 수 있다. 나 역시 형에 대한 이해를 그렇게 시작했었다. (p.48)

 

 죽음 중에는 매우 공적인 의미를 갖는 죽음이 있다. 앞서 언급한 민주화 열사들이 그러하고, 김용균처럼 우리 사회를 크게 변화시킨 경우도 그러하다. 다수의 시민들이 그들의 죽음에서 받은 메시지가 있기에, 사회가 투영하는 정형화된 이미지만 강조되는 경향이 있다. 그들의 죽음이 공적이라 해서, 그들의 삶이 오롯이 공적인 것은 아닐 테다. 한빛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아쉬워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그리 멀지 않은 사람이었다. 보통의 사람이었다. 열사라고 하면 보통 사람들의 일상과는 괴리가 있을 듯 하지만, 형은 불평등, 불안, 병들어온 일터의 문화 등 일상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 평범하면서도 당연한 고민을 했을 뿐이었다. (p.51)

 

 서울과 수도권에서 집을 구매할 만한 자산을 모은 청년은 10% 남짓이다. 대기업과 공공기관의 공채를 통과한 청년도 20%가 되지 않는다. 부동산 영끌, 공채시험, 공정에 대한 이슈가 어떤 청년에게는 직접적으로 닿아 있는 것이 분명하지만, 사실 다수의 청년은 애초에 관여할 수 없다. 오히려 집 같지 않은 집에 세 들어 살고 있는 청년, 빽도 자원도 없이 독립해야 하는 청년, 직장에선 산재(산업재해)로 위협받으며 열정페이와 직장 내 괴롭힘으로 상처받는 청년들이 절대다수다. 이들이 경험하는 불평등, 불안, 좌절에서 비롯된 고민이 우리가 아는 청년의 모습이다. (p.57)

 

어쨌든 뭔가를 열심히 한다는 것은 내 삶이 더 나아질 거라는 기대감으로 하는 건데, 요즘은 그게 보이지 않아요. 삶이 나아지는 각도가 어느 정도는 높아야 되는데, 겨우 지금의 내 삶만 유지할 수 있는 완만한 평지인 거죠. 안정적인 삶의 지표라고 고정화된 것들이 있잖아요. 결혼도 해야 되고, 집도 구해야 되고. 어느 정도의 수준은 유지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게 가능해 보이지 않기에 일도 열심히 안 하게 되는 것 같아요.
얼마 전에 집 전세 연장을 했는데, ‘어떤 큰 사건이 없으면 이런 삶에서 벗어날 수는 없겠구나’라는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어떤 사람은 로또를 기대하는 거고, 어떤 사람들은 주식에 걸어보는 거고. 자본이 좀 있는 사람들은 부동산이라든가 투자를 하는 것으로 지금보다 나아진 삶을 계속 꿈꾸는 듯해요. 이전에는 ‘묵묵히 내가 하고 있는 일들을 잘하면 내 삶이 좀 나아질 거야’라는 믿음이 있었다면, 이제는 ‘그것만으로는 부족하구나’라는 생각을 모두가 한 것 같아요. (준완)

(p.71)

 

앞길이 보이는데 상황이 안 좋으면 어떻게 대비라도 하지. 엄청 불안하고 막막한데 아예 안 보이면, 그냥 아무 생각도 안 들고 ‘그런가 보다’ 하는 것이 있어. 청년들이 소박하게 카페 가고 그런 거 있잖아. 그거 다 앞이 안 보이니까 소비도 하고 아이패드도 사고 이런 거 아닐까? 이 길은 언제 사장될지 모르니, 일을 열심히 하지 않게 되고. 아마도 지금보다 환경은 훨씬 안 좋아질 것 같고 내가 지금 받고 있는 돈의 절반도 못 받는다면, 생활을 어찌 해야 할지 막막하지. 다른 직업을 찾아봐야 하나? 그런 막연한 것들을 준비해야 해. 물론 회사에서는 안 그런 척하지. 우리 세대는 기본적으로 이중생활을 하고 있는 것 같아. 나도 그러고 있고. 나는 그래서 몰래몰래 소믈리에를 준비하는…. (진명)

언제 뭔가 뒤통수에 날아올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항상 하고 있어서 섣불리 행복하다고 만족하기도 어려워. 행복을 함부로 얘기하기 쉽지 않아. 망할 ‘소확행’[소소하고 확실한 행복]. 이 단어를 듣고 있자면 기만하는 느낌이 너무 강해. 그러면 큰 행복은 뭔데? 구석으로 몰아가는 느낌이야. 이 정도면 즐거운 거다, 너네는 어차피 소소하지 않은 행복은 불가능하니 이 정도로 만족하라는 느낌이어서…. 차라리 요새 새로 나온 ‘소확횡’이 더 와닿아. 소소하고 확실한 횡령(웃음). (지은)

(p.74)

 

 

모던 테크 / 홍성욱 / EBS Books

 

 드보락은 자신의 연구를 토대로 효율적인 방식의 자판을 개발하는 일에 몰두한다. 그리고 드디어 오른손을 56퍼센트, 왼손을 44퍼센트 사용하며, 가운데 줄을 쓰는 비율은 70퍼센트에 달하는 드보락 자판을 탄생시킨다.
 당시는 제2차 세계대전 중이었다. 드보락은 여러 통로를 통해 해군과 접촉할 수 있는 방법을 물색한다. 해군을 상대로 실제 실험을 해보기 위해서였다. 당시 군부는 기술을 가장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방법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드보락의 이 같은 제안이 받아들여지면서 해군에서 파견된 열네 명을 대상으로 이 두 가지 자판을 놓고 실험을 한다. 그리고 그 결과, 드보락이 만든 자판이 60~70퍼센트 더 효율적이었고, 오타를 적게 낸다는 것도 발견한다. 드보락은 ‘이것으로 게임은 끝났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자판이 과학적이라는 것이 증명되었고, 더 효율적이라는 것 또한 증명되었으니 사람들은 이제 자신이 개발한 자판을 쓸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그의 예상은 빗나갔다. 사람들은 드보락의 자판을 사용하지 않았다.
 드보락의 생각으로는 사람들이 조금만 노력한다면, 단 2~3주의 시간만 할애한다면 새로운 자판을 익혀 오타를 적게 내고 더 효율적으로 타자를 칠 수 있을 텐데 왜 그렇게 하지 않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이미 많은 사람이 쿼티 자판으로 타자를 배웠고, 앞으로 타자를 배울 사람도 쿼티 자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쿼티 자판이 이미 손에 익숙해진 것이다. 사람들은 굳이 세상 사람들이 모두 사용하고 있는 쿼티 자판을 버리면서까지 드보락의 새로운 자판을 배울 이유가 없었다. 드보락은 자신이 만든 자판을 세상에 전파하기 위한 운동을 멈추지 않았지만 결국 실패하고 만다. 후에 드보락은 “나는 인류에게 좋은 일을 하고 싶었다. 그런데 사람들은 바뀌지 않는다”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p.141-144)

 

 포드는 월급을 두 배로 올려준 대신 여러 가지 조건을 내걸었다. 먼저 월급은 현금으로 지급하지 않고 은행 계좌로 입금해주는 것이었다. 노동자들이 월급을 현금으로 받으면 월급날 집에 가는 길에 흥청망청 다 써버리는 일이 비일비재했기 때문이다. 그다음으로 노동자들의 아내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아내는 집에서 남편과 자녀를 돌봐야 한다는 의미였다. 또 포드의 공장에는 특히 이민자들이 많았는데 이민자들은 영어를 배워야 한다는 것, 노동자들은 하숙을 하면 안 된다는 것 등 여러 가지 조건을 내걸고 노동자들이 이 조건들을 어기지 않는지 조사하고 감독하는 사회부라는 부서를 회사 안에 만들었다. 이제 사회부가 노동자들의 일상생활에 개입하기 시작했다. 포드는 이 같은 방식으로 공장 운영에 있어서도 다른 자본가들이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새로운 방식을 도입했다.
 이 포드주의라는 새로운 생산 방식은 어떤 변화를 가져왔을까?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 미국에서는 1년에 120만 대의 자동차가 생산되었다. 그중 60만 대는 포드 공장에서 생산된 것이었다. 그러니까 자동차의 대량생산이 산업의 중심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그 대신 자동차의 가격은 많이 하락했다. 포드는 자동차 가격이 500달러 내로 하락하면 자동차 시장이 넓어질 것이라고 전망했는데, 자동차 가격은 300달러 아래로까지 내려갔다. 그러자 사람들이 월급을 모아서 얼마든지 자동차를 살 수 있는 시대가 열리기 시작했다. (p.251-2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