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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 가격표 / 하워드 스티븐 프리드먼 / 민음사

 

 생명의 가치를 매기는 데 쓰이는 방법은 가격 책정의 목적, 가격이 상징하는 것, 가격 책정에 채택되는 관점이 무엇이냐에 따라 달라진다. 한 개인이 자신이 갑자기 사망할 경우 자신의 수입을 대체하는 데 필요한 돈의 총액을 추산할 때는 환경 위험 요인이 증가하는 것을 예방하기 위해 생명의 가치를 판단하는 정부와 다른 목적과 관점을 지닌다. 마찬가지로 제품 또는 노동자 안정성의 개선을 위해 비용을 얼마나 쓸지 계산해 보려는 기업도 정부와 목적과 관점이 다르다. 이러한 목적과 관점의 차이는 계산법의 차이로 이어지며, 당연히 산출되는 가격표도 달라진다.

 

 생명 가격표는 우리 주변에서 끊임없이 매겨지고 있지만 그 가격을 어떻게 매기는지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경제 전문가, 각종 규제 기관, 비즈니스 분석가, 의료보험회사들이 이런 가격을 매기는 데 사용하는 방법은 전문용어나 법률 용어로 기술되어 있어 이해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생명에 가격을 책정하는 방법과 가격표는 사회의 핵심 가치, 공정함의 기준을 드러내면서 그 사회가 최우선으로 여기는 것이 무엇인지 말해 준다. 이 책은 그러한 가격 산출 방법과 그런 방법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이해와 통찰을 제공하고자 한다.
 산출 방식을 들여다보면 누구나 이러한 가격표가 때때로 불공정하다는 사실을 금방 눈치챌 수 있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런 생명 가격표는 경제, 법, 정책, 인간의 행위에 영향을 미치며 젠더, 인종적, 민족적, 문화적 편견으로 가득 차 있다. 생명 가격표는 노인보다는 청년의 생명이, 가난한 이보다는 부자의 생명이, 흑인보다는 백인의 생명이, 외국인보다는 미국인의 생명이, 낯선 이보다는 가족의 생명이 더 가치 있다고 판단하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 9.11 희생자 가족들 중에는 보상금으로 25만 달러를 받은 가족이 있는가 하면, 그에 30배에 달하는 700만 달러를 받은 가족도 있었다. 얼마 전에는 미국 환경보호국이 노인들의 생명 가격표를 젊은 사람들보다 훨씬 낮게 책정하는 일이 있었으며, 사법 시스템도 희생자의 배경과 신원에 따라 처벌이 크게 달라진다는 사실을 여러 차례 증명해 왔다.

 

 2016년 통계를 보면 아이가 있는 여성의 약 3분의 1이 전업으로 자녀를 돌보았고, 직장에 다니지 않고 집에서 아이를 키우는 부모의 약 80퍼센트가 여성이었다. 노부모를 돌보는 인구도 3분의 2가량을 여성이 차지하면서 남녀 간의 불균형을 보였다. 이처럼 자녀와 부모를 보살피는 일에 전념하면서 여성은 남성보다 소득 획득의 기회를 단념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여성 희생자들은 남성 희생자들보다 경제적 가치가 더 낮은 것으로 계산되었고, 그 결과 그들의 생명에는 낮은 금액의 가격표가 매겨졌다. 9.11 희생자 보상 기금 프로그램이 종료되었을 때, 여성 희생자들에게 지급된 평균 보상금은 남성 희생자들에게 지급된 평균 보상금의 63퍼센트밖에 되지 않았다.
 9.11 희생자 보상금 산출 방식이 돈을 버는 것보다 가족을 돌보는 데 더 많은 시간을 쓰기로 선택한 사람들의 생명에 훨씬 더 낮은 가치를 부여한 것은 분명하다. 그뿐만 아니라 보수는 적더라도 더 큰 공익을 창출하는 직업에 종사한 사람들에게도 불리하게 작용했다.

 

 인권은 모든 인간에게 동일하게 보장되어야 한다. 인간은 모두 ‘평등하게 태어났으므로’ 생명권, 자유권, 행복추구권에 대한 보장은 모든 이에게 적용되어야 한다. 이 원칙은 미국의 독립선언서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세계인권선언문에도 분명하게 명시되어 있다.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자유로우며 그 존엄과 권리에 있어 동등하다.” 희생자 보상금이 일종의 인권이라면, 대체 왜 그것을 경제적 손실을 기준으로 따져야 하는가?
 2004년에 파인버그 역시 이와 같은 결론에 도달하면서 자신의 저서에 “만약 다음번이라는 것이 있다면, 국회가 테러 희생자들에 대한 보상금을 결정할 일이 또 생긴다면, 보상금 수혜 자격이 있는 모든 청구인들에게 동일한 액수의 비과세 보상금을 지급하는 것이 타당하다.”라고 썼다. 그러면서 “이런 정액 지급 방법이 집행하기도 더 쉽고 수혜자들 간의 분열도 최소화할 수 있는데, 이는 사랑하는 가족의 죽음(예를 들어 소방관)이 다른 희생자(주식 중개인이나 금융인)의 생명 가치보다 낮게 평가되었다고 주장할 일이 없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1년 뒤 파인버그는 한층 더 확고한 태도를 취하면서 보상금 산출 방식에 ‘허점’이 있었으며 “개인의 재산과 유가족들의 사정은 보상금 산출에 어떤 영향도 끼쳐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앞서 논의한 내용은 희생자의 가족들에게 지급된 보상금의 액수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나, 과연 납세자의 세금으로 유가족들에게 보상금을 지급하는 것이 공정한 처사인가라는 근본적인 문제도 있다. 앞으로도 테러리스트의 공격은 미국은 물론 세계 곳곳에서 계속될 것이고, 그로 인해 사망하는 미국인들도 생겨날 것이다. 일반적으로 미국에서는 해마다 수천 건의 살인, 사고, 과실로 인한 사망 사건이 발생한다. 2001년에 미국에서 살해당했거나 부주의치사 외 과실치사로 죽은 사람의 수는 9.11 사건으로 사망한 희생자 수보다 5배나 많다. 다른 사건으로 사망한 미국인의 관점에서 보면 9.11 희생자 보상 기금은 그 존재 자체가 불공평하다. 수많은 생명이 사라진 비극적인 일이지만 보상 기금의 창설은 9.11 사건으로 갑작스럽게 사망한 사람들을 교통사고나 살인 사건, 다른 테러 공격이나 과실에 의해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이한 사람들과는 다른 수준으로 격상시키는 셈이기 때문이다. 9.11 희생자의 유가족들을 위해 납세자들의 세금을 재분배한 정부 프로그램은 과연 어떤 사고의 희생자들에게 국고 보상금을 지급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를 촉발시켰다. 그리고 이는 ‘9.11 희생자 유가족들에게는 세금으로 보상금을 지급했는데, 왜 다른 사고의 희생자들에게는 국고 보상금이 지급되지 않는가?’라는 타당한 문제 제기로 이어졌다.

 

 경제적 손실에 초점을 맞추면 성인의 생명 가치도 마이너스 값으로 책정되는 경우가 발생한다. 이런 비인간적인 결과는 민법의 이론적 부산물이 아니다. ‘서스턴 대 뉴욕주(2013)’ 판결은 이런 비인간적인 일이 현실 세계에서 어떤 식으로 벌어지는지 잘 보여 준다. 로리 서스튼의 동생 셰릴은 주립 정신병원에 입원한 환자였다. 셰릴은 심한 장애를 앓고 있어 목욕을 할 때 일대일 감독이 필요했다. 목욕 중에 감독관의 보호 없이 방치되었다가 발작을 일으킨 셰릴은 의식불명 상태로 발견되었고, 하루도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 셰릴은 장애가 심했고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어서 상실된 소득이 없었다. 뉴욕주의 법은 피해자가 겪은 고통에 대한 보상금 지급을 인정하고 있지만, 셰릴의 경우 의식을 회복한 적이 없었다는 이유로 그녀가 고통을 느끼거나 괴로워한 적이 없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이 소송은 손해배상금 지급 없이 기각되었다. 공정하지 않다는 사실이 너무나 명백해서 판사가 이렇게 언급할 정도였다. “차라리 셰릴이 인간이 아니라 동산(動産)이었다면 유가족이 그녀의 죽음으로 상실된 가치를 회수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사실은 너무나 수치스럽고도 터무니없는 일이다. 재판정이 인간 생명에 어떤 본질적 가치도 인정하지 않는 이 법을 적용해야 한다는 사실이 혐오스럽다.”
 여러 사례에서 확인했듯이 금전적 보상을 결정하는 데 경제적 손실에만 지나치게 초점을 맞추어 놓고 투명한 공정성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셰릴의 생명 손실에 대한 금전적 가치를 인정하지 않은 뉴욕주의 민법은 그녀를 보호하는 데 실패했으며, 앞으로도 가족에게 경제적 가치를 제공하지 못하는 사람을 보호할 수 없을 것이다.

 

 여러 연구에 따르면 사형은 희생자가 백인이고 가해자가 흑인인 경우에 적용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전국적으로 사형선고율이 제일 높은 경우는 흑인 피의자가 백인을 살해했을 때였고, 그다음으로 높은 경우는 백인 피의자가 백인을 살해했을 때였다. 가장 낮은 사형선고율을 보인 경우는 흑인 피의자가 흑인을 살해한 사건이었다.

 

 주 정부가 어떤 사람들의 생명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가치 있으므로 더 강력한 보호를 받을 자격이 있다고 노골적으로 암시하는 경우가 많은 것 또한 사실이다. 경찰, 소방관, 선출직 공무원들에게는 특별한 권리가 주어진다는 사실을 떠올려 보자. 캘리포니아주에서는 경찰을 살해한 경우 다른 살인 사건보다 처벌이 더 무겁다. 코네티컷주에는 치안 담당 공무원, 보안관, 교정국 직원, 공무 수행 중인 소방관의 생명을 보호하는 특별 규정이 있다. 이러한 직종의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추가적인 법적 보호는 이러한 사람들이 직업적인 이유로 더 큰 위험에 처할 수 있다는 인식을 반영하는 것일 수도 있고, 사회가 그들의 생명을 다른 생명보다 더 가치 있게 여긴다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이런 직종의 사람들을 살해한 사건에 더 무거운 처벌을 내리는 것은 그들의 죽음이 교사, 사회복지사, 의사, 간호사와 같은 다른 고학력 전문직 종사자들의 죽음보다 사회에 더 큰 손실로 여겨진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이런 공무원들이나 의원들의 생명에 더 높은 수준의 보호를 제공하는 것은 이들이 사회에서 수행하는 필수적 기능 때문일 수도 있고 다른 이유 때문일 수도 있다. 그 이유가 무엇이든, 사회가 사람들의 직업에 따라 다른 수준의 법적 보호를 제공하고 그에 맞게 생명의 가치를 다르게 판단한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사회가 보호받을 자격과 가치가 상대적으로 낮다고 여기는 이들의 생명보다 특정 직종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생명을 더 강력하게 보호하도록 법으로 의무화한다는 사실은 법 앞에서는 누구나 평등하다는 관념을 정면으로 반박한다.

 

 앞서 논의했던 통계적 생명 가치를 떠올려 보자. 일부 경제 전문가들은 사람들이 리스크를 줄이기 위해 기꺼이 지불하는 돈의 액수를 통계적 생명 가치로 추산한다. 이 방법에는 명백한 문제점이 있지만, 동식물 보호에 따르는 가치를 환산할 때도 자주 사용된다. 만약 어떤 생물종을 보호하는 데 돈을 지불할 의사가 전혀 없다는 결론이 나오면, 해당 종을 보호하는 데 따르는 가치는 비용편익분석에서 ‘0’이 된다. 지불 의사는 현재 설문 조사 대상이 되는 사람들의 우선순위이자 가치를 반영하는 것이지, 미래 세대의 우선순위와 가치를 반영하지는 않는다. 우리가 몇십 년 후의 미래로 가서 후손들에게 의견을 묻고 현재로 돌아올 수는 없는 노릇이기에 일반적으로 경제 전문가들은 비용편익분석을 수행할 때 오늘날의 가치가 미래의 가치와 동일하다고 가정한다.
 그렇다면 현재의 우선순위를 사용하는 인간 중심 관점의 이런 한계점에 대해 잠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 책은 인간의 관점에서 쓰이고 있다. 그 말인즉슨 인간이 아닌 다른 존재에 적절한 생명 가격표를 책정하는 것을 논의할 때에도 그 생명의 가치는 순전히 인간이 그것을 어떻게 평가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는 말이다. 동물은 내재적 가치를 지니지 않는다고 가정된다. 그러나 관점, 우선순위, 공정성에 대한 판단, 가치는 시간이 흐르면서 변화한다. 수백 년 전, 천 년 전은 말할 것도 없고 수십 년 전까지만 해도 용인되었던 많은 태도나 기준들이 오늘날에는 편협하거나 용납할 수 없는 것, 심지어 야만적인 것이 되는 경우가 많다. 동물의 생명을 인간 중심의 관점으로 가치를 매기는 일도 미래 세대의 눈에는 마찬가지로 미개하게 비칠 수 있다. 후손들은 우리가 수백만 종의 동물들 중에 특히 판다, 북극곰, 개, 호랑이 같은 동물들을 왜 더 중요하게 여겼는지 의아해할지 모른다.

 

 비용편익분석은 생명을 구하는 일과 관련된 편익에 0이 아닌 할인율을 적용함으로써 노골적으로 미래 세대의 생명 가치가 현 세대의 생명 가치보다 낮다고 가정한다. 이것은 위험한 가정으로, 자연스럽게 미래 세대의 이익이나 후생을 무시하는 근시안적인 결정으로 이어진다. 3퍼센트의 할인율에서는 오늘날 5000명의 사망이 100년 후 10만 명의 사망과 동일한 가치를 갖는다. 다시 말해 3퍼센트의 할인율을 적용하면 현세대의 생명이 100년 후 후대의 생명보다 약 20배나 더 가치 있다는 말이 된다. 할인율을 높이거나 기간을 늘리면, 그 비율은 더 극단적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계산법은 할인율이 양의 값이면 편익이 상당히 먼 미래에 발생하는 규제안은 비용편익분석으로 정당화하기 어렵다는 일반적인 결론을 뒷받침한다. 먼 미래에 얻을 수 있는 편익의 현재 가치가 할인으로 인해 대폭 감소하기 때문이다. 또 할인율은 미래 세대에게 중요한 일은 간과한 채 오로지 현세대에 중요한 일만 대변한다는 문제도 있다.

 

 도덕성이나 윤리 의식이 기업의 의사 결정에서 충분 요소는 아니지만, 재정적·법적 규제와 함께 일정 정도의 기능을 해야 한다. 비용편익분석을 활용한 기업의 생명 가치 평가 방법이 최악의 도덕성을 보여준 사례는 유명한 필립 모리스의 2001년 보고서에서 찾아볼 수 있다. 당시 필립 모리스의 의뢰를 받아 컨설팅 회사 아서 D. 리틀이 비용편익분석을 수행하고 작성한 이 보고서는 흡연자들의 조기 사망이 정부 수입에 도움이 되므로 체코 공화국 정부가 흡연을 권장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흡연으로 인한 조기 사망이 국고에 유익하다고 주장한 첫 사례는 아니었으나, 이 보고서는 전례 없는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월 스트리트 저널》은 케네스 워너 교수의 말을 인용하여 “자신들의 고객을 죽이면서 국고를 위해 돈을 번다고 자랑하는 기업이 세상에 또 있을까?”라고 썼다. 더불어 필립 모리스의 대변인이 보고서를 옹호하면서 “이것은 경제적 영향에 관한 연구,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라고 한 말도 인용했다. 대중과 정치인들로부터 거센 비난이 쏟아지자, 필립 모리스는 곧 보고서에 대해 공식적으로 사과하면서 그러한 비용편익분석에 자금을 대고 배포한 것은 “기본적인 인간의 가치를 철저하게 경시한 용납할 수 없는 처사였을 뿐만 아니라 끔찍한 결정이었다.”라고 말했다.

 

 인간 생명의 가치를 추산한 값들은 불공정성이 짙다. 이런 사실은 민사재판, 형사 사건에 대한 양형, 노동자의 보수, 선택적 임신 중단, 인구 계획과 같이 생명의 가치를 판단하는 모든 경우에서 나타난다. 불평등은 이 세상에 언제나 있었고 앞으로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가능한 한 이런 불평등을 최소화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부당함이 발생할 때마다, 특히 생명의 가치가 불공정하게 매겨질 때마다 반드시 문제를 제기해야 한다.
 과학에 한계가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우리는 경제 전문가들이 매기는 생명의 가치가 실제 가치라는 생각을 거부하고 생명 가치 산출 방법에 의문을 제기해야 한다. 무언가를 계산하기 위해 생명에 가격을 매기는 일이 불가피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우리는 이러한 생명 가격표를 산출하는 데 쓰이는 방법이 절대적으로 객관적이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매우 주관적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이는 이 분야를 연구하는 경제 전문가들의 능력을 폄하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생명처럼 추상적인 것을 정량화하는 데 따르는 한계를 대하는 당연한 태도다. 생명의 가치를 추정하는 데에 불확실성과 한계점이 있다는 사실은 어떤 분석에서도 반드시 숙고되어야 한다.
 우리는 생명 가격표가 어떻게 매겨지든 그 금액이 인간의 생명을 적절하게 보호할 수 있는 수준일 것을 요구해야 한다. 우리는 생명의 가치를 판단하는 데 영향을 주는 불평등한 (인종 간 또는 남녀) 임금격차를 해소할 것을 요구해야 한다. 우리는 생명 가격표를 매기는 데 소득이 사용되는 경우, 가장 빈곤한 사람들, 은퇴한 사람들, 실업자들, 자신의 시간을 무보수 노동에 쓰는 사람들의 생명을 적절하게 보호하고 이들이 정부나 각종 기관, 기업의 변덕에 쉽게 타격을 입지 않도록 하는 조치를 취할 것을 요구해야 한다.

 

 

타임 푸어 / 브리짓 슐트 / 길벗

 

 조각조각 나뉘고, 여기저기 흩어져 있고, 피로가 가득한 생활. 나는 항상 한 번에 두 가지 이상의 일을 처리했는데 훌륭하게 해내는 일은 하나도 없었다. 자꾸만 할 일이 생겨서 하나만 더, 하나만 더 처리하다가 집 밖으로 뛰쳐나갔기 때문에 항상 늦거나 뒤처졌다. 꼭 처리해야 할 일들에 매달리다 보면 몇 시간이 훌쩍 가버린다. 하지만 일을 끝마친 후에도 내가 뭘 했는지, 그게 왜 그렇게 중요했는지 확신하지 못했다. 나는 《거울 나라의 앨리스(Through the Looking-Glass)》 에 나오는 ‘붉은 여왕’처럼 온종일 달리고만 있었다. 하루 4~5시간밖에 못 자서 멍한 상태로. 최대한 빨리 달리지만 아무 데도 도달하지 못했다. 내가 자주 꾸는 꿈처럼, 스키용 장화를 신고 달리기 시합을 하는 기분이었다.

 

 나도 머릿속으로는 안다. 지금 내 앞의 10분, 또는 1시간을 어떻게 보내느냐가 나의 삶을 결정한다. ‘인생은 한 번뿐이다’, ‘지금이 가장 소중하다’는 진부한 말들을 수없이 들었다. 세월은 유수와 같다는 고대 로마인들의 지혜도, 찰나의 시간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는 불교의 가르침도 알고 있다. 아침에 눈을 뜰 때마다 하루를 정말 잘 보내야겠다고 다짐한다. 일을 훌륭히 해내고, 아이들과 소중한 시간을 보내고, 휴대용 건조식량으로 끼니를 때우지 말고, 바구니 5개에 가득 쌓인 빨래도 기필코 정리하고, 지갑을 자동차 지붕 위에 올려놓은 채 출발하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그러나 아이들 중 하나가 먹은 걸 토해내거나, 베이비시터가 아파서 못 온다고 하거나, 부엌 수도꼭지에서 물이 새거나, 기사거리가 생기거나 하면 모든 게 엉망이 된다.

 

 여가에 대해 고민하는 동안, 나는 내가 나의 삶을 바꿀 결정적인 순간(tipping point)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휴식을 계속 미루기만 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잡초를 모두 제거하고, 웃자란 대나무 가지를 잘라내고, 아이들의 크레용과 상어 이빨과 산수 문제지와 장난감과 조개껍데기와 돌멩이(그렇다, 돌멩이!)를 정리하고, 아이들의 옷장과 서랍에서 작아서 못 입는 옷들을 꺼내 처분하고, 고양이 사료를 사고, 커피포트를 수리하고, 신문기사를 쓰고, 청구서를 처리하고, 서류 작성을 끝내고, 몇 군데 전화를 걸고, 다섯 달 전에 보냈어야 하는 결혼 선물을 보내려 했다. 그 일들을 끝내야 가만히 앉아서 책을 읽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원래 여가란 그토록 힘들게 노력해야 얻는 것이 아닌데도 말이다. 때로는 진짜 자유시간이 생긴 것 같았지만, 그 시간은 너무나 짧아서 어떻게 써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냥 ‘목록’에 올라와 있는 다음번 일을 해버렸다.

 

 남편이 시가를 피우는 동안 나는 왜 생일 파티 뒷정리나 했을까? 남편은 경력을 관리하고 있는데 나는 왜 그저 해고당하지 않으려고 기를 쓰고 있을까? 결혼할 때만 해도 우리는 ‘동등한 파트너가 되자’고 약속했다. 그런데 어쩌다 보니 남편도 나도, 아이들을 병원에 데려가고, 아이들 소풍에 따라가고, 학교 행사에서 자원봉사를 하고, 아이들이 아플 때 집에서 간호하는 사람은 나라고 여기게 됐다. 왜 그렇게 됐을까? 나는 왜 ‘내 일을 한다는 것’에 대해 죄책감을 느낄까? 호르몬 때문일까? 뇌가 원래 그렇게 만들어진 걸까? 내가 자연의 순리를 거스르고 있어서일까? 나는 혹시 “내 아이를 다른 사람 손으로 키우지는 않을래요”라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뭔가를 증명하고 싶은 걸까? 보육시설을 이용하긴 하지만 나도 내 아이를 직접 키우고 있다고 말하고 싶은 걸까?

 

 그리고 여러 연구가 역할 과부하가 증가할수록 출산율이 저하된다는 음의 상관관계를 보여줬다. 머지않아 노인 인구는 많아지는데 그들을 부양해야 할 젊은 노동자들의 숫자는 줄어든다는 뜻이다. 미국의 경우 2008년 금융위기 때부터 출산율이 본격적으로 떨어지기 시작했지만, 그전에도 ‘대졸 이상 학력을 가진 사람들’의 출산율은 사회과학자들이 ‘위기’라고 부르는 수준까지 떨어진 상태였다. 미국 국방대학의 국방 전략 교수인 스티븐 필립 크레이머(Steven Philip Kramer)는 하루빨리 남녀의 불평등을 해소하고, ‘가족’의 의미를 시대에 맞게 변화시키고, 이민법을 개정하고, 남녀 모두 일과 가정생활을 양립할 수 있도록 정책적으로 지원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렇게 하지 않는 나라들은 ‘위험을 자초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여자들의 머릿속에서 테이프가 돌아가는 것은 아주 보편적인 일이기 때문에 그런 현상을 가리키는 용어가 따로 있을 정도다. 시간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그것을 ‘오염된 시간(contaminated time)’이라고 부른다. 시간 오염의 원인은 역할 과부하와 높은 업무 밀도에 있다. 여자들은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여전히 아이들과 가정의 일을 생각한다. 어떤 학자는 이것을 ‘정신적인 오염’이라고 표현했다. 여자들의 머릿속에는 아이들의 일정, 가족들의 이동 계획, 잡다한 집안일들이 가득하다. 엄마들의 목록에 올라 있는 일을 남에게 맡기면 안 되냐고? 물론 된다. 하지만 남에게 일을 맡겨도 마찬가지다. 단순히 일을 부탁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일이 무사히 끝났는지 확인하고 점검해야 하며, 자기가 원한 대로 잘되지 않았거나 신속하게 처리되지 않았더라도 꾹 참아야 한다. 학자들의 연구결과도 이와 비슷하다. 자유시간은 남자들이 시간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데에는 도움이 되며, 1970년대에는 여자들에게도 조금은 도움이 됐다. 하지만 1998년부터는 자유시간이 생겨도 여자들이 전혀 편해지지 않았다.

 

 크레이그는 이렇게 설명했다. “엄마들의 여가는 늘 이런저런 방해를 받고, 오염돼 있고, 목적이 있습니다. 엄마들의 여가는 모두 가족을 위해 쓰입니다. 엄마들은 가족 모두의 기분을 살펴야 합니다. 이를테면 손님을 접대하는 것과 비슷하죠. 물론 가족과 함께 지내는 건 즐거운 일이지만 스트레스도 상당합니다. 예컨대 어떤 엄마가 수영장에 갔다고 합시다. 그건 여가로 분류되죠. 하지만 그 엄마는 계속 곁눈질을 하면서 아이를 살펴야 합니다. 그건 진짜로 쉬는 게 아니죠. 소방서에서 호출을 기다리는 시간과 비슷합니다. 기둥을 타고 내려갈 준비를 하며 다음 임무에 대비하는 거죠. 항상 긴장 상태로 있어야 합니다.” (보든대학의 노동경제학자 레이첼 코넬리는 존 로빈슨이 분석했던 것과 똑같은 시간일지에서, 엄마들이 ‘대기 상태’라고 느끼는 시간을 여가에서 모두 빼버렸다. 그러자 결과는 완전히 달라졌다. “그 여자들은 여가가 전혀 없었어요.”)

 

 노스캐롤라이나주립대학에서 여성의 여가에 관해 연구하고 있는 칼라 헨더슨(Karla Henderson)은 〈내가 ‘여가’라고 말할 때 웃지 마세요〉라는 제목의 논문을 쓰고 싶을 지경이라고 말했다. “우리 엄마는 내가 바보 같은 연구를 한다고 생각하실 거예요.” 헨더슨이 소속된 ‘여가 연구’ 학과는 ‘공원·오락·관광 경영’ 학과로 명칭이 변경됐다. “우리는 일이 여가보다 훨씬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가가 무엇이며 삶의 질과 인간관계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를 제대로 이해하고 나면 여가가 정말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 겁니다. 여가에 대한 오해가 너무 많아요. 그래서 사람들은 죄책감을 느낍니다.” 사색할 시간이 없고, 현재의 순간을 온전히 경험하지 못하고, 삶 속의 신비로운 것들을 대면하지 못하는 사람은 무의미한 바쁨 속에서 살게 된다고 허니컷은 말한다. “그렇게 살면 우리의 능력은 고갈됩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한 대로 ‘마음이 소란스러운’ 상태가 되고 늘 성과에 얽매이게 되지요.”

 

 뇌에 지나치게 많은 정보가 들어올 때 우리의 의지력은 약해진다. 그러면 스마트폰이나 컴퓨터가 새 이메일의 도착, 새로운 친구 신청, 트위터의 팔로우 등을 알려줄 때마다 원래 하던 일을 중단하려는 충동을 이겨내기 어렵다. 신경과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컴퓨터나 스마트폰에서 알림이 울리기를 ‘기대하는’ 동안 우리의 뇌에서는 달콤한 마약 같은 도파민이 분비된다. 이것은 다른 종류의 강력한 중독에 빠졌을 때와 비슷한 현상이다. 그리고 문자 메시지가 짧거나, 생각이 완결되지 않았거나, 메시지가 도중에 끊겼을 경우에 우리는 불만족스러운 상태가 된다. 이때 급격히 증가하는 도파민은 우리 몸속을 돌아다니며 더, 더, 더 많은 정보에 대한 욕구에 불을 붙인다.
 이렇게 항시적으로 방해를 받으면 시간은 쓸모없는 조각들로 바뀐다. 스피라의 책에 따르면, 우리가 한번 방해를 받은 후에 원래 하던 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방해받은 시간의 10배 내지 20배가 소요된다. 어떤 일을 하다가 단 30초 동안 한눈을 팔았다 할지라도 집중력을 회복하고 다시 일에 착수하려면 5분이 걸린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모든 직장인의 3분의 1은 이러한 불필요한 방해의 끝없는 악순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포춘》 500대 CEO로 선정된 사람들, 즉 자신의 시간을 예측하고 통제할 권한을 충분히 가진 사람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어떤 연구에 의하면 CEO들이 하루 동안 방해받지 않고 생산적으로 일하는 시간은 단 28분이었다. “시간에 쫓기는 건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첨단기술 때문만도 아니고, 맞벌이 부부만 그런 것도 아닙니다. 하루 수백 번씩 방해를 받는다고 생각해 보세요. 결과적으로 우리는 24시간 내내 시차를 느끼는 상태로 생활하게 됩니다.”

 

 칙센트미하이는 이렇게 대답했다. “당신은 거시적인 문제를 지적하고 있군요.” 그는 여자들이 실제로 몰입할 시간을 가질 기회가 부족할 뿐 아니라 애초에 몰입에 도달할 수 있는 조건을 스스로에게 허용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내가 몰입에 관해 강연을 하면 질의응답 시간에 늘 똑같은 질문이 나옵니다. ‘하지만 뭔가에 몰입할 때는 죄책감을 느끼지 않나요? 지금 하고 있는 일 외에 다른 걸 다 잊어버리게 되잖아요. 그건 나의 다른 책임들을 방기하는 게 아닐까요?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에 푹 빠져들어 다른 일이나 다른 사람에게 신경을 쓰지 않는 거니까요.’ 이런 질문을 던지는 사람은 거의 100퍼센트 여자입니다. 여자들은 자신이 뭔가에 흠뻑 빠져서 ‘자기 자신’과 ‘시간의 흐름’과 ‘주변의 모든 일’을 잊어버릴 수 있다는 생각을 쉽게 못 합니다.”

 

 사회학자 크리스테나 니퍼트-엥(Christena Nippert-Eng)의 주장에 따르면, 인류의 역사에서 여자들의 시간은 항상 예측 불가능한 방해를 받았던 반면 남자들은 긴 시간을 방해받지 않고 누릴 수가 있었다. ‘유능한’ 비서와 ‘착한’ 아내가 남자들의 시간을 보호해줬기 때문이다. 니퍼트-엥의 주장에 따르면 방해받지 않는 시간은 강자의 영역이었고, 방해를 받는다는 것은 ‘명예롭지 못한’ 일이었다.
 ‘시간은 돈이다’라는 말이 있다. 하지만 시간에 관해 조사하는 과정에서 나는 시간이 돈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배웠다. 시간은 권력이었다.

 

 학자들의 연구결과에 의하면 자녀의 보육 여건이 안정적인 부모들은 스트레스를 적게 받고, 문제해결 능력이 우수하고, 자신의 일에 대한 만족도가 높다. 호주 학자인 린 크레이그의 시간활용 연구에 따르면 정식 허가를 받은 보육시설은 직장과 가정에서 부부의 성평등을 촉진하는 효과가 교대근무 다음으로 높았다. 기업이 질 높고 안정적인 돌봄 서비스를 제공하면 부모들은 물론이고 아이가 없는 직원들에게도 혜택이 돌아간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일정에 차질이 생기거나 직원들이 결근하는 일이 줄어들고 생산성과 의욕은 높아지기 때문이다. 반대로 기업들은 형편없는 보육시설 때문에 생기는 직원들의 결근으로 매년 30조 달러의 손해를 입고 있다고 추정된다. 일과 삶의 균형을 위한 기업들의 전략 개발을 도와주는 컨설턴트 칼리 요스트(Cali Yost)는 다음과 같이 썼다. “한마디로, 애를 키우는 동료가 지원을 받으면 당신에게도 득이 된다.”

 

 유명한 보수주의자인 필리스 슐레플리(Phyllis Schlafly)를 보자. 그녀는 여섯 아이를 키우면서 법률 학위를 취득하고, 전국 순회강연을 다니면서 엄마들에게 집에 머무르라고 명령하고, 페미니즘과 일하는 엄마를 비난하고, 보육시설을 가리켜 ‘낯선 사람의 손에 아이를 맡긴다’고 표현하고, 남녀평등헌법수정안에 반대하는 시위를 주도한 사람이다. 그런 그녀조차도 대행부모들의 도움을 받아 아이들을 키웠다. 다음은 슐레플리의 조카이자 작가인 수잔 벤커(Suzanne Venker)가 《로스앤젤레스타임스》 기자에게 한 말이다. “이모는 집안일을 남에게 맡겼어요. 이모가 그분들을 베이비시터라고 부르진 않았겠죠. 어쨌든 집에 사람을 두고 있었어요. 이모가 어떻게 그 모든 일을 해냈는지 젊은 사람들에게 이야기할 때 그런 사실을 충분히 밝혔나요? 아니죠. 그런 말은 없었어요.”

 

 잘 산다는 것은 보람찬 일을 하고, 가족을 비롯한 주변 사람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의미 있는 인간관계를 유지하고, 영혼을 충전할 여유를 확보하는 것이다. 잘 산다는 것은 결코 엄마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그리고 잘 산다는 것은 새로운 시간관리 시스템을 도입한다고 해서 되는 일이 아니다. 잘 살기 위해서는 공평해야 하고, 삶의 질이 높아야 한다. 잘 산다는 것은 정신건강과도 관련이 있으며 인권의 문제기도 하다.

 

 

번역청을 설립하라 / 박상익 / 유유

 

 명저번역지원사업의 예산과 과제 수는 왜 줄고 있는 것일까. 주무 기관인 한국연구재단이 예산을 어떻게 확보하는지를 봐야 한다. 한국연구재단은 지원사업의 칼자루를 쥐고 있는 기획재정부와 교육부가 결정한 예산을 넘겨받아 이 사업을 운영한다. 『한겨레신문』 김지훈 기자의 취재에 따르면, 한국연구재단 관계자는 예산 축소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고 한다.

교육부는 예산 협의 과정에서 예산을 동결하자고 했으나, 명저번역지원사업에 대한 이해가 없던 기획재정부는 ‘학자들이 영어로 읽을 수 있는데 굳이 예산을 들여 번역을 할 필요가 있느냐’는 논리를 폈다. ‘이만큼 사업을 했으면 웬만한 고전은 대부분 번역된 것 아니냐’고도 했다.
― 『한겨레신문』 2015년 3월 4일 자

 교육부는 그나마 현상 유지라도 하려고 했는데 돈줄을 쥐고 있는 기획재정부가 그마저 거부하고 축소했다는 이야기다. 현재 한국연구재단이 운영하는 ‘국가과학자’ 사업은 과학자 열 명을 선정해 한 명당 매년 15억씩, 최장 10년간 연구비를 지원한다(과학자 1인당 최대 150억까지 받을 수 있다). 과학자 1인에게 매년 15억씩 지원하면서, 명저번역사업 지원금은 인문학자 수십 명의 수령액을 모두 합친 게 고작 10억이다. 지원 규모가 한심할 정도로 약소하다. 그야말로 ‘새 발의 피’ 수준이다.

 

 ‘시민’과 ‘난민’은 모국어에 다가가는 접근법도 엇갈린다. 시민다운 접근법의 모범은 19세기 일본에서 찾아볼 수 있다. 서양 문명을 접한 일본 엘리트들은 메이지유신(1868) 직후 정부 내에 번역국을 설치, 대대적인 번역 사업을 수행해 전 세계의 고급 지식을 모든 국민이 모국어로 읽을 수 있도록 했다.
 멀캐스터가 영어에 가진 애정과 신념, 일본이 번역에 쏟은 정성의 반이라도 한글에 쏟아 보자. 우리도 모국어에 대한 장기적 비전을 갖자. 공허한 한글 찬양은 접어 두고 모든 국민이 한국어만으로도 전 세계의 고급 지식을 습득할 수 있도록 한국어 콘텐츠 확충을 위해 구체적 노력을 기울이자. 이것이야말로 실용이다.

 

 철학자 김재인 박사는 2014년 12월 들뢰즈의 『안티 오이디푸스』를 번역·출간했다. 프랑스어 원서 500쪽, 한글 번역본 700여 쪽에 달하는 책을 번역하는 데 10년이 걸렸다고 했다. 『안티 오이디푸스』는 인문서로는 근래 보기 드물게 2,000부를 찍었다. 출판 시장의 극심한 불황으로 인문서가 500부 단위로 출간되는 상황에서 ‘이례적’이다. 출판을 맡은 곳은 인세도 제때 잘 주고 부당 계약도 맺지 않았다. 말하자면 『안티 오이디푸스』 번역본은 꽤 좋은 조건에서 출판된 셈이다.
 그러나 10년 세월을 바친 번역자에 대한 대우는 허술하다. 아니, 처참하다. 정가 33,000원에 세금 공제 전 금액으로 인세 330만 원을 받는다. 즉 10년에 330만 원을 번 것이다. 언어능력은 물론이고 해당 분야에 대한 고도의 학문적 역량을 지닌 최고 수준 전문가의 10년 노고에 치르는 대가가, 중소기업에 다니는 대졸 신입의 두 달 치 월급에 미치지 못한다. 누가 봐도 분명 정상적인 상황은 아니다.

 

 ‘과학성’만이 한 언어의 필요충분조건인지는 생각해 볼 문제다. 과학적으로 우수하다고 해서 ‘경쟁력’도 우수하다고 단정 지을 수 없다는 말이다. 문자는 지식을 담는 그릇이다. 한글이라는 문자 체계로 기록된 문헌 자료가 얼마나 풍부한가에 대해 문제의식을 가질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서 한글로 기록된 문헌만을 읽어도 전 세계의 고급 지식을 습득하는 데 지장이 없겠는가 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핵심이 아닐까.
 제아무리 과학성이 우수하면 뭐 하겠는가. 읽을 책이 없는데. 고속도로 8차선 깔아 놓으면 뭐 하겠는가. 북한의 평양 거리처럼 자동차 없이 텅텅 비었는데. 21세기 글로벌 시대에 우리가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한글의 콘텐츠 문제다. 콘텐츠가 빈약한 문자 체계는 과학성이 우수하다 해도 빛 좋은 개살구, 속 빈 강정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콘텐츠 확충의 기본적 선행조건은 전 세계의 수많은 언어로 기록된 문헌들을 자국어로 번역하는 일이다.

 

 생물학자 최재천 교수는 1997년 「곤충과 거미류의 사회행동의 진화」 등을 영어로 발표하면서 세계적인 학자가 됐다. 이 때문에 일본 도쿄대학교 등에 강의를 다니곤 했다. 최 교수는 같은 분야를 공부하는 일본 센슈대학교의 하세가와 마리코 교수가 교양서 두 권 인세만으로 도쿄의 아파트를 구입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최 교수는 “그 책은 완전한 대중서도 아니었고 진화생물학 교과서에 가까웠다. 일본에서 책이 얼마나 팔리는지, 그 덕에 좋은 책이 얼마나 더 많이 나오는지 알게 됐다”고 말했다. 최 교수가 쓴 책도 한국에서 꽤 팔린 편이다. 하지만 그가 받는 인세는 지인들에게 밥 한 번 사 주면 끝나는 정도라고 했다.

 

 일제강점기의 상황을 보자. 우리는 1945년까지 일본어를 국어로 상용했다. 한글을 본격적으로 쓴 지가 이제 겨우 70년 남짓이다. 그러므로 ‘한글 텍스트를 기반으로 한 인문학’이란 관점에서 보면 우리는 갓 태어난 아프리카 신생국과 다를 바 없다. 자존심 상하지만 이것이 우리 현실이다. ‘잃었던 빛을 다시 찾은 것’이 아니라 수천 년의 어둠 속에서 처음으로 빛이 비치기 ‘시작’한 것이다. 따라서 인문학에는 ‘광복’이란 말이 어울리지 않는다. 한글 기반 인문학은 70여 년 전 새롭게 ‘탄생’했다.
 광복 직후 우리의 문자 생활은 열악하기 그지없었다. 1945년 광복 직후 13세 이상 인구 가운데 한글을 전혀 읽거나 쓸 수 없는 문맹자가 77퍼센트에 달했다(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 1950년 발발한 한국전쟁 때만 해도 한글을 몰라 전우에게 편지의 대필을 부탁하는 경우가 많았고, 1953년 휴전 후 오랫동안, 심지어 1960년대 초까지도 신병 훈련소에는 ‘가나다’를 가르치는 한글 교육과정이 남아 있었다. 많은 사람이 군대에 입대하고 난 후에야 한글을 익히고 비로소 부모님께 편지를 쓸 수 있었다. ‘군대 갔다 오더니 사람 됐다’는 표현이 등장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였다. 문맹이던 아들이 3년 군 복무를 마치고 오더니 글을 읽고 쓸 줄 알게 되었다는 뜻이다.

 

 영어권에서 최고 권위를 지닌 옥스퍼드 영어사전은 society를 개인들(individuals)의 집합체로 정의하고 있다. 그런데 19세기 일본에는 개인에 기반을 둔 인간관계가 없었다. 개인이 없으니 사회도 없었고, 따라서 그 뜻을 표현할 번역어도 없었다. 일본 지식인들은 실체가 없는 society를 일본어로 번역하기 위해 고심해야만 했다. 우여곡절 끝에 사회가 번역어로 자리 잡게 되었지만, 번역어가 등장했다고 해서 그에 대응할 현실까지 일본에 존재하게 된 것은 아니었다. 단지 기계적으로 society를 사회로 옮겼을 뿐이다. 존재하지 않는 실체를 표현하는 새로운 조어(造語)를 만들어 사용한 것이다. 일본 최고의 지성으로 꼽히는 마루야마 마사오와 가토 슈이치의 『번역과 일본의 근대』(임성모 옮김, 이산, 2000)에는 그 치열한 과정이 잘 나와 있다. 일본 지식인들이 society를 번역하기 위해 수많은 논쟁과 시행착오를 거친 끝에 비로소 사회라는 번역어가 정착된다. 우리는 일본에서 그런 어마어마한 논쟁이 벌어지던 시기에 아무 일도 안 하고 멍하니 있다가 일본에 침략당한 뒤, 식민 지배하에서 그들의 번역어를 고스란히 받아 쓴 것이다. 우리는 식민지 시대에 일본 지식인들이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며 만들어 낸 일본식 한자 번역어를 무차별적으로 받아들여 사용했다. 무임승차를 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