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간착취의 지옥도 / 남보라, 박주희, 전혼잎 / 글항아리
용역업체는 원청의 사업을 따내기 위해 입찰에 참여할 때 도급비, 즉 해당 업무를 하는 데 필요한 금액을 적어 낸다. '이 일을 하려면 이 정도 돈이 필요하다'는 일종의 견적서로, 세부 내용을 적은 것이 '도급비 산출 내역서'다. 이 내역서는 노동자 인건비, 용역업체 운영비, 경비, 이윤으로 구성된다. 즉 원청에서 이만큼의 돈을 받아 노동자들에게 임금도 주고 업체를 운영해 맡은 업무를 완료하겠다는 뜻이다.
용균씨가 속했던 노조인 공공운수노조에서 제공받은 도급비 산출 내역서에는 이 항목들이 상세히 나와 있었다. 업무 숙련도에 따라 직접노무비가 달랐는데, 중급 숙련 기술자였던 용균씨 몫으로 원청이 하청에 지급한 직접노무비는 522만 원이었다. 직접노무비는 용역업체의 운영비 등이 포함돼 있지 않은, 100퍼센트 노동자에게 지급해야 하는 순수 인건비다.
하지만 2018년 11월 그의 마지막 월급명세서에 찍힌 실지급액은 211만 7427원뿐이었다. 하청업체를 거치며 311만 원이 사라진 것이다. 용역업체는 용균씨에게 이 돈만 주기로 근로계약을 맺었기 때문이다. 4조 2교대로 한 달에 8일은 낮에 12시간, 8일은 밤에 12시간을 꼬박 새워 위험한 중장비 사이에서 일한 대가였다. 원청으로부터 이 노동의 대가로 월 522만 원을 받은 뒤 노동자에게는 211만 원어치라고 깎는 것, 그게 사용자와 노동자 사이에 낀 용역업체가 한 일이었다. (p.21-22)
원청은 용역업체가 중간에서 절반 가까이 착복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왜 이렇게 많은 돈을 인건비로 준 걸까. 용균씨 원청은 다달이 522만 원, 김군 원청은 240만 원을 지급했다. 그건 노동자의 임금이 법으로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용균씨가 담당한 연료·환경설비 운전 업무의 직접노무비는 '엔지니어링산업진흥법'에 따라 책정된 금액이다. 이 법을 근거로 설립된 한국엔지니어링협회는 매년 한 차례씩 통계청의 의뢰를 받아 엔지니어링 업체의 임금 실태 조사를 벌이고, 이를 토대로 기술 등급별 기술자들의 노임단가를 공표한다. 용균씨의 인건비는 이 노임단가를 기준으로 책정됐다.
김군이 받았어야 할 월급 240만 원의 근거는 정부의 '용역근로자 근로조건 보호지침'이다. 공공 부문에 적용되는 이 지침은 '시중노임단가'를 기준으로 용역업체 노동자들에게 임금을 지급하도록 하고 있다. 시중노임단가는 중소기업중앙회가 매년 두 차례 발표하는 제조업 부문 노동자들의 평균 임금이다. 2021년 청소 경비 등 단순노무 종사원의 시중노임단가는 시급 1만 13원으로, 최저임금(8720원)보다 1300원 가까이 높다. 즉 시중노임단가를 기준으로 임금을 받는 노동자들은 최저임금보다 훨씬 더 많은 급여를 받을 수 있다.
원청은 법과 정부의 지침에 따라 두 사람의 임금을 용역업체에 줬다. 하지만 그 후로는 법이 부재했다. 법과 지침은 '이 일을 하는 노동자가 받아야 할 합당한 대가는 이 정도'라고 정해놓고서는 '반드시 노동자에게 100퍼센트 줘야 한다'고는 하지 않았다. 용역업체의 배를 불리려고 임금 기준을 정해놓은 게 아닌데, 결과적으로는 그렇게 돼버렸다. 그리고 용역업체는 이 간편한 착취를 '재량'이라고 포장했다. (p.30-32)
우리가 인터뷰한 간접고용 노동자 100명 중 종일 근무하며 월급제로 급여를 받는 노동자는 총 86명이었다. 그런데 이 가운데 절반가량인 43명의 월급이 100만 원대였다. 한 중견 기업에서 일하는 파견직 사무보조원은 162만 원을 받았고, 국립해양박물관의 청소 노동자는 163만 원, 같은 박물관 주차관리원은 180만 원을 받았다. 한 아파트 경비원은 169만 원, 한국장학재단의 콜센터 상담사는 170만 원을 받았으며, 이제 막 사회생활을 시작한 IT 개발자는 172만 원, 자동차 부품 제조 공장에 파견된 노동자는 180만 원을 받았다. 이 금액들은 11년 전 내가 수습기자 때 6개월 동안 받았던 월급과 비슷했다. 그리고 부끄럽게도 100만 원대 월급은 아르바이트생이나 사회 초년생들만 받는 월급인 줄 알고 있었다.
200만 원대 월급을 받는 노동자는 34명(40퍼센트)이었고, 300만 원대 월급을 받는 노동자는 9명(10퍼센트)뿐이었다. 이들의 월급이 상대적으로 많은 것은 처우가 좋아서가 아니었다. 더 오래, 더 열악한 여건에서 밤낮없이 몸을 혹사시킨 대가인 연장 수당, 야간 수당이 더해져서 월급이 늘어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p.51-52)
우리나라 간접고용 노동자는 총 346만 명으로 추산된다. 우리는 그중 겨우 100명을 두 달여 간 인터뷰했을 뿐인데, 취재 전에는 예상치도 못했던 부고와 해고를 마주했다. 우리가 직접 취재한 노동자의 동료 2명의 부고를 접했고, 취재한 노동자 100명 중 4명이 취재 도중 해고 통보를 받았다. 전체 간접 노동자들에게는 이런 일이 대체 얼마나 일상적으로 일어난다는 것일까.
분노와 불안, 체념이 이 세계에 공기처럼 떠다니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그리고 그 공기 속에서 호흡하는 동안 나도 자주 숨이 막혔다. 부고와 해고를 접한 날은 특히 컴퓨터 자판을 두드릴 기운조차 없어 자주 멍해졌다. (p.65-66)
일부 하청업체 대표는 불법 파견 정황이 드러나면 이를 오히려 위장 폐업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수단으로 활용하기도 한다. 위장 폐업이란 기업이 노조활동을 방해하기 위해 허위로 사업을 접는 것을 말하는데, 보통 위장 폐업을 한 기업은 상호만 바꾸는 식으로 새 회사를 차린 뒤 활동을 이어간다. 문제는 위장 폐업을 한 기업의 소속 노동자들은 퇴직금과 밀린 임금 등을 받지 못할 때가 많다는 것이다. 서류상으로는 이들이 속해 있던 회사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이처럼 위장 폐업은 중간착취를 동반한다.
충남 아산에서 현대자동차 하청업체 직원으로 근무 중인 심현우씨는 "18년간 소속 업체가 세 번이나 바뀌었다"고 말했다. "지금 회사가 네 번째 근무처예요. 첫 업체가 폐업했을 때는 임금 체불이 있었고, 아직도 못 받았습니다. 두 번째 회사는 3년 정도 지속되다가 사라졌어요. 그때는 퇴직금을 못 받았습니다."
그는 "소속 업체가 바뀔 때마다 업체 대표도 달라졌지만, 실소유주는 언제나 첫 업체 사장이었다"고 말했다. "새 업체 대표들은 소위 말하는 '바지사장'이었던 거죠. 첫 업체 사장이 두 번째 회사에서는 소장으로 일했고, 세 번째 회사에서는 이사로 근무했어요. 지금 회사에도 사무실 관리자로 이름을 올려두고 있고요." (p.136-137)
이 완성차 제조사의 생산-납품 체계는 '완성차 제조사-1차 하청업체-2차 하청업체-파견업체-파견 노동자'의 다단계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단계마다 '생산 대수만큼만 대금을 지급'하는 방식으로 계약을 체결하고 있다. 따라서 완성차 제조사의 귀책사유로 휴업을 해도 이로 인한 수당은 발생하지 않는다. 계약상 생산 대수가 '0대'이면, 대금도 '0원'이기 때문이다.
"(휴업수당을 안 준 게) 법적으로 문제가 없는지는 좀더 따져봐야 한대요. 원래는 평균 임금의 70퍼센트를 휴업수당으로 주는 게 맞는데, 우리는 애초에 생산한 만큼만 돈을 받는 걸로 계약을 맺어서 좀 애매한가 봐요.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전 억울해요. 회사가 원청과 어떤 식으로 계약을 맺었는지 직원들은 알 길도 없고, 알려주지도 않잖아요. 아무것도 모르는 상대한테 '일감이 없어졌으니 무급으로 쉬세요' 이러는 건 납득이 안 돼요. 우리 같은 노동자들한테는 굶어 죽으라는 소리나 마찬가지입니다." (p.166)
"해고 이후 곧바로 고용노동부 지방청을 찾아가서 원청을 부당노동 행위와 파견법위반(불법 파견) 혐의로 고소했어요. 지방청은 1년간 근로감독을 진행했고, 고소가 접수된 지 2년 만인 2017년에 사건을 검찰로 넘겼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석연치 않은 점이 있었다. 고용부는 불법 파견 혐의에 대해서는 기소 의견을 냈지만, 부당노동 행위는 무혐의로 결론 내렸다. "황당했죠. 노조활동을 방해하는 건 명백한 부당노동 행위잖아요. 그런데 이 부분에 대해서 증거가 부족하다고 결론이 난 거예요. 분명한 정황이 있는데도 사측에 유리한 결과가 나오는 걸 보고 '이래서 기업이 간접고용을 선호하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도 희망의 불씨는 남아 있었다. 불법 파견 여부는 여전히 검찰의 수사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불법 파견이 인정되면 원청 정규직으로 복직할 근거가 마련되잖아요. 그래서 일단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어요."
그러나 희망이 절망으로 바뀌는 데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사건을 넘겨받은 검찰은 불법 파견 혐의에 대해서도 증거 불충분을 이유로 무혐의 처분을 내렸다.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이었어요. 검찰은 법무부 소속이니 정부의 목소리를 대변한다고 할 수 있잖아요. 정부가 기업 편에 서서 불법 파견을 묵인한 꼴인 거예요. 아예 다퉈볼 생각조차 안 한 거죠. '제발 재판이라도 좀 열어주세요'라고 빌어야 하나 싶었어요. 화가 나다 못해 냉소적이 되더라고요. 이렇게 기업에 우호적인 나라에서 간접고용 제도를 활용하지 않으면 그게 바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어요." (p.170-171)
도시가스 안전 점검원이 하는 일은 가스계량기 검침과 점검, 고지서 송달 등의 업무를 통해 가스 사고를 예방하는 일종의 공공서비스다. 그러나 외주화로 직접고용의 울타리 밖으로 밀려나면서 오늘날에는 높은 노동 강도와 최저임금 수준의 급여로 악명 높은 일자리가 됐다.
주택 바깥의 배관 점검과 옥상의 계량기 점검, 또 집 안에서 이뤄지는 연소기와 차단기 점검 등에 걸리는 시간은 10분 남짓이다. 주 40시간 간주근로제 아래 산술적으로 계산하면 하루 근무 시간을 8시간으로 봤을 때 총 48가구를 점검할 수 있다지만 가가호호를 이동하는 데 걸리는 시간을 감안하면 실제로는 하루 30가구도 어렵다. 또 고객이 집에 없으면 기껏 문 앞까지 찾아갔어도 허탕이다. 매달 해야 하는 검침과 고지서 전달에 쓰이는 시간을 빼면 실제 점검에 쓸 수 있는 시간은 또 줄어든다. 이런 상황에서 지숙씨는 홀로 5000세대를 책임지고 있다. (p.198-199)
"당신 아니라도 일할 사람 많다."
이 '마법의 문장'은 수많은 사람을 간접고용의 영역으로 떠밀었다. 공장 노동자, 백화점 판매원, 도시가스 검침원, 청소원, 마트 종업원, 대리운전 기사, 경비원 등이 오늘도 이 문장 앞에서 울분을 삼키며 고된 현실을 묵묵히 감내한다. 최저임금 남짓이라도 벌기 위해 이들이 노동 시장의 변두리에서 버티는 사이 간접고용 시장은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2년 이상 파견 노동자를 쓰고 나서는 직접고용해야 한다는 파견법은 법전 바깥의 현실에서는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파견 노동자를 사용한 사업주들은 약속이나 한 듯 2년이 되기 전에 계약을 종료했다. 기간제 노동자 역시 비슷한 처지다.
파견법이 연 '지옥문'은 수치로도 증명된다. 1998년 법 제정 당시 간접고용 규모는 파견 노동자 4만 명이 전부였다. 그러나 파견법 제정으로 무너진 직접고용 원칙은 기업들이 직접고용하고 있던 노동자를 간접고용으로 돌리는 꼼수의 발단이 됐다. 오늘날 파견과 용역, 호출 노동, 플랫폼 노동을 모두 합친 간접고용 노동자의 수는 346만 명이다. 그리고 이것은 전체 임금 노동자의 17.5퍼센트에 달하는 비율이다. (p.201-202)
"앱으로 일하고 나서는 별이란 단어는 꼴도 보기 싫어졌다니까." 농담처럼 말하면서 기순씨는 웃었다. 별은 고객의 갑질 앞에서 이들을 무력하게 만들었다. 정해진 시간에 청소를 마치려는 선희씨에게 한 고객은 "정이 없는 사람"이라며 쓴소리를 했다. 아직 청소할 곳이 남았는데 어떻게 시간이 다 됐다고 가버릴 수 있냐고 따지는 고객에게 '정해진 시간이 지났다'고 말할 수 없었던 이유는 뒷일이 무서워서였다. 이대로 가버리면 낮은 별점을 주거나 클레임을 걸 게 뻔한 상황에서 선희씨는 결국 30분 정도 더 무료 노동을 해야 했다. 또 청소나 가사에 표준 '매뉴얼'이 없다는 점도 이들의 별점 노동을 힘들게 한다고 기순씨는 말했다. "집마다 청소하는 방식이 다르잖아요. 설거지 후에 접시 물기를 다 닦아내길 원하는 집도 있고, 그렇지 않은 집도 있고. 집주인이 어떤 스타일을 선호하는지 모르니까 괜한 꼬투리를 잡힐 수 있는 거죠." (p.229)
"고객들이 1만 원을 내면 중간에서 가져가는 돈은 4500원입니다. 거의 절반을 떼어가는 거지요."
유료 직업소개소가 구직자, 즉 일하는 사람에게 받을 수 있는 소개료는 3개월간 지급받기로 한 임금의 1퍼센트 이하다. 파견·용역업체에서도 관리비 등을 포함해 인건비의 10~20퍼센트를 가져가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런 기존 인력 중개 시장의 '관례'와 비교했을 때 스마트폰 앱 같은 플랫폼을 통해 이뤄지는 대리운전 업계의 수수료는 그야말로 착취라는 단어로밖에 설명할 수 없었다.
결과적으로 재순씨가 앱을 통해 1만 원짜리 대리 호출(콜)을 받아 일하고 손에 쥐는 돈은 5500원 남짓이다. 나머지 4500원은 중개 수수료와 프로그램 사용료, 보험료, 출근비(셔틀비)로 나간다고 했다. 그는 대리운전 업계의 생리가 '사람 장사'라고 했다. "대리운전 기사들이 수익을 내도록 해야 하는데, 기사가 아닌 회사가 돈을 많이 남기고 있어요." (p.232-233)
고용부는 우리가 질의한 나머지 두 질문인 '용역근로자 근로조건 보호지침'(가이드라인)에 대한 법적 구속력 향상, '간접고용 노동자 보호법 제정'에 대해서도 "어렵다"는 입장이었다.
'거절'의 이유 중 눈에 띄는 것은 "간접고용을 명확하게 정의하고, 범위를 정하는 것이 어렵다"는 대목이었다. 이것을 정의하고 범위를 정해 적절한 법과 제도를 마련하는 게 고용부의 역할 아닌가. 정흥준 교수는 이렇게 일갈했다.
"범위가 모호해서 법을 만들기 어렵다는 것은, 본인들이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으면서 그 상황을 이유로 못 한다고 하는 것이기 때문에 '유체이탈'이죠. 자신들의 책임이 뭔지 정확히 모르는 것 같아요. 질의서 제안은 다 거절하면서도 '우리가 이런 정책을 가지고 있다'는 대안은 하나도 없잖아요."
사실 희망을 품고 고용부의 답변서를 기다린 것은 아니었다. 3월 말 고용부 근로기준정책과장과 차별개선과장을 만나 이야기를 나눴을 때 이미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을 거란 느낌을 받았다. "간접고용 문제는 여러 부처가 다 얽혀 있는 것이라 고용부 혼자 하기는 쉽지 않다" "이게 너무 복잡해서 쉽지가 않다"는 말을 여러 번 들었다.
이에 4월 청와대 춘추관을 통해 일자리 수석 혹은 관련 담당자와의 면담을 요청하기도 했다. 여러 부처가 연관돼 있는 문제는 결국 청와대의 의지가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청와대는 "고용부가 적절한 설명을 한 것"이라며 면담을 거부했다. 고용부의 입장이 정부 입장이라는 것이다.
결국 고용부도 청와대도 중간착취를 허용하는 이 낡고도 나쁜 법들을 고칠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런데 그 이유가 모두 사용자의 논리라는 점은 생각할수록 참담했다. 2021년 1월 '중간착취의 지옥도' 기사를 읽은 윤여준 전 장관이 보내온 글이 떠올랐다. 거기에는 이런 구절이 있었다.
"국가는 쉽게 말해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그것이 공공성이라는 가치이기도 하다. (…) 국가는 지배자들의 이익을 위한 조직이 되어서는 안 된다."
간접고용 노동자들에게도 국가가 있는 걸까. (p.271-272)
언캐니 밸리 / 애나 위너 / 카라칼
우리는 소모품이었다. 자기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국문학 전공자들과 무급 수습 자리는 차고 넘쳤지만, 에이전시와 출판사의 채용 인원은 늘 그보다 부족했다. 따라서 출판계는 구인난을 겪지 않았다. 베이지색 가죽 신발을 신은 남자들과 겨자색 카디건을 입은 여자들이 크림색 종이에 뽑은 이력서를 들고 줄줄이 출판계의 문을 두드렸다. 어떻게 보면, 높은 이직률이 출판계를 지탱하고 있었다.
나와 친구들은 진득하게 버텼다. 책을 가까이하는 일이 좋았고, 우리가 가진 문화 자본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왜 우린 사서 고생을 하고 있느냐고 허구한 날 투덜대면서도, 속으로는 그 고생을 기꺼이 치르고자 했다. 출판계가 시대의 흐름을 발 빠르게 따라가지 못한 것은 사실이지만 인간의 자유로운 표현을 열렬히 사랑하고 수호하는 우리 출판인들이 책의 가치도 모르는 장사꾼들에게 넘어갈 일은 없다는, 우리 스스로 선택한 이 도덕적 논리가 업계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우리는 삶의 맛과 온전함을 아는 사람들이었다. 동시에 과민하며 돈에 쪼들리는 사람들이기도 했다.
CEO는, 밀레니얼 세대가 평생 소유하지 못할 무언가를 빌려 쓰듯 소유보다 경험에 치중하는 까닭이 학자금 대출 혹은 불경기 때문이라거나 디지털 유통의 시대에 창작물의 가치가 하락한 현상과 관련이 있다는 사실에는 무관심했다. 그가 제시한 미래상에는 위기가 말끔히 지워져 있었다. 오로지 기회뿐이었다.
나는 그의 말을 과연 내가 진심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지 따져 보았다. 그는 매력적인 사람이었고 회사와 회사의 미래에 헌신적이었다. 어찌 보면 그와 나머지 두 창업자 모두 정말 대단하다고 할 수 있었다. 실리콘 밸리의 투자자들도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이 사업에서 내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부분, 바로 책에 대해서는 일말의 애정도 없어 보였다. CEO의 발표 자료에는 '헤밍웨이'가 '헴밍웨이'로 잘못 적혀 있었다.
전자책 스타트업과의 면접이 산뜻하고 편안했었기에, 나는 데이터 분석 회사와의 면접도 당연히 그럴 줄 알았다. 샌프란시스코와 실리콘 밸리에서는 면접이란 것이 사실상 벌주기와 같으며, 숨막히는 심사보다는 짓궂게 골려 먹는 신고식에 가깝다는 걸 미리 알려준 사람은 없었다. 마운틴 뷰에 있는 거대 검색 엔진 회사는 면접 때 난해한 문제를 내는 것으로 악명이 높았다. 그런 질문이 실제 업무 능력을 가늠하는 데 아무 쓸모도 없음이 밝혀진 후로 그 관행은 사라졌지만, 다른 회사들은 여전히 그것을 전통처럼 받들었다. 남의 실수에서 교훈을 얻자고 말할 때, 그 실수가 돈 잘 버는 남이 저지른 짓인 경우에는 의미가 조금 달라졌다. 베이 에어리어에 있는 회사들은 '매해 미국인들이 먹는 피자의 면적을 제곱피트로 계산하면?', '비행기 한 대에 채울 수 있는 탁구공의 개수는?' 같은 질문을 지원자들에게 툭툭 던졌다. 어떤 질문은 지원자가 사내 문화와 어울리는지 확인하기 위한 장치였는데, 그 내용은 중학생들이나 할 법하게 유치했다. '슈퍼 히어로가 된다면 어떤 힘을 갖겠는가?' 회사의 인사 담당자들은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로 이런 질문을 건넸다. '낯선 방에 들어갈 때 머릿속에 떠오르는 주제가는?' 이날 오후, 내 주제가는 단연 장송곡이었다.
진보적이고 관대하면서도 수동 공격적인 이 도시의 정치인들은 외지인을 못살게 구는 편이었는데, 자칭 테크 업계를 대표한다는 사람들도 모두에게 이타적이지는 못했다. 이 도시에 막 발을 들인 몇몇 엔지니어와 사업가 들은 수익 모델 없는 한 블로그 플랫폼에다 장광설을 늘어놓았다. 그러한 일이 석 달에 한 번씩은 반복되었다. 그 사람들은 월세 상한 규제 때문에 도리어 콘도 가격이 오른다며 저소득층을 비난했고, 고속도로변 노숙촌이 경관을 해친다며 노숙자들을 욕했다. 그러면서 노숙자들을 인간 와이파이 핫스팟으로 활용해 돈을 벌자고도 제안했다. 또 성적이 부진한 현지 스포츠 구단을 욕했고, 시내에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사람이 너무 많으며 안개가 심하다고 불평했다. 한 크라우드 펀딩 플랫폼을 만든 스물세 살의 창업자는 샌프란시스코 날씨에 대해 "매일 생리 전 증후군에 시달리는 여자와 같다"라고 썼다. 일상적인 여성 혐오를 날씨에까지 갖다 붙인 것은 꽤나 창의적인 발상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진짜 문제는 테크 업계를 대표하는 사람들이 현실에서도 여자를 썩 좋아하지 않는 듯 보인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샌프란시스코 여자는 10점 만점에 5점에 불과하며 그마저도 수가 너무 적다고 칭얼거렸다.
실리콘 밸리에서 비(非)엔지니어는 자신의 가치를 애써 증명해야 한다. 내가 이 사실을 깨우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테크 회사에 비기술직 지원이 들어오고 나면, 이전에는 없던 변화가 생겼다. 우리 같은 사람들은 급여 인상을 요구했고 점심시간에 오가는 대화의 내용을 순화했다. 필요한 절차와 조직도를 만들었고 요가 수업과 인적 자원 팀 신설을 요청했다. 그리고 어떤 식으로든 다양성 지표에 긍정적으로 기여했다.
그러나 우리 회사의 위계질서는 뿌리가 깊었다. 좋은 제품은 알아서 팔린다며 마케팅의 역할을 무시하는 CEO의 태도도 그렇거니와, 직원들의 월급과 주식 할당에도 위계질서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프로그래밍 언어나 애자일 개발과 달리, 감성 지능은 배워서 터득할 수 없음이 이미 입증되었고 인간의 공감 능력은 인공 지능이 쉽게 넘볼 수 없는 장벽이었음에도 소프트 스킬은 언제나 과소평가되었다.
CEO가 들어오더니 특별 공지 사항이 있다고 했다. 고객지원팀이 쉴 수 있도록 오늘은 엔지니어들이 고객지원 업무를 대신 하라는 것이었다. 아침에는 차를 타고 이동하고 오후에는 산에 갔다 오느라 몇 시간짜리 일감이 밀려 있던 터였다. 또 우리는 오후부터 줄곧 술을 마셔서 꽤 취해 있었다. 파티를 하며 일하는 것인지 일하며 파티를 하는 것인지 헷갈렸지만, 엔지니어들이 자신이 개발한 제품을 설명하느라 애를 먹는 모습을 구경하는 일은 가히 유쾌했다. 우리 팀 남자들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옆에서 훈수를 두며 엔지니어들을 놀려 먹었다. 그때만 해도, 이러한 역할 바꾸기 덕에 즐겁게 쉬면서 뒤바뀐 권력 구조를 맛본다고 생각했었다. 나는 나중에야 그 사건에 숨겨진 의미를 깨달았다. 우리가 하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있을 만큼 만만하며, 엔지니어들은 술에 취해서도 그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CEO는 우리 회사의 투자자가 쓴 책을 읽고 있었다. 나도 들어본 적 있는 책이었다. 그 책은 거친 창업의 바다를 항해하는 방법을 알려주고 자기 의심과 외부 압박이라는 두 가지 난관을 극복하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끊임없는 배움과 싸움과 기나긴 여정에 대해 이야기하는 책이기도 했다. 챕터마다 서두에 유명한 랩 가사가 인용되었다. 정말이지, 그렇게 비장할 수가 없었다.
CEO가 존경하는 듯한 남자들은 이 생태계 속 남자들이 존경하는 부류와 정확히 일치했다. 창업가 아니면 투자자. 그중에서도 그는 한 시드 액셀러레이터의 창업자를 제일 존경했다. 영국 출신의 컴퓨터 과학자인 그 남자는 스타트업계에서 가장 학자에 가까운 존재였다. 그 창업자는 소셜 미디어에 글을 자주 올리는 이른바 명언 제조기로, 쿨하고 이지적이면서 감정을 억제한 수사를 구사했다. 그는 스타트업 창업자들을 밀턴, 피카소, 갈릴레오 같은 역사적 위인들과 자주 비교했다. 그가 비즈니스에 일가견이 있다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으나, 어째서 모든 것에 전문가로서의 자격이 있다고 스스로 생각하는지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소프트웨어 엔지니어인 이안은 취업 시장의 장벽에 부딪혀본 적이 없었다. 지위 상승의 기회와 선택권을 갖지 못한다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변변찮은 존재가 된다는 것이 어떤 기분인지 그는 몰랐다. 이안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내 연봉의 세 배나 되는 돈을 거뜬히 벌 수 있었다. 그 어떤 회사도 그에게 주식 할당을 망설이지 않았다. 이안은 안전망 안에 살고 있었다.
어쩌면 나는 특별하지도 대단하지도 않은 능력을 지녔다는 자격지심에 매몰되어 있는지도 몰랐다. 출판계에서 일하기 시작한 이후로 내 안에는 언제든 대체될 수 있다는 감각이 깊이 뿌리내렸다. 미래 계획 없이 일을 그만둔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었다. 대학 졸업 후 내 삶은 매달 간격으로 이력서에 빠짐없이 기록되었다. 대학 교수가 아니고서야 안식년을 갖는다는 것은 터무니없는 생각이었고 신뢰할 수도 없는 계획이었다.
하지만 나는 효율적이지 못한 내 삶을 좋아했다. 라디오를 듣는 것. 과하다 싶게 다양한 도구를 써서 요리하는 것. 양파를 다듬어 보관하는 것. 허브를 가꾸는 것. 오래 샤워하는 것. 살짝 취한 상태로 박물관을 배회하는 것.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것. 그러면서 생판 모르는 사람들이 자녀들과 함께 있는 모습을 보는 것. 해 질 녘 창밖을 내다보거나 휴대폰으로 일몰 사진을 찍는 사람들을 구경하는 것. 오니기리를 사러 저팬 타운까지 걸어가는 것. 아니면 아무런 목적 없이 오래 산책하는 것. 잘 마른 빨래를 개키는 것. 열쇠집에 가서 열쇠를 복사하는 것. 서류를 작성하는 것. 누군가와 통화하는 것. 우체국에 가서 매번 그러듯 복잡한 행정 절차를 견디는 것. 레코드판을 뒤집어가며 앨범을 통째로 듣는 것. 이렇다 할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 긴 소설을 읽는 것.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짧은 소설을 읽는 것. 낯선 사람들을 만나는 것. 남의 일에 참견하는 것. 식당이 문을 닫을 때까지 술을 마시는 것. 마트에 가서 식료품에 붙은 라벨을 정독하는 것. 할인 코너에서 시식하는 사람들을 구경하는 것. 이 모든 것을 나는 좋아했다.
오픈소스 스타트업은 신입 직원에게 입사 선물로 걸음 수를 측정해주는 손목 밴드를 주었다. 직원이 건강해야 불만이 적고 보험비 걱정도 없다는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나는 일주일 동안 손목 밴드를 차고 다니면서 걸음 수와 칼로리 섭취량을 측정하다가, 문득 섭식 장애에 걸릴지도 모르겠다는 위기감을 느껴 그만두었다.
테크 업계는 집중력 향상 앱부터 업무용 타이머, 은둔 모드, 이메일 일괄 전송, 시간표 짜기 등 최적화와 생산성 높이기에 집착했고 급기야 바이오해킹에까지 손을 뻗쳤다. 체계를 그 무엇보다 중시하는 사람들이 온라인 커뮤니티뿐 아니라 시내의 고급 카페에서 효율적인 작업 방식과 약 복용법에 관한 조언을 공유했다. 사람들은 붉은색 조명과 수면 유도 음악을 이용해 수면 사이클을 최적화했다. 버터를 넣은 콜드브루를 마시고, 허벅지에 주사기로 남성 호르몬을 투여하고, 150볼트의 전기 충격을 가하는 손목 밴드를 차고 다니면서 자기 관리를 멈추지 않았다.
신체 최적화는 사람을 조금 서글프게 만드는 구석이 있었다. 항정신제를 먹은 뒤 오후 내내 화장실에 틀어박혀 쌍꺼풀 테이프를 붙인 채 완벽한 캣아이 메이크업 영상을 따라 하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신체 최적화의 목적은 기쁨이 아니라 생산성이었다. 그런데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 누구를 위해서? 어쩌면, 현재 20대들이 높은 생산성에 매달리는 현상은 가장 쌩쌩한 시절의 생산성을 최대한 짜낸 뒤 아직 젊음이 남아 있는 몸으로 일찍 은퇴하기 위해서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신의 소관인 시간을 그렇게 제멋대로 주무르려 한다는 것은 다소 무모한 짓으로 보였다.
바이오해킹은 마치 경영 블로그를 관리하는 것처럼 또 다른 형태의 자기계발이었다. 테크 업계의 문화는 몸 관리와 같이 주로 여성에게만 요구되던 행동을 남성도 똑같이 하도록 끊임없이 기회와 분위기를 조성했다. 개인의 활동 지표를 추적하는 일은 스스로에게 나아지고 있고 빨라지고 있다는 감각을 부여했다. 성과 순위표와 피트니스 앱은 사람들의 경쟁심을 부추겼다. 수량화는 통제 수단이 되었다.
나는 230번대 직원 중 한 명이었다. 사실 그쯤이면 입사 순서의 의미가 없었다. 나와 달리 초창기 직원은 쉽게 눈에 띄었다. 그들 중 몇몇이 소셜 미디어 프로필에다 자신의 입사 순서를 떡하니 적어 놓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채팅방을 장악한 그들의 존재감과, 늘어난 비기술 인력을 향한 그들의 업신여김, 그리고 과거에 대한 그들의 향수가 먼젓번 회사를 다닐 때의 내 모습과 겹쳐 보였다.
나는 자기들끼리만 아는 농담을 주고받고 이유 있는 자부심을 과시하는 초창기 직원들이 부러웠다. 그들이 올린 익살맞은 글이나 그들의 자녀가 핼러윈 기간에 문어냥 코스튬을 입은 사진을 구경할 때, 또는 엔지니어들이 개인 블로그에 비동기식 협업을 극찬하고 오픈소스가 주는 깨달음에 관해 올린 글을 읽을 때면, 한때 내게도 있었던 내부자의 권위가 그리워졌다. 수건함 밑바닥에 깔려 있을 '데이터 주도 형' 티셔츠들이 떠올랐다. 마음속에서 향수병이 일고 욕망이 도졌다. 회사원의 고독이 절절이 느껴졌다. 나는 무언가를 소유하고 어딘가에 소속되어 있다는 느낌을 갈망했다. 확실한 정체성과 강력한 소속감을 간절히 바랐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나는 스스로 마음을 다잡았다.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냐.'
우리 회사의 성차별 사건이 세상에 처음 알려졌을 때, 그 게시판에서 이름 좀 있다 하는 사람들은 이 회사의 위신이 추락한 것을 함께 안타까워했다. 그들은 그 사건과 관련해 새로운 정보가 나올 때마다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어서는 반박할 거리를 찾았다. 음악을 들으며 훌라후프를 돌리는 여자 직원들을 남자 직원들이 대놓고 구경했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남직원들이 스트립 클럽에 온 것마냥 여성 동료들에게 추파를 던졌다는 엔지니어링 팀 첫 여직원의 폭로가 알려지자, 게시판에는 훌라후프 하는 것을 구경했다고 강간범이란 소리냐, 스트립 클럽에 다닌다고 다 강간범인 건 아니다, 라는 글들이 올라왔다.
어떤 사람은 CEO가 직원들을 데리고 스트립 클럽에 가는 것까지 허락을 맡아야 하느냐고 물었다. 여자 직원들이 '먼저' 그곳에 가자고 CEO를 꾀는 건 어떻게 되는 건데? 어떤 이는 사무실에서 훌라후프를 돌린 여자들이 꼬리를 친 거라고 맞장구쳤다. 여자들이 남자의 환심을 살려고 그랬다는 것이다. 진화심리학에 일가견이 있다는 한 사람은, 욕망은 진화를 위해 필수 불가결한 것이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여자 엔지니어의 코드 작업을 누군가 되돌려놓은 사건과 관련해 범죄 과학 수사가 시작되자 게시판에는 곁가지 의견이 추가로 올라왔다. 몇몇은 오픈소스 스타트업이 프로그래밍 언어를 채택하는 과정에 사내 환경이 당연히 반영될 수밖에 없지 않느냐고 주장했다. 누군가는 테크 업계 성비가 평균 미달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걸 성희롱 발생률과 연결 지어서는 안 된다며, 테크 업계의 성비 문제를 다른 업계와 단순히 비교하는 건 곤란하다고 억울함을 내비쳤다.
'기껏 남자들이 노력해서 일하기 편하고 성공한 회사를 만들어 놨더니만, 이제는 페미들 입맛에 맞춰 그 공간을 파괴해야 할 판이다.' 평소 게시판에 자주 글을 쓰던 한 사람은 악에 받쳐 이런 글을 올렸다.
고양이 만화 캐릭터의 이름을 따서 닉네임을 지은 어떤 이는 바람직한 사무실 환경에 관한 논쟁에 불씨를 붙였다. '행복하게 일하는 젊은 남성들로 가득한 사무실 환경이 꼭 나쁜 건가요?'
여자 직원들은 사내 문제가 일부나마 세상에 까발려진 걸 대체로 반기는 눈치였다. 회사에는, 비유적으로든 문자 그대로든, 입으로 똥을 싸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차별에 관해 일말의 고민도 없는 사람들 역시 태반이었다. 백인 남성 미국인이 압도적으로 많고 엔지니어링 팀의 여성 직원이 열다섯 명도 채 안 되는 이 전도유망한 회사에는, 능력주의에 대한 집착이 짙게 깔려 있었다. 동료들 말에 따르면, 공식 조직도가 없는 대신에 사내 정치와 창업자들과의 친분에 따라 만들어진 비공식 조직도가 존재한다고 했다. 어떤 사람들은 평사원임에도 경영진에 준하는 권력과 영향력을 갖고 있었다. CEO와 친한 사람들은 직원 채용과 내부 정책 결정에 관여했고 동료들에 대한 평판을 조성했다.
"평등하되 급여와 권한은 다르다 이거죠." 내부 툴 개발자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이 회사에선 여자로 사느니 털북숭이 동물로 사는 게 더 쉬울걸요."
"〈무구조의 횡포(The Tyranny of Structurelessness)〉를 읽어본 사람이 있기는 할까요." 얼마 전 그 에세이를 읽었다는 엔지니어가 말했다.
테크 업계 여성들은 다양성 정책이 백인 남성을 역차별한다거나, 엔지니어링 분야에 남자들이 많은 이유는 남자들이 선천적으로 이쪽 분야에 재능이 있기 때문이라는 소리를 항상 듣고 살았다. 여자들은 자신들이 겪은 사건 일지를 기록했고, 스프레드시트와 일람표로 남겨놓았다. 그리고 그중 몇몇은 자신들이 당한 피해를 소리 내어 고백하기 시작했다. 커다란 변화의 시작이었다.
이러한 공론화를 모두가 반긴 것은 아니었다. 스타트업들의 쾌활한 업무 환경을 극찬해온 언론 보도에 길들여진 유력 창업자들과 투자자들, 언행에 거침이 없고 이상주의에 심취한 CEO들은 이런 식으로 언론의 관심을 받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들은 기자들이 테크 업계를 폄하하려고 성희롱 사태를 물고 늘어진다며 책임을 전가했다. 테크 업계로부터 위협을 느낀 언론이 자신들을 질투하는 것이라고도 주장했다. 또 테크 업계를 보이 클럽으로 매도해 버리면 STEM(과학·기술·공학·수학) 공부를 하려는 여학생들의 의욕이 꺾이지 않겠느냐며 불평하기도 했다. 마치 이 상황에서 업계 이미지를 지키는 것이 가장 중요한 문제라는 듯이. 남성들 편에 선 일부 여성은 테크 업계에서 남성 멘토들을 만났으며 자신들은 아무런 피해도 보지 않았다고 주장해 논란을 촉발했다.
시애틀에 본사를 두었으며 소송을 자주 걸기로 유명한 소프트웨어 대기업의 CEO가 컨퍼런스의 기조연설자로 나와 여성들에게 급여 인상 요구를 참으라는 메시지를 전했다. "돈을 더 달라고 요구할 게 아니라, 이 시스템이 당신에게 걸맞은 보상을 줄 것임을 믿고 신뢰해야 합니다. 어쩌면 그것이 급여 인상을 요구하지 않는 여성들에게 주어진 엄청난 힘일지 모릅니다." 그러니까 그의 요지는, 덕을 쌓는다 생각하라는 것이었다.
'능력주의'. 사회 풍자의 목적으로 만들어졌으나 그 풍자의 대상인 업계가 누구보다 진지하게 받아들인 단어였다. 재미 삼아 직원과 입사 지원자에게 IQ 테스트를 보게 하는 회사들과, CEO 유형의 남자들로 가득한 스타트업들과, 벤처 캐피탈의 96퍼센트가 남자에게 돌아간다는 사실에 눈 하나 깜짝 않는 투자자들과, 자산이 주식에 묶여 있으니 자신을 여전히 언더독이라고 여기는 억만장자들이 떠받드는 신념이기도 했다.
경제가 불안정한 이 시대에 금융 위기와 함께 어른이 된 세대가 능력주의에 열광하는 이유를 나는 알 것도 같았다. 누구도 미래를 보장받지 못했다. 하지만 잔해를 딛고 살아남은 듯 보이는 사람들은 분명히 존재했고, 강압적으로 존재감을 드러낸 업계에서 자리를 확보한 그 사람들에게 능력주의 서사는 구조적 분석의 공백을 메울 수 있게 해주었다. 능력주의는 모든 것을 말끔하게 정리해주었다. 그들에게 능력주의는 듣기 좋고 죄책감을 덜어주는 말이었다. 반면 어쩔 수 없이 떠나야 하는 사람들에게는 고통이었다.
가끔은 스스로도 인터넷 중독이 걱정되어 컴퓨터를 멀리하고 잡지나 책을 집어 들었다. 하지만 요즘 나오는 책들은 차분함과는 거리가 있었다. 그 글들에는 정보 뭉텅이와 희미한 역사적 연결고리 그리고 작가가 밤새 검색 엔진을 뒤져 찾아냈을 사소한 사실들이 어수선하게 엮여 있었다. 각종 명언으로 가득했고, 그렇게 여러 작가들이 얽혀 있었다. 소셜 미디어에서 화제를 모은 책들을 읽어보면 일종의 큐레이션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실체가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아름답게 묘사하여 그걸 고상한 소품문으로 엮어낸 것들이었다. 말하자면 분위기를 내는 데 치중한 글이었다. 주름진 리넨 시트나 달리아 꽃다발과 다르지 않은 텍스트였다.
'아, 이 작가도 인터넷에 중독된 걸까.' 나는 책장을 넘기며 이렇게 생각하곤 했다.
나는 거의 매일 저작권 및 상표권 침해 신고 건을 처리하느라 지루한 절차를 반복해야 했으나 거기서 얻는 만족감은 상당했다. 오픈소스 커뮤니티를 위해 일하는 준법률가가 된 기분이랄까. 그런 업무가 없는 날에는 사용자들에게 정중히 이메일을 보내 아바타에 사용한 나치 문양을 지워달라거나 저장소에 올린 반유대주의 만화를 내려달라고 부탁하는 것이 나의 일과였다.
나는 종종 하던 일을 멈추고서, 내가 처리하는 것들이 오픈소스 플랫폼에서 극히 이례적으로 일어나는 일임을 스스로 유념해야 했다. 내가 다니는 회사는 그나마 형편이 나았다. 기존의 소셜 네트워크처럼 폭력 행위를 실시간으로 노출시킬 일은 없었으니까. 집 공유 플랫폼이나 차량 호출 앱처럼 대면 거래에 의존하는 것도 아니었고. 회사 제품은 아주 실용적이면서도 온건한 디지털 시민 사회를 조성했다. 낙태나 지구 평면설에 관한 여론을 조성하려고 굳이 오픈소스 플랫폼에 가입하는 사람은 없었다. 세상 돌아가는 소식을 들으려고 오는 사람도 없었다. 대다수는 회사의 의도대로 플랫폼을 이용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일할 때 실명을 감춘 지 오래였다. 외부와 연락할 때는 일부러 남자 이름을 썼다. 다행스럽게도, 근무하며 통화할 일은 아예 없었다. 내가 남자 이름을 고른 이유는, 맡은 일이 민감하기도 할뿐더러 악의적인 사람들에게 잘못 걸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우리 팀에는 나 말고도 가명을 쓰는 동료가 몇 명 더 있었다. 남자 이름은 갈등을 해소하거나 긴장을 완화하는 데 유용하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평범한 업무를 할 때도 도움이 되었다. 내 진짜 모습은 제거해버리는 편이 가장 효율적이었다. 남자들은 남자들에게 다르게 반응했다. 남자 이름은 실제의 나보다 더 큰 권위를 행사했다.
원래 멀쩡히 있던 상품과 서비스를 테크 업계가 조금씩 바꿔서 파는 것뿐이라는 우스갯소리가 나돌았다. 창업자들과 벤처 캐피털리스트들은 그런 말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나는 그런 식으로라도 문제의 초점이 흐려지는 것을 그 사람들이 고맙게 여겨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 농담 덕에, 대중교통과 주택과 도시 개발 같은 것을 애초에 탈 나게 만든 구조적 문제가 가려졌으니까.
미적 관점에서 보더라도, 사람들이 살고 싶어 하는 대도시를 사업가들이 만들 수 있을 것 같진 않았다. 그들이 샌프란시스코에 미친 영향은 그리 긍정적이지 않았다. 물론 그게 전부 그들의 탓은 아니겠지만 말이다. 미니멀리즘 찻주전자를 파는 가게, 새우 팁 위에 캐비아를 얹어주는 샴페인 바, 유칼립투스 향이 나는 헬스장에서 소규모 수업을 여는 회원 전용 코워킹 클럽하우스, 트러플 튀김을 제공하는 탁구장, 디지털 노마드족을 상대로 연필통과 도시락통을 파는 가게, 관절에 무리가 안 가게끔 가상 사이클링과 가상 서핑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피트니스 스튜디오 등 샌프란시스코에는 돈을 쓰게 만드는 신생 사업들이 넘쳐났다.
제1원리 사고는 길고 지난한 과정을 거친 끝에 결국 처음의 방식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기도 했다. 벤처 펀딩으로 버티던 전자상거래 웹사이트들이 하나둘 오프라인 매장을 열기 시작했다. 제1원리 사고의 결과, 대면 소매야말로 고객 참여율을 끌어올리는 스마트한 플랫폼이었던 것이다. 온라인 안경 소매점은 소비자들이 구매 전에 안경을 직접 써보길 원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고급 실내 사이클링 기구를 파는 스타트업은 취미로 자전거를 타는 부자들이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사이클링을 하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매트리스 회사들이 쇼룸을 열었고, 메이크업 스타트업이 오프라인 테스트 숍을 열었다. 대형 온라인 마트가 오프라인 서점을 열어 책 진열대마다 온라인 고객 후기와 데이터 기반 수치를 표시해두었다. '온라인 독자들이 사흘 안에 완독한 책들', '평균 별점 4.8점' 같은 것들을.
그러한 공간에는 언제나 특유의 느낌, 말하자면 약간의 불편함이 깔려 있었다. 진열대는 먼지 하나 찾아볼 수 없고 살아 있는 식물이 전혀 어울리지 않는 공간이었다. 그런 가게들은 허무함, 차가움, 질서 정연함을 공유했다. 물리적 공간이 하룻밤 만에 세워져 하얀 벽과 동그란 글씨체, 불편한 의자들로 꾸며졌다. 자신이 대체한 물리적 세계를 무미건조하게 모방한 것만 같았다.
벤처 캐피털리스트들은 지칠 줄을 몰랐다. 그들처럼 쉴 새 없이 떠드는 사람을 나는 본 적이 없었다. 그들은, 자신의 저서를 홍보할 때도 더러 있었지만, 대개는 거창한 아이디어를 떠들어댔다. 가령 어떻게 계몽을 이끌 것인가, 복잡한 사회 문제에 어떻게 미시경제 이론을 적용할 것인가와 같은 아이디어를. 그들은 언론의 미래와 고등 교육의 쇠퇴에 관해, 문화적 침체와 창업가의 마음가짐에 관해 논했다. 더 많은 이야깃거리를 만들기 위해 직관적 아이디어를 샘솟게 하는 방법을 고민하기도 했다.
벤처계 사람들은 시장 개방과 탈규제와 끊임없는 혁신에 열광했지만 자본주의를 세련되게 옹호하지는 못했다. 그들은 스마트폰을 사용하면서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것의 구조적 위선을 지적했다. 스마트폰을 쓰면서 자본주의를 옹호하는 것은 아주 떳떳하다는 듯이. 그들은 스타트업이라는 만화경을 통해 세상을 바라봤다. 한 시드 액셀러레이터의 창업자는 이렇게 적었다 '경제 불평등을 아예 없애자는 건 회사 창업을 금지하라는 것과 같다.' 어느 엔젤 투자자는 '지금껏 내가 만나본 열렬한 반자본주의자들은 전부 다 실패한 창업가였다.'라고 비꼬았다. 또 어떤 벤처 캐피털리스트는 '오늘날 샌프란시스코 베이 지역은 고대의 로마 또는 아테네쯤 된다.'라는 글을 올렸다. 그러면서 '이 시대 최고의 학자들을 그곳에 보내자. 대가들에게 배우고 동시대의 최고로 걸출한 사람들을 만나게 하자. 지식과 네트워크를 쌓고 돌아가게 하자.'라고 제안했다. 이 사람들은 정녕 남의 시선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 걸까?
벤처 캐피털리스트들이 만들어내는 건 영감 주기 문화 정도였다. 그들은 책과 상품을 추천했고 팔로워들에게 겸손할 것을 조언했다. 건강하게 먹고 술을 줄이라고, 여행하고 명상하고 스스로 목적을 찾아가고 결혼 생활에 충실하라고, 절대 포기하지 말라고 격려했다. 주 80시간 노동을 예찬했고, '그릿'을 최고의 가치로 받들었다. 그들이 워라밸을 유약한 소리로 폄하하며 스타트업 성공에 필요한 투지와 맞지 않는다고 주장할 때마다, 나는 그들 중 얼마나 많은 사람이 사무 비서와 개인 비서를 두고 있을까 생각했다.
나는 1년에 수백만 달러를 벌면서 소셜 미디어에 허구한 날 헛소리를 늘어놓는 사람이 되고 싶진 않았다. 그 사람들의 인터넷 중독 증세는 딱할 지경이었다. 로그아웃해. 그냥 서로 이메일이나 주고받으라고. 나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인터넷의 순기능이 있다고 한다면 바로 이런 게 아닐까 싶었다. 모든 것이 투명하게 드러나 업계 엘리트들의 마음속까지 들여다볼 수 있었으니 말이다. 어느 벤처 캐피털리스트가 정체성 정치가 생산성에 미친 영향을 지켜보며 초조해하는지, 실리콘 밸리 인근 부촌에서 스토아 철학을 어떻게 실천하고 있는지 파악하는 데 있어 그만한 방법이 없었다. 인터넷이 아니고서야, 어느 벤처 캐피털리스트가 과대망상증 환자를 실패한 사업가일 뿐이라며 비호하는지, 정당한 비판을 괴롭힘으로 오인하여 스스로를 디지털 폭력의 피해자라고 주장하는지 알 수 있었겠는가? 인터넷이 아니고서야 이 사회를 혁신시키는 사람들, 사실상 내가 조력해온 부자들의 정체성과 이데올로기와 투자 전략이 얼마나 의도적으로 부풀려졌는지 알 수 있었겠는가?